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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일ː2022년 05월 17일(화)
▶산행지ː 천왕지산(428.1m) 칠불암마애석불 신선암
▶코스ː 화랑교육원-헌강.정강왕릉-통일전-서출지-삼층석탑-전망대-칠형제바위-천동탑-칠불암마애석불-백운암-천왕지산-용장3리(약 13.5km/05:30)
▶난이도ː B+
▶누구랑ː현재 17명(백양,조석,간지,우보천리,대봉감,나한,후라이,시호일,개미,하로동선,산들로,망개등,일광,산하,열심히,한사랑)
▶시 간ː09:55∼15:47(휴식포함 05ː52분)
▶거 리ː약 13.42㎞
▶날 씨ː맑음 구름(조금)
☞화랑교육원(들머리)ː경북 경주시 남산동 831-1
☞용장3리(날머리)ː경북 경주시 내남면 용장리 733-1
◈교통편◈
▶갈 때ː노포시외(08:20)→경주시외(11번)→화랑교육원 하차
▶올 때ː용장3리정류장(506번)→경주시외(버스)→부산(노포 도착)
헌강왕릉에 대한 보수 수습 조사는 1993년 8월 초 우기 때의 자연붕괴로 인해 그 해 9월 16일부터 10월 30일까지 약 45일간 실시되었다. 이 기간에 봉토 단면과 유구 내부를 조사할 수 있었다. 무덤 크기는 지름 15.3m, 높이 4.2m이다. 무덤의 외부모습은 흙으로 덮은 원형봉토분으로서 밑둘레에는 길이 60∼120㎝, 너비 30㎝ 내외의 다듬은 돌을 이용하여 4단으로 쌓아올려 무덤의 보호석으로 삼아 튼튼히 하였다.
무덤 양식은 널길을 동벽에 편향해서 설치한 굴식돌방무덤〔橫穴式石室墓〕이다. 널방은 남북길이가 2.9m인데, 남북길이가 동서길이보다 약간 더 긴 장방형을 이루고 있다. 널방의 벽석들은 최하단의 생토층을 약간 파내고 직경 40∼60㎝ 전후의 괴석으로 축조하였다. 하단부에는 비교적 큰 석재를, 상단부에는 작은 석재를 쌓았으며 사이사이 공간은 잡석으로 채운 후 틈사이를 강회로 막고 있다. 널방의 벽면은 상부로 올라갈수록 안으로 기울었으며 구석부분은 엇물려쌓기 방식으로 석재를 처리하고 있다.
널길은 널방 남쪽의 동쪽면에 치우쳐 부설되어 있으며 제반시설인 돌문〔石扉〕, 문지방, 폐쇄석, 무덤길〔墓道〕등을 갖추고 있다. 돌문은 장방형 괴석 한쌍을 동서에 수직으로 세워 활용했다. 문지방은 장방형 깬돌 3매를 이용하여 만든 것으로 남북 장축의 평평한 면이 위로 오도록 가지런하게 놓고 빈 공간에는 잡석을 채워서 돌문을 세울 수 있도록 했다. 무덤길은 널길 뚜껑돌 아래의 첫 번째 남쪽 벽석부터 널길쪽으로 약간 튀어나오도록 하여 무덤길과 널길을 구분지었으며 이들 바닥층은 직경 15㎝ 내외의 납작한 자연석 1단을 전면에 깔았다.
정강왕릉 정강왕은 신라 제50대 왕이다. 릉은 남산 동남록 송림 속에 있다. 봉토 밑에는 삼단의 호석(護石)이 있는데 모두 가공한 장대석으로 축조하였다. 하단은 한층 넓게 쌓고 그 위에 2단의 석축은 밑은 넓고 위는 좁게 쌓았다. 전면에는 1매 석상이 놓이고 그 주위에 얇은 석단이 있으며 조금 떨어져 일렬 장대석이 있다. 정강왕은 경문왕의 둘째 아들이며 다음해 7월에 훙어하였다. 이 왕릉의 형식은 선왕 헌강왕릉과 같으나 별로 치적(治積)이 없음에도 전왕(前王)과 같은 형식의 왕릉을 만들었음은 태평성세의 여세를 따라 그의 형의 왕릉형식을따른 듯하다. 보리사 동남에 장사 지냈음도 모두 전왕(前王)의 뒤를 따른 듯하다.
사적 제186호. 지정면적 3만 5,702㎡, 무덤의 지름은 15.7m, 높이는 4m이다. 정강왕의 성은 김씨, 이름은 황(晃)이다. 경문왕의 둘째아들로, 886년 7월에 왕이 되어 887년 7월에 승하하였으므로 만 1년간 왕으로 있었다. 승하한 뒤 보리사(菩提寺) 동남쪽에 장사하였다는 기록에 따라 이곳으로 비정하고 있다. 이와 달리 정강왕릉을 제47대 헌안왕릉으로 보는 설도 있다. 무덤의 외부모습은 둥글게 쌓아올린 봉토(封土) 밑부분을 3단으로 쌓아 무덤의 보호석으로 하였는데 모두 가공한 장대석(長臺石)으로 축조하였다. 하단의 지대석(地臺石)은 보다 넓게 하였고 그 위에 2단의 석축을 쌓았는데 최상면에 올려놓는 갑석(甲石)은 원래 없었다. 내부는 발굴되지 않아 확실치 않으나 시기적으로 보아 형의 무덤인 제49대 헌강왕릉과 같은 굴식돌방무덤[橫穴式石室墳]으로 추정된다. 왕릉 앞에는 1매의 판석으로 된 상석이 있고, 그 앞에 다듬은 장방형 화강석으로 축조한 석단이 있다.
서출지: 경주 남산 기슭에 위치한 삼국시대 연못이다. 남산 마을 한가운데에 삼층석탑 두 기가 있고 동쪽에 아담한 연못이 있는데 다음과 같은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신라 488년에 왕이 남산 기슭에 있던 ‘천천정’이라는 정자로 가고 있을 때, 까마귀와 쥐가 와서 울더니 쥐가 사람의 말로 ‘이 까마귀가 가는 곳을 쫓아 가보라’ 하니 괴이하게 여겨 신하를 시켜 따라 가보게 하였다. 신하는 이 못에 와서 두 마리의 돼지가 싸우는 것에 정신이 팔려 까마귀가 간 곳을 잃어버리고 헤맸다. 못 가운데서 한 노인이 나타났는데 그 노인이 어떤 봉투를 건네줘서 왕에게 그것을 올렸다. 왕은 봉투 속에 있는 내용에 따라 궁에 돌아와 화살로 거문고집을 쏘게 하니, 왕실에서 향을 올리던 중과 궁주가 흉계를 꾸미고 있다가 죽음을 당했다는 것이다. 이 못에서 글이 나와 계략을 막았다 하여 이름을 서출지(書出池)라 하고, 정월 보름날은 오기일(烏忌日)이라 하여 찰밥을 준비해 까마귀에게 제사지내는 풍속이 생겨났다.
조선1664년에 임적이라는 사람이 못가에 건물을 지어 글을 읽고 경치를 즐겼다고 한다. 임적은 조선후기 양성현감, 함흥판관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지금 이 건물은 연못 서북쪽에 소박하면서 우아한 모습으로 남아있다.
경주 남산동 동ㆍ서 삼층석탑 남산사지의 쌍탑중 동탑은 모전석탑(模塼石塔)이고 서탑은 일반형 석탑이다.동탑은 넓은 2중의 지대석 위에 팔개의 석괴로서 기단부를 이루고 있다. 각층의 탑신과 옥개석은 일개의 석재로 되어 있으며 표면에 조식(彫飾)이 없다. 탑신부의 중적수법(重積手法)은 일반형 석탑과 다름없이 옥개석과 탑신은 층층이 체감의 비율을 보이고 옥개석 받침은 초층부터 5단, 5단, 4단으로 되어 있다.상륜부는 노반만 남아있고 나머지는 결실되었다. 이에 대한 서탑은 이중기단 위에 삼층석탑을 세웠다. 하대석과 하층기단면석을 일석으로 만들어 서석으로 구성하고 서석에는 각면(各面) 이주식(二柱式)의 당주를 표시하고 있다. 하대갑석은 대소사석(大小 四石)으로 상층기단서석을 받고 있으며 면석의 각면은 당주로서 이구로 나누고 각구 안에 팔부중상(八部衆像) 일구식(一軀式)을 양각하였다. 상대갑석은 이매(二枚)의 판석으로 되어 있으며 상면에 이단의 받침이 있어 탑신부를 받치고 있다. 탑신부는 옥신과 옥개석이 각각 일매석으로 되어 있고 각층마다 체감의 비율이 되어 있으며 탑신은 각층마다 우주형이 표시되어 있다. 옥개석은 처마 끝이 직선을 이루었고 옥개 받침은 각층 5단이며 그 주위로 구조가 돌려 있다. 상륜부는 노반만 남아있고 나머지는 결실되었다. 이 양탑의 건립연대는 그 양식으로 보아 9세기경으로 추정되며 이 곳 절 이름은 알 수 없다.
* 연혁(유래) 이 탑은 통일신라시대인 9세기경에 조성된 것으로 불국사의 석가탑과 다보탑처럼 형식을 달리하는 두 탑이 동서로 마주보고 서 있다. 높이는 동탑이 7.04m, 서탑이 5.85m로 차이가 있다. 동탑은 3층인데, 돌을 벽돌처럼 다듬어 쌓은 모전석탑(模塼石塔) 양식으로, 바닥돌 위에 돌덩이 여덟 개로 어긋물리게 기단을 쌓고 층마다 몸체돌 하나에 지붕돌 하나씩을 얹었다. 지붕돌은 벽돌을 쌓아 만든 것처럼 처마밑과 지붕 위의 받침이 각각 5단이다. 서탑은 이중 기단 위에 3층으로 몸돌을 쌓은 일반형이다. 윗기단의 몸체에 팔부중상을 돋을새김한 것이 독특하다. 팔부신중은 신라 중대 이후에 등장하는 것으로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탑을 부처님의 세계인수미산으로 나타내려는 신앙의 한 표현이다.
[경주 남산 천동골 천동탑]
경주 남산(동남산) 천동골에는 통일신라시대의 이형석탑인 '천동탑'이 있다. 높이 2m, 직경 80cm 내외인 자연 돌기둥을 이용하여 약100개의 감실을 얕게 파낸 특수한 모양의 이형탑(모양이 이상한 탑)이다. 이 천동탑은 천불천탑사상과 관계가 있는 탑으로 하나의 감실에 10분의 부처의 영혼이 있으므로 100개의 감실 속에 모두 1,000분의 부처님이 존재한다고 믿는 사상이다.
2개의 천동탑이 있는데, 서탑은 세워져 있고, 동탑은 윗부분이 파속된 체로 넘어져 있었는데,
2020년 남산마을의 한 재실 향나무 버팀석으로 있던 것이 파손된 부위로 확인되어
문중의 기증(?)으로 원래의 자리로 옮겨져 있다고 한다.
원래의 자리로 돌아온 것인데, 반납인 것이지 기중은 아닌 것 같다?
경주 남산 칠불암 마애불상군 삼존불상은 4.26m 높이의 바위 면에 꽉 차게 부조한 마애불로서, 거의 환조(丸彫)에 가까운 고부조(高浮彫: 모양이나 형상을 나타낸 살이 매우 두껍게 드러나게 한 부조)로 되어 있다. 본존은 높이가 2.6m나 되는 거대한 좌상이며, 두 협시보살도 2.1m로 인체보다 훨씬 장대하다.
본존은 머리가 둥글고 크며 소발(素髮)에 큼직한 육계(肉髻)가 솟아 있다. 사각형에 가까운 얼굴은 풍만하여 박진감이 넘치며, 부풀고 곡선적인 처리로 자비로운 표정을 띠고 있다. 즉, 부풀고 두껍게 처리한 눈두덩이라든가 쌍꺼풀진 오른쪽 눈, 부드러우면서도 양감나게 처리한 코, 세련된 입, 어깨까지 닿은 긴 귀 등 자비롭고 원만한 얼굴 모습을 성공적으로 묘사하였다.
목에는 삼도(三道)가 없으며, 어깨는 넓고 강건하여 건장한 가슴, 가는 허리와 더불어 당당하며 박진감 넘치는 모습이 잘 표현되어 있다. 수인(手印)은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으로 두 손이 유난히 큼직하다.
법의는 우견편단(右肩偏袒)인데 상체의 옷주름은 곡선적인 계단식 주름이며, 옷깃이 반전(反轉)되었다. 하체의 옷주름은 큼직한 선으로 처리되었는데, 두 다리 밑으로 흘러내린 옷자락은 규칙적인 지그재그 무늬를 이루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대좌는 위로 향한 연꽃잎과 아래로 향한 연꽃잎의 이중연화좌로서 단판칠엽(單瓣七葉)은 잎들 사이의 잎에 중간선을 그은 특이한 형태로서, 9세기에 나타나는 독특한 연화문의 조형(祖形)으로 주목된다. 광배는 보주형(寶珠形)의 소박한 무늬를 두드러지게 표현하였다.
협시보살은 좌우 모두 동일한 모습에 비슷한 양식을 나타내고 있는데, 풍만한 얼굴, 벌어진 어깨, 당당한 가슴, 풍만하고 육감적인 체구, 유연한 삼곡(三曲)의 자세 등이 사실적으로 묘사되었다. 왼쪽 보살은 꽃을 들고 있고 오른쪽 보살은 정병(淨甁)을 들고 있으며, 모두 본존 쪽을 향하여 몸을 약간 비틀고 있다.
이 삼존불 앞의 돌기둥에 새겨진 사방불은 높이가 2.23m 내지 2.42m 정도로 바위 모양에 따라 크기를 달리하고 있는데, 네 상 모두 연화좌에 보주형 두광을 갖추고 결가부좌하였다. 동면상(東面像)은 본존불과 동일한 양식으로 통견(通肩)의 법의가 다소 둔중하나 신체의 윤곽이 뚜렷이 표현되고 있다. 왼손에는 약합(藥盒)을 들고 있어서 약사여래로 생각된다. 남면상(南面像)은 여러 면에서 동면상과 비슷하나, 가슴에 표현된 군의(裙衣)의 띠 매듭은 새로운 형식에 속하며, 무릎 위의 옷주름, 짧은 상현좌(裳懸座)의 옷주름이 상당히 도식화되었다.
서면상(西面像)은 동면상과, 북면상(北面像)은 남면상과 서로 유사하나, 북면상은 다른 세 불상과 달리 특히 얼굴이 작고 갸름하여 수척한 인상을 주는 것이 특징이다. 이 네 상의 명칭을 확실히 하기는 어려우나, 방위(方位)와 수인(手印)·인계(印契)에 의하여 볼 때 일단 동면상은 약사여래, 서면상은 아미타여래로 볼 수 있다.
♣.누군가에 화가 났다면.♣
누군가에게 화가 났다면,
그건 사실 당신 입장에서만
상황을 바라본다는 뜻이다. '나라면 어떨까?',
'내가 저 입장이라면 어떤 기분일까?'라는 공감의
질문을 던져 상대의 입장을 헤아려보자. 이 질문은
즉각적으로 적의를 없애줄 만큼 강력하다.
더 많이 알수록 더 많이 용서하게 된다.
첫댓글 백운암, 천왕지산은 담에 한번 가봐야겠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