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사람의 숙명은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고, 가장 큰 공포는 죽음 후의 일은 짐작조차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종교의 가치는 죽음의 문제를 해결해 준다는데 있다.
윤회나 해탈, 환생같은 주장도 나름 죽음의 문제에 대한 해석이다.
문제는 착한 소나 말까지는 그렇다 치더라도 착한 지렁이가 등장할 수 있다는 점이다.
성경에도 궁금한 점은 있다.
사두개인들은 부활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죽음 이후를 어떻게 보았는지 알 수 없지만 부활을 믿었다는 바리새인들도 죽음과 관련하여 부활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알 수 없다.
예수님은 인간들처럼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
하나님은 당신의 형상을 따라 인간을 창조하셨다고 하지만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마다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라" 는 말씀처럼 육신을 초월하신 존재이시다.
성령님은 말 그대로 영적 존재로서 육신과는 별개이시다.
절대자이신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은 고등종교 중 기독교가 유일하다.
아울러 삼위일체라는 신묘한 교리도 기독교만의 것이다.
사람이 죽으면 육신은 썩어 없어진다는 것은 경험으로 안다.
그러나 육신과 다른 존재로 영혼을 인정하기도 하고 부인하기도 하지만 종교를 가진 자들은 대개 인정한다.
그러면 영혼은 어떻게 되는가.
기독교인이라면 육신과 함께 영혼도 죽어 소멸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죽음이란 육신의 죽음이고 영혼은 어떤 형태로든지, 어떤 곳에든지 존재한다는 말이다.
즉 성경이 말하는 부활은 육신이 다시 살아난다는 말이다.
나사로의 부활은 육신의 부활이었지만 다시 죽었기에 일시적 소생으로 보아야 한다.
예수님은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다.
마리아들을 비롯한 제자들에게 보이시고 승천하셨다.
승천이란 하나님 나라로 가셨다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가 어디 있는지 어떤 형태인지는 모른다.
계시록에 묘사되어 있지만 그것만으로 머리에 잘 떠오르지 않는다
분명한 것은 예수님께서 육체로 부활하셨기에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에서도 육신을 지니시고 계실 것이란 점이다.
성육신 전에도 삼위 하나님 중 예수님께서 육신을 갖고 계셨는지는 모르겠다.
부활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부활의 중요성을 역설하며 영지주의나 가현설 등 이단과 맞서 그들의 허구를 폭로한 사도는 바울이다.
바울은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까지의 기간에는 예수님과 접촉이 없었다.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
영적 존재이신 성령님을 통해 예수님을 안 것이 아니고 육신을 지니신 예수님을 직접 만나 뵈었다는 것이다.
육신을 지니신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 앞에 나타나실 수도 있다.
그러면 우리는 성육신하신 성자 예수님을 확실히 믿고 아울러 삼위일체설이라는 기독교만의 교리도 확실히 믿게될 것이다.
그러나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더 복이 있다고 하셨으니 나는 오늘 부활하신 예수님을 묵상하며 재림의 날 나도 육체로 부활하여(아마 지금보다 훨씬 근육질 미남으로) 육신으로 하늘에 계신 예수님을 뵙고 영원한 삶을 누리기를 소망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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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허철, 송미자 및 외 4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