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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교회 복음화를 위한 성지 순례기 |
이승훈 선조께서 그라몽 신부님께 영세 받았던 북당성당
■ 순례기간 : 2013.8.19(월)~8.24(토) 5박6일
■ 순례인원 : 13명
■ 순 례 지 : 여순,대련,장춘,길림,백두산,훈춘,경신,북경
■ 지도신부 : 정 상균 레오나르도
■ 가톨릭여행사 : 02-319-2533
1. 오늘날의 중국
'중국이란 어떤 나라인가?'라고 묻는다면, 우리들이 가장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우리나라 서해 건너 있는 거대한 대륙 땅이 머리에 떠오를 것이고 많은 경우 한국 역사에서 부정적인 역할, 이미지가 부상됨은 당연한 것이었는데 이 성지순례를 마치고 나면서 중국관이 달라지고 인식이 변함에 따라 새로운 지평이 열렸고 ‘새로운 복음화’ ‘북방선교’에 대한 관심을 갖어야 할 곳, ‘선교지’임을 깨달았음에 대한 고백이기도 하고 순례 후 잊지 않기 위해 자료를 찾아서 복습하는 마음으로 정리를 해보았다.
* 일행이 다녀온 곳은 동북 삼성 : 요녕성, 길림성, 흑룡강성 그리고 하북성 북경.
서해 건너에는 지금 中華人民共和國이라는 나라가 있고, 또 中華民國이라고 부르는 나라인 대만(臺灣)섬도 있다. 그 밖에 1997년 7월 1일 반환된 홍콩과 1999년에 中華人民共和國으로 반환되는 마카오도 있다. 우리들은 중국에 사는 사람들, 또는 중국에 살다가 외국에 이주해서 사는 사람들을 보통 '중국인' 또는 '화교(華僑)'라고 부른다. 그러나 흔히 신문이나 텔레비전에서 보거나, 우리나라에서 만나 볼 수 있는 중국인이나 화교들은, 사실상 漢族에 국한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중국에서는 물론 한족들이 전 인구의 대부분(93% 이상)을 차지하니까, 우리가 한족을 보고서 '중국인'을 보았다고 말하여도 크게 틀린 것은 아니나, 사실은 중국이라는 큰 터전 안에는 대만에는 대만 원주민, 만주에는 만주족, 몽골에는 몽골족, 신강에는 위구르족, 티베트에는 티베트족 등이 옛날부터 터전을 이루어 왔다. 이 밖에도 지금 만주를 중심으로 하여 중국 각지에는 우리와 같은 조선족들도 2백만 가깝게 살고 있는데, 이들도 따지고 보면 지금 중국 국적을 가지고 있으니 모두 '중국인'의 일부임에는 틀림이 없다.
2. 국기(五星紅旗)
五星紅旗는 붉은 바탕에 다섯 개의 오각형 황색별이 좌측 상단에 위치하고 있다. 다섯 개의 별 중 가장 큰 별은 중국 공산당을 상징한다. 나머지 4개의 작은 별은 모든 중국인을 상징한다. 毛澤東이 중국인을 노동자·농민·도시소자산계급·민족자산계급으로 분류했기 때문이다. 그 구도가 갖는 의미는 큰 별이 나머지 4개의 별을 인도하는 것이다. 마치 큰 물고기가 작은 물고기를 인도하여 강물을 헤쳐 나가는 형국이고 뭇 별들이 큰 별을 에워싸고 있는 느낌을 잘 살리고 있다. 이 별들의 모양은 동시에 그 배치됨이 중국의 지리적 특징을 나타내고 있다. 지도를 보면 알 수 있듯 중국의 강토는 해안선을 따라 타원형을 이룬다. 별의 색이 황색인 것은 중국이 황색인종이라는 민족적 특징을 의미하고 바탕인 붉은 색은 혁명을 상징한다.
3. 지 리
중국의 위치와 크기
중국은 아시아 대륙의 동부와 태평양의 서안에 위치하고 있으며 동으로는 흑룡강과 우수리(烏蘇里)강의 합류점(동경 135도 5분)에서 서로는 신강성의 파미르 고원(동경 73도 40분)에 걸쳐 있고 남은 태평양의 남사군도(북위 4도 15분)에서 북은 흑룡강(북위 53도 31분)까지 걸쳐 있는 매우 방대한 국가이다. 즉 그 판도는 동서의 경도가 약 62도, 남북의 위도는 49도에 달한다. 이처럼 국토가 광활하므로 기후가 다양하여 각 지방마다 나름대로 뚜렷한 특색을 지니고 있다. 예를 들어 경도에서 볼 때, 중국은 전 대륙에 걸쳐 강력한 계절풍이 불며 동에서 서로 갈수록 건조하며 동부지방은 바다의 영향으로 강우량이 풍부하여 농업이 발달해 있다. 위도를 통해 본다면 중국은 북반구에 위치해 있으며 북회귀선이 무려 남부에 있는 4개의 성을 통과하고 있다. 따라서 위도에 따라 각 지방의 기후와 산물, 토양이 제각기 다르다. 대체적으로 중국은 온대와 아열대에 속하는 지방이 많으며 이에 따라 다양한 농업이 발달해 있다. 중국의 국토 면적은 총 960만 평방 킬로미터로서 지구 전체 표면적의 1/15이고 아시아의 1/4 에 해당된다. 그 크기는 러시아를 제외한 전 유럽의 넓이와 비슷하며 러시아, 캐나다에 이어 세계 제3위의 크기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동서가 5천2백 킬로미터로서 4시간의 시차가 있다. 그러므로 동쪽 우수리 강이 아침일 때 서쪽 아프가니스탄과 인접한 파미르고원은 아직 한밤중이 되는 셈이다. 그리고 남북은 총 5천 5백 킬로미터인데 흑룡강 일대가 백설이 휘몰아치는 엄동설한일 때에도 남방의 해남도는 야자수가 우거진 한여름의 정취를 맛볼 수가 있다. 사실이지 그곳은 아예 겨울이 없고 1년 내내 고온 다습한 열대 기후이니 그럴 수밖에 없다. 대체로 중국은 상층부가 좀 파여 들어간(몽골 때문에) 다듬지 않은 원모양을 하고 있는 셈이다. 중국의 국경선은 총 연장이 2만2천 킬로미터에 달하며(육상) 모두 12개국과 인접해 있다. 즉 동쪽으로는 우리나라와 이웃해 있으며 남으로는 베트남, 라오스, 미얀마와, 서남 및 서부쪽으로는 인도, 부탄, 시킴 왕국, 네팔, 파키스탄 그리고 아프가니스탄과 경계를 이루며, 서북과 동북쪽으로는 러시아와, 북으로는 몽골과 각각 인접해 있다. 이렇게 많은 나라와 이웃해 있다 보니 자연히 국경선 문제가 대두되기 시작했는데 대부분 은 1949년 이후 해결되었고 오직 구(舊) 소련과 인도만이 미해결의 상태로 남아 있다. 이 밖에도 태평양(중국은 이를 남해라고 부름)상의 동사군도(東沙群島)와 남사군도(南沙群島)가 석유의 부존 가능성이 높아짐에 따라 필리핀, 대만, 베트남, 말레이지아 등과 영유권 분쟁의 소지를 안고 있기는 하지만 중국은 평화적인 해결을 천명해 두고 있는 상태다.
해안선은 북으로 한·중 경계의 압록강 하구에서 시작되어 남으로는 통킹만까지 이어져 베트남과 경계를 맺고 있으며 총 연장은 1만8천 킬로미터에 달해 세계에서 가장 긴 국가 중의 하나다. 물론 최대 섬인 대만(臺灣)과 해남도(海南島)의 해안선을 합치면 이보다 훨씬 더 길다. 어쨌든 해안선의 모양은 동쪽으로 치우친 반달의 형태라고 보면 되겠다. 그리고 태평양을 끼고 인접해 있는 국가로는 멀리 동쪽의 일본과 동남의 필리핀, 남쪽의 말레이지아, 보르네오, 인도네시아 등 도합 5개국에 이른다. 중국을 감싸고 있는 바다는 북에서 남으로 각각 발해·황해·동해(동지나해)·남해 그리고 태평양이 있으며 여기에 크고 작은 섬이 5천 개 가량 산재해 있다. 중국 제일의 섬은 대만이고(3만 5천 5백 평방 킬로미터) 그 다음이 해남도( 3만 3천 5백 평방킬로미터)·숭명(崇明)도 주산(舟山)도 등의 순이다. 한편 중국은 영토·주권과 국방·경제상의 이익을 위해 1958년에 12해리 영해를 선포해 놓고 있다.
4. 고도차(高度差)가 크다.
‘세계의 지붕'이라고 일컫는 티베트 고원의 최고봉인 에베레스트(8,848m)를 시작으로 8천m 이상의 높은 봉우리들이 있는가 하면, 신강지방의 툴한(吐魯番) 분지에 있는 아이딩호(艾丁湖)는 해면보다 154m나 낮아 그 표고차(標高差)가 9천m에 이른다. 이러한 고도차는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는 것이다.
5. 다양한 지형으로 이루어져 있다.
서북부지역인 티베트 고원 및 신강, 몽골의 고원은 건조한 사막지대가 많아 농업은 매우 부진하고 유목민들에 의한 목축업이 드문드문 이루어지고 있는가 하면 남부의 운귀고원(雲貴高原)은 빗물로 침식된 카르스트 지형을 이루고 있다.
양자강과 황하 등의 대다수 하천은 이러한 지세에 따라 서쪽에서 동쪽으로 흘러 태평양에 이른다. 그러나 노강(怒江)과 같이 남쪽으로 흘러 인도양으로 흘러들어 가는 강도 있고, 북쪽으로 흘러 북극해로 들어가는 강도 있으며 사막지대에는 계절에 따라 물길이 끊어지는 하천도 있다.
6. 기후 또한 다양하다.
북쪽의 흑룡강성은 겨울이 길고 여름이 짧은데 비하여 해남도 지역은 여름이 길고 겨울이 거의 없다시피 하다. 동부의 연해 지방은 온난습윤하여 사계절이 분명하지만 내륙쪽은 건조하여, 특히 신강의 타림분지 같은 곳은 연간 강우량이 10mm도 되지 않은 곳도 있다. 남선북마(南船北馬)라는 옛말도 바로 이러한 기후에서 생겨난 것으로 비가 많이 내리는 남방 지역에서는 배를 이용한 수상교통이, 건조한 북방에서는 말을 이용한 육상교통이 일반적으로 이용되었다는 것을 의미해 준다.
이것은 오늘날까지도 별로 큰 변화는 없다. 평야가 많은 화북에서는 폭이 넓은 도로가 손쉽게 종횡으로 건설되어 있다. 그런데 포장이 거의 되어 있지 않은 데다가 토질이 황토질이어서 건조기에는 황토먼지가 끝없이 일어나는 황진만장(黃塵萬丈)의 상태를 일으키고 우기에는 발이 푹푹 빠지는 흙탕길이 되기도 한다. 이와 반대로 화남에는 산악지대가 많고 평지에는 논이 많아서 도로의 폭이 좁기는 하지만 자갈 등으로 포장된 길이 많다. 그러나 화북에 비하여 화남은 역시 수로 교통이 발달하였다. 양자강 및 주강에는 기선이 자유롭게 운항할 정도이고, 그 지류에 서도 민선(民船)의 교통이 빈번하다. 또 관개용의 운하망도 여러 하천, 호수 등과 연결되어 조밀한 운송망을 이루고 있다.
7. 중국의 종교정책
1) 중국의 종교의 자유 : 중국이 말하는 “종교의 자유”라는 개념에는 믿을 수 있는 자유(신앙의 자유)와 믿지 않을 자유(불 신앙의 자유)가 병존하는 개념으로서 실제는 국가가 엄격히 통제하고 있으며, 예를 들면 미 성년자에게 선교할 경우 2년 이하의 징역에 처 하도록 형법은 정하고 있다.
2) 중국인과 외국인과의 혼합 종교 활동 규제: 종교 집회는 엄격히 규제하고 있으며 교회(공소포함)안에 종교 활동 허가서를 부착 하도록 명하고 있다. 또한 외국의 종교지도자의 경우 중국에서 종교집회(미사, 피정지도) 또는 어떤 형태의 행사를 하려면 省정부의 허가를 받아야 하고 정부의 관계자가 입회해야한다.
3) 특히 대학생들은 중국공산당 전위조직인 공청당(共靑黨) 요원인 경우가 많기 때문에 어떤 종교도 전파하지 못하게 되어있다.
4) 중국공산당원은 어떠한 경우에도 종교를 갖을 수 없고, 종교를 갖을 경우 당으로부터 출당조치를 받게 된다.
5) 종교서적 휴대금지: 여행 관광객의 경우 본인 용 이외에는 타인용 종교서적의 휴대를 금지 하며, 우편물(소포, 특급우편물)은 철저히 검열 하여 종교서적이 색출될 경우 압수처리 한다.
6) 외국 종교단체의 지도자급 초청은 중앙 정부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중국 교회 복음화를 위한 성지 순례기
“주님께 힘을 얻어 순례 길에 오른 사람은 복되어라.” -시편 84,5-
8/19 첫째 날, 이른 아침부터 부산하게 준비하여 7시30분 성당에 모인 일행12명과 정 레오나르도 보좌신부님은 성체조배와 주임신부님의 강복으로 영적무장을 하고 인천 국제공항을 향해 조금은 상기된 마음으로 ‘중국교회 복음화를 위한 성지순례’라는 거창한 명제로 순례 길에 올랐다. 11시 50분 중국 요동반도 최남단에 위치한 대련공항을 향한 짧은 하늘여행이 시작되었고 시차는 중국이 1시간 늦으므로 손목시계 바늘을 앞당겨 놓았다. 대련까지 한시간정도 소요되는데 시간은 한 시간 멈쳐 버린 듯이 출발했을 때의 시간과 도착했을 때의 시각이 같다는 것에 묘한 기분이 든다. 광활하고 거대한 땅 중국의 동북쪽에 위치한 대련은 북반구의 온난성 기후지역에 위치하여 있으며, 바다로 둘러 쌓여있기 때문에 온순 대륙성 기후와 해양성 기후로 8월 달 평균기온은 섭씨 24도로써, 대련에서 따뜻한 겨울과 시원한 여름철을 보낼 수 있기에 해변 휴양지로 각광받고 있다고 한다. 또한 동북지역의 대외 무역창구로서 기계제조, 조선, 석유화학, 원자력발전, IT 등 산업을 기본으로 발전하고 있고 인구는 130만 명이며 현재 중국에서 세 번째로 큰 항구도시의 거대한 면모에 모두는 놀라워했다.
첫 방문지는 역사의 아픔을 간직한 안중근(도마) 의사의 유적지인 대련시 여순에 위치한 관동법원 및 감옥을 방문, 이곳 여순은 청일전쟁 후 일본 관동군이 중국을 효율적으로 지배하기위해 행정기구와 법원을 설치한 관계로 일본군의 잔재가 많이 남아 있고 특히 여순 관동법원 및 감옥은 안중근 의사, 신채호, 이회영 선생 등 독립투사들이 고문과 사형이 집행되었던 악명 높은 곳이다. 안중근의사는 1909년 10월 26일 중국의 하얼빈 역에서 조선 초대통감을 지낸 이토 히로부미(이등박문)를 사살하였고 저격의 현장에서 코레아 우라! 를 세번 외치고 즉시 체포된 후 11월 3일 여순 감옥으로 압송 되었으며, 일본의 "국사범"으로 분류되어 감방에 단독으로 구금되었고, 이곳 관동법원에서 사형 판결을 받은 안중근 의사는 법원에서 약 1km 떨어진 여순감옥 교수형장에서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에 순국하였으며 그의 나이 32세였다. 안 의사는 마지막 유언으로 "나의 거사는 동양 평화를 위해 결행한 것이므로 임형(사형 집행) 관리들도 앞으로 한일 간에 화합하여 동양평화에 이바지하기 바란다."고 말했다. 왜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를 쏴야만 했을까? 안중근은 일본이 동아시아 평화를 해치고 결국 동아시아의 몰락을 일으킬 주범이라고 생각했다. 일본이 동아시아 다른 나라들과 손잡고 서세동점에 맞서야 할 때 우리민족을 핍박하여 자주권을 박탈하고 국권을 빼앗은 것은 동북아 평화를 위협하는 전범행위라고 본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은 이토 히로부미와 같이 오랫동안 조선정벌과 흡수통합을 준비해온 몇몇 고위관료들의 머릿속에서 구상 실현된 것이었고 그 그룹의 우두머리가 바로 이토 히로부미였기 때문에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가 만주군을 둘러보기 위해 하얼빈에 가게 된다는 소식을 듣고 자신이 목숨을 바칠 기회가 왔음을 알아차리고 그 운명의 흐름에 자신을 내맡긴다. 안의사의 항일계몽운동과 한국 침략의 원흉을 저격함으로 옥중투쟁은 오로지 동양평화를 위한 행동이었음에 숙연한 마음이 든다. 그분에 대한 재판정 및 자료들이 많이 전시되어 있었고 역사 교육과 가치관 교육의 중요한 현장이 되고 있고 이곳은 중국인들이 아니라 바로 우리 민족에게 매우 중요한 공간이며 자신을 대한사람, 한민족이라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꼭 한번 들러 안중근의사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할 곳이고, 당시 여순 감옥에는 연간 수감자수는 2만여 명이 넘었다고 하는데 일본 압제에 시달린 애국충절의 투사들이 얼마나 많이 고문을 받으며 죽어갔을까...안타까운 마음으로 말을 잃은 채 버스에 오른다.
얼마쯤 가서 높다란 도시 속에 자그마한 대련성당에 들어서니 반갑게 맞이하시는 노틀담회 수녀님(사복이라 생소함)의 안내로 이곳저곳을 볼 수 있었다. 주임신부님께서 사목하시던 곳이라 왠지 모를 친근감으로 수녀님께 이것저것 질문도 많고 지하 제단 앞에서 첫 단체사진을 찍고 대련성당 주임신부님, 수녀님과 함께 중국식으로 푸짐하게 차려진 저녁식사를 했다. 그 후 일행을 태운 버스는 대련시내를 지나 외곽에 위치한 큰 규모로 지어진 대련역에서 고속열차를 타고 3시간여 달려 장춘 역에 도착하여 이국땅에서 첫 밤을 보낸다.
8/20 둘째 날, 장춘은 길림성뿐만 아니라 동북3성의 교통요충지이면서 상업의 중심 역할을 하며 일본의 위성국가 만주국의 수도였다고 하는데, 유명한 대학과 연구소가 많은 산업도시, 푸른 녹지로 잘 정비된 도시였다. 장춘에서 소팔가자까지는 1시간30분 거리에 있으며 소팔가자라는 이름은 여덟 가구가 모여서 한 마을을 이루었다는 데서 유래가 되었다고 한다. 일찍이 교우 촌이 형성되었고 소팔가자 초대 교구장 베롤주교는 많은 토지를 매입하여 성당을 짓고 포교의 중요한 거점으로 형성되게 하였으므로, 선교사들의 조선 입국의 주요한 거점이 되었다. 소팔가자 성당은 김대건 신부님이 1년여 동안 머물렀던 곳이다. 성당 제대와 연결이 되어있는 성당 뒤에는 성모동굴이 있고 맞은편에는 김대건 신부님의 동상을 중심으로 원을 이루고 있는 자그마한 뒷마당이다. 뒤편 마당에는 김대건 신부님과 최양업 신부님께서 머물렀던 장소에 지금은 교육관이 들어서 있고 조선 선교사 페레올주교, 메스트로신부, 최양업과 김대건이 이곳에 거주하였고 페레올주교로부터 삭발례와 함께 부제품을 받은 곳으로 이국땅에서의 성지이기도 하다. 이 곳 중국에서는 김대건 신부님은 많이들 알고 있지만 최양업 신부님은 알지 못했다고 한다. 김대건 신부님은 성격이 활달하시어서 이 곳 소팔가자에 일 년을 조금 넘게 계셨는데 사람들과 많이 사귀시었으며 당시에 이 소팔가자 근처에 사는 장씨 가문과 깊이 사귀었고 이 처럼 사귀던 그 가문에서 계속 김대건 신부님의 이야기가 전해져서 왔다는 것이다. 그런데 최양업 신부님은 거의 육 년을 계시었으면서도 알려지지 않았다고 한다. 성당에 들어서니 성당 내부며 낡은 장의자 등 관리하지 않은 듯 어수선한 가운데 우리는 미사를 봉헌하였다. 성당 옆쪽에 있는 문 없는 화장실은 생전 처음 보는 형태로 이럴 수가.. 중국당국에서 관리하는 애국교회의 소관으로 운영되어지는 성당이고 소팔가자 주민은 모두 중국인이지만 90%가 가톨릭 신자라고 한다. 성당을 나서서 조금 버스로 이동하니 김대건로(金大建路)가 비포장도로로 신작로처럼 나있었는데 중국정부가 인정한 공식도로의 명칭이라고 한다.
길림 주교좌성당은 웅장한 고딕풍의 아름다운 성당으로 앞에는 송하강이 흐르고 주변과 성당내부가 말끔하게 정비되어 있었고 공산화되기 전에는 길림시의 상징적 명소였다고 한다. 성당 옆 오솔길을 따라 30미터 정도 올라가면 성당과 성모상을 모신 동굴이 있는데 이 聖母동굴은 1920년에 처음 만들어 졌으며, 홀 안에 1.8미터의 성모상이 서 있고, 성모 발아래의 석판은 프랑스로부터 실어온 것이라 한다. 동굴 내부의 홀은 큰 덩어리 화강암으로 되어 있는 천연 동굴이며, 홀은 그다지 깊지 않고 면적이 대략 15평방미터 정도였다. 사회국가인 중국에서의 종교 상황을 잘 볼 수 있는 것 중에 사제들의 요람인 주교좌성당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는 길림 신학교방문하였다.
길림 신학교는 우리 한국의 신학교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조그마한 신학원 규모였고 오랫동안 손질 하지 않아 허술하고 낡은 상태의 내부 곳곳을 보면서 잠시 혼돈이 온다. 한국의 신학교를 떠올리며 대형화되고 예술적인 멋스런 현대식 교정에서 하느님을 익히는 신학과 우리네 60년대쯤의 학교시설 같이 보여 지는 열악한 환경에서의 신학의 차이가 있을까 하는 엉뚱한 생각이 상념이 되어 괜스레 우울해 지며 절로 한숨이 나온다. 중국의 종교는 전시효과적인 이름뿐인 성당, 신학교.. 그 자체로 종교 자유가 없는 폐쇄된 국가임을 느낄 수 있었고 ‘중국의 복음화’는 현실적으로 막연하게 다가온다. 신학생 수도 총합하여 30명 정도라고 한다. 사제서품도 매년 있는 것이 아니고, 이나마도 중국 전체에 12개 정도 있다고 하는데 다른 곳은 어떨까? 궁금해진다. 문득 예수님께서 성 프란치스코에게 ‘교회를 재건하라’시는 지상 사명의 소리를, 몇 달 전에 새로 선출되신 라틴아메리카 출신 교황님의 첫 말씀이 이 사명을 재천명하신 뜻이 무엇일까 ‘새롭게 교회를 쇄신, 확장하라’시는 이 말씀이 거대한 중국의 15억 인구의 복음화를 간절히 바라시는 주님의 말씀이었을 거라는 생각이 꼬리를 문다. ‘중국의 복음화’는 지금 눈으로, 귀로 보고 듣는 모든 이에게 내리시는 지상 과제일 것이다 하는 생각에 머물며 그 과제를 풀어야 할 북방선교는 한국교회라는 소리들을 간간히 들어 왔지만 과연 우리는 영적 힘이 있는가.. 현세가 주는 안일함에 이미 젖어버린 무디어진 감각, 물질만능의 가치관이 교회에 만연되어 있는데.. 많은 상념들이 스쳐 지나간다. 신학교 방문 후 신학교 바로 아래에 자리 잡고 있는 ‘소 루르드 성모 동굴’은 루르드 성모 동굴을 모방하여 만든 성모 동굴인데, 실제 프랑스의 루르드 성모 동굴을 쏙 빼닮은 이 성모 동굴의 조성 역사를 들어보면 신기한 하느님의 섭리가 있었음을 느낄 수 있다. 이곳에 거주하는 어느 신부님이(아마 신학교 교수신부) 계속 꿈을 꾸었는데, 성모님께서 영상을 보여주시며 이 모양대로 여기에 성모 동굴을 조성하라고 하시며, 물이 솟는 샘을 보여주시더라는 것이었다. 이 신부님은 여러 검토를 한 후, 성모님의 계시임을 확신하고, 이곳에 신자들의 도움을 받아 성모 동굴을 조성하였는데, 다 조성하고 보니, 이미 루르드 성지를 다녀온 신자가 말하기를 ‘루르드 성모 동굴’과 똑 같은 모양이다 라고 말하였다는 것이다. 아마도 루르드 까지 갈 수없는 중국 신자들을 위하여 성모님께서 똑같은 샘과 성모 경당을 만들어주신 것이 아닌가 생각되었다. 이번 순례의 목적인 중국교회 복음화의 실현을 위하여 작은기도를 드린다.
장춘에서 이도백하까지의 5시간의 긴 이동에서 끝없이 펼쳐지는 옥수수밭, 감자밭 등은 작은 한반도에서 살아온 거리 개념을 뛰어 넘고 있었다. 누군가가 가이드에게 질문을 한다. 사람의 손으로 씨앗을 뿌리냐고.. 사람이 손으로 씨를 뿌리면 봄부터 가을까지 씨만 뿌려야 한다고.. 가이드의 답변이 재밌다. 백두산을 가기위해 이도백하로 가는 길은 흡사 우리나라 국도 여행을 하는듯한 나지막한 야산들의 생김새와 간간히 우리말의 표지판이 착각을 일으킬 만큼 참 많이 닮아 있음에 편안하고 친근감이 드는 자연이 살아있는 목가적인 농촌 풍경이었다. 또한 장백산(백두산) 아래의 이도백하 마을은 여행객들을 위한 식당, 숙소가 많은 곳으로 음식 종류와 맛은 영락없는 우리네 손맛이었다. 상추쌈과 재래식 고추장, 된장, 고소한 콩나물 맛이 입맛에 댕긴다고 너무 많이 먹어버렸다.
8/21 수 셋째날, 오늘은 말로만 듣고, 사진에서만 보았던 백두산 가는 날, 이른 새벽 5시30분 호텔 회의실을 빌려 미사를 하기위해 모였고 비오 축일이라 주임신부님을 위한 생미사로 집전, 봉헌되어 졌다. 인솔자, 가이드가 복도를 지키며 성가는 하지 말고 조용히 하라고 당부를 하여 그렇게 조심스레 미사를 드리는데 마치 한국교회 초기 선조들이 포졸들의 눈을 피해 드리는 공포와 기쁨이 교차되는 미사를 드리며 그들의 마음을 아주 조금 헤아려 보는 시간이기도 했다. 민족의 영산인 백두산은 중국 동부의 최고의 산맥인데 중국 청나라 때 ‘장백산’으로 불리워진 2744M의 사화산(250년 전에 활동을 멈춤)으로 전체 면적에서 1/3은 중국 령으로 2/3는 북한령이라는 안타까운 사연을 들었다. 북한의 김일성이 6.25남침 때 중국이 인민군을 파견해준 댓가로 백두산 1/3을 떼어 주었다는 것이다. 장백산(백두산)을 오르며 광활하고 웅장함은 짧은 언어로 표현하기 어려운 장관이었으며 산정에는 거대한 화산호인 천지가 있는데 이 곳 역시도 5/3은 북한, 5/2는 중국 소유란다. 변화무쌍한 날씨여서 천지를 볼 수 있는 경우는 3대가 덕을 쌓아야한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만큼 맑은 천지를 보기가 어렵다고 해서 전날부터 기도를 하였다. 이른 아침인데도 각양각색의 등산복차림의 단체 관광객들로 붐비었다. 이곳은 일반차량의 출입이 제한되며 전용버스인 셔틀버스만 운행되는데 운행되는 버스의 수만 100대가 넘는다니 이곳을 찾는 관광객들의 수를 짐작 할만하다. 서파에서 셔틀버스가 출발하고 점차 고도가 높아지며 굽이굽이 급회전을 하며 몸이 이리저리 쏠리면서 무서워 괴성을 지르다가 차창밖에 펼쳐지는 백두산 산등성의 아름다움에 탄성이 절로 난다. 정상에 오르니 천지개벽을 하듯 세찬 바람이 구름들을 거둬가며 새로운 맑은 하늘과 "백두산 천지"의 남성다운 힘찬 모습으로 눈앞에 장관으로 펼쳐졌다. ‘신비함’ ‘황홀함’ 그 자체였다. 가톨릭성가 2장 ‘주 하느님, 지으신 모든 세계.. 내 영혼 주를 찬양하리니...’ 이곳에서 성가를 부르면서 하느님을 맘껏 찬미하고 싶었다. 세계에서 가장 깊은 화구인 천지는 백두산 최고의 자랑이다. 천지는 원형을 띠고 있으며 전체 면적은 10㎢, 총둘레 14.4Km, 최대수심 384m, 평균수심 204m에 이르는 거대호수 천지에 담긴 물의 비밀은 지하에서 끊임없이 솟아나는 용천수란다. 서파 주차장에서 전용차량을 이용하여 구불구불한 도로를 따라 천천히 하산하면서 보니 백두산의 수목한계선은 해발 2,000m....그 이상이면 나무 한그루 찾을 수 없고 넓은 초원지대가 펼쳐진다. 주변에 야생화 단지가 자연적으로 만들어져 있는데 8월 중하순 경에 이곳 백두산에서만 볼 수 있는 다양한 작은 꽃들을 감상 할 수 있었다. 우리 일행이 정상에서 탄성을 지르며 맑은 천지를 확연히 보고 내려오는데 검은 먹구름과 빗방울이 간간히 내리고 있었음에 구름을 거두어 주신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렸다.
이어서 장백폭포를 보기 위해 버스에 올랐다. 천지에서 내려오는 물이 이룬 장백 폭포의 높이는 68M의 웅장한 폭포의 힘찬 물줄기의 영향은 인근의 자연생태계인 식물, 동물, 조류 등 헤아릴 수 없는 3-4천여의 다양한 종들이 풍성하게 분포되어 있는 근원이 되고 독특한 기후로 인해 자연계의 보고(寶庫)이기도 하다고 한다. 조선족 자치주의 주도인 연길로 이어지는 길은 중국과 북한의 접경지역인 ‘도문(圖們)’으로 이동 중 북한의 함경북도와 두만강을 경계로 국경을 접하고 있고 오른쪽 두만 강변에 철조망이 세워져있고 건너편 강폭이 좁은 두만강이 유유히 흐르며, 그 너머에 나지막한 북녘 땅이 지척에 보인다. 분단된 조국의 슬픔을 이국땅에서 느끼게 되어 창가로 사진이라도 찍기 위해 샷터를 연일 터트린다. 두만강(豆滿江) 칠백리...북한과 중국의 접경지역을 흐르는 강으로 백두산에서 발원하여 동해로 흘러가는 강으로 길이는 610Km, 한반도 5대강 중 하나이기도 하다.
중국 도문시 강변공원에 도착하였다. 두만강 접경지역에 조성된 공원으로 북한과 중국의 경계를 나타내는 ‘중국도문변경(中國圖們邊境)’이 세워져 있으며, 남북 분단이 아니었으면 곧장 갈 수 있는 백두산을 타국인 중국으로 에둘러 멀리 돌아서 가야 볼 수 있는 지금의 정치적인 분단 현실에 가슴이 먹먹해 짐을 느낀다. 북한의 어려운 현실을 단적으로 볼 수 있는 모습이 있었는데 북한과 중국을 잇는 ‘두만강 철교’에 페인트가 칠해져 있는데 중국 쪽엔 붉은색 페인트, 북한 쪽엔 파란색 페인트가 칠해져 있어 그 색으로 경계선이 된다고 한다. 페인트칠이 중국 쪽은 말끔하게 칠해져 있는데 북한쪽은 부식되어 있음이 반반으로 극명하게 대조되어 북한의 경제가 얼마나 어려운지 보는 이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분계선 강 건너 바로 북한 땅을 바라보며 휴게소에서 북한 물품이라도 한 점 사고 싶었으나 김일성 김정일 부자의 사진만 커다랗게 찍혀있는 북한돈만 여기저기 판매되어 있었음이 안타까웠다.
8/22 목 넷째 날, 연길시 에서 항일독립의 요람인 용정시로 이동하면서 우리의 가곡 ‘선구자’로 널리 알려진 일송정(一松亭)은 푸른 소나무인줄 알았는데 왠 정자를 가리키면서 일송정이라고 설명한다. 일송정은 정자 모양의 소나무를 뜻하는데, 일제하에 애국지사들이 밤마다 이 소나무 밑에서 비밀리에 만나 독립운동을 모의했다고 한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된 일제는 이 소나무에 구멍을 뚫고 약품을 넣어 고사 시켰다고 한다. 그 후 1991년부터 여러 차례 용정시가 한국의 도움을 받아 소나무를 다시 심고 정자를 신축하였다고 한다. 민족시인 ‘윤동주’가 중학교를 다녔다는 용정 중앙 소학교를 향했다. ‘선구자’의 노래가사가 떠오르는 두만강의 지류인 해란강이 흐르고 있어 주변의 비옥한 농경지에서 과일과 곡식이 풍성하게 산출되고 있고 박경리의 대하소설인 토지(土地)에 나오는 배경의 한 부분이기도 하다.
3.13 만세운동의 현장인 용정 중앙 소학교(대성중학교)는 일본 통치시 항일의사들을 배양한 곳으로 교정에 우뚝 서 있는 윤동주시인의 시비에는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새겨져 있었고 구관 건물 오른쪽에 이상설선생의 역사전람관이 세워져 있다. 보재 이상설(李相卨,1870~1917) 선생은 고종의 밀지(密紙)를 가지고 만국평화회의 헤이그 밀사로 이준, 이위종과 함께 했던 독립 운동가이다. 건물 1층에 윤동주 시인이 공부했던 교실을 그 시대 그대로 재현해 놓았고, 용정 중앙 소학교의 출신들인 윤동주, 정일권, 나운규, 문익환 등 그 시대에 빛이 된 위인들과(김일성도 이학교 출신임) 유물들인 교실, 소품 등 옛 것이 그대로 잘 보존되어 있었다. 이처럼 용정은 한국의 항일역사와 함께 하였기 때문에 곳곳마다 한국 선조의 숨결이 배어있는 유서 깊은 곳이다. 우리 조상들이 이 고장을 찾아와 용두레 우물을 파고 벼농사를 짓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후반기부터였다. 가난한 농민과 애국지사들이 이곳에 모여 새 학당을 꾸리고 민족계몽과 반일 기치를 높이 들고 일어나게 되자 용정은 일약 독립운동의 중심으로 부상하였다. 1920년 10월에 있은 청산리전투도 바로 이곳 해란강 상류의 백운평 마을에서 벌어졌다고 하며 이곳을 배경으로 우리의 가곡 ‘선구자’가 만들어졌다고 한다.
윤동주 시인의 대표적 ‘서시(序詩)’ 시비(詩碑)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1941. 11. 20. |
‘눈물 젖은 두만강’ 김용호 작사, 이시우 작곡 1. 두만강 푸른물에 노젖는 뱃사공 흘러간 그 옛날은 내님을 싣고 떠나간 그 배는 어디로 갔소 그리운 내님이여 그리운 내님이여 언제나 오려나. 2. 강물도 달밤이면 목메어 우는데 님 잃은 이 사람도 한숨을 지니 그리운 내님이여 그리운 내님이여 언제나 오려나. |
‘선구자(先驅者)’ 윤해영 작사, 조두남 작곡 1. 일송정 푸른 솔은 늙어 늙어 갔어도, 한줄기 해란 강은 천년 두고 흐른다 |
또 다른 조선족 자치주에 있는 훈춘은 과거 당당한 자주 국가로서 찬란한 문화의 꽃을 피웠던 발해의 수도였고 옛 훈춘성당의 활력은 신자가 1천이백여명, 공소 22곳으로 비약적인 성장세를 보였던 곳이다. 1945년 5월 사제, 수도자들이 중국 공산당에 체포되면서 침묵의 교회가 되고 마는 슬픈 역사를 갖고 있다가 문화혁명 후에 작은 규모로 신축되어 조선인 주민들이 주를 이루어 2백여 명의 신자가 있는 곳이고 우리 일행이 방문했을 때 샬트르 수녀님 4분이 안내를 해 주었고 그곳에서 미사를 드렸다. 그분들이 한국교회로부터 지원을 받아 운영하는 무의탁 노인양노원을 방문하며 수녀님들의 노고를 느낄 수 있었다. 두 분의 수녀님의 안내로 우리나라 지도상 최북단 러시아와 접경을 이룬 아주 오래된 교우촌인 경신 공소를 찾았다. 정말 아름다운 모습으로 조경도 잘 되어있고, 아름다운 성모동산까지 꾸며져 있었다. 이곳은 길림교구의 신부님들께서 피정을 하기에 좋도록 계획하셨다고 했다. 신자들이 많이 모여 살던 곳이고 오래전부터 성 김대건 신부님을 주보로 모시던 곳인데 버려졌다가 훈춘성당의 노력으로 신자들이 직접 재건축하여 지어진 자그마한 성당이다. 뻑뻑한 철문을 여니 곰팡이 냄새가 코를 찌르고 성 김대건 신부님 초상화와 성상이 우리를 맞이해 준다. 이곳 신자들의 활동이 없고 인적이 드문 곳임을 알 수 있었고 일주일에 한 번씩 신부님께서 미사를 오시나 그 한분의 할머니와 신부님과 미사를 드린다고 한다.
8/23 금 다섯째날, 아침 6시 연길공항으로 이동하여 북경행 비행기를 2시간에 걸쳐 중국 내륙지역을 가로질러 중국의 수도 북경에 도착했다, 북경은 3000년이 넘는 역사를 지닌 도시로 고대 전국(戰國) 시대에 잠시 연(燕)나라의 수도였다가, 원나라 때 몽고족이 중국을 통일한 후에 북경을 수도로 정한 이후 거의 1000년 동안 수도로서의 입지를 지키고 있다. 도시 전체가 박물관이라 일컬어지는 3천년 역사의 고도답게 세계적으로 유명한 볼거리들이 무궁무진하여 관광 수입도 엄청나다고 한다. 정치, 행정, 문화, 산업의 중심지인 북경 시내로 접어드니 평소 우리가 알던 중국이 아닌 듯 현대적인 천마루 같은 건물들과 잘 정비되고 발달된 거대한 도시로 갖춰진 크기는 우리나라 강원도 크기만 하고 인구는 천만 명이라는데 또 놀란다. 북경시민은 아무나 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우수한 명문대학 출신들, 과학자들, 거부들의 기부도 시민권을 가질 수 있으며 인위적으로 도시를 만들고 통제하는 대표적인 사회주의적인 체제로 통치하고 있는 무서운 나라라는 생각이 들며.. 바로 옆에 조그만 나라 ‘대한민국’이 있다라는 생각이 왠지 자꾸 상념으로 맴돈다.
오늘 북경의 기온은 33도, 햇볕은 무척 뜨거우나 그늘로 들어가면 시원한 습기가 없는 건조함이 그래도 무더위를 견딜 수 있는 날씨였는데 무더위에도 만리장성을 보기 위해 인파들로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다. 인류가 지금까지 이룩한 업적 가운데서 사람의 손으로 만든 가장 위대한 토목공사라는 칭송을 들을 만한 것은 중국의 만리장성이라고 한다. 만리장성 역사를 살펴보자면, 황해에서 서쪽으로 감숙성까지 장장 2700km나 뻗어 나간 이 성은 확실히 장성이라 부를 만하다. 진시황은 기원전 214년, 취약한 북방의 국경을 지키기 위해 만리장성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북방의 변경은 몽골의 기마족 흉노의 침공을 늘 받고 있었다. 몇 만 명의 죄수들이 교대로 노예처럼 공사에 동원되었으며 전설에 의하면 만리장성이 완성될 때까지 100만 명 이상이 죽었다고 한다. 방벽의 구축은 결코 새로운 구상이 아니었다. 몇 세기 전에 왕공제후들은 그들의 도시를 방비하기 위해 성벽을 둘러쳤다. 황제가 한 일은 국경지대의 옛 방벽을 연결하여 자기의 제국을 둘러싸는 하나의 방위선으로 완성하는 일이었다. 시황제는 공사가 시작된 지 불과 4년 후에 죽었지만 그의 후계자들이 공사를 계속했다. 만리장성은 수리도 되고 연장도 되었으며 어떤 곳은 높이가 9m나 되기도 하고 200m마다 높이 12m의 탑이 세워졌으며 성벽의 두께가 10m나 되었다. 2000년 이상이나 지난 지금도 북경 북쪽의 산을 누비며 구불구불 뻗어나간 그 장관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위압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유네스코에 등록된 세계적인 문화유산 관광지로 끊임없이 찾는 관광객들로 붐비고 있었다.
천주교가 중국에 전래된 시기는 원나라 시기이다. 당시 기록에 의하면 1294년 두 명의 외국인 선교사가 들어와 북경시 먼터우고우(门头沟) 호우상위(后桑峪)에서 선교를 시작했다. 그들이 왜 이렇게 북경 시내에서 먼 지역에서 선교를 시작했는지는 지금도 불가사의 한 일이다. 1334년 이곳에서 몇 칸의 민간주택에 북경 최초의 성당을 건립하게 된다. 이렇게 북경에 복음이 들어 온 것은 오래 되었지만 한동안 선교의 흔적이 사라지고 다시 복음의 전래가 시작된 것은 명말인 1582년 이탈리아의 선교사 마테오 리치(Matteo Ricci, 중국명 利玛窦)가 중국에 와서 선교를 시작 하였는데 이어 1622년 선교사 아담 샬 (Johann Adam Schall von Bell) 이 북경으로 오고 나서 천주교당이 본격적으로 북경성내에 건립되기 시작하였다. 현재에 이르러 북경시내에 東堂,西堂,南堂,北堂,东交民巷堂,南岗子堂,平房堂,东管头堂 총 8개의 성당이 있고 교외에 9개의 성당이 있어 북경 내에는 총 17개의 성당이 존재한다. 원대에 수도를 잡은 이래 수백여 년 그동안 천주교, 기독교, 불교, 도교, 이슬람교 등 각기 다른 지역 다른 종교들도 북경에 들어와 발전하였는데 근대에 와서 그 모습들을 거의 상실하긴 하였으나 북경에 오래산 노인들은 이전에 길에서 승려들 목사나 수녀 신부들의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었다고 한다. 북경 내 성당의 건축 양식은 유럽의 성당 건축양식과 거의 비슷하다. 주로 로마,고딕양식이 위주가 되고 있다. 다만 서양의 성당 건축 양식이 주로 동쪽을 향하고 있는 반면에 북경의 성당들은 중국 전통적인 풍수사상에 의해 남쪽을 향하고 있다. 여기에 성당 외부에 별도로 마련된 성모산 혹은 성모정이 있는데 성모산에서 산이란 중국의 전통 정원양식의 인공산을 말한다. 성모상을 이러한 작은 인공산내의 인공동굴에 안치하였고 성모정은 중국식 전각 안에 성모상을 모셔 그야말로 독특한 중국전통과 천주교양식의 만남을 이루게 된다. 북경교구는 한국 교회 창설 발전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북경을 내왕한 조선 사신들이 북경의 선교사들과 접촉하여 그들이 저술한 서학서를 갖고 들어와 결국 조선에 자생적인 교회가 탄생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던 것이다.
북경에는 4곳의 성당 중 본래의 형태가 남아있는 유일한 북당성당北堂(西什庫堂)이다. 북당은 전형적인 고딕양식의 건축물로 4개의 첨탑이 있다. 성당의 좌우에는 두개의 황색기와로 된 전각이 있는데 전각 내에는 건륭황제 친필의 비석이 있다. 1985년 대대적인 수리를 통해 그 모습을 일신하여 현재는 북경 내 가장 크고 아름다운 성당의 원형이다. 중국 공산화 때엔 오랫동안 학교와 창고로 이용되었기에 모습이 헐어 있을 수밖에 없었지만 그나마 있음에 감사하였다. 우리 한국교회 창설의 직접적 계기가 된 이승훈 성조가 그라몽 신부님께 베드로라는 이름으로 영세를 받았던 성당이라 우리와는 아주 친밀한 느낌으로 발길을 돌리기가 아쉬워 자꾸 이곳저곳을 사진으로 찍어댔다.
다음 장소는 북경 중심지에 위치한 4백년 된 고딕풍의 동당성당 東堂(王府井大街)에서 미사를 봉헌하였다. 왕푸징대가(王府井大街)에 있는 동당은 1655년 청의 순치제 때 두 명의 외국인 선교사의 주택지로 제공된 토지에 선교사들이 건립한 작은 성당이 원형이다. 이 성당은 지속된 지진과 전란에 의해 파괴되었다가 1904년 중건되었다가 1980년경 다시 중수되어 문을 열게 되었다. 특이한 것은 동당의 지리적인 위치 때문에 건물이 서쪽 방향을 향하고 있다는 점이다. 건축양식은 로마식이며 성당내부는 바티칸공의회 이전의 제대를 그대로 보존하고 있어서 명동성당과 비슷한 건축양식과 모양을 갖추었으나 관리를 하지 않아 어수선 하고 먼지 쌓인 조화의 제대 꽃은 차라리 치워버렸으면 하는 생각을 하며 왠지 성당에서 느껴지는 거룩한 기운을 느낄 수가 없었다. 미사 드리는 중에 문전에서 구경하는 무리들이 많이 있었고 중국인인지는 모르나 몇 명은 우리와 함께 전례에 참석하여 성체를 영하는 모습도 보인다. 다음 일정은 북경에 와서 즉석 제안한 것이 있었는데 중국의 대형 극장에서 공연하는 중국 정통 고전 뮤지컬을 모두의 동의를 얻어 관람을 하였다. 뮤지컬명은 ‘금명왕조’인데 북경 올림픽 총감독이자 영화 사탕 수수밭으로 국내에 잘 알려진 명감독 장예모‘의 작품이다. 중국다운 화려한 안무, 웅장하고 다채로운 대형화된 무대가 빠르게 전개되며 출연진도 아주 많았고 뮤지컬과 서커스가 혼합된 고전극으로 마지막 무렵에는 무대에 4백 톤의 물을 이용해 대홍수를 입체감 있게 표현한 장면은 관람객들을 충분히 압도하는 연출은 장관이었다. 모처럼 초대형 뮤지컬을 감동 있게 보았다.
저녁식사는 북한이 외화벌이로 운영한다는 평양 옥류관으로 안내되었다. 북경에 가면 특히 한국 사람들 꼭 한번은 들린다는 음식점으로 평양냉면을 먹어보기 위해서이고 코스 요리로 중국식 원형탁자에 놓여진 음식은 우리의 음식과 입맛에 맞춰진 흡사한 형태였다. 놀라운 것은 음식 써빙하는 젊고 고운 아가씨들의 모습인데 한결 같이 곱게 뒤로 빗어 넘긴 똑같은 생머리 길이와 보라색원피스와 높은 하이힐을 신고 음식을 나르는데 표정이 참 예쁘고 고와서 한참을 바라보았다. 공연 중 꽃다발을 선사할 수 있는데 우리 돈 1만원을 지불하여 꽃을 구입, 마음에 든 아가씨에게 선물할 수도 있단다. 가이드의 설명은 옥류관에 파견된 북한 여성들은 북한의 고위급 간부 자손들만 뽑혀서 이곳을 올수가 있다고 하고 또 실수를 하게 되면 곧바로 소환되므로 늘 노심초사 실수를 하지 않으려고 고생한다고 들었다. 빠르면 3개월 안에 잘하면 3년 정도는 북경에서 지낼 수 있지만 다시 선발되어 나오기는 하늘의 별따기라고 하는 설명을 들으니 다양한 춤과 간혹 북한방송을 통해 본 꾀꼬리 같은 음색의 노래와 여러 악기를 다루는 솜씨는 일품인데 왠지 측은하고 즐겁지만은 않은 심정으로 관람을 하고 음식을 먹고 아쉬운 맘으로 숙소로 돌아왔다. 마지막 날에 일행은 함께 모여 그간의 여러 가지 중국 교회 복음화를 위한 성지순례의 현장을 보고, 느낀 점 등을 나누며 순례 후의 소회를 나누는 시간을 갖고 잠자리에 들었다.
8/24 토 여섯째날, 첫 순례지는 책란에 있는 한국 천주교회의 기원에 잊을 수 없는<천주실의>의 저자로 알려진 마태오 리치(M.Ricci)신부의 묘소비 참배였다. 리치는 1552년 이탈리아 마체라타에서 태어났다. 1571년 로마 예수회에 입회하면서 성직자의 길을 걸었다.
이 시기 그는 신학교에서 철학과 신학은 물론 수학·천문학·지도제작법 등도 배웠다. 본격적
인 아시아 선교는 1583년 중국 광둥 지역의 자오칭에서 시작했다. 이곳에서 머문 6년간 리치는 동료 선교사와 함께 포르투갈어·중국어 사전을 편찬했고, 1584년 미주와 유럽의 지명을 최초로 중국어로 표기한 세계지도를 제작했다. ‘불가능한 검은 튤립’이라고 불리는 이 지도 원본은 현존하지 않지만, 1602년 인쇄된 지도가 미국 의회도서관에서 공개됐다고 한다. 리치는 이 지도에 “먼 옛날, 그 누구도 북·남아메리카나 마젤라니카(초기 지도 제작자들이 호주·남극을 부르던 명칭)와 같은 곳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100여 년 전 유럽인들이 배를 타고 이 대륙들을 발견했다고 적어 넣었다. 리치 신부는 복음 전파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핵심인 선교 국가의 참된 이해와 존경, 그들의 풍습과 문화에 대한 올바른 판단을 지녔던 분이셨기에 중국의 공자 숭배와 조상제사 문제, 중국의 수준 높은 종교 심성에 대하여 깊이 연구하셨고 이해했다고 한다. 리치가 전해주는 서양의 학식과 문물은 중국 황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스스로를 낮추는 겸허한 성품도 리치가 중국에 장기 체류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1598년 베이징으로 거처를 옮긴 리치는 가톨릭을 소개하는 서적을 잇달아 집필했는데, 조선 천주교 전파에 큰 영향을 미친 교리서 <천주실의>도 이 시절(1603년) 탄생했다. 이 책은 동·서 사상교류사에 매우 중요한 문헌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 같은 선교에 큰 성공을 거두고 과로로 병약해진 리치는 1610년 5월11일 베이징에서 선종할 당시 약 2천 명의 개종자가 있었을 정도였다고 한다. 명나라 신종 역시 신부의 죽음을 국장으 치룰 것을 명령하였고, 중국인들은 “성인, 성인, 성인이시여!”라고 그분의 죽음을 애통해 하였다고 한다. 중국인들은 박학다식하고 다정다감했던 유럽인 선교사의 죽음을 애도했고 황실은 정성을 다해 그의 시신을 안장토록 했다. 그의 묘소는 중국 공산당 베이징시위원회 당교 구내에 있어 개방되지 않았고 철문 밖에서 주모송으로 참배기도라도 드릴 수 있었음에 감사하는 마음이 들었다.
북경 시내에서 가장 오래된 천주교성당은 남당(南堂 宣武門堂)이다. 일반적으로 선무문당이라고 불리는 곳이다. 초기에는 마테오 리치에 의해서 건립된 작은 규모의 성당이었던 것이 1650년 아담 샬 (Johann Adam Schall von Bell) 신부가 넓게 확장해서 북경성내 최대의 성당이 되었다. 순치황제 시절 황제는 24차례에 걸쳐 아담 샬(Johann Adam Schall von Bell)신부와 만나 흉금 없는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였다. 1775년 남당은 화재로 전소되고 후에 건륭황제 때 은 만량을 들여 중수하게 된다. 1900년 다시 화를 입게 되어 1904년 재차 중수하였다. 성당은 3개의 구역으로 나뉜 구조인데 중식으로 된 주입구내의 첫 번째 구역은 성모산이 위주로 되어 있고 동쪽 구역은 성당, 서쪽구역은 주거구역이었다. 이외에도 내부에 천문대 도서관등이 있었다. 성당의 양식은 남향의 바로크식이며 실내는 로마식을 채용하였다.
이어서 서당성당西堂(西直门天主堂)은 시즈먼대가 남측(西直门内大街南侧)에 있는데 성내 4개 주요 성당 중에 가장 늦게 세워졌다. 1723년 세워져 1912년 중수하였다. 성당 주변에는 커다란 공장들이 늘어서 외부에서 성당이 보이지 않았지만 실내의 독특한 양식들은 미적인 양식이 뛰어나다. 그날, 대성당에서는 혼배미사가 있어서 우리 일행은 중국인수녀님의 안내로 대성당 옆에 작은 건물 안에 있는 20여명 정도 수용할 수 있는 규모로 중국에서 미사 드렸던 어느 성당보다 아늑하게 가장 잘 꾸며져 있는 성당에서 이번 성지순례의 마지막 미사가 봉헌되었다. 정 신부님께서 강론 서두에 이번 순례에서 처음부터 지금까지 수많은 장소에서 느껴졌던 것을 눈을 감고 되짚으며 묵상하는 시간을 주셨고 그렇게 우리의 ‘중국교회 복음화를 위한 성지순례’는 마무리해 가고 있었다. 이후부터는 북경 관광으로 일정이 잡혀 있다.
천단은 북경 외성의 남쪽 끝에 있다. 면적은 2.73㎢이고 중국 최대의 고대 제사 건축물로서 현재 중국의 국가 주요 보호유적이다. 천단은 ‘하늘’을 상징하는 사당 건축물로 당시의 황제들은 스스로를 ‘천자’로 간주했기 때문에 대자연을 숭배했으며, 천지를 숭배하고 제사를 지내는 것은 제왕의 중요 업무였고 황제가 하늘에 기도하는 곳이다. 매년 동지에 재궁에서 수신 재계한 황제가 여기에서 하늘에 기도하였다. 그리고 제사를 지내기도 하는데, 여름의 기우제도 여기서 행하여졌다. 황제의 머리관의 모형과 같은 원구단에 올라서면 멀리 황궁우의 푸른 지붕이 바로 눈앞에 보인다. 원구단의 한가운데에는 황제가 기도를 올리는 원심(圓心)이라는 둥근 대리석 판이 있는데, 그곳에 서서 소리를 지르면 자기의 귀에만 크게 반향 음이 되돌아오는 음향현상이 있다. 천단은 위에서 내려다보면 명확하게 내벽과 외벽 두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북쪽 벽은 원형, 남쪽 벽은 사각형으로 원형은 하늘을 상징하고 사각형은 땅을 상징한다. 중국 고대의 천원 지방(天圓地方;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에 부합하는 것이다. 황제가 하늘에 제사지낼 때 머무는 재궁(齋宮)이 있다. 1998년 12월 세계문화유산 명부에 수록됐다고 한다.
버스로 이동하는 중에 가이드가 이제부터는 걷는 코스가 많으니 무장을 하라고 안내를 한다. 자금성, 천안문광장, 이화원은 중국 최고의 황실이고 동선 거리가 무척이나 길었다. 천안문 앞에는 황제가 머무는 궁궐과 외부세계를 차단하는 외금수하(外金水河)가 흐르고 있고, 이 외금수하를 건너는 5개의 금수교(金水橋)가 있는데, 가운데 다리는 황제만 건널 수 있었다고 한다. 자금성은 명나라 때인 1406∼1420년 사이에 건조된 이후 15명의 명나라 황제와 9명의 청나라 황제가 중국을 다스렸던 곳으로 명나라의 3대 황제 영락제는 권좌에 오른 지 4년째 되던 1406년 수도를 난징에서 베이징으로 옮기고 만리장성 이후 중국 최대의 역사라 불리는 쯔진청, 즉 자금성 쌓기에 나섰다. 방이 9,999개나 된다고 전해지는 자금성은 1987년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원래 자금성은 1만개 이상의 방을 만들 수도 있었지만, 만(萬)이라는 것은 신을 의미하기 때문에, 신을 능가하지 않기 위해 만에서 하나를 뺀 9,999개의 방을 만들었다는 얘기도 있다. 갓 태어난 아이가 하루에 한 방씩 잔다면, 나이가 27살이 된다고 할 만큼 엄청난 규모의 자금성이다. 동서로 760m, 남북으로 960m, 담장 높이는 11m, 둘레 길이 4km에 달하고 800채의 건물과 8,707칸의 방이 있는 세계 최대의 궁궐이다. 자금성이라는 이름은 천제(옥황상제)가 사는 자궁(紫宮)과 같은 금지 구역(禁地)이라는 것에서 연유된 것이라고도 하고 한자로 '자금성'이란 자주색의 금지된 성이란 의미로, 황제의 허락 없이는 들어오지도 나가지도 못하는 성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기도 하다.
남쪽에 오문(午門), 북쪽에 신무문(神武門), 동쪽에 동화문(東華門), 서쪽에 서화문(西華門)이 있다. 명나라가 이렇게 거대한 궁궐을 짓게 된 것은. 중화사상에서 비롯되었다고 보는데 세계의 중심 국가로서 여러 나라 사신들이 왔을 때 그 규모에 놀라고 돌아가서 각자의 왕에게 중국이 세계에게 가장 위대한 나라라고 보고하라는 의미도 있다고 하고 사실상 이 자금성이 지어졌을 때만 하더라고 세계에서 가장 강한 나라는 아마도 명나라였을 것이다. 자금성의 정문인 남쪽의 오문(5단계의 문을 거쳐야함)을 통해 중앙 황궁으로 들어 갈 수 가 있기에 전쟁이 나도 적군이 절대 궁 안으로 들어오지 못했을 것 같은 높이와 두께의 성벽위에 궁궐이 세워져 있었다. 직사각형으로 이루어진 자금성은 기능에 따라 외조와 내정으로 나뉘며 외조는 황제가 공식적인 업무를 처리하는 곳이고, 내정은 황제와 황후, 빈과 상궁들이 사용했던 사적인 공간이다. 자금성의 중심 출입문인 남쪽 오문(1번)에서 보면 앞쪽에 외조가, 뒤쪽에 해당하는 북쪽에 내정이 위치하고 있다. 오문으로 들어와 다리를 건너 5번 태화문을 지나면 13번 태화관이 나온다. 황제의 집무실 태화전(13번) 자금성을 설명하는 안내책자 등에 기본으로 나오는 ‘태화전‘은 황제의 공식 집무실로 황제의 즉위식, 탄생 축하 행사, 결혼식, 국가의 칙령발표, 외국 사진 접대 및 조공 등 나라의 중요한 행사가 열리던 곳이라고 한다. 태화전은 그 자체로 황제의 권위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고 중앙계단에는 폭3m, 길이 16m에 이르는 조각이 새겨져 있는데 이곳은 황제만이 지나다닐 수 있었다고 한다. 우리일행은 5문을 거쳐 들어와 천안문 쪽으로 직선거리로 빠져나가는데도 2시간이 넘게 걸리는 엄청난 규모이다.
자금성을 지나 빠져 나오니 천안문 광장이었다. 북경 시내 한 가운데 자리하고 있는 천안문 광장은 중국 사람들의 드넓은 기개를 대표하는 명소란다. 천안문 광장은 원래 1651년에 설계되었다가 1958년에 시멘트로 접합되고 4배나 큰 현재의 규모를 갖추게 되었다. 그래서 지금 전체 면적이 44만㎡이며 동시에 백만 명을 수용할 수 있어서 세계에서 가장 큰 광장중의 하나로 꼽힌다. 또한 주변에 여러 개의 인상 깊은 건축물들이 주변에 들어서 있는데 광장을 중심으로 해서 북쪽은 자금성으로 들어가는 입구인 천안문, 동쪽은 중국 국가박물관, 서쪽은 인민대회당, 남쪽에는 모택동 기념 당이 있다. 광장의 중심에는 중국 인민영웅기념비가 서 있다. 천안문 광장은 예부터 대규모 군중시위, 집회, 행렬, 경축 행사 등이 이어졌다. 광장의 중심에 서있는 ‘인민영웅 기념비’는 천안문 광장의 정중앙에 자리 잡고 있는 인민영웅기념탑은 1952년에 세워진 기념비로 높이 37.94미터에 탑 토대만 3천여 평방미터의 중국 역사상 최대의 기념비이다. 탑신은 견고한 화강암으로 만들어졌으며, 탑의 주변은 소박한 미의 한 백옥으로 만들어진 2층의 난간이 두르고 있다. 탑에는 모택동 주석의 친필로 쓴 ‘인민영웅영수불후(人民英雄永垂不朽)' 8글자와 중국 현대사가 대형 부조로 새겨져 있다. 모주석 기념당 천안문 광장의 남쪽에 있는 모택동주석 기념당은 1977년 9월에 지어졌다. 건축물은 대추색의 화강암으로 지어졌으며, 기념당은 북청, 첨앙청과 남청 세 부분으로 나눠져 있으며, 방부 처리된 모택동의 시신이 첨앙청 내에 수정관에 뉘어져 있고 주위에는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진귀한 꽃들이 관을 두르고 있다. 북청 상층에는 모택동, 주은래 등의 개국원로의 혁명업적이 나열되어 있는 곳이다.
중국 민주화의 상징인 ‘천안문’은 광장의 북쪽에 위치해 있고, 자금성으로 들어가는 입구이지만 우리는 반대로 왔기에 천안문이 출구가 되었다. 그 당시에는 승천문(承天門)이라고 불렸다가 청대에 개조된 후부터는 '천하를 편안하게 하다'라는 뜻의 '천안문'이라 불리게 되었다. 33.7m 높이의 천안문은 황제의 대형 의식이나 새 군대 파견을 위한 행사를 위해 이용되었으며 황금색 기와 지붕과, 높이 추켜든 추녀, 그림과 조각으로 단장된 대들보, 그리고 주홍색의 웅장한 기둥들은 장엄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또한 하얀색 대리석 위에 새겨진 조각들은 하늘의 평화와 황제의 권력을 상징한다. 천안문 광장은 현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천안문 사태’로 더욱 유명해진 곳이다. 1989년 4월 중국 전총서기이자 개혁가였던 후야오방(胡耀邦)의 죽음이 계기가 되어 이 운동은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학생들을 중심으로 시작되었다가 점차 일반 시민들에게까지 확산이 되어 서로 손을 맞잡고 천안문 광장으로 점차 운집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위기를 느낀 당시 지도자였던 덩샤오핑(登小平)은 이들을 진압할 방법을 강구하던 끝에 결국은 같은 해 6월 4일 천안문 광장에 모여 있던 학생과 시민들을 기관총 난사와 전차 동원 등의 무력을 이용해서 강제 진압함으로서 사건을 마무리시켰다. 이후부터 천안문 광장은 중국 민주주의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곳이기도 하다.
이곳을 지나면서 온통 한문으로 되어있어서 뭐가 뭔지 몰랐기에 지금 복습하는 의미로 되돌아보며 정리를 하는 것이다. 천안문 부근에는 버스정차를 할 수 없다기에 무척이나 먼 곳에 정차되어 있는 버스를 향해 가는 길이 왜 이렇게도 멀기만 한지.. 발은 이미 부르터서 걷는 것이 무척 아프고 곤란했지만 표현 할 처지가 아닌 듯싶었다. 버스 앞에 도착했을 때 모두가 지쳐있는데 일행 중의 형제님이 노상에서 파는 메론꽂이를 하나씩 건네주셨는데 그 맛이 꿀 맛 같았다.
마지막으로 왕푸징은 '왕가의 우물'이 있었던 곳으로서 지금은 쇼핑의 중심가, 번화가인 ‘왕푸징거리’로 발전했다. 남북으로 800m에 이르는 차가 없는 거리이기에 북경여행자들이 활보하기에 좋고 왕푸징거리에 지하철역이 있기에 여행을 오기에, 놀러오기에 좋은 곳이고, 즐길 수 있는 다양한 꼬치음식들!! 중국은 다양한 식재료를 사용하기로 유명하기에 중국의 음식들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어왔다. 그러한 이야기들이 누군가에겐 호기심을 누군가에겐 의구심을 누군가에겐 혐오감을 줄 수도 있겠지만 그 감정과 생각이 어떻든 말로만 듣던 이야기들의 일부를 눈으로 직접 확인해 볼 수 있는 곳이 왕푸징거리다. 꼬치음식들을 확인할 수 있는 골목으로 들어가자마자 보이는 음식들. 새롭게 눈에 띄고 놀랍게 보이는 것들은 불가사리, 해마, 전갈, 애벌레, 뱀, 기타 고기류들도 보였고 참새, 개구리, 한 달 된 오리새끼는 형체가 그대로 살아있고 전갈은 연신 꼬물락 거리며 살아 있는 채로 꽂이에 끼워져 있었다. 우리나라의 번화가에서도 보이는 생과일캔디는 설탕물 혹은 물엿의 단맛과 과일의 맛을 함께 즐길 수 있다는데 웬지 사먹는데는 망설여진다. 더운 날씨였는데도 인산인해로 꽤 많은 사람들이 왕푸징거리를 구경하고 있었기에 떠밀려가는 기분으로 볼 수 있었고, 각양각색의 만두, 과자, 튀김 등 다양한 길거리음식들과 인사동거리나 남대문시장처럼 기념품이나 공예품들도 다양하게 많이 볼 수 있어 시간이 짧은 것이 아쉬웠고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참 재밌었다. 일부 가게 주인들은 우리나라말로 손님 유치를 위한 홍보활동을 펼치기도 했다. 이렇게 모든 일정을 마치고 일행을 태운 버스는 북경 공항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저녁7시20분발 중국 남방 항공사, 비행기의 몸체가 서서히 움직이며 거대한 중국 땅을 박차고 올라가자 점점 작아지는 선명한 지형이 그려지며 발아래 펼쳐진다.
중국이여 안녕! Good Bay! 짜이지엔再见!
처음 성지순례를 준비하면서 인원이 채워지질 않아 애태웠던 일, 처음에 가리라고 결정했을 때와는 달리 가고 싶은 열정이 점점 소멸되어 지는 잡생각들이 마음을 어지럽혔는데.. 그런 분심들로 인해 기대를 하지 않아서일까..? 일정과 일정으로 이어지는 과정이 순조로웠기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변화되어 지는 자신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순례 여정을 통해 주님께서 나에게, 우리에게 바라시는 말씀은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하고 그 뜻에 부합하는 삶을 살아야 겠다라는 새로운 다짐이, 신심이 솟아남은 분명 ‘모든 것은 은총’이었음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오전동 본당에 도착하니 환한 미소로 맞이해 주시는 주임신부님의 환영을 받는 것이 기쁘고 좋았으며 출발할 때의 ‘중국교회 복음화를 위한 성지순례’ ‘출발강복’에 이어 성모상 앞에서 ‘마침 강복’을 받고 각자 집으로 돌아갔다.
“메마른 골짜기를 지나갈 적에 거기에서 샘이 터지고 이른 비가 복을 내려 주리라. 그들은 오르고 또 올라 시온산에서 마침내 하느님을 뵙게 되리라.” 시편 84,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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