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적으로 쓰이는데 그 근원을 살펴보면 의외의 의미와 유래를 지닌 용어들이 있습니다. '신파'가 바로 그런 용어죠. 이 용어… 꽤 많이 쓰이고 있습니다, 드라마든 영화든 과잉된 방식으로 눈물을 자극하는 경우 "완전 신파야…"라며 약간은 비꼬는 투로 이야기하죠. 비속어지만 "신파 쩐다"는 표현도 있고요. 이런 표현들만 보면 '신파'는 꽤나 부정적인 뉘앙스를 띠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 단어의 유래에 대해선 그다지 명확하게 알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한국에서 '신파'라는 단어가 사용된 지도 거의 100년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였던 시절인 1916년, 언론에서 처음으로 '신파'라는 단어를 사용하기 시작했으니까요. '신파'는 일본의 연극계에서 생겨난 단어인데요, 일본의 신파 극단에 있었던 임성구라는 인물이 한국에서 '혁신단'이라는 극단을 이끌면서 신파극을 하기 시작했고, 그러면서 '신파'라는 단어가 조선 땅에서도 통용되기 시작했습니다.
엄밀하게 보면 '신파' 전에 '신극'(新劇)이 있었습니다. 19세기 말 일본에 서양에서 '새로운 연극', 즉 '신극'이 들어온 거죠. 예전까지 일본에 '가부키' 같은 전통극, 즉 '구극'(舊劇)이 있었다면 신극은 여러모로 달랐습니다. 특히 신극이 담고 있는 자유주의적이며 민주주의적인 테마는 메이지 유신 시대 일본의 급변하는 사회상을 반영하고 있었죠. 하지만 자유민권운동은 곧 탄압을 받게 되었고, 신극의 성격도 변하게 됩니다. 저항적이며 사회적인 내용은 사라지고, 감상적인 연애담 중심이 되어 버린 거죠. 이것이 바로 '신파극'의 탄생입니다. 간단히 발하면 신파극은 '변질된 신극'인 셈이고, 한국에 들어온 건 신극이 아니라 바로 신파극이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신파극은 아마도 [이수일과 심순애]라는 제목으로 더 많이 알려진 [장한몽]일 겁니다. 일본에서 엄청난 성공을 거둔 [금색야차]를 번안한 것이죠. "순애, 김중배의 다이아몬드 반지가 그렇게 탐이 났단 말이냐…"라는 이수일의 대사에 심순애가 "수일씨, 그건 오해예요…"라며 매달리는,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이 이야기는 운명과 사랑과 갈등이 엇갈리는 이야기로, 1960년대까지 서너 차례 리메이크되었죠.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1939)도 전형적인 신파 영화인데요, 연극인 [홍도야 우지 마라]를 영화화한 것입니다.
일제 강점기 신파 영화의 특징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이야기의 중심은 남녀 주인공의 연애담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사랑은 한쪽의 부정이나 열악한 상황이나 신분 차이 등으로 갈등을 일으키죠. 이때 평양 갑부 김중배 같은 부자가 등장해 여자를 돈으로 유혹하기도 하고요. 관객들은 주인공의 비극적 상황에 강하게 감정 이입을 합니다. 그리고 결말은 권선징악 아니면 음독자살 같은 비극입니다. 남자 주인공은 유학생이나 부잣집 아들인 경우가 많고, 여자 주인공은 기생이나 마을의 가난한 처녀 등인 경우가 많고요. 전반적으로는 남성에 대한 여성의 헌신을 강요합니다. 당시 지식인들은 신파 영화를 강하게 비판했는데요, 식민지의 현실에 저항하지 않고 모든 고통과 모순을 개인의 문제로 바꿔버린다는 게 비판의 초점이었죠. 패배주의와 현실 순응주의 속에서 쉽게 절망적인 분위기에 젖어드는 영화들…. 그럼에도 당시 신파 영화가 흥행할 수 있었던 건, 어쩌면 억압적인 현실에서 이 영화를 보면서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울고 싶은 놈 뺨 때려준다"는 얘기가 있듯, 힘든 현실 속에서 신파 영화를 보면서 펑펑 울 수 있었던 거죠. 그런 면에서 신파 영화는, 일단 일본에서 넘어오긴 했지만 우리 민족 특유의 '한(恨)의 정서'와 결합되면서 엄청난 시너지 효과를 만들어낸 셈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형성된 '신파 정서'는 이후 해방이 되어도, 전쟁을 겪고 난 후에도, 이후 미 군정을 거쳐 1960년대에 박정희 정권이 들어서도, 엄청난 격변기에도 불구하고 한국영화에서 쉽사리 사라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강한 생명력을 지니며 면면히 이어졌고, 전쟁과 분단은 신파의 새로운 소재가 됩니다. 이 시기 대표적인 배우는 '눈물의 여왕'으로 불리던 전옥(최민수의 할머니)이었죠. 악극단 출신인 전옥은 과장된 연기 스타일로 대중의 눈물샘을 강하게 자극했습니다. 산업화가 시작되면서 사회 갈등이 점점 심화되던 1960~70년대도 신파는 꾸준히 이어졌습니다. 그 공식도 변형을 겪긴 하지만 여전했고요. 대표적인 영화가 [미워도 다시 한번](1968)입니다. 사랑하는 남자는 유부남이었고, 남자 몰래 아들을 힘겹게 키우던 여자는 가난 때문에 아이를 남자에게 보내려고 하고…. 말만 들어도 눈물 나는 이 영화는, 여성의 희생과 비극적 상황과 모성애를 결합시키며 당대 관객들을 사정없이 울렸던 영화입니다. 1970년대의 [별들의 고향](1974)이나 [영자의 전성시대](1975)도, 젊은 감독들의 새로운 감각으로 포장되긴 했지만 그 본질은 신파입니다. 여성의 몸을 담보로 그 운명성과 비극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말이죠. 1980년대 에로티시즘 사극도 마찬가지입니다. 해학과 풍자가 있는 것 같지만, 그 결론은 언제나 '한 많은 여인'의 고통이 서려 있죠.
이처럼 한국영화의 '신파성'은 시대가 변하면서 조금씩 그 모습을 달리하긴 하지만 끊임없이 한국영화에 흐르는, 어떻게 보면 한국영화의 본질과도 같은 것입니다. 액션 영화처럼 보이지만 분단 상황과 비극적 사랑이 결합된 [쉬리](1999)는, 한국영화의 신파성이 어떤 방식으로 각색될 수 있는지 잘 보여주는 사례였죠. 흔히 '비극적 멜로드라마'라고 하지만, 그 근본엔 극적 상황과 운명이 결합되어 주인공을 딜레마에 빠트리고 고통스러운 선택을 하게 만드는 신파의 정신이 있습니다. [편지](1997)나 [약속](1998) 같은 최루 멜로도 마찬가지고요. [내 머리 속의 지우개](2004)나 [너는 내 운명](2005) 같은 영화도, 그 신파성을 빼놓고는 설명하기 힘든 영화들입니다. 알츠하이머병과 에이즈에 걸린 여성 주인공들과 그들에게 순애보를 바치는 남자주인공들은 어쩌면 이수일과 심순애의 후예들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최근 '천만 영화' 고지에 오른 [7번방의 선물](2013)도 마찬가지입니다. 누명을 쓰고 사형선고를 받은 지적 장애를 지닌 아버지와 어린 딸의 생이별…. 아무리 코믹 캐릭터가 가세한다고 해도, 이 영화는 관객의 눈물샘을 강하게 자극합니다. 어쩔 수 없는 현실과 그 과정에서 아버지가 겪어야 할 고통이 결합된 이 영화는 정말 강한 신파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박수건달](2013)도 마찬가지였죠. 흥미로운 건, 로맨틱 코미디나 호러처럼 눈물과 무관할 것 같은 장르에서도 강한 신파성이 발견된다는 점입니다. 한국의 로맨틱 코미디는 대부분 후반부에 꼭 감동의 순간이 다가옵니다. 호러도 '한'을 매개로 하는 경우가 많고요.
어쩌면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신파'라는 단어는, 명확한 의미가 있기보다는 '비극적 멜로드라마'를 약간은 낮춰 부르는 표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세련되게 잘 만들어진 슬픈 장면은 '멜로드라의 감동적 순간'이라고 표현하겠지만, 인과 관계없이 오로지 울리려고 하는 영화는 '신파'라는 단어로 일축하는 거죠. 하지만 사실 그 경계는 모호합니다. [7번방의 선물] 같은 경우도 몇몇 억지스러운 상황을 지적하며 '신파'라고 부를 수도 있겠지만, 한편으로는 멜로와 코미디가 잘 결합된 웰메이드 영화로 볼 수도 있거든요. 사실 '신파'는 어떤 장르가 아니라 하나의 수식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