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의 고사 다 치고 남는 시간이 있거나 수업후 쉬는시간마다 짬짬히 끄적인글을 마음먹고 다듬어서 쓴...
여기에 자작한 소설을 올려도 되는지 모르겠네요.
처음 쓴 소설이라서 미숙하지만 평가 부탁드립니다.
流(흐를 류 - 흐르다, 물이 낮은 대로 흐르다, 떠내려가다, 시간이 지나가다.)
어두운 밤. 사나운 암코양이가 새운 발톱처럼 날카롭고도 빼곡이 솟은 고층 아파트들이 숲을 이루고 있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칙칙한 쥐색의 땅딸막한 영세민 아파트가 바닥에 달라붙듯 들어섰었건만 이제는 알록달록한 색깔로 칠해진 고층 아파트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 아파트의 한 건물의 옥상. 그 옥상의 모습도 많이 변해있었다. 가난하지만 정겨운 아이들의 비밀기지와 낡은 가재도구가 자리하고 있던 옥상은 어느덧 차가운 시멘트로 뒤덮혀 거대한 물탱크만을 내보이고 있었다.
그 장소, 바로 그 장소에 소녀가 있었다. 약간 쌀쌀한 날씨를 예상치 못했는지 후줄근한 운동복 단벌 차림의 소녀는 크게 심호흡하여 얼음장같은 공기를 빨아들였다.
소녀의 얼굴은 추위인지 긴장인지 고운 산딸기 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별안간 소녀가 악-! 하는 비명을 질렀다. 위태로울 정도로 높이 솟은 아파트들이 소녀의 목청에 짜랑- 하고 울리며 몸을 떠는 것 같았다.
"자아- 힘내자 김주연!!! 넌 최선을 다했어!!!"
자신을 김주연이라 칭한 소녀가 다시 한 번 소리를 질렀다. 짜랑한 파공음이 밤 공기를 뚫고 아침을 기다리며 서산에서 잠들어있는 해에게 닿을 때까지.
몇 번 더 기합을 넣은 소녀는 후련한 한숨을 내쉬며 집으로 내려갔다. 단출하지만 아기자기하게 잘 꾸며진 소녀의 방 안. 소녀는 침대에 몸을 뉘였다. 평온한 표정으로 침대에 몸을 누이고 잠이 든 소녀의 입꼬리에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하지만 그 미소도 잠시, 소녀의 표정이 좋지 않은 꿈을 꾸는 듯 굳어가고 있었다.
사각형의 갑갑한 공간 안으로 어둠의 장막 한 꺼풀이 실 끊어진 꼭두각시처럼 풀썩 내려 앉았다.
끝없는 물줄기들의 소용돌이. 그 속에서 헤매고 또 헤매여. 너의 미소. 나는 언제쯤 그런 미소를 지어보지? 늪에 빠진 듯, 허우적대며 너를 부러워하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게 없는 나는...
따르르릉!
전형적인 알람시계의 쇳소리로 인해 눈이 번쩍 뜨였다. 몸이 뻑뻑한 것이, 간밤에 영 개운치 않은 꿈을 꿨나 보다. 하긴, 뭐 대한민국의 한참 바쁠 고교 2학년생이 꿈 따위에 연연할 만큼 한가하겠냐 만은, 뭐 좋은 꿈이면 기분도 좋지 않겠는가? 좋은 꿈이 아닌 듯한 것이 문제지만 말이다.
자자, 꿈 얘기가 너무 멀었다. 3학년이 코앞인 이 시점에서 그따위 것에 젖어서 지각할 수는 없는 법, 지각을 하면 학생부에 기록이 남고, 학생부에 기록이 남으면 학교 갈 때 걸린다. 더군다나 오늘은 무척이나 중요하고도 중요함을 골백번을 곱해도 모자랄 만큼 큰 일이 많은 날! 한껏 능력을 발했던 시험 꼬리표에 인터넷에 투고했던 창작소설의 당선여부가 나온다. 어디 그뿐이랴! 바로 나의 생일날이기도 한 것이다!
대문을 나서 큰길로 나가는 커브 길에 잠시 멈춰 신발 끈을 고쳐 매고 새벽 공기를 뚫으며 대로를 내달린다. 어젯밤 비가 와서 그런지 탁했던 공기가 제법 맑아져 있다.
복장단정을 외치는 선도들을 뚫고 들어온 교실. 이제 3학년을 앞둔 우리들의 처지로썬 아침자율학습 시간이 마냥 즐거울순 없으리라. 소녀들의 생기가 넘치리라 생각되는 교실은 저마다의 공부를 하는 아이들이 구 할이 넘는다. 나머지 일 할도 마치 소리내어 말을 하는 것이 금기인 것처럼, 혹은 즐거운 화제를 입에 담는 것이 금기인 것처럼, 커튼을 털자 묻어 나온 먼지 말린 거미줄처럼 음울한 대화를 하고 있다. 나는 그 중에 어떤 부류일까? 명문대에 간답시고 엄청난 양의 종이에 엄청난 양의 연필 볼펜, 그리고 그 자신의 젊음을 쏟아 붓는 9할? 아니면 대학에 관심있는 척 하면서 그냥 시시껄렁하고 무거운 대화를 매 아침마다 반복하는 일 할?
나는 당연히 구 할중 하나다. 그리고 나는 그에 걸맞은 행동을 한다. 자리에 앉아 책상서랍속에 손을 넣고 휘저으면 당연하다는 듯이 잡히는 어제 풀다 남은 문제집. 그 구깃구깃하고 눅눅한 종이냄새가 나는 문제집을 들어, 사람들이 가장 기본적으로 밥을 먹는 행동을 하듯 나도 생존을 위해 공부를 한다. 이 아침 자율학습 시간은 공부하기 가장 좋은 시간이다.
하지만 오늘은 무슨 일인지 아침 자율학습 시간에도 영 집중이 되지 않았다. 고요함 속의 초조함. 초조함 속의 기다림. 째각째각 흘러가는 시계바늘 소리에 맞춰 조례시간이 다가왔다. 그리고 긴장된 순간 속에 제 주인을 찾아가는 하얗고 가느다란 꼬리표들...
툭. 스쳐 지나가는 무심한 손길이 하얀 꼬리표를 떨궈놓았다. 그것은 나에게 하얀 등을 내보이고 엎어져있다. 떨리는 손가락으로 집어서 뒤집어본다.
그 순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단지 꼬리표 끝에 조그맣게 자리하고 있는 2등이라는 글자 외엔. 하하. 그럼 그렇지, 만년 2등인 내가 뭘 기대했던 거야?
꼬리표가 나와 어수선한 분위기를 선생님이 교탁을 두드리며 정리했다. 그리고 목청을 크흠 크흠 가다듬은 다음 근엄한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우리 반에서 전교 1,2등이 다 나왔다. 먼저 2등은 김주연."
애들의 꽤나 놀란 듯한 시선이 나에게 집중되었다. 하지만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누가 나를 젖히고 1등이 되었느냐는 것뿐!
"그리고 1등은..."
긴장되는 순간.
"유나희!"
고개가 푹 떨궈졌다. 아이들의 감탄소리도, 선생님의 찬사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아, 마치 모두가 바다 속에 잠기기라고 한 듯한 기분. 절망. 자기혐오. 그래, 1등 한 번 못한게 뭐 어때? 라고 자위할 수도 있지만 징그러운 자기혐오가 꾸역꾸역 머리를 디밀고 올라온다. 1등을 못해서가 아니다. 저번에도, 저 저번에도 항상 열심히 노력해온 나를 젖히고 1등을 한 나의 단짝친구의 기쁨을 씁쓸해하는 나의 소심한 마음 때문에!
애써 표정을 풀며 나희에게 축하한다고 해주었다. 그래, 저렇게 좋아하는데... 뭐, 1등 한번 못한게 어때? 다음에 더 잘하면 되는거야...
점심시간. 도서실에 가 컴퓨터를 켰다. 지금쯤이면 소설의 수상여부가 메일로 도착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딸깍딸깍. 위이잉-
적막한 도서실에 마우스를 클릭하는 소리와 인터넷을 읽는 컴퓨터의 기계음이 울려 퍼졌다. 꾸벅꾸벅 졸던 사서 아르바이트 학생이 그 소리에 나를 흘긋 쳐다보곤 다시 눈을 감았다. 새 편지 1통. 그래.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나는 애써 미소지으며 메일을 클릭 했다 .
메일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나의 얼굴이 굳었다.
「 대상. 서울 한명여고 2년 신나희. 」
아, 그래. 나희도.. 나희도 응모했구나.. 마음속으로 중얼거리며 스크롤바를 내렸다. 괜찮아. 가작만이라도..
「 가작. 대구 유서고 3년 진명화
응모해주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
마우스 위에서 손가락이 힘없이 흘러내렸다. 정말로 의미 없는 날로, 칙칙한 회색으로 탈색되어버린 오늘. 그래, 괜찮아. 억지로 중얼거리며 그 횟빛 세상 귀퉁이에서 유일하게 칼라로 움직이고 있는 나의 생일이란 단어를 끄집어내었다. 아직은, 뭔가 의미가 있다.
오후 내내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행동했다. 나희는 아는지 모르는지 해맑게 웃으며 당선소식을 알리고 있었다. 아아, 그녀는 순진한건가 영악하게 내 슬픔을 모르고 더 기쁜척 하는건가? 마음속에서는 그런 어지러운 생각들이 들면서 자연적으로 입꼬리가 비뚜름하게 치켜올라갔다. 비웃음이 걸리는 얼굴 근육을 자제하며 무의식적으로 축하해주었다. 냉소어린 감정을 가라앉히자 착잡한 파도가 밀려왔다. 나는 또 한번 무의미하게 축하한다고 중얼거린 다음 힘겹게 말을 꺼냈다.
"저기 나희야, 오늘 내 생일인거 알지? 내가 한턱 쏠게 같이 놀러가자."
나는 지을 수 있는 최대한 밝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약간 마음이 흡족해졌다. 그러자 나희는 아직도 흥분에 들떠있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 맞아, 주연아.. 오늘 너 생일 이였지.. 응, 축하해. 근데.. 나 오늘 집에 친구들을 초대해서 말야... 어쩌지?"
"그래? 아깝다- 같이 놀고 싶었는데! 그럼 다른 애들은? 다른 애들은 다 갈 수 있지?"
나는 한껏 미소지으며 다른 애들을 돌아보았다. 그러자 내 시선을 마주한 아이들이 시선을 피하기 시작했다. 아, 뭔가 이상하다. 뭔가.. 이건 아니다. 내가 기대한 건 이런게 아니다. 악몽을 떨쳐버리고 가볍게 출발했던 아침엔, 아침엔...
"..저기.. 미안 주연아, 우리.. 오늘 나희집 가기로 했거든.. 그래서.."
듣고싶지 않았다. 더 듣고싶지 않았다.
"아니, 괜찮아."
나는 말을 뚝 자른 뒤 가방을 들춰 매고 학교로 향했다. 원래 이럴 때에는 눈물이 나야 하겠지만 눈물이 나지 않았다. 단지 허탈, 그리고 절망, 고독, 이기심... 그리고...
아!
내가.. 내가 지금 정말로 나희를 질투하고 있는거야? 마음속 깊이 우러나오는 진심으로?
사실 쭉 그녀를 부러워하면서 질투했었다. 하지만 장난이라 생각했다. 너무 친하고 좋아하기에, 그런 상반된 감정이 든거라고 생각했었다. 아니, 일부러 그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더럽다 더러워. 단짝친구다 소리를 입에 달고 다니면서, 그까짓 일 때문에 질투에 사로잡히고.. 김주연, 너 정말 구제불능이다.
이를 악물고 한강대로변을 따라 걸었다. 가슴서는 나 자신을 향한 비웃음과 자괴감이 메아리친다. 정신이 어떻게 될 것 같다. 쉬고싶다. 자고싶다. 편안한 어둠 속에 몸을 맡기고 싶다.
문득, 필통 속의 커터칼이 생각났다. 연필을 깎아 무뎌진 칼날에 울음소리처럼 새카만 심의 잔재가 묻어있는..
내가, 내가 지금 무슨 생각하고 있는거야?
나는 고개를 휘둘러 이상한 생각을 떨쳐 버렸다 . 그래, 피곤하고 실망스러워서 그런걸 거야. 그냥 벤치 같은데, 아니면 강변에라도 앉아서 좀 쉬면...
몸을 쉬게 할 만한 곳을 찾기 위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주위는 간간이 지나다니는 형형색색의 자동차와 온통 횟빛으로 칠해진 도로 뿐. 그래, 이곳은 원래 이렇다. 횟빛 고양이처럼 낯선 도시. 그리고 나는 마치 그 속에서 완벽한 이방인이 된 듯 했었다. 갑자기 대로가 구불구불 움직이는 듯 했다. 횟빛 아스팔트가 일어나서 나를 덮치는 듯 하다. 그때, 횟빛으로 가득 찬 시야에 노란 무언가가 팔랑 날아와 코끝을 스쳤다.
예전에는 분명히 없었던 노란 장미정원 속의 통나무집이 눈동자 속에 틀어박혔다. 이 낯설고 생기없 는 횟빛 세상에서, 유일하게 숨통을 트일만한 곳을 만난 듯 해 그곳으로 달려갔다. 서두르지 않으려고 했지만 자동적으로 발걸음이 서둘러졌다.
가까이 다가간 통나무집은 카페쯤 될 거라는 나의 상상을 여지없이 깨버렸다. 꽃잎이 상승기류를 타듯 치솟으며 향기를 토해내는 그 속에서, 검은 재질의 깃발이 흔들렸다.
「 운명의 흐름을 주관하는 자. 道(길 도 - 길, 이치, 근원. )의 점집. 」
문득 호기심이 동했다. 이때까지 점을 한번도 본적도 없고 믿은 적도 없지만.. 극심한 우울을 겪고 난 후이기 때문인지 쉽게 그 수상쩍은 집 속으로 들어가졌다.
넓어 보이던 외관과는 달리 안은 좁았다. 둥그런 탁자에 의자 두개. 그리고 등을 돌리고 선, 마치 사리같은 것을 뒤집어쓴 여인. 그 여인은 뒤쪽의 빛이 새어 들어오는 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뒷문인가. 나는 중얼거리며 옆의 종에 달린 줄을 잡아당겼다. 딸랑- 청명한 소리가 좁은 실내에서 반사되었다.
"실례합니다-"
여인이 천천히 뒤돌아 섰다. 아, 순간적으로 놀랐다. 도저히 점쟁이라고 상상할 수도 없는, 아름다운 묘령의 여인.
"어서 오세요 . 道의 점집에 오신것을 환영합니다. "
나직하게 노래하듯 말하고 난 그 여인은 노란 장미를 닮은 미소를 베어 물며 의자에 앉았다. 나도 그 맞은편에 앉았다.
무슨 얘기를 해야할까. 점집이 처음인 나로서는 서두를 꺼내기가 쉽지 않았다 .
"..저.. 사실 저는.."
"아니요."
여인이 빙그레 웃으며 나의 말을 막았다. 사향장미의 향. 여인에게서 사향장미의 향이 났다.
"당신이 여기 온 것만으로, 다 알 수 있어요."
여인은 뜻 모를 소리를 중얼거리며 세필로 무언가를 휘갈겨 썼다. 나에게 건네진 그것은, 누르스름한 화선지에 붉은 주사로 한글자의 한자가 쓰여져 있는 일종의 부적 이였다.
「 流 」
종이를 꽉 채운 한자 하나. 나로서는 의미를 알 수 없는 한자였다. 한참 종이를 들여다보다가 문득 고개를 드니 여인은 어느새 일어서서 문을 열고 있었다.
딸각.
문이 열리자 하얀빛이 새어 들어왔다. 여인은 하얀 빛 너머로 사라지고 있었다. 주인이 사라진 집에서는 더 이상 지체할 일 없는 법. 나는 그 통나무집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그 집을 보는 일은 더 이상 없었다.
물은 항상 흐른다. 물은 흐르면서 맑은물이 되기도 하고, 탁한물이 되기도 하며, 시내가 되기도 하고 바다가 되기도 한다. 그렇지만 물은 항상 물이다. 사람도 그렇다. 살아가면서 얼마든지 바뀐다. 그러나 언제까지 본 바탕은 그 자신이다.
오랜만에 꿈을 꿨다.
그다지 나쁘지 않은 꿈. 하지만 꿈이란 것은 언제나 미스테리한 무언가로서 내 안의 소녀적 감성을 불러일으킨다. 나 참, 30대를 향해가는 주제에 무슨 소녀적 감성.
이런 식으로 말해도 예전과 같은 자학은 아니다. 친구끼리 가벼운 농담을 던지듯, 내 안의 또 다른 나와의 언어유희. 아침 식탁을 차리는 동안에도 그 언어유희는 계속되고, 뉴스를 틀어서야 비로소 멈춘다.
「 매춘업에 임하던 28살 신모씨가 오늘새벽 경찰에 검거되었습니다. 가출한 어린 소녀들을 잡아 강제로 매춘업에 종사시킨 신모씨는... 」
앵커의 무감정한 목소리가 상황을 보도하고 있었다. 아무리 모자이크 처리를 해도, 음성변조를 해도 알아볼 수 있는 이가 그 상황의 주인공이였다.
하.. 신나희. 너 결국 이렇게 되려고 했던거니..?
허탈했지만 화나거나 하진 않았다. 이미 나희에 대한 질투의 감정도 버린지 오래. 그리고 혹시나 아직 남아있을지 모르는 질투의 감정을 버리듯, 나무그릇을 싱크대 안에 던져 넣었다.
퐁당-
경쾌한 소리와 함께 물방울이 튀었다. 어느덧 이런 작은 것에도 의미를 부여할 수 있게 되었다.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문을 연다. 목에는 빛이 바랜 부적이 담긴 포켓목걸이가 걸려있다.
「 流 」
이제 그 의미를 안다. 흐를 류. 어쩌면, 그 사향장미향의 여인은 물이 흐르며 모습을 바꾸듯이 인생도 흘러가며 바뀐다는 뜻으로 이 부적을 준 것이 아닐까? 하긴, 지금 내 인생은 바뀌어도 너무 바뀌었지만 말이다.
이곳은 빛, 문 건너 앞쪽은 어둠. 빛과 어둠이 공존하는 세계. 그리고 그 중심에 서있는 나.
"젠장, 맨날 다람쥐 쳇바퀴 굴러가는 세상 속에서 나보고 뭘 어쩌라는 거야!"
가무잡잡한 피부의 아직 앳된 티가 남은 소녀가 시원하게 트인 한강을 향해 소리 지르고 있다. 그래도 분이 안 풀리는지 붉그스레해진 얼굴로 씩씩거리는 아이. 18쯤 되었을까. 화난 듯 하지만 생기가 넘치는 귀여운 소녀였다.
소녀는 몇 번 더 악을 썼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수상한 사람 보듯 기웃거려도, 소녀는 쓰지 않았다.
"제-에-길! 선에서 벗어나지 않기 위해 부조리한 것임을 알면서도 맞춰주는 행동은 이 불타는 열혈여아 에게는 너무나도 힘든 과제라고!!!"
다시 한 번 더 거칠게 소리를 지른 소녀는 반항심리를 표출하듯 일부러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을 찾아 그 바람을 맞으며 전진했다. 비록 얼굴은 화를 가장했지만 어느덧 그 속에는 풀죽음이 깔려 있었다. 실의에 빠진 눈동자. 그 눈동자에 휴식처가 될만한 곳을 잡아내었다. 피를 토하듯 붉게 핀 꽃을 달고 있는 동백나무 무리 가운데의 자그마한 집. 동백꽃잎 속에 검은 깃발이 나풀거리고 있었다.
「 운명의 흐름을 주관하는 자. 流의 점집에 오신것을 환영합니다. 」
소녀는 불가항력에 이끌리듯 점집 안으로 들어갔다. 빛을 바라보며 한 여인이 서 있었다. 그녀가 천천히 빛을 등지며 뒤돌아, 어둠 속의 소녀를 바라보았다. 가슴 어귀에서 낡은 부적이 흔들렸다.
"어서 오세요. 流의 점집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