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3. 22 성주간 화요일)
배반의 밤, 구원의 밤
언젠가 말씀드렸지만 영어 단어 company는 라틴어 cum(함께)+panis(빵)의 합성어에서 비롯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보자면 회사란 함께 밥을 먹는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뜻이지요. 밥을 함께 먹다 보면 정도 들고, 밥도 혼자 먹을 때 보다 맛있습니다. 그래서 빵 안에는 밀가루만 있는 것이 아니라 친교와 일치, 그리고 동료애가 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3년 동안 밥을 먹은 사람들은 12제자였습니다. 그들에게 특별한 애정과 믿음이 있었겠지요. 그래서 공생활 최후의 순간에도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식사를 나누십니다. 그러나 수난이 가까이 오자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산란하시어 드러내 놓고 배신자 유다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십니다. “내가 빵을 적셔서 주는 자가 바로 그 사람이다.” 결국 따지고 보면 빵은 나중에 성체가 되고, 포도주는 나중에 성혈이 됩니다. 그런데 그 빵을 포도주에 적시어 유다에게 주셨다는 것은 이미 끝까지 유다의 회개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는 뜻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어쩌면 주님께서는 유다가 배신하기를 바라지 않으셨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유다는 유혹에 넘어가 스승을 팔아먹습니다. 배은망덕도 따로 없지요. 하필이면 배신의 순간은 유다가 주님으로부터 빵을 받아 든 때였습니다. 그래서 요한 복음사가는 은유적으로 그 때를 밤이었다고 표현합니다. 여기서 밤은 해가 떨어진 시간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지요. 복음사가가 말하는 밤은 죄악이 지배하는 어둠의 상태를 말합니다. 우리도 죄를 짓고 있을 때 이미 마음은 밤입니다.
저는 오늘 우리가 들은 배반의 드라마를 과거의 일이라고 보지 않습니다. 역사는 반복되는 법! 주님과 함께 있어도, 주옥같은 그분의 말씀을 매일 들어도, 그리고 함께 그분과 밥을 먹어도 우리는 여전히 밤의 유혹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예전에 어떤 주교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지요. “교회가 세상을 성화 시키는 속도보다, 세상이 교회를 속화시키는 속도가 훨씬 빠르다.” 아마도 교회의 세속화를 염려한 말씀 같은데, 이는 이미 우리 생활 안에서 자연스럽게 현대화라는 이름으로 침투되고 있음을 느낍니다. 마치 개구리가 미지근한 물에서 천천히 열을 가하게 되면 100˚C가 되어도 모르지 않습니까? 주님께서는 차지도 뜨겁지도 않으면 뱉어버리겠다고 하셨는데, 악은 미지근한 물부터 우리를 죄에 적응시킵니다.
제가 볼 때 그 첫 신호는 주일성수에 대한 개념이 갈수록 희박해진다는 것입니다. 유럽과 미주권은 이미 오래된 이야기입니다. 유아 세례, 결혼, 장례 외에는 성당에 가는 것을 인생 낭비라 여깁니다. 과거 순교자들이 목숨을 걸고 지켰던 그것을 요즘 신자들은 너무 가볍게 여깁니다. 그러다 보니 주일성수 외의 교회 전통도 상대화하고 합리화합니다. 단식과 금육을 지키지 않은 것도, 고해성사를 자주 하지 않는 것도, 부부 간의 정결과 신의를 지키지 않는 것도, 더 심각한 것은 선교하는 것도 예전 같지 않습니다. 어느 종교든 착하게 살면 다 구원 받는다고 여깁니다. 이는 가톨릭의 포괄주의가 아니고 다신교의 혼합주의와 같은 위험한 생각입니다. 개인의 실리와 행복이 우선하다 보니 하느님과 교회는 항상 뒷전입니다. 결국 세속과 타협하고 안일한 사고방식으로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불신과 냉담으로 빠지게 마련입니다.
유다가 처음부터 배신자의 운명을 타고 났을까요? 저는 아니라고 봅니다. 3년 이라는 세월 동안 돈주머니를 맡으면서 천천히 그러나 악의적이게 주님을 배신할 마음을 품었을 것입니다. 그를 그렇게 만든 것은 세상의 유혹입니다. 그 유혹은 분명 합리성과 윤통성의 이름으로 온갖 감언이설과 함께 유다를 휘감았을 것입니다. 이제 밤이 찾아옵니다. 유혹과 배반의 밤. 그러나 그 밤에도 주님께서는 구원을 이루시려 스스로 수난을 받아들이십니다. 그래서 그 밤은 동시에 거룩한 밤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