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강나무꽃
박 순 태
서기瑞氣가 감돈다. 골짜기의 빙설이 동장군과 짝짜꿍이 되어 앳된 봄기운과 멱살잡이를 벌일 때, 샛노란 꽃송이가 산 중턱에서 그들만의 세상인 양 열광이다. 치솟고 또 치솟는 상향식 희열이다.
생강나무에서 기개氣槪가 솟구친다. 냉기 실은 찬바람이 앙상한 가지를 휘감아 돌아도 개의치 않은 채 달아오른 정기를 발산한다. 뭇 생명체에게 서둘러 봄맞이하라는 신의 알림 설정인가. 노랑 깃발로, 알싸한 향기로, 기운찬 함성으로 자연의 시간을 앞잡이 한다. 이웃한 수목은 눈이 멀었는가, 코가 막혔는가, 귀가 먹었는가, 동면冬眠의 잠꼬대만 웅얼거릴 뿐 기상할 기척이 없다. 언제쯤 기지개를 켜랴. 생강나무 꽃은 점점 더 드센 향기로 주변을 다그친다.
꽃 무더기에 코와 눈이 고정된다. 오감으로 받아들인 기운이 입에서 분사되어 허공에 점점이 수놓는다. 드디어 생강나무꽃 마력이 중간 숙주를 통해 온산으로 퍼져나간다.
충만된 기로 봄 산을 선점한 생강나무. 암수 다른 그루로 띄엄띄엄 떨어져 상대를 향해 음극과 양극 전류를 발산한다. 만발한 암수 꽃송이 사이에서 나는 갈피를 잡지 못한다. 한편에서 음기로 흡입하려 하자 또 다른 편에선 양기로 맞서 당긴다. 암술과 수술의 기가 허공을 휘저으며 질척거린다. 향기는 짝 찾기의 정찰병일까, 노예일까. 알싸하고 새콤한 향기, 상대를 탐하려는 양과 음의 주체할 수 없는 발화물질이리라.
생강나무꽃 암수 그루, 외양이 같으나 꽃을 피워내는 생성生成은 다르다. 가지마다 오종종한 꽃송이를 내밀고 있으면 수나무이고, 듬성듬성 꽃송이를 품고 있으면 암나무이다. 수그루의 꽃송이가 암그루의 꽃송이에 비해 크고, 개체 수는 암그루보다 배 이상이나 많다. 그래서일까, 양극 전류가 더 세게 흐르는 듯하다. 무슨 연유로 암수 다른 몸체로 음양의 꽃을 피워 극과 극의 기를 발산하는가. 신의 조종일까, 스스로 일구어낸 진화일까. 자웅이주雌雄異株의 생식生殖, 그 연유가 뭘까. 별난 생명체의 흥미로운 본능을 접하자니 마음속에서 또 하나의 마음이 은근슬쩍 수작을 부린다.
먼저 수나무 꽃가지를 꺾었다. 수술들의 꼿꼿한 기상에 내 눈이 고문당하고, 발산하는 향기에 코가 함몰된다. 헤집어 보니 상상하지 못한 꽃송이의 구성에 그만 눈을 감아버렸다. 건장한 수술 아홉에 퇴화한 암술 하나가 있는 듯 없는 듯 가물가물하다. 일반적으로 꽃의 가정은 일처다부제로서 암술 하나가 다수의 수술과 호흡 맞춰 운우지정에 흠뻑 젖는다. 그런데 생강나무 수꽃 속의 암술은 무용지물이 된 지 오래다. 기능을 상실하여 새 생명을 품을 수 없는 암술, 세월을 베고 누워있는 구름 같다.
등 뒤에서 암그루가 뒤질세라 음극 전류로 그물을 친다. 스르르 끌려가서 암꽃 속을 의뭉스럽게 염탐하다가 또 못 볼 것을 봐서 당황스럽기만 하다. 하나의 암술에 퇴화한 수술이 아홉이나 된다. 우뚝한 몸집에 도도한 측천무후 같은 암술, 고개를 뻣뻣이 쳐들고 사방을 두리번거린다. 암꽃 속의 수술은 가마솥에 삶긴 흐물흐물한 무를 연상시킨다. 생명의 씨앗이 사그라진 수술들 신세가 조금 전에 접했던 수꽃 속의 처량한 암술과 다름없다. 다수의 수컷이 암컷 하나를 당해내지 못하는 초주검 상태, 무슨 불균형의 운명일까.
한 지붕 아래에서 암수가 함께할 수 없는 생강나무꽃. 이쪽 나뭇가지에는 옹녀의 치맛자락이 펄럭이고, 저쪽 나뭇가지에서는 변강쇠 갓끈이 휘날린다. 태초에 자웅동화雌雄同花였을 때, 암술과 수술은 솟구치는 기운을 스스로 제어하지 못했던가. 겨울이 채 끝나기도 전 새벽녘부터 들썩이며 요란법석을 떨었나 보다. 참다못한 조물주가 암수 다른 꽃송이로 떼어놓아도 진정되지 않자, 아예 암수 나무로 분리하여 거리를 두고 따로따로 뿌리내리도록 조정했는가 싶다.
조물주가 바삐 서두르느라 마무리 정리가 매끄럽지 않은 걸까. 그들만의 웅혼雄渾한 기상을 여지없이 억눌렀던 게 애달팠을까. 아마 후자일 성싶다. 암꽃에는 원초적 본능에 몸부림치다 기진맥진한 수술의 잔재, 수꽃에는 생체리듬에 은근슬쩍 안달하다 혼을 잃어버린 암꽃의 유물을 남겨두었다.
스물아홉에 생을 마감한 김유정. 자신의 허약한 기력을 한탄하듯 샛노란 생강나무 꽃가지에 시어를 대롱대롱 매달았던가. 생강나무꽃을 동백꽃이라 이름하여 눈 꽂고, 코 박고, 입 붙이고, 마음 풀어 재꼈다. 수심가의 구절구절을 한없이 풀어내어 내세에 전했다.
천지조화의 참맛을 안내하는 생강나무꽃은 유별난 생식生殖 본능을 암수의 거리 조절로 최고점을 발한다. 사랑이 진하면 진할수록 일정한 틈이 필요함을 알려주는 지혜의 표상이자 자신을 지켜가는 철이다.
드센 알싸한 향기, 명철한 이성理性의 기능, 자연과학의 수학적 사유이다. 무엇보다 생강나무꽃은 부부유별夫婦有別의 상징물이다.
첫댓글 틈새없이 들꽃 사랑정원으로 심어 두고 왔습니다^^ - 봄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