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분의 성인과 5백여 명의 순교자가 치명한 곳
갈매못이란 영보리 앞바다가 좌우의 육지와 섬으로 둘러싸여 마치 연못 같아 보이는 데서 유래하였다. 오천(鰲川)은 치안과 국방을 담당하던 수영(水營)이 있었고 수군통제사가 있던 곳이다. 이곳 갈매못이 순교지가 된 이유 중에 하나가 오천면에 속하는 외연도(外烟島)와 관련되어 있다.
1846년 6월에 프랑스 해군 제독인 세실(C´ecille, 瑟西爾, 1787~1873) 함장이 세 척의 군함을 끌고 서울 한강으로 진입하려고 하였으나 한강을 못 찾고 외연도에 정박하여 당시 임금이었던 헌종에게 1839년 기해박해 때 프랑스 선교사 앵베르(Imbert, 范世亨, 1796~1839, 라우렌시오) 주교, 모방(Maubant, 羅伯多祿, 盧, 1803~1839, 베드로) 신부, 샤스탕(Chastan, 鄭牙各伯, 1803~1839, 야고보) 신부 등 3명을 살해한 책임을 묻는 편지만 남겨 놓고 돌아갔다.
이와 같은 세실 함장의 조선 영해 침입 사건을 계기로 당시 옥중에 있던 김대건(金大建, 보명 芝植, 1821~1846, 안드레아) 신부의 처형이 앞당겨졌고,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李昰應, 호 石坡, 1820~1898)은 서양 오랑캐들을 내친다는 의미로 세실 함장이 침범했던 외연도에서 가까운 오천 수영으로 다섯 명을 끌고 와 외연도를 향하여 처형하게 하였던 것이다. 또한 이 무렵 궁중에서 고종비(高宗妃)의 간택이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서울이나 그 부근에서 처형할 수 없어 보령 수영으로 결정하였고, 이에 따라 이들 다섯 명은 이곳으로 이송되어 성 금요일인 3월 30일(음 2월 14일)에 순교하였다.
순교한 다섯 명의 성인 중 다블뤼(Daveluy, 安敦伊, 1818~1866, 안토니오) 주교는 1845년 조선에 입국하여 활동하다가 1857년 보좌 주교로 성성 되었으며, 제4대 교구장 베르뇌(Berneux, 張敬一, 1814~1866, 시몬) 주교가 순교하면서 1866년 3월 7일 교구장이 되었으나 4일 만인 11일에 충청도 내포 지방에서 체포되었다. 이때 그의 복사로 활동하던 황석두(黃錫斗, 1813~1866, 루카)가 함께 체포되었고, 이어 인근에 피신해있던 오메트르(AumaItre, 吳, 1837~1866, 베드로) 신부와 위앵(Huin, 閔, 1836~1866, 마르티노) 신부가 더 이상 신자들이 피해를 입지 않도록 하려는 생각에서 자수하였다.
이들은 모두 서울 포도청으로 압송되어 3월 23일(음 2월 7일)에 군문효수형을 선고 받았는데, 이때 충청도 제천에서 체포되어 온 장주기(張周基, 일명 樂韶, 1803~1866, 요셉)도 이튿날 같은 형을 선고받았다. 이중 황석두의 유해는 곧 가족들에 의해 거두어 졌고, 나머지 네 유해는 3일 뒤 형장의 모래사장에 묻혔다가 6월 초 신자들에 의해 홍산 남포의 서재골(서직골, 서짓골)로 이장되었으며, 1882년 3월 블랑 신부의 지시로 발굴되어 일본 나가사키로 옮겨지게 되었다. 그리고 1894년 5월 다시 조선으로 옮겨져 1900년부터 명동 성당에, 1967년부터 절두산 순교자 기념관 지하 성당에 안치되었다.
◆ 오성 바위
병인박해(1866)때 순교한 다블뤼 주교, 오매트리 신부, 위앵 신부, 황석두 루가, 장주기 요셉 등 세 성직자와 두 전교회장이 갈매못을 향해 끌려가는 도중에 길목인 내포 땅 아산군 음봉면 길가의 바위 위에 걸터앉아 여기서 쉬는 동안 포졸들이 포승을 풀어 주어서 안 주교는 교우들을 만나 격려하고 함께 기도한 후 막걸리로 목을 추기고 마지막 설교를 한 다음 성가를 부르며 끌려갔다는 눈물겨운 이야기가 전해온다. 그 때 그 바위는 지난 1973년 음봉 삼거리에서 절두산 순교자 기념관 광장으로 옮겨져서 '복자 바위'라는 이름으로 불리었으나 1984년 다섯 분 모두 성인품에 오른 후 '오성 바위'라고 고쳐 부르고 있다.
그 앞의 돌은 김대건 신부와 함께 입국한 다블뤼 안주교가 21년간 숨어 살던 방을 드나들 때마다 밟고 다니던 문지방돌이다. 현재 이 바위는 절두산 성지 야외 전시장에 있다.
■ 순교자
◆ 성 안 안토니오 다블뤼(Daveluy) 주교 (1817∼1866)
한국명은 ‘안돈이’(安敦伊)이며 조선교구 제5대 교구장이었던 안 안토니오 주교는 한한불(韓漢佛)사전을 비롯하여 많은 번역서와 저서를 남겼고, 10여 년 동안 자료를 수집하여 <조선 순교자 비망기>를 완성하는 큰 업적을 이룩하였다. 프랑스의 상류층 가정에서 자라나 한국 풍속에 적응하기 어려웠던 데다 위장병과 신경통에 시달렸지만, 한국말을 잘하고 보신탕을 즐기는 등 가장 한국적인 사제로 알려져 있다. 1845년 10월 조선에 들어와 20여 년 동안 봉사하던 안 주교는 1866년 3월 11일 홍주 거더리에서 체포되어 민 신부, 황석두와 함께 서울로 압송되었고, 유창한 한국말로 천주교에 대한 공격을 반박하여 다른 이들보다 더 심한 형벌을 받았다. 3월 30일에 안 주교 일행을 충청도 갈매못으로 압송한 형리들은 일행을 마을에 조리돌리며 형 집행을 지연시키려 하였지만, 마침 이 날이 주님 수난 성 금요일이었으므로 안 주교가 당일 집행을 요구하여 그대로 형이 집행되었다.
○ 성 다블위 안토니오와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이시여,
● 우리나라의 모든 교우들이 성모님께 대한 신심 활성화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 성 오 베드로 오매트르(Aumaitre) 신부 (1837∼1866)
프랑스 앙굴렘 교구 출신인 오 신부는 1862년에 사제 서품을 받고 1863년 6월에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로 조선 땅을 밟았다. 경기도 수원 근처에 있는 샘골에서 한국말을 익혔으며 충청도 홍주 거더리에서 전교하였다. 1866년에 박해가 일어나고 그 해 3월에 안 주교가 체포되자 피신하려고 배를 탔으나, 거센 역풍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거더리로 돌아와 체포되었다. 오 신부는 안 주교, 민 신부 등과 함께 서울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고, 3월 30일 갈매못에서 안 주교 다음으로 두 번째 칼날을 맞아 29세의 젊은 나이로 자신을 하느님께 봉헌하였다.
○ 성 오매트로 베드로와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이시여,
● 우리 교회내에 사제 성소와 수도 성소의 증가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 성 민 루가 위앵(Huin) 신부 (1836∼1866)
민 신부는 프랑스 랑그르 교구 출신으로, 1861년 사제가 되었고 1865년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로 백, 김, 서 신부와 함께 조선에 파견되었다. 충청도 내포에 머물며 안 주교에게 한국말을 배운 뒤 홍주 황무실에 부임하여 전교하였다. 1866년 3월 11일 안 주교가 체포되자 자수하여 안 주교, 오 신부와 함께 서울로 압송되었고, 갖은 고문을 겪은 뒤 3월 30일 갈매못에서 군문효수형을 받음으로써 30세의 나이로 이 땅에 신앙의 씨앗을 뿌리고 주님의 품에 안겼다.
○ 성 위앵 루가와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이시여,
● 우리나라의 모든 수사 수녀들을 위하여 빌어 주소서.
◆ 성 황석두(黃錫斗) 루가 (1813∼1866)
‘재건’이라고도 불렸던 황석두는 충청도 연풍의 양반 가문에서 자라나 부친의 뜻에 따라 과거 시험을 치르러 상경하다가, 한 주막에서 천주교인과 사귀게 되어 입교하였다. 부친의 반대를 무릅쓰고 3년 동안 벙어리 행세를 하며 교리서를 탐독하였고, 이에 감동한 부친과 가족들도 입교하게 되었다. 그는 덕행이 뛰어나고 교리 지식이 풍부하여 주교와 신부들의 복사로, 회장으로 활동하였다. 고 주교에게 금욕과 절제를 위하여 아내와 별거할 것을 허락받고 독신 생활을 하였으며, 안 주교를 도와 교리서 번역과 교회 서적 출판에도 참여하였다. 1866년 3월에 먼저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던 안 주교를 몇 십 리나 따라간 황석두는 결국 함께 체포되어, 3월 30일 충남 보령군 갈매못에서 54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 성 황석두 루가와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이시여,
● 우리 교회 출판 사업가들을 위하여 빌어 주소서.
◆ 성 장주기(張周基) 요셉 (1803∼1866)
‘낙소’라고도 불렸던 장주기는 경기도 수원 느지지(현 경기도 화성시 양감면 요당리)에서 태어나 1826년에 세례를 받았다. 박해와 친척들의 방해를 피해 충청도 배론으로 이사하였고, 회장이 되어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하였다. 1855년 배론에 신학교가 설립될 때에는 자신의 집을 임시 신학교로 내어 주고, 자신은 신학교에 딸린 땅에서 농사일을 하며 잔일을 도맡아 하였다. 1866년 3월 1일 배론 신학교에서 신 신부와 박 신부가 체포되자 장주기는 제천 부근의 노럴골로 피신하였지만, 다른 교우들이 피해를 입을까 염려하여 자수한 뒤 서울로 압송되었다. 서울의 포청에서 고문을 견뎌 내며 끝까지 신앙을 지켜, 때마침 홍주 거더리에서 끌려 온 안 주교, 민 신부, 오 신부, 황석두 등과 함께 3월 30일 충남 보령군 갈매못에서 군문효수형을 받고 64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 성 장주기 요셉과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이시여,
● 우리 교우들이 신학생 양성에 물질적 정신적 후원을 아끼지 않도록 빌어 주소서.
■ 그외 순교자들
◆ 박 베드로
박 베드로는 본디 충청 신창 사람이라 부모의 가르침을 받아 도리를 배워 열심히 수계하더니 창말서 살적에 무진년에 홍주 포교에게 잡혀 "네 천주학을 하느냐?" 묻거늘 "내 과연 성교를 하노라" 하매 즉시 잡아 본관에 가 문목한 후 수영으로 보내어 진 친 곳에서 베어 죽이니 나이 34세더라. 증인은 면천 찻티 사는 그 아우 박 필립보이다. (증언록 130번 224쪽,치명일기 727번, 수영)
◆ 손치양 사도 요한
손치양 사도 요한은 기해년에 치명한 손 안드레아의 사촌이며 홍주 거더리에 살더니 무진년에 경포에게 잡혀 서울로 가 몇 달 동안 갇혔더니, 이에 대원군 아버지 남연군 묘 굴총하던 배 주인이라 하여 큰 죄인으로 잡아 수영까지 보내어 치명하니 나이 50세요, 때는 무진년 5월이라 증인은 재종손 요한이라. (증언록 85번 143쪽, 치명일기 728번, 충주)
◆ 이영중
본래 공주 서면 사람이라 무진년에 경포에게 잡혀 서울에 갇혔더니, 이에 선교사들이 조선에 입국할 때 태워 온 배의 주인이라 하여 손치양과 한가지로 수영까지 끌고가 효수하니 나이 45세더라. (치명일기 729번, 수영)
◆ 이 발토로메오
본디 충청 덕산 사람이라 그 부모의 가르침을 받아 열심히 수계하더니 병인년 군란 때 경포에게 잡혀가다 도망하였더니 경오년에 수원 포교에게 잡혀 수영으로 가 진터에서 참수되니 나이 24세더라. (증언록 130번 222쪽, 치명일기 730번, 수영)
◆ 임운필
임운필은 임 토마스(치명일기 636번 순교자)의 재당숙이라 여러 일가의 문장되므로 수하 사람을 잘 교훈하여 성교에 열심하더니 병인년 군난 때 모든 가족들이 많이 잡혀가 죽고 나이 많은고로 피하여 나가지 못하여 집에 있어 끝을 보려 하더라. 홀연히 수영 포교가 들어와 잡거늘 "내 집은 성교함으로 인하여 아랫사람들이 많이 죽고 나도 성교를 봉행하니 너희 뜻대로 하라" 한즉 잡아 수영으로 가 수사가 문초한 후 즉시 교하여 죽이니 나이 70세라. 증인은 해미 마새 사는 그 재종손 임 베드로이니 나이 43세다. (증언록 )120번 237쪽)
○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와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이시여,
●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와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이시여,
● 우리 교우들이 순교자들을 공경하는 일에 적극 참여하도록 빌어 주소서.
■ 찾아가는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