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근에 잠을 4시간 정도 밖에 자지 못했기에 금요일에 퇴근을 하고 오전에 잠을 잤는데 많이 피곤했는지 오후가
되어서야 일어났습니다.
일어나 엎드려서 기도를 드리고 옷을 입고 나가는데 이번에는 하얀 와이셔츠에 일할 때에 입는 캐주얼 정장바지를 입고 나갔습니다. 지금까지 특별한 날이 아니면 편한 청바지를 입고 나가었는데 앞전에 광장에서 말씀을 전하려고 하다가 옷차림이 별로여서 말씀을 전하는데 걸림돌이 되었기에 앞으로는 전도를 나갈 때에 정장 옷차림으로 나가려고 합니다.
시간이 늦어 빨리 복음을 전하러 나간다고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였는데 집 근처에 장이 열렸기에 간단하게 끼니를
해결하려고 갔었습니다. 동네 장날이라서 규모는 크지 않았으나 먹거리도 있고 나름 괜찮았는데 금요일 마다 장이
열린다고 하였습니다. 그곳에는 교회에서도 나와서 사람들에게 음료를 무료로 주면서 전도지를 주고 있었는데
요즘 교회에서 전도 대세는 커피 전도 같습니다.
최근에 복음을 전하러 다니다 보면 교회에서 파라솔을 펴고 커피전도를 하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었습니다.
예전에는 그런 전도 방법을 좋게 보지 않았는데 최근에 와서는 복음을 전하지 않는 것 보다는 그렇게라도 사람들의
경계심을 풀고 연결 고리를 만들어 전도를 하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경산에서 차량으로 복음을 전하면서 대구로 향했습니다. 가는 도중에 뒤에서 경적을 울리기에 복음을 대적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짐작하였고 경산시 옥산동에서 신호대기를 하고 있을 때에 탑차 운전자가 옆에 와서는
시끄럽지 않냐며 남에게 피해를 주면 어떡하냐고 하기에 고개를 숙이며 죄송하다고 하면서 소리를 낮추었습니다.
저는 복음을 대적하는 사람과는 상대를 하지 않는 것이 상책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경산을 지나서 대구 시지동 광장에서 마이크로 한참을 말씀을 전하다가 그 주위를 다니며 복음을 전했는데 그곳은
상권이 형성된 곳으로 술집도 많이 보였는데 낮부터 호프집에서 술을 마시는 사람이 보이는데 자동차로 큰 소리로 말씀을 전하는 모습에 조금 놀라고 당황하는 표정 같았습니다.
시지동에서 복음을 많이 전하고 싶었지만 갑자기 아이들을 데리러 가야했기에 동구로 가면서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동서 시장을 지나서 동구청 옆에 또 다른 시장이 보이기에 시장 안으로 들어 가면서 복음을 전하였는데 자동차가 많이
다니는 큰 도로에서는 자동차 소음 때문에 소리가 멀리까지 퍼지지가 않는데 골목 같은 경우는 소리가 엄청나게 크게
들립니다. 그래서 어느 구간에서는 소리를 조금 낮추기도 하였는데 앞으로는 골목도 많이 다니며 복음을 전해야
겠습니다.
이번주 수요일날 대구에서 복음을 전하던 날에는 박근혜 대통령이 취임 이후로 처음으로 대구를 방문하였습니다.
알고보니 대구는 박근혜 대통령이 태어난 곳이며 대통령이 되기 전까지 국회의원을 지냈던 곳이 였습니다.
즉 대구 달성군에서 보궐선거로 정치를 시작해서 15대 국회의원 때부터 18대까지 내리 4선을 지냈던 곳으로 정치적
기반이 되고 정치적 고향이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저를 더욱 놀라게 한 사실은 대구는 제2의 예루살렘이다는 것입니다.
사실 대구는 역사적으로 우리나라에서 아주 중요한 곳이며 1907년 평양 대부흥 때에 대구에서도 부흥이 일어 났습니다.
끝으로 도마 박물관장 조국현 목사님의 글을 이곳에 올리며 전도일기를 마칩니다.
할렐루야!
대구는 제2의 예루살렘입니다.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안을 구하라.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하리로다.(시편 122:6)
예루살렘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죽으심과 부활 그리고 승천이 있었던 곳입니다.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되고 예루살렘의 마가 다락방에 임하셨던 성령님을
모시고 형통한 삶을 살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은 평화의 땅이요 때로는 평화를 구해야 할 땅이기도 하였습니다. 예루살렘은 거룩하신 하나님이
거하시는 땅이었으며 때로는 하나님의 사랑이 진노가 되어 임하시기도 한 땅이기도 하였습니다.
예루살렘은 이스라엘 땅에만 있지 않습니다. 공간적으로 또 다른 예루살렘이 있습니다.
하늘의 예루살렘입니다. (히 12:22)
예루살렘은 과거나 현재만 있지 않습니다. 시간적으로 미래의 예루살렘이 있습니다.
새 예루살렘입니다. (계21:10)
이외에 또 하나의 예루살렘이 있습니다. 제2의 예루살렘 대구입니다.
거룩하고 귀한 이름입니다. 감당치 못할 만큼 영광스러운 이름입니다.
예루살렘에는 하나님의 법궤가 있었습니다. (삼하 6장)
예루살렘에는 하나님의 성전이 있었습니다. (왕상 8장)
대구가 제2의 예루살렘이라는 내용에는 대구 시민의 마음속에 거룩한 하나님의 성전이 이루어질 때 진정한
제 2의 예루살렘이 된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고전 3:16)
이스라엘의 거룩한 하나님의 도성 예루살렘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이 있기 전에도 하나님이
주관하신 긴 역사가 있었습니다.
역사는 천년을 거슬러 올라갑니다. 기원전 1000년경 여부스 사람들이 살던 예루살렘 땅을 다윗이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으로 빼앗았습니다. (삼하5:6-10)
이것뿐입니까? 역사는 더 거슬러 올라갑니다. 예루살렘 왕이었던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에게 떡과 포도주를
가져와 축복 하였습니다. (창 14:17-20)
그렇다면 대구라는 제2의 예루살렘 땅에는 하나님께서 주관하셨던 어떤 역사가 있었을까요?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봅시다.
첫째, 대구, 경북 초기 선교사의 발자취가 있습니다.
예루살렘성과 대구읍성이 닮았습니다. 지금은 철거되고 없는 대구읍성터는 동성로, 서성로, 남성로, 북성로 라는
길만 남았습니다. 대구읍성은 성곽의 모양과 규모가 고대의 예루살렘 성곽과 너무나 빼 닮았습니다.
사람들도 쌍둥이를 보면서 한 사람을 보는 것처럼 느끼듯이 1899년 대구에 온 미국 북 장로교의 선교사 애덤스,
부루엔, 존슨 선교사들은 대구읍성의 성곽을 보고 하나님의 감동을 받으며 대구를 제2의 예루살렘으로
생각하였습니다.
대구읍성의 성곽을 다시 복원할 수 없을까? 아쉬움이 있지만 저는 대구 동산언덕의 선교사 주택의 기초석이 대구
읍성의 성곽을 철거할 때 나온 돌이며 그 돌로 지은 집이 박물관이 되어 있는데 그나마 위안을 받고 있습니다.
저는 대구 경북 초기 선교사 발자취를 따라가는 성지순례 가이드를 하고 있습니다.
대구에 온 선교사들은 미국 북 장로교위 파송선교사로 미국의 부흥사 무디의 전도로 선교사가 된 사람들입니다.
무디를 닮아서 대단히 열정적이었습니다. 대구가 제2의 예루살렘이라고 불리는 뜻에는 무디 선교사처럼
열정적으로 전도하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대구에 온 선교사가 세운 기독교 학교가 중심이 되어 대구에서 3.1운동이 일어났고 경북지역으로 번져갔습니다.
대구의 3.1운동은 불교,천주교 등에서는 가담치 않았고 오직 기독교만이 3.1운동을 하였습니다.
3.1운동은 애국운동입니다. 3.1운동 정신위에 대한민국 헌법을 만들어 나라를 세웠습니다.
대구 동산언덕의 3.1운동길을 모르고는 한국 근대사를 제대로 알 수 없습니다.
3.1운동은 대구의 부활절 연합예배와 같이 매년 초교파적으로 행사를 하여야 합니다. 부활절 연합예배가
기독교인들의 내부적 큰 절기 행사라면 3.1절은 기독교인들이 대구시민에게 보여줄 수 있는 외부적 큰 절기 행사라
할 수 있습니다.
둘째, 대구는 경교와 함께한 통일의 발자취가 있습니다.
대구는 지형적으로 예루살렘과 닮은 점이 있습니다. 예루살렘이 이스라엘의 중심부에 위치해 있듯이 대구는
대한민국의 중심부에 있습니다.
예루살렘이 이스라엘 국가를 지키는 보루 역할을 한 요새라면 대구는 6.25사변 때 나라를 지킨 성지입니다.
대한민국 국군에서는 대구를 호국성지라 합니다.
역사를 1300년 거슬러 올라가면 대구는 경북 경산과 하나의 지역 개념이 되어 압량주라 하였습니다.
당시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시대였는데 신라가 차지하고 있었던 합천, 고령지역의 40여개 성을 642년
백제가 쳐들어 와서 점령하였습니다. 6.25사변 때 대구가 방어선이 되었듯이 신라는 압량주(경산,대구지역)가
최후 방어선이 되었습니다. 김유신 장군을 초대 압량주 군주로 임명하여 지휘케 하였습니다. 김유신 장군은
압량주에 신라군사 대부분을 모아놓고 군사 훈련을 시켰는데 그 유적이 아직 경산에 남아 있습니다.
이때는 또 한편 635년 중국에 기독교인 경교가 들어왔고 당나라는 현재 미국처럼 기독교국가로 초강대국이
되었습니다. 가야 기독교 후손인 김유신 장군의 세력은 당나라의 외교에 성공하여 나당 연합군을 결성하고
삼국통일을 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의 남과 북이 분단되어 남 유다 북 이스라엘의 남북조 시대에 남 유다의 예루살렘이 믿음을 지킨 보루였듯이
현재 대구는 남쪽 대한민국의 믿음을 지키는 보루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북쪽의 사마리아가 변질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남쪽의 예루살렘을 더욱 사랑하셨습니다. 대구가 제2 예루살렘으로 불리는데는 믿음을 지키고 복음으로
통일하라는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셋째, 대구는 사도 도마가 선교한 발자취가 있습니다.
삼국사기 지리지를 보면 대구의 화원은 혀불(舌火 설화) 대구는 달구불(達句火 달구화) 경산 자인은 종의 불
(奴斯火 노사화)이라고 불렸습니다.
혀불은 예루살렘에서 오순절날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님이 불의 혀 같은 모습으로 임하셨다는 뜻으로 붙여진
이름입니다.
달구불은 제련소에서 철강석을 달구어서 철을 녹여내고 다시 쇠를 달구어 무기나 농기구를 만드는 곳이라는 달군다는
말에서 달구불이라 하였습니다. 이후 달구벌로 바뀌었다가 통일신라시대 신문왕(681~692)때는 통일신라의 수도를
서라벌에서 달구벌로 옮기려고도 하였으나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경덕왕(742~765)때는 당나라의 문화가 경교(景敎)의
영향으로 중국 역사상 최고였는데 한화(漢化)정책으로 지명을 한자어로 바꾸어서 대구(大丘)라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조선 영조 때(1750)大丘의 丘자가 공자의 丘자와 같으니 피해 달라는 상소가 있어서 이후로 현재 쓰고
있는 대구(大邱)로 바꾸어 쓰고 있습니다.
대구지역 지명에 왜 이런 불의 이름이 붙어졌을까요? 낙동강을 따라 철기 문화가 일어났으며 철의 제련소의 이름이
지역 이름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서기 42년 김수로왕이 건국한 가야국은 철의 왕국이자 기독교 국가였습니다.
그 때 예수님의 12제자 중 한 사람인 사도 도마가 가야국에서 전도하였습니다. 대구와 경산은 도마가 전도한 발자취가
있습니다.
가야 시대의 경산 자인에는 종의불이란 제련소가 있었습니다. 제련소의 이름을 기독교적으로 붙인 것은 누구의
영향이 있었을까요? 서기 41년 부터 47년 까지 한국에 머물면서 전도한 사도 도마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대구에서 화원으로 나가면 낙동강을 따라 김해로 가고 바다의 실크로드를 따라 김해로 가고 바다의 실크로드를
따라 인도와 예루살렘과 로마로 갑니다. 대구에서 압독국(경산)을 지나 금호강 길을 따라가면 실크로드의 종착지
사로국(경주)이 나옵니다.
사도 도마는 왕궁을 지을 수 있는 석공이자 강철을 만드는 기술자였습니다.물론 목수일도 잘 하였습니다.
서기 42년에는 한국의 가야국을 기독교 국가로 세우는 일을 도왔고 6년간 한국에 머물렀습니다.
서기 48년에는 인도의 아유타국 공주인 허황옥을 가야의 초대왕인 김수로왕에게 중매하였습니다.
사도 도마는 서기 50년 예루살렘의 사도 회의에 참석하였습니다. 그 후 서기 52~72년까지 인도에서
선교하다가 순교하였습니다.
저는 이를 검증할 수 있는 자료를 모아서 자료 보관소(도마 박물관)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한국 고대역사를
잘 모르는 사람들을 위하여 허왕후스토리텔링을 만들었습니다. 허왕후 스토리텔링에 사도 도마의 한국에서
활동한 발자취가 있습니다.
예루살렘은 거룩한 성지(聖地)입니다. 예루살렘은 지중해 연안 평야와 요르단강에서 어어지는 세계 최대의
지구대에 위치해 있으며 산이 둘려져 있습니다. 대구 또한 분지로 둘러져 있습니다.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시온산이 흔들리지 아니하고 영원히 있음 같도다. 산들이 예루살렘을 두름과 같이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두르시리로다. (시편 125:1-2)
마지막으로 대구는 구약 시대의 예루살렘과 교류가 있었습니다.
경산의 영남대학교 정문 맞은편 언덕은 현재 원룸촌이 되어 있습니다.
이 언덕은 원룸촌으로 개발되기 전 압독국 고분들이 있던 지역이었는데 지금도 그 뒤편에는 압독국 고분 몇 개를
보존하고 있습니다. 저는 1988년 고분 발굴의 정리단계 때 발굴 현장에서 압독국 유물을 면밀히 살펴보았습니다.
압독국은 실크로드의 중요한 위치에 있었고 압독국은 구약 시대에 제2의 예루살렘이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압독국은 기원전부터 있었던 삼한의 78개 소국 중 하나였습니다. 압독국은 가야시대 초기에는 가야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받았습니다. 그 후 102년 사로국 파사왕 때 안강의 음즙벌국과 삼척의 실직국과 함께 사로국에 병합
당하고 146년 반란을 일으켰다가 사로국에 진압당하고 그 무리가 남쪽으로 옮겨졌다는 기록이 삼국유사에
전하지만 대체로 5세기 말까지 압독국은 독자성을 가지고 있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역사 연구는 귀납법과 연역법을 이용하여 역사 연구의 가치가 발견되면 가설을 세우고 자료를 수집하고 검증하여야
합니다. 압독국은 제가 20년 전에 가설을 세웠는데 아직도 가설 단계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습니다.
역사 연구는 과거를 만져 볼 수 없기 때문에 흔적이 남아 있지 않으면 발생한 사실이 없는 것으로 취급 받습니다.
그러나 압독국에는 흔적과 유물이 아주 많이 남아 있습니다.
일본에는 '고대에 유대인과 일본의 교류가 있었다.'는 내용으로 지어진 중요한 서적만 해도 1875년부터 2007년까지
132년간 51권이 나왔습니다. 2006년 주일 이스라엘 대사인 에리 코헨은 '대사가 본 일본인과 유대인'이란 책을
출판하고 T.V에 나와서 '고대 유대왕국의 12지파 중 10지파에 속한 19만 명이 일본에 들어와 있었다. 그 조사를
위해 내년 2월부터 일본인과 유대인의 DNA감정을 실시한다.'라고 하였습니다.
압독국 유물은 영남대학교 박물관과 경산시립 박물관에 일부가 전시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