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도전 집안은 향리 출신이었다. 아버지 대에 처음으로 중앙 벼슬을 지냈지만 경제적으로 넉넉하지는 못하였다. 정도전은 외할머니가 천민이었다. 가문을 중시하던 시대에 이런 사실은 출세에 큰 걸림돌이었다. 이 때문에 처음 벼슬을 받을 때 대간의 승인을 얻지 못하였고, 반대 세력과 갈등이 생길 때마다 '불분명한 가계(家系)'라는 비난을 받았다. 정도전은 1362년 진사 시험에 합격해 성균관 대사성, 판의홍부사, 삼도도통사 등을 지냈다. 그는 1375년 (우왕 1) 몰락하는 원나라와 외교 관계를 반대하다 전라도 회진현에 귀양을 갔다. 9년간에 걸친 긴 유배 생활 동안 개혁을 이루어야 한다는 각오를 한껏 다지는 한편 개혁을 위해서는 힘이 뒷받침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1383년 동북면 도지휘사로 명성을 날리던 이성계를 찾아간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용비어천가'에는 그가 이성계 부대의 질서 정연한 대오에 감탄하면서 "참 훌륭합니다. 이런 군대라면 무슨 일인들 못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고 한다. 아마도 정도전은 이미 이때부터 혁명을 실천에 옮기고 있었던 것 같다. 이는 훗날 술자리에서 자신과 이성계의 관계를 한(漢)나라 장양과 유방(고조)에 비유하면서 '한 고조가 장양을 이용한 것이 아니라 장양이 한 고조를 이용하였다'라고 한 말에서 잘 나타난다. 우왕14년(1388년) 6월 위화도 회군 뒤 정도전은 전제 개혁, 군제 개혁을 주도하면서 역성 혁명의 주역이 되었다. 조선 왕조 개국 1등 공신에 오른 그는 조선경국전을 저술하여 통치의 초석을 마련하였고 한양 천도를 주도하였다.
이성계 집안은 원래 전주에 살았다고 한다. 5대조 이안사가 관리들과 마찰을 일으켜 원나라가 지배하고 있는 남경(간도지방)으로 들어갔다. 이안사는 여진인이 많이 살고 있던 이 곳에서 원나라 지방 관리가 되었다. 이어 아들 행리, 손자 이춘은 대대로 두만강이나 덕원 지방 천호(千戶)를 지내며 이 지방에서 기반을 닦았다. 아버지 이자춘도 쌍성 총관부에서 천호로 있었다. 이자춘은 공민왕 때 다시 고려로 귀순하여 쌍성을 되찾는데 큰 공을 세워 이성계가 출세할 수 있는 기반을 닦았다. 이성계는 이러한 가문 배경과 타고난 군사적 재능으로 점차 두각을 드러내었다. 1361년 10월 반란을 일으킨 독로강 만호 박의를 죽였다. 이듬해 정월 친병(사병) 2천명을 거느리고 홍건적에게 함락된 수도 탈환 작전에 참가하였다. 이 때 제일 먼저 성에 들어가는 큰 전공을 세웠다. 1362년 원나라 장수 나하추와 동북면 여진족의 침공을 물리쳤다. 1377년(우왕3)에는 경상도 일대와 지리산에서 크게 창궐하던 왜구를 대파하였다. 1380년에 양광, 전라, 경상도 도 순찰사가 되어 왜구를 운봉에서 섬멸하였다. 이것이 바로 황산대첩이다. 1388년 이성계는 최영과 함께 최고 권력자 이인임을 숙청하고 수문하시중(부총리)에 올랐다. 하지만, 신흥 무인 세력을 대표하는 이성계와 권문 세족 출신인 최영은 대외 관계, 권문세족 숙정 등 여러 면에서 뜻을 같이 할 수 없었다. 이인임 일파에 대한 처벌을 둘러싸고 갈등을 빚은 두 사람은 마침내 요동 정벌을 계기로 숙명적인 라이벌이 되었다. 이성계는 요동 정벌을 주장하는 최영에 맞서 4불가론을 내세우며 강력히 반대하였다. 어쩔 수 없이 정벌에 나선 이성계는 압록강 위화도에서 말머리를 돌렸다. 개경에 돌아와 최영을 제거하고 1390년 병권을 장악하였다. 다음해 토지 개혁을 단행하여 새 왕조의 기틀을 확실하게 잡았다. 마침내 1392년 7월 자신이 세운 공양왕을 내쫒고 왕위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