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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파도에서 바다까지
눈을 감아라. '나는 누구인가?'하는 이 질문을 던진 자가 누구인지 기억해 보라.
파도에서 바다까지
61. 파도는 바다와 함께 있고 불꽃은 불과 함께 있듯이 우리 역시 우주적 대양의 한 조각 파도다.
62. 내면적으로나 외부적으로 그대의 마음이 방황할 때마다, 바로 여기에 이것이다.
63. 어떤 특별한 감각을 통해서 명백하게 드러날 때, 그 자각 속에 머물러라.
언젠가 스리 오르빈도(Sri Aurobindo)는 삶 전체가 요가라고 말했다.
그렇다. 모든 것이 하나의 명상이 될 수 있다. 모든 것이 명상이 되지 않는 한 명상은 그대에게 일어나지 않는다. 명상은 부분이 될 수 없다. 그대 삶의 한 조각이 될 수 없다. 명상이 일어나면 그대는 전적으로 그 속에 몰입된다. 그렇지 않으면 명상이 아니다.
그대는 삶의 한 부분만을 명상적으로 만들 수 없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대는 명상적으로 될 수 있다. 그러나 부분적으로 나눌 수는 없다. 명상은 그대 존재의 성질이 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호흡과 같다. 그대는 무엇을 하든지 호흡을 한다. 걷거나 서거나 앉거나 눕거나 어떤 상태에서도 호흡을 한다.
명상은 내면적인 호흡이다. 이 말은 비유가 아니다. 글자 그대로다. 그대가 공기를 호흡하는 것과 똑같이 그대는 의식을 호흡할 수 있다. 한 번 그대가 의식을 들이마쉬고 내쉴 수 있다면 그대는 더 이상 물질의 육체가 아니다. 그때부터 고차원적 호흡의 삶이 시작된다. 그대의 삶은 다른 차원의 영역으로 들어간다. 그 파원은 형이상학적인 차원이다.
그대의 호흡은 신체적이고 명상은 형이상학적이다. 그래서 그대는 삶의 일부분만을 명상적으로 만들 수 없다. 그대는 아침에 한 번 명상하고 잊어버릴 수가 없다. 사원이나 교회에 가서 명상을 하고, 거기에서 나오면 명상을 안 하는 식이 될 수는 없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그것은 명상이 아니다. 그대는 명상 속으로 들어간 것이 아니라 겉으로 명상을 하는 흉내만 낸 것이다. 그대가 들어갈 때 진짜 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면 그대가 어디에 있든지 명상은 그대 속에 언제나 있게 된다. 그것이 그대의 기본을 이룬다.
두 번째로 그대는 어떤 장소에서도 명상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 삶 전체가 하나의 깊은 명상 속에 있기 때문이다. 산들이 명상하고 별들이 명상을 한다. 꽃들이 명상하고 나무들이 명상하며 모든 원자들도 명상하고 있다. 그리고 바로 이 땅이 명상하고 있다.
삶 전체가 명상하고 있다. 그대는 언제 어디에서나 그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 그 어떤 것도 명상의 입구가 될 수 있다. 그 방법이 수없이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토록 많은 종교들이 존재한다. 그리고 한 종교가 다른 종교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바로 그 입구가 모두 다르기 때문이다. 때때로 그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종교들이 있다. 그대는 그 입구들이 완전히 달라서 그런 사람들을 종교인으로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예를 들어 여기 시인이 한 명 있다. 그 시인은 어떤 스승을 찾아가지 않고서, 사원이나 소위 종교적인 행위를 하지 않고서 명상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 그의 시가, 그의 창조성이 그 입구가 되는 것이다. 그는 그것을 통해 들어갈 수 있다.
동양에서는 도자기공 역시 작업을 통해 그 속으로 들어간다. 궁수 역시 마찬가지다. 정원사도 그렇다. 그 누구라도 어디에서든 명상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 그대가 상상할 수 있는 만큼의 많은 문들이 있다. 어떤 행동이든지 문이 된다. 그러므로 행위하라.
방편은, 길은, 방법은 기본이 아니다. 그대를 행동하게 하는 의식의 질이 기본이다.
인도의 가장 위대한 신비주의자 까비르(Kabir)는 직공(織工) 이었다. 그는 깨달음을 얻은 뒤에도 계속 베 짜는 일을 그만두지 않았다. 그에게는 수많은 제자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까비르에게 늘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 이제 베 짜는 일은 그만두십시오. 그러실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있지 않습니까? 필요한 모든 것을 우리가 제공하겠습니다."
그때마다 까비르는 웃으면서 이렇게 대답하곤 했다.
"이 일은 단지 베만 짜는 것이 아니다. 베를 짜는 것은 외부적인 행동이다. 그대들은 이 일을 하는 동안 나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것들을 볼 수 없다. 이 일은 나의 명상이다."
베 짜는 직공이 베를 짜는 일을 통해서 어떻게 명상가가 될 수 있는가? 그것은 마음의 질이다. 그 질 때문에 베 짜는 일은 명상이 될 수 있다. 그때는 외부적인 행동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
또 다른 신비주의자 중에 도공(陶工) 이 있었다. 그의 이름은 고라(Gora)였다. 그는 동양인이었다. 그는 도자기를 만들면서 노래하고 춤을 추었다. 그가 물레를 돌리며 도자기를 빚는 동안에는 그 물레의 중심이 자신의 중심과 하나가 되었다. 그대는 물레가 돌아갈 때 거기에 하나의 중심이 생기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때 동시에 그대 속에 또 하나의 중심이 생긴다. 그 속에 빠져들 때 보이지 않는 의식의 내면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리고도 도자기가 완성되었을 때 그것은 단지 도자기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을 완성한 것이다.
어떤 행동이든지 명상이 될 수 있다. 한번 그대가 어떠한 행동이 명상이 되는지 알게 되면 그대는 자신의 모든 행동을 명상으로 변형시킬 수 있다. 그때 삶 전체는 요가가 될 것이다. 탄트라가 될 것이다. 길을 가든지 사무실에서 일을 하든지, 방 안에서 할일없이 누워 있든지 그 무엇을 하더라도 그것은 명상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기억하라. 명상은 행동에 속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행동을 하게 되는 그대 마음의 질이다.
이제 우리는 방편으로 들어갈 것이다.
61. 파도는 바다와 함께 있고 불꽃은 불과 함께 있듯이 우리 역시 우주적 대양의 한 조각 파도다.
먼저 파도가 무엇인지 이해해야 한다. 그때 이 의식의 파도가 그대로 하여금 명상 속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돕는다.
그대는 바다 위로 출렁이는 파도를 본다. 그것들은 수면 위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깊이 들어가 보면 파도는 없다. 이를 먼저 이해하라.
파도가 나타나지만 그것은 단지 감각적이다. 더 깊은 감각에서는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더 깊은 감각에서는 오직 바다만이 존재한다. 바다 없는 파도는 존재하지 않는다. 파도는 순간적인 현상이다. 그것은 본질이 아니다. 바다가 바로 본질이다.
언어 때문에 많은 문제가 생겨났다. 우리가 '파도'라고 말할 때 그것은 뭔가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차라리 '파도(wave)' 보다는 '파도침 (waving)'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낫다. 그것은 사물이 아니라 현상이고, 본질이 아니라 운동이며, 물질이 아니라 과정이다. 바다가 물질이며 파도는 그것의 한 모습이다.
바다는 침묵할 수 있다. 그때 파도는 사라진다. 그러나 바다는 거기에 존재할 것이다. 바다는 침묵 속에서나 활동 속에서나 그 언제라도 존재할 수 있다. 그러나 고요한 파도를 본 적이 있는가? 파도는 운동이며 활동이다. 그것은 고요해지는 순간 사라진다. 그러나 바다는 그대로 있다.
두 번째로, 파도는 하나의 개체로 나타난다. 파도는 그 자신의 개성을 갖고 있다. 독특하다. 서로 다르다. 똑같은 파도는 없다. 어떤 파도는 조금 크고 어떤 파도는 조금 작다. 그것은 모두 제 나름대로 개성을 갖고 있다. 하나의 파도가 일어나면 다른 파도는 죽는다. 붙어 있으면서 동시에 함께 떠오를 수 없다. 그리고 거기에는 어떤 관계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일어나는 파도와 스러지는 파도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을 수 있는가?
늙은이는 죽고 아기는 태어난다. 그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 만약 그들이 서로 관계가 있다면 그들은 동시에 태어나고 동시에 죽을 것이다. 그러나 한 파도가 스러지면서 다른 파도가 일어나는 것은 죽은 파도로부터 에너지를 모으기 때문이다. 깊이 들어가 보면 그것들은 모두 같은 바다다. 그것들은 서로 다르지 않다. 그것들은 분리되어 있지 않다. 그것들의 개성은 거짓이며 환상이다. 그것들은 개체가 아니다. 그것은 바다와 이중적인 관계가 아니다. 그것의 진실은 불이원성이다.
이제 나는 이 방편을 다시 한번 낭독한다.
"파도는 바다와 함께 있고 불꽃은 불과 함께 있듯이 우리 역시 우주적 대양의 한 조각 파도다."
우리는 우주의 바다 위에 있는 단지 한 조각의 파도다. 이를 명상하라.
이 느낌이 그대 속에 깊이 들어가도록 하라. 그대의 호흡이 마치 파도가 일어났다 스러졌다 하는 것처럼 느끼기 시작하라. 숨이 들어오는 것은 다른 사람의 숨이 나오기 때문이며, 그대가 숨을 내쉴 때 역시 그것은 다른 사람에게 들어간다. 호흡은 생명의 바다 위에 일렁이는 파도다. 그대는 나와 분리되어 있지 않다. 깊이 들어가 보면 우리는 모두 하나다.
그대의 개성은 단지 거짓이며 환상이다. 그것은 실체가 아니다. 실체는 개성이 없다. 무아(無我) 다. 바다와 같다. 모든 종교가 자기 중심적인 태도에 반대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신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까지도 비종교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내가 존재한다' 라고 말하는 사람은 비종교적인 사람이다.
고타마 붓다는 무신론자다. 그는 어떤 신도 믿지 않았다. 마하비라 바르다만 역시 무신론자다. 그도 신을 믿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성취했다. 도달했다. 전체성을 깨달았다.
만약 그대가 어떤 신도 믿지 않는다면 그것은 비종교적이라고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신은 종교의 기본이 아니기 때문이다. 에고 없음이 종교의 기본이다.
그대가 신을 믿는다고 하더라도 에고이스트의 마음을 갖고 있다면 그대는 비종교적인 사람이다. 에고 없는 마음은 신을 믿을 필요가 없다. 그는 저절로 신성을 깨닫게 된다. 에고가 없을 때 그대는 파도에 집착하지 않는다. 그대는 바다 깊숙이 들어간다. 그러나 에고를 갖고서는 파도에 집착한다.
삶을 바다처럼 바라보라. 그대 자신이 한 조각 파도임을 느껴라. 그 느낌에 사무쳐라.
그대는 이 방편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사용할 수 있다. 숨을 쉬는 동안 바다가 그대 속으로 들어온다고 느껴라. 바다가 그대 속에 들어왔다가 나가고 들어왔다가 나간다. 호흡의 매순간마다 파도가 일어나고 스러진다고 느껴라. 들숨은 일어나는 파도이고 날숨은 스러지는 파도로서 말이다. 그 둘 사이에 그대는 누구인가? 그저 무(無)일 뿐이다. 쑤냐(Shunya)다. 공이다. 이 공이라는 느낌은 그대를 변형시킨다.
무(無)라는 느낌이 들면 그대의 모든 불행은 사라진다. 그대는 깊은 곳에서부터 안도하게 된다. 그대가 없는데 누가 긴장할 것인가? 그대는 축복으로 가득 찬다. 아니 그대가 축복으로 채워진다는 말이 아니다. 그대는 없고 오직 축복만이 거기에 있다.
그대가 없는데도 그대는 불행을 만들 수 있는가? 그것이 바로 붓다가 궁극의 상태, 즉 아난다(ananda ;至福)에 대해서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던 이유다.
붓다는 '단지 거기에 불행이 없다'라고만 말했다. 그것이 전부다. 만약 그가 지복에 관해서, 아난다에 관해서 말했다면 그대는 오해할 소지가 있다. 그래서 붓다는 지복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따라서 그대는 어떻게 불행이 없어지는지를 알려고 하라. 그것은 그대라는 에고 없음이 존재하는 것이다.
우리의 문제는 무엇인가? 문제는 파도가 바다와 분리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만약 스스로 그렇게 생각한다면 즉시 죽음의 공포가 닥쳐올 것이다. 파도는 죽어야 한다. 주위에 있는 모든 파도가 죽어가고 있는 것을 보고 있다. 그대는 자신을 계속해서 속일 수 없다. 누군가가 새로 태어나더라도 거기에는 죽음이 숨겨져 있다. 그래서 그대 역시 죽는다.
만약 파도가 바다와 분리되어 있다고 스스로 생각하면 죽음의 공포는 반드시 닥쳐오고 만다. 그러나 파도가 자신은 존재하지 않으며 단지 바다일 뿐임을 안다면 거기에 죽음의 공포는 없다. 오직 파도만이 죽을 수 있다. 바다는 죽지 않는다. 나는 죽을 수 있지만 생명은 아니다. 그대는 죽을 수 있지만 존재계는 아니다. 코스모스는 죽을 수 없다. 존재계는 계속 파도를 일렁이게 한다. 그것은 그대 속에서 일렁이며 다른 사람 속에서 일렁인다. 그대의 일렁임이 스러질 동안에도 다른 새로운 일렁임들이 계속 시작된다.
한번 그대가 자신을 파도로부터 분리시킬 수 있다면 그대는 바다와 하나가 됨을 깨닫게 된다. 형상이 없는 것은 죽음도 없다.
그리고 죽음의 공포는 그대에게 많은 불행을 낳을 것이다. 모든 고통, 고뇌, 번민은 죽음의 공포가 그 기본으로 되어 있다. 그대는 두려워서 전율하고 있다. 그것을 의식하지 못할 수도 있지만 깊이 들어가 보면 거기에서 매순간 죽을까봐 떨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그대는 많은 안전 장치들을 설치해 놓을 수도 있고, 요새를 만들어 놓을 수도 있다. 그러나 아무것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아무것도 그대를 죽음에서 구원할 수는 없다. 흙은 흙으로 돌아간다. 그대는 길을 가다가 구두에 묻은 흙먼지를 볼 수 있다. 그것이 나폴레옹의 몸인지 알렉산더의 몸인지 모른다. 어디엔가 알렉산더는 먼지가 되었을 것이다. 그대의 몸에 묻어 있는 먼지가 말이다. 똑같은 일이 그대에게도 일어난다.
이제 그대는 여기에 있다. 다음 순간 그대는 사라질 것이다. 조만간 먼지는 먼지로 돌아갈 것이다. 그래서 그대는 다른 사람의 구두에 묻어 있든지 아니면 도공의 손에 의해서 도자기로 구워질지 모른다. 그대의 몸이, 그대가 사랑하는 사람의 몸이 그렇게 된다고 생각해 보라. 그대 자신이 지렁이나 나무 속으로 들어간다고 상상해 보라. 그러나 이것은 지금도 일어나고 있다. 모든 것은 하나의 형상을 이루며, 현상은 반드시 죽는다.
오직 형상 없음만이 영원하다. 그대가 형상에 집착할 때, 자신을 형상과 동일시할 때, 자신이 하나의 파도라고 생각할 때 그대는 스스로 심각한 문제에 떨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그대는 대양이다. 파도가 아니다. 이 명상은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그것은 그대에게 변형을 가져다 줄 수 있다. 그것은 그대를 돌연변이로 만들 수 있다. 그대의 모든 삶에 이 명상이 퍼지게 하라. 호흡할 동안에도 생각하고, 밥먹을 동안에도 생각하라. 무엇을 하든지 이 사실을 생각하라.
언제나 형상은 파도이며 형상 없음은 바다라는 것을 형상 없음은 죽음 없음이다. 형상은 곧 필멸이다. 그대는 어느 날 갑자기 죽는 것이 아니다. 그대는 매일 죽어 가고 있다. 어린 시절도 죽고 젊은 시절도 죽는다. 그리고 노년이 되면 그때 노년이 죽는다. 그리고 형상은 사라진다. 매순간 그대는 어떤 것 속으로 죽어 들어간다. 그리고 어떤 다른 것이 새로 태어난다. 그대가 탄생한 날은 탄생한 첫날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앞으로 다가올 더 많은 탄생의 한 부분이다. 그대가 이 삶을 마치는 날은 처음 죽는 날이 아니다. 그것은 이번 생의 마지막 죽음일 뿐이다. 그대는 그 전에도 여러 번 죽었다.
매순간 어떤 것이 죽어 가고 있고, 어떤 것이 새로 태어나고 있다. 그대의 일부가 죽고 일부는 태어나는 것이다.
과학자들은 그대 몸 속에 7년 이상 살아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말한다. 모든 세포는 변한다. 만약 그대가 70년을 산다면 그대의 세포는 열 번이나 바뀐다. 그때마다 그대는 새롭게 태어난다. 새 몸이 되는 것이다.
매순간 어떤 것이 바뀌고 있다. 그대는 하나의 파도다. 그것은 본질이 아니다. 파도는 잠시도 멈출 수가 없다. 움직이지 않는 파도는 있을 수 없다. 그대는 끊임없이 움직이는 과정 중의 하나다. 만약 그대가 이 흐름과 동일시한다면 그대는 탄생과 죽음 사이에만 있는 것으로 제한된다. 그때 그대는 불행해질 것이다. 그때 그대는 실체의 껍데기만 붙잡게 된다. 이것이 바로 샹카라가 말한 '마야'다.
그리고 바다는 브라흐만이다. 바다는 진리다. 따라서 그대 자신을 일어나고 스러지는 파도의 연속으로 생각해 보라. 하지만 그대는 어떻게 해볼 수가 없다. 이 파도들은 잠시 후에 사라질 것이다. 나타나는 것은 사라질 수밖에 없다. 그것에 대해 어떤 조치도 취할 수 없다. 모든 노력이 절대적으로 쓸모 없다. 오직 한 가지 할 수 있는 것은 그 파도의 움직임을 지켜보는 것이다. 구경꾼이 되는 것이다.
한 번 그대가 구경꾼이 된다면 갑자기 그대는 파도 너머에 있는 그 무엇을 알게 된다. 그것이 바로 바다다. 우주는 그대를 통해서 파도친다. 그것을 느껴라. 그것에 집중하라. 그것을 명상하라. 수많은 방법으로 그것이 그대에게 일어나도록 자신을 허용하라. 수많은 길을 통해서 말이다.
앞에서 나는 호흡에 대해 말했다. 성욕도 마찬가지다. 성욕이 그대 속에서 일어난다. 그것을 느껴라. 그대 자신의 욕망으로서가 아니라 그대 속에 일어나는 대양의 한 조각 파도로서, 삶의 고통으로서, 그대 속에 일어나는 생명력의 물결로서 말이다. 그대는 사랑의 행위 속에서 타인과 만난다. 그것을 두 파도의 만남으로, 두 개체의 만남으로 생각하지 마라. 두 개의 개체 같은 것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파도는 사라지고 오직 대양만이 남아 있다. 그때 섹스 행위는 하나의 명상이 된다.
그대에게 일어나는 것이 무엇이든지 행위가 아니라 명상으로 느껴라. 그것이 그대에게 일어난다고 생각하지 말고, 우주에서 일어난다고 느껴라. 그대는 우주의 일부일 뿐이다. 수면 위의 한 파도일 뿐이다. 따라서 모든 것을 우주로 떠넘겨라.
일본의 위대한 선사(禪師) 도원(道元)은 배고픔을 느낄 때마다 이렇게 말했다. "우주가 나를 통해 배고픔을 느끼는 것 같다."
그는 목마를 때에도 이렇게 말했다. "존재계가 내 속에서 목말라 한다."
명상이 그대를 인도해 갈 곳이 바로 이것이다. 그때 모든 것이 그대의 에고로부터 떨어져 나가서 우주의 한 부분이 된다. 그때 일어나는 것은 그 무엇이든지 존재계 자체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그대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때 더 이상 죄도 없다. 책임도 없다. 나는 그대가 아무런 책임도 질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본래 죄인이라고 말하는 것도 아니다. 죄는 그 성립이 불가능하다. 죄는 오직 에고를 통해서만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그대는 더 이상 무책임해질 수 없기 때문에 책임이라는 문제가 성립되지 않는 것이다. 오직 그대만이 존재하는데 누가 그대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단 말인가?
이제 그대가 어떤 사람이 죽는 것을 본다면 그대는 그와 함께 자신이 죽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우주가 죽어 가고 있고, 그대는 그것의 한 부분이다. 만약 그대가 활짝 피고 있는 한 송이 꽃을 본다면 그대 역시 그 꽃과 함께 피어날 것이다. 이제 우주 전체가 그대가 된 것이다. 그런 깊은 충만과 조화 속에 있는 것이 바로 삼마디 (Samadh)속에 있는 것이다.
명상은 길이다. 그리고 이 하나됨의 조화, 전체와 하나됨의 이 느낌이 목적이자 궁극이다. 이것을 해보라. 바다만 생각하고 파도는 잊어버려라.
그대가 파도라고 생각할 때마다 그대는 파도로서 행동하기 시작할 것이다. 그때 그대는 뭔가를 잘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대는 불행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다. 그대를 벌주는 신 같은 것은 없다. 어떤 환상에 사로잡혀서 기도를 올릴 때마다 그대는 자신을 벌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 신 대신에 법(Dharma)이 있다. 도(Tao)가 있다. 만약 그대가 그것과 조화를 이룬다면 그대가 지복을 느낄 것이다. 그러면 하늘 위에 앉아서 그대를 벌주는 사람이 없음을 안다. 그대의 죄상을 낱낱이 기록해 놓는 책 같은 것도 없음을 안다. 그리고 그럴 필요도 없다.
법이나 도라고 하는 것은 단지 중력과 같은 것이다. 만약 그대가 똑바로 걷고자 한다면 중력은 도움이 될 것이다. 만약 잘못 걷는다면 넘어질 것이고 뼈가 부러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누가 그대를 벌한 것이 아니다. 단지 중력의 법칙에 조화를 이루지 못했을 뿐이다. 그대가 잘못 걸어서 넘어지면 뼈가 부러질 것이다. 따라서 잘 걷고자 한다면 중력을 이용하라. 에너지는 잘 이용할 수도 있고 잘못 이용할 수도 있다.
그대가 자신을 하나의 파도로서 느낄 때 그것은 우주의 법칙에 저항하는 것이다. 그때 그대는 실체에 저항하는 것이며 따라서 스스로 불행을 자초하는 일이다. 이것이 바로 업(karma)의 원리인 것이다. 그 법칙을 제정한 사람은 없다. 신도 심판관이 아니다.
심판이란 추한 것이다. 만약 신이 심판관이라면 그는 완전히 지쳐 버릴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틀림없이 미쳐 버릴 것이다. 그는 심판관이 아니다. 그는 통제자도 아니고 법을 제정한 사람도 아니다. 우주는 단지 그 자신의 법칙을 갖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기본적인 법칙은 그대가 실재 속에 있을 때 지복 속에 있게 된다. 그리고 그대가 비실재 속에, 거짓 속에 있을 때는 불행 속에 있는 것이 된다.
이제 두 번째 방편으로 넘어가자.
62. 내면적으로나 외부적으로 그대의 마음이 방황할 때마다, 바로 여기에 이것이다.
마음이란 것은 하나의 문이다. 그것이 어디를 방황하더라도, 사색을 하거나 꿈을 꾸거나 무엇을 생각하더라도 바로 그 순간, 그 마음은 문이 된다. 이것은 매우 혁명적인 방편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평범한 마음이 문이 된다고는 결코 생각해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항상 지고한 마음, 이를테면 붓다나 예수의 마음만이 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들은 초인간적인 마음을 갖고 있다고 믿어 왔다. 그러나 그대가 갖고 있는 바로 그 마음이, 꿈을 꾸고 계속 쓸데없는 망상을 피우고 있는 그 마음이, 추한 욕망과 갈증과 분노와 탐욕과 모든 저주스런 것들로 가득 찬 바로 그 마음이, 도저히 통제할 수 없이 계속 과거와 미래를 왔다갔다해서 마치 정신병원 같은 그 마음이 바로 문이 된다고 이 방편은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대의 마음이 어디를 방황하든지 언제나 이 사실을 기억하라. 중요한 것은 대상이 아니다. 그것이 내면이건 외부이건 상관이 없다. 바로 그때의 그 마음이 열쇠가 된다.
많은 것들이 이해되어져야 한다.
첫째로 평범한 마음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평범하지 않다. 평범한 마음이라고 해서 우주적인 마음과 동떨어진 것은 아니다. 평범한 마음은 우주적인 마음의 부분이다. 평범한 마음의 뿌리는 존재계의 바로 그 중심에 뿌리박고 있다. 그렇지 않다면 그대는 존재할 수 없다. 어떤 죄인이라도 이 신성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그렇지 않다면 그는 존재할 수가 없다. 만약 악마가 존재한다면 그 역시 신성의 지지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존재계의 모든 것은 현존이 가능하다. 그 자체로 오직 존재 속에 뿌리박고 있기 때문이다.
그대의 마음은 꿈을 꾸고 있다. 상상을 하고 있고, 방황과 긴장을 하고 있으며, 고뇌와 불행 속에 있다. 그러나 그것이 어떤 상태에 처해 있건 그것은 전체성 속에 뿌리박은 채로 남아 있다. 그렇지 않으면 그 모든 것은 불가능하다. 그대는 존재계를 벗어날 수 없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바로 이 순간에도 그대는 그 속에 뿌리박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이루어졌는가? 만약 바로 이 순간 우리가 존재계 속에 뿌리박고 있다면 그때 존재계는 아무것도 이루어진 것이 없다는 에고이스트 마음에 나타날 것이다. 우리는 이미 신성 속에 있다. 그런데 그대는 왜 몸이 달아 안절부절못하는가? 그대는 신성 속에 있다. 하지만 그대는 그 사실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다.
마음이 방황할 때 거기에는 두 가지가 있다.
마음과 방황, 마음이 향하는 대상과 마음 자체, 하늘을 떠도는 구름과 하늘 자체가 있다. 여기에 분명히 구름과 하늘의 두 가지가 있다. 종종 구름이 너무 많아서 하늘이 사라진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그대는 하늘을 볼 수 없다. 그러나 그대가 볼 수 없다고 해서 하늘이 없어진 것은 아니다. 그것은 없어질 수 없다. 하늘이 없어지게 하는 방법은 없다. 하늘은 거기에 있다. 가려졌든 가려지지 않았든, 보이든 보이지 않든 그것은 거기에 있다.
그러나 구름 또한 거기에 있다. 만약 그대가 구름에만 집착한다면 하늘이 사라질 것이다. 만약 그대가 하늘에 주의를 기울인다면 구름은 단지 일시적인 것일 뿐이다. 그것은 왔다가 가는 것이다. 그대는 구름에 대해 너무 걱정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오기도 하고 또 가기도 한다. 아무리 많은 구름이라도 하늘을 파괴시킬 수는 없다. 1인치라도 말이다. 구름은 하늘을 더럽게 만들 수 없다. 구름은 하늘을 어떻게 할 수 없다. 하늘은 언제나 그 순수성을 간직하고 있다.
그대의 마음이 방황할 때 거기에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구름인 사념이고 다른 하나는 하늘인 의식이다.
만약 그대가 대상인 사념에 집착한다면 그대는 하늘을 잊어버린다. 그대는 주인을 잊어버린다. 그대는 손님에게 너무 많은 관심을 쏟고 있다. 생각들, 사념들은 지나가는 객이다. 그대가 그 객들에게 초점을 맞출 때 그대 자신의 존재는 잊어버리게 된다.
그러니 객으로부터 주인을 향해 초점을 옮겨라. 구름으로부터 하늘로 시선을 옮겨라. 이것을 실제적으로 수련해 보라. 성욕이 일어난다. 이것은 하나의 구름이다. 혹은 더 큰 집을 가지고 싶은 탐욕이 일어난다. 이것 역시 한 조각 구름이다. 그대가 그 구름에 너무 강하게 사로잡히면 그것이 누구에게 일어난 것인지를 완전히 망각한다. 도대체 그 구름 뒤에 누가 있는가? 구름이 어떤 하늘 속에서 이동하고 있는가?
하늘을 기억하라. 그러면 갑자기 구름이 사라진다. 그대에게는 대상에서 주체를 향한 초점의 방향 전환이 필요할 뿐이다. 구름에서 하늘로, 객으로부터 주인으로 말이다. 그것은 단순한 초점의 자리 이동이다.
선의 스승인 임제선사가 설법을 하고 있었다.
그때 대중들 중 한 사람이 이렇게 물었다.
"제게 유독 한 질문이 떠나지 않는데 대답 좀 해주십시오. 나는 누구입니까?"
임제는 말을 끊었다. 모든 사람의 이목이 거기에 집중되었다. 도대체 그가 어떻게 대답할까?
그러나 임제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자리에서 내려와 질문한 사람에게 다가갔다. 사람들의 눈이 그 장면에 집중되어 숨조차 쉬지 않는 것 같았다. 그는 도대체 어떻게 하려는 것일까? 그는 단지 제자리에 앉아서 대답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닌가? 법석을 내려올 필요가 없지 않은가?
질문을 던진 사람은 임제가 가까이 오자 겁에 질렸다. 임제가 꿰뚫어 버릴 듯한 시선으로 그를 노려보았던 것이다.
임제는 그 남자의 어깨에 손을 얹고 심하게 흔들어 충격을 주면서 외쳤다.
"눈을 감아라. '나는 누구인가?'라는 이 질문을 던진 자가 누구인지 기억해 보라."
그 사람은 눈을 감았다. 물론 겁에 질린 채로였다. 그는 이 질문을 던진 자를 찾기 위해 내면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되돌아오지 않았다.
대중(大衆)들은 기다리고 기다렸다. 그의 얼굴은 여전히 고요한 침묵에 빠져 있었다.
그때 임제는 그에게 다시 한번 충격을 가해야 했다.
"이제 나와서 대중 앞에 고하라. 그대가 누구인지 말이다."
그러자 그 사람은 갑자기 웃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이 얼마나 기적적인 방법인가? 하지만 어떤 사람이 지금 당장이라도 나에게 이 질문을 한다면 나 역시 똑같은 행동을 했을 것입니다. 나는 대답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단지 초점의 자리바꿈일 뿐이다. 그대는 질문을 한다. '나는 누구인가?라고 말이다. 그대의 마음은 그 질문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고 대답은 질문하는 자의 질문 뒤에 가려져 있을 뿐이다. 따라서 초점의 방향을 바꾸라. 그대 자신에게로 돌아가라.
이 경전은 말하고 있다. "내면적으로나 외부적으로 그대의 마음이 방황할 때마다, 바로 여기에 이것이다."
대상에서 마음 자체로 옮겨 가라. 그러면 그대의 마음은 더 이상 평범한 마음이 아니다. 그대는 대상에 얽매여 있기 때문에 평범해진 것이다.
그러나 대상에서 벗어나는 순간 그대는 스스로 한 명의 붓다가 된다.
그대는 이미 붓다다. 단지 두터운 구름에 억눌려 있다. 뿐만 아니라 그대 자신이 그 구름에 집착하고 있다. 그 구름들이 물러가지 못하게 하고 있다. 그대는 그 구름들을 자신의 재산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많이 가지면 가질수록, 부자가 될수록 더 좋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뒤에 있는 그대의 하늘은, 내면의 공간은 가려져 있다. 따라서 그 하늘은 구름 뒤로 사라져 버리고 구름이 그대의 삶이 되어 버렸다. 구름의 삶이 바로 삼사라, 곧 이 세상인 것이다.
그러나 초점이 바뀌어지면 단 한순간만이라도 하늘을 볼 수 있다. 그 일별은 언제나 갑작스럽게 일어난다. 그것이 갑작스럽게 일어난다고 해서 그대가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다는 뜻은 아니다. 그대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하지만 그 일별은 결코 점차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대가 노력하고 또 노력하던 어느 날 문득, 물이 수증기가 되는 온도에 이르는 순간처럼 다가온다. 갑자기 거기에 있던 물이 사라져 버린다. 그것은 증발되어 버렸다. 그 순간 그대는 더 이상 대상 속에 있지 않게 된다. 구름을 향해 있던 그대의 초점은 내면의 공간 속으로 향하고 있는 것이다. 그대의 시선 중 일부는 내면을 향하고 일부는 외부의 구름을 향하는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그것은 나누어질 수 없다. 10%는 내면이고 90%는 외부라든지, 20%는 내면이고 80%는 외부라든지 하는 따위의 분배는 절대로 불가능하다.
그것은 언제나 100%로 일어난다. 왜냐하면 그대는 자신의 초점을 나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대는 대상을 바라보든지 아니면 자신을 바라보든지 둘 중의 하나만이 가능하다. 세상을 바라보든지 브라흐만 (Brahman)을 바라보든지 하나만 할 수 있다.
그대는 다시 세상으로 돌아올 수 있다. 다시 초점을 바꿀 수 있다. 그리고 바로 그때만이 그대가 스승이 될 수 있다. 진정한 마스터인 것이다. 그대가 원하는 대로 초점을 변화시킬 수 있게 되었다.
티벳의 신비주의자 중에 하나인 마르파(Marpa )가 기억난다.
그가 깨달음을 얻었을 때, 붓다가 되었을 때, 자기 내면의 공간과, 무한성과 조화하게 되었을 때 어떤 사람이 그에게 물었다.
"마르파여 ! 당신은 이제 어떻습니까? 불행과는 이별하게 되었지요?"
그때 마르파의 대답은 매우 엉뚱했다. 어떤 붓다도 그런 식으로 대답하지는 않았다.
마르파는 이렇게 대답했다. "이전처럼 불행할 수 있다."
질문한 사람은 그 대답을 듣고 당황했다. 그는 반문했다. "이전처럼 불행할 수 있다고요?"
그러자 마르파는 웃으면서 말했다. "그렇다. 하지만 차이는 있다. 그 차이란 지금의 불행은 의도적인 것이라는 데 있다. 때때로 세상을 맛보기 위해서 나는 외부를 향해 시선을 옮길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제 마스터가 되었다. 내가 원한다면 언제라도 다시 내면으로 들어갈 수 있다. 이처럼 양극으로 움직이는 것은 좋다. 한 극으로 이동해 갔을 때 나머지 한 극 역시 살아 남는다. 그래서 나는 때때로 불행 속으로도 들어갈 것이다. 그러나 지금 불행은 내 속에서 일어나는 어떤 것이 아니다. 불행이 일어나더라도 나는 그것들에게 얽매이지 않을 수 있다."
물론 그대가 자발적으로 움직일 수 있다면 그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고 움직일 수 있다. 한번 그대가 자신의 초점을 내면으로 바꿀 줄 알게 되면 그대는 외부 세계로 되돌아갈 수 있다. 모든 붓다들이 이 세상으로 되돌아왔다. 그리고 다시 이 세상을 향해 시선의 초점을 바꾸었다. 하지만 그때 그들의 내면은 더 이상 이 전과 같지 않다. 그들은 완전히 자각하고 있다. 그러면서 구름들이 다시 일어나는 것을 허용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아름답다. 때때로 하늘이 구름으로 뒤덮혔을 때 그 광경은 아름답다. 구름의 움직임 역시 아름다운 광경이다. 그래도 하늘이 그대로 있다면 구름의 움직임은 얼마든지 허용될 수 있다.
문제는 하늘이 자신을 잊어버리고 오직 구름에만 집착할 때 생겨나는 것이다. 모든 것은 추해진다. 자유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방편은 아름답다. "내면적으로나 외부적으로 그대의 마음이 방환할 때마다, 바로 여기에 이것이다."
이 방편은 선(禪)의 전통에서 깊이 사용되어져 왔다.
선은 그대의 일상적인 마음, 즉 평상심 (平常心)이 곧 붓다의 마음이라고 말한다. 먹는 것을 통해 그대는 한 명의 붓다가 된다. 잠자는 것을 통해서도 그대가 붓다임을 확인할 수 있다. 우물에서 물을 길어도 그대는 붓다이다. 그대는 이제 붓다이다. 상상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그것은 꿈처럼 황홀한 일이지만 사실이다.
만약 그대가 물을 길을 때 단순히 물을 긷기만 한다면, 그것으로부터 어떤 문제도 만들어 내지 않는다면, 그대의 마음이 구름에 집착하지 않고 의식의 하늘이 맑게 개어 있다면 그때 그대는 한 명의 붓다다. 식사를 할 때에도 어떤 사념에 끌려다니지 않고 단지 식사만 한다면 그대는 붓다다.
그러나 그대는 그냥 식사만 할 수는 없다. 그대는 수천 가지 생각들과 함께 먹는다. 마음은 지금 전혀 여기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대의 육체는 그저 로봇처럼 기계적으로 먹기만 할 뿐 마음은 다른 곳에 가 있다.
며칠 전에 한 대학생이 이곳에 찾아왔다. 그는 시험을 앞두고 있었는데 나에게 와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지금 매우 혼란스럽습니다. 나는 어떤 소녀와 사랑에 빠졌습니다. 그런데 내가 그녀와 함께 있을 동안 나는 시험을 걱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시험공부를 할 때에는 그녀 생각만 납니다. 그러니 어떻게 해야 합니까? 공부를 할 때는 그녀 생각만 나고 막상 그녀와 함께 있을 때는 곧 닥쳐올 시험만 생각납니다. 모든 것이 뒤죽박죽입니다."
이것은 비단 그 청년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처해 있는 상황이다. 그 상황은 정말 말 그대로 뒤죽박죽이다. 그대가 사무실에 있을 때는 집을 생각한다. 그리고 집에 있을 때는 사무실을 생각한다. 하지만 그대는 그런 마술 같은 일을 할 수 없다. 집에 있을 때는 집안일만 할 수 있다. 그리고 사무실에 있다면 사무만 볼 수 있는 것이다. 사무실에 앉아서 마술을 부려 집안일을 해치울 수는 없다. 만약 그렇게 하려고 한다면 그대는 제정신이 아니다. 그때는 모든 것이 뒤죽박죽으로 된다. 그 어떤 것도 분명한 것이 없다. 그래서 이 마음이 바로 문제가 되는 것이다.
우물에서 물을 길을 때는 물만 길어라. 만약 그대가 하나의 일에서 단순하게 행동할 수 있다면 그대는 한 명의 붓다다. 그래서 그대가 선사들을 만나서 그들에게 '당신의 수행은 무엇입니까? 당신은 어떻게 수행합니까?'라고 묻는다면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졸리면 잠을 자고 배고프면 밥을 먹는다. 그것이 전부다. 다른 수행은 없다."
그러나 보기에는 간단하게 보이지만 이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그대가 밥 먹을 때 그저 밥만 먹을 수 있다면, 앉아 있을 때 그냥 앉아 있을 수만 있다면, 다른 어떤 것도 하지 않고 말이다. 그대가 그 순간에 다른 곳으로 옮겨 다니지 않고 머무를 수 있다면, 어떤 미래나 과거로도 빠져 나가지 않고 그 순간에 몰입할 수 있다면, 그 순간이 바로 유일한 존재계다.
그때 그대는 붓다가 된다. 바로 이 마음이 붓다의 마음인 것이다.
그대의 마음이 방황할 때 그것을 억지로 멈추려고 하지 마라. 그저 하늘을 자각하라. 그 마음을 어느 한 곳에 붙들어매려고 하지 마라. 어떤 집중도 하려고 들지 마라. 그저 자유롭게 떠다니도록 내버려두라. 그 떠도는 현상에 주의를 쏟지 마라. 찬성이나 반대 때문에 그대는 방황에만 집착한 채로 남아 있다.
하늘을 기억하라. 방황하는 것을 허용하라. 그리고 단지 이렇게 말하라.
"좋다. 그것은 그저 길 위를 지나가는 교통수단이다."
사람들이 복잡하게 이길 저길을 옮겨 다닌다. 그와 마찬가지로 마음도 똑같이 붐비고 있다. '나는 오직 하늘이다. 구름이 아니다' 라고 생각하라. 그것을 느껴라. 기억하라. 그리고 그 속에 남아 있어라. 그대는 곧 구름이 개이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리고 푸른 하늘을 바라보게 될 것이다. 그대의 초점이 진실로 어떤 순간 내면으로 향한다면 구름은 물러가고 그대는 하늘이 된다. 더 없이 맑고 순수한 처녀성의 하늘 말이다.
한번 그대가 이 순수성을 알고 나면 그대는 다시 구름의 세상 속으로 나올 수 있다. 그때 이 세상은 그것 나름대로의 아름다움을 갖고 있다. 그대는 이제 마스터이기에 세상은 더 이상 나쁘지 않다. 그것은 사랑스럽다. 그대는 내면의 진실을 아는 마스터로서 세상의 아름다움과 어여쁨을 알 필요가 있다.
자, 세 번째 방편이다.
63. 어떤 특별한 감각을 통해서 명백하게 드러날 때, 그 자각 속에 머물러라.
그대는 눈을 통해서 바라본다. 기억하라. 눈이 보는 것이 아니라 눈을 통해서 그대가 바라보는 것임을 말이다. 눈은 볼 수 없다. 보는 자는 뒤에 가려져 있다. 눈은 단지 하나의 창문일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눈이 본다고 생각한다.
또한 귀가 듣는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아무도 귀만으로 들을 수 없다. 단지 귀를 통해서 들을 뿐이다. 듣는 자는 뒤에 가려져 있다. 귀는 음파를 받아들이는 수용기관일 뿐이다.
내가 지금 그대를 만진다. 내가 손바닥으로 그대를 사랑스럽게 어루만진다고 해서 손이 그대를 만지는 것은 아니다. 손을 통해서 내가 만지는 것이다. 손은 하나의 기구에 불과하다.
그래서 두 가지 유형의 만짐이 있을 수 있다. 내가 그대를 진짜로 만질 때와 단지 형식적으로 만지는 것이 그것이다. 사랑을 가지고 어루만지는 것과 상대방의 감촉이 내게 전해져 오는 것을 싫어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악수를 하는 것 말이다.
처음의 만짐은 나의 가슴이 담겨져 있다. 그러나 후자의 만짐은 거기에 내가 없다. 단지 죽은 손만 거기 있을 뿐이다. 만약 상대방이 민감하다면 그는 죽은 손을 느끼게 될 것이고 모욕감을 느낄 것이다. 그대는 그를 속이고 있는 것이다. 그대는 그를 만지고 있지만 실제로는 만지지 않는다.
여성들은 그 점에 있어서 매우 예민하다. 그대는 촉감으로 여자들을 속일 수 없다. 그들은 감촉에 있어서 대단히 민감하다. 그래서 그들은 안다. 남편이 듣기 좋은 이야기를 하고 꽃을 사주며 '당신을 사랑해'라고 말하지만 그의 손길은 그가 거기에 있지 않음을 나타낸다. 그때 여자들은 곧 알아차린다. 여성들은 민감한 촉감을 본능적으로 타고난다.
그대가 마스터가 되지 않고는 그들을 속이기가 어렵다. 그대 자신의 주인이 되지 않는 한 그대는 그들을 속일 수 없다. 그러나 마스터는 남편이 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것은 정말로 어렵다. 그대가 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거짓될 것이다. 그대의 손길이 그것을 보여준다.
아이들도 매우 예민하다. 그대는 아이들을 속일 수 없다. 그대는 아이들을 애무하지만 그 애무는 죽은 것이며 형식적인 것임을 아이들은 금방 알아차린다. 그대의 손에 흐르는 에너지가, 사랑의 에너지가 없다면 그들은 금방 알아차린다. 오직 그대의 손길에 그대 전체가 담길 때, 거기에 그대가 현존할 때, 그대의 중심이 손으로 이동할 때, 거기에 그대의 영혼이 존재할 때 그때 손길은, 감촉은 달라진다.
이 경전은 말한다. 감각은 단지 문이고, 수용기관이며 하나의 통로라고 말이다. 그대는 그 뒤에 가려져 있다. 음악을 듣는 동안 귓속에서 그대 자신을 잊어버리지 마라. 그대 자신을 놓치지 마라. 귀 뒤에 숨어 있는 자신을 자각하라. 각성하라. 누군가를 바라보는 동안......
이것을 해보라. 지금 당장 나를 바라보면서 해보라.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그대는 눈에 의해서 나를 바라볼 수 있다. 내가 '눈에 의해서'라고 말할 때 그것은 그대가 눈 뒤에 감추어진 자신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대는 눈을 통해서 나를 바라볼 수 있다. 내가 '눈을 통해서'라고 말할 때는 그대와 나 사이에 눈이 있다는 말이다. 그대는 눈 뒤에 서 있고 단지 눈을 통해서 나를 바라보고 있다. 마치 어떤 사람이 창문이나 안경을 통해서 보는 것처럼 말이다.
그대는 은행 직원이 안경테 너머로 그대를 지켜보는 것을 경험한 적이 있는가? 그의 안경은 코에 걸려 있고 그는 안경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방해가 되는 것처럼 직접 나를 바라본다. 그처럼 나를 바라보라. 마치 그대의 눈이 코 위로 흘러내린 듯이 눈 위로 나를 바라보라. 갑자기 그대는 뭔가 질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느낄 것이다. 그대의 초점이 변화했다.
눈은 단지 하나의 문이다. 이제 하나의 명상이 된 것이다. 소리를 들을 때도 귀를 통해서 들어라. 그리고 귀가 아니라 그대 내면에 듣는 중심이 있음을 자각하면서 들어라.
촉감도 마찬가지다. 손은 그저 촉감을 전달하는 기구일 뿐 그 뒤에 감촉을 느끼는 자가 숨어 있다. 어떤 감각에서든지 그대는 내면에 감각의 중심이 있음을 느낄 수 있다. 모든 감각이 그 내면의 중심으로 들어간다. 거기에다 보고를 한다.
그대가 나를 바라보고 내 말을 들을 때 그대는 눈과 귀를 통해서 보고 듣는다. 그리고 그대 속으로 깊이 들어가 보면 보는 자와 듣는 자가 같은 자임을 그대는 알게 된다. 만약 내가 체취를 풍긴다면 그대의 코는 그것을 맡을 것이다. 그때 세 가지 다른 감각이 하나의 중심에 보고된다. 그래서 그대는 그 정보들을 정리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어려워진다.
만약 보는 주체가 그대의 눈이고 듣는 주체가 그대의 귀라면 그때는 눈과 귀가 서로 다른 것이어서 그 정보를 통합하는 데 어려움을 느낄 것이다. 하지만 눈을 통해서 보는 자가 귀를 통해서 듣기도 하고 코를 통해서 냄새 맡기도 하기 때문에 정보의 통합에는 어려움이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 통합하는 자는 그대의 감각기관들과는 다르다. 모든 감각들은 이 통합하는 자에게 보고된다. 이 자는 중심에서 모든 것을 통합하고 하나를 이룬다. 이것은 하나의 기적이다.
나는 하나다. 나의 육체와, 육체 속의 현존과, 육체의 냄새, 내가 말하는 행위 이 모든 것이 하나다. 그대의 감각은 나를 분리시킬 것이다. 그대의 귀는 내가 어떤 것을 말할 때 보고할 것이며, 그대의 코는 내 몸의 어떤 냄새를 보고할 것이고, 그대의 눈은 내 모습을 보고할 것이다. 나는 하나지만 그대의 감각기관은 모두 따로 행동하여 나를 분리시킨다. 그리고는 각자 분리되어 보고된 정보들이 다시 하나가 되는데 내가 그대 속에서 하나가 되는 곳이 바로 그대 존재의 중심이다. 그것이 그대의 의식이며 자각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대는 그것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살아왔다. 망각이 곧 무지가 된 것이다.
그리고 자각은 자신을 아는 지식의 문을 열어준다. 그대는 내면의 자각 외에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자신을 알 수 없다. 어떠한 경우에도 오직 그 자각 속에 남아 있어라. 자각을 지키고 있어라. 처음에는 무척 어려울 것이다. 우리는 계속 잠에 떨어질 것이다.
눈을 통해서 사물을 보는 것은 지극히 어려워 보인다. 눈에 의해서 보는 것은 쉽다. 지금까지 그렇게 보아 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눈을 통해서 본다면 처음에는 일종의 긴장감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것은 그대뿐만 아니라 그대가 바라보는 사람 역시 그런 느낌을 받는다. 만약 그대가 눈을 통해서 바라보는 기분으로 누군가를 쳐다본다면 그는 자신이 관통당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마치 그대가 무례한 행동을 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대가 뭔가 자연스럽게 행동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다른 사람이 문득 알게 된다. 왜냐하면 그대의 눈길이 상대방을 꿰뚫는 것 같기 때문이다. 그대의 시선은 깊어진다. 그것은 그대의 깊숙한 곳에서 나오는 것이기에 상대방의 깊은 곳까지 관통한다.
그래서 비밀 위에 세워진 이 사회는 다른 사람을 쳐다볼 때 사랑하는 관계가 아니면 깊이 쳐다보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그대의 사랑하는 사람만이 그대의 깊은 시선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는 그대 앞에서 완전히 벌거벗을 수 있다. 완전히 열려질 수 있다. 그러나 사랑하지 않는 관계에서는 그런 시선이 허용되지 않는다.
인도에서는 그런 식으로 사람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사람을 루크차(luchcha)라고 부른다. 그것은 보는 자(seer)란 뜻이다. 그리고 루크차는 로찬(lochan)에게서 나왔다. 로찬은 눈을 의미한다. 따라서 루크차란 '그대를 향해 눈이 된 사람' 이란 뜻이다. 그러므로 그대가 모르는 사람을 그런 식으로 쳐다보지 마라. 그는 그대가 한 명의 루크차라고 생각할 것이다.
처음에는 사물을 놓고 해보라. 한 송이의 꽃, 나무, 밤하늘의 별을 향해 해보라. 그것들은 그대에게 어떤 저항감도 표시하지 않을 것이다. 아니 그것들은 오히려 그대의 바라봄을 좋아하고 이해할 것이다. 그리고 나서 사랑하는 사람을 향해서 해보라. 그대의 아내, 아이들에게 말이다.
때때로 그대의 아이를 무릎 위에 앉혀 놓고 눈을 통해서 그를 바라보라. 아이는 이해할 것이다. 그는 다른 누구보다도 잘 이해할 것이다. 아직 사회의 물이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아직 왜곡되지 않았으며 자연스럽다. 그대가 눈을 통해서 그를 바라본다면 그는 깊은 사랑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는 그대의 현존을 느낄 것이다.
그대의 연인을 바라보라. 그렇게 함으로써 그대는 이 방편의 느낌을 서서히 받아가면서, 그것에 대해 더욱 능숙해져 갈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됨에 따라 다른 사람을 바라보는 일도 가능해진다. 그때는 아무도 그대가 왜 그토록 깊이 바라보는지 눈치채지 못하기 때문이다.
한 번 그대가 그대의 감각 뒤에서 언제나 자각한 상태로 서 있는 기법을 갖게 된다면 감각들은 더 이상 그대를 속일 수 없다. 그렇지 않으면 감각들은 그대를 속일 것이다. 하나의 겉모습으로 꾸며진 세상에서 감각들은 그대로 하여금 그것이 실체라고 느끼게 할 것이다.
만약 그대가 감각을 통해서 그것들을 바라보고 자각한 채로 남아 있다면 세상은 서서히 그대에게 하나의 환영처럼 나타날 것이다. 그때 그대는 본질을 관통하게 될 것이다. 이 모든 것의 본질 말이다. 그것은 브라흐만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질문)
"당신은 사람들이 분노와 폭력, 섹스 등등을 표현할 때 진실하지 못하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인도의 대학이나 젊은 세대들이 서양의 젊은이들보다 감정을 표현하는 방식이 소극적이며 덜 폭력적이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서양의 젊은이들이 자신들을 표현하는 데 더 진실한 것입니까? 섹스나 분노 등과 같은 감정을 있는 그대로 표출하는 것이 진실을 향한 성장이란 말로 표현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많은 것들을 살펴봐야 할 것이다.
첫째로 진실해지는 것은 전체적으로 사실적이어야 함을 의미한다. 이데올로기들, 이론들, 무슨 무슨 주의들, 이런 것들은 모두 그대를 왜곡시킨다. 그리고 그대에게 거짓된 인격을 형성시킨다.
그대는 교양이란 이름의 여러 얼굴들을 갖고 있다. 그대가 나타내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대가 아니다. 거기에 실체는 항상 빠져 있다.
그리고 그대는 갑자기 행동하고 있다. 그대 자신의 삶은 더욱 적어지고 어떤 것을 흉내내는 게임은 더욱 늘어간다. 그것은 그대의 진짜 영혼이 아니다. 그것은 교양이고 교육이며 문명이고 사회다. 인간은 세련되어질 수 있다. 그리고 그대에게 세련되어지는 부분이 늘어날수록 진짜 그대 자신은 줄어든다.
실체는 교육받지 않은 그대의 내면이다. 그것은 사회에 의해서 물들지 않은 부분이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위험하다.
어린아이가 홀로 남겨진다면 아이는 동물과 같아질 것이다. 그는 순수하다. 그러나 동물과 같다. 그는 사람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거기엔 어떤 가능성도 없다.
우리는 어린아이를 홀로 내버려둘 수 없다. 우리는 뭔가를 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그것은 아이의 진짜 자아를 혼란시킬 것이다. 그것은 아이에게 옷을 입히고 가면을 주는 것과 같다. 그는 배우가 될 것이다. 그는 진실을 잃어버릴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대가 아이를 홀로 내버려 둔다면 그는 동물처럼 될 것이다. 순수하고 진실해지겠지만 인간은 아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를 가르치는 것은 필요악이다. 우리는 그를 교육하고 세련되게 만들어야 한다. 그때 그는 인간이 될 것이다.
제3의 가능성이 이들 명상 테크닉들을 통해 열려 있다.
명상의 모든 테크닉은 인간에게 부여된 여러 가지 조건들을, 가면과 옷들을 벗어 버리는 것이다. 사회가 주는 것은 언제든지 다시 취할 수 있다. 그래서 그대가 명상을 총해서 그것들을 벗어 버린다고 해도 그대는 동물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때는 인간 그 이상의 뭔가가 될 것이다. 그대는 초인, 동물이 아니면서 순수함을 지닌 인간 이상이 될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아이에게는 문화를 가르쳐야 한다. 그를 홀로 내버려 둘 수가 없다. 그대로 두면 그 아이는 동물이 될 것이다. 물론 그는 순수해질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세상을 잃는다. 인간에게 열려 있는 의식의 차원을 놓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는 먼저 인간이 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그는 왜 진실하지 못한가? 그는 자신의 내면은 동물인 채로 남아 있으면서 겉으로 인간성이라는 교양의 옷을 입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분리되어 있다.
그리하여 동물은 그의 내면에서 살아갈 것이고, 인간은 그의 외부에서 살아간다. 그대가 무슨 행동과 말을 하든지 그것은 이중 매듭이 된다. 한 가지는 인간으로서 그대의 체면을 유지해야 하고 또 한 가지는 그대 속에 들어 있는 동물을 만족시켜야 한다. 이런 상황이 결국은 문제를 만들어 낸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부정직하다.
그대가 이상주의자가 될수록 그대는 부정직해지는 것이다. 이상은 '이렇게 하라' 라고 말하지만 그대의 내면 속에 있는 동물은 거기에 반대할 것이다. 그것은 이상이 말하는 것과 정반대로 행동하고 싶어 한다.
그러면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그대는 다른 사람을 속일 수 있다. 그때 한 가지 얼굴을 계속 유지할 수 있다. 거짓 얼굴을 말이다. 그리고 동물의 삶은 계속 유지된다. 그대는 성적인 삶을 계속 살 것이다. 하지만 결코 그것에 대해 입 밖에 내지 않는다. 그대는 단지 브라흐마차리아(독신 수행)에 대해서만 이야기할 것이다.
그대의 성적인 삶은 어둠 속에 가려져 있다. 사회뿐만 아니라 가정 속에서도 말이다. 그리고 심지어는 그대의 의식 속에서도 그러하다. 그대는 그것이 마치 자신의 부분이 아닌 것처럼 어둠 속으로 밀어 넣어 버렸다. 그대의 생물학적 본성은 교육에 의해 변화되지 않기 때문에 그대는 결국 원치 않는 행위를 계속해 나간다. 그대의 유전자는, 그대의 육체를 이루고 있는 세포는 교육을 통해 변화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잊지 마라.
어떤 학교도, 어떤 이데올로기도 그대의 내면에 있는 동물을 바꿀 수 없다. 오직 과학적인 테크닉을 통해서만이 내면의 존재를 변화시킬 수 있다. 단지 도덕적인 가르침만으로는 불가능하다. 그리하여 변화된 후에라야 그대는 이중성을 벗어난다. 그대는 단순해지는 것이다.
동물은 단순하며 통일되어 있다. 그리고 현자 역시 단순하고 통일되어 있다. 그러나 인간은 이중적이다. 그것은 동물과 현자 사이를 오가기 때문이다. 그대는 신(god)과 개(dog)사이를 왔다갔다 한다. 신을 거꾸로 읽으면 개가 된다. 개를 거꾸로 읽으면 신이 된다. 사실 신과 개는 어떤 의미에서 하나이다. 그것들은 통일 속에 있다. 그러나 인간은 그렇지 못하다.
인간은 내면 속에서 개로 있으면서 겉으로는 신처럼 행동한다. 바로 이 점이 긴장과 고통을 만들어 낸다. 모든 거짓된 것을 만들어 낸다. 그대는 추락해서 동물이 될 수 있다. 그러면 그대는 인간보다 더욱 진실해질 것이다. 그러나 많은 것을 놓치게 될 것이다. 그대는 신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놓치게 될 것이다. 동물은 절대로 신이 될 수 없다. 동물은 초월의 문제를 모르기 때문이다. 동물은 변형될 그 무엇이 없기 때문에 결코 신이 될 수 없음을 기억하라.
동물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 갈등도, 투쟁도, 욕구불만도 없다. 그래서 변형이나 초월의 문제도 없다. 동물은 무의식적이다. 그래서 거짓말을 할 줄 모른다. 동물에게 있어서 거짓말이란 있을 수 없다. 그들에게는 거짓이란 개념조차 없다. 그들은 진실할 수밖에 없다. 진실은 그들의 선택이 아니다. 그들은 진실의 노예일 뿐이다. 동물은 진실할 수밖에 없다. 다른 선택권이 없다. 동물은 오직 자기 자신일 수밖에 없다. 거기에는 어떤 자유도 없다.
그러나 그대가 진실하다면 그것은 하나의 성취이다. 그대는 언제라도 거짓일 수 있기 때문이다. 가능성은 열려 있다. 그러나 그대는 그것을 선택하지 않는다. 그대는 다른 것을 선택한다. 그것은 의식적인 선택이다. 물론 그러한 때에 사람들은 항상 어려움 속에 있다. 선택하는 것은 항상 어렵다.
그리고 마음은 이루기 쉬운 것을 선택하고 싶어한다. 최소한의 저항만으로 어떤 것을 성취하고 싶어한다. 거짓말을 하는 것은 쉽다. 남을 사랑하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것은 쉽다. 그러나 진짜로 사랑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꾸미는 것은 쉽지만 실제로 그렇게 되기란 정말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사람은 간단하고 쉬운 것을 택한다. 희생 없이 고통 없이 얻을 수 있는 것을 말이다.
인간에게는 자유 의지가 있다. 동물은 단지 노예 상태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선택의 의지가 있는 만큼 어려움과 고통이 존재한다. 그리고 거짓이 있다. 그대는 속일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필요악이다.
인간은 동물처럼 단순해질 수가 없다. 그러나 그는 동물보다 더 단순하고 순수해질 수 있다. 인간이 더욱 복잡하기 때문에 더욱 단순해질 수 있는 것이다. 오히려 더 순수해지고 더 단순해질 수는 있지만 동물과 같아질 수는 없다. 동물의 순수는 무의식적인 순수이다.
그러나 인간은 의식을 갖고 있다. 이제 그는 두 가지 일을 할 수 있다. 계속해서 거짓과 함께 살아갈 수 있다. 갈등 속에서 자신과 분리된 채로 말이다. 그러나 그에게 일어나는 모든 현상에 대해서 그는 의식할 수 있다. 그리고 거짓된 행위를 그만둘 수도 있다. 그때 그는 희생을 치러야 할 것이다. 그리고 다시 진실해질 수 있다.
그러나 이 진실은 동물의 진실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동물은 무의식적이다. 그는 어떤 것을 의식적으로 할 수 없다. 그는 자연에 의해 움직여지는 것일 뿐이다.
그러나 인간의 진실은 자기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다. 그 누구도 그에게 진실을 강요할 수 없다. 오히려 모든 것은 그에게 진실해지지 않도록 요구하고 있다. 사회가, 문명이, 그를 둘러싼 모든 환경이 말이다.
그러나 그는 진실해지기를 결심한다. 이 결심은 그대를 하나의 자아로 만들어 준다. 동물은, 거짓 속에만 사는 인간은 결코 누릴 수 없는 자유를 준다. 사실 그대가 거짓말을 할 때마다, 부정직해질 때마다 그것은 강요된 것이다. 그것은 그대의 선택이 아니다. 왜 거짓말을 하는가? 그것은 사회 때문이다. 그대가 진실을 말하면 그대는 고통을 받게 된다. 그래서 그대는 거짓말을 하고 고통을 피해 간다.
그대가 진실을 말하는 것은 그대의 선택이다. 아무도 그대에게 진실을 말하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그대에게 거짓을 말하라고 강요한다. 그러나 그대가 한 번 진실을 선택한다면 그대는 처음으로 자아를 얻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의 진실과 동물의 진실은 다른 것이다. 인간의 진실은 의식적인 진실이다. 인간이 진실해질 때 그는 붓다가 된다.
물론 붓다도 동물만큼 순수하고 단순하다. 단 한 가지 차이점을 빼고는 말이다. 그것은 그가 의식적이라는 점이다. 그는 완전히 깨어 있는 것이다.
'이것은 서양의 젊은이들이 더 진실하다는 뜻입니까?' 라는 질문은 어떤 의미에서는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다.
점점 진실해진다. 왜냐하면 그들은 더욱 동물처럼 변해 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선택에서 나온 진실이 아니다. 그것은 가장 쉬운 길이다. 그냥 추락하는 것이다.
서양의 젊은이들은 동양의 젊은이들보다 더욱 동물적으로 깊이 떨어지고 있다. 물론 동양도 서양을 맹렬하게 따라가고 있다. 하지만 그들이 먼저 시작했다. 동양의 젊은이들은 아직 거짓 속에 있다. 그들은 아직 염치를 차린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이 선택의 차원은 아니다. 무의식적인 흐름이다.
동양의 젊은이들에겐 아직도 진실해져선 안 되는 사회적 관습과 제도가 많다. 서양의 젊은이들은 그런 제도에 대항해서 혁명을 일으켰다. 물론 그 혁명의 방향은 동물적 순수를 향한 것이다. 그래서 그들 사이에는 섹스와 폭력이 그토록 난무한 것이다. 이미 한 번 방향이 잡히면 기회는 사라지고 만다.
붓다도 혁명 속에 있고 히피도 혁명 속에 있다. 그러나 그 혁명들은 서로 다르다. 질이 다르다. 붓다 역시 모든 제약 조건에 대해서 반대한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초월해 간다. 그의 길은 인간이나 어떤 동물보다도 더 고차원적인 것이다.
그러나 그대의 혁명은 동물을 향해 내려가는 혁명이다. 그대 역시 하나의 통일체를 향해 움직여 가지만 그것은 인간 이하의 상태로 가는 것이다. 어쨌든 혁명은 좋은 것이다. 한번 마음에 혁명의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그대는 곧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때는 퇴보 뿐만 아니라 진보도 가능하다.
그래서 서양의 젊은이는 조만간에 이해할 것이다. 그들의 혁명은 변화라는 점에서 좋지만 그 방향은 잘못되었음을 말이다. 그래서 서양에서 새로운 인간상(人間想)이 탄생할 가능성이 생겼다. 인간은 삶의 제약들에 대항해서 혁명을 일으키고 그것을 넘어서야 한다. 그러나 그대가 혁명의 재미만 만끽하고 추락해 버린다면 그때 혁명은 파괴적인 것이 될 것이다. 그것은 어떤 창조성도 갖고 있지 않다.
사실 종교는 가장 깊은 혁명이다. 하지만 한 번도 그대는 그런 식으로 생각해 보지 않았다. 우리는 종교를 가장 정통적인 것, 올바르고 보수적인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종교는 인간의 의식 가운데 가장 혁명적인 것이다. 그것은 그대로 하여금 동물이나 인간보다도 더 높은 차원에 이르게 해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테크닉들은 그런 혁명에만 관계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시바가 진실하라고 말하는 것은 당나귀처럼 되라는 뜻이 아니다. 당나귀로 계속 남아 있으라는 뜻도 아니다. 그대의 거짓된 인격을 자각하라는 뜻이다. 그대를 감추고 있는 옷, 가면, 그리고 이전에 그대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그대가 아닌 그 모든 것들을 인식하라는 뜻이다.
인도에서는 자비나 비폭력에 대해서 많은 말을 한다. 그리고 인도인은 비폭력적이라고 누구나 생각한다. 그러나 만약 그대가 그들의 행동을 관찰해 보면 그들은 매우 폭력적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단지 그런 자신을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다른 사람에게 비폭력적으로 되라고 강요하는 것이 바로 폭력이다.
진실하게 되는 것은 자신의 진짜 마음 상태가 무엇인지를 이해하고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생각도 아니고, 원리도 아니다. 바로 마음의 상태이다. 그대의 마음 상태는 무엇인가? 그대는 폭력적인가? 그대는 화가 나 있는가?
시바가 '진실하라' 라고 한 말은 그대 자신의 진짜 모습을 이해하라는 말이다. 오직 사실만이 변화될 수 있다. 허구는, 소설은 변화될 수 없다. 만약 그대 자신을 변형시키고자 한다면 그대는 먼저 그대 자신의 진실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 그대는 폭력적이지만 자신은 비폭력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거기에는 변형에 대한 어떤 가능성도 없다. 그런 비폭력은 어디에도 없기 때문에 그대는 변화할 수 없다. 그 대신 폭력이 거기에 있다. 그러나 그대가 그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는 한 어떻게 그대에게 변화가 일어날 수 있겠는가?
우선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알아야 한다. 어떻게 진실을 알 수 있을까?
그대의 해석 없이 그것들과 만나야 한다. 그것이 앞에서 '바라보라' 라고 말한 것이다.
그대의 부하가 오고 있다. 그대 자신이 그를 어떤 눈길로 보고 있는지 바라보라. 그대의 상사가 오고 있다. 자신이 상사에 대해 어떻게 보는지를 바라보라. 그대의 눈길은 부하나 상사를 대하는 데 차이점이 없는가? 그렇지 않다면 어떤 차이점이 있는가? 만약 차이점이 있다면 그대는 폭력적인 사람이다.
그대는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는다. 언제나 편견과 선입관의 색안경을 쓰고 사람을 본다. 거기에는 항상 그대의 해석이 따른다. 그가 부자라면 그대는 다르게 볼 것이다. 그리고 만약 그가 가난하면 또 다른 방식으로 본다. 거기에서는 나름대로의 균형을 갖추고 있다.
가난한 사람을 대할 때 그대는 그를 쉽게 대한다. 그것은 일종의 폭력이다. 그를 모욕하는 것이다. 부자를 대할 때 그는 약간 어렵게 대한다. 이미 거기에는 미묘한 계산이 깔려 있다. 그대의 계산을 살펴보라.
그대가 자녀들에게 화를 내고 있다. 그대는 그들이 잘되기를 바라는 뜻에서 화를 낸다고 말한다. 그러나 깊이 들어가 보라. 그 말이 진실인지 깊이 생각해 보라. 그대의 아들이 지금 그대의 말을 듣지 않는다. 그러면 그대는 화가 난다. 하지만 아들이 그대의 말을 듣지 않아서 모욕감을 느낀 것인가? 아니면 정말로 아들의 이익을 위한 것인가? 사실은 그가 그대의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에 그대의 에고는 상처를 입은 것이다. 만약 그대의 에고가 상처를 입었다면 그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대는 그것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가장하기 시작한다. 그대가 화가 난 이유는 아들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자신을 속이는 것일 뿐이다.
진실로 사랑 때문이라면 그대는 화를 내지 않는다. 사랑 속에서는 에고가 사라진다. 거기에 상처받을 에고는 남아 있지 않다. 그렇다면 그대가 단지 가장을 하는 것인가? 그가 말을 듣지 않는다고 해서 자존심이 상했다고 느끼는 것인데도 말이다. 아니면 그대가 무슨 말을 하든지 그것이 그에게 진정으로 옳은 것인지 확신할 수 있는가? 그대 속으로 깊이 들어가 보라. 그리고 무엇이 사실인지 정확히 알아내어야 한다.
그대가 변형하는 데는 사실의 부분만을 변형시킬 수 있다.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은 변형할 수도 없다. 허구는 변형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대의 생각과 그대가 하고 있는 모든 것 속으로 깊이 들어가 보라. 그리고 사실을 파 내어라. 그대의 해석과 변명을 갖다 붙이지 마라. 그럴싸한 말들로 색칠하지 마라. 그대가 깨어서 자신을 들여다보기 시작한다면 그대는 점점 진실해질 것이다. 그 진실은 동물의 진실과 다르다. 그 진실은 깨달은 사람의 진실이다.
그대 자신이 얼마나 추하다는 사실을, 자신이 얼마나 폭력적이라는 사실을 잘 알면 알수록 그대는 자신의 내면을 관통하고 자신이 하고 있는 행동이 얼마나 넌센스인가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때 그대는 더욱 깨어 있게 된다. 그리하여 그대의 추함은 점점 떨어져 나갈 것이다. 추함은 그대의 무의식에서 생겨난 것이기 때문이다. 한번 그대가 자신의 추함을 발견한다면 그것은 계속되어질 수 없다. 만일 그대가 자신을 들여다보지 않는다면 그대의 추함은 번지르르한 것으로 겉을 가장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을 아름답다고 느낄 것이다. 그 이면에는 추함이 숨겨져 있지만 절대로 그 속을 들여다보지 않는다.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이것이 문제다.
아들은 에고가 상했기 때문에 아버지가 화를 낸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것을 숨기려 한다. 그대는 자신의 추함을 다른 사람에게 숨길 수 없다. 오직 자기 자신에게만 숨길 뿐이다. 마치 닭이 숨을 때 자신의 머리만 땅속엔 박고 자신이 안전하게 숨었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은 형편이다. 그대는 자신에게 폭력이 숨어 있음을 모든 사람에게 드러내고 있다. 그대는 오직 자신만을 속일 수 있다. 모든 사람이 자신은 정말로 지고한 존재라고 믿는 이유도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은 아무도 그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것은 자신의 착각에서 생긴 결론이기 때문이다.
그대의 아내는 그대가 위대한 존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대의 아이들 역시 마찬가지다. 그대의 친구, 그대를 아는 어떤 사람이라도 그대가 위대한 존재라는 사실에 동의하지 않는다.
러시아의 속담 중에 이런 것이 하나 있다.
"모든 사람이 자신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표현한다면 이 세상을 통틀어서 네 명의 친구를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것은 사실이다. 그대의 친구는 그대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을 결코 말로 표현하지 않는다. 친구 관계가 지속될 수 있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그러나 그대의 친구는 항상 그대의 등 뒤에서 모든 것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자신의 생각을 솔직하게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왜인가? 그대는 오직 그대 자신만을 속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대는 타인을 속일 수 없다. 오직 자기 도취만이 가능하다.
어떤 사람이 속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는 한 그대는 어떤 누구도 속일 수 없다. 그러므로 그대의 해석을 던져 버리고 아무런 해석 없이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보라. 그리고 두려워 마라. 추한 것들이 거기에 수없이 있을 것이다. 만약 그대가 그 장면을 두려워한다면 그대는 결코 그것을 바꿀 수 없다. 그 장면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라. 그리고 지켜보라. 이것이 바로 지켜본다는 것의 의미다. 그것의 적나라한 모습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 뿌리에까지 파고 들어가서 낱낱이 분석하라. 왜 그것이 거기에 있는지, 그대가 어떤 식으로 그것을 돕고 유지하고 있는지 말이다.
그대는 추한 것들을 키워 왔다. 이제 그 모든 실체를 들여다보라.
시바는 말한다. 만약 그대가 그것을 전체적으로 바라볼 수 있다면 그대는 즉시 그것을 떨쳐 버릴 수 있다고 말이다. 바로 이 순간 그대는 모든 추함을 없애 버릴 수 있다. 그것을 보호하고 있던 사람은 바로 그대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뿌리를 캐낼 수 있는 사람도 바로 그대다. 그것은 그대의 창조물이다. 지금 당장 그대는 그것을 던져 버려라. 그리고 다시 쳐다볼 필요도 없다.
하지만 그대가 그 일을 하기 전에 먼저 그대는 그것이 어떤 현상인지, 얼마나 복잡한 것인지, 그리고 그대가 어떻게 매순간 그것을 지켜왔는지 정확히 이해해야 한다.
만일 어떤 사람이 그대에게 욕을 한다면 그대는 어떻게 반응하겠는가? 만약 그의 말이 옳다면? 그때는 그저 보아라. 그가 옳을 지도 모른다. 그대 자신보다 그가 더 정확할 수도 있다. 그는 외부의 방관자로서 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반응하지 마라. 기다려라. 그에게 이렇게 말하라.
"나는 당신이 하는 말을 주시할 것이다. 당신은 나에게 욕을 했다. 그리고 나는 사실을 주시할 것이다. 당신이 옳을 수도 있다. 만일 당신이 옳다면 나는 당신에게 감사할 것이다. 나로 하여금 그 사실을 깨우치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신이 틀렸다면 나는 당신의 실수를 알려줄 것이다. 그러니 나로 하여금 주시하도록 시간을 달라."
결코 반사적인 행동을 하지 마라. 만약 그대가 나를 욕한다면 나는 그대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기다려라. 7일 동안만 살펴보자, 나는 그대가 무슨 말을 하든지 그것을 주시해서 살필 것이다. 그대가 옳을 수도 있다. 그대의 입장이 되어 나를 살펴볼 작정이다. 그리고 그대가 옳았을 때 나는 그대에게 감사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대가 틀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나는 그대가 틀렸다는 것을 가르쳐 줄 것이다."
그러니 반사적인 행동을 할 필요가 과연 있겠는가? 그대는 나를 욕했다. 그때 내가 어떻게 행동하겠는가? 나 역시 그대를 욕하란 말인가? 그러면 나는 주시 속에서 빠져 나온다. 나는 반사적인 행동을 한다. 그대가 나를 욕하면 나 또한 그대를 욕한다.
기억하라. 반사적인 행동은 결단코 옳지 않다. 그것은 옳을 수가 없다. 그대가 나를 욕한다면 그대는 나를 화나게 하는 가능성을 만든 것이다. 그러나 그때 내가 화를 낸다면 나는 무의식적인 행동을 한 것이다. 나는 그대에 관해서 전혀 생각해 보지 못한 것을 말한다. 그대의 욕설 때문에 나는 순간적으로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그리고 다음 순간 나는 후회할 것이다.
반응하지 마라. 실제 상황을 지켜보라. 그대의 관찰이 전체적이라면 그대는 어떤 것도 쉽게 버릴 수 있다. 그것은 그대 손안에 있다. 그대가 그것에 집착하고 있기 때문에 거기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대는 그것을 쉽게 떨쳐 버릴 수 있다. 거기에는 어떤 억압도 없다. 그대가 사실을 지켜볼 때 거기에는 어떤 억압도 있을 수 없다. 그대가 좋아해서 그것을 계속하든지 아니면 그것이 싫어서 떨쳐 버리든지 둘 중 하나다.
이제 됐는가?
첫댓글 오쑈의 글을 읽을때마다 무슨말을하려는걸까?를 생각한다. 오쑈의 글을 읽을때마다 이말대로 가능한가를 생각한다
오쑈가 하는말들은 새로운말이 없다
성현들이 한마디로 한말을 오쑈는 책한권으로 말한다. 오쑈의 글은 무지한 나에게 매우 친절하게 설명한다 그러나 나에게는 성현의 한마디와 오쑈의 책한권이
같은 느낌을 준다. 이긴글에서 들리는말은 반응하지마라. 반응하는 너는 네가 아니다 라는 말은 사랑하라. 또는 이해하라 또는 세번참으면 살인도 면한다
라는 말로 들린다.사람의 반응은 의식적이지않다. 번개보다 더 빠르게신경망을 타고 흐른다 무슨수로 번개를 잡겠는가. 그것이 의지적으로 반응을 억제하는것이라면 그는 상대에게 반응하지 않아서 자신의 존엄을 지키고 관계를 파괴하지않는다해도 결국에는 다른방식으로 자신과의 관계를 망칠수도있다 협심증 암
발기불능 아토피 집중력장애 편집강박 류마치스 허리디스크 모든자가면역질환.. 로 댓가를 치룰수도있다. 반응을 억제하지 않고 반응을 하지않는 방법은 모든것을 수용인정이해사랑 하는것이겠지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인간이 그게 가능키나한지...글을 읽고 그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사람이 변화하는것은
인지로되지않는다. 인지로 되려면 책을 만권쯤읽으면될지도모른다. 변화는 경험할때 이루어진다. 아버지에게 주먹질을 했는데 아버지가 나에게 반응하지않을때 나는 폭력에 반응하지않는것이 얼마나 강력한 힘인가를 한순간알게된다. 그러나 아들이 아버지의 주먹질에 반응하도 아버진두려움을 느낄것이다.한순간의
아들이 아버지의 폭력에 반응하지 않아도 아버지역시 반응하지않는 아들에게 두려움을 ?수정이 안되네요.
경험이 폭력에 반응하지않는것을 경험시켜준다. 오쑈의 글은 매력적이다. 그러나 쓰레기에 지나지않는다 오쑈의 글이 그럴듯해서 도움이 되는게아니라오쑈의 이야기를 전해주는 사람의 진실한 마음이 느껴지기에 그가 전하는 오쑈의 글이 유효한것이다. 그래서 스승이 필요한거일게다. 오쑈를 전하는 그가 오쑈다.
전하는 그가 신뢰할만 하지않다면 그가 전해주는 오쑈의 말역시 신뢰할수없다. 이것이 나의 어리석음이다 누가 오쑈의 말을 하던 무슨상관있겠는가. 누가 나에게 충고하던 무슨상관있겠는가. 나만 그런것은 아니겠지 . 어쩌겠는가 나에겐 그런문제가 있는것을...
오늘 신뢰에 대해 생각한다. 신뢰.
이글을 올린 당신을 신뢰합니다. 이 노력과 열정과 헌신과 집중을 신뢰합니다.
당신은 오쑈군요 저에게 큰도움되었습니다.
오늘 신뢰를 배웠습니다.
감사하고 고맙습니다. 반응하지않는 하루
욕망과 욕심에 반응하지않는하루 나의 욕구에집중하지않는 하루가 되겠습니다.
나없는 하루가 되겠군요
타인도 없고
나도 없다면 지금여기있는 이것은 무엇이지요? 나는 지금 무엇을 해야할까요? 나는 인형이군요 마리오네트. 조종자가없으면 움직이지않는. 오늘 나는 조종자가 나타날때까지
눈을 감고 있게되겠군요
오... 누가 나를 조종하게 될까 궁금하네요 이긴이야기는 무슨이야긴지...오쑈처럼장황해져버렸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