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5. 8. 21 런던~1837. 6. 20 런던 근처 윈저 성.
영국 및 아일랜드의 왕이자 하노버의 왕(1830. 6. 26~1833. 7. 29 재위).
개인적으로는 의회개혁에 반대했으나 획기적인 1832년의 개정선거법을 수용했다.
이 개정법은 주민이 없는 '부패 선거구'에서 산업지역으로 대표권을 옮김으로써 영국 왕실 및 귀족 지주들의 정부에 대한 권한을 축소했다.
조지 3세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13세에 영국 해군에 입대, 미국 독립전쟁에 참전했으며 서인도제도에서 근무하는 동안 후일 해군 영웅이 된 호레이쇼 넬슨(나중에 자작)과 깊은 우정을 맺었다.
그러나 1790년 제대할 무렵에는 많은 동료 장교들 사이에서 평판이 나빴으며 수많은 애정행각을 벌여 부왕을 격노케 했다. 1794~1807년 아일랜드인 희극 여배우 도로시아 조단과의 사이에 10명의 사생아(姓은 피츠클래런스)를 낳았다.
작센마이닝겐의 아델하이트 공주와 결혼하여(1818. 7. 11) 두 딸을 낳았으나 모두 어려서 죽었다. 그래서 윌리엄이 죽자 영국의 왕위는 조카딸인 빅토리아에게 넘어갔고, 하노버 왕위는 동생인 컴벌런드 공작 어니스트 오거스터스에게 상속되었다.
형인 섭정공(후에 국왕 조지 4세, 1820~30 재위)의 유일한 적자인 샬럿 어거스타 공주가 죽자(1817. 11. 6) 그는 법정추정 상속인이 되었다. 1827년 4월 신임 총리 조지 캐닝이 윌리엄을 위해 해군장관직을 부활시켰으나 웰링턴 공작이 총리에 오르자 1828년 8월 사임해야 했다.
조지 4세의 왕위를 승계한 이후 형보다 총명하지는 못해도 공무에서 형보다 덜 이기적이고 더 적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1832년 5월, 총리인 그레이 백작 2세 찰스 그레이가 그에게 의회개혁안을 반대하는 상원 다수파를 이기기 위해서 적어도 50명의 새로운 세습귀족직을 만들자고 요청했다.
윌리엄의 반대로 이는 좌절되었지만 웰링턴은 토리당(보수당) 내각 구성에 실패했다.
그레이의 휘그당은 선거법 개정안을 통과시키기에 충분한 수의 세습귀족직을 주겠다는 국왕의 서면약속을 받은 후에야 직무를 재개했다.
큰 위협을 받은 상원은 법안 통과를 허락했다. 선거법 개정의 결과 로버트 필 경의 토리당은 1835년 1월 선거에서 하원의 과반수 의석 확보에 실패했다. 결국 그해 4월부터 윌리엄 4세는 과거에 해임했던 비타협적인 휘그당 총리 멜버른 자작 2세 윌리엄 램을 상대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