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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문학관.한국시낭송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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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게시글
최치원문학관 스크랩 모정 이야기
지리산문학관.지리산시낭송축제 추천 0 조회 1,214 18.01.25 12:48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의성 > 서북권 > 달제리
- 1600년경 선조때 경주인 최명후(崔明厚)가 개척한 마을 달제리
의성군 다인면(多仁面)은 동으로 곤지봉(坤地峰)과 문암산(文巖山)이 맥을 높게 이루어서 안사면(安寺面)과 경계를 이루고, 서쪽은 상주시 중동면(中東面), 예천군 풍양면(豊壤面)에 접한다. 남으로는 단북면(丹北面), 북으로는 비봉산(飛鳳山)이 높고, 그 너머로 낙동강이 서쪽으로 흐르며, 예천군 지보면(知保面)을 건너다 본다. 비봉산과 문암산등 큰 산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구릉성 평야지대이고 토질 또한 황색점토질이라 농경지로 적합니다.
달제마을은 조선시대 때 서울로 과거 보러 가는 사람이 이 마을에서 쉬어가면 통달(通達)한다하여 달동(達洞)이라 한 달(達)과 현 달제(達堤) 1리 양지산을 바라보니 황금이 날 것 같았고, 그 산 모양이 길게 제 방과 같아서 금제(金堤)라고 한 제(堤)를 합하여 달제라는 마을 이름이 생겨나게 되었다.
모운정(慕雲亭)이 위치한 달제(達堤) 3리(里)는 1600년경 선조때 경주인 최명후(崔明厚)가 이 마을을 개척했고, 그 후 영월인 신동주(辛東柱)가 예천군 개포(開浦)에서 이주 정착하였다. 당시 마을 앞산에 영월 신씨의 모정이 있어 모정이라 부르다가 그 후 변음으로 모지라고 하였으며, 모(茅)자는 모(毛)와도 뜻이 통하므로 풀이 우거진 골짜기라 하여 모창(毛昌)으로 개칭하였다.
달제마을 입구 개울을 중심으로 여러 그루의 교목이 있다. 북쪽에 있는 나무는 동신목이고, 남쪽에 있는 나무와 인근에 있는 나무는 풍치림이다.
달제마을에는 예로부터 전설 2가지가 전해내려 오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 번째는 마을 입구 나무 밑에 가로 약 70cm 세로 약 1m 둘레 약 2.8m의 거북모양의 돌이 있었는데, 거북의 꼬리가 자기 마을로 향하면 길하다고 생각하여 이 마을 사람과 서쪽 마을 간에 서로 돌 거북의 꼬리를 자기마을로 향하여 놓도록 하기 위해 실랑이를 벌렸다고 한다. 거북이 상대방 마을의 기운을 먹고 자기 마을에 배설하기를 원했기 때문이라 한다.
두 번째는 1800년경 모창에 이동지라는 700섬지기의 부자가 살았는데, 주위에 부자라는 소문이 퍼지자 항상 집안에 손님이 많이 드나들어, 귀찮은 나머지 어떤 승려에게 손님을 끊을 수 있는 방법을 물으니 앞산에 있는 돈 바리 바위가 보이지 않도록 막으면 된다하여 몇 달 공사로 둑을 쌓으니 곧바로 손님이 줄었다고 한다. 따라서 이 바위가 집안에 영향을 주었다하여 돈 바리 바위라 하였다.

 

누정 이야기
- 학문을 강마하던 곳에서 휴식 공간으로
멀리 넓은 들을 바라보며 마음을 열어 공부하기에 좋은 장소라 할 만하다. 정자의 위치는 경치가 좋은 곳에 지어 풍류를 벗하며 즐기는 곳이 있고, 집 부근의 조용한 곳에 지어 학문을 연마하기 위한 곳으로 구분할 수 있다면, 이 곳 모정은 경치를 즐기는 곳이 아닌 학문을 위한 곳이라 하겠다.

설립자의 남다른 교육 정성으로 지어져 글을 가르칠 때는 사다리를 설치하여 이용하여 올라갔으며, 글을 가르치고 내려 와서는 사다리를 치워 버렸다고 한다. 그리고는 이 정자에 한 번 오르면 급제하기 전에는 내려오지 못하게 하였다. 다섯 아들이 문과 급제를 이룬 것도 정자를 지어 교육에 정성을 다한 주인의 열정과, 어버이의 지극한 정성을 깨닫고 열심히 공부하여 급제하여 나라에 공헌하는 것이 보은이라 여긴 때문일 것이다.

이제는 마을의 젊은 사람들이 드물고 아이들은 더욱 귀하게 되어 이 정자에 올라 공부하는 사람은 없지만, 공자가 은행나무 아래서 제자들을 교육시키던 습속을 잇고자 심은 은행나무는 여전히 고색을 자랑하며 정자를 지키고 있다.


관련인물
- 박눌(朴訥)
세종조(1448)에 태어나서 중종조(1528)에 사망한 인물로 본관은 함양이며, 호는 행정(杏亭)이다. 안동김씨 정헌공(正憲公) 보백당(寶白堂) 계행(係行)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창락도찰방(昌樂道察訪)을 지냈으며 사후(死後) 병조참판(兵曺參判)겸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의 증직(贈職)이 내려졌으며 중종이 묘(墓)에 사제(賜祭)하였다.

아들의 교육 정성이 남달라 어릴 때부터 행동거지와 학문을 법도에 맞게 엄격히 시행하였다. 아들들이 성장하자 이곳 모정에서 공부를 시키며 누구든지 이 정자에 오르면 급제하기 전에는 내려오지 못하게 하였다. 사다리를 통하여 옷과 음식을 올려 보내었다고 한다.

이러한 교육의 정성으로 박눌(朴訥)의 다섯 아들은 모두 급제하였다. 거린(巨鱗)은 장령(掌令)을 지냈으며, 형린(亨鱗)는 참의(參議), 홍린(洪鱗)은 대사헌(大司憲), 붕린(鵬鱗)은 설서(設書),막내인 종린(從鱗)은 이조좌랑(吏曹佐郞)을 역임하였으며 예천 금당실 마을로 입향하였다. 인자(鱗字)돌림으로 모두 과거(科擧)에 급제(及第)하고 높은 벼슬을 하였다. 이러한 것을 기리는 말로 향오인(鄕五鱗)이라는 신화가 있다.

심수경의 『유한잡록(遺閑雜錄)』에서는 “다섯 아들을 두기도 어렵고, 그 다섯이 대과에 급제하기가 어렵고, 그 다섯이 문과 급제하기는 더 어렵다.”고 칭찬 하였으며, 이를 두고 삼난가(三難家)라고 하였다.
다섯 아들의 급제로 참판으로 증직되었으며, 예천 금당실의 금곡서원에 배향되었다.
- 박종린(朴從鱗)
1496~1553. 자는 자룡(子龍), 본관은 함양이다. 박눌(朴訥)의 다섯째 아들이다. 1516년(중종 11)에 진사가 되었고, 1532년(중종 27)에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승문원정자로 벼슬을 시작하여 예문관검열로 옮겼고, 승정원주서에 기용되었다. 그리고 홍문관에 들어가 정자, 박사(1534년), 수찬(1535년)으로 승진을 거듭하였다. 그 후 사간원정언, 사헌부지평을 거쳐 다시 홍문관에 들어가 교리(1536년)로서 세자시강원 사서와 문학을 겸직하면서 세자에게 글을 가르쳤다.

또 사간원헌납을 거쳐 이조정랑에까지 벼슬이 이르는 동안 경연의 시독관(1536년)을 겸직하여 중종 임금의 정치 자문 역할을 충실히 하였다. 그러나 당시 권세가 김안로의 횡포가 심하여 벼슬을 그만 두고, 처가 마을인 용문면 상금곡리에 숨어서 정신 수양과 학문 연구에만 전념하면서 후진 양성에 여생을 보냈다.
- 박홍린(朴洪鱗)
1482~1555. 자는 자운(子雲)이며, 호는 용암(龍庵)이다. 박눌(朴訥)의 셋째 아들이다. 1510년(중종 5)에 진사가 되었고, 1522년(중종 17)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예문관에 뽑혀 검열로 벼슬을 시작했다. 그 후 1526년 정언, 1527년 수찬, 1528년 부교리, 교리로 승진하였다. 다시 1530년 헌납, 1531년 지평, 1533년 장령으로 승진을 거듭하였다.

박홍린은 그 후에도 벼슬에 승진을 거듭하였다. 집의, 1534년 우부승지, 직제학을 거쳐, 1534년 대사간, 1536년 도승지, 1537년 대사헌, 공조참판, 그리고 현재 교육부 차관에 해당되는 예조참판에까지 벼슬이 이르렀다.

1538년(중종 33) 3월에는 전라남도 고흥군 흥양으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그 후 귀양살이에서 풀려나 예천에 와서 살았다. 부인이 용문면 성현리 중마에 살던 권갑손(權甲孫)의 딸이기에, 처가에서 가까운 용문면 능천리 능내에서 여생을 마쳤다. 명나라 사신과 시를 지어 사귈 만큼 문학이 깊었다.

 

주변경관
- 정자에 올라 공부를 생각하다.
정자의 위치가 높지 않아 담장 너머로는 빈 하늘만이 큰 은행나무와 소나무 사이로 보일 뿐이다. 아마 주변 풍경 보다는 학문에 힘쓰라는 배려인 듯하다.
마을에서 모정을 올라오기 위해서는 가파른 시멘트 계단을 올라야 한다. 이 계단을 거의 올라오면 양 옆으로 커다란 은행나무와 소나무가 대칭을 이루며 한그루씩 서있다.
학문을 가르치는 마음으로 은행나무를 심었을 것이며, 여름의 더위에도 겨울의 추위에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본디 모습을 유지하며 푸름을 돋보이게 하려는 꿋꿋한 기상으로 소나무를 심은 듯하다.

그러나 정자의 담장 밖 풍경은 자못 다르다. 쏟아져 내리는 햇살이 가득한 사이로 황금 빛 들녘이 아득히 펼쳐져 있다.
그 들판을 가로 질러 3번 국도가 긴 강줄기처럼 마을 앞을 감고 돌아가며, 그 위로 차들이 분주하게 다니고 있다. 전에는 마을 앞 도로와 경북선 철도가 거의 나란히 지났으나, 지금은 4차선 간선도로가 새로 나며 서로 멀어졌다. 마을 뒤쪽으로는 중부 내륙고속도로가 뻗어 있어 이 고장 발전을 돕고 있다.
가까이에 보이는 이안마을에는 상주의 특산물인 감이 달린 나무가 집집마다 몇 그루씩 붉게 익어가며 풍요를 자랑하고 있다.

마을 사람들에게 모정을 물어보면 정자의 이름보다는 박씨들 정자로 더 잘 알려져 있다고 한다. 모정을 한 언덕 너머에 채수의 쾌재정이 있어 채씨들 정자와 구분하여 부르고 있었다.
마을이야기

상주 > 북부권 > 이안면 이안리
- 이안면은 상주시에서 3번 국도를 따라 북으로 19km 지점인 함창읍에서 서쪽으로 4.6km 지점의 32번 지방도 우측에 위치하여 있다.
북부는 작약산(芍藥山:770m)과 수정봉(水晶峰:487m)등의 산지로 구성되고, 남부는 대가산 (大佳山:325m)과 숭덕산(崇德山:231m)등의 낮은 산지와 평야를 이루며, 이안천(利安川)이 동류하는 명산대천의 산세가 수려한 천혜의 고장으로서, 면의 동쪽은 함창읍, 남쪽은 공검면(恭儉面), 서쪽은 은척면(銀尺面), 북쪽은 문경시 가은읍과 인접한다.

미곡중심의 농업지역이며 지역특산물로는 명주, 오이, 토기가 유명하다. 경북선 철도와 국도3호선이면의 남북을 지나며, 함창∼가은간 지방도가 동서로 통하여 교통이 편리하다.

고령가야국의 영역이었으며 신라유리왕 18년에 고령가야에 편입되어 古陵, 古寧에 속했다가 고려 광종 15년(964)에는 함녕군의 관내였으며 고려 현종 9년(1018) 상주목 함창현에 속하였고 명종2년(1171) 함창감무의 관할하에 있었다. 조선에서는 태종 13년(1413) 함창현에 1896년 함창군에 속하여 지산천 아래쪽에 위치하였으므로 수하면이라 하고 지산리 등 19개 동리를 관할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함창군 상서면의 18개 동리와 상주군 은척면의 하신리 일부를 병합하여 한때 이안부곡이라 했던 옛 이름을 따서 이안면으로 하여 상주군에 편입하였으며 1973년에 저음리를 문경군 가은읍에 할애하고 12개 법정리로 개편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충효의 고장인 이안면의 주요 문화 유적지로는 동래정씨 효열각, 유거인 효자각, 김회복 효자각, 감암정 등 충효행적지와 난재 채수선생이 세운 가장리 쾌재정, 역사적으로 가장 오래된 대현리 성황당이 있다. 최근에 조성된 국내 최대의 넓이를 자랑하는 지산리의 백련 단지에는 여름이면 수많은 사진작가와 관광객이 찾아 드는 명소가 되고 있다.

- 이안1리(利安一里) 유래

원래(元來) 함창군(咸昌郡) 하서면(下西面) 지역(地域)으로 중촌(中忖), 이안(利安), 율정(栗亭), 신지(新池), 모정리(茅亭里)를 합(合)하여 이안5동(利安5洞)이라 하였고, 모정(茅亭), 중촌(中忖), 이안리(利安里)를 합(合)하여 이안1리(利安一里)로 하였다.
냇물이 맑고 경치가 좋아서 정자(亭子)를 세우고 학문(學文)을 즐기던 곳으로 많은 선비들이 배출(輩出)되었으며 이안(利安)이라는 말은 '주이(周易)'의 이용안신(利用安身)에서 "이롭게 쓰면 편하다"는 이자(利字)와 안자(安字)를 따서 이안(利安)이라고 하였다 한다. 1914년(年) 행정구역 개편 당시 이안5동(利安5洞)의 이름을 따서 이안면(利安面)으로 하였다고 추정(推定)된다.

○모정(茅亭)
이안(利安) 북쪽에 위치한 마을로서 모정(茅亭)이란 정자(亭子)가 있어 마을 이름을 모정(茅亭)이라 하였으며 지금은 이안(利安)을 합(合)하여 부르고 있다.

○이안(利安)
옛 이안부곡(利安部曲)이며 이안5동(利安5洞) 중(中)의 하나이다. 일제(日帝) 강제침략후 행정구역 개편시 중촌리(中忖里)로 부르다가 1992년 7월 18일 상주군 조례 제1416호로 중촌리(中忖里)를 이안리(利安里)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 이안2리(利安二里) 유래

이안5동(利安5洞) 중(中) 율정(栗亭)과 신지(新池)를 합(合)하여 이안2리(利安2里)로 하였다.

○율정(栗亭) 또는 밤경지
율정(栗亭) 또는 밤경지로 한 것은 마을 뒤 태양산(太陽山) 중턱에 밤나무가 많았다고 한다. 이 밤나무 그늘에서 공부하여 선비가 많이 났다고 하며 밤나무 정자(亭子)란 뜻으로 율정(栗亭) 또는 밤경지(방경지, 뱅경지)라 하였다.
율정리(栗亭里)는 동(東)쪽 서(西)쪽 2마을로 나누어져 동(東)쪽은 양지담, 서(西)쪽은 음지담이라 하고 청주곽씨(淸州郭氏)와 청풍김씨(淸風金氏)가 주성(主姓)을 이루고 있다.

○신지(新池) 또는 새못골
밤경지 북동(北東)쪽에 있는 마을로서 이 마을에 인천채씨(仁川蔡氏)의 정자(亭子)가 있었는데 이 정자(亭子) 옆에 못을 파서 신지곡(新池谷) 또는 새못골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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