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짜 호국영웅 심일소령 파동 [2]
2. 인사참모부 차장 근무시 참모총장이었던 이희성 장군과의 악연
제1군단장 축출사건의 내용은 명지대학교 교재로 사용되는 [박정희시대와 한국현대사](정성화, 강규형 교수 엮음. 선인출판사. 2007. 170~178P 박경석)에 기록돼 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박정희와 군부를 논할 때 가장 크게 부정적으로 인식된 사건이 '윤필용 사건', '하나회 정치군인 사건', '12.12 군사반란 사건' 등을 떠올리지만 세상에 널리 알려지지 않은 사건이 있었으니 '제1군단장 축출 사건' 이다.
1976년 수도권 북방 방위책임을 맡고 있던 제1군단은 양봉직 중장이 군단장이었다.
당시 군단장의 친형이 양순직 공화당 국회의원이었는데 박정희 대통령의 3선개헌을 반대하고 나서자 박정희의 눈밖에 났다.
이에 착안한 당시 진종채 보안사령관은 제1군단장 양봉직 축출을 구상했다. 그때 육사 8기생 군단장은 충청도 출신의 이재전 중장과 강원도 출신의 이범준 중장이었기 때문에 영남권 8기생들은 위기 의식을 느끼고 있었다.
군단장을 거쳐야 군사령관 참모총장으로 이어지는 군권을 장악할 수 있는데 8기생 영남 출신이 자칫 전멸할 수 있다고 분석한 것이다.
따라서 진종채 소장과 이희성 소장의 음모가 시작되었다. 양봉직 제1군단장을 축출하고 그 자리에 이희성 소장이 가고, 진종채 소장은 사단급인 육군보안사령부를 해군,공군을 통합 군단급으로 격상하면 영남권 두 군단급이 만들어진다고 결론을 냈다.
그러나 강직하고 그 낌새를 알고 있던 양봉직 중장이 약점을 노출할 리가 없었다. 그러자 진종채는 최후 방책으로 양봉직 군단장이 방위성금을 착복했다고 박정희 대통령에게 허위보고해 단 하루만에 제1군단장을 교체했다.
진종채는 육해공군 통합 보안사령부를 맡아 군단급으로 격상시켜 중장으로 진급했고 이희성은 제1군단장에 취임함으로써 두 명의 8기생 영남권 군단장직을 확보했다.]
위의 기록에 대한 추가 사실은 다음과 같다.
공병여단장 황오연 준장은 양봉직 제1군단장에게 부대 운영비로 사용하라고 3천만원을 건네자 "내가 부대를 운영하는 것이 아니고 참모장 박익주 장군이 부대 운영을 하는 것이니 박익주 장군과 상의하라" 하며 공병여단장을 되돌려 보냈다. 당시는 예산이 부족할 때였으므로 부대운영비를 편법으로 조달하고 있었다. 이에 진종채 보안사령관은 양봉직 장군을 축출하기 위해 이 자금으로 양봉직 장군을 옭아매려는 계획을 세웠다.
이러한 사연이 있는 내용을 이용하여 박정희 대통령에게 양봉직 장군이 방위성금 3천 만원을 착복했다고 허위보고 했다. 대통령은 격분하여 바로 그날 부로 양봉직 군단장을 해임 예비역에 편입시키고 이희성 소장이 중장으로 진급 군단장으로 부임시켰다.
이러한 일이 있은 후 단 한 푼도 착복한 적이 없는 양봉직 군단장의 억울한 사정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고 진종채 보안사련관은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당시 박익주 제1군단 참모장 후임으로 부임한 나는 어수선한 분위기가 팽배하고 있을 무렵, 진종채 보안사령관으로부터 만나자는 연락을 받았다. 나는 보안사령관실로 찾아갔다.
진종채 보안사령관은 나에게 "박 장군은 전도가 유망하니 이 문제에 대해서 더 이상 확대하지말고 3천만원 방위성금을 양봉직 군단장이 착복한 것으로 알고 있어라. 대신 잔고(역 350여 만원)는 박 장군 개인이 사용해도 좋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양봉직 군단장이 단 한 푼도 착복하지 않은 것을 알고 있는데 제가 어찌 한 나라의 장군으로서 거짓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이 잔금통장도 저는 받을 수 없습니다"라며 그의 회유를 받아드리지 않았다.
나는 앞날에 불길한 예감을 느꼈지만 정의를 택하는 편이 떳떳하다고 생각해 그대로 밀고 나갔다. 이 과정에서 나의 신뢰성과 관계되는 잘못이 있는가?. 국방 당국자에게 묻고 싶다.
상기 내용이 제1군단장 축출사건의 숨겨진 진상이다.
이 사건으로 나의 앞길은 험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