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티끌없어 같이 존재한다"/구하스님
"스님들 있으니 그윽하고 한가로워 물소리만 들린다"
"나, 이제 갈란다. 너무 오래 사바에 있었어. 그리고 다시 통도사로 와야지"
불보종찰 통도사의 승풍을 진작시키고 사격(寺格)을 바르게 세운
구하(九河)스님이 1965년 11월24일 한낮
에 입적에 들기전 남긴 법어이다. 이때 스님의 세상나이는 94세였고, 법의 나이는 82세였다.
1872년 울주에서 태어 난 스님은 어려서 신동으로 불릴 만큼 총명함을 보였다. 유가의 학문
을 섭렵한 스님은 13세되던 해(1884년) 천성산 내원사로 출가한다. 5년간 정지한 스님은 18
89년 경월(慶月)스님을 은사로 사미계를 수지했다.
이후 범어사에서 강백 의룡(義龍)스님에게 외전을 3년간 배우고, 해담(海曇)스님과 혜옹(慧
翁)스님에게 내전을 두루 배웠다. 또, 표충사의 만화(萬化)스님에게 계를 수지했다. 이때가
1896년이다. 1898년에는 지리산 대원사에서 강백 영호(永湖)스님에게 대교를 배우는등 내외
전을 널리 안았다. 스님은 1900년 통도사에서 성해(聖海)스님의 사법(嗣法) 제자가 되는데,
이때 받은 법호가 구하이고, 법명은 천보(天輔)였다.
1905년 통도사 옥련암에서 정진하던 스님은 정각의 경지에올랐다. 당시 스님이 읊은 오도송
(悟道頌)이다. "심진미합동귀숙(心塵未合同歸宿) 오체투공공귀의(五體投空共歸依)" 우리 말
로 옮기면 이렇다. "마음에 티끌이 따로 없어 같이 존재하고, 오체를 공중에 던지니 함께귀
의 한다네"
1911년 40세의 나이로 통도사 주지로 취임한 스님은 같은 해 11월3일 진산식에서 ·각 지역
포교당 설치 ·인재양성 ·조선불교 혁신 ·선교양종 확립 등 근대불교의 개혁 기치 13가지
를 약속했다. 이후 조선불교의 발전을 위해 정진하던 스님은 1950년 초대중앙총무원장에 취
임하면서 불교정화에 헌신했다.
구하스님은 1932년4월17일 통도사를 출발해 8월26일 금강산을 순례하며 살펴본 명승지와 사
찰 30여곳을 꼼꼼하게 기록하기도 했다. 당시 금강산의 생생한 모습과 이를 보고 느낀 소감
등을 기록한 구하스님의 90여편의 시는 소중한 역사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금강산 신계사를 참배한 스님의 소감은 이러했다.
"집선봉 위 가을하늘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땅이 넓고 평평하여 걸음 또한 편하도다 골짜기
외진 곳에 승려들의 집을 지으니 그윽하고 한가로워 물소리만 들리누나."
평생 참선과 염불정진에 몰두했던 스님은 통도사를 비롯한 한국불교의 승풍진작에 적극나섰
다. 또, 누구에게나 존경받는 인품을 지녔던 스님은 대중들을 제도하고 섭수하는 일을 게을
리 않았다.
그리고, 불교정화에도 적극 앞장 섰으며, 스님의 붓글씨는 보는 이로 하여금 환희심을 불러
일으켰다. 또 일제시대에는 독립운동에 자금을 대는등 민족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도 보
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