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위군 동남단 고로면 매봉(800m)에서 시작되는 위천. 실핏줄 같은 한 가닥 물줄기가 효령면
병수리에 이르면 팔공산 북쪽 골에서 흐르는 남천과 합강 되면서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낸다.
그곳에서 위천의 물길은 한숨 돌리는가 하더니 여전히 빠른 유속을 지닌 채 새을(乙)자로 구불
구불 굽어 흐르다가 낮은 산모퉁이를 돌아가면서 여울을 만들고 그 위에 멋들어진 정자를 세운다.
물길은 흐르면서 순치되는 걸까. 널찍한 소보들녘을 뒤로 하고 군위를 벗어난 물길은 의성군 비안
문턱에서 또 한 차례 창자를 꼬듯이 굽어돌고는 비안면 옥연과 박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소리를
낮추고 유유히 흐른다.
그렇게 흘러가는 동안 체를 치듯 거친 자갈돌을 걸러내고 부드러운 금모래 밭을 일구어낸다.
숨 가쁘게 달려온 위천이 100여 년 전까지 비안현청이 있었던 비안면 서부리 앞을 지나 한 걸음 더
동남쪽으로 흐르면서 병풍을 펼쳐 낸듯한 병산 언덕배기 아래서 쉬어간다.
병산정이 서 있는 절벽 중간쯤에 ‘병산벽’이라 새긴 암각서가 희미하게 남아 있어 옛사람들의
흔적을 보여준다.
위천은 다시 서쪽으로 굽어도는가 하더니만 구미리에서 의성군 봉양에서 흘러드는 쌍계천을
만나 수역을 넓힌다.
그리고 비안면 소재지가 있는 이두리를 지나고 용천리를 거쳐 비옥한 들녁을 끼고 구천을 넘어
선다.
마침내 상주시 낙정에 이른 위천은 300리 물길을 감춘 채 낙동강으로 흘러든다.
물줄기마다 풍요가 익어 내리는 그 중심에 의성군 비안과 안계가 자리한다.
옛 정서가 묻어 배인 듯 고즈넉한 서부리 뒤 켠에 비안현청 터가 빈 채로 남아있다.
마을 사람들은 서둘러 복원해야 한다고 하지만 그 빈터마저 개인 소유라 하니 손길이 더 멀어진
느낌이다.
서부리와 처마를 맞대고 사는 동부리, 거기서 동남쪽으로 기다랗게 뻗어난 언덕배기 위에 병산정이
자리 한다.
병산정은 병산박씨 시조 박우와 그 10대 후손 율정 박서생을 기리기 위해 세운 정자이다.
비안은 고려 초기 병산군으로 작위를 얻은 문하시중 박우의 식읍이 되면서 조선 세종 5년까지
세월이 흐르면서 원래의 건물은 허물어지고 현재의 병산정은 1935년에 다시 건립된 것으로
그리고 최근에 그 동쪽 방향으로 마치 석문 같은 두 개의 돌기둥을 큼직하게 세우고 가운데는
◆위천 따라 비안을 거쳐간 사행로
세종대왕으로부터 일본 사신의 명을 받은 율정은 마음이 적잖게 무거웠다.
1419년 세종이 즉위한 뒤 왜구의 내침교란이 거세진 때라 대일외교 사절의 책임이 막중함을
안 까닭이다.
율정은 1428년 세한의 섣달에 100여명의 사행단을 꾸리고 한양 도성을 벗어 한강을 건넜다.
강물이 꽁꽁 얼어붙었고 나루에 정박해 둔 배들도 꼼짝하지 않았다.
청도와 나팔수를 앞세우고 율정을 태운 털빛이 검붉은 흑마는 뚜벅뚜벅 얼음 위를 천천히 걸었다.
양재에 이르자 짧은 겨울 해는 저만큼 서산 속으로 숨어들었다.
산자락에 어둠이 내리고 하룻밤 쉴 자리를 마련 하려 들자 정녕 나라를 떠난다는 실감이 났다.
그렇게 첫날밤을 보낸 율정은 충주 수안보를 거쳐 문경 새재를 넘어섰다.
그리고 안동과 예천을 지나 보름 만에 의성에 이르러니 고향의 강, 위천도 하얗게 얼어 있었다.
얼음 위로 반짝이는 아침 햇살이 자신을 반기는 것도 잠시였다.
율정은 자신이 태어나 성장한 안정리(교촌)를 설핏 바라보면서 구천을 돌아 용천마을 장승배기에
이르니 벌써 해가 중천에 올랐다.
용천(후천리)은 위천을 감싸고 예천에서 들어와 비안 서부리를 거쳐 군위로 나가야하는 길목이다.
길손의 안전을 빌어주는 장승과 성황당이 있어 장승배기 고갯길이라 불렀다.
율정과 사행단은 현청 객관에 들려 잠시 쉬었다가 마을 앞 위천 건너 눈에 뒤덮여 하얗게 반짝
거리는 옥녀봉 기슭을 따라 군위 의흥으로 향하는 걸음을 재촉하였다.
고향의 산과 강, 옹기종기 이마를 서로 맞댄 초가집 마을이 품에 안길 듯이 선뜻 들어왔지만
사행길을 멈출 수가 없었다.
또한 조상의 제단비가 놓여있는 병산원을 지나자니 눈시울이 달아올랐다.
실로 고향 땅을 밟아본 지 몇 해가 지났던가. 부모님은 무고하신가. 농사로 혹은 향원으로 살아
가는 죽마고우들의 일상도 궁금하기 이를 데 없었다.
어린 날 어버이의 손을 잡고 선조를 참배하던 병산원 언덕배기 아래 다섯 길이 넘는 벼랑 끝에
새겨 진 ‘병산벽’이라는 글귀를 익히고 조상의 음덕을 기리던 옛일들이 아련하게 떠올랐다.
그러나 일본의 족리의교의 계승을 축하하는 세종대왕의 국서를 전달하기 위하여 먼 길을 떠나는
몸이라 비록 지나가는 길목이 고향이라 한들 어찌 잠시라도 머물 수가 있으랴…. 고향은 자신의
육신을 길러내고 감성의 힘을 길러준 태토이건만 율정은 그저 바라만 볼 뿐 위천의 물길을 거슬러
군위를 향하여 걸음을 옮겨놓았다.
◆비안에 남은 율정의 흔적들
날마다 풍성하고 맛있는 밥상/ 때마다 큼직하고 넘치는 술잔/ 곳곳마다 향기롭고 기이한 풀꽃들/
산을 가로질러 굽어흐르는 기이한 물길/ 사신으로 오지 않았더라면/ 하늘아래 다시없는 별난
볼거리를 못보고 지날 뻔 했네//
율정은 일본에서 여러 가지 경험을 한다.
낯설고 맛있는 음식을 대접받고 풍광이 빼어난 지역을 여행한 율정의 소회는 남달랐다.
일본에 머무는 동안 율정은 문화적인 차이를 체감하면서 일본인들이 누리고 있는 앞선 기술과
생활방식을 도입하고자 노력했다.
그중에서도 수차(水車)의 사용을 건의한 견문기는 단연 돋보인다.
‘비록 물살이 느리더라도 사람이 발로 밟아서 물을 끌어올린다면 물을 댈 수 있을 것이다’ 라고
건의하고 농업용 수차의 모형을 제작하기도 하였으니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혁신적인
관개기법을 도입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리고 세금을 곡물이나 특산물이 아닌 돈으로 납부토록 하는 화폐거래의 중요성을 제기하는 등
새로운 문물을 도입하고자 노력했다.
한편, 율정은 향리를 위한 애정과 베풂의 끈도 놓지 않았다.
그 당시 고향에서는 비안향교를 건립할 마땅한 땅이 없어 온 마을 사람들이 걱정하고 있었다.
그때 마을 앞을 지나가던 남루한 차림의 한 노인이 “뭐 그리 고민들 하시오. 이 마을에 팔도장원을
한 서생이 태어난 집이 길지 중에서도 명당이 아니요” 라고 하면서 “율정 선생이 장원급제한
이 집에 장원의 씨를 뿌리시오. 학교를 세우고 인재를 양성하면 장원의 홀씨가 무한정 흩날릴 것
아니오” 라고 했다는 것이다.
행색과 달리 지혜로웠던 그 노인은 세종 때 처음 생긴 현직관리를 중용하기 위한 중시에서 율정이
장원했다는 이야기를 잘 알고 있던 터였다.
설령 노인의 말이 옳다하더라도 마을 사람들은 감히 넘보지 못할 일이었는데 그 풍문을 전해들은
율정은 선뜻 자신이 태어난 집을 향교터로 내 놓는다.
비안향교의 건립 시기와 장소는 그리 명확하지 않다.
자연재해와 전란 등 여러 차례 우여곡절을 겪은 만큼 처음 세워진 곳과 달리 한두 번 옮겼을 것
이라고 추측한다.
그러다 1735년에 멀리 청화산을 바라보는 교촌리, 율정이 내놓은 그 땅에 중건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향교를 뒤로 두고 폭이 넓은 구천교를 건너면 구천면 위성리 마을 가운데에 구천서원이 있었던
옛터가 남아있다.
딱히 서원 터라고 보여지지 않지만 ‘구천서원육선생매판소’라는 작은 비각은 율정을 비롯한 여섯
분의 위패가 묻힌 곳임을 알게 한다.
그리고 용천마을, 장승배기가 바라보이는 곳에 1898년에 세운 율정을 기리는 또 하나의 기념비가
오가는 이들의 눈길을 끈다.
대부분 문중에서 세운 조형물들이긴 하지만 조선통신사가 지나갔던 비안마을 곳곳의 석비들은
통신사의 이름으로 처음 길을 연 율정을 기리는 뜻인 동시에 낯선 여행객들의 이정표가 되고 있다.
역사는 흐르고 길은 다만 외줄기로 쓰여지지 않는다.
1910년 3월12일 아침, 현청 옆 비안보통학교 150여명의 학생들은 경북도에서는 처음으로 3ㆍ1
조선통신사가 지나갔던 그 길을 내려다보면서.
김정식
담나누미스토리텔링연구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