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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조임금(1468년)이 보령에 잔치를 베풀다.
조선 초기의 명장으로 세조 때 여진 정벌에 공이 컸으며, 이시애(李施愛)의 난 진압에 참여하여 격파하였던 공으로 정충출기포의적개공신 1등이 되고 우의정으로 승진되었던 강순康純)이 어머니의 병을 구환하러 보령으로 가는데 세조임금이 강순에게 편의를 베풀었다.
우의정(右議政) 강순(康純)의 어머니는 충청도(忠淸道) 보령현(保寧縣)에 있는데, 병이 있어 강순이 가서 뵙고 선영(先塋)에 분황(焚黃)하려 하니, 임금이 이조(吏曹)와 병조(兵曹)에 명하여 말미를 주고 역말[驛馬]을 주게 하였다.
또한 의원(醫員)과 강순의 아들 강석손(康碩孫)에게 역말을 타고 따라가게 하고, 승정원(承政院)으로 하여금 충청도 관찰사(忠淸道觀察使) 김지경(金之慶)에게 치서(馳書)하게 하여 "우의정 강순(康純)의 어미가 있는 보령의 거주지에 잔치를 베풀게 하였다.
또 선영(先塋)에 분황(焚黃)할 때 치전(致奠, 제수를 갖추고 제사를 올리는 것) 도록 하였으며 그가 돌아올 적에는 한 번 잔치를 베풀어 또다시 위로하도록 하라." 명하였다. (1468년(成化 4년) 세조실록 45권, 신미 2번째 기사 중.)..
- 강순(康純) 조선초기의 명장으로 세조 때 여진정벌에 공이 컸으며, 이시애(李施愛)의 난 진압에 참여하였으며 본관은 신천. 자는 태초(太初). 판삼사사를 지낸 윤성(允成)의 증손이다. 1450년(문종 즉위) 첨지중추원사로 있다가, 조전절제사로 박천에 나가 북방 방어에 힘썼으며 1453년(단종 1) 행회령도호부사를 거쳐 판의주목사로 옮겼다. 1458년(세조 4) 첨지중추원사로 복귀하여, 이듬해 사은사로 명(明)에 다녀왔다. 1460년 영북진도호부사로 여진정벌에 참가했으며, 그 공으로 종성절제사가 되었다. 이후 5년 가까이 북방 방어에 힘쓰면서 세조의 신임을 받았다. 1467년 이시애가 반란을 일으키자, 진북장군으로 평안도 군사를 이끌고 어유소·남이 등과 함께 홍원·북청·만령 등지에서 반란군을 격파했다. 그 공으로 정충출기포의적개공신 1등이 되고 우의정으로 승진되었다. 이해 서정장군으로 남이·이유소 등과 압록강을 건너 건주위 동북쪽 파저강 올미부의 여러 곳을 토벌하고 추장 이만주(李滿住)를 죽였다. 이 공으로 명의 헌종(憲宗)으로부터 은 20냥과 비단을 받았으며 1468년 신천부원군에 봉해지고 영의정으로 오위도총관에 임명되었으나, 유자광의 무고로 일어난 남이의 옥사에 연루되어 사형당하였으나 1818년(순조 18) 우의정 남공철(南公轍)의 건의로 누명이 풀리고 복관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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