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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주대교구 꾸르실리스따 원문보기 글쓴이: 이선정스테파노
2024년 11월 10일 주일
[(녹) 연중 제32주일(평신도 주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늘 전례
평신도는 예수님께서 선택하신 백성으로서, 성직자가 아닌 모든 신자를 가리킨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평신도의 역할을 크게 부각하면서, 평신도를 통하여 교회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될 수 있다고 강조하였다. 한국천주교주교회의는 이러한 공의회의 정신에 따라 1968년 ‘한국 천주교 평신도 사도직 협의회’(지금은 ‘한국 천주교 평신도 사도직 단체 협의회’)의 결성과 더불어 해마다 대림 제1주일을 ‘평신도 사도직의 날’로 지내기로 하였다. 평신도들에게 주어진 사도직의 사명을 거듭 깨닫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 뒤 1970년부터는 연중 마지막 주일의 전 주일을 ‘평신도 주일’로 지내 오다가,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연중 마지막 전 주일을 ‘세계 가난한 이의 날’로 정하시면서 2017년부터 한 주 앞당겨 지내고 있다.
오늘은 연중 제32주일이며 평신도 주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고아들과 과부들의 아버지, 떠돌이들의 피난처, 억눌린 이들의 정의이시니, 하느님 사랑에 의탁하는 불쌍한 이들을 지켜 주십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주시는 자유와 빵을 넉넉히 얻어, 당신 자신을 내어 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가진 것을 형제들과 함께 나누도록 합시다.
말씀의 초대
엘리야 예언자는 사렙타의 과부에게 물과 빵을 청하고는, 그 여자의 밀가루 단지는 비지 않고 기름병은 마르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제1독서). 히브리서의 저자는, 그리스도께서는 많은 사람의 죄를 짊어지시려고 단 한 번 당신 자신을 바치셨다고 한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고 하신다(복음).
제1독서
<과부는 밀가루로 작은 빵을 만들어 엘리야에게 가져다주었다.>
▥ 열왕기 상권의 말씀입니다. 17,10-16
그 무렵 엘리야 예언자는 10 일어나 사렙타로 갔다.
그가 성읍에 들어서는데 마침 한 과부가 땔감을 줍고 있었다.
엘리야가 그 여자를 부르고는,
“마실 물 한 그릇 좀 떠다 주시오.” 하고 청하였다.
11 그 여자가 물을 뜨러 가는데 엘리야가 다시 불러서 말하였다.
“빵도 한 조각 들고 오면 좋겠소.”
12 여자가 대답하였다.
“주 어르신의 하느님께서 살아 계시는 한,
구운 빵이라고는 한 조각도 없습니다.
다만 단지에 밀가루 한 줌과 병에 기름이 조금 있을 뿐입니다.
저는 지금 땔감을 두어 개 주워다가 음식을 만들어,
제 아들과 함께 그것이나 먹고 죽을 작정입니다.”
13 엘리야가 과부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말고 가서 당신 말대로 음식을 만드시오.
그러나 먼저 나를 위해 작은 빵 과자 하나를 만들어 내오고,
그런 다음 당신과 당신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드시오.
14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소.
‘이 주님이 땅에 비를 다시 내리는 날까지,
밀가루 단지는 비지 않고 기름병은 마르지 않을 것이다.’”
15 그러자 그 여인은 가서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다.
과연 그 여자와 엘리야와 그 여자의 집안은 오랫동안 먹을 것이 있었다.
16 주님께서 엘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대로,
단지에는 밀가루가 떨어지지 않고 병에는 기름이 마르지 않았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제2독서
<그리스도께서는 많은 사람의 죄를 짊어지시려고 단 한 번 당신 자신을 바치셨습니다.>
▥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 9,24-28
24 그리스도께서는, 참성소의 모조품에 지나지 않는 곳에,
곧 사람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않으셨습니다.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느님 앞에 나타나시려고 바로 하늘에 들어가신 것입니다.
25 대사제가 해마다 다른 생물의 피를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듯이,
당신 자신을 여러 번 바치시려고 들어가신 것이 아닙니다.
26 만일 그렇다면 세상 창조 때부터 여러 번 고난을 받으셔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분께서는 마지막 시대에
당신 자신을 제물로 바쳐 죄를 없애시려고 단 한 번 나타나셨습니다.
27 사람은 단 한 번 죽게 마련이고 그 뒤에 심판이 이어지듯이,
28 그리스도께서도 많은 사람의 죄를 짊어지시려고
단 한 번 당신 자신을 바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을 고대하는 이들을 구원하시려고
죄와는 상관없이 두 번째로 나타나실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저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2,38-44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38 가르치시면서 이렇게 이르셨다.
“율법 학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긴 겉옷을 입고 나다니며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즐기고,
39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잔치 때에는 윗자리를 즐긴다.
40 그들은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 먹으면서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는 길게 한다.
이러한 자들은 더 엄중히 단죄를 받을 것이다.”
41 예수님께서 헌금함 맞은쪽에 앉으시어,
사람들이 헌금함에 돈을 넣는 모습을 보고 계셨다. 많은 부자들이 큰돈을 넣었다.
42 그런데 가난한 과부 한 사람이 와서 렙톤 두 닢을 넣었다.
그것은 콰드란스 한 닢인 셈이다.
43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까이 불러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44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다 넣었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과부의 정성을 눈여겨보십니다. 부자들은 자신이 가진 것에서 얼마씩을 넣었지만, 과부는 생활비를 모두 봉헌하였습니다. 만일 교회가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한다면, 어떤 모습일지 생각해 봅니다.
평신도는 성직자가 아닌 모든 신자를 뜻하고, 교회 안에서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합니다. 그런데 교회에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이들이, 봉헌은 제 몫이 아니라고 생각하며 자신을 봉헌하지 않는다면, 자신이 가진 것 가운데 얼마씩만 봉헌하는 부자와 별반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교회의 봉헌이 과부의 봉헌과 같게 되려면 교회의 대부분을 구성하는 평신도들도 자신을 주님께 바쳐야 합니다.
예전에는 성직자나 수도자처럼 봉헌을 서약한 이들만 주님께 봉헌할 수 있었고, 교회에 주어진 사명에 대한 책임도 그들에게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 교회의 사명은 평신도를 포함한 온 교회의 책임이며, 온 교회 구성원이 헌신하고 봉헌하여 함께 이 사명에 참여해야 한다고 여깁니다. 물론 새로운 교황님 한 분이 일으키시는 변화가, 교회가 나아가는 방향을 바꿀 만큼 영향력이 매우 큽니다.
그러나 다른 모든 신앙인이 그 변화에 함께하지 않는다면, 교회는 바뀌지 않습니다. 새로 부임한 한 사제가 본당 공동체의 변화를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당 신자들이 변화하지 않는다면, 그 공동체는 바뀌지 않습니다. 평신도 주일을 맞이하여 모든 평신도 그리스도인이 교회에 자신을 봉헌하고 교회의 선교 사명에 책임을 다하여 참여하는 주님의 일꾼이 되기를 주님께 청합니다.(최정훈 바오로 신부)
세상 안에서도 충분히 거룩하게 살 수 있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크게 착각하고 있는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교계 제도 안에 성직자·수도자들은 평신도들보다 훨씬 더 하느님 가까이 있고, 평신도들보다 훨씬 거룩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착각입니다.
교회나 수도회, 수녀회는 거룩한 곳이고, 결혼생활이 이루어지는 가정이나 세상은 속된 것으로 여기는 착각입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이런 그릇된 생각을 완전히 새롭게 혁신한 은총의 사건이었습니다. 교회 안에서 교황님이나 주교님들은 1중대, 사제나 수도자들은 2중대, 평신도들은 3중대가 아님을 공의회는 명확하게 강조했습니다.
“평신도들은 교회의 주체이자 교회의 주인공입니다. 교회의 위계 제도, 다시 말해서 주교직, 사제직이 하느님의 백성인 평신도 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존경하는 성 요한 23세 교황님께서는 평신도들 역시 성화의 길로 불림받았음을 명백히 강조하셨습니다.
“평신도들은 세상 안에서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합니다. 평신도들은 세상 안에서 거룩함을 지향하는 신앙생활을 해나가야 합니다. 성화(聖化)된 삶을 교회 밖 세상 안에서 실천하는 것이 평신도에게 주어진 소명입니다.”
훌륭한 평신도들을 만나면서 저는 늘 확신합니다. 신분이 절대로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진흙탕 같은 세상 한가운데서 살아가면서도, 한 송이 청초한 연꽃처럼 살아가시는 분들도 많이 존재한다는 것을.
끝도 없는 고통의 세월 속에서도, 언제나 거룩함을 갈망하며,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평신도들은 이미 성화의 길로 접어들었다는 것을.
오늘 평신도 주일을 맞아 꼭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세상 안에서도 충분히 거룩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을. 평신도들께서도 간절히 열망한다면, 거룩한 갈망을 마음에 품고 살아가신다면, 세상 안에서 충분히 봉헌생활을 해나가실 수 있다는 것을.
특별히 평신도들께서는 매일 수행하고 계시는 작은 사랑의 실천을 통해, 저희 사제나 수도자들이 수행하는 직무 못지 않은 성직을 수행하실 수 있습니다.
평신도들께서 매일 행하고 계시는 가까운 사람들 가족들을 향한 봉사의 현장에서, 짜증내면서 억지로 하시는 것이 아니라, 최대한 기쁜 얼굴로 봉사하실 때, 여러분들은 이미 성화의 길을 걷고 계시는 것입니다.
‘나를 찾아오는 이웃들 한 명 한 명이 다 변장하고 찾아오시는 예수님이다.’ 생각하고, 그들을 대한다면, 여러분들은 그 어떤 위대한 주교님이나 수도자들이 수행하는 직무보다도 훨씬 고귀한 성직을 수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알쏭달쏭하면서도 참 진리의 말씀이 하나 있습니다. “스님이 술집에 들어가면 술집이 절간이 되고, 술꾼이 절간에 들어오면 절간이 술집이 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평신도들께서도 술집에 들어가시면 그 술집을 주님의 성전으로 변화시키고자 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여러분들 발길 닿은 곳마다 주님의 성전으로 변화시켜나가시길 바랍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수학 시간에 ‘공약수와 교집합’을 배웠습니다. 공약수는 두 수 사이에 공통으로 들어있는 수를 의미합니다. 교집합은 두 개 이상의 집합에서 공통으로 포함된 원소들로 이루어진 집합을 의미합니다. 즉, 두 집합에 모두 속한 원소들의 모임이 교집합입니다. 사람들은 문화나 역사가 다르더라도 인간으로서 공통된 가치를 지닙니다. 예를 들어, 사랑, 정의, 평등과 같은 가치들은 인류의 공약수와 같습니다. 여러 사회와 문화가 다르게 작동하지만, 그 안에서 발견되는 보편적 가치가 바로 공약수입니다. 현대 사회는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는 다문화 사회입니다. 각기 다른 문화가 교차하는 지점에서 생기는 ‘교집합’은 새로운 통찰과 발전을 가능하게 합니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서로 다른 문화에서 배울 수 있고, 공통의 목적을 향해 나아갈 수 있습니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만나서 공유할 수 있는 가치를 발견하는 것이 공동체 형성의 핵심입니다. 이러한 교집합을 통해 사회가 더욱 풍요롭게 발전합니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가 공약수와 교집합을 찾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하마스와 이스라엘도 공약수와 교집합을 찾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만 될 수 있다면 서로의 가슴에 총을 겨누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가슴에 장미를 달아 줄 수 있을 겁니다.
오늘은 ‘평신도 주일’입니다. 교회에는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가 공동체를 이루고 있습니다. 삼위일체인 하느님께서 조화와 균형을 이루면서 사랑을 주십니다. 성부인 하느님은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하느님을 닮은 모습으로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성자인 하느님은 몸소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고 가셨습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돌아가셨지만 부활하셨습니다. 성령인 하느님은 교회와 함께 하십니다. 효경, 굳셈, 의견, 지혜, 지식, 통달, 두려움의 은사를 주십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의 최대공약수는 ‘사랑’입니다. 그 사랑이 모든 걸 가능하게 합니다. 성직자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입니다. 복음을 전하고, 성사를 집전합니다. 병자를 위해 기도하고, 마귀를 쫓아냅니다. 예언의 직무, 성사의 직무, 봉사의 직무가 있습니다. 수도자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입니다. 이 세상에서 천국의 삶을 보여주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는 사람입니다. 수도자는 복음 삼덕을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정결, 순종, 청빈의 삶을 드러내는 사람입니다. 평신도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입니다. 세례를 통해서 하느님의 자녀가 됩니다. 예수님은 그런 평신도를 무척 사랑하셨습니다. 강도당한 사람을 도와준 착한 사마리아 사람을 칭찬하셨습니다. 겸손한 세리의 기도를 칭찬하셨습니다. 믿음이 강했던 백인대장을 칭찬하셨습니다. 회개하고, 가진 걸 나누었던 자캐오를 칭찬하셨습니다.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는 모두 같은 하느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의 최대공약수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동반자입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에서 우리는 두 명의 과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과부는 남편이 먼저 세상을 떠난 미망인입니다. 남편이 없기에 가정도 돌봐야 하고, 돈도 벌어야 합니다. 특별한 직업이 없다면 과부들의 생활은 궁핍하고 힘들기 마련입니다. 누군가로부터 도움을 받아야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이 과부들의 삶이었습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에서 보여준 과부의 용기와 사랑의 실천은 그 뒤에 과부의 남다른 노력이 있었습니다. 어떤 것일까요. 첫째는 올바른 가치 기준을 확립하는 것입니다. 나의 개인적인 욕망을 따를 것인가 또는 나의 욕망을 희생하고 타인을 사랑하라는 그리스도의 요구를 따를 것인가 하는 문제는 매 순간 우리에게 다가오는 문제이며 이러한 문제에 직면할 때 우리 안에 어떤 가치 기준을 갖고 있느냐에 따라서 선택하기 쉬울 수도, 어려울 수도 있는 것입니다. 둘째 자기 수양이 필요합니다. 비록 올바른 가치 기준을 내 안에 갖게 되었다 하더라도 우리는 충동적인 자신을 발견하게 되며 평소 나의 기준에 따라서 해서는 안 되는 것을 이 충동에 의지하게 되는 경우를 만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보고, 듣고 말하고 만지고 싶은 욕구를 자제하는 훈련을 쌓아야 합니다. 셋째로 기도가 필요합니다. 자신을 이기려고 노력하고 남을 위해서 우리의 재능을 제공하려는 삶을 살고 있다 하더라도 우리 안에는 많은 내면적인 어려움을 만나게 되고 결국 실패하고 말리라는 두려움을 안고 있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기도로서 하느님께 모든 것을 의탁하고 맡기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올바른 가치 기준을 확립하고 끊임없이 자기 수양을 하는 사람이 하느님께 꾸준히 기도 한다면 오늘 독서와 복음의 가르침을 생활 속에서 쉽게 실천할 수 있고 하느님으로부터 많은 축복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세상은 어쩌면 아름다운 사람들이 있기에 더욱 아름다운 겁니다. “전능하시고 자비로우신 하느님, 저희에게 해로운 모든 것을 물리쳐 주시어 저희가 평안한 몸과 마음으로 자유로이 하느님의 뜻을 따르게 하소서.”
<봉헌>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다 넣었기 때문이다.”(마르 12,44)
숨김없이
그대로
하느님과 벗님들께
나를 드리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늘
하느님과 벗님들께
나를 드리는 것입니다
아낌없이
기꺼이
하느님과 벗님들께
나를 드리는 것입니다
남김없이
오롯이
하느님과 벗님들께
나를 드리는 것입니다
오늘의 성인
성 안드레아 아벨리노 (Andrew Avellino)
활동년도 : 1521-1608년
신분 : 신부
지역 :
같은 이름 : 아벨리니, 안드레아스, 앙드레, 앤드루, 앤드류
이탈리아 카스트로누오보(Castronuovo) 태생인 아벨리노는 로렌조(Lorenzo)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나폴리(Napoli)에서 민법과 교회법을 수학한 뒤 박사학위를 받고 사제로 서품되었다. 교회법 학자로서 임기를 마친 그는 사목 활동으로 돌아와서, 바이아노(Baiano)의 산타 아르칸젤로 수도원 개혁 임무를 맡았다가 자신의 개혁안을 반대하는 이들로부터 거의 살해당할 뻔하였다.
그는 바이아노를 떠나 나폴리의 테아틴회에 입회하면서 이름을 안드레아(Andreas)로 개명하였다. 그는 나폴리 수도원의 장상이 되었고, 사제들의 품위 향상을 시도했던 그의 노력은 유명하다. 1570년 그는 성 카롤루스 보로메오(Carolus Borromeo, 11월 4일)의 요청에 따라 롬바르디아(Lombardia)로 갔으며, 밀라노(Milano)와 피아첸차(Piacenza)에 수도원을 세웠고, 이 지역의 수도원 개혁이 그의 성공 중에 가장 돋보인다.
그는 1582년에 나폴리로 돌아와 여생을 지내면서 프로테스탄트들을 설득하고 일반 시민들의 영적 요구에 응하였다. 그에게 수많은 기적들이 일어났는데, 특히 그의 시신에서 흐른 피는 성 야누아리우스(Januarius, 9월 19일)와 같이 치솟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몬시뇰 팜필리의 조사에 의하면 이 보고는 신빙성이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아벨리노는 1608년 11월 10일 나폴리에서 운명하였다. 1624년 교황 우르바누스 8세(Urbanus VIII)에 의해 복자품에 오른 그는 1712년 5월 22일 교황 클레멘스 11세(Clemens XI)에 의해 시성되었다.
성 대 레오 교황 학자.
신 분 : 교황, 교회학자
활동지역 : 다수의 지역
활동년도 : +461년
같은이름 : 리오, 레오날드, 레온
성 대 레오 1세는 아마도 이탈리아 중부 토스카나(Toscana) 사람인 부모 밑에서 태어나 로마(Roma)에서 살았고, 교황 성 코일레스티누스 1세(Coelestinus I, 7월 27일)와 성 식스투스 3세(Sixtus III, 8월 19일) 밑에서 부제로 봉사하는 한편, 황제의 요청을 받아 에지오 장군과 알비누스 집정관 사이에 평화를 이룩하려고 노력하던 중 교황 성 식스투스 3세를 계승하여 교황으로 선출되어 440년 9월 29일에 착좌하였다.
이때부터 그는 황제와 교회간의 알력을 비롯하여 마니교도, 펠라기우스주의, 프리실리아누스주의 그리고 네스토리우스주의에 강력히 대처하는 등 수많은 난관을 무난히 극복하였다. 448년 그는 콘스탄티노플에 있던 대수도원장인 에우티케스(Eutyches) 일파와 격돌하게 되었다.
에우티케스는 그리스도의 두 가지 본성(신성과 인성)을 부인하는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 플라비아누스(Flavianus)가 내정한 원장이었다. 동로마제국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의 지원을 받던 에우티케스는 더욱 극심한 혼란을 초래하였다. 451년 성 레오 교황은 보스포루스(Bosphorus) 해협 연안의 도시 칼케돈(Chalcedon)에서 공의회를 소집하여 이때부터 그는 황제와 교회간의 알력을 비롯하여 마니교도, 펠라기우스주의, 프리실리아누스주의 그리고 네스토리우스주의에 강력히 대처하는 등 수많은 난관을 무난히 극복하였다. 448년 그는 콘스탄티노플에 있던 대수도원장인 에우티케스(Eutyches) 일파와 격돌하게 되었다. 에우티케스는 그리스도의 두 가지 본성(신성과 인성)을 부인하는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 플라비아누스(Flavianus)가 내정한 원장이었다. 동로마제국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의 지원을 받던 에우티케스는 더욱 극심한 혼란을 초래하였다. 451년 성 레오 교황은 보스포루스(Bosphorus) 해협 연안의 도시 칼케돈(Chalcedon)에서 공의회를 소집하여 천주강생의 교리를 분명히 하는 교의서간을 반포하였다.
그는 아프리카에도 선교사를 파견하는 등 교황으로서 놀라운 업적을 남겼다. 그는 교황권을 확립하는데 크게 기여하였고, 성좌의 권위는 하느님과 성서적인 명령이기 때문에 속권보다 우월하다는 신념을 굳게 확립한 위대한 교황이다.
한마디로 그의 재임 기간은 교황권 확립의 시기였다.
역사적으로 성 대 그레고리우스 1세(Gregorius I, 9월 3일)와 함께 '대'(大)라는 존칭을 받는 교황인 성 레오 1세는 461년 11월 10일 선종하여 교황으로서는 최초로 성 베드로 대성당 지하묘지에 안장되었다.
그는 1754년에 교황 베네딕투스 14세(Benedictus XIV)에 의해 교회학자로 선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