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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세 전라좌수사 휘 응규공 비문을 판독하고
2022. 6. 26일에 다시 경기도 광주 추자리에 다녀왔다. 현장에서 이끼를 솔로 닦아내고 판독못한 글자를 다시 확인했다. 그래도 모르는 글자는 집에 와서 재차 규명했다.
9세 전라좌수사공의 고비 해석에 혼신의 힘을 다하였다. 관심을 가지고 눈여겨 본지도 오래되었다. 이 비문은 1577년에 수립되었고, 광주정씨 내에서 가장 오래된 비문이므로 매우 중요하다. 일부는 지금과 달리 기록된 부분, 즉 2세 개성부윤공(휘 윤부)과 3세 완백공(휘 인진)의 기록이 혼재되어 있다. 그 것을 연구하는 것도 족보학의 과제이다. 1983년 새로이 비석을 세울 때, 정기호 박사께서 고비를 참조하여 지으셨다. 현재 깨져나간 글자도 많고 닳아서 보이지 않는 글자가 많다.
이 비문을 지은 분은 사돈 남응운 공인데 문과 무과 모두 급제하시고 공조참판을 지내셨다. 그 사위가 10세 증판서 휘 연공이시다.
이 비문의 글씨를 쓴 분은 김현성이란 분인데 종2품 동지돈녕부사를 지냈다. 8세 응교공께서 연산군 시절 무오사화로 사사된 탁영 김일손 공의 원사를 씻어달라는 상소를 중종임금 때 올렸는데, 탁영의 현손(고손자)이 바로 김현성이다. 이 분은 서화에 능해 비문과 서첩이 많이 전해온다. 광해군 때 정인홍 무리의 인목대비 축출회의에 불참하였다 하여 더 이상 서용되지 않았다. 이와 같이 인연은 이어가며 보답하고 베푸는 것이다.
7월 5일, 1845년 을사보를 다시 찾아 보았는데, 수상공 묘갈이 서문 말미에 인쇄되어 있는 것 아닌가? 그동안 헛수고 했네! 라는 생각도 잠깐 들었는데, 원 고비와 비교해보니 인쇄본도 여러 글자가 고쳐지거나 잘못되어 있다. 그 당시에도 비문을 판독해서 옮긴 것으로 생각된다. 인진(麟振)을 윤부(允浮)로 고쳐 인쇄했다.
9세 전라좌수사 휘 응규공 묘갈
2022. 7. 6일 여천 정철중
有明朝鮮國 折衝將軍 全羅左道水軍節度使 鄭公墓碣
嘉善大夫 同知中樞府事兼五衛都摠府副摠管 南應雲 撰
公姓鄭 諱應奎 字夢得 系出光州 高麗之末 有諱臣扈者 三重大匡門下贊成事 判版圖司 有子曰 麟振入我 朝尹開成府(주1)家傳詩禮(주2) 奕業(주3)以名位顯 其後有諱存司憲府監察 生雲峯縣尉以忠 縣尉生司宰監主簿㬚 主簿生司猛參仝司猛生諱熊官至宗簿寺正卽公之考也 是娶奉常寺參奉宋孝亨女
以正德(주4)戊辰六月辛未生 公幼有英氣 初學儒業十年 投筆習弓馬 登癸巳武科 是年丁外囏(주5) 丙申選授宣傳官 己亥爲南海縣令 癸卯陞樂安郡守 入爲訓鍊院判官 尋遷都摠府經 歷己酉出補長興府使 翌年遭內囏服闋(주6) 拜訓鍊院僉正 旋移繕工監副正 出爲高嶺鎭僉使 仕滿(주7)授訓鍊院正 遂陞加德鎭僉節制使(주8) 階折衝是爲堂上(주9)之職也 後守梁山郡 又移鎭釜山浦 庚申拜全羅左道水軍節度使(주10) 甲子夏除慶源府使 大臣啓遞以有疾也 自此以養病爲急 不以仕宦爲意常在護軍之列(주11) 自筮仕(주12)仕徃郡府者四(주13)鎭邊塞者亦如之(주14) 莅事勤而御率嚴 恩威(주15)幷用 所在皆有聲 乙丑四月二十六日卒于家 享年五十八 八月庚寅葬于廣州之門懸山遺命(주17)也
配淑夫人李氏 高麗吏部尙書嶠之後 贈資憲大夫戶曹判書兼知義禁府事固城君行奮義靖國功臣(주18)僉知中樞府事李孟友之女也 賢而有禮 年十四歸公(주19)自始至終克盡婦道 宗族皆稱之 後公十一年十二月五日終 壽六十三(주20)附葬于公兆 有一男曰演 贅(주21)于吾家 生男女均四 長曰興門次昌門保門榮門 次適士人尹慶元 餘皆幼 公又有孼産(주22)曰浲(주23) 鳴呼 吾與公爲婚家 知公之有所袍 而不得大施於時 壽又不避 惜哉
銘曰 於赫鄭宗 自麗朝興 冠冕(주24)禪聯 昭載國爲 桓桓我公 家聲是承 歷事三朝(주25) 出入效能 分符(주26)授鉞(주27) 臨事戰兢 北塞南陲 蔚有名稱 方擬干城 疾病相仍 弗竟厥施 天意難憑 擔彼南漢(주28) 有山崚嶒(주29) 泉淸土肥 樹木層層 雙劒同埋 龍光上騰 天降吉慶 子孫繩繩
萬曆五年 七月 日立 宣略將軍行 龍驤衛司猛兼迎曙道察訪(주30) 金玄成書
유명조선국 절충장군 전라좌도수군절도사 정공묘갈
(有明朝鮮國 折衝將軍 全羅左道水軍節度使 鄭公墓碣)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겸오위도총부부총관 남응운 지음
공의 성은 정(鄭)이요, 휘는 응규(應奎) 자는 몽득(夢得)이고 광주인이다. 고려 말 휘가 신호(臣扈)인 분이 계신데 삼중대광문하찬성사(三重大匡門下贊成事) 판판도사(判版圖司)이고, 그 아들은 인진(麟振)인데, 조선조에 들어 개성부윤(尹開成府)이다.
집에 시문과 예도(詩禮)가 전하고 빛나는 업적은 그 명성과 지위가 현저하였다. 그 후 휘는 존(存)이니 사헌부감찰이고, 그 아들은 운봉현위 이충(以忠)이고 현위의 아들은 사재감주부 철(㬚)이고, 주부는 사맹 참동(參仝)을 낳았다. 사맹은 휘 웅(熊)을 두었는데 직책이 종부시정에 이르렀으니 공의 아버지다. 이 분은 봉상시참봉인 송효형의 딸을 얻었다.
정덕 무진(1508년) 유월 신미 생이다. 공은 어려 뛰어난 기상이 있어 처음 유업(儒業)을 십 년 공부하더니 붓을 던지고 궁마를 단련하니, 계사(1533년)에 무과 급제하였다. 이 해에 부친상을 당했다. 병신(1536년)에 선전관에 뽑혔다. 기해(1539년)에 남해현령, 계묘(1543년)에 승진하여 낙안군수에 나갔다. 다시 돌아와 훈련원판관을 거쳐 도총부경력으로 옮겼다. 기유(1549년)에 장흥부사에 나갔으며, 다음 해(1550년)에 모친상을 당해 외부 출입을 끊었다. 훈련원첨정을 제수 받고, 바로 선공감부정으로 옮긴 후 고령진첨사로 나갔다. 임기를 채우고 훈련원정에 나가고, 드디어 승자하여 가덕진첨사가 되었다. 모두 절충장군으로 당상관의 직급이다.
그 후 양산군수를 거쳐 부산포첨사로 옮겼다. 경신(1560년)에 전라좌도수군절도사를 제수 받고, 갑자(1564년)에 경원부사를 제수 받았으나 병환이 있어 대신들이 교체해 달라는 계를 올렸다. 이로부터 급히 양병을 하였다. 벼슬살이하며 뜻은 항상 호군지열(護軍之列)에 있지 않았고, 처음 벼슬에 나아가 군부(郡府)를 오간 것이 네 차례이고 국경 요새(邊塞)의 군진에 나간 것이 이와 같다.
직무에 임하여 부지런하였으며, 군을 통솔함에 엄격하였다. 은혜를 베풀고 위엄을 지킨 것을 겸비하니 가는 곳마다 모두 그러하여 명성이 높았다. 을축(1565년) 사월 이십육일에 집에서 돌아가시니 향년 오십팔 세였다. 팔월 경인일(26일) 광주 문현산에 장례를 치렀는데 유명(遺命) 때문이었다.
부인 숙부인 이씨는 고려 이부상서 교(嶠)공의 후손으로 증자헌대부호조판서 겸지의금부사 고성군(固城君) 행 분의정국공신 첨지중추부사 이맹우의 딸이다. 어질고 예도가 있었는데 열네 살에 시집오셨다. 처음부터 끝까지 부인의 덕망이 극진하였으므로 집안사람들이 모두 칭송하였다. 공이 돌아가시고 11년 후(1576년) 12월 5일에 졸하시니 육십 삼세였고 공의 묘에 부장하였다.
아들 하나을 두었는데 이름이 연(演)이고 우리 집에 데릴사위로 들였다. 아들 딸 공히 네 명씩 낳았다. 장남이 흥문이고 그 다음이 창문, 보문, 영문이다. 다음으로 사위는 사인 윤경원이다. 나머지는 모두 어리다. 공은 또 서자를 두었는데 이름은 봉이다. 오호라! 나와 공은 사돈이 되었고 공의 마음에 품은 바가 있었으나 부득이 이루지 못하였거늘 수(壽)를 얻지 못하였으니 아쉽구나! 그 명(銘)에 부치기를,
어혁정종 자려조흥(於赫鄭宗 自麗朝興) 정씨 가문 빛나니 고려에 일어나
관면선련 소재국승(冠冕禪聯 昭載國爲) 벼슬 대이어 이어져 부지런히 힘써 나라 받들었네
환환아공 가성시승(桓桓我公 家聲是承) 빛나도다! 나의 공이여! 집안의 명망을 이같이 이어가
역사삼조 출입효능(歷事三朝 出入效能) 세 임금 섬기며 들고 나고 그 능력 출중하였네
분부수월 임사전긍(分符授鉞 臨事戰兢) 부신 나누고 병권 받으니 직무에 임하여 최선을 다하였고
북새남수 울유명칭(北塞南陲 蔚有名稱) 북쪽의 국경 남쪽의 변방에서 씩씩한 기상으로 명성과 칭송뿐이네
방의간성 질병상잉(方擬干城 疾病相仍) 성을 지킴에 장소를 가리지 않았는데 질병으로 인하여
불경궐시 천의난빙(弗竟厥施 天意難憑) 뜻을 펼치지 못했으니 하늘의 뜻을 믿기 어렵구나
담피남한 유산릉증(擔彼南漢 有山崚嶒) 저 남한산을 등지고 높고 험한 산 있는데
천청토비 수목층층(泉淸土肥 樹木層層) 샘은 맑고 땅은 기름지며 나무들은 층층이 우거졌네
쌍검동매 용광상등(雙劒同埋 龍光上騰) 검 두 자루 함께 묻었으니 용 같은 빛이 하늘로 솟고
천강길경 자손승승(天降吉慶 子孫繩繩) 하늘은 상서로운 경사를 내려 자손은 승승장구 번성하리라
만력오년(1577년) 칠월 세움. 선략장군 용양위사맹겸영서도찰방 김현성이 글씨를 씀
주1) 1523년~1555년 사이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기재 신광한의 장모 ‘숙인 광주정씨’ 묘갈 중 “臣扈生麟振仕我尹開城府
麟振生存‘ 司憲府監察存生以忠雲峯縣尉 是生~~~”이란 구절이 있다. “신호는 인진을 낳고 벼슬은 개성부윤이고, 인진은
존을 낳았다. 존은 사헌부감찰이고 이충을 두었는데 운봉현위이다 ~~~.” 적어도 완백공종에서 1577년 까지는 2세 개성
부윤 휘 ’윤부(允浮)‘가 보이지 않고, 3세 휘 인진(麟晉)공의 ‘진(晉)’자도 ‘진(振)’으로 알고 있었다.
주2) 시예(詩禮) : 시(詩)와 예(禮)의 가르침」
* 시례지훈(詩禮之訓) : 「시(詩)와 예(禮)의 가르침」, 자식이 아버지에게서 받는 교훈
* 시례고가(詩禮故家) : 시(詩)와 예(禮)가 여러 대로 이름 있는 집.
주3) 혁엽(奕葉) : 대대(代代)로 영화(榮華)를 누림
주4) 정덕(正德) : 명나라의 제10대 황제인 정덕제(正德帝) 주후조(朱厚照) 때의 연호이다. 1506년을 원년으로 1521년까지 16년
동안 사용되었다.
주5) 간(囏) : 간(艱)의 고자(古字) * 외간(外艱) :부친상, 내간(內艱) : 모친상
주6) 익년조내간복결(翌年遭內囏服闋) : 족보에는 8세 응교공의 배 야로송씨(冶爐宋氏)의 졸년을 기유년(1549년) 11. 16일로 기
록하였는데, 이 비문에 의해 그 다음해인 경술년인 1550년으로 고쳐야한다. 을사보에 ‘익(翌)’을 ‘시(是)’로 잘못 인쇄하였
다.
주7) 사만(仕滿) : 옛날 벼슬아치가 한 관직(官職)에서 다른 관직으로 전직(轉職)하거나 승진(昇進)하는 근무(勤務) 기간(期間)
주8) 명종실록에 1556년 8월 4일, 가덕진첨사에 임명된 기록이 있다.
상이 가덕 첨사(加德僉使) 정응규(鄭應奎)를 사정전에서 인견하고 분부하였다.
"근래에 첨사와 만호들이 침탈만을 일삼고 방비하는 일에는 유의하지 않아서 지난해에는 참혹한 변고를 당하였다. 지금부
터는 법을 벗어난 일은 일체 하지 말고 군졸들을 어루만지고 살피며 군기를 잘 단련시켜 날로 새롭게 변란에 대비하여야
한다.“
주9) 당상(堂上) : 문관(文官)은 정삼품(正三品) 통정대부(通政大夫) 이상, 무관(武官)은 정삼품(正三品) 절충장군(折衝將軍) 이상
(以上)의 벼슬 계제(階梯)
주10) 1563년 2월에 명종실록에 ”정응규를 경기도수사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한국역대인물종합시스템에서는 온양정씨
의 문관 정응규를 이 인물로 원용하고 있다. 나이로 보나, 직위로 보나 正郎(정랑) 직책에 있던 사람이 갑자기 당상관인
무관으로 돌변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어찌 묘갈이나 족보에 기록이 없을까? 이는 1564년 경원부사에 제수되었
는데 병환으로 계를 올려 체차(遞差)해 달라고 기록에 미루어, 경기수사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으로 보인다.
◼ 명종실록 29권, 명종 18년(1563년) 2월 10일 송기수(宋麒壽)를 좌참찬으로, 오겸(吳謙)을 호조 판서로, 안위(安瑋)를 병조 판서로, 심전(沈銓) 을 오위 장(五衛將)으로, 윤백원(尹百源)을 필선으로, 이식(李拭)을 검상으로, 박소립(朴素立)을 이조 정랑으로, 홍인경(洪仁慶)을 예빈시 정으로, 권순(權純)을 사헌부 장령으로, 박인원(朴仁元)을 지평으로, 이윤덕(李潤德)을 내승(內乘)으로, 이문성(李文誠)을 경상우도 병사로, 정응규(鄭應奎)를 경기도수사(京畿道水使)로 삼았다. |
주11) 호군지열(護軍之列) : 무관의 최고직급은 절충장군 당상 정삼품이다. 종2품부터는 문관의 직급으로 통일된다. 종2품은 가
선대부인대, 병마절도사, 훈련대장, 금위대장 등의 최고반열에 드는 것이다. 무관의 승진단계는 첨사 등 가점이 주어지는
고위 변장을 거쳐 당상의 방어사, 수사를 거쳐 곧바로 종2품관으로 나가는데, 실직(實職)이므로 중요한 순간이다.
주12) 서사(筮仕) : 처음으로 벼슬함.
주13) 사왕군부자사(仕徃郡府者四) : 지방관으로 군부(郡府)에 네 차례 나갔는데, 남해현령, 낙안군수, 장흥부사, 양산군수로 모
두, 경상도 전라도 해안지방이다.
주14) 진변새자역여지(鎭邊塞者亦如之) : 북쪽 변방과 남해안의 군진을 오가며 네 차례 오랑캐와 왜구를 막았다. 함경도 고령진
첨사, 경상도 가덕진첨사와 부산포첨사, 전라좌수사 직이다.
주15) 은위(恩威) : 은혜(恩惠)와 위엄(威嚴)
주16) 경인(庚寅) : 1565년(명종20년) 8월 26일
주17) 유명(遺命) : 임금이나 부모(父母)가 임종(臨終)할 때에 하는 명령(命令). 을사보(乙巳譜)에 ‘이전공사예장(以戰功賜禮葬)’이
라 하는데, 이와 관련 있어 보인다.
< 1845년 을사보(乙巳譜) >
주18) 분의정국공신(奮義靖國功臣) : 연산군의 패륜정국에 대한 1506년 중종의 반정(反正)의 공신
주19) 년십사귀공(年十四歸公) : 14세에 시집오셨으므로 만 13세이다. 1527년이다.
주20) 後公十一年十二月五日終 壽六十三 : 공이 1565년에 돌아가신 11년 후이고 63세이므로, 1576년도 12월에 돌아가셨다. 이
때가 63세(만62세)이시면 생년은 1514년이다.
주21) 췌(贅) : 데릴사위
주22) 얼산(孼産) : 서자. 서얼
주23) 봉(浲) : 漨와 동자(同字), 을사보에 ‘택(澤)’으로 판독하였다. 무후(无后)되었다.
주24) 관면(冠冕) : 벼슬하는 것을 일컫는 말.
주25) 역사삼조(歷事三朝) : 중종 조에 나시어 중종28년 1533년에 무과에 나가고 1545년 인종(仁宗)을 거쳐, 명종 조에 졸하셨
다
주26) 분부(分符) : 군진을 운용함에 있어 병권(兵權)을 가진 지휘관은 밀부(密符)를 받게 되는데, 그 비밀 표식을 둘로 나누어
병조와 지휘관이 지니고, 병사의 진퇴를 명하는 유서는 날인을 비상시에 서로 맞추어 보아 합치(합부 合符)할 때 실행했
다. 이들 오가는 비상 문서를 ‘유서(諭書)’ 라는 형식으로 전하였다.
주27) 수월(授鉞) : 병권을 가진 최고 책임자에게 상징적으로 수여하는 도끼. 고려사절요에 홍건적을 토벌한 총병관 정세운 장
군에게 이러한 구절이 있다.
命門下平章事商議會議都監事鷹揚軍上將軍鄭世雲爲捴兵官。賜之節鉞。代予行事 명을 내려, 문하평장사 상의 회의도감사 응양군상장군(門下平章事商議會議都監司鷹揚軍上將軍) 정세운(鄭世雲)을 총병관(摠兵官)에 임명하고, 절월(節鉞)을 주어 나(공민왕)를 대신하여 임무를 행하게 하였다. |
주28) 남한산(南漢山) :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에 있는 산(498m). 북한산(北漢山), 관악산 등과 더불어 서울 분지(盆地)를 이중(二
重)으로 둘러 싼 자연(自然) 방벽(防壁)임.
주29) 유산능증(有山崚嶒) : 높고 험준한 산이 있는데 바로 문현산(498m)을 말한다.
주30) 겸찰방(兼察訪)과 영서도(迎曙道) 찰방
도로와 역(驛)·원(院)의 관리와 감독을 위하여 설치한 종6품직인 찰방의 폐해를 규찰하기 위해 설치하였다. 1551년(명종 6)에 처음 설치되었다. 중종 때 김안로(金安老) 등이 서리출신의 자리였던 각 도의 종9품 역승(驛丞)을 찰방으로 승격시켜 문음출신의 자제들을 임명하면서 각종 부정부패가 심해지자, 불법적인 사례를 적발해 중앙에 보고하는 역할을 맡긴 것이다. 주로 문과급제자가 분관되는 성균관·교서관·승문원의 참하관을 파견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파견 지역은 『대전통편』에 의하면 경기도의 영서(迎曙)·양재(良才), 충청도의 성환(成歡), 경상도의 유곡(幽谷)·황산(黃山), 전라도의 삼례(參禮), 황해도의 금교(金郊), 강원도의 은계(銀溪), 함경도의 고산(高山), 평안도의 대동(大同)·어천(魚川) 등이었다. |
□ 묘비를 만든 사람들
삼족(三族)이라 하면, 부계·모계·처계를 말한다. 본가, 외갓집, 처갓집인 매우 가까운 관계이다. 신분사회의 속성이 비슷한 처지의 사람끼리 혼인관계가 이루어지고, 그 끈끈한 관계는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결속력과 지원군이 되기도 한다. 그러기에 일원(一員)의 행동거지와 입지가 많은 친인척에 영향을 주므로 함부로 하기 어려운 일이다. 천거를 하거나, 만사(挽詞)를 쓰거나 비문(碑文)을 짓는 예는 자주 보인다.
수사공의 묘갈을 지은 국창(菊窓) 남응운 공은 수사공과 사돈지간인데, 영사당 휘 연(演)공이 아내로서 국창공의 따님을 맞이하였기 때문이다. 수사공보다 나이는 한 살 아래이고 과거는 수사공이 1533년에 무과를, 국창공이 1535년에 문과에 급제하였고 서총대 무과에도 급제하여 함경도 남병사를 지낸 문문겸전의 대표적인 인물이 되었다. 1577년 이 때는 관직에서 물러난 지 거의 10년이 된 시점이다. 아마도 우리집안의 든든한 지원군이 되었다.
비문을 쓴 김현성은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 1464~1498)의 손자이다. 김종직(金宗)과 제자 김일손은 연산군 조에 조의제문(弔義帝文) 문제로 1498년 무오사화(戊午史禍)의 화를 입었다. 일찍이 8세 응교공(휘 웅)께서 1507년 중종 때 점필재 김종직과 김일손의 원사(寃事)를 풀어달라고 소를 올린 바 있다. 그러한 인연도 대를 이어 여기에 이른 것이다. 김현성공은 시서화에 능하여 그 작품이 이름이 나있다.
□ 배 고성이씨 생몰년도는 1514년과 1576년, 족보와 다르다
음기(陰記)에 수사공의 배 고성이씨(固城李氏)의 생몰년도는 간지(干支)로 기록되지 않았다. 오로지 ”수사공 졸 후 11년이 지난 해의 12월 5일이고 수(壽)는 육십삼“이라고만 되어있다. 수사공께서 ”정덕 무진(1508년) 유월 신미 생“이시고, ”을축(1565년) 사월 이십육일에 돌아가시니 향년 오십팔 세였다.“고 기록하였다.
고성이씨는 1565년에서 11년 후인 1576년 병자(丙子) 12월 5일이 졸일(卒日)이시고 63세(만62세)되셨으므로, 태어나신 해는 1576년의 62년 전인 1514년 갑술(甲戌)년이다. 14세에 시집오셨으므로 혼례년도는 1527년 수사공 20세(만19세)난 해이다.
1845년 을사보에는 생년 졸년 기록이 없는데, “신좌(辛坐) 합폄(合窆)하였다.” 했다.
고성이씨의 생몰년도를 각각 2001년 신사보와 1977년 정사보(丁巳譜)도 1513년(계유)과 1575년(을해)이라 하였다.
< 고비 고성이씨 졸년 기록 >
< 수사공 고비 >
< 참 고 >
□ 비문을 지은 사돈 남응운(南應雲) : 1509(중종 4)∼1587(선조 20)
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치원(致遠), 호는 국창(菊窓)·난재(蘭齋)·관원(灌園). 개국공신 남재(南在)의 후손으로, 할아버지는 삭령군수 남변(南忭), 아버지는 참판 남세건(南世健), 어머니는 이윤식(李允湜)의 딸이다.
1535년(중종30)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1537년 교서관검열, 이듬해 승정원주서가 되었다. 이때 춘당대의 시예에서 제술로 입격해 반숙마(半熟馬) 한필을 하사받았다.
김안로(金安老)의 탄핵에 앞장서기도 했으나 춘추관기사관을 겸하면서 사관직(史官職)을 소홀히 한 잘못으로 탄핵을 받고 추고(推考)되었다. 이어 외직인 강계판관이 되었다. 이때 변방의 야인들이 자주 침범해 백성들을 괴롭히는 것을 경험하고 뒤에 내직으로 돌아와서 야인에 대한 강경책을 주장했다.
1545년(인종1) 사성으로 참교를 겸직했고, 춘추관 편수관이 되어 『중종실록(中宗實錄)』의 편찬에 참여했다. 1546년(명종1) 장령이 되어 다음 해 을사사화 이후에 남아 있던 대윤 세력의 근절을 주장하기도 했다. 1549년 장령으로서 양사(兩司)의 관원과 함께 이기(李芑)·윤인경(尹仁競)·정순붕(鄭順朋) 등의 국정 천단을 탄핵하다가 실패했다.
마침 북방의 중요성이 대두되어 길주목사(吉州牧使)로 임명되었다. 1551년 다시 내직으로 돌아와 장례원판결사·좌부승지·우부승지·참찬관 등을 차례로 역임하고, 1554년 황해도관찰사를 지냈다. 그 뒤 1557년 형조와 병조의 참의, 1559년 우승지·함경도병마절도사, 1561년 동지중추부사, 1564년 경기도관찰사, 1565년 경상도관찰사 등을 두루 역임했다. 1584년(선조 17) 공조참판에 이르렀다.
일찍이 서총대(瑞葱臺)의 시예에서 문과·무과에 모두 합격하는 등 문무를 겸비해 남병사(南兵使)를 세 번이나 역임하는 등 북방의 전략에 밝았다. 상례에도 밝아서 선조 초년 복상 문제가 대두되었을 때 세종 때 제정한 『오례의(五禮儀)』에 따를 것을 주장했고, 글씨에도 일가를 이루었다. 특히 전서와 주서에 능해 많은 비에 전서를 썼다.
현재 남아 있는 작품으로는 개성에 있는 서화담경덕비(徐花潭敬德碑), 운봉에 있는 황산대첩비(荒山大捷碑), 과천의 허엽신도비(許瞱神道碑), 장단에 있는 허종신도비(許琮神道碑) 등의 전서가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묘비의 글씨를 쓴 김현성(金玄成) : 1542~1621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서예가이다. 자는 여경(餘慶), 호는 남창(南窓), 본관은 김해이다. 고조부는 김일손(金馹孫)이고, 부친은 김언겸(金彦謙), 모친은 광주이씨(廣州李氏) 중경(重卿)의 딸 이며, 부인은 이달충(李達忠)의 딸이다. 5세에 『소학(小學)』을 읽었으며 15세에는 경사백자(經史百子)에 통달하였다. 성품이 청렴하고 단아하여 몸가짐이 법도에 어긋남이 없었다. 집안이 매우 가난하였으나 효성이 지극하였고, 평생을 청빈하게 살았다.
1558년 진사가 되었으며, 1561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다. 1564년 식년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고 교서관(校書館) 정자(正子)와 양주목사(楊州牧使), 1617년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 차사자관(次寫字官) 등을 역임하였다. 한편, 동지돈녕부사 시절 왕명(王命)으로 평양(平壤)에 파견되어, 차사자관자격으로 기자비(箕子卑)의 비문(碑文)을 모사(摸寫)한 후, 서울로 돌아왔다. 불행히도 인목대비(仁穆大妃) 폐모론(廢母論)의 정청(庭請)에 참석하지 않은 까닭으로 면직(免職)당하였다.
ㅇ 주요 작품
김현성의 글씨는 당시 평론가들에게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는 한호(韓濩)와 더불어 글씨로 이름이 높았다. 김현성은 당대에 유행했던 원(元)나라 서화가 조맹부(趙孟頫)의 송설체(松雪體)를 섭렵했고, 부분적으로 동진(東晉)의 서예가 왕희지(王羲之)의 서법도 수용했으며, 특히 해서(楷書)에 능했다. 그는 비석, 병풍, 족자, 서첩 등 다양한 형태의 작품을 남겼다. 김현성은 동지돈녕부사를 지낼 때 왕명을 받아 평양에 가서 기자비(箕子卑)의 글씨를 모사해오기도 했다.
김현성의 작품으로는 '초서첩(草書帖)'이 전한다. 이는 오언시(五言詩)를 초서(草書)로 쓴 것이다. 당(唐)나라 서예가 회소(懷素)의 '자서첩(自敍帖)'의 글씨도 연상시킨다. 송설체의 진수를 담고 있다. 대담하고 화려한 필력과 글자 배치에 있어서 뛰어난 공간 구성력을 확인할 수 있다. 한 획과 한자의 짜임새 등을 전체적으로 볼 때, 그의 반듯하고 점잖은 생활태도가 필치에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주자시(朱子詩)'와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남창 김현성이 쓴 글씨'(翰墨淸玩書), 보물 제1626호로 지정된 '김현성 필적(金玄成 筆蹟)'에서는 그의 행서(行書)를 확인할 수 있다.
김현성은 글씨뿐만 아니라 시와 그림에도 능해서 조선에 방문한 명나라 사신들을 접대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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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지식백과] (한국 역대 서화가 사전, 2011. 11. 28.)
첫댓글 수사공묘갈 전문으로 수정하여 게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