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군의 베트남 전쟁 참전과 관련해서는 지금까지 정치적 의미와 경제적 의미만이 논의되었다. 한국군의 베트남 전쟁 참전은 경제발전을 가속화시켰고 이것이 박정희 정권의 안정과 유지에 기여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베트남전 참전은 한국군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한미관계에도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한국전쟁 직후부터 미국 내에서 제기되었던 한국군과 주한미군의 감축론은 1950년대를 통해 계속되었고, 1960년대에 케네디 행정부가 들어선 이후에도 지속되었다. 한반도가 ‘완충지대(buffer zone)’로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는 점에 대해서는 인정하지만, 거대한 군사력을 유지하기 위한 미국의 지원이 부담된다는 것이었다.
주한미군의 감축은 한국전쟁 이후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비록 주한미군이 완전히 철수한 것은 아니었지만, 1954년 1개사단의 감축이 이루어진 이후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 주한미군은 점차적으로 감소하였다. 1950년대 중반에는 주한미군 사령부를 일본으로 옮기자는 논의도 이루어졌다. 그러나 한국군의 감축은 1950년대 말 2개 사단의 감축을 제외하고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본고에서는 1950년대와 1960년대 미국의 한국군 감축을 위한 논의와 한국정부의 대응에 대해서 살펴보겠다. 이 과정에서 1950년대와 1960년대 한국군 감축 논의의 특징, 그리고 한국군의 베트남 전쟁이 군축논의와 한미관계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가에 대해서 고찰하도록 하겠다.
2. 1950년대 한국군 감축론과 한국 정부의 대응
(1) 미국의 한국군 감축론
한국군의 감축과 관련된 논의는 한국전쟁 직후부터 이루어졌다. 한국전쟁으로 인해 3배 이상 늘어난 미국의 군사비를 줄이기 위해서는 군사적인 대외원조를 감축할 필요가 있었고, 가장 많은 군사원조를 하고 있던 한국이 중요한 논의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재정균형을 핵심적인 국정운영의 목표로 하고 있었던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한국에 주둔한 주한미군의 감축과 미국의 원조로 유지되고 있었던 한국군의 감축을 대외정책의 중요한 목표 중 하나로 설정하였다.
그러나 한국군의 감축에서 가장 문제가 되었던 것은 한국의 휴전상황과 중국군의 북한 주둔 문제였다. 전쟁이 끝나기는 하였지만, 종전이 아니라 전쟁을 쉬고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군사력을 감축하기 어려웠고, 중국군 역시 1958년까지 북한에 주둔하고 있었다. 일본 중심의 아시아 질서 재편을 위하여 완충지대로서 한국의 역할을 중시하고 있는 미국으로서는 한국 내의 군사력을 줄이는 것이 쉽지 않았다.
한국군의 감축과 관련된 최초의 논의는 타스카 보고서에서 이루어졌다. 타스카 보고서(NSC 176)에서는 한국군의 감축을 통해 군에서 나온 인력을 경제개발을 위한 목적에 이용해야 할 필요성을 제기하였다.타스카는 아이젠하워의 특사로 파견되어 한국의 경제복구를 위한 조사를 수행하였고, 경제복구를 위한 계획의 수행을 위해 한국군의 병력을 반으로 줄일 것을 제안하였다. 그러나 산업건설계획을 내용으로 하는 타스카의 계획이 인플레이션을 유발할 가능성이 많고 병력을 줄이는 것 역시 당시의 안보상황을 고려하여 채택되지 못하였다.
미국은 1954년의 합의의사록(Agreed Minute relating to the Continued Cooperation in Economic and Military Matters)에서 한국군의 수를 규정한 이래NSC 5514에서 처음으로 한국군의 규모를 줄일 것을 명시하였다. 즉, “적당한 시기에 활동 중인 군대의 규모를 줄이기 위하여 군대의 전투 효율성을 증가시키고 효율적인 예비사단을 발전시키는 방식으로 한국의 전반적인 안전적 지위를 유지”한다는 것이었다.
이후 한국군의 단계적 감축과 관련된 문제는 1950년대 미국의 대한정책에 가장 핵심적인 사안이 되었다. 특히 1955년 이후 한국군의 감축문제는 세계적인 상황과 맞물리면서 활발하게 논의되었다. 즉, 중국과 소련의 후진국에 대한 경제원조 공세와 자본주의권과 공산주의권 사이에서 중립을 표방하는 제3세계의 등장으로 인해 미국은 군사원조보다는 경제원조를 보다 강조하는 정책으로 전환하였다. 따라서 1956년경부터 후진국에 대한 원조를 전면적으로 재검토하기 시작하였다.
1957년에 결정된 NSC 5707/8의 문서는 군병력의 삭감을 가장 중요한 정책의 하나로 규정하였다.이 문서는 유럽 이외의 동맹국의 정규병력을 삭감하고, 현지의 군사력은 해당국의 경제적 유지능력에 준하는 규모로 축소할 것을 명시하였다. 이에 따라 군사원조의 필요액을 삭감하고 국내 치안을 강화하기 위한 경찰형 병력의 강화, 그리고 재래적인 병력과 무기 대신에 핵무기에 대한 의존을 한층 강조하는 방향으로 새로운 정책이 입안되었다. 따라서 한국에서의 병력 감축을 위한 노력은 일층 강화되었다.
1956년 10월 미국의 합동참모본부는 주한미군을 2개 사단으로 유지하고 한국군 4개사단을 삭감하는 대신 한국에 핵무기를 도입할 것을 건의하였다. 1958년에 이르러 미국의 대한정책 문서는 2개 사단의 7만여 명을 삭감을 규정하였고 한국군의 병력수를 규정한 합의의사록 부록 B 역시 개정하였다. 핵탄두의 탑재가 가능한 미사일의 배치도 1958년 이루어졌다. 미국은 북한과 중국의 휴전협정 위반을 이유로 정전협정 13조 d항을 폐기를 선언하였고, 어네스트 존스와 280mm 원자포의 한국배치가 이루어졌다.
1958년 12월 한국군 2개 사단이 삭감되었지만, 한국에서의 군 감축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한국군 감축에 대한 한국정부의 반발도 중요한 고려사항이었지만, 세계적인 상황 역시 한국군의 감축을 어렵게 했다. 소련의 인공위성 발사 성공은 특히 미국의 대외 군사정책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1959년 6월 25일에 있었던 국가안보회의의 411차 회의에서 다음과 같은 논의가 이루어졌다.
우리가 대한민국을 진공상태로(in a vacuum) 고려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그에게 명확해진 것 같다. 한국의 문제는 세계정세 하에서 논의되어야 한다. 그의 견해를 설명하기 위하여 대통령은 오늘 아침 Averell Harriman(주소대사: 필자주)과 Khrushchev 사이에 있었던 가장 최근의 논쟁과 관련된 부분을 읽었다. … 이러한 종류의 정보는 우리가 세계정세의 문제를 떠나서 한국군의 규모를 16개 사단으로 할 것이냐, 18개 사단으로 할 것이냐를 한가하게 계산할 틈이 없다는 것(we could not sit down and coolly calculate)을 의미한다고 대통령은 느꼈다. 대통령은 미국이 어느 곳에서도 허약하다고 인식할 여유를 주어서는 안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 대통령은 한국군의 규모를 줄이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미국이 세계적으로 너무나 많은 결정적인 지역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진정한 위협이 될 것이라는 점을 주장하는 것이라고 언급하였다.
이에 따라 1959년 7월 1일에 나온 NSC 5907에서는 한국군의 단계적 삭감조항을 삭제하고, 한국군이 “아시아 전역에 있어 공산주의의 침략에 대항하는 한국의 항상적인 결의를 과시하는 데 충분한 힘과 능력을 행사”한다고 규정하여 이전에 비하여 한국군의 역할을 확대하였다.
한국군의 감축을 어렵게 한 또다른 요인은 한국의 경제적 상황이었다. 타스카 보고서 이후 일부 정책입안자들 사이에서 경제개발을 목적으로 한 군대 규모의 감축 - 한편으로는 노동력의 문제를 초점으로, 다른 한편으로 군대에 사용될 국가 예산을 경제개발의 비용으로 전용해야 함을 초점으로 - 을 강조하는 논의는 계속되었지만, 군대의 감축이 오히려 사회적 불안을 조성할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로 반론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특히 전역한 장교들의 경우 전문적인 직업을 갖는 것이 가능하였지만, 수만 명의 일반 사병들은 오히려 실업문제를 악화시키는 방향으로 기여할 가능성이 컸다.
결국 미국은 1950년대를 통하여 한국군의 감축을 2개사단의 감축 외에는 더 이상 추진하지 못하였다. 재미있는 점은 1960년 민주당 정부에 의해서 한국군 10만 명의 감축안이 제기되었다는 점이다. 민주당 정부는 경제개발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과정에서 10만 명의 감군안을 공약으로 내세웠고, 군사비용을 경제개발의 비용으로 돌리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미국에 의해서 거부되었다. 자신들이 주도하지 않는 군축은 허용할 수 없다는 것이 미국의 의도였다.
(2) 한국정부의 대응
북진통일론을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었던 이승만 정부로서는 미국의 감축론이 달가울 리 없었다. 한국전쟁 이전에 주한미군의 철수에 반대하면서 38선 분쟁을 일으키기도 했던 이승만 정부는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미국으로부터 확고한 방위공약을 받고자 하였다. 주한미군의 감군과 함께 미국이 한국군을 단계적으로 감축하려고 하자 이승만 정권이 취했던 대표적인 반응은 해외에 한국군을 파견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미국의 단계적 감군론에 대한 이승만 정부의 첫 번째 대응은 인도차이나 지역에 국군을 파견하겠다는 것이었다. ‘반공 십자군’ 운동을 전개하겠다는 것이었다. 이승만 정부는 1954년 2월 초 국군 1개 사단을 공산군과 싸우고 있는 프랑스군을 지원하기 위하여 인도차이나 지역에 파병하겠다고 제안하였다.파병의 전제조건은 한국군 20개 사단을 35개 사단으로 증강하는 것이었다.미국정부는 물론 프랑스 정부도 이러한 제안에 대해 애초부터 실현성이 없다고 보고 거절하였다. 이승만 정부는 다시 1954년 5월21일 외신과의 회견에서 한국군의 인도차이나 파병을 제안하였다.그러나 이승만 정권의 이러한 제안은 곧 제네바 정치회담에서 베트남의 휴전이 합의됨에 따라 더 이상 논의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미국이 한국군의 감군을 직접적으로 추진하고 있었던 1958년에 가서 이승만은 다시 한번 인도네시아 파병을 제안하고, 비밀리에 우익 반군 지도자들과의 접촉을 시도하였다. 또한 1959년에도 라오스 내전에 개입할 의사를 피력하고, 비밀리에 국방부 내의 정보기관인 ‘79호실’ 책임자 이후락을 라오스에 보내어 상황을 파악하도록 하였다.
한국군의 해외파견에 대한 제안은 당시 미국의 입장에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우선 미국 스스로가 해외에 직접적으로 파병하는 것을 고려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미군을 제외한 다른 나라의 군대를 미국의 지원 하에 파견한다는 것은 정당성을 얻기 힘든 것이었다.또한 중국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한국군의 감축을 추진한 것이 한국군 유지를 위해 사용되는 엄청난 미국의 원조를 줄이기 위한 방편이었는데, 한국군의 해외파견이 이루어진다면 이것은 또 다른 원조 증액의 효과를 가져오는 것이었다.
이승만 정부가 미국의 감군정책에 반대했던 또 다른 이유는 당시 미국의 대한원조가 한국군의 유지비용을 전제로 하여 이루어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950년대 미국의 대한경제정책은 현상유지 안정화정책이었다.더 많은 달러를 얻기 위해서는 더 많은 원조가 필요하였고, 한국군의 감축은 미국의 대한원조가 감소하는 것을 의미하였다. 반공이데올로기, 반일이데올로기와 함께 1950년대 중요한 이데올로기의 하나는 ‘더 많은 원조 이데올로기’였다.
더 많은 달러의 필요성은 경제개발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더 많은 원조는 한편으로는 빈곤상태의 국민들이 환상을 갖도록 하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경제정책과 정부의 재정을 지탱하는 버팀목이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국이 한국군의 감축을 시도한다는 사실 자체는 이승만 정권의 존재자체를 위협하는 것이었다. 미국에게 있어서 또 다른 일본이 되기를 원했던 이승만 정부는 한국군의 현대화와 군사비의 경제개발비용으로의 전용을 미끼로 하여 군감축을 추진하였던 미국의 정책에 대해서도 반대하였다.오히려 李承晩은 한국군의 사단을 늘리겠다고 주장하였다.
圜貨의 과대평가와 이중환율은 미국으로부터 더 많은 원조를 받아내기 위한 가장 중요한 수단이었으며, 환율문제는 미국과 갈등을 일으킨 가장 중요한 부분이었다. 이승만의 달러에 대한 집착은 모든 달러 사용에 대한 그의 직접 통제에서 잘 드러난다. 마이어 협정 체결 직후부터 더 많은 달러를 받아내야 할 필요성을 천명했던 이승만은 모든 달러의 사용을 직접 통제하였다. 심지어 유학생이나 정부관료의 연수 경비로 사용되는 달러까지도 이승만이 직접 통제하였다.
결국 이승만 정부의 대응은 2개 사단의 감축으로 인하여 실패로 끝났지만, 세계적 상황의 변화로 인한 미국의 대한정책 변화로 인하여 더 이상의 감축이 실행될 수는 없었다. 미국의 대한원조 역시 1957년을 정점으로 하여 1958년과 1959년에 점차 감소하였지만, 1960년과 1961년에는 일시적으로 다시 증가하는 추세를 보였다.
3. 1960년대 초반 한국군 감축론과 한국정부의 대응
(1) 미국의 새로운 대한정책과 군축론
1950년대 아이젠하워 행정부의 정책에 대한 비판을 통해 미국 내에서 새로운 후진국 정책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비판의 핵심은 후진국에 대한 현상유지 정책이었다. 공산주의의 확장을 막기 위한 최소한의 비용을 제외하고는 후진국에 대한 원조를 감축하는 것은 공산주의권을 봉쇄하기 위한 적절한 정책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공산주의에 대한 보다 적절한 봉쇄를 위해서는 경제개발을 통하여 자본주의적 경제체제가 공산주의보다 더 우월하다는 점을 피부로 느끼게 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 새로운 대안으로 제시되었다. 아울러 후진국의 경제성장을 위해서는 사회적 비효율성을 제거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사회개혁을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를 위해서 새로운 지배계급-근대화의 물을 먹은, 전근대적인 경제관계와 연결되어 있지 않은, 가난한 농촌 출신의 군인과 지식인의 연합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이러한 아이젠하워 행정부의 후진국 정책에 대한 비판은 곧바로 케네디 행정부 내에 흡수되었다. 이러한 주장의 핵심적 역할을 하였던 로스토우(Walt W. Rostow)가 케네디 대통령의 안보담당 부보좌관, 국무성 정책기획실장으로 임명되었으며, 후진국 정책은 그의 지휘하에 새로운 정책을 지지하는 관료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미국의 대한정책 역시 이러한 흐름에서 예외가 아니었다. 미국의 대한정책 변화는 1961년 5월 15일의 국가안보회의 483차 회의에서 대통령의 지시에 의하여 極東問題 擔當 國務次官補(Walt McConaughy)를 의장으로 하는 ‘한국에 대한 긴급임무팀(Presidential Task Force on Korea)’을 구성하면서 본격화되었다.긴급임무팀은 한국에서 경제개발계획의 실행, 사회개혁의 실행 등을 골자로 하는 새로운 대한정책 문서를 만들어냈다.
새로운 정책 하에서도 한국군의 감축문제는 1950년대와 마찬가지로 중요한 고려사항이었다.그러나 1950년대와는 달리 새로운 정책 하에서 군축문제가 논의되었다. 1950년대의 군축 논의가 미국의 재정균형을 기본적인 목적으로 하여 진행되었다면, 1960년대 초의 군축문제의 기본적 고려는 경제개발계획과 군사정부에 대한 고려였다. 따라서 두 가지 사안이 군축과 관련하여 핵심적으로 고려되었다. 한국의 경제적 진보에 있어서 군축이 어떠한 역할을 할 수 있는가와 군축이 한국의 군사정부에 미칠 영향에 대한 문제였다.
첫 번째 사안과 관련해서는 군축이 한국의 경제적 진보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으로 고려되었다. <표 1>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1960년대 초반까지 한국정부의 전체 재정 중에서 군사비용이 차지하는 비율이 30%를 넘나들었다. 이것은 경제성장을 위해 부정적인 요소였다. 단지 군대의 존재가 긍정적이라는 것은 경제개발의 한정된 자원, 즉 국토건설사업을 비롯한 노동력의 보충으로서의 의미를 가질 뿐이었다.이러한 의미에서 경제적 진보를 위한 한국군의 감축은 당연히 고려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표 1> 전체 예산세입과 세출 중 대충자금, 국방비 및 투융자 비율 (단위 : %)
1961
1962
1963
1964
1965
대충자금
48.4(48.4)
34.8(29.6)
31.9(34.1)
32.2(33.9)
33.6(30.1)
국방비
32.8(27.4)
24.8(22.4)
26.8(28.1)
32.6(31.6)
33.0(30.9)
투융자
16.7(21.8)**
27.5(27.8)
29.4(26.7)
23.3(22.2)
23.3(23.1)
*( ) 안은 최종 추경예산에서 차지하는 비율
** 1961년도 투융자는 세출 중 대충자금 및 경비와 국토건설특계 항목을 합친 것
두 번째 사안과 관련하여 중요한 문제는 군대의 감축이 군사정부의 안정성을 뒷받침할 수 있겠는가의 문제였다. 미국의 후진국 정책에 대한 새로운 정책의 필요성을 강조했던 그룹들은 전술한 바와 같이 후진국에서 새로운 지배세력이 등장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한국에서 군사쿠데타와 군사정권의 등장은 그들에게 하나의 실험대가 되었다. 1963년 이후 많은 미국 내의 문서들 속에서 베트남과 한국을 비교하는 문서들이 많이 등장한 이유 중의 하나도 한국에서의 실험이 베트남에 비하여 성공적임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심지어는 한국에서의 경험을 다른 나라에 도입하고자 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한국에서 등장한 새로운 지배세력의 안정성은 이들의 정책의 실효성을 뒷받침할 수 있는 중요한 근거가 되었다. 따라서 한국에서의 군대감축이 당시의 군사정부와 군사정부의 뒤를 이은 박정희 정부에 어떠한 영향을 줄 것인가가 이들에게는 중요한 고려사항이었다. 1963년에 나온 “Guidelines Paper”는 군사정부의 안정을 위하여 군축에 반대하는 입장을 보여주었다.
한국정부의 안정성 여부가 미국의 대외정책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함에도 불구하고 한국군의 감축과 관련된 논의는 계속되었다. 물론 한국군 감축논의의 중요한 배경은 1950년대와 마찬가지로 미국의 대외원조를 줄이기 위한 것이었다. <표 1>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1960년대에 들어서도 한국정부의 예산 세입 중 미국의 원조로 조성되는 대충자금이 차지하는 비중이 여전히 30%를 넘고 있었으며, 이 중 대부분은 군사유지비에 사용되었다.
그러나 미국의 대외원조를 줄이기 위한 목적에서 1950년대와 1960년대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었다. 1950년대의 목적이 균형예산의 확보에 있었다면 1960년대의 목적은 군사원조에 들어가는 비용을 후진국 경제개발원조로 돌리기 위한 것이었다. 보수적인 정부재정을 운영했던 아이젠하워 행정부와는 달리 케네디 행정부는 대외원조를 확대하고자 하였다.한국에 대한 군축 정책 역시 경제개발을 위한 비용으로 전용되어야 한다는 점이 강조되었다.물론 한국군의 유지비용이 싸고, 광범위한 실업자군을 만들어낼 가능성이 크다는 지적이 함동참모본부에서 나오기도 했다. <표 2>에서 볼 수 있듯이 베트남 전쟁에 파견된 한국군의 월 보수액은 베트남 군인의 월급을 제외하고는 가장 값싼 것이었다. 그러나 경제개발원조를 증액시키기 위한 감축안은 1961년 이래 계속 논의되었다.
<표 2> 베트남에 파견된 각국 장병의 월 보수액 (단위: 달러)
한국
베트남
미국
필리핀
태국
소장
준장
354.16
320.00
217.38
212.35
1,294.15
1,060.65
-
641.60
-
-
대령
중령
소령
291.72
256.67
224.57
170.43
153.66
138.56
833.15
686.65
601.45
590.40
539.20
500.80
590.76
563.39
518.43
대위
중위
소위
준위
190.40
166.70
151.55
137.74
123.48
111.74
103.35
86.58
569.05
483.85
435.85
430.15
475.20
454.72
441.92
404.80
406.92
395.19
389.33
-
상사
중사
하사
102.50
86.35
82.90
76.51
69.82
68.13
402.25
366.25
333.35
284.80
282.24
279.68
266.39
261.51
257.60
병장
상병
일병
이병
64.47
56.83
51.36
51.11
62.64
58.53
57.16
55.79
304.75
259.15
238.73
235.15
주한미국대사인 버거(Samuel D. Berger)의 계획에서부터 국방차관보 히치(Charles J. Hitch)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군축안이 제기되었다. 1963년 6월 국방부장관 맥나마라(Robert McNamara)의 보고서는 주한미군이 완전히 철수한다고 하더라도 남한군의 군사력이 북한군을 능가한다고 평가하였으며, 각각의 군축 계획에는 군축을 대신할 핵무기의 사용여부가 중요하게 논의되었다.
한국군 감축을 위한 논의는 1950년대와 마찬가지로 단계적 감축안이었으며, 당시 약 60만 명에 달하는 한국군을 3-5년여에 걸쳐 12만 명에서 25만 명을 감축하는 방안이 검토되었다. 1964년 1월 국무성에서 작성된 문서에서는 최소한 2년 내에 한국군 7만 명을 감축하는 방안이 제시되기도 하였다.
이상과 같이 한국군이 베트남전에 참전하기 직전인 1965년까지 미국의 대한정책 문서는 한국군의 감축을 실행 또는 연구하는 방안을 정책의 중요한 골자로 못박았다. 경우에 따라 중국군의 존재, 한국정부의 불안정성 등으로 인하여 한국군의 감축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가 도출되기도 하였지만, 정책결정자들 사이에서의 전체적인 논의는 한국군을 감축해야 한다는 점에 대해서 이견이 없었다. 1965년에 작성된 “National Policy Paper: Republic of Korea”에서는 한국에 대한 미국의 부담을 일본으로 넘겨야 한다는 점과 함께 한국군의 규모를 조만간에 10만 정도 감축해야 한다는 정책이 결정되었다.
(2) 한국군의 베트남 전쟁 참전
5.16 쿠데타를 성공한 군사정부에게 미국의 한국군 감축안은 상당한 부담이 되는 것이었다. 주한유엔군사령관이 쿠데타 직후 한국군의 감축이 역쿠데타(counter-coup)가 가능하도록 할 것이라고 염려한 사실에서 잘 나타나듯이 한국군에 대한 감축은 군사정부에게 상당한 정치적 부담이 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에 대한 무상원조의 감소와 함께 한국군의 감축은 계속 논의되었고, 이러한 논의는 군사정부에게 일정부분 통보되었다. 미국의 한국군 감축정책에 대한 군사정부의 대응은 이승만 정권과 마찬가지로 한국군의 해외파병 제안으로 이루어졌다.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박정희의 미국방문이 1961년 11월 이루어졌다. 최고회의 의장직이 공식적인 선거에 의해 선출된 국가수반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미국에 초청하고, 당시 미국 대통령과 회담을 두 차례 가졌다는 사실은 파격적인 대우였다. 케네디와의 회담에 앞서 군사정부는 주한미국대사에게 당시 미국의 정책이 군사정부의 입장을 어렵게 할 것이라는 점을 피력했다. 즉, 미국의 대한정책 중 민간정부로의 회귀, 한일관계 정상화의 강조, 원조의 감소 등이 군사정부의 입지를 어렵게 하는 조건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주한미국대사는 군사정부의 항의에 대해 당시 미국의 정책이 확고한 것이기 때문에 조정이 어렵다고 답변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나온 것이 한국의 베트남 파병 제의였다. 박정희 의장은 1961년 11월14일 백악관에서 이루어진 케네디 대통령과의 회담에서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을 제안하였다.박정희 의장이 구체적으로 제안한 부분은 공개된 문서 상에는 삭제되어 있지만, 전후 문맥을 볼 때 베트남전 참전 가능성을 포함하여 한국의 지원을 제의한 것으로 보인다.
케네디 대통령은 박정희 의장의 제의에 대해 애매한 태도를 보였다. 즉, 베트남 정부의 전복을 방지하는 문제에 대한 미국의 관심과 함께 궁극적으로 미국의 병력을 사용하는 문제에 대하여 언급하였다. 또한 베트남 문제는 미국만의 문제가 아니며, 공동의 문제라고 하면서 회담 다음 날 국방성 장관 및 합동참모본부 의장과 상세한 토론을 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권고하였다. 1950년대 이승만 정부의 인도네시아 파병을 단호하게 거절하였던 미국의 태도와는 다른 것이었지만, 미군이 직접 개입하고 있지 않은 상황에서 한국군의 파병 제안이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
1962년 3-4월 베트남 문제에 대한 한미간의 토론이 있은 직후 박정희 의장은 베트남 지원의 뜻을 비쳤다. 그는 고 딘 디엠 베트남 대통령의 편지에 대해 “한국정부와 국민은 국내 재원과 국제적인 관례 그리고 한국인의 이익이 허용하는 한도 내에서 자유월남을 지원하는 가능한 노력을 다할 것”이라는 회한을 보냈다. 4월11일에는 게릴라 전문가로 구성된 10여명의 군사시찰단이 극비리에 베트남을 떠났다. 10여명으로 구성된 군사시찰단은 약 2개월간 게릴라전과 전략촌의 건설상황을 살피는 한편 라오스 정부군을 시찰하기도 하였다.이후 군사정부 내의 혼란, 민정이양을 위한 선거 등으로 베트남 파병문제는 논의가 이루어지지 않다가 1964년에 이르러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이 공식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하였다.
케네디 행정부의 뒤를 이은 존슨행정부는 1964년 4월 베트남에 미국 외의 연합군을 참전시키도록 하는 “More Flag” 정책을 제안하고 ‘자유세계 군사원조단(Free World Assistance Forces)’를 창설하고자 하였다. 한국정부는 국회의 동의를 거쳐 1964년 9월 비전투부대를 파견하였으며, 1965년에도 한국군 공병, 운송 및 자체경비병력 등의 건설지원단 2천명을 파견하였다.
1964년의 1차 파병 때는 한국 측이 미국에 대해 특별한 요구를 하지 않았지만, 1965년 2차 파병부터는 미국 측에 몇 가지 사안을 요구하기 시작하였다. 한국 측 요구의 핵심은 한미상호안보조약을 넘어서는 보다 확고한 안보공약과 함께, 더 이상의 주한미군 철수를 막는다는 것이었다. 본격적인 한미간의 논의는 1965년 5월 박정희 대통령과 존슨 대통령 간의 회담을 통해 이루어졌다.
한미 정상회담을 통해 이루어진 한미간의 합의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경제원조와 함께 군사부문이었다. 존슨대통령은 한국의 안보가 보장되도록 조처할 것이며, 충분한 병력과 돈이 1954년의 조약에 따라 한국의 안보를 보장하도록 제공될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미국은 한국에서 병력을 현재 수준으로 유지할 계획이며, 만약 한국에서 어떤 병력 철수계획이 있다면 한국과 우선적으로 협의할 것이라고 말했다.박정희는 1967년 선거유세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솔직한 이야기를 하자면 만약 우리 한국군이 파견되지 않았다면 당시의 내 추측으로는 주한미군2개사단이 월남으로 갔을 것이다. ... 당시 월남, 미국정부가 한국군을 보내달라고 했을 때 우리가 보내기 싫으면 안 보낼 수도 있습니다. 그럴 경우 미군 2개 사단이 갔을 겁니다. ... 우리나라의 국방을 위해서도 한국군이 월남에 가지 않을 도리가 없지 않습니까?
주한미군의 철수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한국군의 감축문제였다. 이것은 박정희 정부의 기반과 관련된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무엇보다도 1965년 존슨 대통령의 한국군 1개 사단 파견 요청은 한국군의 감축문제가 더 이상 논의될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한국군을 베트남에 파견하면서 한국군을 감축한다는 것은 논리 상 불가능한 것이었다.
한국군의 감축과 관련된 문제는 1966년의 한국군 5차 파병과 관련된 한미 국방장관 사이의 회담에서 제기되었다. 이 회담에서 미국방장관은 한국 군사력의 감축 필요성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였다. 전술한 바와 같이 당시 미국방장관은 이미 5.16 직후부터 한국의 경제성장을 위해 군축의 필요성을 제기하였었다. 그러나 한국군의 감축과 관련된 논의는 더 이상 제기되지 않았고, 오히려 미국이 한국측에 무언가 더 주어야 한다는 점이 강조되었을 뿐이었다. 1966년 10월말 국무장관, 로스토우 등과 함께 내한한 존슨 대통령은 주한미군의 감축계획이 없음은 물론 한국안보를 보장하기에 적절한 수준까지 한국군을 계속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푸에블로호 사건에 대응하기 위해 미국의 특사로 임명된 밴스(Cyrus R. Vance)를 위해 1968년 작성된 대한정책 문서에는 더 이상 한국군의 감축과 관련된 논의는 나타나지 않았다. 오히려 점차적으로 한국의 군사능력을 강화시키는 방안이 앞으로의 정책 대안 2가지 중 하나로 설정되었다.
4. 결론
미 국무성의 한 관리는 1966년 초 대통령 안보담당 보좌관에게 보내는 서한에서 베트남전과 관련된 한국의 도움에 감사한다고 하더라도 ‘인기없는 박정부에게 백지수표를 제공하는 것’은 피해야 한다고 지적했다.한국군의 베트남전 참전의 대가로 실제로 미국이 백지수표를 한국에 제공했는가의 여부를 떠나서 중요한 점은 ‘인기없는 박정부’라는 인식이다. 1964년부터 1965년 사이에 있었던 한일관계 정상화와 관련된 논의과정을 통해 박정희 정부에 대한 국민적인 여론은 매우 악화되어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군의 베트남 전쟁 파병과 이에 따른 미국의 전폭적인 지원 - 미국의 지원은 파병하는 군대뿐만 아니라 한국의 경제발전과 관련된 지원까지 포함된다-은 박정희 정부가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아울러 한국군의 베트남 전쟁 파병은 본고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미국 내에서 광범위하게 제기되고 있었던 한국군 감축을 위한 논의를 잠재우는 역할을 하였다. 쿠데타를 통해 불법으로 집권한 군사정부에게 군대 이상의 값진 기반은 없었다. 만에 하나 한국군의 감축이 이루어지고, 이를 통해 옷을 벗는 장교가 생긴다면 군부를 기반으로 한 정권의 존립기반이 흔들릴 수 있는 가능성도 없지 않았다. 군부 내의 부정부패를 하극상 쿠데타의 명분으로 내세웠던 군사정부, 그리고 군사정부를 기반으로 한 박정희 정부에게 군 감축을 막는다는 것은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군축은 반공안보의 공약 측면에서도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결론적으로 본고를 통해 1950년대와 1960년대 미국 내에서 한국군의 감축 논의가 광범위하게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1950년대와 1960년대의 군축 논의는 서로 다른 목적을 가지고 진행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한국정부의 입장을 곤란하게 하는 것이었다. 한국정부는 군축과 관련된 논의가 제기될 때마다 이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그리고 보다 적극적으로 이에 대응하기 위하여 공산주의와 전선이 형성되어 있는 동남아시아에 한국군을 파견하겠다고 역제안을 내 놓았다. 군축안을 반대하기 위한 가장 적극적인 방안이었다고 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이승만 정부의 제안은 미국측에 의해 거부되었다. 민주당 정부가 스스로 감군하겠다는 제안 역시 미국측에 의해 거부되었다. 박정희 정부의 제안은 당시 미국의 대외정책 변화에 의하여 수용되었고, 이후 1960년대말까지 한국군의 군축과 관련된 논의는 더 이상 정책 문서 상에 나타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