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유성 출가상 (踰城出家相)
싯달타가 출가한 이유는 자애에 넘친 아버지와 새어머니의 뜨거운 모정 아름다운 아내와의 사이에서 태여 난 아들에게 향하는 말할 수 없는 연민 그 모든 것에 등을 돌리고 가정을 버리고 뛰어 나온 것에는 보통 사람들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절실한 까닭이 있었음이 틀림없다.
깨닫음을 얻고 난 후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중아함경에 "내가 출가한 것은 생,사,병,노가 없고 근심 걱정 번뇌가 없고 지저분함이 없는
가장 안온한 행복의 삶(涅槃)을 얻기 위함이라고 하였다.
밤중에 궁전을 나온 싯달타는 날이 밝은 뒤에 어느 강가에 이르렀다. 여기에서 그는 스스로 머리를 깍고 지나가던 사냥꾼과 옷을 바꾸어 입고 출가 수행자, 즉 사문이 되었다.
수행자가 된 그를 흔히 사문 고타마라고 부른다.
성을 넘어 출가하는 모습으로 태자를 감시하던 부인 야소다라와 시녀 챤타카, 그리고 오백 군사들이 잠에 취해 있는 장면, 태자가 마부에게 성을 넘을 것을 지시하는 장면 성을 넘은 태자를 제석천왕이 호위하며 하늘에는 오색광명이 비치는 장면, 머리를 깍은 태자가 사냥꾼과 옷을 바꿔어 입는 장면,마부가 태자에게 하직인사를 하고 눈물을 흘리며 태자의 금관과 용포를 가지고 궁궐로 돌아오는 장면, 정반왕과 마야부인 그리고 태자비가 태자의 의관을 받고 슬피 우는 장면 등이 묘사되어 있다 (29세 2월 8일 - 출가절)
5, 설산 수도상 (雪山修道相)
설산에서 수도하시는 모습으로 보통 사문 싯달타의 모습을 핏줄까지 튀여 나온 앙상한 모습으로 묘사를 한다. 설산에 들어간 태자가 대신을 보내 환궁을 종용하는 왕의 권청을 물리치고
신선과 함께 수도에 전진하는 모습들이 묘사되고, 정반왕이 교진여등 5신하를 보내는 장면,
6년 고행의 무상함을 깨우친 태자에게 수자타가 우유죽을 바치는 장면, 태자가 수도하면서
모든 스승을 찾는 장면, 풀 베는 천인에게서 길상초(吉祥草)를 보시 받는 장면 등이 묘사되어 있다.
사문 고타마는 저명한 수도인을 따라 편력의 길에 나섰다.
처음으로 찾아간 수행자는 고행주의자인 바가바로 그에게 그 고행의 목적이 무엇인가를 문의
하였던 바, 그들은 천상에 태여나기 위함이라고 하였다.
이에 고타마는 천상에 태여 난다고 하여도 죽지 않고는 불가능하며 수명을 다하면 고통을 당하여야 한다는 생각과 천상에 태여 난다는 것을 무엇으로 보장 하는냐 하는 생각에서 그를 떠났다.
다음은 배화주의자를 찾아갔는데 그들은 범천과 해와 달과 물과 불을 섬기고 있었다.
이또한 자신의 수행길이 아님을 직감하고 그 곳을 물러났다.
또 수정주의자인 알라라 칼라마와 웃타카 라마풋타였는데 이들은 정신통일을 통하여 정신적 작용이 전면 정지되여 숙정한 경지에 도달함으로써 해탈에 이른다는 것이다.
고타마는 이들에게 각각 지도를 받아 수행을 하였으나 그들이 해탈의 경지라고 일컫는 최고의
단계까지 수행을 하고서도 일단 정신통일의 상태가 끝나버리면 다시 전과 같은 상태로 돌아오게 되므로 수정은 끝없이 되풀이하게 되어 이것은 결코 무고안온(無苦安穩)한 해탈이 될 수가 없음을 알고 붓다가야의 네란자라강 근처의 고행림을 찾아 맹렬한 고행을 하였다.
이때 부왕이 보낸 다섯명의 신하들도 함께 고행을 하였다.
그러나 곧 고타마는 출가의 목적이 육체를 괴롭히는 고행이 아닌 열반 해탈이 였으므로 고행을 버리고 강물에 몸을 씻고 거의 탈진 상태에 빠져 나뭇가지를 붙잡고 강변을 올라가서 자나가던
수자타의 우유죽을 공양 받았다.
그와 함께 수행하였던 다섯 수행자는 고타마의 이 모습을 보고 크게 실망을 하고 고타마는
타락하였다. 그는 정상적인 수행자가 아니다. 신성한 수행을 모독하였다.
우리는 그가 있는 곳에 머물 수가 없다고 하며 녹야원으로 가버렸다.
당시의 인도의 수행자들은 옷도 입지 않고 먹지도 않고, 목욕도 금물로 여겼다.
우유죽을 먹고 목욕을 한 고타마는 기운을 차려 심신을 회복하고 과거 6년간의 모든 수행을 청산하고 마음을 가다듬어 독자적인 길을 찾아 나섰다.
6, 항마수하상 (樹下降魔相 )
싯달타는 그늘이 좋은 핍파라수를 발견하고 그 아래로 갔다. 거기에는 안기에 알맞은 반석이 있었다. 고행에 지친 그가 앉기에는 돌바닥이 너무 딱딱해서 부드럽고 깨끗한 풀을 한 아름 깔고 앉았다.
사문 고타마는 "깨닫음을 구하기 전에는 결코 이 자리(金剛寶座)에서 일어나지 않겠다는 결심을 하였다. 인간을 괴롭히고 자유를 박탈하는 것은 결코 외부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내심에서 그 원인이 있다고 생각하고 그 근본적인 원인이 무엇인가를 깊이 추구(推究)하여 그것은 번뇌 때문에 생긴 진리에 대한 무지(無知)는 곧 무명(無明)이라는 것을 깨닫았다.
그리하여 싯달타는 내심의 깊은 성찰에 잠겨 모든 것이 연기(緣起)하는 도리를 알았다.
연기라는 것은, 이세상의 모든 것이 하나도 예외가 없이 다 그것이 형성 될 수 있는 조건에 의하여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다.
연기의 도리를 깊이 관찰한 고타마는 생사 괴로움의 근본 원인인 진리에 대한 무지, 즉 무명을 멸함으로써 무고안온의 열반을 증득하는 데에 성공하였다.
끝내 마구니의 항복을 받고 더 없이 바르고 참된 평등 원만(平等圓滿)의 깨닫음,
곧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 ; 아뇩다라삼막삼보리)을 이루었다는 것이다.
곧 수행자 사문 고타마는 부처님이 된 것이다.
"나는 일체의 승자(勝者)이며 일체의 지자(智者)이다. 일체법(一切法)에 물들지 않고 일체를 버렸으며, 渴愛(갈애)가 다하여 해탈 하였다."{大品}
성도(成道)란 보편 타당한 우주와 인생의 진리를 올바르게 보고 참되게 알아 그것을 자기화 함으로써 자율적이고 자주적인 인격을 완성한 것이며 그와 같이 인격을 완성한 이를 부처님이라고 한다.
석존의 성씨는 고타마(Gotama), 이름은 싯달타(Siddartha)로 붙여서 고타마 싯달타라고 부르기도 하며, 부족의 이름은 샤카이며 성자란 의미의 무니(Muni)를 덧붙여 석가모니라고 한다.
이 장면은 보리수 아래서 마구니를 항복시키는 모습으로 태자가 마구니들의 온갖 유혹과 위험을 물리치고 그들로부터 항복을 받는 모습이 묘사되고, 마왕 파순이 딸들로 하여금 마녀로 변신케 하여 부처님을 유혹하는 장면 마왕의 무리들이 코끼리를 타고 부처님을 위협하는 장면,
마왕이 80억 마군을 몰고와 부처님을 몰아 내려고 하나 창칼이 모두 연꽃으로 변하는 장면,
지신(地神)이 태자의 전생공덕과 계행을 마왕에게 증명하는 장면 ,마구니들이 작은 물병을 사력을 다해 끌어내려고 하나 조금도 요동치 않고 오히려 돌비(石雨)와바람이 쏟아져 80억 마구니들을 물리치는 모습,
드디어는 마왕의 무리들이 항복하고 부처님과 모든 천신, 천녀, 군중들의 수희 찬탄하는 장면들이 묘사되어 있다. (35세, 12월8일이다)
7. 녹원전법상(鹿苑傳法相)
깨닫음을 구한 싯달타는 보리수 아래에 앉은 채 형연 할 수 없는 기쁨 즉 법열(法悅)에 잠겨 있었다. 대우주 속에 실로 조그만한 인간에 불과한 자신이 대우주와 하나의 생명으로 통해 있는 자신을 발견한 그 목적을 달성하였다는 만족감과 기쁨으로 충만했고 그 만족감과 기쁨은 자신만의 것으로 끝나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기쁨은 온 누리의 생명이 있는 존재, 즉 중생(衆生)모두의 기쁨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자신이 성불한 기쁨과 만족감으로 혼자 볍열에만 젖여있다면 그것은 진실로 부처님이 취할 태도라고는 할 수가 없다.
법열(法悅)에 잠겨 빙그레 미소짓고 있는 그 순간에도 중생들은 생, 노, 병, 사의 고통에서 허덕이고 있다.
무엇이 행복이며 괴로움인지 조차도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나 혼자만의 안락을 누리는 것은 부처님의 도리가 아니다.
처음에는 스스로의 무고안온한 열반을 얻기 위함이지만 완전한 열반이란 개인주의적인 안락만이 아니다.
부처님께서는 중생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과 다름없이 보는 대자대비하신 분이다.
자신의 무고안온한 열반을 구한 이를 우리는 벽지불이라고 한다.
보리수 아래서 부처님은 법열의 자리로부터 몸을 일으켰다. 중생을 제도해야 한다는 움직임의
시작 되여 바로 거룩한 부처님의 길이 비롯된 것이다.
진리에 무지한 중생들에게 진리를 어떻게 알려 줄것인가?
어떻게 그들을 고통의 세계에서 밝음으로 이끌어 낼 수가 있을 것인가?
문제를 안고 처음으로 붓다가야의 녹야원으로 향하셨다.
그 다섯 비구가 수행하고 있었기 곳이기떄문이다. 고타마가 성도한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던
그들은 아는 체를 하지 않기로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고타마가 곁에 이르자 자신들도 모르게 일어나 자리를 권했다.
부처님은 이 자리에서 다섯비구 즉 교진여, 아사바사, 마하나마, 발제리가, 바사파에게
비로소 가르침을 펼치시니 이를 초전 법륜이라고 한다.
욕락과 고행의 두극단(二邊)을 버리고 중도를 취할 것과 사성제 팔정도의 법문으로써
그들을 깨우쳐 진리의 세계에 눈뜨게 하였다.
이리하여 비로소 불교가 세상에 출현하게 되었으며
불(佛; Buddha), 법(法; Dharma), 승(僧;Samgha)의 삼보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또 근처에서 부호의 외아들로 인생을 비관하고 번민하고 있던 야사(Yasa)라는 청년이 녹야원에서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출가하였고, 야사의 부모 아내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고 불자가 되었는데 이들이 우바새, 우바이의 시초이다.
또 야사의 친구55명도 감화를 받고 부처님의 제자가 되어, 귀의한 제자가 60명이 되었다.
이들이 진리를 증득하게 되자 부처님은 이들로 하여금 각 지방으로 가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게 하였다.
불본행집경(佛本行集經 전도선언)에 의하면
"그대들은 이미 해탈을 얻었다. 그러므로 많은 사람들의 이익을 원하고 많은 사람들의 안락을 위하여 그리고 세상에서 구하는 미래의 이익과 안락을 위하여 가도록 하라. 다른 마을로 갈 때 혼자 가되 두 사람이 한곳으로 가는 일이 없도록 하라. 그대들은 많은 사람들을 연민(憐愍)하고 섭수하여 이치에 맞게 잘 알아 들을 수 있도록 설법하라. 나도 우루벨라의 병장촌으로 가서 설법 교화 하겠다"고 하셨다. 가급적 빨리 많은 곳으로 가서 가르침을 펴도록 하시고 마가다국
왕사성(王舍城;Rajagrha)으로 향하였다.
이 길목에서 30명의 젊은이들을 교화하시고, 우루벨라의 병장촌으로 가셔서 사화외도(事火外道)의 바라문 가섭 3형제를 교화하여 제자로 삼았다.
이들 가섭3형제는 당시 왕사성에서는 가장 이름 있는 종교가 였으며 국왕인 빔비사라왕의 존경을 받고 있었다.
이들 삼형제는 부처님보다도 연상이 었는데 그들의 제자등 모두 1000명이 스승을 따라 부처님께 귀의하여 새로운 제자가 되었다.
이들의 귀의로 마가다국 국왕을 비롯한 국민들의 놀라움은 아주 컸다. 그로 인해 국왕과 왕실권속과 많은 신하들도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랐으며, 그때 가르침을 펼칠 장소를 지어 바쳤는데 이가 바로 최초의 불교 사원 죽림정사(竹林精舍)이다.
이로서 불교는 왕사성을 중심으로 크게 교세가 확장되여 갔다.
그 뒤 부처님은 고향인 카필라성으로 가서 부왕을 비롯한 많은 친척과 그 곳 사람들을 교화하고 아우 난다와 아들 라훌라를 출가 시켰을 뿐만 아니라 아난, 데바닷타, 어누룻다등 사촌동생과 적지 않은 석가족 사람들을 교화 귀의 시켰다.
그리고 코살라(Kosala)국의 수도인 사위성(舍衛城: Sravasti)의 큰 부호 수달다(Sudatta)가
많은 재산을 들여 유명한 기원정사(祇園精舍)를 지어 부처님의 교화에 큰 도움을 주었다.
그로부터 코살라국의 파세나짓왕과 그의 비 말리부인을 교화하고 기원정사를 중심으로
널리 가르침을 폈다.
부처님이 직접 교화한곳으로는 왕사성과 사위성이 가장 중심지였으며, 북쪽으로는 카필라, 남쪽으로는 바라나시, 동쪽으로는 참파, 서쪽으로는 코삼비등이 있다.
당시 그 가르침은 파격적으로 각계 각층에 펼쳐져서 종래의 풍습에 의해 출가한 수행자나
새로운 출가 수도자나 국왕, 왕비, 귀족, 부호, 평민, 천민이나 모두가 차별없이 교화 되었고,
큰 감화를 받게 되었다. 신분이나 출신에 의한 것이 아닌 오직 진리에 의한 질서만이 존중되었으며, 여자 출가 수행자(比丘尼)도 나오게 되었다.
그림에는 녹야원에서 처음으로 전법하는 모습과 수달다 장자가 아사세 태자의 동산을 사서
기원정사를 건립하고자 하는 장면, 흙장난을 하고 놀던 어린이들이 부처님께 흙을 쌀로 생각하고 보시하자 부처님께서 이것을 탑으로 바꾸는 장면들이 묘사되어 있다.
1)부처님의 귀향에 따른 왕가의 출가 소동
부처님께서는 성도(成道)후 풍찬노숙을 하면서 형극의 고행을 마친후 4여년동안 유행하며
포교 활동을 하시고 많은 제자들과 카필라성으로 금의환향하게 되었다.
열렬한 환영 속에서 귀향한 부처님의 영향으로 카필라성은 물론 나라 전체에 새로운 기류가 감돌기 시작하였다.
쌰카족에서 는 왕자들이 앞을 다투어 출가를 하게되자 왕실에서는 후계자의 문제로 큰 파문이
야기되게 되었다.
당시 왕위계승자인 밧디아(Bhaddiya)가 출가를 고집하자 당황한 왕실에서는 출가를 강경하게
반대 저지하였고 상호 대안을 제시하여 결국은 7년을 고집한 밧디아의 뜻과는 달리 7일간으로
단축하여 일곱왕자들과 출가 수행하고 돌아왔다.
이때 함께 출가를 하게된 우발리(Upali - 왕궁의 이발사 - 천민인 수드라계급)의 문제가 대두되었다. 교단의 규칙상 먼저 삭발한 사람이 상수인 윗사람 대우를 받게 되는데,
부처님은 우발리가 자신들의 종이였기에 출가 후에도 왕자들이 우발리위에 있게 되면 자만심이 생겨 수행에 지장을 초래할것으로 생각하여 우발리의 출가를 먼저 인정하고,
우발리부터 순서대로 삭발을 하였다.
불법의 평등 사상을 그대로 실천한 본보기로 높이 평가 받을만한 일이었다.
부처님은 그들을 7일간 혼자 있도록 하여 자신들이 과거의 왕자였다는 생각을 완전히 잊게한 다음 교단의 규칙대로 기꺼이 수행할 것을 다짐받고 정식으로 제자로 받아 드렸다.
그 다음 부왕과 양모인 마하파자파티, 자신의 아내였던 야소다라비, 왕족, 귀족, 일반인등 500여명이 재가신도로 귀의하거나 제자로 출가를 하였다.
왕후 마하파자파티와 야소다라비는 여러번의 거절에도 불구하고 아난의 노력으로 결국 불교 교단의 첫 비구니가 되었다.
2) 샤카족의 멸망
부처님 당시 강대국의 하나였던 코살라 국 파세나디왕과 빔비사라왕은 부처님의 큰 후원자들이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파세나디왕의 뒤를 이은 비두다바(Vidudaha 琉璃)왕에게 샤카족은 멸망하게 되었다.
파세나디왕은 미남 미녀가 많은 샤카족의 왕족이나 귀족의 미녀를 왕비로 삼기를 원하여 청혼을 하였는데, 그 청혼을 거절하기 어려웠던 샤카족은 그 대안으로 왕족 마하나마(Mahanama)와 그 하녀 사이에서 태여난 딸을 왕족이라고 속이고 코살라국 왕비로 시집을 보냈다.
그 몸에서 태여난 아이가 바로 비두다바였다. 그가 성정 하면서 외가집인 카필라 성에 갔을 때
샤카족 사람들은 그를 천민의 자식이라고 경멸하고 모욕을 주었다.
그때 어린 왕자의 가슴에 원한의 싹이 심어져, 부왕 파세나디왕의 제위시는 어쩔 수가 없었지만 자신이 왕위에 오르자 군대를 동원하여 샤카족의 정벌에 나섰다.
그때 부처님은 이미 노년에 접어든 시기였으나 자신의 조국이 멸망하는 것을 차마 보고만 있을수 없어 비두다바의 군대가 진격해 오는 길목에 말라 죽어가는 니그로다 나무 옆 땡볕에 앉아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많은 군대를 인솔하여 오던 비두다바는 나무 그늘을 마다하고 태양이 작열하는 땡볕에 앉아 있는 부처님을 발견하고 늙은 노인이 되어 슬픈 모습으로 자신을 기다리는 뜻을 짐작한 비두다바는 부처님께 정중히 예배를 하며,
"부처님이시여! 어찌하여 그늘을 마다하고 이처럼 뜨거운 불볕아래에서 앉아 계십니까?"
"대왕이여! 동족이 없는 것은 그늘이 없는 것과 똑 같습니다."
부처님이 이렇게 대답하자 비두다바는 군대를 그대로 철수하기를 세 번이나 반복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 뿌리깊은 원한은 참고 참아도 참을수 가 없어 네 번째의 정벌에 오르면서 이번에도
부처님이 보이시면 복수를 영원히 포기하고 되돌아간다는 각오를 하고 달려왔지만
부처님은 보이시지 않자 샤카족을 군왕을 위시한 모든 백성 가릴것 없이 모조리 살육하였다.
궁전은 불바다가 되고 카필라서은 폐허가 되어 현재는 그 흔적조차도 찾을 수 가없다.
이렇게 철처한 살육속에서 도 살아남은 두 그룹이 있는데 그중 하나는 불가사의하게 살아 남았다.
부처님께서는 망어(妄語; 거짓말)을 경계를 하였는데 이 가르침을 지키는 샤카 족 사람들 목에
칼을 들여댄 병사들은 물었다.
"너희들은 샤카 족이냐? 코살라 족이냐?"
만일 정직하게 샤카 족이라고 대답하면 그 자리에서 죽임을 당하는 판이다.
이 광경을 지켜본 한 장로는 너무나 참혹한 일이라 생각한 나머지 방편을 생각해 내었는데.
인도 사람들은 지금이나 예나 즐겨 씹는 담배 풀이 있는데 이 풀은 이 앓는 데도 씹었다고 한다.
이것을 씹고 있어면 대답을 하지 않아도 거짓말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소수이긴 하지만 그 씹는 담배 풀 덕분에 살아 남은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로서 샤카 족은 멸망하고 코살라국 역시 머지 않아 마가다 국에 멸망을 당하여
마우리야 왕조의 일부가 되고 말았다. 너무나 정확한 인과 응보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8,쌍림 열반상(雙林涅槃相 )
부처님께서는 바아살리 근처 대림중각강당(大林重閣講堂)에서 설법 끝에 석달 후에 입멸을 예고 하셨다.
그 후 쿠시나가라로 가시던중에 대장장이 춘다(Cunda)의 버섯죽 공양을 받으시고 아무 차별 없이 드셨다. 춘다의 공양을 수자타의 공양과 다를바가 없다고 보셨던 것이다.
부처님은 성도한지 45년이 되는 80세 때에 북쪽 쿠시나가라(Kusinagara)의 살라나무사이(少羅雙樹間)에 자리를 잡고 아난을 비롯한 여러 제자들에게 마지막 말씀을 하셨다.
"자기자신을 등불로 삼고 자기를 의지하라. 진리를 등불로 삼고 진리를 의지하라.
(自歸依 法歸依 自燈明 法燈明) 이 밖에 다른 것에 의지하여서는 안 된다.
그리고 너희들은 내 가르침을 중심으로 서로 화합하고 공경하며 다투지 말라.
물과 젖처럼 화합할 것이요, 물 위의 기름처럼 겉돌지 말라. 다함께 교법(敎法)을 지키고 배우며 수행하고 부지런히 힘써 도(道)의 기쁨을 누려라.
나는 몸소 진리를 깨닫고 너희들을 위해 진리를 말하였다.
너희는 이 진리를 지켜 무슨 일에나 진리대로 행동하여라.
이 가르침대로 행동한다면 설사 내게서 멀리 떨어져 있다 하여도 그는 항상 내곁에 있는것과
다름이 없다. 죽음이란 육신의 죽음이라는 것을 잊지 말라. 육신은 부모에게 받은 것이므로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은 어찌할수 없는 일이다.
여래는 육신이 아니라 깨닫음의 지혜이다. 육신은 여기에서 죽더라고 깨닫음의 지혜는 영원한 진리와 깨닫음의 길에 살아 있을 것이다. 내가 간 후에는 내가 말함 가르침이 곧 너희들의 스승이 될 것이다. 모든 것은 덧없다. 게으러지 말고 부지런히 정진하라."
이 말씀을 남기시고 부처님은 열반에 드셨다. 부처님의 육신은 이 세상을 떠났지만 그 가르침은 어두운 밤에 등불처럼 중생의 앞길을 밝게 비추고 있다.
살라나무 아래서 마지막 설법을 마치고 설법을 마치고 열반에 드시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사라쌍수 아래 길게 누워 열반에 드신 부처님과 그 주위로 비탄에 잠겨 있는 사부대중과 천룡팔부중의 장면, 가섭이 크게 슬퍼하자 부처님의 두발을 관 밖으로 내보이시는 장면, 아나율존자가 하늘로 올라가 부처님의 열반 소식을 전하자 마야부인이 천녀들과 허공에서 눈물을
흘리면서 꽃을 뿌려 공양하는 장면, 관이 성밖으로 저절로 들려 나가는 장면, 다비를 하니 사리가 비오듯이 쏟아 졌는데 이 사리를 모시려는 여덟나라 왕들에게 바라문이 골고루 나누어주는 장면들이 묘사되어 있다.
열반은 성도 하신지 45년 세수80세때 B.C 544년 2월 15일에 드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