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일본서기』 편찬 과정
『일본서기(日本書紀)』는 일본에서 편찬된 각종 문헌 중에서 한국 고대사와 가장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는 사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여러 가지 사실들이 『일본서기』에만 기록되어 있는 경우도 적지 않다. 왕인에 관한 내용, 백제성왕의 불교 전래에 관한 내용, 백제의 오경박사 파견 등이 대표적이다. 또한 『일본서기』에는 『백제기(百濟記)』·『백제신찬(百濟新撰)』·『백제본기(百濟本記)』·『일본세기(日本世記)』 등 백제 및 고구려 계통 사람들이 편찬한 문헌들이 자료로 인용되어 있다. 그런 점에서 한국 고대사를 연구하는데 대단히 유용한 사서이다. 그렇지만 향기로운 장미에 가시가 있는 것처럼, 『일본서기』는 7세기 후반부터 8세기 전반을 중심으로 강화된 일본적인 대국의식으로 윤색되어 있어서 사료로 이용하기가 쉽지 않다. 따라서 사료의 개별적인 이용 못지않게 『일본서기』가 갖는 사서의 성격도 정확히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서 먼저 사서의 명칭, 편찬 과정, 편찬 자료, 특징 등을 살펴보고자 한다.
1. 『일본서기』의 명칭
『일본서기』에 대해서는 1) 『일본기(日本紀)』가 원래의 명칭이라고 보는 견해, 2) 일본서(日本書)의 기(紀)를 붙여서 『일본서기(日本書紀)』라고 하였다는 견해, 3) 『일본기』와 『일본서기』가 모두 일본어로는 ‘야마토부미’로 읽혔으며, 차이가 없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먼저 『일본기』와 『일본서기』를 동일한 명칭으로 보는 견해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일본서기』가 『고사기』와 달리 일본이라는 새로운 국가의 역사를 대외적으로 과시하려는 측면이 있었다는 지적이 옳다고 한다면, 사서의 명칭도 중요하다. 즉 중국 사서의 관행이나 명명법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전제로 사서의 편찬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만약 원래 명칭이 『일본기』라면, 중국 사서의 선례에서 보이는 것처럼 황제의 역사를 재위 기간과 연도에 따라 정리한 본기(本紀)만을 작성하려는 의도를 가졌다고 보아야 한다. 반면 『일본서기』가 원래 명칭이라면, 이는 『일본서』라는 기전체(紀傳體) 사서를 상정하고 사서 편찬을 시작했으나, 부득이하게 본기 부분만 작성하는 데 그쳤다고 볼 수 있다. 처음부터 본기만 작성하려고 했는가, 아니면 본기·표(表)·지(志)·열전(列傳)등을 편찬할 계획이었으나 본기 부분에 그친 것인가 하는 문제를 밝히는 작업은 『일본서기』의 성격을 이해하는데도 중요한 단서를 제공할 것으로 생각된다. 최초의 편찬 의도를 차치하고서라도, 『일본기』와 『일본서기』의 차이를 편찬자들이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 특히 백제와의 전투에서 포로가 된 당의 병사들 중에 속수언(續守言) 등과 같은 문사(文士)들이 편찬의 최종과정에 참여한 점에서 더더욱 『일본기』와 ‘일본서 중의 기(紀)’를 구별하지 못했다고 보는 것은 잘못이다.
『일본서기』의 완성에 대해서 언급한 유일한 자료인 『속일본기(續日本紀)』에서 『일본기』 30권과 계도(系圖) 1권을 완성하였다고 하였고, 『일본서기』 이후의 사서도 『속일본기』, 『일본후기(日本後紀)』, 『속일본후기(續日本後紀)』와 같이 『일본기』를 공통적으로 사용하였으므로, 『일본기』를 원래의 명칭으로 보는 견해가 생겼다. 그렇지만 『일본기』는 『일본서기』, 『속일본기』 등을 총칭하는 용어로 사용된 것이 일반적이다. 따라서 『일본서기』가 『일본기』였다고 보기 어렵다. 다만 『속일본기』라는 명칭은 『일본기』를 이었다는 뜻이므로 이전의 사서인 현재의 『일본서기』를 『일본기』라고 칭한 것으로 보인다. 만약 『일본서기』가 본래 명칭이라면 새로운 사서의 이름은 『속일본서기』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속일본후기』를 제외하면 사서의 이름이 모두 4자로 구성되어 있는 점을 아울러 생각하면 『일본서기』가 원래의 명칭이었고, 『속일본기』에서『일본기』라고 한 것은 『속일본기』를 염두에 두고 표현한 것으로 그것이 정식명칭은 아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다면 『일본서기』가 본래 명칭이라면 왜 『속일본기』는 『일본서기』를 『일본기』라고 하였을까? 이는 두 가지 이유를 생각할 수 있다. 하나는 본래의 명칭이 『일본서기』이지만 내용상으로는 『일본기』에 불과하다는 『속일본기』 편찬 단계의 『일본서기』에 대한 인식을 상정할 수 있다. 『일본서기』는 본기만 있으므로 굳이 ‘일본서의 기(紀)’라고 할 필요 없이 『일본기』라고 불러도 상관없다고 하는 후대의 인식이 반영되었을 것이다. 두 번째는 『속일본기』 편찬자들이 지향하고 있는 사서의 방향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속일본기』는 처음부터 본기만을 작성하고자 하였기 때문에 『일본서기』조차도 『일본기』로 인식하였다고 볼 수 있다. 『속일본기』라는 명칭 자체가 『일본기』, 정확하게는 『일본서』의 본기 부분을 잇는다는 의식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처럼 『일본서기』의 본래 명칭은 『일본기』가 아니며, 또한 『일본서기』와 『일본기』가 처음부터 혼용되었던 것은 아니다. 즉 『일본서기』는 원래 ‘일본서’라는 사서를 구상하였으나 본기만을 편찬하는 데 그쳤기 때문에 ‘일본서의 기’라는 뜻으로 『일본서기』라고 하게 되었고, 『속일본기』 편찬 단계에서는 이미『일본서기』라고 할 필요 없이 『일본기』라고 불러도 무방하다고 생각하게 되어 『속일본기』라는 명칭이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사실을 보여주는 자료로 『일본기경연화가(日本紀竟宴和歌)』가 있다.이 책은 연희(延喜)·천경(天慶) 연간에 두 차례에 걸쳐 이루어진 경연가(竟宴歌)를 모은 것이다. 경연가는 연회를 베풀고 흥이 올랐을 때 지은 노래를 말한다. 그런데 책의 제목은 『일본기』라고 되어 있지만, 서문에는 『일본서기』는 사인친왕(舍人親王)과 태조신안만(太朝臣安滿) 등이 칙을 받들어 편찬한 것이라고 명기하고 있다. 즉 원래의 책 제목은 『일본서기』인데 연희(延喜) 연간(901~923)에는 일반적으로 『일본기』라고 불렀음을 알 수 있다. 그밖에도 『일본서기』를 『일본기』라고 한 사례는 『본조월령(本朝月令)』에 인용된 연력(延曆) 11년(792) 태정관부(太政官符)와 『일본후기(日本後紀)』 연력 16년(797) 2월 및 홍인(弘仁) 3년(812) 6월 기사가 있다. 『속일본기』가 연력 13년(794)에 이미 일부가 완성되었고 연력 16년(797)에 최종적으로 완성된 점을 생각하면, 『속일본기』가 편찬되던 시기에 『일본기』라는 용어가 본격적으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정식 명칭은 어디까지나 『일본서기』에 대한 강독 결과를 모은 『홍인사기(弘仁私記)』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일본서기』’였다. 현재 확인되는 것은 『속일본기』가 편찬되는 단계에 두 가지 명칭이 함께 쓰이게 되었으며, 정식 명칭은 어디까지나 『일본서기』임을 알 수 있다.
2. 『제기』와 『구사』
『일본서기』의 편찬과정은 분명하지 않다. 다만 편찬의 직접적 단서로는『일본서기』 천무(天武) 10년(682) 3월 기사에 천도황자(川嶋皇子) 등에게 제기(帝紀)와 상고제사(上古諸事)를 기정(記定)하라고 명령한 것을 들 수 있다. 또한 720년에 완성된 『일본서기』보다 8년 전에 편찬된 『고사기(古事記)』의 서문에 따르면 각 가문이 가지고 있는 『제기』와 『본사(本辭)』가 잘못과 허위가 많으므로 『제기』를 찬록(撰錄)하고 『구사(舊辭)』를 토핵(討覈)하도록 하였고, 패전아례(稗田阿禮)가 제황일계(帝皇日繼)
[주001]
와 선대구사(先代舊辭)를 암송하였다고 한다.
이들 자료에서는 제기(帝紀)-제황일계(帝皇日繼)-선기(先紀) 그리고 구사(舊辭)-선대구사(先代舊辭)-상고제사(上古諸事)[천무기(天武紀)]라는 용어가 혼용되고 있다. 즉 『제기』는 『제황일계』라고 할 수 있고, 『선기』라고 할 수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천무대(天武代)에 『제기』와 『구사』가 이미 있었던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그 내용이 틀린 것이 많으므로 “『제기』를 찬록하고 『구사』를 토핵하여 잘못을 깎고 참된 것을 정하여 후세에 전하고자 한다”고 하였다. 다만 그 작업은 완성되지 못하였는데, 원명대(元明代)에 와서 다시 “『구사』의 잘못되고 어그러진 것을 안타까워하고, 『선기』의 그릇되고 어긋난 것을 바로잡고자 하여”, “칙어구사(勅語舊辭)를 찬록하여 헌상하라”고 한 것으로 되어있다. 그리고 그 결과물이 『고사기(古事記)』라는 것이다. 칙어구사를 찬록하라는 부분을 중시하여 『고사기』의 내용 전체가 구사적(舊辭的)인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다만 전체의 문맥에서 보면 『제기』(제황일계, 선기)와 『구사』(선대구사, 칙어구사)가 짝을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으므로, 칙어구사를 찬록하라는 말에서 『제기』를 생략한 것으로 볼 수 있는 여지도 있다. 이 문제를 포함하여 천무 시기에 존재하였다는 『제기』와 『구사』는 무엇이고, 추고(推古)~황극대(皇極代)에 보이는 『천황기(天皇記)』·『국기(國記)』·『본기(本記)』와는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밝혀볼 필요가 있다.
천무천황은 “『제기』를 찬록하고, 『구사』를 토핵하여”라고 명하였는데, 찬록한다는 말을 새롭게 문헌을 편찬한다는 말이고, 토핵한다는 말은 이미 존재하는 자료를 검토하여 바로잡는다는 말이다. 용어의 쓰임새를 중시한다면 『구사』는 이미 존재하고 있는 문헌이나 자료이지만, 『제기』는 아직 존재하지 않은 문헌인 셈이다. 그런데 여러 가문이 가지고 있는 『제기』와 『구사』에 잘못이 많다고 하였으므로, 이미 천무 시기에 『제기』도 존재하고 있었다고 볼 수있다. 그러나 『구사』는 각 씨족 집안이 가지고 있는 것이 당연할지 모르지만, 『제기』는 천황가의 계보를 중심으로 한 문헌 형태의 기록이라고 한다면 우선 일반씨족들이 집집마다 이 문헌을 가지고 있었고, 나아가서 『제기』의 내용을 마음대로 수정하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므로 각 가문이 가지고 있는 『제기』의 내용이 다르다고 한 것은 천무시기에 『제기』로 인식되었던 부분의 내용이 각 가문이 작성·보유하고 있는 본기 등에서 서로 다르게 나타난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만약 정리된 『제기』를 대왕가(천황가)에서 가지고 있었다면, 대왕가가 가지고 있는 『제기』를 기준으로 정하고 각 가문이 가지고 있는 『제기』를 폐기토록 하는 것만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그런데도 원명(元明) 시기까지 『제기』의 잘못된 내용이 문제가 된 것은 기준이 될 『제기』가 존재하지 않았고, 천무 시기에 찬록하고자 한 『제기』가 아직 완전히 정리되지 못하였음을 보여준다.
그 주된 이유는 후술할 바와 같이 을사(乙巳)의 변(變) 과정에서 『천황기(天皇記)』가 소실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국기(國記)』와 『본기』 속에 나타나는 제기적(帝紀的)인 부분, 즉 천황가와 관련된 내용을 추출하여 『제기』를 정리하고자 하였을 것이다. 추고(推古) 시기에 이루어진 『천황기』의 편찬은 곧 천무 시기의 『제기』의 편찬과 같은 사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천황기』가소실되면서 『제기』의 편찬이 필요해진 것이다. 소실을 면한 『국기』와 각 씨족이 가지고 있던 『본기』를 근거로 하여 『제기』를 재구성하고자 한 것으로 생각된다.
3. 『천황기』와 『국기』
『천황기(天皇記)』와 『국기(國記)』 등은 일본에서 사서의 편찬을 위한 기초작업이 이루어진 사실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추고(推古) 28년(620)에 황태자[성덕태자(聖德太子)]와 도대신[嶋大臣, 소아마자(蘇我馬子)]이 『천황기』와 『국기』 그리고 여러 씨족 및 공민(公民)의 『본기』를 편찬하였다고 한다. 한편 황극(皇極) 4년(645) 6월 을유에 소아하이(蘇我蝦夷)가 주살되었을 때, 『천황기』와 『국기』그리고 여러 가지 보물이 모두 불타게 되었다. 이때 선사혜척(船史惠尺)이 재빨리 위기에 처한 『국기』를 꺼내어 중대형황자(中大兄皇子)에게 헌상하였다.
그런데 이 시기의 『천황기』·『국기』·『본기』 중에서 『천황기』는 『천황기』가 아니라 ‘『대왕기(大王記)』’였을 수도 있다. 이 시기에는 사적으로 천황이라는 용어가 쓰였을 가능성도 있지만, 아직 공식적으로 천황이란 용어가 사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황극대(皇極代)에 존재했던 기록은 대왕가(大王家)를 중심으로 한 기록(『천황기』), 왜국(倭國)의 역사에 관한 기록(『국기』)
[주002]
, 중앙의 호족 및 유력 씨족[신(臣)·연(連)·반조(伴造)·국조(國造) 등]의 『본기』 등이다. 이들 기록은 공통적으로 ‘기(記)’라고 불린 사실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각 기록의 차별성은 존재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그 중 『본기』는 주로 중앙 유력 씨족들의 역사를 기록한 것으로, 후대의 가전(家傳)과 같은 성격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이 단계에서는 일본국 전체를 하나의 단위로 하는 역사를 편찬한 것이 아니라, 일본열도 내부의 대왕을 비롯한 여러 세력들이나 지역의 역사를 개별적으로 정리한 단계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천황기』와 『국기』·『본기』 등이 편찬된 것이 추고(推古)·서명(舒明)·황극대(皇極代)이고, 이 시기에 이들 문헌이 존재하고 있었다면 천무(天武)는 서명과 황극의 아들이므로 두 시기는 크게 떨어져 있지 않다. 또한 이들 문헌이 전래되었다고 하더라도 그 사이에 많은 개변이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 그래서 『천황기』·『국기』·『본기』가 곧 『제기(帝紀)』와 『구사(舊辭)』로 불릴 수 있었을 것이다. 통설적인 주장처럼 흠명대(欽明代)를 중심으로 한 시기에 『제기』와 『구사』가 편찬되었다고 하는 것은 별다른 근거가 없으며, 설령 후대에 『제기』와 『구사』로 불릴 만한 자료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천황기』·『국기』·『본기』를 편찬하는 단계에 그 내용으로 편입되었을 것으로 볼 수 있다.『제기』와 『구사』라는 표현이 처음 나타나는 시기가 바로 천무 시기이며, 그 한 세대 내지는 두 세대 앞에서 『천황기』 등이 편찬되었기 때문에 천무가 말하는 『제기』와 『구사』가 곧 『천황기』 등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만약 『천황기』·『국기』가 『제기』·『구사』로도 불릴 수 있는 문헌이라면, 『제기』와 『구사』에 문제가 있다고 한 것은 흠명대 이래로 전래되는 과정에서 생긴 조작이나 변개를 지적한 것이 아니라, 추고·황극대의 『천황기』·『국기』·『본기』 단계에서 본질적으로 가지고 있던 문제를 거론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즉 호족에 대하여 대왕이 절대적인 우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호족들과 병렬적인 모습 혹은 극히 인간적으로 묘사된 그 자체를 지적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또한 호족들의 우열과 질서에 대해서도 천무 자신의 의중을 반영하고자 하였을 것이다. 임신(壬申)의 난 과정에서 자신에게 협조한 지방호족들을 부각시키는 한편, 천무에 맞섰던 중앙의 유력호족은 견제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아울러 천무 시기에는 소실을 면한 『국기』와 각 가문이 가지고 있던 『본기』를 통해서 제기적(帝紀的)인 내용을 재구성하는 작업을 시도한 것으로 보인다.
그것이 『고사기』의 편찬으로 이어졌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고사기』는 천황가의 계보 및 그와 관련된 씨족들과의 관계를 정리하는 데 주안점을 두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즉 『고사기』는 천황가를 중심으로 한 여러 씨족들의 계보를 재구성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일본서기』처럼 다양한 전승이나 서로 다른 계보를 극력 배제하는 방향으로 편찬되었다. 이에 대해서 『일본서기』는 천황가나 유력 호족의 계보 정리라는 차원을 넘어서서 일본이라는 국가의 역사, 그것도 중국 왕조의 역사서와 비견될 수 있는 사서를 편찬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한편으로 일본국의 지배자인 천황의 위상을 높이고 그 지배의 정당성을 드러내기 위해서 노력하였다. 거기에 중국적인 사서 편찬의 소양을 가진 중국계 인물들이 편찬에 참여하면서 중국적인 사서 편찬원리, 즉 다양한 전승이나 이전(異傳) 중에서 하나만 채택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병치(竝置)시켜두고 후대인의 판단에 맡기는 편찬방침을 취하게 되었다. 따라서 신대(神代)의 내용도 『고사기』는 단일한 줄거리를 가진 신화로 정리된 모습을 갖고 있는데 비해 『일본서기』는 여러 가지 전승을 함께 기록하고 있다. 바로 『일본서기』에 수록되어 있는 ‘일서(一書)’ 등의 이전(異傳)이야말로 천무 시기에 토핵(討覈)의 대상이 되었던 『제기』와 『구사』(『국기』와 『본기』)의 실태를 반영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4. 『천황기』에서 『제기』로
을사(乙巳)의 변 당시에 소아하이(蘇我蝦夷)의 저택이 불타게 되었는데, 선사혜척(船史惠尺)이 『국기』만을 화재로부터 구해내어 중대형황자[中大兄皇子, 후의천지천황(天智天皇)]에게 헌상하였다고 한다. 즉 『천황기』는 이때의 화재로 불타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본기』의 경우는 개별 씨족이 각각 관리하고 있었기 때문에 소아하이의 집에 있지 않았으며, 그래서 이 기사에서는 언급하지 않은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지만 『국기』와 『본기』 속에도 천황과 관련된 내용들이 당연히 들어있었을 것이고, 그러한 내용들은 『국기』와 『본기』가 서로 상이할 수도 있었을것이다. 후에 천황 및 천황가에 대한 내용은 『제기』로, 지방호족과 중앙의 유력씨족에 관련된 내용은 『구사』로 인식하게 되면서, 『국기』와 『본기』에 실려 있는 천황과 관련된 내용들이 서로 다르다는 점을 지적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천지(天智)에게 전해진 『국기』는 천무(天武)에게로 이어졌을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천무 시기에 언급되고 있는 『제기』는 천황과 관련된 내용이라는 관념적인 인식일 뿐 현실적인 문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에 대해서 『구사』 역시 호족들에 대한 내용을 지칭하는 용어였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비로소 『고사기』 서문에서 ‘칙어구사(勅語舊辭)’를 편찬케 하였다는 말이 제자리를 찾게 된다. 칙어구사란 바로 천무가 칙명(勅命)으로 인정한 구사적(舊辭的)인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고사기』가 『구사』만을 편찬한 것인데 『제기』의 내용을 담고 있는 이유도 알 수 있다. 결국 『제기』와 『구사』라는 용어는 천무 시기에 형성된 천황 우위의 정치질서를 반영하는 용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고사기』가 편찬되는 최후 단계까지 『제기』가 완성되지 않은 상태였다고 하는 것은 『제기』의 찬록이 각 가문이 가지고 있었다는 『제기』의 이동(異同)만을 바로잡은 작업이 아니었음을 반영한다. 또한 『제기』가 계보적인 기록이라고 이해하는 것도 문제가 있다. 『국기』나 『본기』와 마찬가지로 『천황기』나『제기』가 대왕을 중심으로 한 계보를 비롯해서 대왕의 중요한 사적이 망라되지 않았다고 한다면, 호족들의 기록보다도 간략한 것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추고(推古) 황극대(皇極代)에 편찬된 문헌들은 『천황기』·『국기』·『본기』와 같이 기(記)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계체 흠명대(欽明代)에 정리되었다고 하는 문헌들이 『제기』와 같은 이름을 가질 수 없다는 사실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천황이라는 용어는 이미 추고 시기에 율령법적인 근거를 가진 용어로서가 아니라 사적인 용어 혹은 미칭(美稱)으로 쓰였을 가능성도 일찍부터 제기되고 있으므로
[주003]
, 『천황기』라는 용어 전체를 추고·황극대의 것으로 보아도 문제가 없다고 할 수 있다.
천황가와 유력호족이 서로 대등하다는 관념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 『천황기』와 『국기』·『본기』라고 한다면, 천황과 유력 호족 사이의 차별성을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용어가 『제기』와 『구사』라고 할 수 있다. 기(紀)는 천자·황제의 역사를 편년체 형식으로 기록한 것이다. 바로 중국 사서에서 보이는 본기(本紀)에 해당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제기』는 황제의 역사라는 관점에서 기록한 것이며, 동시에 이것은 시간을 인식하는 기준이 되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구사』는 『천황기』·『국기』와 병렬적이었던 『본기』가 천황을 정점으로한 국가 질서 속에 재편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천황기』라고 하지 않고 『제기』라고 한 것은 바로 천무 시기부터 종래의 대왕과는 구별되는 한 차원 높은 권력자로서 천황이라는 인식을 갖기 시작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대왕과 호족 등이 각각의 역사를 차별 없이 기(記)라고 했던 의식을 극복하고, 천황에 대한 기록을 한 단계 높여서 기(紀)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으로 보고자 한다. 선기(先紀)라는 표현이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선기 즉 ‘이전의 기(紀)’라는 말이 제황일계(帝皇日繼)와 동일시 될 수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구사』는 『국기』와 『본기』를 가리키는 것이며, 그러한 기록이 갖는 권위와 위상을 천황의 그것과 선명하게 대비시키기 위해서 『상고제사(上古諸事)』, 『구사』라 부른 것으로 보인다.
사실 천무가 공식적·법적으로는 최초의 천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천황이란 용어가 법제화되어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천무의 사후인 지통(持統)의 시대일 가능성이 지적되고 있다. 그러므로 천무 시기에는 천황이라는 용어보다는 제(帝)·제황(帝皇)같은 용어가 유력씨족들과의 차별성을 드러내는 용어로 선호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천무가 임신(壬申)의 난을 통하여 중앙의 유력호족을 통제할 수 있는 입장에 있었기 때문에, 대왕가(大王家)의 역사를 호족들의 역사와 차별화하면서 『제기(帝紀)』라고 부르고자 하였을 것이다. 이에 대해 종래에 『천황기』와 더불어 나란히 『국기』·『본기』라고 하였던 유력호족들을 중심으로 한 기록은 『구사』 혹은 상고제사로 더욱 격을 낮춘 것으로 생각된다.
이렇게 본다면 『천황기』·『국기』·『본기』의 계통을 이은 것이 『고사기』이고, 『제기』 즉 천황을 중심으로 한 기록을 축으로 일본국의 국가사로 편찬된 책이 『일본기』 즉 『일본서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고사기』라는 용어 자체도 상고제사+『구사』+기(記)로 구성된 말로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칙어구사(勅語舊辭) 혹은 상고제사만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호족들에 관한 기록과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천황기』 내지는 『제기』의 내용도 함께 담고 있다.
5. 구분론
712년에 완성된 『고사기』와 720년에 편찬된 『일본서기』는 적지 않은 차이가 있다. 『고사기』는 일본적인 변형 한문체인데 비하여, 『일본서기』는 정형적인 한문체이다. 그런 점에서 『고사기』는 대내용, 『일본서기』는 대외용, 즉 일본이라는 국가의 성립과 그 역사를 대외적으로 과시하려는 측면이 있음을 알 수 있다.
표 1 『일본서기』 권별 내용, 분량 및 분류
권 |
내용 |
쪽수 [주004]
|
글자 수 [주005]
|
쪽당 글자 수 |
|
구분 |
1 |
神代 上 |
49 |
11,306 |
230 |
|
β군 |
2 |
神代 下 |
44 |
10,388 |
236 |
|
3 |
神武紀 |
23 |
5,670 |
246 |
|
4 |
綏靖~開化 |
16 |
2,915 |
182 |
八代 |
5 |
崇神 |
15 |
3,505 |
233 |
|
6 |
垂仁 |
19 |
5,077 |
267 |
|
7 |
景行·成務 |
30 |
7,055 |
235 |
二代 |
8 |
仲哀 |
7 |
1,653 |
236 |
|
9 |
神功 |
24 |
6,297 |
262 |
|
10 |
應神 |
16 |
3,832 |
239 |
|
11 |
仁德 |
28 |
6,516 |
234 |
|
12 |
履中·反正 |
11 |
2,400 |
218 |
二代 |
13 |
允恭·安康 |
20 |
4,304 |
215 |
|
14 |
雄略 |
35 |
8,762 |
250 |
|
α군 |
15 |
淸寧·顯宗·仁賢 |
23 |
5,694 |
248 |
三代 |
16 |
武烈7 |
1,681 |
240 |
|
|
17 |
繼體23 |
5,571 |
242 |
|
|
18 |
安閑·宣化 |
10 |
2,283 |
228 |
|
19 |
欽明 |
50 |
12,952 |
259 |
|
20 |
敏達 |
16 |
3,970 |
248 |
|
21 |
用明·崇峻 |
14 |
3,430 |
245 |
|
22 |
推古 |
34 |
7,862 |
231 |
|
β군 |
23 |
舒明 |
15 |
3,473 |
232 |
|
24 |
皇極 |
23 |
5,695 |
248 |
乙巳의 變 |
α군 |
25 |
孝德 |
42 |
11,166 |
266 |
大化改新 |
26 |
齊明 |
18 |
5,404 |
300 |
|
27 |
天智 |
23 |
5,733 |
249 |
|
28 |
天武 上 |
20 |
5,138 |
257 |
壬申의 亂 |
β군 |
29 |
天武 下 |
57 |
14,044 |
246 |
|
30 |
持統 |
38 |
9,516 |
250 |
|
|
이처럼 『일본서기』는 정격 한문으로 쓰였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한문 속에 많은 기용(奇用)과 오용(誤用)이 있다. 또한 기용과 오용은 1~13권, 22·23권, 28·29권에서 현저하다. 『일본서기』의 각 권별 어구 및 어법, 가요(歌謠), 가명(假名) 표기에 사용된 한자, 분주(分註)의 수, 출전과 소재(素材) 등의 특징을 바탕으로 하여 통상적으로 1~13권, 22·23권, 28·29권을 β군, 30권을 제외한 나머지 권을 α군, 30권으로 세 영역으로 구분하고 있다. 이처럼 『일본서기』 각 권의 특징을 찾아내어 몇 개의 그룹으로 구분하는 연구를 구분론(區分論)이라고 한다.
구분론의 출발점을 이루는 연구는 강전정지(岡田正之)의 『近江奈良朝の漢文學』(1929)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인용서를 제시하는 방법의 차이에 주목하였다. 1~13권까지는 一書曰, 一書云, 一曰, 一云, 或云, 或曰이 주류를 이루는데, 14권 이후에서는 一本云, 一本, 舊本云, 別本云, 或本云이 주로 나타나는 것을 근거로 전자와 후자의 편찬자가 다르다고 보았다. 이렇게 『일본서기』가전체적인 통일성을 갖춘 게 아니라, 편찬자의 차이에 따른 여러가지 상이점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된 것이다. 이후 ‘之’의 용법, 貢職·先(조상이라는 뜻)·皇祖·宮室·朝貢·幣帛·因以·歌之曰·群卿·群臣·公卿百寮人 등의 어구 분포, 宮의 기재형식, 皇子·皇女의 기재형식 등 다양한 방법으로 『일본서기』를 구분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졌다. 일례로 일본어의 や, く, も를 나타내는 한자로 椰·區·茂(β군)와 耶·矩·謀(α군)가 있는데, 이를 기준으로 나누어 보면 1~13권과 22~23권(β군)과 14~19권, 24~27권(α군)으로 구분된다.
또한 일본어에서는 한자의 아음(牙音)과 후음(喉音)이 구별되지 않는다. 우리말에서도 訶(가 혹은 하), 河(하), 胡(호), 許(허), 虛(허)는 모두 ‘ㅎ’ 음가를 가지고 있는데 비하여, 일본어에서는 訶(か), 河(か), 胡(こ·ご), 許(きょ·こ), 許(きょ·こ)가 か행의 음가를 가지고 있다. 『일본서기』 속의 가요(歌謠)는 당시 일본어를 한자의 음가로 표기한 것인데, 아음과 후음을 구별할 수 없는 일본인과 아음과 후음을 구별할 수 있으며 일본어의 か행 음가가 아음이라고 간주한 중국인 사이에는 가요에 사용한 한자가 서로 구별된다. 이처럼 아음과 후음을 구별한것은 α군이고, 구별하지 못한 것은 β군이다
[주006]
.
표 2 가요의 음운을 통한 구분론
假名/卷 |
牙音 |
喉音 |
分布 |
カ |
コ(甲) |
コ(乙) |
カ |
コ(甲) |
コ(乙) |
|
10種 |
5種 |
6種 |
曉母 |
匣母 |
曉母 |
|
訶 |
河 |
胡 |
許 |
虛 |
1 |
|
|
|
|
|
|
|
|
|
2 |
10 |
1 |
3 |
1 |
|
|
|
|
● |
3 |
12 |
4 |
4 |
|
|
|
|
2 |
● |
4 |
|
|
|
|
|
|
|
|
|
5 |
8 |
2 |
|
|
|
1 |
2 |
|
● |
6 |
|
|
|
|
|
|
|
|
|
7 |
7 |
1 |
|
|
|
|
2 |
3 |
● |
8 |
|
|
|
|
|
|
|
|
● |
9 |
10 |
2 |
|
1 |
|
|
2 |
3 |
● |
10 |
11 |
3 |
1 |
3 |
|
|
1 |
3 |
● |
11 |
29 |
7 |
|
|
|
1 |
4 |
19 |
● |
12 |
1 |
|
|
|
|
|
|
|
|
13 |
5 |
3 |
4 |
2 |
|
|
2 |
3 |
● |
14 |
20 |
7 |
8 |
|
|
|
|
|
|
15 |
3 |
|
1 |
|
|
|
|
|
|
16 |
19 |
4 |
3 |
|
|
|
|
|
|
17 |
10 |
2 |
3 |
|
|
|
|
|
|
18 |
|
|
|
|
|
|
|
|
|
19 |
2 |
2 |
|
|
|
|
|
|
|
20 |
|
|
|
|
|
|
|
|
|
21 |
|
|
|
|
|
|
|
|
|
22 |
6 |
3 |
|
6 |
1 |
1 |
2 |
|
● |
23 |
1 |
|
|
|
|
|
|
2 |
● |
24 |
7 |
2 |
8 |
|
|
|
|
|
|
25 |
6 |
2 |
1 |
|
|
|
|
|
|
26 |
14 |
4 |
|
|
|
|
|
|
|
27 |
3 |
6 |
2 |
|
|
|
|
|
|
6. 편수론
구분론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서, 상박달(森博達)은 일본어를 표기한 한자의 음운(音韻) 및 오용(誤用) 등을 근거로 β군은 일본인들이 편찬한 부분이고, α군은 중국인들이 편찬한 부분이라는 결론을 이끌어냈다. 구분론의 성과로 편찬자에 관한 논의는 물론이고 편찬 순서 등을 밝힐 수 있게 된 것이다
[주007]
.
모리 히로미치는 1~13권(β군)이 14권 이후보다 나중에 편찬된 것으로 보고 있다. 14권의 웅략기(雄略紀)에는 안강(安康)이 미륜왕(眉輪王)에게 살해되는 과정이 자세하게 보인다. 그런데 13권의 안강기(安康紀)에서는 안강이 미륜왕에게 살해되었다는 기사만 있고 자세한 것은 대박뢰천황기(大泊瀨天皇紀)(웅략기)에 있다고 하였다. 13권이 나중에 편찬된 증거다
[주008]
.
그런데 웅략기에는 안강천황이 황후를 매(妹)라고 하였고, 이 부분에 편찬자가 주를 달아 처를 매라고 하는 것은 고속(古俗)일 것으로 추정하였다. 처를 누이라고 부르는 것은 『일본서기』가 편찬되던 나라[奈良]시대까지도 일반적이었기 때문에, 이 주석을 단 사람은 중국인일 수밖에 없다
[주009]
.
『일본서기』 편찬에 참여한 중국인 후보로는 7세기 말(691)의 음박사(音博士)였던 속수언(續守言)과 살홍각(薩弘恪)을 들 수 있다. 속수언은 660년에 나당연합군이 백제를 공격할 때 포로가 되어 왜로 건너갔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이들 두 사람은 지통(持通) 3년(689)에 반포된 「정어원령(淨御原令)」 편찬에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살홍각은 「대보율령(大寶律令)」의 편찬에도 참여하였다. 691년 9월 4일에 두 사람과 함께 서박사(書博士)인 백제인 말사선신(末士善信)에게 은(銀)이 하사되었으며, 직전에는 대삼륜씨(大三輪氏) 등 13씨 선조의 묘기(墓記)를 바치도록 하였다. 『일본서기』 편찬의 자료다. 692년에는 다시 두 사람에게 논 4정(町)이 지급되었다. 천무의 의도에 따라서 지통 시기에 『일본서기』 편찬이 실제로 진행되었음을 보여준다.
한편 각 권에 사용된 역법을 보면 3권에서 13권까지는 새로운 의봉력(儀鳳曆)이고, 14권 웅략기부터는 원가력(元嘉曆)이다. 이 또한 β군이 α군보다 나중에 편찬된 사실을 보여 준다
[주010]
. 원가력은 송(宋)의 원가 22년(445)부터 사용되기 시작한 역법으로, 왜는 송에 빈번하게 사신을 파견하였으므로 직접 송으로부터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 『송서(宋書)』에 보이는 왜왕 무(武)가 웅략으로 추정되고 있고, 『일본서기』의 내용 중 가장 먼저 편찬되기 시작한 14권의 웅략기가 원가력에 의거하고 있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원래 인덕력(麟德曆)으로 불렸던 의봉력은 당의 인덕 2년(665)에 시행되었으며, 신라를 거쳐 일본으로 전래되었다. 지통 4년(690) 11월에는 원가력과 의봉력을 사용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일상적인 목적을 위해서 동시에 두 개의 역법을 사용하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일상적으로는 의봉력, 사서의 편찬을 위해서는 그대로 원가력을 사용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이후 문무(文武) 2년(698)에 이르러 의봉력만을 사용하도록 하였는데 β군에서 의봉력을 사용한 것은 빨라도 690년, α군의 편찬이 완료된 이후에 시작된 것으로 본다면 698년 이후로 볼 수 있다.
α군 내에서도 14~21권과 24~27권 사이에는 차이가 존재한다. 문헌을 인용할 때 ‘一本云’이라고 한 경우가 스물한 번 있는데, 모두 14~19권에서만 보인다. 또한 조상을 뜻하는 선(先)이라는 글자도 열세 번 사용되었는데, 모두14~21권에만 보인다. 반대로 천황의 조모(祖母)를 뜻하는 황조모(皇祖母)는 열네 번의 사례가 모두 24~27권에서만 나타난다.
한편 제명기(齊明紀) 7년 11월 무술의 분주에 『일본세기(日本世記)』를 인용하여 “11월에 복신(福信)이 사로잡은 당나라 사람 속수언 등이 축자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동시에 다른 책을 인용하면서 신유년(661)에 백제 좌평 복신이 바친 당나라 포로 106명을 근강국(近江國)에 거주하며 논을 개간하도록 하였다는 내용과 경신년(660)에 이미 복신이 당나라 포로를 바쳤다는 두 가지 내용을 다 기록하여 후대 사람이 확인해 줄 것을 바란다고 하였다. 만약 속수언이 이 부분을 기록하였다면 자신이 왜에 온 시점을 분명하게 정할 수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24~27권은 살홍각이, 14~21권은 속수언이 편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살홍각이 제명기를 편찬할 당시에는 이미 속수언은 활동을 중지한 것으로 보인다. 「대보율령」 완성에 따른 논공행상에서도 살홍각만 나타난다.
원래는 속수언이 고대의 중요한 획기라고 할 수 있는 14권의 웅략기부터 23권의 서명기(舒明紀)까지, 살홍각은 소아마자(蘇我馬子)가 주살되고 대화개신(大化改新)에 이르는 과정을 서술하기 위하여 24권 황극기(皇極紀)부터 집필하기로 되어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속수언은 21권[숭준기(崇峻紀)]을 다 완성하지 못하였고, 그 결과 일본인이 집필한 숭준기의 후반에는 한문의 오용(誤用)이 많이 나타난다.
「대보율령」 완성 직후에는 살홍각도 더 이상 문헌에 보이지 않으므로 700년 직후에 그도 은퇴하였거나 죽은 것으로 생각된다.
α군의 당 출신 편찬자들이 모두 사망한 후 『일본서기』의 편찬은 일시적으로 중단된 상태였다. 한편 경운(慶雲) 4년(707) 4월 15일에 학사(學士)를 우대하는 의미에서 정6위하 산전사어형[山田史御形, 어방(御方)·삼방(三方)으로도 표기됨] 등에게 포(布) 등을 하사하였다. 그는 『일본서기』가 완성된 720년에 종5위상이 되었다. 사(史)라는 낮은 직책에도 불구하고 그가 종5위하를 거쳐 종5위상까지 승진할 수 있었던 배경은, 역시 『일본서기』의 편찬을 생각하지 않을수 없다. β군 편찬의 주역은 바로 산전사어형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그는 원래 신라에 유학한 승려였으나, 지통 6년(692)에 무광사(務廣肆)(종7위하)에서 위 되었다. 그의 문필능력을 활용하기 위해서 환속(還俗) 시킨 것이다. 특히 β군에는 미경기년(未經幾年)과 같은 어구들이 보이는데, 이러한 표현은 『경률이상(經律異相)』·『법원주림(法苑珠林)』과 같은 불교 분야의 유서(類書)에서 비롯된 것이다. 승려였던 산전사어형이 불전이나 유서에서 익힌 표현을 β군에 사용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β군의 편찬은 언제 시작되었을까? β군이 의봉력을 사용하고 있는 점과 「대보령」에서 규정된 천황의 공식 호칭인 ‘명신어우천황(明神御宇天皇)’과 관련된 용어들이 β군과 효덕기(孝德紀)에 보인다. 한편 α군에서는 ‘치천하(治天해제 39下)’라는 용어가 보인다. 도하산(稻荷山) 고분 출토의 철검 명문 등에서 보이는 것처럼 ‘~궁치천하(宮治天下)’라는 표현은 율령제 이전에 사용된 표현이다. ‘치천하’라는 표현은 α군과 지통기(持統紀)에서만 보인다. 이는 β군의 편찬이 「대보령」 이후에 이루어졌음을 짐작케 한다. 아울러 이때 α군에 대한 윤색도 함께 이루어졌을 것이다.
한편 권30 지통기는 α군에도, β군에도 속하지 않는다. 『일본서기』에는 군신(群臣)이라는 용어가 109차례 보이지만 지통기에는 전혀 보이지 않으며, 공경백료인(公卿百寮人)이라는 표현은 아홉 차례 보이는데 모두 지통기에만 보인다. 또한 대진황자(大津皇子)와 같이 이름을 먼저 쓰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지통기에서는 황자대진(皇子大津)이라고 하여 황자를 앞세우고 있다. 그런데 화동(和銅) 7년(714)에 기조신청인(紀朝臣淸人)과 삼택신등마려(三宅臣藤麻呂)로 하여금 국사(國史)를 편찬하도록 하였다. 기조신청인은 715년에 종5위하에 올랐고, 이 해와 717년에 학사를 우대한다는 뜻에서 각각 벼 100석을 하사받았다. 또한 721년에는 산전사어방(山田史御方)과 더불어 동궁(東宮) 학사가 되었다.
7. 최종 단계의 윤색
구분론은 구체적인 『일본서기』의 편찬과정에 대해서도 중요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일본음을 표현하기 위한 한자 사용에서 아음(牙音)과 후음(喉音)을 명확히 구분하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 중국인의 손으로 이루어진 것이 분명한 α군에도 오용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이를 근거로 일단 중국인의 손으로 이루어진 α군에 대하여 일본인에 의한 최종 윤색이 이루어진 것으로 판단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한 오용이 두드러지는 것이 효덕기(孝德紀)이다. 특히 대화개신(大化改新)과 관련된 기사에 대하여 대폭적인 윤색이 이루어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α군의 이른바 왜습(倭習)이라고 하는 한문의 잘못된 표현 사례는 다음과 같다. 흠명기(欽明紀) 24년 4월조의 “而今被誑新羅, 使天皇忿怒, 而任那憤恨, 寡人之過也”에서 ‘被誑新羅’는 ‘被新羅誑’ 혹은 ‘爲新羅見誑’이 옳다. 비슷한 표현이 “今余被遣於百濟者”(흠명기 5년 2월조), “有高名之人四十余, 被放於島”[황극기(皇極紀) 원년 2월 무자조], “其於倭國六縣被遣使者”[대화(大化) 원년 3월 경자조], “復有妻妾, 爲夫被放之日”(대화 2년 3월 갑신조), “被遣大唐使人, 高田根麻呂等”[백치(白雉) 4년 7월조], “于時, 能登臣馬身龍, 爲敵被殺”[제명기(齊明紀) 6년 3월조] 등에도 보인다. ‘爲夫被放’이나 ‘爲敵被殺’은 ‘爲夫見放’, ‘爲敵見殺’이 옳다. 이처럼 흠명기의 한반도 관계기사나 효덕기에 집중적으로 왜습이 보인다. 그밖에도 종(縱)의 용법, 사역의 용법 등에서 왜습 혹은 오용이 나타난다.
그 중에서도 한반도 관계 기사 중의 대화문, 유서(類書) 등의 한적(漢籍)을 이용한 윤색문, 효덕기의 조칙에서 오용이 두드러진다. 특히 효덕기 조칙의 경우는 『일본서기』 편찬 최종단계의 윤색 과정에서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대화개신의 사료적 가치와 더불어 백제삼서(百濟三書) 등의 사료 인용 상황에 대해서 최종적인 윤색 문제를 좀 더 신중하게 판단할 필요가 있다.
8. 출전론
『일본서기』 연구에서 또 다른 중요한 성과를 거둔 분야는 출전론(出典論)이다. 에도[江戶]시대부터 이미 『일본서기』 문장 중에 『한서(漢書)』·『후한서(後漢書)』 등 중국 문헌을 인용한 부분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졌다(『서기집해(書紀集解)』). 그러나 고지마 노리유키[小島憲之]는 중국 문헌을 인용한 부분이 원전을 직접 본 것이 아니라, 『예문유취(藝文類聚)』(100권, 624년)와 같은 유서류(類書類)를 통한 간접적인 인용일 가능성을 제기하였다(『上代日本文學と中國文學-上』, 1962). 그는 『일본서기』 편찬자들이 주로 『예문유취』를 이용한 것으로 보았으나, 이후 등촌철야(藤村哲也)와 신야지융광(神野志隆光)·동야치지(東野治之)는『수문전어람(修文殿御覽)』(360권, 573년), 뇌간정지(瀨間正之)는 『법원주림(法苑珠林)』·『화림편략(華林遍略)』(720권, 524년, 逸書) 내지 『변정론(辯正論)』의 이용 가능성을 제기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예문유취』만 이용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또한 지전창홍(池田昌弘)은 『육도(六韜)』·『고열녀전(古烈女傳)』·『회남자(淮南子)』·『사기(史記)』·『후한서』를 인용한 것으로 보았던 내용도 『화림편략(華林遍略)』에 의거한 것으로 보는 견해를 제기하였다.
『華林遍略』(長文, 逸書) → 『修文殿御覽』(短文, 逸書) → 『太平御覽』(短文)
『文思博要』(長文)
『藝文類聚』(短文)
대표적으로 『일본서기』의 첫머리를 장식하는 “古天地未剖, 陰陽不分, 渾沌如鷄子, 溟涬而含牙. 及其淸陽者, 薄靡而爲天, 重濁者, 淹滯而爲地, 精妙之合搏易, 重濁之凝竭難. 故天先成而地後定. 然後, 神聖生其中焉”이라는 문장의 경우, ‘溟涬而含牙’라는 구절은 『예문유취』에 보이지 않는다. 이에 대해서 『수문전어람』의 내용을 거의 그대로 계승하고 있는 『태평어람(太平御覽)』에는 “天地未剖, 陰陽不分”과 “及其淸陽者, 薄靡而爲天, 重濁者, 淹滯而爲地, 精妙之合搏易, 重濁之凝竭難. 故天先成而地後定”이라는 문장이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이 문장은 『화림편략』에서 인용한 것으로 보기에 이르렀다
[주011]
.
이처럼 『일본서기』는 문장의 윤색을 위하여 유서(類書)를 활용하였다는 점이 다른 사서들과 구분되는 중요한 특징이다. 또한 유서를 활용하는 과정에서도 오용이 생기고 있으므로, α군에 대한 최종적인 윤색과 더불어 『일본서기』의 편찬에서 적극적으로 검토해야 할 과제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일본서기』를 편찬하면서 이용한 자료로는 앞에서 언급한 『제기』와 『구사』 이외에도 백제삼서(百濟三書)라고 불리는 『백제기(百濟記)』, 『백제신찬(百濟新撰)』, 『백제본기(百濟本記)』가 있다. 이들 문헌에 대해서는 편찬 시기나 주체 목적 등에 대하여 다양한 논의가 이루어져 왔는데, 계체기(繼體紀)와 흠명기(欽明紀)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일본 측 사료의 부족을 보완하는 자료로서 크게 중시되었다. 중국 측 자료로는 『삼국지(三國志)』와 『진기거주(晉起居注)』가 인용되었지만, 이용 빈도는 극히 낮다.
그밖에 일본 측 자료로는 정부의 기록, 각 씨족의 시조 전승, 지방에 전해지는 전승, 사원의 연기(緣起), 『이길련박덕서(伊吉連博德書)』, 『난파길사남인서(難波吉師男人書)』, 『안두숙례지덕일기(安斗宿禰智德日記)』, 『조련담해일기(調連淡海日記)』와 같은 개인 일기가 있고, 고구려의 승려 도현(道顯)이 쓴 『일본세기(日本世記)』라는 책도 인용되어 있다.
9. 『일본서기』와 『고사기』–씨족들에 대한 전승
『일본서기』의 특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비슷한 시기에 편찬된 『고사기』와 어떻게 다른지를 파악할 필요가 있다. 두 문헌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고, 그런 차이를 통해서 『일본서기』의 성격을 선명하게 조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고사기』의 내용 중에서 특색을 이루는 것은 『일본서기』보다 두 배 가까이 많게 씨족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표 3 참고
[주012]
). 그 중에서도 주목을 끄는 것은 지방호족, 그것도 동국(東國)의 호족들이 많이 등장한다는 점이다. 동해도(東海道) 호족의 경우 7씨족(『일본서기』)과 34씨족(『고사기』), 동산도(東山道) 호족의 경우 8씨족(『일본서기』)과 19씨족(『고사기』), 북륙도(北陸道)의 경우 2씨족(『일본서기』)과 6씨족(『고사기』)이다. 그밖에 산음(山陰), 산양(山陽), 남해(南海), 서해도(西海道)의 경우는 『고사기』 쪽이 많기는 하지만 큰 차이가 없다. 또한 국조(國造)가 지방호족의 대표적인 성(姓)인데, 『일본서기』에서는 8씨족, 『고사기』에서는 24씨족이 등장한다. 이는 『고사기』가 동해도와 동산도의 호족들을 적극적으로 반영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표 3 『일본서기』와 『고사기』에 보이는 씨족의 수(梅澤伊勢三 정리)
구별/姓 |
『일본서기』 |
『고사기』 |
황계씨족 |
독립씨족 |
황계씨족 |
독립씨족 |
君 |
23 |
7 |
44 |
5 |
臣 |
9 |
14 |
57 |
1 |
連 |
4 |
8 |
11 |
7 |
別 |
6 |
0 |
24 |
0 |
國造 |
6 |
2 |
22 |
2 |
造 |
0 |
4 |
7 |
0 |
史 |
0 |
3 |
0 |
1 |
縣主 |
0 |
6 |
1 |
2 |
直 |
2 |
6 |
6 |
2 |
首 |
0 |
8 |
1 |
3 |
吉師 |
0 |
2 |
0 |
1 |
稻置 |
0 |
0 |
5 |
0 |
소계 |
50 |
60 |
177 |
24 |
합계 |
110 |
201 |
표 4 『일본서기』와 『고사기』의 씨족 분류(伊野部重一郞 정리)
|
양쪽 공통씨족 |
『고사기』 독자 |
『일본서기』 독자 |
皇親系 씨족 |
24 |
135 |
21 |
天神系 씨족 |
7 |
23 |
1 |
地祇系 씨족 |
7 |
0 |
4 |
渡來系 씨족 |
2 |
0 |
11 |
합계 |
40 |
158 |
37 |
이러한 경향은 임신(壬申)의 난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천무천황(天武天皇)은 미농국(美濃國)을 근거로 하여 동해도와 동산도의 병력을 모아 근강조정(近江朝廷)과 대립하였다. 임신의 난의 참여한 인물들은 사후에는 대체로 본인의 관위를 올려주거나 그 자손까지 배려하고 있는 사례를 『일본서기』와 『속일본기』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이름을 확인할 수 있는 경우만 40명에 달하는데, 임신년의 공신(功臣)에 대해서는 나라시대에도 지속적으로 우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표 4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출자(出自)가 기록된 씨족은 『고사기』가 많으며(198), 『일본서기』가 적다(77). 이러한 차이는 『고사기』가 황친계(皇親系)와 천신계(天神系) 씨족을 많이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비롯된 것이다. 반대로 지기계 및 도래계 씨족은 『일본서기』와 공통되는 것을 제외하면 『고사기』에는 독자적인 기록이 없다.
이처럼 『고사기』는 『일본서기』와 비교하면 계보에 대한 관심이 강렬하다. 이는 『고사기』의 자료가 된 『국기』·『본기』의 내용을 상당히 충실하게 채록하고자 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주013]
. 역으로 이들 문헌의 내용이 천황가와 호족들 간의 계보를 중심으로 한 것임을 짐작해 볼 수도 있다. 구체적으로는 호족들의 계보에 관한 기록을 천황가를 중심으로 재구성하려는 작업이었다고 할 수 있다.
『고사기』에 빈번하게 나타나는 씨족의 출자에 대한 기재는 천무대(天武代)의 씨족 정책에 대한 호족 측의 반응의 산물이라는 견해가 있다. 『고사기』의 씨족 출자 기재가 천무 9년 이후의 8색성 수여 씨족과 부합·일치되고 있는 점이 근거가 된다. 『고사기』에 출자가 기재된 총 198씨족 중 신성(新姓) 수여씨족은 74씨족으로, 천무대에 새롭게 씨성이 사여된 171씨족 중 43%에 해당한다.
한편 천무 10년에 사국(史局)을 설치하고, 11년 8월에 관리의 고선법(考選法)에서 족성(族姓)을 중시한다는 조칙을 반포하였다. 또한 『고사기』에 출자가 보이는 씨족의 성은 단 하나의 사례를 제외하고는 모두 8색성 이전의 것이다. 따라서 씨족의 출자 자료를 제출토록 하고 8색성을 부여하였고, 이때 제출된 자료가 『고사기』 편찬에 반영되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씨족에 관한 기록 중에서도 『고사기』에는 황별(皇別)과 신별(神別) 씨족에 관한 기재가 많고, 『일본서기』에는 지기(地祇) 및 번별(蕃別) 씨족이 많다. 특히 『고사기』에만 독자적으로 전하는 지기 및 번별 씨족은 전혀 없다. 번별 씨족은 바로 한반도와 중국대륙에서 건너간 도래인들을 지칭하므로, 『고사기』는 도래인에 대해서는 큰 관심이 없었던 셈이다. 이에 대해서 『고사기』는 황별 씨족에 대한 기록을 중심으로 하고 있는 점에서 일종의 황통보(皇統譜)라고도 할 수 있다
[주014]
.
한편으로 『고사기』에 보이는 씨족 중에서 임신의 난과 관계가 없거나 사성(賜姓)의 대상이 아니었던 씨족도 적지 않다. 이들 씨족은 기내(畿內)에서는 천성(賤姓)인 자들 혹은 왕권에 예속적인 존재로서, 대화국가(大和國家)의 권력기구 속에서 왕권의 지배와 관련된 전통을 가진 계층이라고 한다
[주015]
. 그런 점에서『고사기』는 천무정권(天武政權)의 지배구조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천무정권의 정치적인 요청 하에 종래의 씨족 계도를 재편성한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천무 시기의 씨족 정책은 종래의 대호족(大豪族)을 중심으로 한 체제로부터 임신의 난 때 자신에게 협력한 중소호족(中小豪族)을 기반으로 하면서 황실 중심의 정치체제로 이행하고 이를 확립하려는 것이었으며, 그러한 정책에 입각해서 편찬된 문헌이 바로 『고사기』인 것이다.
10. 『일본서기』와 『삼국사기』
『일본서기』가 우리에게 의미를 갖는 것은 『삼국사기』를 보완할 수 있는 사료이기 때문이다. 아직기(阿直岐)·왕인(王仁)에 관한 전승, 성왕(聖王)의 불교 전래, 오경박사(五經博士)의 파견 등은 『일본서기』에만 보이는 내용이다. 또 백제의 가야 지역 진출과 가야의 멸망 등에 대한 기사는 『일본서기』 쪽의 기사가 훨씬 자세하고 관련 내용도 풍부하다. 『일본서기』의 가치는 한반도 관련기사가 풍부하다는 데 그치지 않는다. 진정한 가치는 『일본서기』가 고대인에 의해서 편찬된 고대의 사서라는 점에 있다.
『삼국사기』는 고려시대, 즉 중세인의 시각에서 본 고대의 역사라고 할 수있다. 중세인의 눈에 합리적이지 않은 내용은 기사가 될 수 없었다. 그래서『삼국사기』에는 시조 신화를 제외한 다른 신화는 실려 있지 않지만, 『일본서기』는 1·2권에서 신화를 다루고 있다. 천지의 생성부터 일본열도의 생성, 천손 강림, 신무(神武)의 정벌과 국가 건설 등 실로 다양한 신화가 실려 있다. 나머지 부분에도 신이한 이야기들이 적지 않다. 신의 아내가 된 여자 이야기, 신들이 인간에게 빙의한 이야기, 중애천황(仲哀天皇)이 신탁을 믿지 않아 저주를 받아서 죽은 이야기, 웅략천황(雄略天皇)이 갈성산(葛城山)에서 신을 만난 이야기 등 신과 관련된 이야기로 넘쳐난다. 신을 위대한 인간을 반영한 것으로 보든, 자연의 위력을 나타낸 것이라고 보든 고대적인 사고의 산물인 것은 분명하다.
또한 『삼국사기』는 정치·군사·외교·내정·자연현상 등에 대한 기사가 중심을 이루고 있고, 사서 편찬의 목적이 감계(鑑戒)에 있다. 이에 비해서 『일본서기』는 왕족의 연애, 왕위계승을 둘러싼 갈등과 살육, 유력 씨족의 시조 전승, 사건과 관련된 노래 등 무미건조한 역사 기록이 아니라 인간의 삶이 전면에 구체적으로 드러나 있는 이야기들이 많다. 또한 혈연적인 계보가 자세하며 왕위 계승의 원리, 고대인들이 사용한 물품에 관한 기록도 풍부하다. 이런 내용을 통해서 고대인의 삶을 자세히 알 수 있다. 1145년에 완성된 『삼국사기』와 720년에 편찬된 『일본서기』의 차이는 크다. 범위를 넓히면, 『일본서기』다음에 편찬된 『속일본기』를 비롯하여 6국사라는 사서가 있어서 『삼국사기』의 기록보다 훨씬 정밀하다고 할 수 있다. 비유하자면 일본 고대사의 촘촘한 그물망을 통해서 『삼국사기』의 성근 그물을 보완할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일본서기』를 통해서 지방호족들이 중앙의 대왕에게 여자를 바치는 관행이 광범위하게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를 채녀(采女)라고 하였다. 처음에는 지방호족이 대화정권과 유대관계를 맺기 위하여 여자를 보내 대왕과 혼인을 하여 왕자를 낳기도 하였다. 웅략대(雄略代)에 길비(吉備)의 호족집안 출신인 치희(稚姬)가 반성황자(磐城皇子)와 성천치궁황자(星川稚宮皇子)를 낳은 예를 들 수 있다. 이렇게 지방 호족을 어머니로 둔 왕자들도 왕위계승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지방호족의 위상이 저하되면서 채녀는 궁중에서 시중을 드는 궁녀의 성격으로 변화되어 갔다.
이에 대해서 『삼국사기』에서도 단편적으로 국가 간의 혼인 혹은 지방호족과 중앙왕실 간의 혼인이 보인다. 백제와 낙랑 간의 혼인, 신라와 가야 간의 혼인, 소지왕과 벽화(碧花)의 혼인 등이 그러한 예이다. 채녀제를 통해서 고대 우리나라의 국가 간, 왕실과 지방호족 간의 혼인을 좀 더 다양하게 파악할 여지가 있다.
다른 예로는 『삼국사기』에 백제의 관등으로 좌평 이하 16개의 관등이 기록되어 있는 것을 들 수 있다. 그렇지만 관등을 가지고 있는 관인의 이름과 함께 나오는 사례는 제4등인 덕솔(德率)까지다. 그것도 단 한 차례 덕솔 진로(眞老)가 보일 뿐이다. 그 아래 관등을 가진 인물은 『삼국사기』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일본서기』에는 간솔(杆率)·나솔(奈率)의 솔위(率位)를 비롯하여 장덕(將德)·시덕(施德)·고덕(固德)·계덕(季德)·대덕(對德) 등 덕위(德位)를 가진 인물이 보인다. 인명표기에서도 『일본서기』에는 진모(眞慕)·사택(沙宅) 등으로 보이는 성들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들 성이 『삼국사기』에서 진(眞)·사(沙)로 기록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이처럼 『일본서기』는 성근 『삼국사기』를 보완하는 자료로 적극적으로 활용할 필요가 있다.
Ⅱ. 『일본서기』 인용 자료
일본 고대사 연구에서 가장 기본적인 문헌은 『일본서기』이다. 『일본서기』는 천무(天武) 10년(681) 「제기(帝紀)」·「상고제사(上古諸事)」의 ‘기정(記定)’사업을 시작으로 사인친왕(舍人親王) 등에 의해 720년에 총 30권으로 완성되기까지 많은 자료가 이용되었다.
『일본서기』 편찬에 이용된 자료는 「제기(帝紀)」와 「상고제사(上古諸事)」, 씨족의 가전(家傳), 국가의 단편적 기록, 개인의 수기, 사찰의 연기문(緣起文), 한반도 관련 자료와 중국 측 자료 등이 있다. 이들 자료는 『일본서기』에 이용될때 서명을 밝히고 있는 것도 있고, 서명은 밝히고 있지 않으나 이용 자료의 확인이나 추정이 가능한 것도 있다. 전자는 ‘백제삼서(百濟三書)’라고 불리는 『백제기(百濟記)』·『백제신찬(百濟新撰)』·『백제본기(百濟本記)』를 비롯하여 「위지(魏志)」·「진기거주(晋起居注)」·『일본구기(日本舊記)』·『이길련박덕서(伊吉連博德書)』·『난파길사남인서(難波吉士男人書)』·『일본세기(日本世記)』가 있다. 이상의 자료는 다음의 표 1로 정리하였다. 후자의 경우에는 『사기(史記)』 이하의 중국자료와 각 씨족의 가기(家記), 사찰의 연기문 등의 일본 국내자료가 있다. 이러한 예들은 『일본서기』 편찬 당시에 다수의 문헌이 존재하였음을 말해준다.
이 가운데 백제삼서와 『일본구기』·『이길련박덕서』·『난파길사남인서』·『일본세기』는 『일본서기』 내용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대외관계 서술에서 이용되었다. 모두 백제 관련 기사를 싣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들 자료는 주로 『일본서기』에 분주의 형태로 인용되고 있고, 본문 작성에도 이용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주016]
.
표 1 『일본서기』에 인용된 자료표
인용 서목(引用 書目) |
一書 |
一(云)(曰) |
亦(又)(曰) |
一本 |
舊本 |
別本 |
或本 |
或(云)(曰) |
或所(云) |
『魏志』 |
『晋起居注』 |
『百濟記』 |
『百濟新撰』 |
『日本舊記』 |
『百濟本記』 |
『伊吉博德書』 |
『難波男人書』 |
『日本世記』 |
계 |
卷 |
기명(紀名) |
1 |
神代 上 |
47 |
4 |
17 |
|
|
|
|
1 |
|
|
|
|
|
|
|
|
|
|
69 |
2 |
神代 下 |
16 |
13 |
|
|
|
|
|
|
|
|
|
|
|
|
|
|
|
|
29 |
3 |
神武 |
|
|
|
|
|
|
1 |
|
|
|
|
|
|
|
|
|
|
|
1 |
4 |
綏靖~開化 |
4 |
12 |
|
|
|
|
|
|
|
|
|
|
|
|
|
|
|
|
16 |
5 |
崇神 |
1 |
5 |
|
|
|
|
|
|
|
|
|
|
|
|
|
|
|
|
6 |
6 |
垂仁 |
|
9 |
|
|
|
|
|
|
|
|
|
|
|
|
|
|
|
|
9 |
7 |
景行·成務 |
1 |
4 |
|
|
|
|
|
|
|
|
|
|
|
|
|
|
|
|
5 |
8 |
仲哀 |
|
1 |
|
|
|
|
|
|
|
|
|
|
|
|
|
|
|
|
1 |
9 |
神功 |
|
6 |
|
|
|
|
|
|
|
3 |
1 |
2 |
|
|
|
|
|
|
12 |
10 |
應神 |
|
2 |
|
|
|
|
|
|
|
|
|
2 |
|
|
|
|
|
|
4 |
11 |
仁德 |
|
|
|
|
|
|
|
|
|
|
|
|
|
|
|
|
|
|
0 |
12 |
履中·反正 |
|
4 |
|
|
|
|
|
|
|
|
|
|
|
|
|
|
|
|
4 |
13 |
允恭·安康 |
|
2 |
|
|
|
|
|
|
|
|
|
|
|
|
|
|
|
|
2 |
14 |
雄略 |
|
1 |
|
10 |
1 |
2 |
3 |
2 |
|
|
|
1 |
2 |
1 |
|
|
|
|
23 |
15 |
淸寧·仁賢 |
|
1 |
|
3 |
1 |
|
3 |
|
|
|
|
|
|
|
|
|
|
|
8 |
16 |
武烈 |
|
|
|
3 |
|
|
|
|
|
|
|
|
1 |
|
|
|
|
|
4 |
17 |
繼體 |
|
|
|
7 |
|
|
1 |
1 |
|
|
|
|
|
|
4 |
|
|
|
13 |
18 |
安閑·宣化 |
|
|
|
1 |
|
|
|
|
|
|
|
|
|
|
|
|
|
|
1 |
19 |
欽明 |
3 |
|
1 |
5 |
1 |
|
|
|
|
|
|
|
|
|
14 |
|
|
|
24 |
20 |
敏達 |
|
|
|
|
1 |
|
1 |
|
|
|
|
|
|
|
|
|
|
|
2 |
21 |
用明·崇峻 |
|
|
|
|
|
|
5 |
1 |
|
|
|
|
|
|
|
|
|
|
6 |
22 |
推古 |
|
1 |
|
|
|
|
|
|
|
|
|
|
|
|
|
|
|
|
1 |
23 |
舒明 |
|
|
|
|
|
|
|
|
|
|
|
|
|
|
|
|
|
|
0 |
24 |
皇極 |
|
|
|
|
1 |
|
5 |
|
|
|
|
|
|
|
|
|
|
|
6 |
25 |
孝德 |
|
|
|
|
|
|
16 |
1 |
|
|
|
|
|
|
|
1 |
|
|
18 |
26 |
齊明 |
|
|
|
|
|
|
13 |
|
1 |
|
|
|
|
|
|
3 |
1 |
3 |
21 |
27 |
天智 |
|
|
|
|
|
|
10 |
|
|
|
|
|
|
|
|
|
|
2 |
12 |
28 |
天武 上 |
|
|
|
|
|
|
|
|
|
|
|
|
|
|
|
|
|
|
0 |
29 |
天武 下 |
|
|
|
|
|
|
1 |
|
|
|
|
|
|
|
|
|
|
|
1 |
30 |
持統 |
|
|
|
|
|
|
|
|
|
|
|
|
|
|
|
|
|
|
0 |
계 |
|
72 |
65 |
18 |
29 |
5 |
2 |
59 |
6 |
1 |
3 |
1 |
5 |
3 |
1 |
18 |
4 |
1 |
5 |
298 |
「위지(魏志)」와 「진기거주(晋起居注)」는 신공기(神功紀)에만 보이는데 『일본서기』 편찬자가 중국사서와 중국력(中國曆)이라는 권위와 신용을 빌려 『일본서기』의 편년(編年)을 구성하고자 이용하였다. 이밖에 서명을 밝히지 않고 이용된 중국 문헌은 『사기(史記)』를 비롯해서 80여 종에 달하며, 『일본서기(日本書紀)』의 거의 모든 권에 걸쳐 이용되었다(표-2 참조). 같은 중국 측 문헌이라도 서명을 밝힐 때와 그렇지 않을 때의 이용 목적 및 방식은 큰 차이를 보이고있다.
한편 『일본서기』에는 일서(一書)·일운(一云)·혹운(或云), 그리고 일본(一本)·구본(舊本)·별본(別本)·혹본(或本)의 형태로 구체적으로 알 수 없는 자료도 인용되어 있다(표-1 참조). 『일본서기』의 편찬자들은 어느 것이 올바른 전승인지 옳고 그름을 결정하기 어려울 경우에는 그중에서 가장 옳다고 생각되는 전승으로 일단 본문의 체계를 세우고, 그 밖의 여러 설들은 위와 같은 형태의 주(註)로 망라하고 있다. 『일본서기』는 천황 중심적 사관에 의해 편찬되었기 때문에 많은 기사가 과장·윤색되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편찬자가 후세의 판단을 위해 가능한 한 많은 현존자료를 채록하고자 했고, 원자료를 중시하는 편찬자의 태도도 드러난다.
그러나 이 기록물들은 서명이나 작성자가 명기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고찰하는 데 많은 어려움이 따른다. 이 기록물 가운데는 씨족의 가기(家記) 등 일본국내사료로 추정되는 것이 있고, 한반도 관계 기록물로 판단되는 것
[주017]
도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같은 사건에 대해서 동일 명칭의 분주가 반복해서 인용되고있기 때문에 일서(一書) 또는 일본(一本) 등은 서명을 가지고 있는 기록물처럼 하나의 기록물을 가리키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일본서기』에서는 하나의 사건에 대해서 위의 기록물과 서명이 있는 자료가 내용을 다르게 전하고 있는 경우 우선적으로 서명이 있는 자료를 신뢰한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서명이 있는 자료에 대한 『일본서기』 편찬자들의 신뢰는 두터웠으며
[주018]
, 이것은 이들 자료를 작성한 사람들이 『일본서기』의 편찬에도 참여했음을 시사한다
[주019]
.
이와 같이 인용 문헌에 대한 검토는 『일본서기』의 사료적 성격 및 편찬 과정을 구체적으로 밝히는 데 매우 중요함을 알 수 있다. 여기서는 일본, 한국, 중국 측 기록으로 나누어 정리해 보기로 한다.
1. 일본 측 기록
1) 『제기(帝紀)』와 『상고제사(上古諸事)』『일본서기』는 『고사기』와 달리 편찬 과정을 말해주는 서문 없이 단지 『속일본기』에 국사(國史)를 편찬하도록 하였다는 기사와 『일본기(日本紀)』가 완성되었다는 서술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천무(天武) 10년(681)에 제기(帝紀)와 상고제사(上古諸事)를 ‘기정(記定)’하도록 하였다는 기사가 『일본서기』에 나와 있다. 『일본서기』의 편찬에 사용된 자료에 대한 논의에서 항상 먼저 등장하는것이 바로 『제기』와 『상고제사』이다.
『제기(帝紀)』는 상고(上古)에서 천무에 이르는 왕대기와 같은 것으로, 어명(御名), 황거(皇居), 재위년수(在位年數), 후비(后妃)·황자(皇子)·황녀(皇女), 붕년(崩年)에 관한 사항이 기록된 왕력(王曆)과 같은 것이다
[주020]
. 『상고제사』는 『고사기(古事記)』 서(序)에 보이는 『구사(舊辭)』와 같은 것으로 신화나 설화와 같은 이야기풍의 기록으로서 천황의 치적과 씨족이나 지방의 전승을 포함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주021]
. 『제기』는 『일본서기』 왕대기 구성의 골격을 이루었을 것이며, 『상고제사』는 여러 설화의 바탕이 되었을 것이다
[주022]
.
한편 『일본서기』 추고 28년(620) 시세조에는 소아씨(蘇我氏)의 주도 아래『천황기(天皇記)』와 『국기(國記)』가 기록되었다고 한다. 이 기사는 역사 편찬에 관한 『일본서기』 최초의 기사로 『천황기』는 『제기』와 비슷하며, 『국기』는 각 씨족이 가지고 있는 가전을 정리하여 통합한 것으로 『상고제사』와 같은 것을 모아놓은 책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일본서기』 황극 4년(645) 6월조에는 소아씨가 멸망할 때 소아하이(蘇我蝦夷)가 자살하면서 자신의 집에 불을 질러 진귀한 보물들과 『천황기』 및 『국기』가 불에 타게 되었는데, 선사혜척이 타다만 『국기』를 불 속에서 건져내 중대형황자에게 바쳤다고 한다.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錄)』 서문(序文)에도 이와 비슷한 내용이 보이는데 이것은 선사혜척이 소아씨의 주도 아래 추고 28년 『천황기』와 『국기』 편찬에 관여하였음을 말해준다. 이러한 사실은 결국 『천황기』와 『국기』가 천무 10년 ‘기정’ 사업에서 『제기』와 『상고제사』를 정리하는 데 활용되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말해준다.
2) 『제왕본기(帝王本紀)』『일본서기』 흠명 2년(541) 3월조의 주에 “『제왕본기』에 많은 고자(古字)가 있었는데 찬진하는 사람이 여러 차례 고치고 뒷사람이 또 글을 읽을 때 뜻에 맞춘다고 하여 글자를 고쳐서 옮겨 쓰는 경우가 많아 이미 내용이 뒤섞였다.그래서 전후가 차례를 잃고 형제의 순서가 바뀌었다. 이제 고금의 서적을 살펴서 그 바른 것을 돌아가고자 한다. 일단 알기 어렵게 된 것은 하나의 전거를 기준으로 하고 서로 다른 내용을 가진 것들을 주로써 상세하게 하였다. 다른것도 모두 이에 따랐다.”고 한 기사가 보인다. 이 기사는 『일본서기』의 자료를 취급한 태도에 대해서 지적하고 있는 것인데, 이는 당(唐) 안사고의 『한서(漢書)』 중에 나오는 서례(敍例) 가운데 두세 개의 자구를 바꾼 것이다. 『한서』서례의 의미는 『한서』 전반에 걸쳐서 고자가 많고 옮겨 쓰는 과정에서 잘못이 많다는 것을 지적한 것이다.
『제왕본기』는 『제기』와 용어가 유사하므로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제왕본기』라고 하는 별도의 책이 있었던가의 여부는 단정할 수 없다. 왜냐하면 『한서』의 서례에서 ‘한서구문(漢書舊文)’이라고 한 것을 ‘제왕본기’라고 바꾸었고, 문장도 그대로가 아니라 적절하게 앞뒤를 바꾸어 쓴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흠명기(欽明紀) 이전에도 천황의 자녀에 대한 이설을 기록하고 있는 경우가 있어서 흠명기에 이르러 비로소 이와 같은 범례를 기록한 이유를 이해하기 어렵다. 이와 같은 예는 인현즉위전기에도 보인다. 천황의 실명[휘(諱)]을 기록하면서 다른 모든 천황의 경우에는 이름을 언급하지 않았으나 이 천황에 이르러 홀로 이름을 써 넣는 것은 ‘구본(舊本)’에 의한 것이라고 하였지만, 이미 신무천황기에 실명이 기록되어 있는 경우가 있어 모순이 있다.
이러한 사실은 『일본서기』가 완성된 후에 면밀하게 기사의 일관성을 조사하지 않았다는 점을 반영하는 것이며, 또 한편으로는 편찬 과정의 한 단면을 암시하는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한 사람이 일관해서 기록하였다면 이와 같은 일은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몇 사람이 분담해서 집필하였기 때문에 서로 일치하지 않은 점이 생기게 되었거나, 혹은 집필된 시기가 달라서 이러한 통일성의 결여가 나타나게 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3) 씨족가전(氏族家傳)『일본서기』 천무기를 보면 ‘기정(記定)’ 사업을 전후하여 씨족에 대한 새로운 정책이 나오고 사성(賜姓)이 대대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천무천황은 681년 9월에 각 씨족마다 ‘씨상(氏上)’을 정하여 보고하도록 하였고
[주023]
, 684년에는 씨족들의 사회적·정치적 등급을 확정한 8색의 성을 확정하여
[주024]
씨족들에게 새로운 성을 주었다.
『일본서기』에서 천무천황대에 8색성 질서 안에 편입된 씨족은 174씨이다. 그런데 새로운 씨성 질서 속에 씨족들을 편입시키기 위해서는 그 작업을 위해 기준이 되는 씨족 대장이 필요하였을 것이다. 과거 오랫동안 대화정권에서 활약한 씨족들의 계보나 활약상은 『제기』와 『구사』에 기록되어 있었지만, 새로 등장한 씨족들은 달랐다. 천무조정에서는 이들 씨족에게 자신들의 조상계보나 활약한 이야기를 담은 ‘가기(家記)’, 혹은 ‘가전(家傳)’을 제출하도록 하였을것이다. 이들 씨족들은 계보를 조작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던 것이다.
이후 691년 8월에는 지통천황(持統天皇)이 대삼륜(大三輪) 등의 18씨에게 조상의 ‘묘기(墓記)’를 바치도록 명령하였다. ‘묘기’는 씨족의 기원과 계보, 그리고 공적담과 같은 씨족의 ‘가전’과 같은 것으로 『일본서기』 편찬에 중요한 자료로 이용되었다
[주025]
. 지통조에 ‘묘기’를 제출한 씨족들은 대부분 흠명조 이후 대화 연간에 이르기까지 중요한 신하를 배출하였던 집안이다
[주026]
. 이 가운데 대반(大伴)·기(紀)·물부(物部)씨 등은 계체기와 흠명기의 가야나 백제와의 관련기사에 빈번하게 등장하는 씨족들이다. 지통조의 ‘묘기’ 제출은 『일본서기』 편찬과 관계가 깊으므로, 계체기와 흠명기에 보이는 일본 유력씨족들의 활약담은 이 시기에 제출된 ‘묘기’에 의해 채록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천황가의 치적과 관련된 부분은 취사선택을 당하거나 개변이 이루어졌을 것으로 여겨진다. 특히 씨족들의 대외활동에 관한 전승은 천황가의 치적을 선양하는 데 보탬이 되도록 개변되었을 것이다.
한편 같은 사건기록에서 여러 씨족의 전승이 중복기술 되기도 하였고, 기년(紀年)이 결락되었거나, 서로 다른 역(曆, 예컨대 원가력과 의봉력)에 의한 기년의 차이도 보인다. 고대 한일관계사에 관련된 기사에서 흔히 보이는 모순이나 중복 또는 기년적 착오는 이러한 원사료의 특징이나 편찬과정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4) 공식기록일본 조정의 기록이 언제부터 이루어졌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동서사부(東西史部)가 정부의 기록을 관장하는 곳이었기 때문에 비록 조직적으로 기록을 보존하는 방법은 없었다고 하더라도 기록을 위한 선례로써 혹은 우연히 잔존하게 된 기록이 있었을 것이다.
예컨대 효덕기의 정치개혁에 관한 기술이나, 제명기에 대재부(大宰府)에서 정리하고 있던 외교문서와 같은 것도 편찬에 이용되었던 기록 중 하나였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주027]
. 다만 효덕기의 대화개신에 관한 기술이나 그 이전의 민달·추고기의 ‘임나의 조’라든지, 한반도 삼국과의 외교형식을 둘러싼 이야기등에 많은 개변이 이루어져
[주028]
『일본서기』에 실렸음은 고려해야 한다. 한편 천무·지통기 이후의 기술이 실록과 같은 성격을 보이는 것도 대화조정의 공식기록을 기본자료로 이용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이러한 공식기록은 대화개신 당시 소아씨가 멸망하면서 『천황기』와 『국기』가 불탔고, ‘임신의 난’ 때 대진궁(大津宮)이 폐허가 되면서 많은 부분이 소실되었을 것이다
[주029]
. 이러한 이유 때문에 서명이 있는 자료나 기년을 명확히 알 수 있는 한반도 관련 기록들이 『일본서기』 편찬 당시 더욱 중요시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5) 개인수기(個人手記)·일기일본에서 작성된 개인기록물로는 『이길련박덕서(伊吉連博德書)』, 『난파길사남인서(難波吉士男人書)』, 고려사문도현(高麗寺門道顯)의 『일본세기(日本世記)』가 제명·천지기에 인용되어 있고, 등원겸족(藤原鎌足)의 비문
[주030]
이 보인다. 서명은 명시되어 있지 않으나 후대의 『석일본기』의 인용에 의해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천무기의 임신의 난에 대한 기사는 『안두숙녜지덕일기(安斗宿禰智德日記)』, 『조련담해일기(調連淡海日記)』를 참조해서 기록한 부분이 있다.
먼저 『이길련박덕서』는 제명·천지조에는 외교관으로 활약했으며, 문무조에는 율령찬정에도 참여했던 이길련박덕의 개인기록이다
[주031]
. 『이길련박덕서』는 『일본서기』 제명기에 분주의 형태로 세 군데에 걸쳐 인용되고 있다. 그 내용은 왜국의 제4차 견당사가 제명 5년(659) 7월에 축자(筑紫)에서 출발하여 제명 7년(661) 5월에 귀국하기까지의 왕복과정 및 당에서 있었던 일들에 대한 것이다. 그 내용 중에는 한반도 원정을 앞둔 당이 왜국의 사신단을 장안(長安)에 가둔 사실이나 탐라(耽羅)가 왜국에 처음으로 사신을 파견하게 된 경위 등 중국이나 한반도 자료에는 볼 수 없는 내용도 전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제명 5년(659) 추7월조에는 이길련박덕과 같이 당에 파견되었던 난파길사남인(難波吉士男人)의 기록인 『난파길사남인서(難波吉士男人書)』도 인용되어 있다. 『난파길사남인서』가 『일본서기』에 인용된 유일한 곳이다. 그 내용은 견당사 대사(大使)의 배가 좌초됨에 따라 부사(副使)가 대신 천자를 알현하고 하이(蝦夷)를 바쳤다고 적고 있다. 『이길련박덕서』의 내용과는 달리 자신의 경험담을 기록하지 않았다. 『난파길사남인서』는 『이길련박덕서』와 함께 제명·천지조에 견당사 일원의 수행록 같은 정리된 기록물들이 존재했음을 말해준다.
다음으로 『일본세기(日本世記)』는 고구려 출신의 승려 도현(道顯)에 의해서 집필되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도현은 백제 멸망 전에 왜국으로 건너가 당시 국제사정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왜국 내에서 등원겸족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정치·군사고문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 과정에서 『일본세기』를 편찬한 것으로 여겨진다.
『일본세기』는 『일본서기』의 제명·천지기에 분주(分註)의 형태로 네 군데에 걸쳐 인용되고 있다. 그 내용은 백제의 멸망과 원인, 복신의 풍장 귀국요청, 고구려의 멸망 과정, 그리고 등원겸족의 사망 관련기사이다. 즉 백제의 멸망을 시작으로 7세기 후반 한반도를 둘러싸고 일어난 사건들에 대한 것이다
[주032]
. 『일본세기』에는 중국이나 한반도 자료에는 볼 수 없는 내용도 전하고 있어서 그 사료적 가치가 매우 크다.
이러한 『일본세기』는 『일본서기』에 인용될 때 분주로 인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본문으로도 기술되었다. 『일본서기』 편찬자는 본문을 구성하는 데 용어 및 내용의 통일보다는 『일본세기』의 원문을 더욱 존중하였다. 이러한 『일본서기』의 인용방식과 태도는 비단 『일본세기』뿐만 아니라 서명을 밝히고 있는 자료를 인용할 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으로 대외관계사 부분에서 자주 엿볼 수 있다.
6) 사사연기(寺社緣起)불교관계 기사에는 『원흥사연기(元興寺緣起)』가 가장 많이 이용되었다. 『원흥사연기』는 평안(平安)시대에 집록된 것이지만 「원흥사사탑로반명(元興寺寺塔露盤銘)」이나 「장육광명(丈六光銘)」과 같은 추고조(推古朝) 유문(遺文)이 실려있다. 숭준·추고기의 불교관계기사에 이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밖에 길야비소사(吉野比蘇寺, 흠명기)와 남연판전사(南淵坂田寺, 용명기)에서 불상의 유래를 전하는 기사와 같은 것도 사찰연기에 채록되었을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주033]
.
7) 별권(別卷)『일본서기』 웅략 22년 7월조에는 소위 ‘포도전설(浦島傳說)’을 간략하게 기록한 말미에 “자세한 이야기는 별권에 있다.”고 하였는데 별권이라는 것은 현재 남아 있지 않다. 별권이라고 하였으므로 『일본서기』와 다른 책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이 경우의 별권은 편찬과정에서 별도로 만들어진 것일 가능성이 크며, 『일본서기』 편찬자가 참조했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현존하는 『일본서기』완성기사에는 별도의 존재를 암시하는 어구는 보이지 않기 때문에 어쩌면 어느 시기 편찬계획의 일단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2. 한반도 관련 문헌
1) 백제삼서(百濟三書)『일본서기』에는 『백제기(百濟記)』·『백제신찬(百濟新撰)』·『백제본기(百濟本記)』가 신공기(神功紀)에서 흠명기(欽明紀)에 걸쳐 인용되어 있다. 『백제기』라는 서명은 신공기와 응신기(應神紀), 웅략기(雄略紀)에 보이고, 『백제본기』는 계체기(繼體紀)와 흠명기에, 『백제신찬』은 웅략기와 무열기(武烈紀)에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일본서기』의 분주에 그 출전을 명기한 경우만을 든 것이고
[주034]
, 실제로는 그보다 훨씬 많은 본문기사에서 인용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기록을 인용하고 있는 권에서는 백제뿐만 아니라 신라·가야 등 한반도 관계기사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어서 일본 측 사료가 부족한 결함을 보충하기 위해서 인용한 것으로 생각된다.
백제삼서는 『일본서기』에만 기록되어 있고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어서 그 성격에 대한 여러 가지 견해가 제시되고 있다
[주035]
. 다만 백제의 기록이 일본에 대해서 ‘귀국(貴國)’ 등의 경칭어를 비롯하여 ‘천황(天皇)’, ‘일본(日本)’이라는 새로운 명칭을 사용하고 있는 점을 보면, 이러한 기록은 663년에 백제가 멸망한 후 많은 백제인 망명자가 일본으로 건너와 일본의 관인이 되면서 이들이 가져온 기록을 근거로 백제인이 편찬하였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들 기록의 백제왕력 등은 「무령왕지석」이나 『삼국사기』의 관련기사들과 대부분 일치를 보이고 있어 비교적 신빙성이 높다. 이외에도 일본 내의 백제계 후예씨족들과 대외관계에 종사한 일본 씨족들에 대한 정보도 제공하고 있다. 따라서 『일본서기』 편찬진의 백제삼서에 대한 신뢰는 계체기에서 『백제본기』의 기년을 택하고 있는 것처럼 매우 두터웠다.
그러나 이 기록들을 역사복원의 자료로 이용하기 위해서는 편찬되는 과정이나 『일본서기』에 인용되는 과정에서 많은 윤색과 개변이 이루어졌음을 고려해야 한다. 일본 율령용어의 사용이나 천황에 영합하는 기술, 백제의 가야정책과 그 역사에 대해 기록한 부분에서 현저하게 개변이 이루어졌다. 백제삼서의 인용과정을 검토해 보면
[주036]
, 『일본서기』 편찬방침 및 7~8세기 일본의 세계관, 역사의식을 엿볼 수 있다.
한편 웅략 21년에는 『일본구기(日本舊記)』가 분주로 인용되어 있는데 그 내용은 백제관련 기사이다. 『일본구기』는 다른 곳에 전혀 보이지 않아 그 사서적 성격에 대한 연구가 전혀 없다. 단 내용에 구마나리의 위치를 임나국 하치호리현의 별읍으로 기록하여 웅략의 하사로 조작했던 본문에 대한 보완적인 성격의 기록으로 볼 수 있다. 현(縣)과 같은 율령적 용어의 사용이나 백제의 새로운 도읍을 천황이 하사했다는 논리 등은 위의 백제삼서와 비슷한 사서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주037]
.
2) 가야 측 자료현재 가야에 대한 기록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그리고 『일본서기』에 보인다. 그러나 한국 측 문헌에는 단편적인 기록밖에 보이지 않는 반면, 『일본서기』에는 한국 측 문헌에서 찾아볼 수 없는 가야 국명이나 인명, 그리고 지명 등 주목할 만한 내용을 담고 있다. 많은 부분이 백제삼서, 특히 『백제본기』가 인용된 곳에서 보이지만, 가야와의 교류에서 활약한 근강씨(近江氏)나 길사계(吉士系) 씨족들의 전승에도 단편적으로 나타난다.
백제삼서가 백제멸망 후 망명백제인과 관계가 있다면 『일본서기』 가야관련 기록 역시 망명가야인들의 기록물일 가능성을 전혀 배제할 수 없다. 그러나 현재 『일본서기』에 보이는 가야관련 기사는 백제관련 기사와 달리 그 출처를 명확히 확인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 대부분 백제 및 신라와 같이 등장하며, 이외에 일본 측 씨족들의 대외교류 활약 속에서 일본적 관념으로 포장되어 기술되었다. 또한 『일본서기』 편찬단계에서 활약한 가야계 인물이나 씨족 등의 모습도 찾을 수 없다. 이러한 점은 가야 측 원자료가 『일본서기』에 인용되기 이전에 백제삼서 등의 백제 측 문헌에 정리되었거나, 일본 측 씨족가전의 자료가 되었음을 말해준다. 한편으로는 『일본서기』 편찬단계에서 대(對)가야 관련씨족 전승과 함께 기사로 구성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이는 계체 23년 4월조 기사에 분주로 인용된 ‘일본(一本)’에서 구사모라(久斯牟羅)라는 가야 지명을 언급하고 있는데, 가야 측 원자료가 ‘일본(一本)’이라는 형태로 남아 전해졌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그러나 이러한 자료도 가야에서 정리된 자료인지, 일본 내에서 정리된 것인지 명확히 알 수 없다.
3. 중국 측 문헌
『일본서기』에는 본문의 문장을 구성하기 위해서 80종 이상의 중국문헌이대부분의 권에 걸쳐 이용되었다
[주038]
. 그러나 사실 그 자체를 기록하기 위해서 사용된 문헌은 「위지」와 「진기거주」뿐이다. 「위지」는 신공기 39·40·43년조에 인용되어 있는데 이른바 비미호(卑彌呼)를 신공황후로 간주한 것으로 보이며
[주039]
, 이 기사들 이외에는 다른 기사가 없다. 또 「진기거주」도 역시 신공기 66년조에 보이며 마찬가지로 다른 곳에 인용되어 있지 않다. 두 경우 모두 일본관계기사를 그대로 본문으로 인용하고 있다. 이에 해당하는 일본 측 기사가 없었던 것은 분명해 보이며, 중국사서와 중국력의 신용과 권위를 빌려 『일본서기』 신공기 기년을 설정하였다. 이렇게 설정된 신공기의 기년은 『일본서기』전체 기년구성에 중요한 중심축으로 활용되었다.
「위지」와 「진기거주」 이외의 중국문헌들은 『일본서기』의 문장을 윤색하거나 기록이 없는 부분을 보충하기 위해서 이용되었다. 그동안 『일본서기』 ‘출전론’의 연구 성과로 『일본서기』 문장 중에는 『사기』, 『한서』, 『후한서』, 『삼국지』, 『양서』, 『수서』, 『예문유취』, 『문선』, 『금광명최승왕경』, 『회남자』, 『당고조실록』 등을 참고로 작성된 것이 많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러한 편찬태도는 『일본서기』에만 있는 특색이고 그 이후의 사서인 『속일본기』 등에서는 아직 지적된 바가 없다. 『속일본기』 등의 기사는 기본적으로『외기일기(外記日記)』 등의 정부기록과 조칙 같은 그 당시의 것이므로 전체적으로 실록의 자격을 갖추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일본서기』는 일본과 관계없는 중국문헌의 내용을 상당히 길게 인용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편찬자의 편찬태도와 『일본서기』의 사료적 성격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표 2 『일본서기』에 인용된 중국문헌표
구분 |
『史記』 |
『漢書』 |
『後漢書』 |
『三國志』 |
『梁書』 |
『隋書』 |
『藝文類聚』 |
『文選』 |
『金光明最勝王經』 |
『淮南子』 |
『唐實錄』 |
『東觀漢記』 |
1·2 神代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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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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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神武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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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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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綏靖~開化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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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崇神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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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垂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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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景行·成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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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仲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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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神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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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應神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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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1 仁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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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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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履中·反正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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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允恭·安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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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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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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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雄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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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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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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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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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淸寧·仁賢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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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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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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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6 武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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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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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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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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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繼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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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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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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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安閑·宣化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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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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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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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欽明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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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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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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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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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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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敏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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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用明·崇峻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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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推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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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舒明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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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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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皇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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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孝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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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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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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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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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齊明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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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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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天智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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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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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29 天武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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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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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持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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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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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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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천황을 포함한 인물들을 묘사한 경우, 중국문헌의 원문을 그대로 인용하고 있다. 어구를 수정한 부분도 보이지만 전체적인 내용에는 큰 차이가 없다. 이러한 경우는 어느 정도까지 당시 일본의 상황과 부합되는 것인지 의문스러운 점이 적지 않다. 중국사서의 체제를 보면 한결같이 이름, 부모, 성장기에서 성년기까지의 행적과 그 인물에 대한 성격을 기록하고 있으므로 중국사서에 필적하는 사서를 만들고자 했던 편찬자가 기재할 사료가 없는 경우 별도의 방법으로 공백을 채운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해서 마음대로 인물상을묘사할 수는 없었을 것이며 중국식 표현이 갖는 과장과 추상적인 어구를 열거함으로써 가장 간단한 해결방법을 찾을 수 있었을 것이다.
이렇듯 『일본서기』 문장을 윤색하고 기록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인용한 중국 문헌은 많으나, 이들의 많은 부분이 『예문유취(藝文類聚)』를 이용하여 간접적으로 인용하였다
[주040]
. 당대의 문인이라고 해도 이른바 경전의 용례를 금방 생각해내서 적절하게 구사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이 때문에 중국의 경우 육조시대 이래 유서(類書)가 많이 만들어졌다. 『수문전어람(修文殿御覽)』, 『예문유취』, 『북당서초(北堂書鈔)』 등이 그러한 예이다. 이러한 유서를 참고하면 일일이 원전을 암기해야 하거나 다시 찾을 필요 없이 전거가 있는 어구를 활용할수 있다.
여기서 『일본서기』 편찬자가 『일본서기』의 문장을 작성할 때 특정한 중국문헌 그 자체를 참고하였는지 아니면 그것을 포함하고 있는 유서를 참고하였는지의 여부가 다시 문제가 된다. 만약 짧고 고립되어 있는 문장일 경우에 문장에 차이가 없으면 둘 중에 어느 쪽인지를 결정하기 더욱 곤란하다. 그러나 많은 문헌이 전거로 사용되었고 그것들이 『예문유취』 등과 동일하거나 근접할 경우에는 그 유서에 의거한 것이라고 판단되고 있다
[주041]
.
유서 이외의 단행본인 경우에는 하나의 예로는 알 수 없지만, 같은 권의 다른 부분에서도 동일한 문헌으로부터 인용을 했다든가, 혹은 인접한 다른 권에 같은 문헌으로부터의 인용이 있는 경우에는 여러 문헌에서 적절한 어구를 취하여 사용하였다기보다는 동일한 문헌에서 한꺼번에 많은 어구나 문장을 인용하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즉 어떤 권의 담당자가 주로 어떤 특정한 문헌 중에서 적절한 어구를 집중적으로 인용하였다고 볼 수 있다. 편찬자의 중국전적에 대한 소양이나 한문 구사능력을 가늠할 수 있는 자료가 될 수 있는 것으로 ‘구분론’과 연결시켜 볼 수도 있다.
한편 일본과 관계된 기록을 담고 있는 중국문헌인데도 인용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 『송서(宋書)』의 경우 왜5왕 관련 기사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 또한 『일본서기』 추고기의 대중관계 기사와 유사한 내용이『수서』에도 실려있는데 전적으로 묵살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을 미루어 보면 중국문헌의 인용방식과 백제삼서를 포함한 다른 문헌의 인용방식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중국사서의 체제를 모범으로 하면서도 거기에 기록된 사실을 무시하고 있는 것은 천황중심사관이라는 『일본서기』 편찬방침과 어긋나기 때문일 것으로 여겨진다.
이처럼 『일본서기』 편찬에 이용된 중국문헌을 파악하는 작업은 『일본서기』 문장구성 과정에 대한 해명뿐만 아니라 그 작성 시기까지 아는 데 도움이 된다. 좋은 예로 흠명 13년의 불교전래에 관한 기사를 들 수 있다. 이 해 백제 성왕이 일본 천황에게 보낸 상표문의 출전에 관해서 1891년 12월에 간행된 『표주일본기(標注日本紀)』에서는 그중 42자가 『금광명최승왕경(金光明最勝王經)』 「여래수량품(如來壽量品)」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 『일본서기통석(日本書紀通釋)』에서도 『금광명최승왕경』을 인용하면서 이를 취사선택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나아가 견당승려 도자(道慈)가 『일본서기』 불교전래기사와 관계가 깊을 것이라는 견해
[주042]
가 있는데 이러한 시각은 현재까지 인정되고 있다. 결국 이 기사는 『일본서기』 완성 직전에 서술된 것이라고 할 수 있고 『일본서기』 편찬과정의 한 단면을 구체적으로 잘 보여주고 있다.
4. 기타–서명을 밝히고 있지 않는 자료
『일본서기』에는 전권에 걸쳐서 ‘일서(一書)’, ‘혹본(或本)’ 등이 인용되어 있다. 특히 신대권에서 많이 나타나는데, 하나의 본문에서 많은 경우에는 ‘일서’를 11개까지 들고 있는 예도 있다. 앞의 표-1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이러한 자료들은 『일본서기』 권14 웅략기를 경계로 그 이전은 서(書) 계통의 기록물이 인용되었으며, 웅략기부터는 본(本) 계통의 기록물이 인용되었다. 서 계통과 본 계통의 기록물이 웅략기를 경계로 구분되어 인용된 이유에 대해서 아직까지 명확하게 밝혀진 바가 없다
[주043]
.
다만 단순히 『일본서기』 편찬 과정에서 수집된 자료로서 특정한 명칭이 없어서 『일본서기』를 담당·편집한 사람에 따라 다르게 명명된 것일 수 있고
[주044]
, 『일본서기』의 편찬이 진행됨에 따라 여러 차례 수정을 거쳐 성립한 교본(橋本)이 ‘일서(一書)’ 혹은 ‘일본(一本)’ 등으로 전해지게 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주045]
. 대체로 서(書) 계통의 기록물은 신대(神代)를 시작으로 신화나 신(神)·왕족(王族)의 계보를 담고 있다
[주046]
. 그리고 본(本) 계통의 기록물은 정부관계기록이나 씨족전승 그리고 한반도 관계 내용을 담고 있다
[주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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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계통의 ‘일본(一本)’과 ‘혹본(或本)’ 가운데는 한반도 관계 용어와 더불어 사실성 높은 내용을 담고 있는 것도 있어 주목된다. 먼저 ‘일본(一本)’은 『일본서기』 웅략기부터 제명기까지 모두 29곳에 걸쳐 인용되어 있는데 이 가운데10곳이 웅략기에 보인다. 여기서 한 곳만 신라관련 내용으로 나머지는 대왕가 인물과 노래가사에 대한 보충설명이다. 청녕·선화기와 무열기도 노래가사에 대한 보충설명이다.
이에 비해 계체기와 흠명기는 대부분 한반도 관계 기사에 분주로 인용되어있다. 계체기의 경우 계체 20년 추9월조부터 계체 24년 추9월 사이에 7곳이 보인다. 7곳 가운데 4곳이 가야, 2곳은 신라, 나머지 1곳은 일본 국내 전승이다. 흠명기에는 ‘일본(一本)’이 흠명 15년 12월조를 시작으로 흠명 23년 8월조까지 5곳에 걸쳐 분주로 나온다. ‘일본(一本)’의 내용은 성왕의 사망을 비롯하여 신라와 백제의 관계, 대반씨와 고구려 관계, 임나 멸망에 대한 내용이다.‘일본(一本)’의 내용이나 그 본문은 신라인명이나 가야인명이 많이 나오고 그 표기 방법도 『백제본기(百濟本記)』와 차이를 보이고 있다
[주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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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본(或本)’은 『일본서기』 웅략기부터 천지기까지 모두 59곳에 걸쳐 인용되어 있는데 ‘일본(一本)’과 마찬가지로 『일본서기』 본문의 보충 설명 또는 본문의 이설(異說)을 제시하는 분주로 인용되었다
[주049]
. 그 내용은 왜국(倭國)의 국내기사와 대외관계기사, 가전류(家傳類) 성격을 지닌 기록 등 다양한 내용을 전하고 있다
[주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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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략기에는 길비씨(吉備氏) 관련 기사, 청녕·계체·민달·용명·황극기의 경우는 대왕 및 대왕가 관련 기사의 보충설명이 대부분을 이루고 있다. 그런데 효덕기에는 박시진조전내진(朴市秦造田來津) 등 씨족들의 모반기사 및 견당사 일원의 관련 기록이 주를 이루고 있다. 효덕기 ‘혹본(或本)’은 왜국 자체의 대내외 기록물로 보이며, 7세기 중반 왜국 내에서도 기록 정리가 이루어졌음을 말해준다.
『일본서기』에서 ‘혹본’이 가장 많이 인용된 곳은 제명기와 천지기이다. 모두 23곳에 걸쳐 인용되어 있는데 그중에서 제명 4년(658) 시세조와 제명 6년 9월조를 포함하여 8곳이 백제 관련 기록이다. 이 중에서 제명 4년 시세조와제명 6년 9월조 ‘혹본(或本)’에는 ‘노수리지산(怒受利之山)’, ‘도도기류산(都都岐留山)’ 등과 같은 백제자음가명(百濟字音假名)이 보이고 있고, 백제의 왕성을 ‘아왕성(我王城)’이라고 표현한 점 등을 볼 때, 망명백제인의 기록임을 알 수 있다.
이렇듯 ‘일본(一本)’과 ‘혹본(或本)’의 내용을 보면 기사의 성격 등은 대체로 비슷하다. 따라서 내용의 차이나 사료적 성격 차이로 인해 ‘일본(一本)’이나 ‘혹본’으로 구별되어 인용된 것은 아닐 것으로 판단된다. 다만 ‘혹본’ 쪽이 ‘일본(一本)’보다는 정리시기가 늦었던 것은 아닐까 한다. 왜냐하면 『일본서기』에서 ‘혹본’이 가장 많이 인용되어 있는 제명·천지기에는 ‘일본(一本)’이 전혀 보이지 않으며, 더구나 망명 백제인의 기록으로 보이는 곳도 있기 때문이다. 또한 웅략(雄略) 8년 춘2월조에 ‘일본(一本)’과 ‘혹본’이 동시에 인용되고 있기 때문에
[주051]
『일본서기』 각 기별 편찬차가 이들 자료를 인용하는 단계에서 명명된 것도 아닐 것이다. 따라서 지금으로서는 ‘일본’과 ‘혹본’은 정리된 시기가 다르고『일본서기』 편찬에 인용될 때 이미 구별된 자료로서 존재해 있었다는 점만 추정 가능할 뿐이다
[주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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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구본(舊本)’은 『일본서기』에 웅략 2년(458) 추7월조를 시작으로 인현전기(仁賢前紀, 487), 흠명(欽明) 23년(562) 8월조, 민달(敏達) 12년(583) 시세조, 황극(皇極) 4년(645) 춘정월조 등 모두 5곳에 걸쳐 나온다. 그 내용은 국내전승과 대외 관계 내용을 모두 담고 있다
[주053]
. 일찍이 『일본서기(日本書紀)』에 인용된 ‘구본(舊本)’을 소아마자(蘇我馬子)가 작성하였다고 전해지는 『구사본기(舊事本紀)』로 보는 견해도 있었지만
[주054]
, 『구사본기』는 『일본서기』 및 기타 다른 자료를 참고로 평안(平安)시대에 만들어졌다는 것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주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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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구본’에는 대반씨(大伴氏)와 관련된 기록이 많이 보이지만, 계체·흠명기에서 대반씨 가기(家記)로 추정되는 기록이 ‘일본(一本)’으로도 인용되고 있기 때문에 어느 한 씨족 관련 전승으로 보기는 어렵다. 다만 ‘구본(舊本)’은 명칭이 시사하듯이 ‘일본(一本)’이 정리되기 이전의 단편적인 자료였을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다.
Ⅲ. 일본의 『일본서기』 연구사
1. 나량(奈良), 평안(平安)시대의 『일본서기』 강서
『일본서기』가 편찬된 직후인 양로(養老) 5년(721)부터 강보(康保) 2년(965)까지 일본 조정에서는 모두 일곱 차례 강서를 하였다. 그것은 13세기 후반에 복부겸방(卜部兼方)이 편찬한 『석일본기(釋日本紀)』 개제(開題)에 인용된 「강보(康保) 2년(965) 외기감신(外記勘申)」의 「일본기강례(日本紀講例)」를 통해 알 수 있다. 「일본기강례」에서는 강서의 연월일과 박사 이름, 강서 장소, 경연(竟宴) 연월일, 경연가(竟宴歌)의 서자(序者), 가인수(歌人數) 등을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양로 5년(721)의 강서에 관해서는 자료가 없었던 듯, 양로 5년이라고만 적고 있을 뿐 월일이나 박사 이름은 적고 있지 않다. 『속일본기(續日本紀)』양로 5년조에도 『일본서기』 강서에 관한 내용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석일본기』나 『일본서기』의 고사본에서 만엽가명(萬葉假名)을 이용하여 일본어로 읽으면서 「양로(養老)」 또는 「양로설(養老說)」이라고 주를 달고 있는 곳이 있는데, 만엽가명(萬葉假名)을 이용한 방법이 나량(奈良)시대의 것으로 인정되고 있어서 양로년간(養老年間)에 강서가 있었음은 확실하다
[주056]
. 강의를 담당한 것은 『일본서기』 편찬에 참가한 사람이었을 것이지만 누가 강의를 담당하였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주057]
. 『일본서기』를 편찬한 다음해에 일본조정에서 즉각 강서한 것은 『일본서기』가 완성된 것을 조정의 신하들에게 알리기 위한 것이었다. 이때『일본서기』를 일본어로 읽었고, 이때 읽은 것을 필기한 것이 「양로」 또는 「양로설」로 남게 된 것이다
[주058]
.
양로 5년 이후 다시 『일본서기』를 강의한 것은 차아(嵯峨)천황 때이다. 「일본기강례」에서는 단지 홍인 3년(812)이라고만 적혀 있으나, 『일본후기(日本後紀)』 홍인 3년 6월 무자조에서는 이 날 참의(參議) 종4위하 기조신광빈(紀朝臣廣濱), 음양두(陰陽頭) 정5위하 아배조신진승(阿倍朝臣眞勝) 등 10여 인에게 「일본기(日本紀)」를 읽도록 하였는데, 산위 종5위하 다조신인장(多朝臣人長)이 강서를 담당하였다고 적고 있다. 홍인강서(弘仁講書)는 외기조사(外記曹司)에서 홍인4년까지 이어졌다. 이 홍인강서 때부터 훈점(訓点)을 기입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때의 훈독법은 상당히 자유로워 문맥에 따라 읽는 법이 바뀌었다.
승화강서(承和講書)는 승화(承和) 10년(843) 6월부터 다음해 6월까지 이어졌다
[주059]
. 이때는 고사(古事)를 잘 아는 산위 정6위상 관야조신고년(菅野朝臣高年)이내사국(內史局)에서 「일본기(日本紀)」를 강의하였고 참의 자야정주(滋野貞主)와 문장박사 춘징선승(春澄善繩) 등이 강서에 참석하였다.
원경강서(元慶講書)는 원경(元慶) 2년(878)부터 원경 5년(881) 6월까지 선양전(宣陽殿) 동상(東廂)에서 이루어졌는데, 이때 강서의 형식과 내용이 완성되었다. 우선 학식자를 박사(博士), 도강(都講), 상복(尙復) 등으로 임명하여 강서를 담당하게 하였다. 이때는 박사 대학조교(大學助敎) 선연애성(善淵愛成), 도강 대내기(大內記) 도전양신(島田良臣), 명경생(明經生), 기전생(紀傳生) 3~4명이 강서를 담당하였고, 강서에는 태정대신 등원기경(藤原基經)을 비롯한 관리들과 화산승정(花山僧正) 등이 참석하여 활발한 토의를 하였다. 그리고 『일본서기』 전체 30권의 강서가 끝난 후 원경 6년 8월에 시종국(侍從局) 남쪽의 우대신(右大臣) 조사(曹司)에서 경연(竟宴)을 거행하였다. 이 경연에서는 참가자들이 『일본서기』 속의 천황과 신하를 주제로 한 화가(和歌)를 만들어 대가소(大歌所)의 어금사(御琴師)의 왜금(倭琴) 반주에 맞추어 낭송하였다. 경연이 끝난 후 강서를 담당한 박사, 도강, 명경생, 기전생 등에게 녹을 주었다.
연희강서(延喜講書)는 연희(延喜) 4년(904) 8월부터 연희 6년(906) 10월까지이루어졌다. 이때 강서를 담당한 것은 박사 대학두(大學頭) 등원춘해(藤原春海), 상복(尙復) 학생 갈정청감(葛井淸鑑)과 시전부공망(矢田部公望), 등원충기(藤原忠紀)였다. 참석자의 이름은 전하고 있지 않지만, 대신 이하 관리들이 참석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경연은 연희 6년 12월에 시종소(侍從所)에서 거행되었다.이 연희강서의 경연과 승평강서(承平講書)의 경연 때 낭송했던 화가(和歌)는 『일본기경연가(日本紀竟宴歌)』로 현재 남아 있다.
승평강서는 승평(承平) 6년(936) 12월부터 천경(天慶) 6년(943) 9월까지 선양전(宣陽殿) 동상(東廂)에서 이루어졌다. 이때는 박사 아파권수(阿波權守) 시전부공망(矢田部公望)과 상복(尙復) 귤중일(橘仲逸)이 강서를 담당하였다. 경연은 천경 6년 12월에 시종소에서 거행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강보강서(康保講書)는 강보(康保) 2년(965) 8월에 시작되었지만 언제 끝났는지, 이때 참석자가 누구였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강서를 담당한 것은 승평강서에서 상복(尙復)이었던 귤중일이었다. 그는 이번에는 박사가 되어 선양전(宣陽殿) 동상(東廂)에서 『일본서기』를 강의하였다. 이후 더 이상 일본 조정에서『일본서기』 강서를 실시한 사례는 보이지 않는다.
양로강서(養老講書)부터 강보강서까지 모두 일곱 차례에 걸쳐 박사들이 『일본서기』를 강의한 내용은 『사기(私記)』라는 이름으로 기록되었고, 그중 일부 내용이 현재 일본에 남아 있다. 그 내용은 『일본서기사기(日本書紀私記)』라는 성립연대 미상의 책[잔권(殘卷)은 갑을병정(甲乙丙丁)으로 모두 네 종이 존재한다.]
[주060]
이나 『석일본기』에 주(註)로 수록되어 있다. 따라서 그 내용을 통해 나량, 평안(平安)시대의 『일본서기』에 대한 연구를 짐작할 수 있다. 강서를 담당한 박사들은 『일본서기』의 사서적 성격에 대해서는 별로 언급하지 않았다. 이들은 중국의 훈고학자와 마찬가지로 훈독(訓讀), 어의(語義) 등에 대한 실증적인 설명에 주력하여, 한문으로 서술된 『일본서기』를 일본어로 읽어내려고 하였다
[주061]
.이것은 불교경전이나 한적을 읽을 때에 한자음으로 읽었던 것과 방법과 달랐다
[주062]
.
『일본서기』는 편찬할 때에 이미 일본어로 읽도록 하기 위한 방법이 고안되어 있었다. 즉 『일본서기』에는 314개의 훈주가 들어있는데, 이 경우는 어떻게 읽으면 좋을지 모르는 때에 일본어로 그 한자의 읽는 방법을 나타낸 것이다
[주063]
.
그리고 강서를 통해 『일본서기』 본문을 일본어로 읽는 모범이 만들어졌다.이러한 평안시대의 훈독의 결과는 평안 중기의 암기본(岩崎本)을 비롯하여 전전본(前田本), 도서료본(圖書療本), 북야본(北野本)과 같은 가점(加點)이 보이는『일본서기』 필사본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지금 『일본서기』의 훈독은 여기에 보이는 고훈(古訓)을 표준으로 하고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일본서기』강서는 일본의 사학 연구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강서 이외에 따로 본격적으로 『일본서기」를 연구한 예는 보이지 않지만, 평안시대에 『일본서기』의 기년에 대해 혁명설을 가지고 언급한 사람도 있었다. 삼선청행(三善淸行, 847~918)은 『일본서기』의 기년에 대해 신유혁명설을 가지고 설명하였다. 그는 창태(昌泰) 4년(901)에 조정에 『혁명감문(革命勘文)』을 제출하여 『역위(易緯)』에 따르면 이 해가 신유혁명의 해이므로 우대신 관원도진(菅原道眞)을 사직하도록 하고 연호를 바꾸도록 요구하였다. 그는 『혁명감문』에서 『역위』의 정현(鄭玄)의 해석에 맞추어 신유혁명설을 주장하면서 『일본서기』의 신무천황 원년이 신유년(기원전 660)인 것은 1부(1320년) 혁명이 시작되는 때이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그로부터 1320년 후인 제명천황 6년(660)에 1부 혁명이 끝난다고 하였다
[주064]
.
9세기 초에는 『고사기』나 『일본서기』에 보이지 않는 자신들만의 전승을 서술하려는 씨족들의 움직임이 나타났다. 대동(大同) 2년(807)에는 재부광성(齋部廣成)이 『고어습유(古語拾遺)』를 저술하여 기부[忌部, 재부(齋部)]씨가 일본 조정의 제사에서 중신(中臣)씨와 함께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음을 주장하였다. 기부씨가 신사(神事)에 관련되었던 유래를 설명하여 기부씨가 신사 제사에서 배제된 것에 항의하고자 한 것이었다.
9세기에는 『선대구사본기(先代舊事本紀)』(10권)가 등장하였다
[주065]
. 이 책의 서문에서는 추고(推古)천황 28년에 섭정 성덕태자(聖德太子)와 대신 소아마자(蘇我馬子)가 천황의 명에 따라 선대구사(先代舊事), 상고국기(上古國記), 신대본기(神代本紀), 신기본기(神祇本紀), 천손본기(天孫本紀), 제왕본기(諸王本紀), 신련본기(臣連本紀), 반조국조백팔십부공민본기(伴造國造百八十部公民本紀)를 저술하던 도중에 성덕태자가 죽어서 그때까지 완성된 신황계도(神皇系圖) 1권과 선대국기(先代國記), 신황본기(神皇本紀), 신련반조국조본기(臣連伴造國造本紀) 10권만을『선대구사본기』라는 이름으로 펴내었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선대구사본기』에는 『일본서기』를 바탕으로 『고사기(古事記)』, 나아가 9세기 초에 저술된 『고어습유(古語拾遺)』의 문장까지 들어 있다. 따라서 이 책은 9세기 초 이후에 나온 책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권5 천손본기(天孫本紀)에는 미장(尾張)씨와 물부(物部)씨의 독자적 전승이 보이고, 권10 국조본기는 오래된 자료에 의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저자는 물부씨 계통의 사람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전체 10권 중에서 1권부터 6권까지는 신대(神代), 7권부터 9권까지는 신무(神武)천황부터 추고천황까지를 천황의 계보, 10권은 국조(國造)를 중심으로 서술하고 있다. 『선대구사본기』는 평안시대에서 중세에 걸쳐 『일본서기』를 읽을 때 갖추어야 할 책으로 중시되었고, 출전으로서도 『일본서기』 이상으로 중시되었으나 근세에는 위서(僞書)로 여겨지게 되었다
[주066]
.
11세기 말에는 『부상략기(扶桑略記)』(30권)가 등장하였다. 이 책은 신무천황부터 굴하(堀河)천황 관치(寬治) 8년(1094) 3월 2일까지의 일본 역사를 간략하게 한문 편년체로 서술하여 육국사(六國史)의 초본(抄本)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또한 불교관련 내용에 역점을 두어 서술하고 있어 일본 불교의 약사(略史)이기도 하다. 『본조서적목록(本朝書籍目錄)』에서는 저자를 「아자리 황원초(皇圓抄)」라고 적고 있는데, 황원(皇圓, 1074~1169)은 등원(藤原)씨 출신의 천태종승려였다.
평안시대에 천태종(天台宗)과 진언종(眞言宗) 교단에서는 불(佛)과 신(神)의 관계를 합리적으로 설명하고자 하여, 불(佛)이 임시로 신(神)이 되어 나타났다고 하는 본지수적설(本地垂迹說)을 주장하였다. 이는 불교가 우위에 서서 그 주도하에 신기(神祇) 세계를 포섭하고 통합해 가려는 적극적인 논리였다
[주067]
. 10세기말 등장한 『왕생요집(往生要集)』에서는 왕권과 세속세계를 향해 불(佛)의 세계가 신기(神祇)의 세계보다 상위에 있음을 논리화하는 것에 성공하였다. 신도가(神道家)와 신불습합적인 현밀(顯密)불교교단의 승려들은 『일본서기』를 교의(敎義)의 원천으로 존중하여 『일본서기』 신대권을 ‘신전(神典)’으로 여겼다. 이들은 각종의 신도서(神道書)를 저술하여 유통하였다.
2. 일본 중세의 『일본서기』 연구
강보강서(康保講書) 이후 일본 조정에서 『일본서기』의 강서는 더 이상 없었지만, 귀족사회에서 『일본서기』는 계속 읽혔다. 그리고 원정기(院政期)에는 후백하천황(後白河天皇)의 측근이었던 신서(信西)가 1153년경 『일본기초(日本紀抄)』를 저술하였다. 신서[信西, 속명 등원통헌(藤原通憲)]는 대강(大江) 가문을 중심으로 한 박사 가문의 일본서기학을 계승하여 『일본서기』를 연구하였다. 그는『일본서기』의 훈독에 그치지 않고 자구를 해석하였다. 이런 점에서 신서(信西)의 『일본기초』는 『일본서기』에 대한 최초의 주석서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은『일본서기』에 나오는 300여 개의 어휘를 상권[천(天), 지(地), 초목(草木), 신(神), 인(人)의 5부(部)], 하권[물명(物名), 소명(所名), 사(詞), 조수어충(鳥獸魚虫)의 4부]으로 나누어 분류하고, 그에 해당하는 『일본서기』의 기사를 약술하고 그 뜻을 적은 유서적(類書的)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항목의 대부분은 신대권(神代卷)에서 취한 것으로 설화적인 내용이었다. 마치 「일본서기설화색인」과도 같다.
겸창(鎌倉)시대에는 복부겸방(卜部兼方, 생몰년 미상)이 『석일본기(釋日本紀)』를 펴내었다
[주068]
. 『석일본기』는 복부겸문(卜部兼文, 생몰년 미상)이 문영(文永) 11년(1274)부터 다음해 건치(建治) 원년(1275)에 걸쳐 전(前) 관백(關白) 일조실경(一條實經)과 그 아들인 섭정(攝政) 가경(家經) 등을 대상으로 강의한 노트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 강의 노트를 복부겸문의 아들 복부겸방이 28권으로 편집한 것이다. 정안(正安) 3년(1301)에는 사본이 등장하고 있으므로, 1275년 이후 1301년 이전에 완성되었을 것이다. 복부(卜部)가(家)는 원래 중신(中臣)씨 밑에서 복점(卜占)을 담당하던 집안이었으나, 겸방의 집안은 경도(京都)의 평야(平野)신사, 길전(吉田)신사의 사가(社家)였다. 겸방의 할아버지 겸뢰(兼賴)와 아버지 겸문은 모두 고전적(古典籍)에 조예가 깊었다. 복부가에는 평안시대 초기 이래 조정에서 행해지고 있던 『일본서기』 강독의 기록인 「일본기사기(日本紀私記)」가 대대로 전해지고 있었던 듯하다. 겸방은 조정에 출사하여 신기권대부(神祇權大副), 산성수(山城守) 등의 관직을 역임하고 섭관가인 일조가(一條家)에도 봉사한 사람이다. 그가 『석일본기』를 펴냄으로써 복부 가문은 『일본서기』 연구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이어갈 수 있게 되어, ‘일본기(日本紀) 집안’으로 불리게 되었다.
『석일본기』는 개제(開題), 주음(注音), 난탈(亂脫), 제황계도(帝皇系圖), 술의(述義), 비훈(秘訓), 화가(和歌)로 나누어 『일본서기』의 성립 과정과 본문 내용, 자구의 해석, 강독법, 화가 등에 대해 검토하였다. 이 책에서는 여러 종류의 「일본기사기(日本紀私記)」뿐만 아니라 『풍토기(風土記)』, 『상궁기(上宮記)』, 『안두지덕일기(安斗智德日記)』, 『조련담해일기(調連淡海日記)』, 『고어습유(古語拾遺)』, 『천서(天書)』, 『선대구사본기(先代舊事本紀)』 등의 많은 고서와 한적 등을 참조하여『일본서기』의 내용을 고증하고 있다. 새로운 설을 제시하기보다는 그전까지의 설을 잘 정리하여 『일본서기』의 훈고학적 연구를 집대성하였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전국(戰國)시대에 없어져 버린 많은 고서의 일문(逸文)을 포함하고 있어 자료적 가치가 크다. 그 후 『일본서기』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석일본기』를 필사하면서 주석을 계승하였다. 또한 겸문은 신(神)으로서 황통의 영원성을 강조하여 중세의 신도(神道) 사상에 영향을 끼쳤다.
겸창시대 중기에 본지수적설과 반대로 신(神)이 임시로 불(佛)이 되었다고 하는 역본지수적설(逆本地垂迹說)이 등장하였다. 이세신궁(伊勢神宮)의 외궁의 신관들이 이세신궁의 연혁을 설명하고, 천지개벽 이래의 신들의 제사에 대해언급한 신도오부서(神道五部書, 1295년경 성립)를 썼다. 1320년경에는 도회가행(度會家行)이 이세신도(伊勢神道)의 교설을 집대성한 『유취신기본원(類聚神祇本源)』을 저술하였다. 1332년에는 자편(慈遍)이 『구사본기현의(舊事本紀玄義)』를 저술하였다.
겸창막부가 멸망한 후 실정(室町)막부 시대의 전기에 해당하는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에는 신도가(神道家)로 추정되는 기부정통(忌部正通, 생몰년 미상)이『신대권구결(神代卷口訣)』(5권)
[주069]
을 썼다. 기부씨(忌部氏)는 중신(中臣)씨와 함께 일본조정의 제사를 담당하던 집안으로, 기부정통(忌部正通)은 『신대권구결』의자서(自序)에서 정치(貞治) 6년(1367)에 이 책을 썼다고 적고 있다. 이 책에서는유교와 불교를 이국(異國)의 것으로 배척하면서도, 송학(宋學)의 이기설(理氣說)을 수용하여 일정하여 변하지 않는 리(理)를 근본으로 한 신도설(神道說)을 제창하였다. 이를 기부신도(忌部神道)라고 한다. 그는 고천원(高天原)에 사는 천어중주존(天御中主尊)은 명리(明理)의 본원, 고황산령존(高皇産靈尊)은 만물화생(萬物化生)의 신, 신황산령존(神皇産靈尊)은 영(靈)이 내려와 생물의 혼(魂)이 되는 신이라고 설명하면서, 이들 세 신은 원래는 하나로 국상립존(國常立尊)과 같은 존재라고 보았다. 신도를 일본의 정로(正路)라고 주장하는 기부신도설(忌部神道說)은 강호(江戶)시대에 산록소행(山鹿素行), 석출대도(石出帶刀) 등의 유학자에 영향을 끼쳤다.
실정(室町)시대의 강정(康正) 연간(1455~1457)에는 일조겸량(一條兼良, 1402~1481)이 『일본서기찬소(日本書紀纂疏)』(6권 3책)
[주070]
를 썼다. 이 책도 『일본서기』신대권(神代卷)만을 대상으로 하여 일본의 고전적, 한적, 불전, 운서(韻書) 등을 사용하여 주석한 책이다. 일조겸량은 좌대신, 섭정, 태정대신, 관백(關白) 등을 역임하고 의례와 정치에 관해 20여 종의 저서를 쓴 실정시대 중기의 대표적 학자로, 『일본서기찬소』는 궁중에서 강석한 것을 바탕으로 한 책이었다. 『일본서기찬소』에서 신대(神代)는 유교와 불교의 교의를 가지고 해석하면 이해할 수 있다고 하는 신유불(神儒佛) 삼교일치론(三敎一致論)에 입각하여 주석하였다. 상당히 자세한 주석을 달고 있어서 그 후 신대권 주석의 모범으로 여겨졌다
[주071]
. 그의 주석을 통해 중세 사상사를 엿볼 수 있지만, 역사 연구서로서는 가치가 높지 않다.
한편 「일본기(日本紀) 집안」인 복부가의 『일본서기』 연구도 이어졌다. 복부가는 경도(京都)의 길전신사(吉田神社)의 신주직(神主職)을 세습하면서 14세기 후반에 길전(吉田)씨를 칭하게 되었다. 길전신사의 신주이며 신기권대부(神祇權大副)를 역임한 길전겸구(吉田兼俱, 1435~1511)는 응인(應仁)의 난이 끝난 1477년경부터 『일본서기』를 강술하는 활동을 시작하였다. 이때 그의 강의 내용을 오산(五山)의 선승 경서주린(景徐周麟)이 필록한 것이 『일본서기신대권문서(日本書紀神代卷聞書)』[1책(冊), 천리도서관(天理圖書館) 소장]다. 그 후 1477년과 1478년에 임생관무아구(壬生官務雅久) 등의 지식인에게 강술한 내용을 편집한 것이 『일본서기도원초(日本書紀桃源抄)』[경도대국어연구실(京都大國語硏究室)소장]이다. 그는 당시 사람들이 『일본서기』 신대권을 읽지 못한다고 탄식하면서 승려에게 신도(神道)를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주072]
.
길전겸구는 길전신도(吉田神道)를 확립한 사람으로도 알려져 있다. 길전겸구는 종래의 본지수적설(本地垂迹說) 및 불교와 습합한 양부신도(兩部神道)를 비판하면서, 복부씨만이 전해온 유일한 지고(至高)의 신도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 신도는 『선대구사본기』, 『고사기』, 『일본서기』와 복부씨에게만 비밀스럽게 전해진 세 종류의 경전에 의거한다고 주장하면서 이 신도를 유일신도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비전인 세 경전은 실재하지 않는 것으로, 그의 주장은 유교, 진언밀교, 노장, 도교, 음양오행설을 비롯한 여러 가지 설을 합친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전국의 신사에 면허장을 발부하여 전국에 영향력을 확대하였다.
길전겸구의 아들로 청원가(淸原家)를 이은 유학자 청원선현(淸原宣賢,1475~1550)은 『일본서기찬소』와 많은 책을 참고하여 『일본서기신대권초(日本書紀神代卷抄)』와 『일본서기초(日本書紀抄)』(1526~1527)[두 책 모두 천리도서관(天理圖書館) 소장]를 저술하였다. 이 책을 기초로 청원가(淸原家)와 길전(吉田) 가(家) 사람들은 신도를 전수하기 위해 전국시대의 무장과 부유한 상인층과 예술가들에게 일본서기를 강술하여, 길전파(吉田派)라고 하는 학파를 형성하였다. 1599년 청원국현(淸原國賢)은 후양성(後陽成)천황의 명령을 받아 「경장칙판(慶長勅版)」으로 불리는 『일본서기신대권(日本書紀神代卷)』을 간행하였다.
이상 실정시대의 『일본서기』 연구를 살펴보면 『일본서기찬소』를 비롯해 신대기의 주석서가 많이 출현했으나, 대부분은 신도가(神道家)들이 자신들의 신도 교의를 설명하기 위한 공리공론으로 『일본서기』의 내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은 별로 없다.
3. 근세의 『일본서기』 연구
강호(江戶)시대에는 인쇄술이 발달하면서 관영(寬永)년간(1624~644)에 고활자판에 훈점을 첨가한 『일본서기』 30권[관영판본(寬永版本)]이, 1644년에는『고사기』[3권, 관영판본(寬永版本)]가 간행되었다.
실정(室町)시대에 저술된 책들도 활자본으로 간행되어, 1640년에는 청원선현(淸原宣賢)이 저술한 『일본기신대초(日本紀神代抄)』가 간행되었다.
강호시대에는 유학을 중심으로 학문이 발달하면서 일본 고전에 대한 학문적 연구가 촉진되었다. 특히 문헌학적 연구와 실증적 연구가 발발하면서 『일본서기』에 대해서도 중세에는 보이지 않던 객관적·실증적 연구가 등장하였다. 고대의 강서 때보다 훨씬 체계적인 형태를 갖춘 연구가 이루어져 지금까지도 『일본서기』 주석서로서 학문적으로 높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주석서『일본서기통증(日本書紀通證)』과 『서기집해(書紀集解)』가 등장하였다.
유가신도가(儒家神道家)인 곡천사청(谷川士淸, 1709~1776)이 쓴 『일본서기통증(日本書紀通證)』은 보력(寶曆) 원년(1751)에 완성되었으나, 보력 12년(1762)에야 35권 23책으로 간행되었다. 곡천사청은 의사, 박물학자이며, 일본어학자로서 일본 최초의 아이우에오순의 일본어사전으로 2만 1천 개의 어휘가 수록된 『화훈(和訓)간[간간목(干干木)]』을 펴내기도 하였다. 그는 중세에 주로 신대권(神代卷) 만을 중심으로 신도적인 교양의 면에서 연구해온 것을 타파하고 학문적 입장에서 『일본서기』 전권(全卷)을 대상으로 주석하여, 『일본서기』 전체에 대한 최초의 상세한 주석서를 저술하였다.
이 책의 신대기 주석에서는 여전히 중세의 신도사상이나 수가신도(垂加神道)의 영향이 많이 보이지만, 인대기(人代紀)에 대해서는 일본의 종래의 설을 정리하고 특히 자구의 음과 뜻을 일본어로 명확히 고증하려 노력하였다. 또한 중국의 유교 관련 서적과 불경을 널리 섭렵하여 스스로 주석을 달았다. 그는 『일본서기』를 해석하여 일본은 천황이 지배해온 나라라는 점을 명백히 하고자 하였는데, 이는 일본의 국학(國學)의 입장에 가깝다.
한편 미장번(尾張藩)의 무사이며 국학자였던 하촌수근(河村秀根, 1723~1792)은 형 수영(秀潁), 아들 은근(殷根)·익근(益根)과 함께 『서기집해(書紀集解)』를 저술하였다. 이 책은 하촌수근이 살아있던 천명(天明) 5년(1785)에 완성한 것을 익근이 약 20년간에 걸쳐 30권으로 간행하였다. 이 책에서는 『일본서기』 서술에 이용된 많은 중국의 고전과 불전을 출전으로 제시하고 있다. 최근에는 여기에 제시된 출전이 원전을 직접 본 것이 아니라 『예문유취(藝文類聚)』와 같은 유서(類書)에서 재인용한 것이라는 것이 명백해졌다
[주073]
. 그러나 『일본서기』전권(全卷)의 문장의 출전을 명확히 하고자 하였다는 점에서 최초의 본격적인 출전 연구서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의 총론에는 저자의 『일본서기』에 대한 견해가 보이는데, 하촌수근은 고훈(古訓)을 적은 분주(分註)는 후세에 첨가한 것이라고 보고 『일본서기』 본문에서 삭제하였다. 그리고 『서기(書紀)』가 원래의 이름이라고 보아 자신의 주석서도 『서기집해』라고 이름 붙였다
[주074]
.
한편 국학자 영목중윤(鈴木重胤, 1812~1863)은 본거선장(本居宣長)의 『고사기전(古事記傳)』을 모방하여 『일본서기전(日本書紀傳)』을 완성하고자 하였으나1863년에 암살당하여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신대기의 천손강림의 일서제일(一書第一)까지를 대상으로 한 『일본서기전(日本書紀傳)』(1863)만을 남겼다. 강호시대의 대표적인 『일본서기』 주석서는 『일본서기통증』과 『서기집해』로 현재까지도 『일본서기』 주석서의 쌍벽을 이루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근세에도 『일본서기』 연구는 주로 신대권(神代卷)에 집중되었다. 그러나 일본 근세에는 실증적으로 학문하려는 경향이 발달하고 천황의 권위가 쇠퇴하면서 황실의 기원을 말해 주는 『고사기』와 『일본서기』의 설화에 대해서도 합리적인 설명을 시도하는 연구가 등장하였다.
유학자 신정백석(新井白石, 1657~1725)은 향보(享保) 원년(1716)에 『고사통(古史通)』
[주075]
을 저술하여 신대(神代)부터 신무(神武)천황까지의 전승을 고찰하였다. 이 책에는 권두에 「독법(讀法)」과 「범례」를 두어 고사 연구 방법에 관해 언급하였다. 그리고 그는 ‘신(神)은 곧 인간’이라고 보고, 『선대구사본기(先代舊事本紀)』, 『고사기』, 『일본서기』 등을 참고하여 고사(古史)의 전승을 유교적 합리주의에 입각하여 해석하였다. 그는 신(神)의 일로서 비밀스러운 일로 만든 것은 천통(天統)을 높이고자 한 것이지만, 백성을 바보로 만들고 스스로를 존대하게 하는 것은 진(秦)이 2대 만에 망했듯이 멸망하는 길이라고 보았다
[주0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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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학자이며 신도가였던 길견행화(吉見幸和, 1673~1761)도 보력(寶曆) 2년(1752)에 『대문필기(對問筆記)』와 보력 10년(1760)에 『신대상강(神代尙綱)』을 저술하여 신대의 신기한 이야기를 인사(人事)에 빗대어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아 합리적인 해석을 시도하였다.
대판(大坂)의 정인(町人)학자였던 산편반도(山片蟠桃, 1748~1821)는 향화(享和) 2년(1802)에 『夢の代』를 저술하여, 『일본서기』, 『고사기』의 신대의 설화와 신무천황부터 중애천황까지는 객관적 사실이 아니라 후세에 만들어 넣은 이야기라고 보았다. 상전추성(上田秋成, 1734~1809)도 문화(文化) 5년(1808)에『담대소심록(膽大小心錄)』을 저술하여 신대의 설화를 후세에 만든 이야기라고 주장하였다. 한편 귤수부(橘守部, 1781~1849)는 천보(天保) 13년(1842)에 신대기부터 신무기(神武紀)까지의 주석서인 『능위도별(稜威道別)』을 썼다. 그는 권1·2의 총론에서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있는데, 신대의 설화 속에 동화적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고 주장하였다.
합리적인 연구는 『일본서기』의 기년의 불합리성에 주목하게 되었다. 『일본서기』의 기년에 대해 가장 먼저 의문을 제기한 것은 유학자 신정백석이다. 그는 『고사통혹문(古史通或問)』(1716)
[주077]
에서 추고(推古) 10년(602) 백제승려 관륵이 역본을 가져온 이후 일본에서 역(曆)이 사용되면서 그 이전의 기년을 모두 역산하였으므로, 일본무존(日本武尊)이 죽은 지 30년 후에 아들 중애천황이 태어나는 등 『일본서기』의 기년에 착오가 많다고 하였다.
한편 국학자 등정간(藤貞幹, 1732~1797)은 『충구발(衝口發)』(1781)에서 『일본기』를 읽으면 일본의 문물은 마한과 진한에서 시작되었고 변한의 것도 섞여 있음을 알 수 있다고 하면서, 신무천황원년 신유년(기원전 660)에서 600년을 늦추어야만 연기(年紀)가 맞는다고 주장하였다
[주078]
. 본거선장(本居宣長)은 등정간(藤貞幹)의 이 주장에 대해서는 반발하였으나, 자신은 『고사기전(古事記傳)』(1798)에서 『일본서기』의 기년에 모순이 있다는 것을 여러 번 밝혔다. 그는 특히 『동국통감(東國通鑑)』과 비교하여 신공기(神功紀)와 응신기(應神紀)의 기년이2주갑(120년) 소급되었음을 지적하였다.
『군서유종(郡書類從)」의 편찬에도 참가한 국학자 석원정명(石原正明, 1760~1821)은 『연년수필(年年隨筆)』에서 신무기원은 신유혁명설에 의하고 있다고 지적하였다. 국학자 반신우(伴信友, 1775~1846)는 「일본기년역고(日本紀年曆考)」
[주079]
를 저술하여 신무천황 즉위년은 신유혁명설에 의해 제명(齊明) 7년(661)신유년에서 1부(1320) 소급하여 설정한 것이라고 논증하였다.
4. 근대의 『일본서기』 주석
강호(江戶)막부가 멸망하고 새로 명치(明治)정부가 들어선 이후 명치 초기에는 강호시대 후기에 등장하였던 『일본서기』 기년(紀年)에 관한 연구도 이어졌다. 성야긍(星野恆), 관정우(菅政友), 길전동오(吉田東伍), 나가통세(那珂通世) 등의 연구로 『일본서기』의 신무천황원년은 신유혁명설에 의해 조작한 것이며, 『일본서기』의 기년은 신빙성이 떨어진다는 것이 정설로 되었다
[주080]
. 나가통세는『상고년대고(上古年代考)』(1878)에서 『일본서기』의 건국기년은 추고 9년(601)에서 1부 1260년을 소급하여 설정하고 안강기(安康紀) 이전의 기년을 연장한 것이라고 하였다. 그는 『삼국사기』 등의 한국사서와 대조하여 신공기(神功紀)와 응신기(應神紀)의 기년이 2주갑 소급되었다고 보고 이를 수정한 결과 『삼국사기』의 왜병침입기사와 신공기의 ‘신라정토(新羅征討)’ 이야기가 서로 부합되는 것으로 보았다.
1889년 대일본제국헌법이 제정되면서 근대천황제가 확립되었다. 대일본제국헌법에서는 주권자로서 천황의 신성한 지위를 강조하였다. 『고사기』와 『일본서기』는 천황의 신성한 지위를 문헌적으로 증명하는 정치적 역할을 부여받았다. 따라서 대일본제국헌법하에서는 『일본서기』를 학문적으로 연구할 자유는 보장되지 못하였다.
대일본제국헌법이 제정된 후 일본 근대의 대표적인 『일본서기』의 주석서로『표주일본기(標注日本紀, 1891)』와 『일본서기통석(日本書紀通釋)』이 발간되었다.『표주일본기』는 국학자로서 이세신궁 황학관(皇學館)을 창설기도 한 부전년치(敷田年治, 1817~1902)가 그 전의 여러 주석서를 정리하여 펴낸 책이다.
『일본서기통석』은 반전무향(飯田武鄕, 1827~1900)이 저술한 것으로, 70권 5책(1892), 색인 1책(1926)의 방대한 주석서다
[주081]
. 반전무향은 국학자(國學者)로 강호시대 말기에 존왕양이(尊王攘夷)운동에도 참가하였고, 명치시대에는 태정관(太政官) 수사관(修史館)과 동경대학(東京大學) 교수, 경응의숙대학(慶應義塾大學) 교수 등을 역임하였다. 48년에 걸친 연구 작업 끝에 1899년에 완성한 이 책의 권1은 총론으로 찬사(撰史), 제호(題號), 이본(異本), 일서(一書), 독법(讀法), 윤식문화지론(潤飾文華之論)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는 『일본기(日本紀)』가 원래의 명칭이며, 홍인(弘仁) 경에 『일본서기』라는 명칭이 사용되게 되었다고 보았다. 이 주석서에서 반전무향은 본거선장(本居宣長)의 『고사기전(古事記傳)』과 『신대기(神代紀)계[상투]화산음(華山蔭)』, 곡천사청(谷川士淸)의 『일본서기통증』, 하촌수근의 『서기집해』, 평전독윤(平田篤胤)과 반신우(伴信友), 영목중윤(鈴木重胤)의 『일본서기전(日本書紀傳)』 등을 인용하고, 때로는 ‘어떤 사람’이라고 하면서 부전년치(敷田年治)의 『표주일본기』를 인용하기도 하였다. 『일본서기통석』에 반전무향의 독자적인 설은 거의 없어서 그가 처음부터 강호시대의 여러 주석서를 집대성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주082]
. 독창성은 없지만 『일본서기』 주석을 집대성한 최초의 활자본이었기 때문에 널리 이용되었다.
『일본서기』를 일본어로 번역한 책도 등장하였다. 좌백유의(佐伯有義)는 『일본서기』를 일본어로 훈독한 『육국사(六國史) 일본서기(日本書紀)』[조일신문사(朝日新聞社), 1928·1929]를 저술하였다. 좌백유의는 다시 관문(寬文) 9년판을 저본(底本)으로 하여 제본(諸本)을 비교하여 본문을 정하고 글자 옆에 훈(訓)을 적어넣고 두주(頭注)를 붙여 『증보육국사(增補六國史) 일본서기(日本書紀)』[상(上), 하(下), 조일신문사(朝日新聞社), 1940)]를 저술하였다.
무전우길(武田祐吉)은 좌백유의(佐伯有義)의 『육국사 일본서기』 훈독문을 참고하여 작은 제목과 황기년(皇紀年)을 넣은 『국문육국사(國文六國史) 일본서기』[상(上), 하(下), 대강산서점(大岡山書店), 1932·1937)]를 저술하였다. 이 책은 본문은 북야본(北野本)을 저본으로 하였으나 결권(缺卷)은 창고관본(彰考館本), 전전가본(前田家本)을 저본으로 하여 다른 고사본들을 비교하여 교정하고 두주에교이와 어구 해석을 간단히 서술하였다.
『일본서기』에 수록된 가요의 주석서로는 상기정삼(相磯貞三)이 『기기가요신해(記紀歌謠新解)』(1939)를 저술하였다.
『일본서기』의 고사본과 고판본을 모으고 소개하는 일도 이루어져, 흑판승미(黑板勝美, 1874~1946) 등은 『일본서기고본집영(日本書紀古本集影)』(1920), 『비적대관일본서기(秘籍大觀日本書紀)』(1927), 『북야신사본(北野神社本) 일본서기』를 간행하였다. 이로써 연구자들은 『일본서기』의 고사본을 영인본으로 접할 수 있게 되었다.
대일본제국헌법의 제약 때문에 일본 근대의 연구자들은 『일본서기』를 자유롭게 연구할 수 없었다. 그러나 강호시대까지 신대(神代)에 집중되었던 『일본서기』 연구 경향이 바뀌어, 역사 시대에 대한 연구가 추진되었다.
진전좌우길(津田左右吉, 1873~1961)은 『神代史の新しい硏究』(1913), 『古事記及び日本書紀の新硏究』(1919), 『神代史の硏究』(1924), 『上代日本の社會及び思想』(1933)을 저술하여, 『고사기』나 『일본서기』는 6세기 전후의 대화조정(大和朝廷) 관인이 황실의 일본 통치를 정당화하기 위해 구상한 이야기라고 하면서 이들 사서의 사료적 가치를 부정하였다. 그는 『일본서기』는 한적(漢籍)이나 불교경전(佛敎經典)의 문장을 빌려 윤색한 것이 많아 천무기(天武紀)와 지통기(持統紀)를 제외하면 서술 내용을 믿기 어렵다고 하였다.
그러나 대일본제국헌법 체제하에서 이러한 『고사기』와 『일본서기』의 학문적 연구는 용인되지 않았다. 1940년 그의 저서 『古事記及び日本書紀の新硏究』, 『神代史の硏究』, 『일본상대사연구(日本上代史硏究)』는 1940년에 발매금지 행정처분을 받았다. 그리고 신무(神武)천황부터 중애(仲哀)천황까지의 역대천황의 존재에 대해 그가 의혹을 품은 것에 대해 동경지방재판소(東京地方裁判所)는 유죄로 판결하여 금고(禁錮) 3개월과 집행유예를 선고하였다
[주083]
. 진전좌우길(津田左右吉)은 결국 조도전대학(早稻田大學)을 퇴직하게 되었다.
일본 근대는 일본 국민의 역사를 새로 만들어 교육하는 시대이기도 하였다.1903년에는 제1기 국정 역사 교과서로 『소학일본역사(小學日本歷史)』가 등장하여 일본의 역사를 『고사기』, 『일본서기』의 신대(神代)에 보이는 황조(皇祖) 천조대신(天照大神)부터 서술하면서, 천양무궁(天壤無窮)의 신칙(神勅)과 3종(種)의 신기(神器)를 강조하여 일본의 건국신화를 만들었다. 이후 1945년까지 천황통치의 정통성을 주장하는 황국사관에 의한 역사 교육이 이어졌다.
5.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일본서기』 연구
1945년 8월 일본이 패전하고 연합국의 점령정책이 수행되면서 대일본제국헌법도 그 효력을 잃었다. 1946년에 일본은 새로운 헌법을 만들었다. 일본의 전후 체제는 전전의 체제에 대한 철저한 부정과 반성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전후 일본사학계의 명제는 전전의 황국사관에 기초한 역사서술을 극복하는 것이었다. 『일본서기』 연구에도 큰 변화가 일어났다.
전후의 일본 고대사학은 진전좌우길의 『고사기』, 『일본서기』 비판을 계승하는 일에서 출발하였다. 『고사기』와 『일본서기』에 대한 사료 비판이 방법론적으로 요구되었고, 고고학과 중국의 문헌, 한국의 금석문 등이 중시되었다.
1950년대에 『일본서기』에 대한 비판적 연구가 활발해졌다. 특히 씨족계보에 관한 연구를 통해 『일본서기』의 편찬 과정에서 일본국가의 논리를 명확히하고자 하는 연구가 축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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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는 1960년대에도 이어졌다. 1960년 발족한 「일본서기연구회」는 『일본서기』와 관련한 논문을 모은 논문집 『일본서기연구(日本書紀硏究)』[삼품창영(三品彰英) 편(編), 제1책(冊), 각서방(塙書房), 1964]를 간행한 후 2013년 1월까지 모두 28책을 간행하였다.
전후의 연구 성과를 반영하여 엄밀한 교정을 통해 본문을 확정하여 훈독하고 상세한 주석을 한 주석서가 1960년대에 간행되었다. 판본태랑(坂本太郞), 가영삼랑(家永三郞), 정상광정(井上光貞), 대야진(大野晋)이 교주(校注)한 『일본고전문학대계(日本古典文學大系) 일본서기(日本書紀)』 상(上)·하(下)[암파서점(岩波書店), 1965, 1967]가 그것이다. 이 책은 본문(本文), 훈독문(訓讀文), 두주(頭注), 보주(補注), 교이(校異) 등으로 구성되었다. 본문은 신대기(神代紀, 권1~권2)는 복부겸방본(卜部兼方本), 인대기(人代紀, 권3~권30)는 겸우본(兼右本)을 저본으로하여 여러 사본으로 교정하였다. 고대사를 중심으로 관련 학문을 종합한 두주와 보주는 『일본서기』 연구의 도달점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일본서기』 주해서이다. 이후 『일본서기』를 전거로 하는 연구 논문은 질과 양 모두 증가하였다.
국학원대학 일본문화연구소에서는 『일본서기』 신대권의 교본을 『교본일본서기(校本日本書紀)』(1-4)[각천서점(角川書店), 1973·1975·1989·1995]로 간행하였다. 이 책은 관문(寬文) 9년판을 저본으로 하여 약 30종의 『일본서기』의 고사본(古寫本)을 교합(校合)하여 본문, 훈의 이동(異同)을 상세하게 보여주는 교본(校本)이다.
1980년대에는 정상광정(井上光貞), 천부무윤(川副武胤), 좌백유청(佐伯有淸)등이 현대일본어로 번역하여 주석한 『일본서기(日本書紀)』 상(上)·하(下)[중앙공론사(中央公論社), 1987]가 간행되었다. 이 책은 관문(寬文) 9년판본을 저본으로하여 여러 고사본을 교합한 교이(校異)를 제시하고 있으며, 현대일본어로 번역하고 소제목을 달아 읽기 쉽게 하였다. 이 책에서 원문과 교이(校異)를 제외하고 현대어역과 주 등을 새로 편집하여 문고본 『일본서기(日本書紀)』 Ⅰ, Ⅱ, Ⅲ[중앙공론신사(中央公論新社), 2003·2004]으로 간행하였다.
우치곡맹(宇治谷孟)이 번역한 『전현대어역(全現代語譯) 일본서기(日本書紀)』 상(上)·하(下)[강담사학술문고(講談社學術文庫), 1988]도 등장하여 『일본서기』를 쉬운 일본어로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소도헌지(小嶋憲之), 직목효차랑(直木孝次郞), 서궁일민(西宮一民), 장중진(藏中進), 모리정수(毛利正守)가 역주(譯注)한 일본고전문학전집(日本古典文學全集) 『일본서기』(전3책)[소학관(小學館), 1994~1998]도 간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