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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사랑하며
전쟁과 평화 황인용 (시인·수필가) 세월은 빛보다 더 빨리 구르는 수레바퀴이런가? 옛 시인은 “연못가 풀잎 봄꿈이 깨기도 전에 계단 앞 오동나무 잎은 이미 가을소리를 낸다.”고 탄식해마지 않았다. 사춘기思春期가 엊그제 같은데 어느덧 사추기思秋期를 넘어 인생의 겨울을 맞이하기 시작한 나의 감회라고 무엇이 다르랴? 돌아보면 초등학교 입학하던 해가 하필이면 6·25동란이 일어났던 해였다. 50년도 더 지난 옛일이니 피어린 산하에 숱하게 세워졌던 비목碑木들도 노래 속에서만 남고 썩어 없어진지 이미 오래이리라. 초연硝煙이 쓸고간 깊은 계곡 깊은 계곡 양지녘에 비바람 긴 세월도 이름 모를 이름 모를 비목이여 먼 옛날 초동樵童친구 두고온 하늘가 그리워 마디마디 이끼되어 맺혔네. 이 감개무량한 노래를 나는 결혼하고 나서야 아내에게 배웠었다. 이 노래의 작사자인 한명희 전 국립국악원장의 사연을 안 것은 그후로도 20년의 세월이 흐른 뒤였다. 앞으로 또 20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는 ‘달빛 타고 흐르는 궁노루 산울림’을 적막 속에 듣고 있지나 않을까? 녹슬은 철모 속에서 민들레 꽃씨가 바람에 날린다 삼천리 방방곡곡에서 새벽 종소리가 일제히 울려오는 눈부신 환청幻聽. 이 자작시는 “아름다운 종소리가 새벽 종소리가…” 운운의 아름다운 동요를 흉내내 지은 것이다. 민들레는 지천으로 피어나는 풀꽃에 지나지 않지만 초연이 쓸고 간 산야의 녹슨 철모 속에서 피어났을 때는 결코 범상한 꽃일 수 없다. 이를테면 명암의 대비 극명한 대위법이라고나 할까? 우리는 이를 무생물과 생물, 죽음과 부활, 절망과 희망의 이중주二重奏라고 고쳐 말해도 좋으리라. 환언하면 희망은 절망 속에서 싹트고 생명은 죽음 속에서 부활한다. 질곡과 어둠의 역사에서 자유와 광명의 역사로의 진화법칙이라고 무엇이 다르겠는가? 녹슨 검은 철모 속에서 눈부시게 하얀 평화의 씨앗이 새벽 종소리마냥 날아서 흩어진다는 사실만큼 희망적인 상징의 광경도 달리 없으리라. 우리는 이를 민들레가 증언해주는 한반도 평화와 통일의 미래도 믿기로 하자. 이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작년의 대선은 역사의 분수령-냉전이냐 남북화해냐의 갈림길이었다고 하겠다. 이제 역사의 물줄기는 민족의 화해 쪽으로 확실히 물길을 튼 작금 감개무량함을 금할 길이 없다. 그건 결국 하늘의 뜻이었다면 부처님의 뜻이었다는 말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다르겠는가? 작년에는 대선 말고는 월드컵과 미선이 효순이 추모 촛불시위 등 기념비적인 사건들이 많았다. 이들은 모두 직접적인 관련성은 없으나 공통점이 없지도 않다. 눈물겨운 민족적 자긍심과 자신감의 확인이 그것이다. 이러한 민족적 자긍심은 미국으로 하여금 일방적인 한반도정책을 밀어붙이지 못하도록 제동을 거는 요인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이러한 획기적인 상황의 변화를 민들레의 과감한 자기변신-자기혁신으로 비유하고 싶다. 부연하자면 민들레는 지극히 평범한 풀꽃에 지나지 않되 어느 꽃도 흉내낼 길이 없는 자기변신을 이루하는 것이다. 방글방글 노오란 미소이다가 세상에 부러운 것 없는 자족이다가 하루 아침에 빛나는 선정禪定에 들어 있는 눈부신 돈각頓覺이라니. 이는 시라기보다 민들레의 눈부신 변신을 예찬한 운문韻文일 따름이다. 쬐그만 민들레가 그처럼 화려한 변신을 이룩할 수 있는 신비한 비결은 과연 무엇일까? 나는 감히 민들레의 탁월한 주체성의 결과라고 단언하고 싶다. 비유컨대 우리 나라 같은 약소국이 미국 같은 초강대국에 맹목적으로 굴종하지 않으려면 강한 민족적 주체성 말고는 아무런 처방도 필요치 않다. 저 민들레로 말하더라도 오직 자기적합성自己適合性-자적에 충실했기로 수도자처럼 득도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었음이리라. 이러한 측면에서 세상의 모든 위기는 항상 주체성의 위기가 그 본질일 수밖에 없다. 미증유의 재앙이었다는 IMF 외환外換위기도 그 본질은 주체성의 위기였기는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북핵위기도 민족주체성의 관점에서 풀어나가지 않으면 안된다. 민족 자주自主 자결自決의 대원칙 말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북한도 남한도 그리고 미국도 민들레를 본받아 자유로워져야 한다. 그 표표한 해탈의 정신을 본받는다면 이 땅의 평화는 물론이고 전 세계의 평화도 절로 찾아오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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