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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nless a grain of wheat, fallen to the earth, dies, it remains alone. But if it dies, it brings forth much fruit! (John 12:24). Photo by "Bluemoose." Used by permission under the GNU Free Documentation License 1.2. |
본문
예레미야 31장 31-34절
시편 51편 1-12절
히브리서 5장 5-10절
요한복음 12장 20-33절
설교 도우미 Preaching Helps
주석(Chris Haslam) - 번역 이 기호 목사(평안교회담임)
예레미야31:31-34
이 예언은 BC587년 예루살렘의 멸망 이후에 기록되었다. 30절은 “누구나 자기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죽으리라”고 말한다. 이것은 단체적인(아버지가 잘못하면 아들까지도 벌을 받는)죄가 세대적 혹은 개인적인 죄로 바뀔 것이라는 뜻이다. 즉, 처벌이 더 이상 세대를 넘어서까지 연장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전체 백성들과 함께, 즉 이스라엘과 유다백성들과 함께, 새 언약(31절)을 세울 것을 약속하신다. 그것은 시내산에서 세웠던 언약과는 같지 않을 것이다. 시내산에서 세웠던 언약은 하나님이 그들의 “남편” 혹은 “주인”이 되었을지라도, 백성들이 깨뜨려 버린 언약이다. 이전에 돌 판에 써졌던 율법이 “그들의 마음”(33절)에 기록될 것이다 - 백성들은 율법에 충실할 것이고 율법을 따를 것이다. 그래서 율법은 개인적인 양심에 중요한 것이 될 것이고 힘차게 나아갈 것이다.
(율법을) 가르치는 것(34절)이 더 이상 필요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모두가 주님을 알기 때문이다. 각자는 모든 행동들과 모든 상황에서 하나님을 인식할 것이다. 각자는 경건한 방식으로 하나님께 다가갈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께 반항하는 것으로부터 백성들이 돌아선 것 때문에 그들을 용서하실 것이다. 그리고 백성들이 하나님의 길에서 이탈한 것을 용서하실 것이다. 36-40절에서, 이 약속은 영원히 지속될 것이라고 말씀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무수히 많아져서 예루살렘이 확대될 “그날이 반드시 올 것이라”고 말씀한다.
시편51:1-12
이 시편은 예루살렘의 재건축을 말한다(18절). 그래서 우리는 이 시편이 포로기, 혹은 포로기가 끝난 바로 그 시점에 기록된 것임을 안다. 개인적인 죄와 개인적인 용서와 회복을 위한 기도들에 강조점이 있다. 시편기자는 “불법한 행위들”(2,9절)과 “죄들”로부터 깨끗함을 받기를 추구한다. 태어날 때부터 죄를 가지고 있다(5절)는 개념은 창세기8:21에도 있다. 창8:21“사람은 어릴 때부터 그 마음의 생각이 악하기 마련이다”(비록 시편기자는 그가 철저하게 죄악된 존재임을 고백하고 있는 것으로 보일지라도)
6절에서, 시편기자는 하나님이 그의 마음속에 있는 진실을 찾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마음속은 그가 “지혜”(이해)를 받을 장소이다. 8절후반부는 아마도 그가 그의 죄 때문에 병이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께 “주님의 얼굴을 자신의 죄에서 돌이켜 달라”고 간청한다. 이렇게 간청하는 것은 볼 수 없는 한, 관대해지고 동정적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하나님이 자신을 회복시켜주기를 바란다. 그는 하나님이 자신에게 경건함을 다시 주시기를 바란다. 그는 하나님이 자신에게 깨끗한 양심, 즉 “깨끗한 마음”(10절), “새롭고”, “옳은”(하나님께 향하는) “영”을 주시기 바란다. 오직 하나님만이 깨끗케 하실 수 있다. 그는 하나님이 그의 거룩한 영(11절)을 통해서, 자신에게 기쁨과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주시기를 바란다.
히브리서5:5-10
저자는 유대인의 대제사장제도를 말하고 있다. 저자는 (인간의)대제사장은 사람들을 위해서, 그들의 죄를 위해 희생제사를 드리기 위해서, 하나님과 관계되는 일에 임명을 받았다(1절)고 말했다. 대제사장 자신도 때때로 무심코 죄를 지음으로써, 하나님의 마음을 상하게 하기 때문에, 그는 그러한 죄를 짓는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 관대하게 다룰 수 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의 죄를 위해 희생제물을 드려야만 한다. 더구나 대제사장은 오직 하나님이 부르실 때만 대제사장이 될 수 있다 - 누구도 이 영예는 자기 스스로 얻는 것이 아니다(4절).
저자는 지금 예수님이 유대의 대제사장과 같다고 말하고 있다. 예수님도 역시 하나님에 의해서 부르심을 받았다. 눅3:22의 어떤 필사본은 예수님이 세례 받으실 때, 하늘의 “소리”가 여기서 인용된 말들(5:5후반부)을 말하고 있는 사실을 전하고 있다. 그러나 시편110:4절에 따르면,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다르다: 그는 멜기세덱을 따른 영원한(6절) 제사장이다(“멜기세덱”은 창14:17-20에서 언급된다. 거기서 멜기세덱은 빵과 포도주를 가져온다. 그리고 아브람을 축복한다. 히브리서에서, 멜기세덱은 하나님의 아들을 닮고 있고 영원히 산다. 멜기세덱은 하나님의 아들의 영원함을 미리 보여주고 있는 초자연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 7:2-3을 보라).
예수님이 지상의 삶을 살고 있는 동안에(“그의 육체의 날들”, 7절), 예수님은 죽음으로부터 자신을 건져주실 수 있는 분이신 하나님께 기도했다. 비록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8절)이었을지라도 그는 순종을 배웠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셨다. 예수님은 경건하게(7절) 순종하셨다: 이것은 고난과 죽음에 관계되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다음과 같이 그의 탄원을 들으셨다: 그는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셨다.
그때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완전하게 되셨다: 그의 성직(제사장직)은 우리 모두의 죄를 위한 그의 희생 속에서 완성되었다. 그리고 그는 부활하여 아버지와 함께 계신다. 이 방식으로, 예수님은 그를 따르는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가져오신다. 이 구원은 영원하다(유대의 대제사장에 의해 가져온 제한된 기간과 같지 않다). 그는 영원한 대제사장이시다.
요한복음12:20-33
유월절(“명절”)기간에, 어떤 이방인들(헬라인들)이 예루살렘에 왔다. 그들은 아마도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예루살렘에 온 것이다. “예수님을 보게 해 달라”(그의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 보기를 원하는 것이다, 21절)는 그들의 요청은 헬라인의 이름을 가지고 있는 두 제자, 안드레와 빌립에 의해서 예수님께 전달되었다. 예수님은 이 기회를 그의 시간(23절), 즉 자신을 계시하실 때가 왔다는 것을 알릴 것으로 삼으신다. 예수님은 지금 아들이 영광을 받을 것으로 말씀하신다. 예수님이 영광 받으실 때, 모든 사람들은 참으로 그를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공식회견을 위한 시간은 아니다.
예수님은 그의 죽음의 중요성을 말하기 위해서, 자연으로부터 실례를 사용하신다: 그것은 “한 알의 밀”(24절)이 땅에 묻혀서, 죽은 이후에야 오직 열매를 맺는다는 역설이다. 예수님의 죽음은 다른 사람들을 위한 구원을 가능하게 만든다. 인생을 즐기면서 살려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이 생명의 의미가 잘 이해될 수 없는 것이고 이것 또한 역설이다. 자기중심적인 것은 사람을 멸망하는 것으로 끝내버린다 {“미워하다”(25절)는 말은 유대인에게는 사랑이 적은 것을 뜻한다}. 예수님을 섬기는 것은 예수님의 모범을 따르는 것과 관련되는 것이다. 이것은 아버지에 의해서 귀히 여김을 받게 될 것이다(26절).
27절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임박한 죽음과 싸우고 있다: 예수님은 고난과 죽음으로부터 자신이 해방되기를 아버지께 요청해야만 하는가? 아니다.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그런 회피는 그의 사명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의 죽음은 하나님의 뜻이다(28절전반부).
하늘로부터의 소리는 다음의 사실을 재확인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필생의 사업과 가르침은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과 현존의 표시들이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다시 살리시는 일을 하실 것이다. 무리들은 말씀의 초점을 놓치고 있다(29절). 그래서 예수님은 무리들에게 하나님이 말씀하셨던 것을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무리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사실을 믿을 수 있게 될 것이다. 예수님은 이미 이것을(“나를 위한 것이 아니다”는 사실,30절)알고 계신다. 31절의 “이제(지금)”는 하나님으로부터 고의적으로 돌아선 사람들이 심판을 받는 시간이다. 그리고 마귀(“이세상의 통치자”)가 사람들을 지배하는 힘을 잃어버리는 시간이다. 예수님이 땅으로부터 들려질 때(32절), 즉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영광을 받으실 때, 모든 사람의 구원이 가능해질 것이다. 이것은 일종의 죽음의 역설이다. 이 죽음의 역설을 통해서 예수님은 영원히 지속될 것이다.
설교실마리 Sermon Cues
( 김성국 목사- 미 연합감리교회의 사이트 www.gbod.org/site 일부 참조)
설교 함께 구성하기
이번 주 설교에 포함될 다음의 내용들을 숙고하라.
▶ 회개와 용서
▶ “감성의 종교” 對 “이성의 종교”
▶ 복음을 위한 희생(헌신)
▶ 우리에게 예수께로 자신들을 인도하여 주길 바라는 낯선 자들(사회적 이방인들)
묵상을 위한 질문
1. 우리의 심비에 새겨진 하나님의 법(말씀)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2. 용서를 얻기 위한 회개는 얼마나 의미 있는 일인가?
3. 그리스도를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드린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4. 만일 낯선 자(사회적으로)가 나타나서 자신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해주기를 바란다면 당신의 회중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가?
설교구상
예레미야 31장 31-34절, 마음의 종교(33절)
기독교는 결코 외부의 압력이나 강요에 의해서 교회규칙과 종교의식을 규정받도록 의도되어진 실체가 아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서 그리고 이웃들과의 관계 속에서 자연스럽게 사회에 녹아들고 사회로부터 인정받은 존재들이다. 우리가 신앙을 가장 쉽게 실천하는 방법은 복음에 낯선 이웃들의 마음속에서 복음적 반응이 일어나도록 돕는 역할에 있다. 사순절 기간은 포스트모던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이성의 종교에서 마음의 종교로 움직이도록 하는 어떤 길(방법)을 묵상하는 기회를 제공한다.
시편 51편 1-12절
회개하기: 시편 51편은 사순절 기간 동안 회개와 용서라는 주제를 가지고 계속해서 우리 자신을 검토하도록 우리 내면의 신앙적 질문들을 잘게 빻아 부수어서 새로운 것을 만들 수 있는 식재료를 제공한다. 회개는 다음의 몇 가지 비판적 요소들을 내포한다:
▶ 하나님의 성품(1절)
▶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기대(6절)
▶ 용서를 향한 진실된 갈망에 부합하는 죄의 실체에 대한 이해와 인식 및 하나님과 공동체(이웃)에 진정으로 연합하고자 하는 참여적 인식(3-4절과 7-12절)
요한복음 12장 20-33절, 열방을 향한 그리스도(20-23, 32절)
복음서가 가진 포괄적인 내용에 대해 짤막하게 소개하는 것은 자주 간과되기 일쑤다. 유대인뿐만 아니라 헬라인(이방인)을 위해서도 복음이 존재한다는 후기의 제자들의 발언들은 결코 놀랄 일이 못된다. 아브라함의 계약부터 새로운 계약에 이르기까지(창 17:1-6, 22:18절) 모든 나라들과 백성들이 하나님의 인류를 향한 구원계획들 속에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은 명명백백한 것이다.
영원한 역설(24-25절)
복음을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기꺼이 희생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그리고,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발언하는 내용은 주로 어떤 것들인가?) 상기 구절을 읽을 때 우리는 그들이 순교자에게만 해당하는 말씀이라고 생각하는가? 과연 우리가 그 순교자일 수는 없는가? 아마도 이러한 복음전도의 역설은 순교자보다는 평범한 우리 자신에게 시사하는 바가 큰 말씀이라고 생각한다. 소명으로서의 목회사역이냐 아니면 소명으로서의 그리스도인이냐는 주제의 함축성을 깊이 생각하는 기간이 되었으면 한다.
신앙을 나눈다는 것
복음의 메시지를 언급함에 있어 다양한 문화적 성격을 성급히 지적하고자 한다면, 우리들 중에 어떤이들은 복음전도를 예수께로 한 개인을 인도하는 것이라고만 생각하는 경향이 아주 강하다. 회중들 중에 자신들의 신앙을 다른 사람들과 넉넉히 나누는 성도들은 얼마나 되는가? 콰지 케나 박사(Dr. Kwasi Kena)는 GBOD 라는 복음적 웹사이트에서 교회 내의 다양한 문제적 사항들을 가지고 성경공부 모임을 운영하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당신도 이러한 획기적인 설교 모임을 감히 결성하였으면 한다.) 이러한 아티클 중에 기독교인들이 자주 자신들의 신앙을 나누는 일에 장애가 되는 문제들을 발견하고 도와주고 있다. 그는 로컬 처치에서 일어나는 신앙에 대하여 쉽게 이야기로 풀어가는 방식을 지원한다. (“쉽게 신앙나누기 1-2-3”(Faith Sharing: Easy as 1-2-3)을 찾아보라.)
설교 예화
1) 김대규의 처세술
① 계산하지 말 것
② 후회하지 말 것
③ 되돌려 받으려 하지 말 것
④ 조건을 달지 말 것
⑤ 다짐하지 말 것
⑥ 기대하지 말 것
⑦ 의심하지 말 것
⑧ 비교하지 말 것
⑨ 확인하지 말 것
⑩ 운명에 맡길 것
김대규의 ‘사랑과 인생의 아포리즘 999’중에서
2) 좋은 아버지 10계명
①자녀들과 함께 여행을 자주 가라.
②가족들에게 가끔 편지를 써라.
③일주일에 하루를 ‘가족의 날’로 정하고 즐거운 시간을 갖는다.
④자녀를 하루에 한 번 이상 안아주고 자주 서점에 데려가라.
⑤부모의 고향을 찾아가 어른들께 효도하는 모습을 보여주라.
⑥자녀들과 한 약속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
⑦아버지는 자녀의 인격형성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존재임을 명심하라.
⑧교통신호나 공중도덕을 잘 지키는 모범을 보여주라.
⑨아내와 화목한 모습을 보여주라. 자녀들은 부부가 화목할 때 정서적 안정을 얻는다.
⑩실수한 것에 대해서는 분명히 인정하라.
하나님은 어린아이를 잠시 그의 부모에게 맡겨주셨다. 부모는 자녀의 청지기일 뿐이다.
3) 사랑과 율법의 차이
어떤 주인이 하녀를 고용하면서 세 가지 규칙을 만들었다. 첫째, 아침 여섯시까지 일어날 것, 둘째, 아침 일곱 시까지 식사 준비를 마칠 것, 셋째, 아침 아홉 시부터 청소를 시작할 것, 이 세 가지 중 한 가지라도 어길 경우 즉시 해고할 것임.
이 하녀는 고용당한 날부터 매일 매일을 무거운 부담 속에서 살아야 했다. 그런데, 시일이 지나면서 주인과 하녀 사이에 사랑이 생겨 그들은 결혼하게 되었다. 하지만, 결혼한 직후, 하녀였던 부인이 “이제 나는 당신의 하녀가 아니고 당신의 부인입니다. 이전에는 여섯 시에 일어났지만, 앞으로는 열 시에 일어날 거예요.”하고 말한다면 얼마나 잘못된 일인가? 종의 위치에서 아내의 위치로 이끌어준 남편의 은혜를 생각한다면, 여섯 시가 아니라, 다섯 시에라도 일어날 준비를 갖추어야 하는 것이다. 그들 사이에 계약이란 법은, 새로운 ‘사랑’이란 법에 매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신앙인들이 은혜의 시대에 살고 있다고 해서 율법을 어겨도 된다는 말은 아닌 것이다. 죄로부터의 자유를 허락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한다면, 오히려 더욱 하나님께서 설정하신 율법을 지키고자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4) 크리스천의 위치
미국 피츠버그에서 만난 성도님의 이야기다.
미국 유학 후 미국에서 직장을 얻어 30년 동안 엔지니어로 일하고 있는 그분은, 지난 세월 동안 상사나 주위 사람으로부터 탈법 혹은 부당 행위를 지시받거나 요구당한 일이 단 한 번도 없었다고 했다.
몇 해 전, 그는 한국 관계 기관으로부터 경부고속전철 공사와 관련된 자문을 부탁받고 귀국했다. 그러나 그는 몇 달 지나지 않아 계약 기간이 만료되기도 전에 스스로 계약을 포기하고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가 참을 수 없었던 것은 부당한 청탁을 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그가 교회 장로임을 아는 크리스천들이었다는 것이다. 크리스천이, 크리스천에게, 크리스천이기 때문에, 봐 달라고 부당 청탁을 한 것이다. 그들이야말로 이 땅에 사는 크리스천들의 보편적인 모습이다.
2002년 10월, KBS 텔레비전의 ‘현장 출동’에서 세관 수사원들의 삶을 다룬 적이 있었다. 밀수꾼을 잡기 위해, 정보가 입수되는 대로, 전국을 추격의 무대로 삼아 밤낮을 가리지 않는 그들의 수고는 눈물겹기까지 했다. 젊은 세관원이 압수된 시계를 철판 위에 올려놓고 쇠망치로 일일이 깨부수었다.
그때, 취재하던 PD가 아깝지 않느냐고 묻자, 그의 대답이 이랬다. “아까워 보이죠? 그러나 이게 아까우면 이 자리를 지킬 수 없어요.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고 여겨야 할 수 있죠.”
그렇다. 세상의 것이 아까우면 진짜 크리스천의 자리를 지킬 수 없다. 진짜 크리스천이란 교회 안팎에서 주님의 말씀을 좇아 사는 것을 당연히 여기는 자다.
5) 궁(窮)하면 통한다. 아니, 기도하면 통한다.
우리 교회 고 집사는 퇴직금도 못 받고 회사에서 조기은퇴를 당했다. 대학에 다니는 두 아들과 아내, 이렇게 네 식구가 살아갈 길이 캄캄했다. 교회에서는 건축헌금을 작정하라고 한다. 헌금을 드린 성도를 보면 부럽고, 못 드린 자신이 부끄러웠다. 그는 엎드려 부르짖었다.
“살 길도 막막하지만 평생 한번 있는 성전 건축인데…. 나도 언제 남들처럼 맘껏 헌금을 할 수 있을까. 하나님, 저에게도 복을 주세요.”
기도 후 한 달이 지났는데, 그린벨트로 묶인 산을 광산으로 개발하겠으니 팔라는 제안이 왔다. “나에게는 그런 땅이 없어요. 잘못 연락한 것입니다.”
사연인즉, 조상들이 남겨준 땅의 상속자가 모두 끊겨 자신이 그 상속자가 된 것이다. 그는 상속된 땅 일부만 팔아 계약금 1억 원을 교회 건축헌금으로 드렸다. 고 집사는 감사의 눈물을 흘렸다.
하나님은 운행하는 분이다. 산속 땅 돌산을 운행해 건축헌금을 드리게 하신다. 나는 이런 하나님을 찬양한다.
설교 : 모든 사람이 내가 누구인지 알게 되리라
성경 ; 렘31:31-34, 히5:5-10, 요12:20-33
정수환목사 (학운교회)
지난 2009년도에 열렸던 WBC 결승전에서, 우리나라는 참으로 애석하게도 숙적 일본에게 패하고 말았습니다. 우리나라는 9회 초까지 일본에게 3:2로 밀리고 있다가, 9회 말에서 극적인 동점을 이루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가 일본을 물리치고 우승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와 희망을 갖게 했습니다.
하지만, 1점을 더 얻지 못하고 10회 연장전을 치르게 되었습니다. 10회 초, 우리나라는 다시 위기에 몰렸습니다. 잘 던지고 있던 투수 임창룡이 안타를 거듭 얻어맞고 말았던 것입니다. 일본은 노 아웃 상태에서 주자가 1루와 3루에 나가 있었습니다. 그래도 다행히 대타로 나온 일본선수를 아웃 시켰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등장한 선수가 메이저리그에서 타격 왕을 차지했던 ‘이치로’였습니다.
김인식 감독은 임창룡 투수에게 정면승부를 하지 말고 그냥 걸려 보내라는 사인을 보냈다고 합니다. 그런데, 임창룡 선수가 고집을 부린 것입니다. 결국 이치로는 안타를 쳤고, 그 결과 1루와 3루에 나가 있던 주자를 불러들임으로써, 우리나라는 5:3으로 패하고 말았습니다.
임창룡 선수의 정면승부는 한편 생각해볼 때에 대단한 용기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비록 이치로가 메이저리그에서 타격 왕을 차지했다고 하지만, 결코 그를 비겁하게 피하지 않고 정면승부해서 이겨내고야 말겠다는 그 마음을 탓할 수는 없으리라고 봅니다. 그러나 감독의 지시까지 어기면서 고집을 부린 것은 그다지 칭찬할 수 없는 행동입니다.
임창룡 선수와 오랫동안 함께 생활했던 김응룡 씨의 말에 의하면, 그때 그 상황에서 그 선수에게는 사인이나 지시만 가지고서는 통할 리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타임을 부르고, 감독이 직접 마운드로 올라가서 강력하게 고의사구를 지시해야만 했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임 선수에게는 그 누구도 쉽게 꺾을 수 없는 똥고집이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요컨대, 임창룡 선수의 그런 똥고집과 뱃장이 그로 하여금 대선수가 되도록 만든 좋은 요인으로 작용도 했을 것이고, 때로는 그 똥고집이 그를 좌절하게 하거나 실패에 빠뜨리는 나쁜 요인이 되기도 했을 것입니다. 아무튼, 임창룡 선수에게 있어서 이번의 실투는, 아마 어쩌면 그의 일생에 가장 큰 실수와 실패로 기록되리라는 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만일 그가 이번의 실수를 거울삼아서 지금보다 더 큰 선수로 성장하기를 원한다면, 그의 가장 큰 결점인 그 똥고집과 만용을 버려야 할 것입니다. 물론, 그 용기와 뱃장을 완전히 다 버려서는 안 되겠죠. 다만, 감독이나 코치의 지시까지 거역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어디까지나, 감독과 코치의 지시를 따르면서 용기와 뱃장을 가지고 경기에 임하게 될 때, 그는 진정 성공한 야구선수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성도 여러분, 임창룡 선수에게만 고집이 있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사람이라고 생긴 존재는 거의 대부분 다 고집이 있습니다. 물론, 고집이 신념으로 승화되면, 그 고집은 사람으로 하여금 성공에 이르도록 작용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고집이 불순종하는 마음과 결합하게 될 때에는 우리 인간을 아주 비참하게 만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비참하게 하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종래에는 우리 인간을 멸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바로 고집과 불순종입니다. 이 고집과 불순종이 수많은 사람들을 불행에 빠뜨리고 있습니다.
이미 말씀드렸듯이, 임창룡 선수에게는 남다른 고집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렇더라도 감독의 지시를 따라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그만, 감독의 지시까지 어기고 고집을 부림으로써, 그는 온 국민에게 아쉬움을 안겨주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에게도 그와 같은 고집과 불순종하는 마음이 있다고 하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고집과 불순종하는 마음을 버리지 않을 경우, 그런 사람은 결코 성공할 수 없습니다. 언젠가는 그 고집과 불순종하는 마음 때문에 아주 비참한 지경에 빠지거나 큰 실패를 당하게 될 것이고, 끝내는 영원한 멸망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우리 인간은 반드시 이 세상의 총감독자이신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야 합니다. 하나님의 지시를 따르지 않고 불순종하면서 고집을 부릴 경우, 어쩔 수 없이 그런 사람은 이 세상에서도 아주 불행하게 되거니와, 마지막에는 지옥에 떨어지고 말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만큼 우리 인간에 대해서 잘 아시는 분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 인간에 대해서 너무나 잘 아십니다. 왜냐하면, 인간을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자동차를 만든 사람보다 그 자동차에 대해서 더 잘 아는 사람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하물며,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인간을 만드신 전능하신 분이시니, 그 누구라서 하나님보다 인간을 더 잘 알 수 있겠습니까?
우리나라의 김연아 선수가 2099년도에 열린 세계 피겨선수권대회 여자 싱글 첫날 쇼트프로그램에서 세계신기록을 경신하면서 1위를 했습니다. 이번에 김연아 선수가 얻은 76.12점은 지난 번 4대륙선수권대회에서 자신이 세웠던 72.24점보다 3.88점이 더 많은 점수라고 합니다.
김연아 선수가 이처럼 좋은 점수를 얻게 된 것은, 말할 것도 없이 그에게 그만한 실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김연아 선수가 그처럼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는 실력을 갖추게 된 것은, 그의 코치인 ‘브라이언 오서’의 말을 잘 듣고 따랐기 때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브라이언 오서는 캐나다 피겨스케이트 국가대표 선수 출신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를 김연아 선수의 코치로 받아들이게 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브라이언 오서’가 피겨스케이트에 대해서 잘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만한 실력이 있기 때문에, 김연아를 세계 최고의 선수로 길러내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그동안 김연아가 브라이언 코치의 말을 잘 듣지 않고 자기 고집대로만 했다면 지금의 영광을 누릴 수가 있었을까요?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인간에 대해서 여호와 하나님만큼 더 잘 아시는 분은 이 세상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의 성품과 생리구조, 그리고 우주만물과 자연의 원리까지도 너무나 잘 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성공할 수 있는지, 그 방법을 알고 계십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진정으로 성공적인 인생을 살고자 원한다면,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우리는 그 처한 위치에 따라 그 누군가의 지시를 따라야 할 때가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우리가 몸이 아파서 병원에 갔을 때에는 환자의 입장이 되어서 의사를 지시를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병 고침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런가 하면, 학생이 되었을 경우에는 선생님의 지도와 교육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에 와서 교인이 되었을 때에는 목사의 가르침을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학생은 선생님의 말씀을 잘 듣고 따라야 좋은 성적을 거두게 되는 것이고, 교인은 목사의 가르침과 지도를 잘 따라야만 믿음의 성장을 가져올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만일 학생이 선생님의 지시를 따르지 않고 성도가 목사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으면서 자기 고집대로 행할 경우에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두 말할 것도 없이, 그 자신에게 큰 손해가 됩니다. 특히 성도의 경우, 목사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게 된다면, 영적인 면에서 엄청난 손해를 입게 되는 것입니다. 때로는, 큰 불행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일찌감치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하셔서 그들에게 갖가지 은혜와 사랑을 많이 베푸셨습니다. 그리고 놀라운 기적과 능력까지 보여주심으로써, 그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따르도록 하셨습니다. 그야말로, 하나님께서는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하여 그들을 축복된 길로 인도하고자 애쓰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모든 인류의 모델로 삼기를 원하셨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지시대로 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쓸데없는 똥고집을 부리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했습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이스라엘백성이 내가 지시하시는 대로 따르기만 하면 참으로 놀라운 복을 베푸시겠다.”고 굳게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백성은 하나님과의 약속을 제대로 지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하나님께 불순종하면서 반항하기를 밥 먹듯이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들 고집대로만 행했던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인 예레미야서 31장 32절에서, 하나님은 예레미야 선지자의 입을 빌려서 말씀하시기를 “이스라엘백성이 애굽에서 종살이 하고 있을 때, 나는 그들을 데리고 나왔다. 그때, 나는 그들과 계약을 체결했다. 그래서 나는 그 계약을 충실하게 지켰으나, 그들은 일방적으로 그 계약을 깨뜨려버렸다.”라고 밝히시고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수많은 선지자를 보내셔서 이스라엘 백성의 잘못을 지적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잘못을 고쳐 살 경우, 새로운 기회를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일러주시는 말씀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결국 이스라엘 나라는 멸망을 당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나라가 망했을 때에, 이스라엘백성이 겪어야 했던 비참한 상태는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수많은 백성이 바벨론으로 끌려가 인간 이하의 노예생활을 해야만 했을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 성은 완전히 다 파괴되고, 거룩한 성전마저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했을 때에 겪게 되는 불행과 고통이 무엇인지, 그들은 철저하게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노예생활을 하면서 생각한 것이, 그들의 후손들만은 자기들이 겪고 있는 그런 고통을 겪게 해서는 안 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문자로 기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동안에는 구전(口傳)으로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왔는데, 바벨론 포로 때에 비로소 문자로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구약성경의 대부분은 바벨론 포로 시대 때에 기록되었다고 하는 것이 대다수 성경학자들의 주장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인류의 총감독이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따르도록 지시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한 마디로 말해서, 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세상적인 모든 욕심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 하나님의 지시요 명령입니다. 하나님께서 일러주신 사인(sign)을 받아서 그대로 실천할 때에, 우리는 살아남을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는 것처럼, 나는 죽어야 한다(요12:23)”고 하시면서 “내가 죽으면 한 알의 죽은 밀알에서 많은 밀알이 맺히듯이 새생명을 풍성하게 거두리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후, 예수님은 다시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지만,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는 사람은 영원히 목숨을 보존할 것이다(요12:2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셨던 것입니다. 그 결과, 예수님은 죽은 자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는 부활의 영광을 누리게 되셨고, 모든 인류의 스승과 구세주가 되셨습니다. 그래서 그를 믿고 따르는 자는 그 누구든지 영생을 얻고 천국에 들어가는 특권까지 누릴 수 있도록 하셨던 것입니다.
물론, 예수께서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았더라면, 예수님은 오늘 우리의 스승이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주께서 보여주셨던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십자가를 져야만 진정한 크리스천이 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세상적인 욕심과 아집을 버리고 우리의 십자가를 질 때에, 집에서는 훌륭한 부모가 될 수 있고, 교회에서는 모범적인 성도가 되는 것이며, 세상에서는 사람들에게 본받을 만한 이웃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1. 우리는 예수님처럼 고난 받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어떤 젊은 부자 하나가 가정부를 고용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가정부를 고용하면서 세 가지 규칙을 만들어놓고, 가정부로 하여금 지키게 했습니다. 첫째는 아침 여섯시까지 일어날 것, 둘째는 아침 일곱 시까지 식사준비를 마칠 것, 그리고 셋째는 아침 아홉 시부터 청소를 시작할 것, 이 세 가지 중에서 하나라도 어길 경우에는 즉시 해고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가정부는 자존심도 상하고 기분이 나빴지만, 어쩔 수 없이 그 규칙을 지켜야 했습니다. 하루 이틀이 아니고, 매일 아침 6시에 일어난다는 게 정말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하루하루 참으로 고달프고 괴로운 날들을 보내야만 했습니다. 더군다나, 같은 나이 또래의 젊은 남자 주인으로부터 인격적인 무시를 당한다는 느낌이 들어서 더욱 속이 상했습니다.
하지만, 그 가정부는 모든 자존심을 버리고 충성스럽게 일했습니다. 젊은 주인이 어떻게 대하든지 상관하지 않고 미소로 답하면서 최선을 다했습니다. 원래 예쁜 용모를 지니고 있는데다가 언제나 항상 밝은 미소를 머금고 열심히 일하는 그 가정부에게 젊은 주인이 애틋한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드디어, 그 젊은 주인은 가정부에게 프러포즈했습니다. 그 가정부는 한사코 거부했지만, 젊은 주인의 진심어린 마음을 알게 되자, 결혼을 결심했습니다. 드디어 결혼해서 가정을 이루게 되었고, 가정부는 젊은 부자 주인의 아내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가정부로 처음 들어올 때부터 지켜야 했던 그 규칙은 변함없이 잘 지켰습니다. 이제는, 의무감에서 지키는 것이 아니라 남편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 규칙을 지켰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십자가를 지라고 하시는 것은 우리를 미워하시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를 진정으로 사랑하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런 지시를 하신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명령은 우리가 쉽사리 지킬 수 있는 것들이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가 영원히 살기 위해서는 그 명령에 따라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를 지는 일은 참으로 고통스럽고 괴로운 일이지만, 우리가 진정으로 성공적인 인생을 살기를 원한다면 십자가를 지는 고통을 이겨내야 합니다. 특히 사랑하는 우리의 아들딸들로부터 존경받는 부모가 되기 위해서, 우리는 모든 자존심도 버리고 쓸데없는 고집도 버려야 합니다.
김연아가 지금 온 국민의 사랑을 받게 된 것은, 그가 고난도의 모든 훈련을 잘 감내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보통 그냥 맴돌기를 한 열 번만 해도 쓰러지고 마는데, 김연아는 수없이 많은 회전을 한 후에도 다시금 다음 동작으로 들어가고 있는 것을 보면, 그가 얼마나 연습을 많이 했으면 그렇게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야말로, 피나는 노력과 고된 훈련 끝에 얻은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말하기를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었지만, 몸소 고난을 겪음으로써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을 배우셨다(5:8)’고 했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은 어떤 존재입니까? 그리고 이 세상에서 얼마나 귀하게 쓰임을 받고 있습니까? 하지만, 우리가 지금보다 좀 더 귀한 존재가 되려면, 그리고 지금보다 좀 더 훌륭한 부모가 되기를 원한다면, 십자가 지는 일을 결코 피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2. 십자가의 고난을 피할 것이 아니라, 즐거운 마음으로 잘 감당해야 합니다.
기독교의 본질은 인간답게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참 모습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을 본받아 살아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내면에는 옛 조상인 아담의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내 멋대로 살고 싶어 하는 본능이 있습니다. 감독의 지시를 따르지 않았던 임창룡 선수처럼, 우리에게는 불순종하는 마음과 쓸데없는 고집이 있습니다.
이것을 이겨내지 못하면, 우리는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많은 창피를 당하거나 수모를 겪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실패의 쓰라림을 경험하지 않으려면, 우리 스스로가 미리 십자가를 지는 아픔을 감수해야만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십자가는 쉽고 가벼운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십자가를 외면했을 때에 우리가 져야 하는 십자가는 정말 감당하기 어려운 십자가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누구든지 나를 따르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서 높이실 것이다(요12:26)”라고 하셨습니다. 사실 예수님도 “내 앞에 있는 이 고난의 쓴잔을 마시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까?”하고 하나님께 간절히 간구하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뜻대로 겸손히 순종하셨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좋으신 하나님을 굳게 믿으십시오. 그리고 그 지시에 따라 살아가도록 합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전에 미처 상상할 수 없었던 놀라운 축복을 해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돈을 버는 것이 참으로 어렵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열심히 돈을 벌어야 합니다. 그러나 돈보다 더 귀한 것이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그런고로, 힘들고 어려워도 주님 뜻에 따라 살아야 합니다.
고3 수험생이 그토록 고생하면서 열심히 공부하는 것은 원하는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서입니다. 사실 요즘에는 공부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대학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공부를 열심히 한 후에 들어가는 대학과, 공부하지 않아도 들어갈 수 있는 대학은 분명히 여러 가지로 다를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생활을 열심히 하지 않아도 누가 뭐라고 할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대충 믿음생활을 하다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과, 고생을 마다하지 않고 최선을 다하여 믿음생활을 한 후에 가게 되는 천국은 분명히 다를 것입니다.
하지만, 훗날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금 우리가 어떻게 믿음생활을 하느냐에 따라, 우리 후손이 받게 되는 축복이 여러 모로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성실하게 믿음생활을 해야 합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십자가 지는 일을 미루지 말아야 합니다. 기회가 지난 후에 아무리 후회해도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아무쪼록, 옛 조상 아담이 물려준 쓸데없는 고집과 불순종하는 마음을 다 버리시고, 우리 예수님처럼 겸손히 순종하는 삶을 살아감으로써, 우리 모두 영광스럽게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