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보당의 난으로 많은 문신들이 척결되자 정증부와 이의방의 무신정권 타도를 외치며 서경 유수 조위총이 난을 일으켰다. 1174년에 일어난 이 사건은 김보당의 난에 비해 규모가 매우 컸으며, 이 때문에 정부군의 힘이 약해진 틈을 타 충청도, 경상도 일원에서 대대적인 민란이 발생하게 된다.
서경 유수 조위총은 국왕을 폐립하고 문신을 학살하여 권력을 남용하는 정중부와 이의방을 비롯한 무신들의 축출을 목표로 내세웠는데, 절령(자비령)이북의 40여 성이 이에 호응하여 동조하였다.
이리하여 고려군은 순식간에 개경군과 서경군으로 양분되었다. 이에 개경에서는 이의방이 평장사 윤인첨으로 하여금 토벌대를 이끌고 서경군을 치게 하였는데, 악천후와 추위 때문에 서경군에게 대패하고 말았다.
윤인첨이 대패했다는 소식을 들은 이의방은 서경 출신 상서 윤인미와 대장군 김덕신. 장군 김석재의 목을 베고 군사를 이끌고 출전하였다. 그는 최숙을 비롯한 날랜 기병 수십 명을 서경 군영 깊숙이 보내 적진을 교란한 다음 기습 작전을 펼쳤다.
이에 당황한 서경군이 후퇴하자 이의방은 그 여세를 몰아 서경군을 대동강까지 쫓아갔다. 하지만 조위총이 전열을 가다듬고 수성작전을 펴자 싸움은 교착상태에 빠졌다. 그리고 혹독한 추위 때문에 이의방은 군사를 이끌고 후퇴하게 되었다.
그해 11월 이의방은 다시 윤인첨을 원수로 두경승을 후군총군사로 삼아 서경을 치게 하였다. 윤인첨은 조위총의 심복들이 연주에 머물고 있다는 정보를 받고 곧 연주로 향했다.
하지만 쉽사리 조위총을 공략하지 못했다. 이 소식을 들은 명종은 전중감 유응규와 급사증 사정유를 서경에 보내 전쟁을 그만두라는 조서를 내렸다. 그러자 조위총은 일단 항복 의사를 표시했으나 곧 이를 번복하였다.
이에 후군총관사 두경승이 연주를 공격하여 성을 함락시키니 서북의 여러 성이 항복하게 되었다. 전세가 이처럼 호전되자 윤인첨은 군사를 서경으로 돌려 성을 포위하고 지구전에 돌입했다.
윤인첨에 의해 이처럼 완전히 포위된 조위총은 김존심과 조규를 금나라에 보내 이의방이 왕을 내쫓고 시해한 일을 고발하려 하였다. 하지만 김존심이 중도에서 조규를 죽이고 조정에 항복하는 바람에 이는 실패로 돌아갔다.
그 후 조위총은 다시 서언을 금나라에 보내 정중부와 이의방이 의종을 시해한 사건을 고하게 하고 절령 이북의 40여 성이 모두 금나라에 내속하겠다는 뜻을 전하며 원병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금나라 왕은 도리어 서언을 잡아 고려로 압송해버렸다.
이처럼 금군 원정요청에 실패한 조위총은 정부군과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다가 윤인첨과 두경승의 협공에 말려 1176년 7월 난을 일으킨 지 22개월 만에 체포되어 사형되었다.
하지만 서경의 잔병들은 그 후 몇 년 뒤까지도 산발적으로 정부군과 싸움을 벌였다. 조위총의 난은 무신들의 독재를 막고 국가 질서를 회복한다는 처음의 의도는 좋았으나 전세가 위태롭게 되자 외세에 의존하려는 경향을 띠게 됨으로써 부정적인 평가를 받게 되었다,
출처: [한권으로 읽는 고려왕조실록 - 지은이 : 박영규, 들녁출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