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학기 사회선교학교 두 번째 시간에는 서울환경운동연합(약칭 서울환경연합)에 다녀왔습니다. 서울환경연합은 환경운동연합의 서울 지역조직으로 자원순환, 기후행동, 생태도시 등 크고 작은 도시환경문제에 대응하기 위해 여러 활동을 하고 있다고 해요. 단체소개 중에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정부지원 없이 100% 시민들의 후원과 의사결정으로 운영되고 있다는 점이었어요. 많은 시민단체들이 정체성 유지와 지속적 활동의 선결조건으로 경제적 자립을 이야기하지만 그것을 실현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지요. 그래서인지 환경운동연합의 재정자립이 30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시민들과의 상호신뢰를 형성하기 위해 부단히 애써 온 노력의 결과물처럼 보였어요.
소개를 맡아주신 서울환경연합의 정책국장, 동언님의 이야기도 기억에 남아요. 이전에 DMZ, 새만금, 4대강 같은 국책사업에 대응하는 일을 하셨는데 거대 이슈일수록 이해관계도 복잡하고, 현장이 멀리 떨어져 있어 품은 많이 드는데 비해 체감되는 변화는 미미하다는 것에 괴리감을 느끼셨다고 해요. 반면 지금 서울환경연합에서 하고 있는 '연세로 대중교통 전용 지구', '조류 충돌 방지 스티커 부착', '플라스틱 폐기물 재활용' 등의 활동들은 임팩트는 작아보여도 일상의 공간에서 삶에 가까운 이슈들을 다루다보니 훨씬 더 효능감을 느끼며 일하고 계신대요. '가랑비에 옷 젖는다'는 말처럼 손에 잡히는 작은 성공의 경험들이 쌓이다보면 시민들도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 되고, 그렇게 하나 둘 모여든 시민들(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을 통해 느리지만 근원적인 변화를 이룰 수 있는 것 같아요.
강의 말미에 동언님의 고민이라며 던져주신 질문이 몇 가지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상대방을 악마화 하는 방식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가?"였어요. <2003년 새만금 개발 반대 삼보일배 행진>을 예로 드시며 불의한 구조에 대한 '개체적인 분노와 저항' 만큼이나 '성찰을 통한 사회적 회심'이 중요하다 말씀하셨어요. 오늘날 민주주의의 위기가 성찰과 생성의 과정 없이 기존 권력체제를 해체/부정하는 방식으로만 이루어졌다는 사실에서 기인하듯이, 마찬가지로 생태학살의 현장을 살아가고 있는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거대한 자본의 힘에 맞설 수 있는, 구체적인 대안을 함께 살아낼 관계(공동체)가 아닐까? 이야기 나누었어요.
같은 맥락에서 육아, 살림, 농생활 등 '살림과 돌봄이 곧 환경운동'이라는 말씀도 하셨어요. 일상의 관계에서 살림과 돌봄을 경험하며 생명감수성을 기르지 못하면 운동의 현장에서 엉뚱한 판단을 내리거나, 쉽게 소진되어버린다고요. 실제로 대다수의 활동가들이 계란으로 바위치기 같은 상황을 반복적으로 마주하며 무력함과 우울감을 호소하거나, 연예인이 된 것처럼 사업의 결과나 대중의 반응에 따라 감정이 오르락내리락하게 된다고 해요. 운동이 지속가능하지 않은 것이죠. 동언님은 자신이 15년 넘게 환경운동을 해올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 말씀하시며, 감정이 요동치거나 체념의 기운에 가라앉을 때마다 한몸살이가 '성찰의 준거점', '영혼의 안식처' 역할을 해주며 운동을 지속할 수 있게 하는 힘이 되어주었다고 말씀하셨어요.
짧은 시간이었지만, 서울환경연합 공간 둘러보고 이야기 들으며 좋은 기운 느낄 수 있었어요. 사무실 곳곳에서 활동가들의 진심과 애정 엿볼 수 있었고, 동언님이 마지막에 나눠주신 이야기는 제가 최근에 고민하고 있는 '일과 삶의 순환'이라는 주제에도 큰 울림이 되었어요. 직업적 소명은 나 개인에게 주어지는 것이라 생각해서 일과 한몸살이를 이분법적으로 바라보곤 했어요. 그런데 홀로 맥 없이 쓰러지는 저를 다시 일으켜 세워주는 지체들, 교회공동체의 힘 경험할 때마다 누구보다 나의 꿈을 응원하고 더 든든히 세워주고 있구나, 우리의 꿈이 다르지 않구나 조금씩 알아가는 것 같아요. 나무 한 그루는 세찬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리지만 나무들이 모여 이룬 숲은 한결같이 생명들 품어내듯, 한 뜻 품은 관계들이 곁에 있다는 것은 크나큰 축복이구나 다시금 되새기는 시간이었습니다.
식물 많아 더 생기있어 보였던 서울환경연합! 사무실 곳곳에 삶의 흔적들 묻어났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