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김대건 신부님의 탄생지이며 4대의 순교자가 살던 신앙의 못자리
한국 최초의 사제인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탄생하고 그 일가가 살았던 곳이다. 증조부 하느님의 종 김진후(1814년 순교), 종조부 하느님의 종 김한현(1816년 순교), 부친 성 김제준(1839년 순교), 그리고 성 김대건 신부(1846년 순교)등 4대의 순교자를 배출한 곳이다. 이로써 솔뫼는 신앙의 못자리로 불리게 되었다.
충남 당진군 우강면 송산리에 위치한 솔뫼는 소나무 숲이 청청하다고 하여 솔뫼[松山]라 불린다. 김대건(金大建, 보명 芝植, 1821~1846, 안드레아) 신부의 증조부인 김진후(金震厚, 보명 運祚, 1738~1814, 비오)가 50세에 영세한 이후 교우 마을이 되었다. 면천 군수로 있을 당시 김진후는 내포 지방의 사도라고 불리는 이존창(李存昌, 1752~1801, 루도비코 곤자가)에게서 복음을 전해들은 뒤 벼슬을 버리고 신앙생활에 전념하다가 신해·신유박해 때 체포되어 10여 년을 옥살이하다가 1814년 해미 감옥에서 옥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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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6년에 김진후의 셋째 아들 김종한(金宗漢, 보명 漢鉉, ?~1816, 안드레아)이 순교하였고, 1839년에는 다시 둘째 아들 김택현(金澤鉉)의 아들 김제준(金濟俊, 보명 濟麟, 1796~1839, 이냐시오)이 순교, 1846년에는 김제준의 아들 김대건 신부가 순교함으로써 김대건의 가문은 32년 사이에 4대가 순교하는 영광의 가문이 되었고, 솔뫼는 신앙의 못자리로 불리게 되었다.
김대건 신부 가문 사람 가운데 가장 먼저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사람은 김진후의 장남인 종현(淙鉉)이었다. 그는 이존창의 권면으로 입교한 후 형제와 조카들을 차례로 인도하였고, 그의 부친 김진후도 1791년 이전에 입교하였다. 아울러 이존창의 딸인 이 멜라니아와 김대건 신부의 조부인 김택현이 혼인함으로써 김대건 신부 가문의 천주 신앙은 더욱 활기를 띠었으며, 그러한 신앙 전통이 김제준, 김대건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미 증조부와 종조부가 순교한 천주학 집안이어서 가세는 기울대로 기울었고 또 언제 새로운 박해가 닥칠지 몰라 김대건 신부 집안은 1827년의 정해박해를 계기로 솔뫼를 떠났다. 가솔을 이끌고 서울 청파로 이주한 조부 김택현은 그곳에서 다시 경기도 용인의 한덕동(경기도 용인군 이동면 묵리)으로 옮겨 살다가 1830년에 사망하였다.
그 후 김제준은 가족을 데리고 한덕동 이웃의 골배마실로 이주하였다. 김대건 신부는 16세 때인 1836년 이곳에서 모방 신부에 의해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최양업(崔良業, 1821~1861, 토마스)과 최방제(崔方濟, 과출, 1821~1837, 프란치스코)와 함께 마카오로 유학하여 신학을 공부했고 상해에서 페레올(Ferr´eol, 高, 1808~1853, 요셉) 주교 집전으로 사제품을 받았다. 1845년에 입국한 김 신부는 선교 활동에 힘쓰는 한편, 동료 최양업 부제와 외국 선교사 신부를 맞이하기 위해 애쓰다가 1846년 6월 5일 체포되어 1846년 9월 16일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 멀리 있는 것이 (솔뫼에서) <김영수> ▒
뜨거이 살아 뜨거이 죽고
뜨거이 죽어
다시 뜨거이 사는 법 아는
미소 맑은 소년 하나
지금도 솔뫼동산 우거진 속을
숨 가쁘지 않게 달리고 있습니다
멀리 있는 것이
더욱 또렷이 보이는 곳
소년은 아직도 부서지고 있는
나의 햇살입니다
아직도 가슴 뛰는 나의 노래입니다
안심하고 닿을 곳 있음을 아는 일
천길 절벽 앞에서도
하늘을 숨 쉬는 일
그 눈물같은 기도만이 영원하는 것입니까
나도 소년처럼 쉬지 않고 꿈을 달리면
마침내 여기 햇살 고인 동산에서
마음껏 죽을 수 있을까요
마음껏 살 수 있을까요
■ 순교자
◆ 김대건 신부 가문의 순교자들
김대건 신부의 가문은 한국천주교회 창립시인 1784∼1785년 3월 이전에 충청도 사도 이존창의 권유로 서울 명례방 김범우 토마스에게 배워서 처음으로 천주교에 입교한 후 1791년 신해박해, 1801년 신유박해, 1866년 병인박해 등 역대 박해 때마다 많은 수난을 당했으며 또한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왔다. 그리하여 10명의 순교자와 많은 증거자가 탄생했으며 그 중에는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와 부친 김제준(제린, 이냐시오), 김데레사 등 세분이 1984년 5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서 서울 여의도 신앙 대회 때 시성(諡聖)되었다. 더욱이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는 103위 순교 성인의 대표 성인이다.
◆ 성 김제준 이냐시오(1796∼1839)
김대건 신부의 아버지로 충청도 면천(沔川)땅 솔뫼에서 태어났다. 1814년에 순교한 할아버지 김진후와 큰아버지의 권면으로 입교한 뒤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위하여 경기도 용인으로 이사하여 농사를 짓고 살았다. 이 무렵 나 베드로(모방) 신부를 찾아가 세례와 견진 성사를 받고 용인으로 돌아와 회장으로 활약하였다. 1836년 15세 된 아들 김대건을 모방 신부에게 맡겨 마카오에 있는 신학교로 유학 보냈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김순성 일당의 밀고로 체포되었다. 포청에서 아들을 외국으로 보낸 국사범으로 간주되어 매우 혹독한 형벌과 고문을 받고 한때 배교하였으나, 형조로 이송된 후 배교를 취소하고 9월 26일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그의 나이 44세였다.
◆ 성녀 김 데레사(1796∼1840)
김 데레사는 1816년 대구에서 순교한 김종한의 딸로 충청도 솔뫼에서 태어났으며 김대건 신부의 당고모이다. 17세 때 교우인 손연욱 요셉과 혼인하였으나, 1824년 남편이 해미에서 순교하자 가난하게 혼자 살면서 신앙생활에 전념하였다. 정정혜와 함께 유방제 신부와 범 라우렌시오 주교의 살림을 돌보던 중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7월 11일 범 라우렌시오 주교의 집에서 정하상 일가와 함께 체포되었다. 김 데레사는 포청에서 주교의 은신처를 알아내려는 형리들에게 여러 차례의 혹형과 고문을 받았으나, 순교한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신앙을 본받아 꿋꿋이 참아 내고, 옥에서 만난 이광헌의 딸 이 아가타와 함께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며 신앙을 굳게 지켰다. 1840년 1월 9일 포청에서 44세의 나이로 이 아가타와 함께 교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 성 김대건 안드레아(1821∼1846)
김대건은 1821년 충청도 솔뫼에서 천주교 신자 김제준 이냐시오와 고 우르술라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굳센 성격과 진실한 신심을 보고 1836년 나 베드로(모방) 신부는 그를 신학생으로 뽑아 마카오로 유학 보냈다. 그는 6년 동안 신학 공부를 하고 1845년 8월 페레올 주교에게서 사제품을 받아 한국인 최초의 신부가 되었다. 고국에 돌아온 김 신부는 서울과 용인 지방에서 사목 활동을 시작하였으나, 1846년 음력 4월 주교의 명에 따라, 선교사들의 편지를 중국 배에 전하고 선교사들의 입국로를 개척하기 위하여, 황해도 지방으로 가게 되었다. 김 신부는 편지를 중국 배에 전하고 돌아오는 도중 순위도에서 관헌에게 체포되어 서울 좌포도청으로 이송되어 사형을 선고받고 1846년 9월 16일 새남터에서 군문효수로 치명하였다.
○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성 김제준 이냐시오, 성 김 데레사와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이시여,
●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와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이시여,
● 우리나라의 모든 성직자들을 위하여 빌어 주소서.
○ 성 김제준 이냐시오와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이시여,
● 우리 교회의 모든 성직자 수도자 가정을 위하여 빌어 주소서.
○ 성 김 데레사와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이시여,
● 저희 자신의 고신극기 수련을 위하여 빌어 주소서.
◆ 복자 김진후 비오 (1739∼1814년)
충청도의 면천의 솔뫼에서 태어난 김진후 비오는, 성 김대건(안드레아) 신부의 증조부요 1816년에 순교한 김종한(안드레아)의 부친이다. 족보에는 그의 이름이 ‘운조’(運祚)로 기록되어 있다. 그가 천주교 신앙을 처음 접하게 된 것은, 맏아들이 이존창으로 부터 교리를 전해 듣고는 이를 형제들에게 전하면서였다. 당시 그의 나이는 50세가량 되었었다. 1791년과 1801년의 신유박해 때 체포되어 배교를 뜻하는 말을 하고는 유배형을 받았지만, 1805년에 다시 체포되어 해미로 압송되었다. 그가 천주교 신자답게 행동한 것은 이때부터였다. 10년간 모범적인 인내심으로 옥중 생활의 고통을 참아냈으나, 결국 1814년 12월 1일(음력 10월 20일) 옥중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다. 당시 그의 나이는 76세였다.
◆ 복자 김종한 안드레아 ( ? ∼1816년)
김종한 안드레아는 충청도 면천의 솔뫼에서 태어났다. 족보에는 그의 이름이 ‘한현’(漢鉉)으로 나온다. 1814년에 순교한 김진후(비오)의 아들로, 성녀 김 데레사의 아버지가 되며, 성 김대건 신부의 작은 할아버지가 된다. 맏형으로부터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그의 부친 김진후가 1814년에 해미에서 옥사로 순교하고 그는 가족과 함께 홍주를 거쳐 경상도 영양의 우련밭(현 경북 봉화군 재산면 갈산리)으로 가서 오랫동안 숨어 살았다. 1815년의 을해박해가 일어난 뒤, 영양에서 체포되어 안동으로 끌려가서 문초와 형벌을 받은 뒤 대구로 이송되었다. 순교 후 그의 시신은 형장 인근에 매장되었다가 이듬해 3월 2일 친척과 교우들에 의해 그 유해가 거두어져 적당한 곳에 안장되었다.
◆ 손연욱 요셉 ( ? ∼1824)
손연욱은 충청도 홍주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신자의 본분을 기리는 일에 지극히 엄격하였다. 1811년에 순교자 김종한(계원) 안드레아의 딸인 김데레사(1839년 순교)와 혼인하였다. 그러나 결혼 생활 7년 후인 1817년 10월(음) 덕산의 배나다리(현 예산군 삽교읍 용동리)에서 마을 교우 30여명과 함께 체포되어 해미 진영으로 압송되었고 거기서 매우 혹독한 형벌과 고문을 당했으나 끝까지 신앙을 고수하였다. 무수한 고문을 오랫동안 당하고 옥중에 갇혀 영영 석방될 가망이 없어지니 그는 일생을 거기서 지내려는 것처럼 자리를 잡았다. 6∼7년이라는 세월이 이렇게 흘렀지만 그의 열심은 덜해지기는 고사하고 날로 더 단단해져갔다. 마침내 감옥 곁에 있는 어떤 집에서 동생과 같이 살 허락을 얻어 몇주일 동안 거기서 머무르다가 죽었다.
◆ 김제항 루드비꼬(1814∼1866)
김제항 루드비꼬는 김대건 신부의 막내 작은 아버지 희현의 아들로서 솔뫼에서 살다가 박해가 있자 온양 배여동으로 피신하여 살았다. 1866년 병인박해 때 포졸들에게 붙잡혀 그해 6월 6일 공주 감영에서 순교하였다.
◆ 김제교
김제교는 김진후의 아우 김귀조의 장손으로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다 1866년 병인박해 때 공주에서 순교하였고, 진식(베드로), 근식(프란치스코)은 김대건 신부님의 숙부 제철의 아들들로서 근식(프란치스코)은 1866년 해미에서 진식(베드로)은 그 이듬해인 1867년 공주에서 순교하였다.
◆ 김 베드로와 김 방지거
김 베드로와 김 방지거는 김대건 신부의 숙부인 제철의 네 아들 의식, 근식, 진식, 선식 4형제중의 2사람이다. 김 베드로는 김대건 신부님의 사촌이며 공주 금동에서 살다가 관헌들이 잡으러 오자 형과 식구는 피신시키고 자기는 자원으로 잡혀 1867년 11월 공주에서 순교하였다. 김 방지거는 베드로의 동생이며 덕산에서 살다가 포졸들에게 잡혀 순교하였다.
■ 천주교 성인공파 가계도
김해 김씨 안경공파는 2000년 판 경진세보를 발행하며 천주교 성인공파를 분파하였다. 즉 김해 김씨 안경공파 아산공문중 천주교 성인공파이다. 천주교의 순교자 김진후(譜名, 運祚.) 비오를 파조로하여 그의 네 아드님 종현(부안), 택현(대전/논산), 한현(종한,안드레아), 희현(익산)과 동생인 김귀조(정읍)와 그 후손을 천주교 성인공파로 분파한바, 파조 김운조(震厚)로부터 시작하여 현재 11대의 후손에 이르고 있으며, 2002년 9월 15일(추석 전주일) 솔뫼 성지에서 창립 총회를 거쳐 천주교 성인공파 종회를 설립하였다. 후손들은 4개의 (부안, 대전/논산, 익산, 정읍)집안으로 분포되어 있다.
김대건 안드레아의 증조부 김진후의 가문은 김해 김씨(金海金氏) 안경공파(安敬公派)의 아산공파(牙山公派)에 속하며 시조 가락국 김수로왕의 66대 손(孫)이며 중시조 목경공(牧卿公)의 16대 손(孫)이며 그의 가문이 이곳 충청도 솔뫼에 산 것은 고조부 수완(守完)때부터 인 듯하며 6대조 아산공 희현(希賢)이 아산 현감(縣監)을 지내고 5대조 의직(義直)이 또한 임진왜란 때 무과 급제하여 충청도 병마절도사를 지낸 이래 나라의 공신으로 대대로 벼슬을 한 사대부(士大夫)의 양반 집안이며 그도 또한 통정대부(通政大夫)로 공주 감영에 어떤 직을 맡고 있었다.
그의 가정에 신앙의 복음이 전파된 것은 1784년 한국 교회 창립 시에 충청도 복음 사도인 이존창(李存昌)의 권유를 받은 맏아들 종현<宗連>과 둘째아들 택현<春奉>이 1784-1785년. 3월 이전에 서울 명례방 김범우 토마스 집에서 신앙 집회를 할 때 김범우 토마스에게 교리를 배워 두 아들이 이존창과 함께 영세 입교함으로써 시작되었다.
1, 김종현(宗連, 자 희안 1764~1824) [부안 집안]
파조 김진후(運祚, 비오)의 큰아들로 1764년 충청도 면천 고을 솔뫼에서 부친 김진후<運祚>비오와 모친 유씨(兪氏)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법망을 피해 경상도와 전라도 산골로 피신을 다니며 포교 활동을 했고 여러 지방으로 숨어 다니며 주문모 신부를 도와서 박해 중에서도 열심히 포교 활동을 했으므로 훌륭한 신앙의 증거자였으며 나중에 큰아들 제광(1780-1863) 가정과 함께 고향 솔뫼에 있다가 1824년에 세상을 떠났으며 그 후 후손들은 전북 부안에 터를 잡고 살았기에 지금도 종현의 후손들을 부안 집안이라 부르고 있다.
2, 김택현(자는 春奉, 혹은 종원 1766~1830) [대전/논산집안]
파조 김진후(자 億金, 譜名 運祚) 비오와 모친 유씨(兪氏)사이에 둘째 아들로 1766년 4월 7일에 충청도 면천고을 솔뫼에서 태어났으며 본인도 순교하였고 아들 제준, 손자 지식(대건)등도 순교하였다, 후손들이 대전과 논산에 터를 잡고 살았으므로 택현의 후손들을 대전/논산집안 이라 부른다
(순교자 : 김택현, 아들 제린(제준), 손자 지식(대건), 손자 근식, 손자 진식, 손자 선식)
3, 김종한(譜名 漢鉉) 안드레아 [절손됨]
충남 면천 솔뫼(현 당진군 우강면 송산)에서 파조 김운조(진후)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1798년경에 처자와 자녀 김 데레사를 데리고 경상도 일월 산중인 안동 고을 우련밭(경상북도 봉화군 재산면 갈산리 우련전)으로 가서 17년 동안 열심한 신앙생활을 하며 살았다. 거기서 그는 오직 애긍에 힘쓰고, 기도와 성서 읽기와 그 밖의 모든 신자 본분을 지키는 일에만 부지런하였으며 1816년 11월 1일(음)에 대구 관덕정 형장에서 참수 치명을 당했다.
(순교자 : 김한현(宗漢), 딸 김제신 데레사, 사위 손연욱 요셉)
4, 김희현(자 秀元 1785~1839) [익산집안]
그는 1785년에 부친 김진후(운조)와 모친 유씨(兪氏) 사이에 넷째 막내아들로 충청도 면천고을 솔뫼에서 태어났다. 1815년 을해박해가 있은 후 1827년 정해박해 때 혹은 1839년 기해박해 때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공주에서 순교를 했다. 그리고 그의 아들 명집(濟恒) 루도비꼬도 병인 박해 때 순교를 했다. 후손들은 제항의 아들 경식의 부인이 순교한 후 천등산의 옥배 마을로 찾아들어 거기서 피난 생활을 하면서 숯을 굽고 옹기를 구우면서 살다가 고산 구제리등을 거쳐 익산으로 나와 터를 잡고 살았으므로 지금도 희현의 후손들을 익산집안이라 부른다.
(순교자 : 김희현, 아들 제항(明集) 루도비꼬, 손자 며느리, 무명인 손자, 경식의 처))
5,김준명(濟敎 : 1827~ ? ) [정읍집안]
파조 김운조(震厚)의 동생인 김귀조의 손자로써 김대건 신부의 7촌 아저씨이다. 김귀조 때부터 큰집과 함께 신앙을 받아들인 듯 하며, 1827년에 관현(1875~1835)의 첫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가족들은 충청도 여사울(현 예산군)에 가서 살다가 1866년 병인 박해가 일어나자 포교에게 잡혀서 배교하고 나와 살았다. 그러나 배교하고 나왔음을 항상 원통하다고 말하더니, 다시 공주 포교에게 가서 잡혀 치명하였다. 후손들은 제교가 순교한 후 여러 지방을 거치며 피난하다가 정읍에 터를 잡고 살았으므로 파조(派祖)의 동생인 귀조의 후손들을 지금도 정읍집안이라 부른다.
(순교자 : 김준명(譜名 濟敎))
김해 김씨「천주교 성인공파」 가문의 순교자는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가 시복시성 추진 대상자로 확정한 순교자 124명에 포함된 김진후 순교자를 비롯해 을해박해 때 대구 관덕정 형장에서 순교한 김종한(안드레아) 순교자와 기해박해 때 순교해 성인품에 오른 김제준(이냐시오 1796∼1839) 성인과 김제신(데레사1796∼1839) 성녀와 김대건(안드레아 1821,8,21~1846,9,16) 신부 등 모두 14명의 순교자를 배출하였다.
성인공파의 순교자와 증거자
[순교자]
1. 김진후 비오 : (김대건 신부 증조부.) 자는 억금, 보명: 운조,1735~1814.10.20(음)
2. 감종한 안드레아 : 보명 한현, 1816.11.1(음)대구 관덕정 형장 참수 치명
3. 김택현 : (김대건 신부 할아버지) 자는 춘봉, 혹은 종원 1766~1830
4. 사위 손연욱 요셉 : 김종한의 사위 (성녀 김제신 데레사의 남편) ~1824
5. 성녀 김제신 데레사 : 1796~1839 기해박해
6. 성 김제준 이냐시오 : 자는 신명. 보명 제린 1796~1839
7. 성 김대건 안드레아 : 보명 지식, 아명 재복, 1821~1846.9.16. 서울 새남터 군문효수 26세
8. 김제항 자 : 명집 루수 1814~1866년 병인박해
9. 김근식 베드로 : 1825~1867
10. 김진식 프란치스꼬 : 1827~ (1866~1873 ?)
11. 김준명 : 제교, 1827~1866
12. 김경식의 부인 : 병인박해(1866~1873) 때 순교
[순교자로 추증]
13, 김희현 : 자는 수원, 1785~1815 을해박해 후. 1827 정해박해 또는 1839 기해박해 때 순교
14, 김선식 : 1833-병인박해(1866~1873)때 옥천에서 순교
[증거자들]
1. 김종현 : 宗連, 자는 희안, 순교자 김진후(운조)의 장남
2. 이 멜라니아 : 순교자 김택현의 부인
3. 고 우르술라 : 성인 김제준의 부인이며 김대건 신부의 어머니
4. 김란식 프란치스꼬 : 김대건 신부의 친동생
5. 김현채 도마와 강 막달레나 동정부부 : 김종현의 증손
6. 김재식의 부인 경주 최씨 : 김종현의 둘째 아들 제맹의 자부
7. 김양배 : 김재식의 손자
8. 김현학 : 순교자 김선식의 아들
9. 김경식 : 순교자 김희현의 손자, 순교자 김제항 루도비꼬의 아들
10. 김현중 : 순교자 김진식의 아들
11. 김만식 : 파조 김진후의 동생 김귀조의 증손자
■ 찾아가는 길
■ 순례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