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소해진 포플러
저녁을 먹고 우리 부부는 엘지와 롯데의 야구경기(엘롯라시코)를 시청하고 있었다. 9회말 트윈즈가 6-8로 리드당하고 있는 상황에서 자이언트의 김원중 투수가 마무리로 나섰다. 빼어난 실력과 더불어 목덜미를 지나 어깨를 덮을 정도로 치렁치렁 긴 장발로 유명한 선수다.
“아니, 더워서 어떻게 저러고 있는 거야? 공 던질 때마다 눈을 가리고 걸리적거려서 머리에 신경 쓰느라 제대로 못 던지겠네. 못 봐주겠다.”
보수적인 아내는 남자의 장발을 혐오한다. 나도 덩달아 “한국판 데릴라를 만나 잠자는 사이에 머리칼이 댕강 잘리면 정신이 확 들겠네.”라고 맞장구를 친다. 머리를 단정하게 깍은 김원중 선수의 잘 생긴 모습을 머릿속에서 그려보면서, 곧 이어 나는 오전 산책에서 보았던 강한 가지치기로 왜소해진 포플러를 떠올렸다.
한 육칠 년 전쯤 되었는가, 구청에서 도림천변의 새로운 보행로를 따라 포플러를 여러 그루 죽 심었다. 아낌없이 주어진 햇살과 물기를 양분삼아 포플러는 하늘을 향해 거침없이 치솟으며 잘 자랐다. 올해 초 여름 더위가 오기 전 그 길을 걸으며 문득 느낌이 있어 살펴보니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하고 삼각 고깔을 쓴 키다리들이 원근법에 맞추어 열을 지어 서서 모든 줄기와 가지들을 위로 향해 치켜들고 미풍에도 나뭇잎을 뒤집으며 살랑거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는데 그 광경은 신선하고 아름다웠다.
왜 포플러가 모든 줄기와 가지를 번쩍 쳐들고 있는지, 그 의문에 관해서는 그리스 전설이 답을 해주고 있다.
<먼 옛날 포플러는 다른 나무들처럼 줄기와 가지를 위, 아래 그리고 옆으로 벋어 무성한 그늘을 만들었다. 어느 날 어떤 간 큰 사나이가 무지개의 기초였던 황금 항아리를 훔쳤다. 그는 밤이 다가오자 길가에 서있는 포플러의 무성한 늘어진 줄기 밑에 항아리를 숨기고 떠나갔다. 그 날 밤 여신 이리스가 아버지 제우스신에게 황금 항아리를 찾아 달라고 울며 애원했다. 제우스신은 즉시 장사, 목동, 전령과 도둑의 신 헤르메스에게 명령을 내렸다. 유능한 수사관 헤르메스는 숲 속에 도난품이 숨겨져 있으리라고 추리하고 신 새벽 모든 나무들에게 황금 항아리를 못 보았느냐고 물었다. 아직 잠이 덜 깬 나무들 모두 보지 못했다고 답했다. 포플러도 그렇게 대답했는데 도둑이 항아리를 숨겼을 때 포플러는 쿨쿨 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헤르메스가 외쳤다. “신체검사를 실시한다. 모두 줄기와 가지를 위로 쳐들엇!” 곧 포플러의 무성한 줄기 밑에서 황금 항아리가 발견되었다. 그러자 포플러가 “저의 부주의를 용서해 주십시요! 앞으로는 영원히 모든 줄기와 가지를 쳐들어 모두들 제가 아무 것도 숨기지 않았음을 알도록 하겠습니다.”라고 맹세하여 그 후로 포플러는 오늘과 같은 모습이 되었다고 한다.>
위 전설의 마지막 부분엔 다른 버전이 있는데, 그것에 의하면 포플러의 거짓말에 화가 난 헤르메스신이 포플러에게 영원히 줄기와 가지를 위로 쳐들고 살게끔 벌을 내렸다고 한다. 나는 이 버전이 더 맘에 드는데, 우리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 벌을 서면 무릎을 꿇고 포플러처럼 팔을 번쩍 쳐들고 있었던 것과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기 때문이다. 한편 누가 황금 항아리를 훔쳤으며 무슨 이유로 나무 밑에 감추었는지 등은 절도범이 잡히지 않아 알 수 없게 되었다고는 하나, 헤르메스가 도둑을 알고서도 검거하지 않았다고 나는 생각한다. 헤르메스가 달래 도둑의 신인가 말이다. 괜찮은 도둑은 적당히 봐주면서 정보원으로 쓰지 않았을까 싶다.
어찌 되었던 간에 포플러는 호리호리한 몸집으로 창공을 향해 날아갈 듯이 서있는 그 모양이 아름다워 모네, 홉베마, 폴 세잔, 고흐, 모리스 드 블라멩코, 줄리아 프린튼, 구스타프 클림트 같은 화가들이 그림의 주제로 삼았고 특히 모네는 포플러를 사랑해서 포플러가 있는 땅을 사들여 놓고 많은 포플러 그림을 그렸을 정도였다.
그런데 며칠 산책을 거른 다음인 그 날, 천변을 걸으며 나는 달라진 포플러들의 왜소하고 초췌한 모습에 일순 놀랐고 놀란 가슴을 진정시킨 다음에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무들의 머리 부분을 20퍼센트 정도 잘라버리고 옆의 줄기와 가지도 사정없이 잘라내어 수년 간 나무가 자랐던 몫을 다 없애버렸다. 포플러 몇 그루는 특히 심하게 가지들을 잘라내고 솎아내어 푸른 잎들은 보이지 않고 가지 사이로 건너편이 휑하니 다 내다보였다. 내 어리석은 상상엔 무고한 포플러들이 품에 이리스의 목걸이, 무지개 조각을 달고 있다가 모진 처벌을 받은 것처럼 가엾게 보인다.
이것은 마치 김원중 선수의 장발을 자르고 다듬어 초등학생의 동그란 상고머리로 만든 격이다. 아니다. 그 정도가 아니다. 그들은 포플러의 머리를 원했으므로 포플러는 솜씨가 나쁜 이발사, 한국판 데릴라를 만난 것이 아니고 사악한 댄서, 살로메를 만난 격이다.
미루어 짐작하건데 구청 공원과의 입장은 너무 높게 자란 포플러는 태풍이 불면 줄기가 부러질 가능성이 크고 부러지는 줄기에 사람이 다칠 위험이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으므로 강한 가지치기와 톱핑(topping)이 불가피했다는 것이리라. 특히 심하게 가지치기를 당한 포플러들에 대해서는 "강풍이 내습하는 장소에 위치하여 수간과 수지가 절단, 낙하하여 인명손상의 위험이 상존하므로 강한 가지치기를 실시함으로써 바람이 수간 및 수지 사이를 원할하게 통과하여 절단사고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함이니 이 점 양지하시기 바랍니다."라고 해명하리라.
그러나 태풍이 불면 천변은 출입이 금지되는데 무슨 인명손상의 위험이 있다는 말인가? 그렇게 안전 위주로 산다면 어떻게 외출을 해서 차도 타고 길도 걸어다니는지 반문하고 싶다. 그리고 이렇게 강한 가지치기를 하면 잘라낸 상처에 곰팡이와 세균이 침입하기 쉽고 잘라진 머리부분을 복구하려면 숨은 눈을 틔워야하므로 많은 에너지가 소요되고 나무는 약해지게 된다고 한다.
결국 나무를 사랑하는 마음이 없는 사람들이 조자룡이 헌 창 쓰듯이 전동톱을 마구 휘두르고, 그것도 열심히 일했다고 나랏돈을 주고 받으니, 그 결과로 자연이 손상되고 우리 시민들의 마음이 상한다. 빈민을 위한 복지가 목적이라면 차라리 삽으로 조그만 구덩이를 팠다가 다음 날 다시 메우는 일을 반복하고 돈을 지급하는 방법을 취하고 멀쩡한 나무들은 가만히 놔두었으면 정말 좋겠다.
구로구에 속한 아름다운 포플러 길이 망가졌으니 나는 앞으로는 개천을 건너 영등포구의 산책로를 이용하여야만 할까 싶다.
주제와 관계는 없지만 혹시 궁금한 분들을 위해 알려드리면 그 날 롯데의 김원중 선수는 마무리에 실패하여(불론 세이브) 10회말 엘지가 역전승을 거두는 빌미를 제공했다. 마누하님의 논평에 따르면 김선수는 손과 팔을 탓하기보다 긴 머리칼을 탓해야 한다고 하는데 글쎄 어떨지. (끝)
첫댓글 포플러에 관한 재미있는 글이네요.
9년전에 미국 서부에서 시간을 보내느라 매일 수목원 (aboretum)에 가서 풀, 나무, 꽃, 새 등을 보고 있었는데, 어떤 여학생(?)이 나에게 aaa sycamore 와 bbb sycamore의 차이점을 묻는데, 버즘나무 (platanus)가 sycamore라는 것도 수목원에서 처음 알게된 나에게 왜 물었는지 모르겠어요.
교양이 있어 보이는 동양인과 대화를 나누어 보고 싶어서였겠죠. 대화를 나누다가 상호 뜻이 맞으면 다음 단계로 나가서 시간을 보내고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