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산 주등산로 |
가. 안양예술공원 수목원입구 주차장 ⇒ 염불암 ⇒ 삼막사 |
▶ 부등산로
|
- 안양예술공원 ⇒ 안양사 ⇒ 학우봉 ⇒ 삼막사 |
- 안양예술공원(입구) ⇒ 유유산업 ⇒ 삼막봉 ⇒ 학우봉 ⇒ 삼막사 ⇒
삼성사 |
- 석수IC옆 주택가 산 123-1번지 ⇒ 불영암 ⇒ 찬우물 ⇒ 삼성산 ⇒ 삼막사 |
- 석수역 백조아파트 뒤산 ⇒ 불영암 ⇒ 찬우물 ⇒ 삼성산 ⇒ 삼막사 |
나. 석수역-장군봉-삼성산-안양예술공원 또는 서울대입구


다. 안양코스-(1)안양종합운동장 또는 인덕원역부대-제1국기봉-kbs송신탑-연주대
(2)삼성산코스: 관악역 -유원지입구-삼성산-국기봉-서울대입구 가능
(3)삼성초교-삼성산-국기봉-서울대입구및 회귀코스
(4)관악역-안양천 삼막천-경인교대-삼막사-서울대입구및 회귀코스
(5)관악역, 석수역-호압사분기점-삼성산 국기봉
라. 석수역-호암산-불영암-한우물-찬우물-장군봉-삼막사-삼성산깃대봉-안양예술공원

오래 전 이 코스를 선택했는데 삼막사를 내려다 보고는 그냥 진행하는 바람에
아쉼움이 커서 삼막사를 집중 탐구하려 했다.
조선 성종 때(1484) 노사신 등이 왕명을 받들어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를 본떠 저술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금천현 산천조에「삼성산은 현동쪽 10리 지점에 있
는데 진산이다」- 삼성산재현동십리진산(三聖山在縣東十里鎭山)라고 하였고, 같은 책
과천현 산천조에「관악산은 현 서쪽 5리 지점에 있는데 진산이다」- 관악산재현오리
진산(冠岳山在縣五里鎭山)라고 하였으며
삼성산은 금천현의 관아가 있던 지금의 서울시 구로구 시흥 2동에서 동쪽으로 10리
지점에 있는 산으로 금천현의 진산(각 고을을 진호(鎭護) 하는 주산(主山))이며,
관악산은 지금의 과천시 관문동 소재 온온사가 있는 지점에서 서쪽으로 5리 지점에
있는 과천현의 진산이어서 이들 두 산이 별개의 산임을 밝히고 있다.

이번 산행은 지난날 국기봉에서 내려다 보고 지나친 삼막사를 집중적으로 탐구하고자
▶경인교욱대학 정문 → 삼막사 주차장→삼막사→국기봉→백하여 삼성산→호압산→호압사 →과천역 코스를 선택했다.
경인교육대학정문까지는 버스도 운행되고 안양시청부근에서는 택시로 약 5~7천원 요금
이 발생한다.
삼막사 주차장에서 삼막사까지는 약 2㎞ 정도의 거리이나 아기자기한 오솔길을 따라
오르막으로 된 길을 따라 오르다보면 한시간 정도이면 삼막사에 도착한다.
삼막사(三幕寺)는 신라시대 유명한 승려인 원효와 의상, 윤필 등이 창건한 절이다.
세 사람이 이 곳에서 막(幕)을 치고 수도를 했기 때문에 삼막사라고 하는 유래담이
있지만, 정확하지는 않은 듯하다.
또 다른 전설에는 원래 이곳 주위에 일막사, 이막사, 삼막사라는 사찰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일막사와 이막사는 폐사가 되어 터만 남고, 삼막사만이 명맥을 유지했다는 것이
다.
삼막사가 주목을 받게 된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이 사찰의 칠보전에 모셔진 마애삼존불
의 앞에 세워져 있는 남근석과 여근석 때문이다. 이처럼 기자신앙의 대상물로서 산신각
이나 칠성각에 해당되는 칠보전과 남·여근석이 한곳에 모여 있는 사례는 삼막사가 유일
하다.
이런 지형적 특징 때문인지 몰라도 자식 낳기를 기원하는 기도처로서 전남 돌산의 향일
암과 함께 잘 알려진 곳이다. 특히 이 남·여근석은 1983년에 경기도 민속자료 3호로
지정되어 일찍부터 주목받았음을 알게 한다
삼막사의 남·여근석 과 관련해서 한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금실이 좋은 부부가 있었는데, 자식이 없는 것이 큰 걱정이었다. 시어머니는 씨받이라도
들이라 난리였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어느 날 꿈에 웬 할머니가 나타났다. 그
할머니는 삼막사의 남·여근석을 문지르면서 소원을 빌면 자식을 낳을 수 있다고 하였다.
부부는 그 바위를 찾아 근처에 움막을 짓고 치성을 드렸다. 하늘이 감응했는지 과연
아들을 낳았을 뿐만 아니라 자손이 번창하고 잘 살았다는 것이다. 이런 소문에 자식을
낳지 못한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아 치성을 드렸으며, 지금도 사월 초파일과 칠석에
는 많은 사람들이 모인다고 한다.
삼층석탑 앞에 놓여 있는 무수한 동자상도 삼막사라는 사찰의 성격을 잘 보여주는 대목
이다. 이 석탑은 경기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것으로, 고려시대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또한 칠보전 안에 모셔진 마애불의 코가 완전히 납작해질 정도로 갉아낸 것도
흥미로운 사실이다. 왜 코를 그렇게 갉아냈을까. 이것은 장승과 같이 나무도 아닌 화강
암이기 때문에 코를 갉아내는 일이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코를 갉아낸 것은
자식을 얻고자 하는 여인네의 심사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이 코를 갉아낸 돌가루를 물에 삶아 먹으면 바위가 지닌 뛰어난 생산 능력을 지닐 수
있게 된다는 전통적 사고방식이 반영되어 있다. 이런 사정은 줄다리기에 사용되는 수줄
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창녕 영산의 줄다리기는 지름이 50㎝ 이상이 될 정도로 굵다.
그런데 이곳의 줄은 수줄과 암줄을 비녀목이라는 굵은 막대기로 연결하게 되어 있다.
여기서 수줄의 머리통이 바로 남근 모습을 띠고 있다. 그래서 줄다리기가 끝나면 사람
들은 수줄의 머리를 베어간다. 이것을 지붕에 올려놓으면 잡귀가 근접하지 못한다고
믿는다. 또 아기를 낳지 못한 사람은 이 줄로 삶아 먹으면 잉태가 가능하다고 생각하
는 것이다.
내가 삼막사를 찾을 때마다 묘한 인연이 있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항상 여근석
가운데 물이 고여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에 누군가 물을 뿌려놓은 것은 분명히
아니다. 너무나 묘한 인연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더 관심을 끌었던 것은 물이 조금
고인 여근석 안에 누군가 백원짜리 동전을 넣어 놓았다는 점이다.



삼귀자
종두법을 실시한 지석영의 형 地雲英(지운영)이 이곳 白蓮庵止(백련암지)
에 은거할때 바위에 陰刻(음각 : 글씨가 바위면의 안에 파서 새긴 것)
한 거북龜(거북구)자 세글자입니다. 그래서 삼귀자
세 개 모두 거북구자라는 말이지요.


삼귀자를 쓴 지석영의 형 지운영이 시주를 한 사람의 이름을 바위에 새겨놓았다.

삼막사에는 전국에서 유일하게 마애삼존불을 모신 칠보전과 남·여근석이 한 곳에 모여
있다. 필자 옆에 서있는 바위는 남근석이다. 참 힘차게 생겼다. 하긴 여근석 옆에 서
있으니 사그라들 일은 없겠지.



거참 신기하다. 여성의 음부와 흡사한 모양이고 틈새 구멍은 촉촉하게 젖어있고 동전도
던져져 있다.


동전이 여러 개가 있다는 것을 보면 한 사람의 소행은 아니다. 누군가 치성을 드리고는
그 안에 백원을 넣은 것임이 분명하다. 삼막사의 여근석에는 백원짜리와 같은 동전을
문지르는 특징이 있다. 10년 전에 찾았을 때도 백원짜리 동전이 떨어지지 않고 붙어 있던
것을 본 기억이 난다. 그래서 치성이 끝나고 그 돈을 던진 듯하다. 아들을 낳기 바라는
마음에서 그 안에 돈을 넣은 것은 마치 음양의 교합을 뜻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원효굴 (元曉窟)이다.
필자의 생각읠 덧붙인다. 원효는 설총의 친부이다. 설총을 낳은 이는 요석공주이다.
소요산을 가면 이 곳에도 원효굴이 있다. 공주봉은 요석공주의 전설같은 이야기다.
월효국은 팔공산에도 봉화 청량산에도 경사 ㄴ불굴사와 괴산 군자산에서도 본 기억이
난다. 참으로 그 오래 전 원효는 전국을 이렇게 다니며 굴에서 수도를 했을까?

등곡대(燈谷臺)
경기유형문호 제125호
삼막사가 원효대사 (617-686) 에 의해 창건 되었다고 삼막사는 원효 이야기를
빼고는 이야기 할 수 가없다,
또 하나는 그 분이 수도하든 장소가 등곡대이다.
남여 근석이 있는 곳으로 돌계단을 따라 올라 면 삼귀자가 있고 여기서 왠쪽 11
시 방향으로 올려 보면 燈谷臺 라는 글씨가 보인다,
일반 등산객들은 지나쳐 버릴 정도로 일반인들의 눈에는 잘 보이지 않는다.
바윗길을 따라 가보면 옛 원효대사가 다니던 발 자욱이 분명한 자연 바위에 돌계단
을 새겨 놓은 길을 따라 올라가게 된다. 20-30m 정도 올라가면 두 자연 암벽을
지주로 삼아 또 다른 돌을 가로질러 지붕으로 삼아 석굴을 만들어 놓고 수도한
흔적이 분명하다.
앞 기둥 바위에는 홈을 파서 나무기둥을 새워 출입구와 안쪽을 평평하게 만들어
충분히 사람이 기거 할 수 있는 공간과 비바람을 피 할 수 있게 해두었다.
바로 앞에도 평평한 자연 암반이 있어 공부하기에는 아주 좋은 자리 인 것을 알
수 있다.

삼막사 뒷편에는 자연암석을 파내고 조각한 불상이 묘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저 짐승은 무엇이며 부처님과는 어떤 사실관계가 있는 것일까?
알 수도 없고 물어볼 사람도 없으니 발길을 돌리는 수 밖에...

천불전 부처님 형상이 천 여개가 된다?

삼막사의 창건과 역사를 비에 기록해 둔 것이나 판독이 쉽지않고 날씨가 추운 탓에 한
곳에 오래 시간을 보낼 수가 없다.






고려시대의 탑이라고 한다.























국기봉가는 길은 아주 흥미롭다. 암릉길을 오르고 내리는 것은 신나는 일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