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충기의 세계배낭여행기 134>
유구한 역사와 문화의 나라 중국
백두산(白頭山) 기행 1
1. 백두산 가는 길과 연변조선족자치주(延邊朝鮮族自治州)>
북경 관광을 마친 후 다음 목적지는 백두산인데 먼저 랴오닝성(遙寧省) 선양(瀋陽)에 들렀다가 지린성(吉林省)으로 들어가 장춘(長春), 옌지(延吉)을 거쳐 이도백하(二道白河)를 지나 백두산에 이르는 대 장정(長程)이다.
베이징(北京)에서 비행기로 선양(瀋陽)까지 이동하고 거기서부터는 황량하고 끝없이 넓은 만주 벌판을 버스로 이동한다. 울퉁불퉁 비포장도로를 털털거리는 고물 관광버스로 10시간 이상 타다보면 엉덩이가 아픈 것은 말할 수도 없을뿐더러 맨 뒷좌석에 앉았던 가이드는 차가 덜컹거리는 바람에 머리를 천정에 부딪쳐 이마에 밤톨 같은 혹이 생기기도 했다.
랴오닝성(遙寧省) 성도(省都)인 선양(瀋陽)은 인구 500만이 넘는 대도시인데 예전에는 봉천(奉天)이라고 불리던 도시이다. 중국 간자체(簡字体)로는 심양(沈阳)이라고 쓴다. 일제 점령기 일본이 도시이름을 고쳤었는데 천황을 받드는 도시(奉天)라는 의미이다.
선양(瀋陽)에서 장춘(長春)을 거쳐 이도백하(二道白河)까지는 끝없는 만주 벌판을 차가 달리는데 가도 가도 인가는 별로 보이지 않고 옥수수 밭의 연속이다. 결국 노중에 버스 바퀴가 펑크가 나서 길 옆에 세워놓고 수리를 하는데 도로변에는 막 모심기가 끝난 넓은 논이 있고 논두렁 옆으로 작은 돌무더기와 무너진 흙 담 같은 것이 보이는데 초라한 돌비석에 붉은 한글로 ‘발해고성’ 이라고 씌어있다.
거기가 어디쯤인지 기억은 나지 않는데, 여기서 우리 민족이 세운 저 해동성국(海東盛國) 발해(渤海)의 흔적을 만나다니 감회가 새롭다. 우리민족(韓民族)인 대조영이 세워 오래 지속되지는 못했지만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던 발해의 흔적을 이곳에서 만나다니.... 이곳 만주 벌판은 옛 고구려와 발해의 터전이었으니 엄밀히 보면 우리 땅인 셈이다. 이 부근에 살던 중국인(여진, 말갈족 등)들은 벼농사를 지을 줄 몰랐다는데 우리 조선족(韓民族)이 논농사를 짓기 시작하여 지금은 조선족은 물론 많은 중국인들도 논농사를 짓는다고 한다. 이곳은 조선족이 많이 살고 있어 집 구조나 마을의 모습이 우리나라 시골의 풍경을 보는듯하여 친근감이 느껴진다.
옌지(延吉)의 용문교와 해란강
내가 이곳을 다녀온 후 1998년부터인가 중국정부는 동북공정(東北工程)이라고 하여 고구려와 발해의 역사도 중국역사에 포함시키는 억지 학설로 역사를 왜곡하려하여 한-중간 외교문제로 비화되기도 했다.
중국 동북3성 중 지린성(吉林省)은 중국 최초의 소수민족 자치주인 연변조선족자치주(延邊朝鮮族自治州)이다. 그러나 지금은 인원수도 급감하는 등 자치주로서의 지위가 위태롭다고 한다.
지린성(吉林省)은 예전부터 고조선, 고구려, 발해의 땅이었으니 조선족이 많이 살았지만 특히 일제침략기에는 일제의 억압을 피하여 많은 우리 민족이 이주해 살았다. 특히 독립운동의 근거지이기도 했던 지역으로 지린성 인구 중 약 38%가 조선족이라고 한다.
연변조선족자치주인 지린성(吉林省)의 성도(省都)는 옌지(延吉)인데 인구는 약 50만으로 절반이상이 조선족이며, 따라서 옌지 시내의 상점 간판들은 모두 한글과 한자를 병기(倂記)한다.
옌지(延吉)에는 우리 귀에 익숙한 곳이 많다. 가곡 ‘선구자’에 나오는 해란강(海蘭江)과 용문교(龍門橋), 용두레우물(龍井),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윤동주(尹東柱) 시인 생가(生家), 그리고 조선족이 세운 연변대학(延邊大學), 화룡현에 있는 청산리전투의 대승을 거두었던 청산리계곡 등이다.
우리나라 시골을 연상시키는 연변 시골 / 연변대학교 / 용두레우물(龍井)
청산리계곡은 1920년 김좌진 장군이 이끄는 독립군이 일본 정예군 200명을 몰살시키는 대승을 거둔 역사적인 곳인데 잡초만 무성한 황량한 골짜기는 팻말하나 없이 쓸쓸하다. 용두레우물(龍井)은 길쭉한 표지석이 서 있고 가까운 곳에는 윤동주 시인이 다녔던 대성중학교도 있다. 우리들의 여행일정 중 연변대학 방문이 있어 연변대학 총장실에 들러 총장과 면담이 있었다. 중국 56개 소수민족 중 대학을 설립한 소수민족은 오직 조선족뿐으로 바로 이 연변대학이라고 한다. 그런데 아쉽게도 모든 강의는 중국어로 한다는 답변이다. 중국 학생들도 많지만 조선족도 젊은 사람들도 한국어가 서툴러서 한국어 강의를 어려워한다고 한다. 그리고 조선족의 교육열에 대해서 총장이 재미있는 비유를 한다.
‘한국은 농경사회여서 논밭과 소를 매우 소중하게 여긴다. 그런데 자식들 교육을 위해서는 그 논밭과 소를 팔아서 자식을 학교에 보낸다. 중국의 어떤 다른 소수민족도 그런 민족은 없다.’
백두산의 관문 이도백하 / 백두산 미인송
백두산 관광의 관문이라 일컬어지는 이도백하(二道白河)는 자그마한 시골마을인데 백두산에서 발원하여 중국 쪽으로 흐르는 송화강(松花江)의 원류라는 의미의 강 이름에서 따온 지명이라고 한다. 이도백하에 있는 미인송호텔(美人松賓館)에서 일박을 했는데 이곳에는 미끈하고 곧게 자란 소나무들이 많은데 미인송(美人松)이라고 부른다. 백두산 일대에서 자라는 소나무로 ‘장백미인송(長白美人松), 이도백하 미인송(二道白河美人松)’ 이라고도 부른다는데 우리나라 남쪽에서는 보기 힘든 소나무로 키가 엄청나게 크고 잔가지가 없으며 곧게 자라서 무척 아름답게 보인다. 나무껍질은 아랫부분은 회갈색, 위로 올라 갈수록 붉은색을 띈다.
미인송 호텔은 말이 호텔이지 열악하기 그지없다. 침대는 그런대로 괜찮은데 화장실 물도 잘 나오지 않고 청결상태도 좋지 않다. 이곳 호텔 프런트를 보는 순진한 조선족 아가씨는 예쁘장한데 간절한 눈빛으로 우리를 쳐다보며... ‘한국을 꼭 가고 싶은데 갈 방법이... 누가 초청해주면 갈 수 있다는데...’
초청해 준다, 어쩐다... 적당히 둘러대면 뭐든지 다 할 표정이다. 당시 한국의 못된 사기꾼들이 조선족들을 속여 한국으로 데려와 팔아먹고... 그런 사기꾼들이 속여먹기에 딱 좋겠다 싶어 안타까웠다.
이도백하에서 백두산 입구까지는 버스로 약 30분 정도 걸린다.(34k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