|
[나는 김정일의 경호원이였다 제3부]
제2장 수용소 생활
이영국
1. 정치범 수용소는 계급적 원수를 가려내는 심판장
6월초 어느 날이었다. 3중대 선생인 외래자 숙소로 찾아와 담화실에 불러놓고 3중대 소개를 하였다. 소개인즉 3중대는 농산3개 소대에 여성소대, 남새분조, 경비 등으로 되어 있으며 농산 소대는 1개조에 14명, 그 중에 환자가 4명, 4개조로 되었으며 남새분조는 노인들로 구성되어 있고 경비는 4명을 두었는데 젊은 사람들로 구성되었다.
이런 중대 구성에 대한 복잡한 이야기를 먼저 하였다. 그리고 3중대는 다른 중대보다 급식량이 높고 아직까지 도주분자가 한 명도 없는 중대로 구역에서는 제일 조용한 중대이고 환자가 다른 중대보다 적다고 자랑하였다. 나중에는 일을 잘하면 소대장으로 승급시키겠다고 나를 어르기까지 했다. 자기도 호위국 출신이라면서 자기를 믿으라고, 그러면 내가 죄를 씻고 살아서 사회로 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처음 들어오는 죄수 중 돈이 많다거나 뒤를 봐주는 사람이 있는 경우 이런 식으로 얼러서 무언가 속을 뽑아내는 것이 보위지도원들의 수법이라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또 자기가 맡은 중대에서 도주분자가 생기면 그들이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에 가능하면 괜찮은 사람을 데려가려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언젠가는 중대에 나가야 되니 일단 한 번 믿어보자는 생각에 3중대 선생을 따라 3중대로 올라갔다.
분주소에서 3중대까지 3~4km 정도의 거리였다. 힘들어 잘 걷지 못하고 겨우 걸음을 재촉하여 3중대 앞에 도착했다. 주위를 둘러보니 놀아웠다. 병영은 천 평이 되는 부지에 사면이 3m의 담장으로 둘러쳐 있고 담장 위엔느 1.5m의 가시철조망과 전기철조망에 신호 줄까지 달아놓은 어마어마한 분위기였다. 정문을 열려고 하니 열어지지 않고 신호를 하니까 안에서 두 명의 경비원이 철문을 열고 뛰어나왔다.
선생 앞에 무릎을 끓고 머리 숙여 인사하는 모습이 참으로 안쓰러우면서도 중대에 배치되면 나도 저렇게 된다는 사실에 걱정이 몰려왔다. 죄인들의 인사에 “별일 없는가”라고 물어보고는 발로 차면서 “따라 오라”고 하자, 그들은 “알았습니다”라는 대답과 함께 동시에 번개같이 일어나 선생을 따랐다. 마당에 들어가니 창문도 없이 나무로 된 집이 있는데, 가운데 복도가 있고 그 양쪽으로 침실이 있었다.
문짝들은 구멍이 나고 속이 메스꺼울 정도로 때가 끼어 있었다. 방에 들어가 보니 나무바닥에 나무베개, 그리고 담요가 있었는데 다 찢어지고 기름때가 짜들하게 묻은 것밖에 보이지 않았다. 각 방 면적은 5평 정도이고 그 속에 14명씩 돼지생활을 하고 있었다. 경비원들은 “우리 같은 죄인은 병영 안에 있는 비품 창고에 집에서 보내온 옷과 신발류들을 바치고 이제부터는 선생님의 승인이 있어야 물건을 꺼낼 수가 있다”고 가르쳐 주었다.
밖에 나와서 주변을 보니 식당과 선생의 담화실이 따로 있고, 240명이 공동으로 이용하는 나무로 지은 화장실이 3칸, 오줌통은 돼지 여물통처럼 마당 한가운데 있었고, 여자 화장실 한 개가 있었다. 또한 경비실이 독립적으로 있는데 전기는 이곳에서 통제한다. 취침시간이 되면 밖으로 나오는 문을 한 곳만 남긴 채 자물쇠로 채우고 순찰하며, 병영 담당 밖 경비대 잠복초소에 기관총을 걸고 잠복근무를 선다.
한 시간 정도 지나서 담당 선생이 담화실에서 찾는다하여 함께 배치된 정현수와 같이 담화실로 갔는데 담화를 하겠다고 하면서 정현수는 내려가 기다리라고 하였다. 기다리라는 말이 떨어지자 경비병들이 정현수를 데리고 내려갔다. 담화방에 들어가니 책상과 서류함, 개인용 소파, 나무의자들이 있었다. 들어가서 머리를 숙이고 인사를 하자 나무의자에 앉으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나의 죄를 물으면서 온갖 상욕을 다 퍼부었다.
그는 “관리소는 자본주의의 부르주아 사상을 뿌리뽑고 실천 노동 속에서 단련하여 자기 죄를 삭제하는 곳으로 계급적 원수들을 가려내는 심판장”이라고 했다. 그리고 “네 죄는 당과 수령을 헐뜯고 나라를 배반한 역적죄로 다른 사람보다 무거우나 너의 집안의 과거를 봐서 관대히 용서를 받은 것이니 정치범 수용소에서 너의 죄를 씻으라”는 것이었다. 그는 “사실 너의 죄는 45조, 46조, 47조로 이미 총살되었을 것이나 네 가정과 지난날 공로로 혁명의 이익 견지에서 살려준 것이니 죄를 꼭 씻어야 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수용소 안에서 10년을 살면서 자기를 갱신하고 사회에 나갈 준비를 하라는 것이다. 10년이라는 말에 나도 몰래 ‘인제는 죽었구나, 살아서 밖의 세상을 못 보겠구나’하는 절망감이 스쳐갔지만, ‘언젠가는 기회가 올 것이다, 도망치든 살아서 나가든 나의 결심을 꼭 실현해야 한다’는 생각이 정신 똑바로 차리라는 듯 내 머리를 두드렸다.
2. 남한 실정을 은근히 궁금해하던 보위원
담당 선생은 자기 이름은 김형섭이다, 죄는 죄지만 자기를 믿고 허심하게 말하라고 하면서 뜬끔 없이 “중국이 어떻던가”하고 물었다. 여기서 말을 잘못하면 다시 한번 실수한다는 것을 알았기에 정치적 색채가 없이 순수한 말로 “이밥에 돼지고기를 먹기 싫어 안 먹는다”라고 말하였다.
이어서 “중국에 거지가 많다던데 거지가 얼마나 많은가”고 묻기에 “거지는 한 명도 못 보았다”고 하자 자기를 속이지 말라고 그대로 이야기하라고 했다. 내가 사실이라고 하자 그는 나에게 상욕을 하면서 “중국이 잘산다면 중국에서 살 것이지 왜 남조선에 간다고 너덜거리다가 잡혀왔는가”하고 물었다. 그는 궁금한 게 많았는지 이것저것 물어보았다.
“네가 남조선 책이랑 보았다고 하던데 실제로 보았는가?”하고 묻더니 “책은 그들의 선전물이기 때문에 믿기 어렵다”고 스스로 대답했다. 그때 나는 중국에서 잡히기 전에 샀던 한국 정장 한 벌과 한국 신발을 신고 있었는데 “네놈이 입은 옷과 신발은 어디 것인가”하고 묻기에 나도 모르게 ‘남조선 옷’이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그러자 옷을 뒤집어보고 살펴보면서 “남조선 괴뢰들이 이렇게 발전하였는가? 그러면 잡지나 화보 책들이 사실이란 말인가”라고 신기해하면서 “중국에서 사람들에게 들은 말 중에 한국의 발전 모습에 대한 것이 있었는가”하고 물었다.
나는 이제 나의 죄를 다 알고 있을 테고 내 머리 속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이미 다 드러났는데 설마 죽이겠는가 싶어 남조선 화보의 월간 잡지를 보았는데 남조선이 선박, 강철, 자동차, 방직, 전자가 일본과 겨룬다고 이야기해줬다. 담당 선생은 머리를 끄덕이다가 갑자기 “야 이새끼야, 그것은 다 선전이야”라고 소리를 버럭 질렀다.
그리고는 내일부터 배치되는 소대에 따라 나가서 일하면서 선생에게 말한 내용과 중국에서 보고 들은 것, 특히는 나의 경호생활 자료나 경력에 대해 다른 사람에게 말하여 알려졌을 때는 목을 달아매겠다며 비밀을 지키겠다는 내용이 적힌 서약서에 사인과 손도장을 찍게 했다.
담당 선생은 중국에서 생활하던 것을 다 잊고 그 머리통을 깨끗이 털어 버리라고, 그러자면 내일부터 일나가서 엎드리든 기든 간에 자기 일을 죽으나 사나 무조건 수행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이제부터는 일과대로 움직이며, 2소대에 배치되며, 농산 기본 핵심소대이며, 소대장은 젊은 사람인 김대봉이로 현역군인 출신이며, 나가서 일을 잘하라고, 네가 일을 잘하고 비밀을 잘 지키는가에 따라 사는가 죽는가 하는 문제가 달려 있다고 일러주었다.
또한 누가 물어보아도 광산에서 노동자로 일하다가 왔다 하라고 하였다. 이렇게 그날 저녁까지 선생과 담화를 2시간 40분 동안 끝내고 경비원의 인솔 하에 담화실을 나왔고 다음차례로 정현수가 들어갔다. 그때부터 공포분위기 속에서 살게 되었다.
3. 부끄러움은 잊은 지 이미 오래
나는 2소대에 배치 받고 돼지우리 같은 침실로 향하였다. 침실은 소대사람들 25명이 모두 함께 자는 좁은 방이었다. 소대장 김대봉이 어디에서 왔는가 하고 묻고는 내 잠자리를 한가운데에 잡아주고 소대에서 제일 오래 있은 이철우라는 젊은 사람을 감시로 붙여놓았다. 소대장 김대봉은 황주 비행장에서 전투폭격기 비행사였는데 북한 사회를 비판하는 말이 걸려 1991년도에 관리소에 들어오게 되었다.
이철우라는 사람은 평양시 안전부 무기고에서 경비를 서던 사람으로 동창끼리 ‘성도’라는 조직을 묶어 일단 유사시에는 무기고의 무기를 탈취하는 행동계획까지 세워 북한 정권을 반대하는 조직을 형성하였다가 관리소로 들어왔다. 이철우의 아버지는 평양시 민방위부장이었다고 한다. 아들이 반체제조직 사건에 연루되자 민방위부장 자리에서 떨어졌고 온 가족이 함경북도 연사군으로 추방되었다.
이철우와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밥 먹는 시간이 되었다. 중대 식당에 소대 단위로 한 명도 빠짐없이 모여야 식당에 들어갈 수 있었다. 영양실조로 나오지 못하는 환자도 다른 사람이 부축하여 식사대열이나 작업 현장까지 나가서 앉아있든 누워있든 기다려야 한다. 일체의 대열모임에 열외란 있을 수 없다. 대열이 다 모인 다음 경비원이 인원을 확인하고 식당에 들어갔다.
중대 식당에 들어가 보니 통나무로 식탁을 만들고 통나무 연결의자가 있었는데 식탁과 의자에 사람의 기름때가 짜들짜들 묻어 있었다. 식탁도 1급, 2급, 3급 좌석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나는 신입생이다 보니 3급 좌석에 앉았다. 3급은 1급에 비해 밥 양이 훨씬 적었다. 1급은 농산 소대에서 1년 동안 자기계획을 수행한 건강한 사람들로 밥 양이 제일 많았다. 외래자 숙소의 식사량은 1급 수준이다.
3급은 숟가락으로 눌러서 다섯 숟가락이 되나마나 한 160g이며 1급은 200g, 2급은 180g이 기준이었다. 그나마 선생들이 개인적으로 한사람당 닭 100마리, 오리 50마리, 게사니 20마리 이상을 기르는데, 이 짐승들의 사료로 죄인들의 식량 5분의 1가량을 떼어내니 한끼 밥 양은 130g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 밥은 옥수수에 소금국이 전부였다.
그러다 보니 영양실조에 걸려 허기진 배를 끌어안고 오직 먹는 것에만 신경을 곤두세우며 옆 좌석의 많은 밥을 부러운 듯 쳐다본다. 아무리 죄인이라지만 이렇게 짐승처럼 먹는 음식을 가지고 고통을 주는 것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짓이다. 밥을 먹다가 옆 사람의 밥을 훔쳐먹어 싸움이 벌어지는 일까지 종종 생기곤 하였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영양실조에 걸려있기 때문에 식당에서는 몇분도 안 되는 짧은 시간 내에 밥그릇들이 없어진다. 밥을 먹다 소란이 일면 처벌로 밥도 채 먹지 못하고 끌려나와 선생이 죄인들의 웃옷을 벗기고 나무회초리로 등과 다리를 때린다. 여성도 예외는 아니다. 저녁밥을 8시에 먹고 10시까지 침실에서 싸리대를 가지고 삼태기와 지게 만드는 일을 하였다.
저녁 점검시간이 되자 ‘중대 모엿’ 구령에 따라 복도에서 이름을 부르고 자기 소대 침실로 들어갔다. 다음 날 작업에 대하여 알려주고 자기 공구를 준비하고 잠자리에 눕는다 자리에 누우니 정신이 혼란스러웠다. 처음 보는 광경들이라 생각하면 기가 막혔다. 누우면 들어온 지 오래된 사람들은 나름대로 살아가는 방법이 있어서 옥수수로 생식하는 소리가 어둠 속에 여기저시서 들려오는데, 잠자리에 누워도 먹고 싶은 충동에 배고픔이 시작되면서 밤이면 밤마다 겪는 그 고통은 글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였다.
날이 갈수록 사람들이 영양실조에 걸려 죽어갔다. 특히 겨울이 되면 나무판자 집이다 보니 바람이 세차게 들어와 숨이 가쁠 정도이다. 눈보라가 날려 들어와 추위로 잘 수가 없었고 몸은 꽁꽁 얼어든다. 사람들은 세면을 한번도 하지 않아 검둥이 얼굴이고, 옷은 동복을 입은 채 죽을 때까지 그 모양 그대로 산다. 사람들의 오직 먹는 생각만 하다보니 팬티도 내의도 입지 않아 웃옷을 벗으면 살이 그대로 보인다.
부끄러움 같은 건 이미 잊은 지 오래다. 영양이 부족할수록 모에 이가 수 천 마리나 도는데 죽기 전에 이가 몸 밖으로 다 기어 나온다. 식사시간이 끝나면 옷을 벗어 불에 쬐어 이를 불태워 죽이는 재미 또한 죄인들의 생활 중에 빼놓을 수 없는 일과이다. 아침이면 누구도 세면할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밤새껏 떨고 배고픔에 시달리다보니 얼음구멍에 손대기가 싫고, 또 죄인들 모두가 삶에 대한 가치를 잃고 어떻게 하든 많이 먹고 생을 유지하는 것만 모두의 동일한 생각이며 그들만의 신념이 되어 있다.
아침 7시까지 식사를 마치면 환자를 담가(들것)에 싣고 작업장에가 소대별, 조별, 개인별 과제를 맡아 수행한다. 나가면 누구에게나 하루의 과제를 맡긴다. 먼저 자기 과제를 수행한 사람들은 밭머리에서 소대장의 감시 밑에 휴식을 할 수 있다. 나는 집에 갇혀 살다가 밭에 나가게 되어 처음에는 살 것 같았지만 노동과제를 수행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4. ‘오직 나만 먹고 사는’ 방법을 익힌다
난생 처음으로 밭에 나가 일을 했다. 북한에서는 부식토, 인분, 구운 흙, 썩힌 거름을 섞어 ‘영양단지’라는 것을 조성한다. 영양단지 한판의 길이는 9~10m, 너비는 180cm정도이다. 이것을 하루에 한 사람당 한 판씩 찍어내야 했다. 오전에는 재료를 섞는 작업을 한다. 오전 동안 혼자서 1톤 가량을 옮겨야 하는데, 그러자면 지게를 50번 이상 져 나르게 된다. 이것을 져 날라 섞어놓으면 오전 일이 끝난다.
그리고는 12시부터 12시 50분까지 점심시간을 갖고 밭에 나가 자기 과제를 시작한다. 오후에는 물을 길어 재료에 혼합하여 단지를 찍어내는 일을 한다. 모든 일을 제대로 하는지는 소대장이 감시 통제한다. 이렇게 해서 오후 4시까지 일을 끝낸 사람은 밭머리에서 휴식하면서 이를 잡든지, 낄장구(질경이), 소라지, 능쟁이(돼지풀)등 햇풀을 캐어 비닐봉지에 넣고 소금과 문대 먹는다.
하루 과제를 개인별로 다 끝내지 못하면 소대가 달려들어 저녁 8시까지 끝내고 들어온다. 자기 과제를 수행하지 못한 사람들은 과제를 수행한 사람들한테 모진 수모를 당하면서 식사시간에 과제를 수행한 사람들과 자기 밥의 절반을 나누어 먹어야 한다. 자기 과제를 수행하지 못한 인원은 소대에 3분의 1정도인데 수행한 사람은 1급 밥에 다른 사람 밥까지 기분 좋게 먹지만 수행 못한 사람은 그렇지 않아도 영양실조에 걸린 데다 밥까지 빼앗겨 어기진 배를 움켜진 채 밤에는 추위와 고통으로 시달려야 한다.
이러한 생활을 하다보면 사람이 아니라 짐승이 되어간다. 이곳에서는 사람이 짐승보다 더한 짐승이며 오직 나만 먹고 살아야 한다는 방식을 익혀 나간다. 영양단지 시기가 지나고 단지에서 강냉이 잎이 어는 정도 자라나면 영양단지를 밭에 옮기는 일을 해야 한다. 김매기 철(6~7월)에는 다음해 농사를 위해 풀을 베어 거름 3톤을 만들어내야 하며, 부식토 시기(12~2월)에는 2톤의 부식토를 만들어 낸다.
하루에 수십수백 번씩 지게를 져 나른다. 가을이 오면 가을걷이를 하고 겨울이 오면 통나무를 베어 땔나무를 사회에 내다 팔아 관리소 자금으로 이용한다. 이 정도가 수용소 죄인의 한 해 작업분량이다. 콩밥도 아닌 강냉이밥을 고작160g 먹으면서도 농사를 짓지 못하면 80g을 먹어야 한다. 기름도 된장도 없이 탄수화물밖에 없는 강냉이와 소금국을 먹다보면 처음에는 사람들의 얼굴과 온몸이 푸실푸실하게 부어오른다.
그러다가 그것이 쫄아 들면 늙은이처럼 쭈글쭈글 해지면서 백골처럼 되었다가, 나중에는 다시 부으면서 죽는다. 일반 경제범들은 콩밥을 주기 때문에 모자라는 영양소를 콩에서 조금이나마 보충할 수 있어 죽는 경우가 비교적 적다. 그러나 정치범들은 아무 것도 먹지 못하게 하여 뼈 물까지 짜내면서 비쩍 말려죽이는 것이 오늘날 북한 정치범 수용소의 실태이다.
반세기 동안 유지되어온 승냥이 소굴 정치범 수용소 내부를 펼쳐보면 사람들은 아마 상상을 초월하여 믿지 못할 것이다. 북한의 수용소 문제는 김정일이가 죽고 그 체제가 무너져야만 없어질 것이다.
5. 덫에 걸리다
3중대에서의 2년은 내 성격과 자존심을 무참히 짓밟은 시간이었다. 소대장 김대봉은 내가 신입자인지라 나에 대한 감사를 한시도 놓치지 않았고 동향을 매일 선생에게 보고하였다. 그 일은 소대장의 임무이기도 하였다. 한 명의 도주자만 나타나도 소대장이 책임지고 구류장에서 2~3달 동안 매를 맞고 나온다. 나오면 양양실조에 매맞은 어혈로 오래가지 못하고 죽는다.
이것이 관리소의 현실이다. 죽지 않는 경우 자기 형기를 2~3년은 더 받게 된다. 상황이 이러하니 네가 죽는가 내가 죽는가 하는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소대 내에서 서로 경계심이 높다. 죄인들 상호간에 인간관계가 이루어질 수 없고 ‘네가 먹히지 않으면 내가 먹힌다’는 심정에서 오직 자기 건강만 유지하여 그곳에서 살아 나오는 것이 영웅이라고들 한다.
죄인들 사이에는 벙어리처럼 침묵밖에 없고 눈치만 보면서 거의 본능적으로 자기를 보호하며 지내는 것이 일상 생활이다. 한번은 소대장이 “동쪽은 금야군으로 20km만 나가면 사회이고, 서쪽은 맹산군으로 40km 나가면 사회이고, 남쪽은 북창으로 여기는 요덕 정치범 관리소 15호이지만 북창에는 14호 관리소가 있다”는 말을 나에게 던졌다. 내 속마음을 한번 떠보려는 것 같았다.
나는 아무 말 없이 머리만 끄덕이고 말았는데 소대장 김대봉은 여기서 살자면 항상 주머니에 먹을 것을 장만해 두어야 한다면 겨울솜옷 둘레에 호주머니 단 것을 건네주었다. 밑주머기에는 소금을, 다음 칸에는 쑥으로 만든 부시(차돌과 쇳조각을 서로 마주치면 불이 붙게 하는 것)등을 넣고 다른 주머니에는 옥수수, 먹는 풀을 넣고 다니면서 자기 몸보신을 하라는 것이다.
나는 한편으로는 고마웠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의문이 생기면서 무섭기도 하고 모략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가 말을 끝내면서 “선생님에게 이것을 들키면 도주분자로 몰리니 항상 주의하라”는 말을 하여 더욱 의문이 커졌다. 나는 일단 고마워 내가 이곳에 들어올 때 가져온 미원을 50g 정도 주었다. 그는 고맙다며 여기 수용소에서는 미원만 있어도 산다고 했다.
그러면서 다시 옥수수 2kg을 주면서 “너만 알도록 밭 주변 돌 밑에 보관해두되 한곳에 말고 여러 곳에 묻어두고 허기질 때 한줌씩 주워 먹으라”고 했다. 그때부터 나는 집에서 가지고 온 미원을 아꼈는데, 이것이 수용소를 나올 때까지 나를 살게 한 자그마한 원인이 되었다. 어느 날 소대장은 어느 늙은이를 데리고 와 동의학을 배운 박사선생이라고 하면서 나에게 소개하였다.
그는 옥수수를 잘 섭취하려면 다리 장수혈에 뜸을 놓아야 살 수 있다며 나에게 뜸을 놓아주었다. 그 늙은 박사 선생은 전쟁시기에 거제도 포로병들 중 장수혈에 뜸을 뜬 사람만이 살았는데 자기가 그런 사람들을 많이 만나보았고 의학적으로도 좋은 방법이라고 하였다. 그때부터 나는 소대장을 잘 만났다는 생각을 하면서 남다르게 그를 대했다.
누구도 믿지 못하고 의지할 데 없는 나로서는 소대장이 그 중 가까운 친구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어느 날 선전실에서 선생이 일주일 간 작업총화를 하면서 누구는 주의하라는 식으로 얼리기도 하고 엄포도 놓았다. 그러다 난데없이 나보고 나오라고 하기에 앞에 나가서 머리를 90°로 숙이고 있는데 “야 이새끼야, 네놈을 목매달겠다”고 하면서 경비병한테 몽둥이를 가져오라는 것이었다.
경비병은 선전 담화실에 가서 1.4m길이에 직경이 6cm정도 되는 물푸레나무 한 단을 가져왔다. 풀어놓으니 10개 정도 되었다. 선생은 웃옷을 벗고 엎드리라고 했다. 매 맞는 것은 처음 당하는 일이라 나의 죄명도 알지 못하고 무리 매를 맞았다. 선생은 나무가 모두 끊어져 나갈 때까지 짐승 때려잡듯이 마구 팼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는지 정신없이 때리더니 “네가 신입자이기 때문에 총살이나 교수형에서 면제되고 매로 끝맺는 것이다”면서 “입을 잘못 놀리다가는 죽는다는 것을 명심하라”고 하였다.
끝까지 왜 맞는지 모른 채 매를 맞아 억울하고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날 저녁도 먹지 못하고 침실에 와서 등이 쓰려 엎드려 있는데 소대장이 찾아왔다. 나를 보고 “안 되었다”고 하면서 “누가 선생님에게 말한 것 같은데 누구한테 나쁜 말한 것이 없는가?”하고 물었다. 사실 사는 누구한테도 말한 적이 없었고 소대장밖에 상대한 사람이 없어 사실 그가 몹시 의문스러웠지만 누구에게 하소연도 못하고 눈물만 흘렸다.
6. 쥐는 최고의 보신육(保身肉)
며칠 후 선생이 담화실에서 나를 찾는다고 했다. 경비원이 소대장에게 보고를 하고 나를 데리고 선생의 담화실로 향했다. 담화실로 들어가자 선생이 경비원을 내보내고 나에게 “이 자식이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도주할 생각을 한다”고 무섭게 말했다. 그의 말인즉 내가 지형에 대하여 신경을 쓴다는 것이다. 선생이 사실이냐고 묻는 말에 나는 “그럼 말 자체를 한 적이 없고 소대장이 나에게 말해준 것”이라고 사실대로 대답했다.
나의 말을 듣고 나서 선생은 소대장을 나쁜 놈이라고 말하면서 “여기 수용소 생활을 하면 별 모략에 달 걸리니 일체 입을 봉하라”고 했다. 그리고는 도주할 생각은 추호도 하지 말고 열심히 일을 잘하면 좋은 일이 생길 것이며 모든 것을 잊고 어떻게 하면 입에 풀칠이라도 할까 생각만 하는 것이 수용소 생활의 기본이라고 귀에 박히도록 들은 말을 되풀이했다. 나는 선생에게 무슨 사과를 받은 것도 아니었지만 아무튼 오해를 풀게 되어 너무나 감격했다.
수용소에서는 이처럼 작은 일에도 감격하게 된다. 일단 한 번 찍히면 수용소에서 생활하는 죙니들에게는 죽느냐 사느냐 하는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나는 좋은 기분으로 담화실을 나와서 경비성원과 같이 작업현장에 나가서 소대장에게 보고를 하고 나의 도급제를 수행하느라 애써 일하였다. 소대장이 나에게 다가와 선생이 무엇 때문에 불렀는가 하고 묻기에 나의 이력 때문에 찾았다고 적당히 말했다.
그날 이후 나는 그를 경계했다. 세상 모든 것을 믿어서는 안 된다는 뼈저린 교훈을 얻었다. 갈수록 몸이 허약해지고 일이 힘들어만 가던 어느 날이었다. 한신옥이라는 50대 재일동포가 우리 소대에 같이 있었다. 그와 밭에서 일하고 있는데 옆으로 쥐가 뛰어 지나갔다. 쥐를 본 한신옥은 잽싸게 잡아 땅바닥에 몇 번 던진 후 쥐를 뜯어먹는 것이었다. 그런 모습을 사회에서 보았다면 먹은 것을 다 토해내고 말았겠지만 신기하게도 더럽다는 생각은 전혀 없이 나도 먹고 싶다는 생각만 치솟았다.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영양보충을 해야하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가 쥐 먹는 모습을 내가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자 동정심이 생겼는지 쥐 다리를 하나 먹으라고 권하였다. 일생에 쥐만 보아도 피하던 내가 그 쥐를 입에 넣었는데 그렇게도 고소할 수 없었다. 그때부터는 쥐고기를 생식하게 되었으며 쥐가 달아나면 가서 잡아먹고 햇볕에 말려 먹기도 했다. 관리소에 들어온 사람치고 쥐고기를 먹지 않은 사람이 없다.
각자 살기 위한 최후수단이다. 수용소 안에 만약 통제가 없다면 분명히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일도 생길 것이다. “쥐나 뱀을 한해에 7마리 정도는 잡아먹어야 그 해를 넘길 수 있다”는 것이 관리소 죄인들의 공토용어로 되어 있다. 그것은 수용소 생활 25년을 살아온 경험자들의 이야기이며 또한 그들이 살 수 있었던 증거이다. 나는 영양상태가 나빠져 농산 소대에서 일하지 못하고 늙은이들이 일하는 부업 소대에 가서 일하게 되었다.
선생의 남새를 관리하고 중대 겨울준비 무밭 관리를 하면서 김을 매고 물을 대는 일이 하루 일과의 전부였다. 남새는 남몰래 많이도 뜯어먹었지만 허기진 몸을 달랠 길이 없었다. 성공도 하지 못하라 한국행을 어찌하여 그렇게 단순하게 결정하여 이렇게 잡혀와 이런 인간 이하의 생지옥, 언제 목숨을 앗아갈지 모르는 곳에서 허덕이며 살아야 하는지···. 죽고 싶은 생각이 하루에도 몇 천 번 났지만 쉽게 죽고 싶지 않았다.
짐승처럼 천대와 멸시를 받으면서도 자살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곳은 생존본능을 일깨우는 곳이었다. 어떻게든 살아서 사회에 나가자 하는 것이 오직 하나의 신념이다. 살려달라고 애원하다가 숨을 거둔 사람들을 볼 때면, 그렇게 살겠다고 애원하는 것을 보면, 배를 비우지 말고 살아서 빨리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는 결심 끝에 차마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았지만 소처럼 억지로 풀을 뜯게 된다.
인간이 아니라 개가 되고, 돼지가 되고, 소가 되고, 때로 늑대가 되고···, 생각할수록 눈물이 앞선다.
7. 인체 실험실로 끌려갔다는 부업 소대장
어느 날 나는 생각지도 않게 선생의 신임을 얻었다. 밭에서 도급제 과제인 옥수수 밭 천 평을 김매고 있을 때였다. 선생이 옆에서 지켜보는 것도 모르고 한없이 밭고랑에 엎드려 온몸이 땀투성이가 되어 김을 매고 있는데 그 모습을 보고 선생이 나를 불렀다. 머리를 숙이고 그대로 있는데 선생이 하는 소리가 “영국이 너처럼 열심히 일하고 건강이 회복되면 사회로 나가는 길이 빨라진다. 그러니 앞으로 자기 죄를 인정하고 그 죄를 씻기 위하여 노력하라”고 충고하고는 가버렸다.
그날 나는 관리소에 들어와서 처음으로 일 잘한다고 선생에게 칭찬을 받은 터라 기운이 솟았다. 그 며칠 후 저녁에 중대가 교양실에 다 모였는데 선생이 부업 소대장을 처벌한다는 것이었다. 다른 말은 하지 않고 “나쁜 놈 새끼 여기가 어디라고 사회 비난이야”라고 욕을 하더니 “영국이 일어나라, 네가 이제부터 부업 소대장을 하라”고 했다.
느닷없는 일이어서 어리벙벙해 있는데 “중대 부업을 잘하라. 알았는가?”하고 묻기에 나는 일어서서 알았다고 대답하였다. 관리소에서는 선생의 말 한마디가 법보다 무서운 것이었다. 그날부터 나는 30명의 늙은이를 데리고 중대 남새와 선생의 고추밭을 관리하게 되었다. 나처럼 구역에서 몇 달 일하지도 않았는데 소대장이 되는 사람은 드물었다.
내가 소대장이 되니 다른 소대장들이 나를 별다르게 보고 모략도 많이 하였지만 나는 어떻게든 트집을 잡히지 않기 위해 애를 썼기에 모든 모략에 걸려들지 않았다. 내 앞에 부업 소대장을 하던 조양진이는 함경도 청지에서 무역사장을 하던 사람이었다. 그는 부업 소대장에서 쫓겨난 후 농산 소대에 배치되어 일했는데 일주일 후에 족쇄를 차고 어디론가 끌려간 후로는 다시 보이질 않았다.
떠도는 말을 들으니 부업 소대장을 하면서 다른 사람들과 ‘북한 정권도 언젠가는 무너진다’는 제도 비난을 하였다고 하는데, 족쇄를 채워 데려간 사람은 대체로 건강한 사람들로 인체 실험을 하는데 쓴다고 했다. 들리는 말로는 남포시 인근에 의학부대가 있는데 거기에 정치범들을 데려가 6.25동란 때부터 현재까지 인체 실험을 한다는 것이다.
평북도 락원기계공자 정량원으로 일했던 정수현도 관리소에서 제도 비난을 했다가 작업 현장에서 족쇄를 채워 데려갔다. 김영화(가명)라고 불리던 미쯔미스 후미꼬(본명)라는 일본인 여성도 일하는 현장에서 족쇄를 채워 데려갔다. 실제 죄가 있어 데려갔다기보다는 죽일 만한 사람, 건강한 사람을 없는 죄를 만들어 인체 실험용으로 데려가는 것으로 보였다.
우리 3중대에서만 내가 알기로 6명이 족쇄에 채워 나갔으며 2중대와 1중대에서도 이런 식으로 갔다고 했다. 한해에 관리소 구역안에서 18명 정도가 죄 아닌 죄를 씌워 관리소 문밖으로 나간다는 것이다. 허약한 사람이나 건강이 나쁜 사람은 죄에 따라 용평구역에 내려가서 구류장에 1달~2달 정도 있다가 올라와서 교수형 또는 총살당하지만 건강한 사람은 인체 실험용으로 쓰인다.
매일 자고 일어나면 누구 잡아갔다, 누구 총살했다는 소리에 사람들은 공포에 질렸다. 그럴 때면 사람들은 생체 실험용으로 끌려가는 악몽에 비명을 지르며 일어나기도 한다. 그 공포가 어떤 것인지, 사람들은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