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yond reason
우리나라 최초의 선문·조계종 원류
현재 한국 불교를 대표하는 종파는 선종인 대한불교 조계종이다. 도의(道義, 道儀)의 가지산문(迦智山門, 821년)에서부터 긍양(兢讓)의 희양산문(曦陽山門, 935년)에 이르기까지 115년 동안 세워진 9개의 선문인 ‘구산선문(九山禪門)’은, 한국에서 선종이 확립되기 시작한 신라 말 고려 초기에, 이 땅에서 이루어진 최초의 선문이자, 조계종(曹溪宗)의 원류로 인구(人口)에 회자(膾炙)된다.
‘고려사’ 구산문 용어 첫 등장
“구산문에서 참학하는 승려들…”
구산선문이라는 용어가 처음 나타나는 것은 《고려사(高麗史)》, 《세가(世家)》 제10권으로, “선종(宣宗) 원년(1084년) 정월에, 보제사 승려 정쌍(貞雙) 등이 구산문에서 참학하는 승려들에게도 진사과의 예에 따라 3년에 한 번씩 선시(選試)를 치를 수 있도록 요청하자, 그것을 허락하고 시행했다”는 ‘내용’이 그것이다. 이후 여러 문헌에 달마구산문(達磨九山門)·구산선려(九山禪侶)라는 용어가 등장한다. 특히 《선문조사예참의문(禪門祖師禮懺儀文)》에서는 구산선문의 명칭과 장소, 그 개산조들을 구체적으로 밝히고, 구산선문의 개조와 보조국사 지눌(1158년~1210년)을 예참의 대상으로 하고 있다. 지눌이 예참의 대상인 것으로 보아서 《선문조사예참의문》은 고려 후기의 저술인 듯 싶다. 따라서 우리는 적어도 고려 후기 불교계에서는 구산선문을 한국선의 원형으로 이해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선(禪)’을 대표하는 언명은 불립문자(不立文字)·교외별전(敎外別傳)·직지인심(直指人心)·견성성불(見性成佛)이다. 이때 ‘불립문자’란 불교 경전의 문자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고 문자 이전으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또한 ‘직지인심’의 ‘인심’은 인간의 망심으로서의 분별심이 아니라 진심으로서의 절대적 주체를 의미한다. 또 ‘직지’는 진실한 자기의 진심을 깨닫는 것을 의미한다. 이때 깨닫는다 함은 상대적으로 깨달아지는 것이 아닌 자각이므로 진실의 자기에 돌아가는 것 이상의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마음[心]이 그러하듯이 ‘견성성불’에서의 ‘성’ 또한 상대적인 본성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자성(自性)으로 설명되는 인간의 원래적 본성으로 진실한 자아라고 할 수 있다.
선불교, 역사상 가장 혁명적 개혁
따라서 선은 구제자와 피구제자가 있을 수 없으며, 믿는 자와 믿는 대상이 없다. 그러므로 진실한 자아를 탐구하고 절대주체의 자각에 사는 자각적 종교이다. 또한 선은 궁극적 목적이 진실한 자아추구에 있으므로 형식과 표현을 중요시하지 않는다. 경전의 내용과 그리고 표현방법인 문자나 교설은 한갓 수단에 불과한 것이지 깊은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다. 경전이 말하고자 하는 내용 이전의 것, 혹은 경전이 말하고자 하는 내용 바로 그 자체를 귀히 여기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선불교는 불교 역사상 가장 혁명적인 개혁불교이다. 그것은 선불교가, 멀게는 붓다의 초기불교를, 가깝게는 전통적인 중국의 교학불교를, ‘마음의 종교’로 변화시켰기 때문이다. 이러한 선종의 사상이 나말여초에 한국에 전해지며, 이후 지눌과 서산을 거쳐 한국불교의 중심사상이 되는 것이다.
새로운 ‘시대정신’으로 자리 매김
4조 도신 선법 이은 법랑·신행
한국선 원류·주류로 보는 건 무리
‘산문(山門)’이란 글자 그대로 산을 중심으로 하여 정의를 내린 말이다. 신라 말 고려 초에 형성된 새로운 선불교 사상이 경주 등 신라의 중심지가 아닌 지리산 줄기와 태백산 줄기 등 9 개의 산을 중심으로 형성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산문’이라는 용어로, 지방을 중심으로 해서 전개되었고, 전개될 수밖에 없었던, 나말여초의 불교를 정의한다.
신라승 선진사상 배우려 당나라로
신라는 하대(809년∼935년)에 이르면 왕위쟁탈전과 사치·부패 등으로 골품제가 와해되면서 통치력이 붕괴되고 지방 분권화 현상이 광범위하게 일어나는 등 왕조의 붕괴를 예언하는 조짐들이 도처에서 일어난다. 불교계 역시 시대의 흐름을 외면한 채 왕실과 중앙 귀족의 절대적인 후원을 받고 있었던 현학적(衒學的)이고 전통적(傳統的)인 교학불교를 고집하고 있었다. 당시 중국은 이미 개혁불교인 선종(禪宗)이 크게 발달한 상태였기 때문에, 새로운 사상에 목말라하던 신라의 승려들은, 선진사상인 선종을 배우기 위하여 당으로 건너가게 된다.
골품제·교종 타락상 비판
그리고 배움을 마치고 귀국하여서는, 선종의 이론을 바탕으로, 신라의 골품제(骨品制)를 비판하며, 교종(敎宗)의 타락상을 질타하게 된다. 또한 이들 선사들은 수도 경주와는 멀리 떨어진 지방의 산간 오지에 선문을 개산함으로써 지방 호족들의 적극적인 지원과 귀의도 받게 된다. 그 뿐 아니라 드높은 수도정신과 더불어, 선종 본래의 사원노동을 중시하고, 불성(佛性)의 보편성(普遍性)을 강조하여 신분의 고하를 묻지 않는 선사들의 태도는 일반 민중들의 광범위한 지지도 받게 된다. 다시 말해서 구산선문은, 나말여초라는 격변기를 헤쳐 나갈 수 있는 하나의 대안을 제시함으로써, 새로운 ‘시대정신’으로 자리 매김 하게 되는 것이다.
한국선법 남종선 중심 전개
중국의 선법이 이 땅에 전해진 자취를 전해주고 있는 것 가운데 가장 오래된 현존 기록은 〈단속사 신행선사비〉이다. 이 비에 의하면 신라 36대 혜공왕 15년(779)에 지리산 단속사에서 입적한 신행(神行)이 법랑(法朗)선사로부터 심등(心燈)의 법을 전해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법랑의 행적이나 그 법통에 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다만 지증(智證)국사 도헌(道憲, 824∼882)의 비문에서 법랑의 법통을 언급하고 있는데, 거기에서는 신행(愼行)이라 표기하고 있으며, 그 스승 법랑이 중국으로 가서 제4조 도신(道信, 580∼651)의 법을 받은 것으로 되어있다. 그러나 신행의 법이 구체적으로 제자들에게 전승되었다는 증거를 찾기 어려울 뿐 아니라, 우리나라 선법이 전통적으로 6조 혜능(慧能, 638∼713)의 남종선을 중심으로 해서 전개되어왔다는 점을 생각해본다면, 6조 혜능 이전의 4조 도신의 선법을 전등했다는 법랑과 신행의 선법을 한국선의 원류나 주류라고 보기에는 많은 무리가 따른다.
도의, 구산선문 시작이자 한국선 효시
그렇기 때문에 784년(선덕왕 5) 중국 당나라 강서(江西) 홍주(洪州)의 개원사(開元寺)로 유학 가서 마조(馬祖)의 제자인 서당지장(西堂智藏)으로부터 “진실로 법을 전할 만하다면 이런 사람이 아니고 누구에게 전하랴”하면서 법맥을 전수받으며, 또 사숙인 백장회해(百丈懷海)로부터도 “강서 (마조도일의) 선맥이 몽땅 동국으로 가는 구나”라는 극찬을 받고, 821년(헌덕왕 13)에 귀국하였으나, 당시 교학만을 숭상하고 선법을 무위(無爲)하다고 힐난하며 믿지 않는 풍조를 보고는, 아직 때가 도래하지 않았음을 느끼고는, 그 길로 강원도 양양 설악산 진전사(陣田寺)에 들어가 40년 동안 산림에 은거하다가, 제자 염거(廉居)에게 남종선을 전수하고 입적한, 훗날 가지산문(迦智山門)의 개조(開祖)로 일컬어지게 되는 도의(道義, 道儀)를, 오늘날 한국선이 정착할 수 있는 기초를 다진 실질적인 선구자로 간주하여, 그가 귀국한 821년을 구산선문의 시작이자 한국선의 효시로 보는 것이다.
가지산문과 실상산문
가지산문(迦智山門)은 보조선사(普照禪師) 체징(體澄, 804∼880년)이 860년경 신라 헌안왕의 권유로 전라남도 장흥군 유치면 가지산 보림사(寶林寺, 迦智寺)로 이주한 뒤, 김언경 등 신라 중앙귀족의 후원을 받으면서, 형성된 선종 9산문의 한 파이다.
체징은 웅진(현재의 충남 공주) 출신으로 어릴 때 출가해 도의의 법을 전해 받아 스승을 가르침을 펴고 있던 염거(廉居)를 찾아가 그의 인가를 받은 도의의 손제자다. 그는 837년(희강왕 2)에 당나라에 들어가 여러 선지식을 찾아뵙고 840년(문성왕 2)에 다시 신라로 돌아온 이후, 개산하여 도의를 제1조로 하고 염거를 제2조로 자기를 제3조로 하여서 남종선법(南宗禪法)을 표방하면서 800여 명의 제자를 배출하여 가지산문을 일으켰다. 그렇기 때문에 가지산문의 실질적인 개산조(開山祖)는 체징이 된다.
체징의 제자 중에 그 행적을 알 수 있는 자는 형미(逈微)이다. 그는 진성왕 5년(891) 중국에 들어갔다가 효공왕 9년(905)에 귀국하였다. 그는 해동(海東) 4무외사(四無畏士)의 한 사람으로써 고려 태조 왕건의 귀의를 받아 개경으로 갔다가 궁예로부터 박해를 받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후 보림사 가지산문의 선맥은 고려 말까지 이어져서, 《삼국유사》를 지은 일연스님도 가지산문에 속한다.
실상산문(實相山門)은, 헌덕왕 때(809년∼825년) 당나라로 건너가 조계 혜능(慧能)의 선맥인 마조(馬祖)의 제자였던 지장의 문하에서 선종의 진리와 법을 전해 받고 깨달아 흥덕왕 1년(826년)에 귀국한, 증각대사(證覺大師) 홍척(洪陟)이 흥덕왕 3년(828) 전라북도 남원시 산내면의 지리산 기슭 평지에 지실사(현 실상사)를 연데서 비롯된다.
최치원이 “북산에는 도의요. 남악에는 홍척”이라고 한 것으로 보아 홍척보다 5년 앞서 821년(헌덕왕 13년)에 귀국한 도의는 설악산에 은거하고 있었고, 홍척은 남쪽인 지리산에 자리 잡고 활동하였음을 알 수 있다. 맨 처음 중국으로 건너가 지장에게서 남종선을 배워온 이는 가지산문의 도의선사이지만, 가지산문이 도의의 3대 법손 체징 때 와서야 비로소 독립적인 산문이 형성되었음을 상기한다면, 실상산문은 사실상 구산선문 중 최초로 개산된 산문임을 알 수 있다.
홍척은 1000여 명에 이르는 많은 제자를 배출하였는데, 그 중에서 수철(秀澈)이 법손(法孫)이 되어 실상산문의 제2대 조사가 되었다. 이때가 실상사 역사에서 가장 번창했던 때로 약사전에 모셔진 철불(鐵佛)이 만들어진 시기다. 이 불상은 4천근이나 되는 철을 녹여 만들었다고 하는데, 3m가량 되는 거불로 우리나라 철불 가운데 가장 크다.
신라 말 고려 초에는 철제농기구가 보급되어 철을 다루는 기술이 발달하였으며 호족들은 이를 토대로 경제력을 높이는 한편 무기를 제조하여 독자적인 행동을 감행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철제기술의 발달로 선종사찰에는 어김없이 철불들이 등장하게 된다. 그리고 이 철불들에는 전 시대에 볼 수 없었던 새로운 특징이 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불상에서, 고매한 불성이나 자비로움보다는, 이제는 무엇이든 꿈꾸고 할 수도 있다는 호족들의 야심이 엿보이는 것이다.
동리산문과 사굴산문
동리산문(桐裏山門)은 적인선사(寂忍禪師) 혜철(慧哲, 785년∼861년)이 839년(신무왕 원년) 전라남도 곡성군 죽곡면의 동리산 대안사(大安寺, 泰安寺)에서 개산한 산문이다. 그는 15세에 출가하여 처음 태백산 부석사에서 화엄을 배우다가 30세(814년) 되던 해에 당으로 건너간다. 앞서 말했던 도의·홍척과 마찬가지로 마조계의 지장선사를 만나, 심인(心印)을 전수받는 등, 30여 년간을 공부하다가, 839년 귀국한다. 즉 구산선문 중 가지산문, 실상산문 그리고 동리산문이 모두 지장의 선법을 이은 것이다.
도선, 신격화한 비역사적 존재
이후 풍수지리의 원조라 불리는 도선(道詵)으로 여겨지기도 하는 옥룡사 계열의 도승(道乘)과 태안사 계열의 여(如)가 법을 이었으며, 그들은 각각 경보(慶甫)와 윤다(允多)를 제자로 두었다. 동리산문 중 옥룡사 계열의 도승[도선]은 개성 중심의 풍수지리를 제창함으로써 왕건이 고려국을 건설하여 후삼국 시대의 혼란을 수습하는데 이념을 제공하였다고 주장되기도 한다. 그러나 역사적 사실과 부합되지 않는 점이 많아 후대의 이런 견해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즉 고려 건국의 정통성을 갖기 위해 고려 역대 왕실이 풍수지리의 원조라 불리는 신격화한 비역사적 존재로서 도선이라는 인물을 의도적으로 만들어냈다고 보아야 한다.
다른 한편 도승[도선]의 제자 경보는 진성왕 6년(892) 중국에 들어가 동산양개(洞山良介) 계통의 선법을 공부하다가, 신라 경명왕 5년(후백제 견훤 30년, 921년) 귀국하여, 견훤의 도움으로 전북 전주의 남복선원(南福禪院)에 머문다. 그는 후에 견훤의 허락을 받아 스승이 머물던 전남 광양시 옥룡사로 돌아가서 사찰을 재건한다. 훗날 왕건은 삼한을 통일한 후 경보를 부처님을 받드는 예로 존중하였다 한다.
곡성 태안사, 동리산문의 중심사찰
동리산문 중 태안사 계열의 윤다는 경보보다 일찍 왕건의 귀의를 받는다. 왕건의 도움을 받아 윤다는 개산조인 혜철이 머물렀던 태안사에 132칸의 당우를 짓고 대사찰을 이룩하기도 한다. 이후 태안사는 동리산문의 중심사찰이 되며, 고려초에는 송광사·화엄사 등 전라남도 대부분의 사찰이 이 절의 말사였으나, 고려 중기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 이후에 송광사가 수선(修禪)의 본사로 독립됨에 따라 사세가 축소되었다. 태안사는 1925년 최남선이 찾아와 “신라 이래의 이름 있는 절이요, 또 해동에 있는 선종의 절로 처음 생긴 곳이다. 아마도 고초(古初)의 신역(神域)같다.”고 극찬한 곳이기도 하다. 물론 최남선의 말 중 ‘선종의 절로 처음 생긴 곳’이라는 말은 잘못된 것이지만, ‘태고의 신비로움을 간직한 신성한 구역 같다’라는 말은 크게 동감이 된다.
사굴산문, 통효국사 범일이 개산
수선사(修禪社) 결성하여 지눌(知訥) 배출
가지산문과 고려 중엽 구산선문의 맥 이어
사굴산문(闍崛山門)은 통효국사(通曉國師) 범일(梵日, 810년∼889년)이 강원 강릉시 구정면 사굴산 굴산사(崛山寺)에서 847년 개창한 산문이다. 범일은 15세(824)에 출가하여 흥덕왕 6년(831) 당나라로 갔다. 그 곳에서 마조의 제자인 염관제안(鹽官齊安)으로부터 “실로 동방의 보살이로다”는 칭찬을 듣고 6년간 그의 문하에서 정진했으며, ‘평상심이 곧 도’라는 말에 크게 깨쳤다. 뒤에 청원행사(靑原行思)-석두희천(石頭希遷) 계열인 약산유엄(藥山惟儼)을 찾아가 도를 묻고, “대단히 기이하구나! 대단히 기이하구나! 밖에서 들어온 맑은 바람이 사람을 얼리는구나!”라는 극찬을 받기도 하였다. 천하를 주유하다가, 844년 법난을 만나 곤경을 피해 상산(商山)에 가서 혜능의 탑에 참배한 뒤 847년(문성왕 8) 귀국했다.
범일, 선과 교를 달통한 승려
‘평소의 마음이 곧 도[平常心是道]’라고 강조한 범일국사의 가르침에서 특이한 것은 유명한 ‘진귀조사설(眞歸祖師說)’이다. 천책(天𩑠)의 《선문보장록(禪門寶藏錄)》(고려 충렬왕 19년, 1294년 편찬)에 의하면, 범일은 진성여왕이 불교의 선·교 양종에 대해서 물은 데 대하여 “우리 본사인 석가모니께서 태어나서 사방으로 각기 일곱 걸음을 걷고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설법을 하였다. 그 뒤에 성을 넘어 출가하여 설산 중에서 공부를 하다 샛별을 보고 도를 깨달았는데 이미 깨달은 이 법[敎]은 지극한 깨달음이 못되었다. 그래서 수 십 개월 동안 다시 유행을 하여 진귀조사를 심방하고서 현묘하고 극진한 사무친 도[禪]를 비로소 깨달았다. 그래서 이것이 바로 교외별전이다.”고 설했다 한다. 교는 석가세존으로부터 나왔으나 선은 진귀조사에게서 나왔으며 석가세존이 오히려 진귀조사에게 법을 물었다는 것이다. 과연 이러한 기록이 사실에 근거한 것인가 하는 것은 의심이 가지만, 진성여왕이 ‘교종과 선종'의 차이를 범일에게 묻고 있다는 내용에서, 우리는 범일이 선과 교를 달통한 승려로서 받아들여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주지하다시피 사굴산문은, 훗날 수선사(修禪社)를 결성하여 송광사에서 선종을 다시 일으킨 지눌(知訥)을 배출하여, 가지산문과 함께 고려 중엽 구산선문의 맥을 잇게 된다.
성주산문
“중국에 선법 없어지면 동이에 물어야 될 것”
성주산문, 대낭혜국사 무염이 개산
성주산문(聖住山門)은 대낭혜국사(大朗慧國師) 무염(無染, 800∼888)이 충청남도 보령시 미산면 백제 오합사(烏合寺, 뒤에 성주사로 고침)터에 847년 세운 산문이다.
무염은 신라 29대 태종무열왕의 8대손이며 진골 신분에서 강등된 육두품 출신이었다. 10세에 출가해 설악산 오색석사(五色石寺)의 법성선사(法性禪師) 아래서 공부했으며, 이때부터 선과 인연을 맺었다. 그 후 영주 부석사로 옮겨 화엄학을 공부하는 등 선교를 두루 섭렵하다가, 헌덕왕 13년(821)에 중국에 들어가 마조의 제자인 마곡보철(麻谷寶徹)로부터, “나의 스승, 마조께서 나에게 예언하시기를 ‘만일 동쪽 사람으로서 눈에 뜨이게 두드러진 이를 만나거든 그를 길거리로 보내라. 지혜의 강물이 사해에 넘치게 되리니, 그 공덕이 적지 않으리라’하셨는데 스님의 말씀이 그대에게 맞는 도다. 나는 그대가 온 것을 환영하여 다시 동토에서 으뜸가는 선문을 세우게 하노니, 가거라. 기꺼이 가거라.”라는 당부와 함께 법맥을 전수받고, 사숙인 불광여만(佛光如滿)으로부터는, “내가 많은 사람을 겪었으나 이와 같은 동국인을 본 적은 드물다. 뒷날 중국에 선법이 없어지면 동이에게 물어야 될 것이다.”라는 극찬을 받는다.
성주사 쌀뜨물 성주천 십리나 흘러
이후 문성왕 7년(845) 귀국하여서, 같은 무열왕계의 후손으로서, 왕위 쟁탈전에서 패한 남포(현재의 보령)지역의 호족이자 왕자인 김흔(金昕)의 시주를 받아 성주산문을 열었다. 성주산문은 김흔이 김인문의 유산을 물려받아 그것을 경영하기 위해 개창되었기 때문에, 당시로서는 거대한 재력과 인력을 갖추고 있었다. 성주사의 규모는 대개 불전 80칸, 행랑 800여칸, 수각(水閣) 7칸, 고사(庫舍) 50여 칸으로 알려져 있다. 거의 1,000여 칸에 이른 엄청난 규모의 사찰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한창 때의 성주사는 충청도는 물론 온 나라에서도 손꼽히는 절이었고 신라 하대 구산선문에서 가장 번창했던 일문으로 특히 이곳에서 선풍을 떨친 무염국사의 문도는 2,000여 명에 이르렀으니 수도승들이 공양하느라 쌀을 씻은 뜨물이 성주천을 따라 십리나 흘러내렸다는 말이 전할 정도다.
무염국사, ‘무설토론’ 주창
무염국사는 ‘말에 얽매이거나 이론에 의지하지 않으며 곧장 심법(心法)에 직입한다’는 ‘무설토론(無說土論)’을 주창한 것으로 유명하다. 천책의 《선문보장록》을 보면 무염은 철저하게 선 우위의 입장에서 선과 교를 대비시키고 있다. 선을 무설토(無舌土), 교를 유설토(有舌土)라고 하며, 언어에 매이지 말고 선을 통한 무한진여의 세계로 나아가야 함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교는 문무백관이 그 직책을 지키는 일이고, 선은 제왕이 팔짱을 끼고 침묵을 지키고도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순수한 조사(祖師)의 견지에서 무상(無相), 무위(無爲), 무전(無傳)이라야 선(禪)”이라는 것이다.
교학 일색 고려불교에 선 중요성 전해
하지만 다른 시각도 있다. 시대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선문보장록》은 교학 일색의 당시 고려 불교계에서 선의 중요성을 가르치기 위하여, 무염의 ‘무설토론’을 교묘하게 첨가·개조하였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400여 년 뒤의 기록 《선문보장록》(1294)에서는 ‘무설토론’이 교종에 대한 선종의 절대적 우위를 설명한 것으로 나타나지만, 보다 가까운 60여 년 뒤에 쓰여진 《조당집祖堂集》(952)에서는 ‘무설토론’이 선법 자체에 있는 상대적인 것을 뛰어넘은 절대적 경지로 설명하기 때문이다. 실제 그는 선교의 비교에 대한 물음에, “선법을 바르게 전하는 근기는 법을 구하지 않기 때문에 스승도 필요치 않나니, 이것이 혀[말] 없는 국토요[무설토], 진실에 맞추어 법을 구하는 사람은 거짓 이름인 말로써 설명을 하나니, 이것이 혀[말] 있는 국토니라[유설토].”라고 대답한다. 그렇기 때문에 뛰어난 조사는 무설토와 유설토를 동시에 다 갖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자산문과 봉림산문
사자산문, 개산자-징효 개산조-도윤
사자산문(獅子山門)은 실제 개산자(開山者)는 징효대사(澄曉大師) 절중(折中, 826∼900)이지만 개산조(開山祖)는 철감선사(徹鑑禪師) 도윤(道允, 798∼868)이다.
도윤, 화순 쌍봉사에서 선법 펼쳐
도윤은 헌덕왕 17년(825)에 중국에 들어가, 마조(馬祖)의 제자인 남전보원(南泉普願)으로부터, “우리 종(문)의 법인이 몽땅 동국으로 돌아가는구나.”라는 말과 함께 법인을 얻고는, 문성왕 9년(847)에 귀국하여 전남 능주(綾州, 현재의 화순군)의 쌍봉사로 가서 크게 선법을 펼쳤다.
절중, 화엄에서 출발 선의 세계 들어가
절중은 도윤의 제자인데 사자산 석운선사(釋雲禪師)의 초청으로 강원도 영월군 주천면 사자산 흥녕선원(현 법흥사)에 882년 산문을 실제로 개창하게 된다. 당시 신라의 왕실은 이 절을 중사성에 예속시켜 사찰을 돌보게 할 정도로 지극한 관심을 보였는데, 산문이 번창할 때는 2,000여 명이 넘는 스님들이 수행했으며, 공양 준비를 위해 쌀을 씻으면 10여리 밖에 떨어진 수주면 무릉도원까지 그 물이 흘러갔다고 한다. 그러나 절중은 왕이 그를 국사(國師)로 봉하고자 하였지만 신라 왕실의 귀의를 뿌리치고는 지방 호족과 연계하였다. 절중은 우리나라를 떠난 적이 없으며, 화엄학(華嚴學)의 무애법계연기(無碍法界緣起)에 입각한 깨달음을 터득했다. 화엄학에서 출발해 선(禪)의 세계에 들어간 것은 우리나라의 선이 후대에 화엄학과 깊은 관련을 가지게 된 특징이기도 하다.
봉림산문, 원감국사 현욱이 개산
봉림산문(鳳林山門)의 개산조는 원감국사(圓鑑國師) 현욱(玄昱, 787∼868)이다. 그는 헌덕왕 16년(824)에 중국에 들어가 마조의 제자인 회희(懷暉)의 법인을 받아 희강왕 2년(837) 귀국한 뒤 경문왕의 청으로 혜목산(慧目山)의 고달사(高達寺)에 주석하였다.
심회 행보 삼국경영체계 짐작케 해
진경선사(眞鏡禪師) 심희(審希, 854∼923)는 구가야(舊伽倻) 왕족의 후예로서 그의 신분적인 한계로 말미암아 중앙 정계로의 진출이 어려운 형편이었다. 이에 심희는 9세에 출가하여 혜목산의 현욱에게 가서 가르침을 받는다. 심희는 효공왕 때 지금의 경상남도 창원시 봉림동에서, 김해 지방의 가야계 김씨 세력인 김율희(金律熙)와 김인광(金仁匡) 부자의 후원으로, 봉림사를 창건하여 선풍을 드높이며 실질적으로 봉림산문을 개산(890)하고, 그의 스승인 현욱을 개산조로 추앙한다. 심회는 진성여왕의 청을 거절하는 등 반 신라적 경향을 띠기도 하다가, 진성여왕의 뒤를 이어 왕위를 계승한 효공왕의 귀의는 받아들이는 등 친 신라적 경향을 띠기도 한다. 심희가 왕실의 청을 거역한 것은 그의 단월(檀越) 세력이 반 신라적 경향을 띠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 효공왕의 귀의를 받아들인 것은 효공왕이 김해 지역의 호족 세력과 우호관계를 유지하고자 한 것에 대하여 긍정적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심희는 왕건과 연결되어 918년에는 고려 왕실에 나아가기도 했다. 이 사실로 미루어 특정지역을 중심으로 후삼국 세력과 각기 연결되는, 삼국 경영체제의 일환을 짐작할 수 있다.
법계변조, 새로운 종교와 정치관계 재편성 이유
수미산문, 진청국사 광조사에서 개창
수미산문(須彌山門)은 진철국사(眞徹國師) 이엄(利嚴, 866∼932)이 황해도 해주시 수미산 광조사(廣照寺)에서 개창한 산문이다. 이엄은 12세 때 가야산(伽倻山) 갑사(岬寺)의 덕량(德良)을 따라 출가하고, 정강왕 1년(886) 도견(道堅)에게 구족계를 받았다. 진성여왕 10년(896)에 당나라로 건너가 청원행사(靑原行思)의 법맥인 운거도응(雲居道膺)에게서 법인을 받은 뒤 효공왕 15년(911) 귀국하였다. 경남 김해(金海) 승광산(僧光山)에 절을 짓고 4년 동안 선종을 전파하기도 하고, 영동(永同) 영각산(靈覺山)에 머물기도 하다가, 고려가 건국된 918년 왕건의 부름을 받고 개경(開京)에 들어가 스승의 예우를 받았다. 932년 태조가 황해도 해주 수미산(須彌山)에 창건한 광조사(廣照寺)의 주지가 되어 선풍을 선양하면서, 수미산문을 개창하였다. 이엄과 더불어 여엄(麗嚴)·경유(慶猷)·형미(逈微) 4인은 모두 당 도응의 법을 전해 받아와서 왕건과 연결되고 있기 때문에, 이들을 해동(海東) 4무외사(四無畏士)라고 불렀다. 이들의 사상 경향은 고려 왕건을 보위하는 성격을 지니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희양산문, 정진국사 봉암산에서 선풍 선양
희양산문(曦陽山門)은 정진국사(靜眞國師) 긍양(兢讓, 878∼956)이 경북 문경군 희양산 봉암사(鳳巖寺)에서 선풍을 선양하여 하나의 산문을 이루었다. 긍양(兢讓)은 효공왕 4년(900)에 중국으로 건너가 청원행사(靑原行思) 계열인 도연곡산(道緣谷山)에게서 법을 얻고, 경애왕 원년(924)에 귀국하여 강주 백엄사(伯嚴寺)에 머물렀다. 그 뒤 고려 태조 18년(935)에 더 나은 도량을 찾아 나섰다가 마침 그의 사조(師祖)였던 지증국사(智證國師) 도헌(道憲, 824∼882)이 머물렀던 절이 허물어져 있음을 발견하고 그 터에 새로 봉암사를 일으켰다. 그렇기 때문에 희양산문(935년 개산)은, 수미산문(932년 개산)보다 3년 늦게 개산한 것이 되기 때문에, 구산선문 중 맨 마지막 산문이 된다. 여기에서 그는 도량을 넓혀 태조로부터 광종에 이르는 역대 왕들의 귀의를 받았으며, 많은 제자를 배출하여 희양산문의 가풍을 확립하였다.
희양산문, 개산조를 도헌
중창조는 긍양으로 보는 시각도
그러나 다른 시각도 있다. 희양산문의 개산조를 도헌으로, 중창조를 긍양으로 보는 것이다. 앞에서 이미 진술하였듯이 신라의 법랑은, 중국의 북종선 계통인 4조 도신의 법인을 받아서 신행(神行, 愼行)에게 전하였다. 그는 다시 준범(遵範)에게, 준범은 다시 혜은(慧隱)에게 전하였다. 혜은이 다시 도헌(道憲)에게 법을 전하였으므로 도헌은 4조도신의 북종선의 법맥을 이은 셈이 된다. 도헌은 다시 양부(楊孚)에게 법을 전하고 양부가 긍양에게 법을 전하였으므로 도헌은 긍양의 사조(師祖)가 된다. 기록에 의하면 도헌은 어느 신도의 청으로 희양산에 새로 지은 절인 봉암사에 가서 좀 지내다가 다시 현계산으로 가서 생을 마쳤다. 그래서 그가 한때 머물었던 희양산 봉암사에는 그의 비가 아직 남아있다. 만일 우리가 희양산문의 개산조를 도헌이라고 한다면, 희양산문은 구산선문중 북종선의 선법을 이은 유일한 산문이 되면서, 동시에 구산선문 중 유일하게 중국에 들어가지 않고 산문을 연 종파가 되는 셈이다. 《선문조사예참의문》에서도 희양산문의 개산조가 도헌(道憲)으로 되어있다. 긍양대사의 비문에 의하면 그의 할아버지 격인 도헌이, 남종선 계통인 마조의 제자인 심감(神鑑)의 법인을 받아온, 쌍계사 혜소(慧昭)의 법인을 이은 것으로 되어있다. 법계가 변조된 것이다.
이러한 법계 변조는 직접적으로는 왕건의 고려 건국에 따른 새로운 종교와 정치관계의 재편성에 이유가 있었으며, 간접적으로는 남종선 일색인 당시 불교계의 분위기를 감안한 데 있었다. 그러나 남종선이 고려 초의 선문을 주도하였음을 반영하는 법계 변조에도 불구하고 희양산문의 저류에는 북종선의 흐름이 있었다는 점을 부인할 수는 없다. 이후에 봉암사의 중창을 긍양이 추진하여, 전성기에는 3000여 명의 수도승이 도를 닦는 거대한 사원으로, 고려왕실에 의해 우뚝 선 것은 역설적으로, 한편으로는 불교가 왕권에 종속되는 모습을 보여주고, 다른 한편으로는 구산선문이 초기 선종의 건강함을 상실한 징후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구산선문, 우리나라선 이해 문제와 직결
구산선문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것은 우리나라 선을 어떻게 이해 할 것인가 하는 문제와 직결된다. 주지하다시피 구산선문은 모두 남종선 일색이다. 남종선이란 6조 조계혜능의 종지를 잇는 것을 그 정통으로 삼는 선적 계열을 말한다. 신라 후기에 선법을 개산한 각 산문의 개조들은, 아래의 <구산선문 법맥도>에서 보듯이, 거의 모두가 다 혜능의 법을 이은 남종선 홍주종(洪州宗) 마조도일(馬祖道一)의 손제자이다. 고려 초에 개산된 수미산문과 희양산문도 이 점에 있어서는 마찬가지이다. 수미산문을 개산한 이엄의 법사는 운거도옹인데, 운거도응은 육조혜능의 제자인 청원행사의 현법손(玄法孫)이다. 앞에서 이미 서술했듯이, 아래의 표에는 나타나 있지 않지만, 희양산문의 실질적 개산조인 긍양에게 법을 전한 곡산도연, 역시 청원행사 계열이다.
<구산선문 법맥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