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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3. 묵상글 들 (부활 5주 수요일-“삭정이는 아닌지 돌아보는 오늘”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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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3. 김 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부활 5주 수요일-삭정이는 아닌지 돌아보는 오늘
오늘 주님께서는 당신을 포도나무라고 하시며
우리는 당신의 가지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바오로 사도의 그리스도 신비체 교리와 맥을 같이 합니다.
우리는 그분 지체들로서 그분과 일치하여 한 몸을 이룬다는 교리 말입니다.
이 가르침이 맞다고 우리가 인정한다면 우리가 그분에게서 떨어지면
곧 죽게 된다는 것은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너희가 나 없이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는 말씀은
그래도 거부감이 있을 수 있겠습니다.
왜냐면 너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자신감을 심어주는 것이 요즘 추세인데,
주님께서는 제자들의 품위를 높이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깎으시고, 스스로는 아무것도 못 한다고 기죽이시는 것이 아닌가요?
예를 들어 마음씨 좋은 사장이라면 자신의 밑에서 정비기술을 배운 사람이
이제 배울 것 다 배웠으니 나가서 혼자 자신의 가게를 내도록 하는데 비해
마음씨 고약한 사장은 계속 자기 밑에서 자기에게 의존해 살도록
기술을 다 가르쳐주지 않는데 주님도 그러시는 것이 아닌가요?
이 지점에서 우리의 믿음이 필요할 것입니다.
주님은 그런 분이 아니고 이 말씀도 사랑의 충고라고 믿는 믿음 말입니다.
그것은 오늘 복음에 이어지는 내일 복음에서 제자들을 더 이상 종이라
부르지 않고 친구라고 부르겠다고 말씀하신 것을 봐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의 뜻은 진정 무엇입니까?
제 생각에 그것은 첫째로 나라는 존재, 아니 인간이라는 존재가
어떤 존재인지 엄밀히 보고 하느님 안에서 무엇이든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사랑이신 하느님께서 창조하셨기에 사랑의 존재이지만
하느님처럼 전능하지는 않기에 하느님 사랑에 연결되어 있어야 하는
존재이고, 그래야 하느님 사랑 안에서 열매를 맺는다는 겁니다.
지혜서 11장을 보면 "당신께서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기에 모든 사람에게
자비하시고 모든 것을 사랑하신다."라고 함으로써 전능하심이 사랑의
원천임을 탁월하게 갈파하는데 이것을 뒤집으면 우리는 전능하지 않기에
비록 사랑에서 태어난 존재이고 사랑을 지향하는 존재이지만
독자적인 사랑으로 사랑의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당신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말씀하신 것은
당신 없이는 우리가 아무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말씀과 같은 뜻이고,
하느님 사랑에 연결된 우리의 사랑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뜻일 텐데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봐야 할 것은 사랑의 열매란 무엇인지 그것입니다.
제 생각에 사랑의 열매란 선의 창조입니다.
삼위일체 사랑이신 하느님이 모든 선을 창조하시고,
사랑하는 남녀가 자녀를 생산하듯이 주님 사랑에 연결된 사랑은
여러 가지 좋은 결과를 낳는데 말하자면 사랑에 보람이 있는 것입니다.
우선 사랑을 했는데 내가 기쁘지도 않고 행복하지도 않다면
아무 열매가 없는 거라고 할 수 있는데 나는 지금 사랑의 기쁨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많은 사랑이 나는 사랑한다고 했는데 그에게는 사랑이
못 되는 경우가 많은데 나의 사랑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으로 받아 들여져 그도 기쁘고 행복합니다.
그런데 나의 사랑을 이렇게 받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라 많습니다.
그렇다면 나의 사랑은 그만큼 더 많은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살아있긴 하는데 생기도 기쁨도 없고,
그래서 그리 행복하지도 않습니다.
그렇다면 주님께 붙어 있긴 하지만 아마 삭정이일 것입니다.
내가 혹시 삭정이로 주님께 붙어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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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3. 오 상선 바오로 신부님. 부활 제5주간 수요일
오늘 미사의 말씀은 주님과 우리가 한 몸이라고 하십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요한 15,5).
가지는 나무의 일부입니다. 나무는 땅에서 끌어올린 양분을 가지 끝까지 전달해 꽃도 피우고 열매도 맺고 잎도 무성히 돋게 합니다. 그러면서 나무는 전체적으로 더 풍성해지지요. 가지는 홀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홀로 떨어져 있다면 부러지거나 잘려나가 곧 폐기될 죽은 가지일 뿐이지요.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요한 15,5).
포도나무이신 예수님께서 가지인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당신을 떠나면 너희는 무능해지고 무기력해져 결국 망할 거라는 저주나 으름장으로 들으면 곤란합니다. 그건 사이비 종교에서나 하는 이야기지요.
오히려 예수님의 이 말씀은 "너희와 내가 함께라면 무엇이나 할 수 있다"는 뜻으로 들립니다. 엄청난 긍정의 기대와 격려가 담겨 있지요. 조금 다른 각도로 한 걸음 더 들어가면, "나와 함께 하지 않은 일은 아무리 세속적으로 성공한 듯 보여도 실상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속말 또한 느껴집니다.
제1독서에서는 초대 교회에서 주님의 가르침이 자리를 잡아가는 과정이 나옵니다.
"바오로와 바르나바 두 사람과 그들 사이에 적지 않은 분쟁과 논란이 일어나 ...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과 원로들에게 올라가기로 하였다"(사도 15,2).
유다교와의 연속성 안에서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인 이들, 즉 할례받은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이 모세의 관습과 할례를 이방인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까지 강요하자 선교지는 물론 예루살렘에서도 의견차가 발생합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예루살렘에서 함께 이 문제를 검토하고자 합니다.
이 기사는 교회 초창기부터 공동체가 한 몸인 양 움직였음을 보여줍니다. 이제 막 싹이 난 가지 끝에서 일어난 일도 몸통 전체가 나서서 하느님의 뜻에 의거해 길을 찾으려는 모습입니다. 이 움직임은 포도나무이신 예수님과 가지인 우리 사이의 일체감과 다르지 않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고 우리는 그 지체이니까요.
"그들은 예루살렘에 도착하여 ... 하느님께서 자기들과 함께 해 주신 모든 일을 보고하였다"(사도 15,4).
그들이 보고한 내용은 하느님께서 함께 하시면서 이뤄 주신 모든 일에 대한 것입니다. 자기들이 거둔 성과나 이득, 영광이 아니었지요. 주님께서 파견하신 모든 그리스도인은 주님과 함께이기에 무엇이나 할 수 있고, 또 그렇게 이룬 일은 의미를 가집니다. 파견된 이는 자기 일이 아니라 주님의 일을 하기에 그렇습니다. 무엇을 하든 그는 혼자 하지 않고 주님과 함께 하기에 무엇이나 할 수 있습니다.
"내 안에 머물러라. 나도 너희 안에 머무르겠다"(요한 15,4).
이 상호적 머무름은 일치를 가리킵니다. 내가 네 안에 있고, 네 안에 있는 내 안에 또 네가 있고, 그런 네 안에 또 내가 있고... 이 신비로운 머무름은 무한대로 반복되고 무한대로 깊어집니다. 끝을 알 수 없이 서로 안에 자리하는 자신을 발견하는 사이, 어느 지점인지 알 수 없으나 이미 하나입니다.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한 말로 이미 깨끗하게 되었다"(요한 15,3).
감사하게도, 우리에게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이 우리를 정화하고 성화합니다. 하루 하루 내게 새로이 다가오신 "말씀"에 머물러 오늘을 걷고 한 해를 걷는 동안, 부족하고 죄인인 우리는 어느새인지도 모르게 깨끗해지고 순화되고 거룩해집니다. 당장 눈에 보이는 효과가 아닐지라도 그렇게 되어 갑니다. 우리가 머무르는 말씀, 품는 말씀이 되려 우리에게 머무르시고 우리를 품으시기 때문입니다. 머무름의 신비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오늘도 주님 안에 머무르는 귀한 날 되시길 기도합니다. 주님과 함께라면 우리는 무엇이나 할 수 있습니다. 아멘.
▶ 작은형제회 오 상선 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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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3.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부활 제5주간 수요일>
-파티마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내 안에 머물러라. 나도 너희 안에 머무르겠다."(요한15,4)
오늘은 '부활 제5주간 수요일'이자, '파티마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를 기념하는 날'입니다.
1917년 5월13일, 포루투칼 작은 시골마을인 파티마에서 성모님께서 어린 목동들, 곧 루치아와 프란치스코와 그의 동생 히야친타에게 첫 번째 나타나셨습니다.
이후 10월13일까지 매월 13일에 여섯 번 나타나셨습니다.
성모님께서 어린 목동들에게 나셔서 하신 말씀은 '개인의 평화와 세계 평화를 위해 묵주기도를 바치라는 것'과 이를 위해 '고행(보속)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회개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어린 목동들에게 하셨던 성모님의 이 말씀이 지금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들려옵니다.
코로나19라는 지금의 상황을 통해 마치 '너희들이 회개하지 않으면 이렇게 죽게 될 것이다.'라는 말씀으로 다시 들려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13,34)
"내 안에 머물러라. 나도 너희 안에 머무르겠다."(요한15,4)
예수님의 이 말씀은 우리가 예수님처럼 사랑하지 않고, 예수님 안에 머물지 않으면 잘려나간 가지처럼 죽게 될 것이라는 강한 메시지입니다.
회개는 돌아가는 것입니다. 회개는 예수님 안에 머무는 것입니다.
이 돌아감과 머뭄이 단순히 미사하고, 기도하는 것에 그쳐서는 안 됩니다.
삶의 자리에서 내가 예수님이 되어야 합니다.
삶의 자리에서 예수님의 눈으로 세상과 너를 바라보고, 예수님처럼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회개의 본질'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매일 미사에 참례하고, 묵주기도를 바칩니다.
파티마의 성모님을 기억하는 오늘, 그동안 회개하지 못한 우리의 잘못들에 대해 하느님의 자비를 청하고, 몸과 마음이 새롭게 다시 태어나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헛된 신앙인이 아니라, 회개하는 참 신앙인의 모습으로.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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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3. 이영근 신부님. "너희는 나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오늘 <복음>은 단지 “포도나무와 가지”에 대한 비유가 아닙니다. “참 포도나무와 가지”에 대한 비유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오늘 우리 공동체는 단순히 공동체임을 넘어서, 참된 공동체인가? 라는 질문을 받게 됩니다.
<구약성경>에서 “포도나무”는 ‘이스라엘 백성’을 지칭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참”이라는 형용사가 붙어서, 예수님의 진리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참된 진리는 “참 포도나무와 가지와의 관계”, 곧 “참된 진리이신 예수님과 제자들의 관계”를 통해서 드러납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이 관계를 “붙어있다, 머물다, 열매 맺다”라는 동사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특히 “관계”에서 중요한 것은 여덟 번이나 반복되고 있는 “머물다”라는 단어입니다.
그렇다면, “머물다”라는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
그것은 오늘 <복음>에서 우선 “붙어있음”을 말합니다. 곧 포도나무에 붙어있어서, 다른 데서가 아닌 바로 그 포도나무로부터 수액을 받아먹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기에, 단순히 포도나무에 “붙어있다”는 사실만으로는 결코 “머물러 있다”고 할 수 없다. 왜냐하면 나뭇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다하더라도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는 잘려져 불에 태워져버리기 때문입니다. 결국, 붙어있되, “열매를 맺는 이”라야 “머물러 있는 이”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머물다”는 말의 의미는 단지 그분께 ‘붙어있음’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열매 맺으실 수 있도록 자신을 비워드림이요, 그분의 말씀의 권능이 자신 안에서 이루어지도록 허용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하여 그분의 ‘참 생명’을 공유하고 있는 것이요, 그분과 결합하여 있는 것입니다. 이를 두고 사도 바오로 <코린토인들에게 보내는 둘째 편지>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과 결합하는 이는 그 분과 한 영이 된다.”(1코린 6,17)
그러기에, “머물다”는 말의 진정한 의미는 뗄레야 뗄 수 없는 “상호 불가분의 긴밀한 관계”로 ‘붙어있음’ 말합니다. 곧 “상호내주 혹은 상호공유의 관계”를 말합니다. “상호 내주 혹은 공유”는 상호 안에 단순히 머물러 있음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하느님과 인간이 함께 벌리는 역동적인 활동이 벌어지는 ‘상호 친교’요, ‘상호교제’요, ‘상호 교환’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토록 예수님께서는 <사도 베드로가 그의 둘째 편지>에서 밝히듯, 우리를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게 하셨습니다.”(2베드 1,4). 참으로 예수님께서는 신비로운 방식으로 우리 안에 계시며 활동하십니다. 참으로 우리는 참 포도나무이신 그분과 이토록 신비롭게 결합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신비로운 “공동본성”(Connaturality) 결합을 두고, 천사적 박사라 불렸던 토마스 아퀴나스는 경탄하여 이렇게 탄성을 질렀습니다.
“아, 우리가 하나라는 걸 그토록 모르는가?”
바로 이 ‘공동본성’이 우리에게 신적 진리, 참된 진리를 가능케 하는 자리라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 자리가 신적 진리로써 사랑이 피어나는 곳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늘스런 참 사랑, 하늘스런 참 생명이 피어나는 곳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를 가리켜, 토마스 아퀴나스는 ‘공동본성에서 오는 사랑의 지혜, 하느님 사랑으로 주어지는 신적 지혜 혹은 관상’이라고 일컫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이 신적 진리, 참된 진리에 참으로 머물러 있고,
많은 열매를 맺을 수가 있을까?
이에 대한 대답을 오늘 <복음>에서 찾아본다면, “너희는 나 없이 아무 것도 하지 못한다.”(요한 15,5)라는 말씀에서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곧 가지는 나무에 속해 있을 뿐 스스로는 열매를 맺을 수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것은 가지가 나무를 지탱시키는 것이 아니라, 나무가 가지를 존속시킨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열매를 맺으실 수 있는 그분께 승복하여 그분의 사랑을 받아들일 때라야, 참된 사랑의 열매를 풍성히 맺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단지 붙어있어야 할뿐만 아니라, 좀 더 적극적으로 머물러 있어야 할 일입니다. 이미 우리 안에 내주하신 그분의 수액을 받아 마시며, 말씀 안에 머물고, 사귀고, 교제하면서, 당신께서 열매를 맺으시도록 해 드려야할 일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사도 바오로처럼,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 2,20)라고 고백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오늘 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요한 15,5)
주님!
오늘도 십자나무에 붙어 당신의 사랑을 수혈 받게 하소서.
제 삶에 사랑의 피가 흐르게 하고, 그 사랑 내어주게 하소서.
당신처럼 십자나무에 붙어 자신을 내어주게 하소서.
당신은 골고타 언덕에 심어진 참 포도나무. 당신만이 저의 혈관, 저의 숨통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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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3. 부활 5 주간 수요일. 반영억 신부님.
원하는 바를 다 이루어라
우리는 흔히 기도한다고 하면 무엇을 청하는 기도를 생각합니다. 끊임없이 무엇을 달라고 합니다. 나의 바람을 정해 놓고 그것을 꼭 이루어 달라고 하소연 할 때가 많습니다. 기도는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고 그분 마음에 드는 것을 행하는 것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달라는 기도에 익숙해 있습니다. 그것도 내가 원하는 것을 원하는 때에, 원하는 방법으로 달라고 떼를 씁니다.
레지오 마리애 선서문을 보면, “지극히 거룩하신 성령이시여, 당신의 위대한 목적을 이루는 도구가 되게 하소서….제 영혼 안에 사랑의 불을 놓으시어 이 세상을 구하고자 하는 성모님의 사랑과 뜻에 일치하게 해 주소서…..우리 주 그리스도께서 제 안에서도 자라시게 해 주소서……이 세상과 영혼들에게 그리스도를 모셔다 드리게 해 주시고……복되신 성 삼위의 영광 안에 살게 해 주소서….당신께서 저를 받아 주시고 저를 써 주시며 저의 나약함을 굳센 힘으로 만들어 주시리라 확실히 믿으며 다짐하나이다.”하고, 이어서 충실한 봉사와 규율에 대한 엄격한 복종을 선서합니다.
개인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기도가 아니라 봉헌의 기도요, 성령의 도구가 되기를 소망하며 성령께 각별한 사랑을 드리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내 안에 머무르고 내 말이 너희 안에 머무르면, 너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청하여라.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주님 안에 머물고 말씀 안에서 주님의 뜻과 일치할 때 효과적인 열매를 맺는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 머문다는 것은 예수님을 향한 신앙을 지키는 것을 의미하며 동시에 예수님 마음으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달라고 매달리는 것도 필요하지만 먼저 그분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래야 일치를 이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 빌면 무조건 이루어지리라는 지나치게 자기중심적이고 맹목적인 신앙논리를 펼쳐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기도가 사랑으로 가득 차 있을수록 그만큼 더 가치가 있습니다. 마더 데레사 수녀님은“나의 할 일은 성공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충성심을 바치는 것입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원의가 이루어지려면 먼저 타인 지향적인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바람이 무엇보다도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것과 일치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아버지와 사랑으로 철저히 하나가 되셨고,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당신 스스로 인간과 하나가 되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하느님께 열려있고 그분과 하나 되어 살아간다면 우리의 모든 바람은 그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그 열매는 나의 열매가 아니라 하느님의 열매가 맺어집니다. 그러므로 내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불평하기 전에 그분과의 일치된 마음을 살펴야 하겠습니다.
포도나무와 그 가지는 붙어있을 때 생명력을 지닙니다. 열매는 가지에 달리지만 가지가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몸통이 튼튼하기 때문에 가지의 열매도 튼실합니다. 포도나무는 전체고 가지는 부분입니다. 부분과 전체는 나뉠 수 없는 사이입니다. 스승과 제자 사이도 그렇습니다.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도 그러합니다. 아버지와 아들, 아들과 제자의 관계를 이어주는 것은 ‘사랑’과 ‘순명’입니다. 우리의 관계도 그러해야 합니다.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그의 명을 좇지 않는다면 그는 참 제자가 아닙니다. 안 될 때 안 되더라도 최선을 다하여 예수님의 가르침을 좇아 살다보면 우리 인생에 알찬 열매가 맺을 것입니다. 열매를 맺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가치관을 받아들이는 이가 늘어난다는 의미와 함께 신앙의 삶을 통해 더 큰 생명력을 얻는다는 뜻입니다. 그런 의미로 주님 안에 머물러 원하는 바를 다 이루시기 바랍니다.
“모든 것은 당신의 것, 오로지 당신의 뜻대로 그것들을 처리하소서.” 하고 기도하며 오늘을 봉헌합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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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3. 부활 제5주간 수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 내 안에 머물러라. ♣
“나는 참포도나무요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 나에게 붙어 있으면서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다 쳐내시고, 열매를 맺는 가지는
모두 깨끗이 손질하시어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신다(요한 15,1-2).”
이 말씀에서, ‘열매’는 충실한 신앙생활을 뜻하고,
‘더 많은 열매’는 궁극적인 구원과 생명을 뜻합니다.
‘붙어 있으면서’는, 뜻으로는 ‘붙어 있으면서도’입니다.
그래서 “나에게(나무에) 붙어 있으면서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는
“신앙인이면서도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는 사람”으로 해석됩니다.
(그 경우는 겉으로는 붙어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붙어 있는 것이 아닌 가지입니다.
즉 겉으로는 신앙인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신앙인이라고 말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세례대장이나 교적에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고 해서 신앙인인 것은 아닙니다.
신앙인은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입니다.)
“다 쳐내시고”는 심판과 멸망을 뜻합니다.
“열매를 맺는 가지”는 신앙생활을 충실하게 하는 신앙인입니다.
“모두 깨끗이 손질하시어”는, ‘은총 속에서 사는 것’을 뜻합니다.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신다.”는,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을 뜻합니다.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한 말로 이미 깨끗하게 되었다. 내 안에 머물러라.
나도 너희 안에 머무르겠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처럼, 너희도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잘린 가지처럼 밖에 던져져 말라 버린다.
그러면 사람들이 그런 가지들을 모아 불에 던져 태워 버린다(요한 15,3-6).”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한 말로 이미 깨끗하게 되었다.” 라는 말씀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여서
‘깨끗하게 손질이 된 상태’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즉 은총 속에서 살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시작 단계일 뿐입니다.
은총이 완성되려면, 즉 구원과 생명이라는 열매를 맺으려면
예수님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내 안에 머물러라.” 라고 명령하십니다.
‘예수님 안에 머무르다.’ 라는 말은, 예수님과 일치를 이루고,
예수님과 함께 사는 것을 뜻합니다.
(온 삶으로 믿음을 실천하면서 사는 것을 뜻합니다.)
줄기는 가지에 무제한으로 생명력을 공급해 주지만,
가지가 그 생명력을 받아서 열매를 맺으려면 능동적으로 줄기에
잘 붙어 있어야 하고, 열매를 맺으려고 스스로 노력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은총은 무상으로, 또 무제한으로 우리에게 주어지지만,
그 은총이 자동적으로 ‘우리 것’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은총을 잘 받으려면
능동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면서 예수님 안에 잘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나도 너희 안에 머무르겠다.” 라는 말씀은, 겉으로 보이는 표현만 보면,
‘지금은’ 제자들 안에 머물러 있지 않지만 ‘나중에는’ 머무르겠다는 약속으로
보일 수도 있는데, 그것은 아니고,
‘언제나 항상’ 제자들 안에 머물러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처음부터(복음을 선포하실 때부터, 또는 제자들을 부르실 때부터)
‘늘’ 제자들 안에 머물러 계셨고,
세상 끝 날까지 머물러 계실 것입니다(마태 28,20).
그렇지만 제자들이(신앙인들이) 그것을 의식하지 못하거나
잊어버릴 때가 많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신앙인이) 되었지만 예수님 안에 머물러 있지 않아서
열매를 맺지 못한 사람 가운데에서 대표적인 인물은 배반자 유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다 안에도 머무르셨지만, 유다 자신이 예수님 안에
머무르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열매를 맺을 수가 없었습니다.
“안에 머무르다.” 라는 말의 반대말을 “밖에서 방황하다.”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배반자 유다는 몸만 예수님과 함께 있었고, 마음은 ‘밖에’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은 흘려듣고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에만 귀를 기울였을 것입니다.
또 예수님은 보지 않고 밖에서 일어나는 일에 한눈을 팔았을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 안에 머무르지 않고 밖에서 방황하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우리도 그럴 때가 있습니다.
미사 참례는 예수님 안에 머무르는 일입니다.
그런데 몸만 성당에 앉아 있으면서 마음은 밖에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경우에는 미사 참례를 한 것이 아닌 것이 됩니다.
‘말씀’은 듣지 않고 세속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주님께 집중하지는 않고 세속 일만 신경 쓰고......)
그런데 “내 안에 머물러라.” 라는 명령은, 우리에 대한 예수님의 마음을(사랑을)
생각하면, “내 안에 머물러서 살아라.” 라는 간곡한 호소입니다.
(“밖에서 방황하다가 죽지 말고, 내가 주는 생명력을 받아서 살아라.”)
사실 신앙생활은 ‘내가’ 살기 위해서 하는 생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나를’ 살리려고 오셨습니다.
따라서 “내 안에 머물러라.” 라는 말씀도,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라는 말씀도,
당신을 위해서 하신 말씀이 아니라, ‘나를’ 살리기 위한 ‘사랑의 호소’입니다.
(철이 덜 든 아이들은 자녀가 잘되기만을 바라면서 하는 부모의 훈계를
듣기 싫은 ‘잔소리’로만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그럴 때 부모들은 자녀에게 “이게 다 너를 위해서 하는 말이다.” 라고 말하지만,
철없는 자녀들은 그 말도 상투적인 말로 생각합니다.
만일에 예수님의 말씀들을 의무적으로 지켜야 하는 명령으로만 생각한다면,
그것은 우리를 살리려고 애쓰시는 예수님의 사랑은 외면하고,
‘생명의 말씀’을 귀찮은 잔소리로만 생각하는 철없는 태도입니다.)
신앙생활은 ‘내가’ 살기 위해서 하는 생활이지만,
‘내가’ 잘 사는 것은, 나와 함께 한 몸을 이루는
공동체 전체가 잘 사는 일이기도 합니다(에페 4,15-16).
내가 아프면, 즉 내가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거나 죄를 지으면,
한 몸을 이루고 있는 공동체 전체가 아프게 되고,
나를 살리려고 오신 예수님께 아픔과 슬픔을 드리는 일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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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3. 부활 제5주간 수요일 /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님.
오늘의 묵상
포도나무와 가지의 관계는 예수님과 신앙인의 관계를 드러내는 값진 비유입니다.
나무에서 떨어져 홀로 남겨진 가지는 불을 지피는 데 던져지거나 땅의 거름으로 사라져 가겠지요.
열매를 맺는 풍성한 수확을 생각하면 가지는 나무에 제대로 꼭 붙어 있어야 합니다.
포도나무와 가지의 이야기는 다른 두 지향점의 공존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열매라는 하나의 목적을 위하여 서로 온전히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합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포도나무로 소개하시는 것은, 당신께서 누구이신지 드러내시기보다는
당신을 따르는 신앙인들이 당신 안에서 또 다른 예수로 거듭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두 존재가 하나로 거듭난다면 서로의 원의와 지향점도 하나가 될 것입니다.
우리 신앙인이 원하는 것이 무엇이든 청하면 이루어질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 각자가 원하는 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점을 전제합니다.
예수님과 우리는 하나가 되어 하느님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합니다.
너무나 놀랍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지금 우리더러 당신이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당신과 함께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자고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요한 복음의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라오라고 초대하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과 함께 아버지께 나아가자고, 어깨동무하자고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런 예수님을 두고 이것 해 달라, 저것 해 달라 청하는 것은 참 부끄러운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신앙에 위험한 것들은 대개 하느님을 대상화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대상화된 하느님, 자기 자신과 다른 하느님, 그리하여 늘 목적이 되어 버린 하느님은 그저 우상일 뿐입니다.
-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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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3. 새벽을 열며. 부활 제5주간 수요일. 빠다킹신부님.
영국 런던에 블랙캡이라는 택시 회사가 있습니다. 이 블랙캡 택시 기사가 되기 위해서는 런던의 도로가 너무나 복잡해서 최소 4년은 공부해야 한다고 합니다. 런던 중심가에 있는 채링크로스 역에서 반경 6마일 내에 있는 25,000개의 도로와 20,000개의 랜드마크를 외우고, 이를 연결하는 경로도 모두 외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블랙캡 기사가 되기 위해 치러야 하는 훈련과 방대한 암기량이 뇌 과학자들의 관심을 사로잡았습니다. 뇌 과학자들은 기사들이 훈련을 받기 전과 받은 후를 비교해서 연구했지요. 그 결과 훈련을 받은 뒤에 기억력을 담당하는 뇌의 해마가 상당히 커졌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모두 육체적 성장이 끝난 성인인데도 말입니다. 그리고 놀라운 점은 이들이 택시 기사를 그만둔 뒤에는 해마가 다시 줄어들었다는 것입니다.
성인이 되면 머리 회전이 잘 안 된다는 말씀을 많이 하십니다. 그러나 그보다는 뇌의 사용을 하지 않다 보니 뇌의 성장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는 충분히 성장할 수 있도록 하느님으로부터 창조되었고, 충분히 할 수 있는 소명을 받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스스로 할 수 없다고 단정 지으면서, 할 수 없는 이유를 나열합니다. 하느님의 뜻과 다른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세상의 눈으로는 가장 부족해 보이는 사람들을 제자로 삼으셨지요. 그리고 그들은 놀라울 정도로 세상에 주님의 뜻을 성공적으로 알립니다. 우리도 이렇게 주님 안에 머물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나가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포도나무의 비유 말씀을 전해주십니다. 주님께서는 포도나무고 우리는 그 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라고 하시지요. 나무에 붙어 있는 것이 싫다고 가지가 스스로 떨어져 나가면 어떻게 될까요? 포도나무로부터 어떤 자양분도 얻을 수 없어서 생명을 잃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주님과의 친밀한 결합 안에 머무름으로써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이들에게 성령께서 주시는 생명의 자양분을 받게 됩니다.
지금 우리의 모습을 반성해 보았으면 합니다. 주님이라는 포도나무에 붙어 있기보다는 세상의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에 붙어 있으려고 애쓰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세상은 할 수 없는 것이 너무 많다면서 포기하고 좌절에 빠지게 합니다. 그러나 주님과 함께하면 세상 안에서 큰 희망을 간직하며 할 수 있는 것들이 너무나 많음을 깨닫게 됩니다. 특히 주님의 뜻인 사랑의 실천은 아무리 해도 부족할 수밖에 없고, 이 사랑의 실천을 통해서 더욱더 행복한 나 자신을 만나게 됩니다.
주님께 꽉 붙어 있으면서 할 수 있는 일들을 충실히 실천하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좋은 열매를 많이 맺을 수가 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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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다른 것으로 가득 차 있다면 신의 음성을 들을 수 없습니다. 침묵 속에 들으십시오(성녀 마더 데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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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태도가 먼저입니다.
어느 성당에서 봉사하는 한 자매님의 스트레스를 듣게 되었습니다. 오랜 시간 봉사활동을 했는데 새로 오신 신부님 때문에 너무 힘들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의견을 사사건건 반대하시고, 이제까지 해왔던 모든 것을 다 바꾸려 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자신의 이 말이 자기만의 생각이 아니라는 듯이 “다른 봉사자들도 너무 힘들어해요.”라고 하십니다.
성당에서의 모든 일이 기쁨이 아니라 스트레스로 다가오니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그래서 “어떻게 하고 싶으세요?”라고 물으니, 이제 성당에 나가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오랫동안 기쁘게 했던 봉사활동을 신부님 한 분으로 인해 그만둔다는 것이 너무 억울하지 않냐고 하자, 어쩔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너무 스트레스가 심하다면서 말이지요.
사실 스트레스에 맞서야 합니다. 그러나 잘 맞서야 하겠지요. 이때 필요한 태도가 첫째, 의미 있는 헌신, 둘째 자신의 행위에 대한 통제, 마지막은 새로운 것을 감행하는 도전입니다. 이러한 태도를 만들려는 노력 없이 도망만 친다면, 또 다른 스트레스로 힘들어지는 순간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내 태도가 먼저 아닐까요? 우리는 다른 이의 변화가 먼저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내 태도를 바꾸기가 더 쉽고 가장 빠른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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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3. 부활 제5주간 수요일/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어린 날의 기억입니다. 형님은 재주가 많았습니다. 그림도 잘 그리고, 책꽂이도 잘 만들었습니다. 썰매도 만들어서 탈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저는 더 어렸고, 손재주가 없어서 잘 못했습니다. 형님이 연을 만드는 걸 옆에서 본 적이 있습니다. 한지, 대나무 살, 신문지, 풀, 실과 실패가 있었습니다. 한지를 마름모로 자르고, 대나무를 붙이고, 구멍을 내서 실로 묶습니다. 연의 모서리에 가위로 일정하게 자른 신문지를 이어붙이면 연의 꼬리가 되었습니다. 꼼꼼한 형님은 한지 위에 그림을 그리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만든 연을 동네 넓은 공터로 가져가서 날렸습니다. 뒤에서 연을 잡아주고, 앞에서 뛰어갑니다. 어느 순간 뒤에서 연을 놓아 주면 연은 하늘 높이 날아올랐습니다. 바람이 불어 코끝이 차가웠지만 하늘 높이 날아가는 연을 보면 내 마음도 날아오르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았습니다.
연이 하늘을 자유롭게 날기 위해서는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하나는 바람입니다. 바람이 너무 세면 연줄이 끊어질 수 있습니다. 바람이 너무 없으면 연을 날리기 어렵습니다. 연을 날리기 위해서는 바람 부는 좋은 날을 택해야 합니다. 연은 자체로는 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연줄입니다. 연줄은 연을 구속하는 것 같지만 연이 중심을 잡을 수 있도록 해 줍니다. 줄이 끊어진 연은 이내 땅으로 떨어지는 걸 봅니다. 중심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줄은 관계가 되기도 하고, 줄은 인연이 되기도 하고, 줄은 신앙이 되기도 합니다. 세 번째는 연을 날리는 사람입니다. 바람이 불어도, 줄이 튼튼해도 연을 날리는 사람이 없으면 연은 하늘을 날 수 없습니다. 지난 4월 15일 총선이 있었습니다. 국회의원은 많은 특권을 가집니다. 법을 만들고, 행정부를 견제합니다. 국회의원은 하늘 높이 나는 연처럼 신문에도 나오고, 텔레비전에도 나옵니다. 그러나 국회의원은 국민의 선택을 받아야만 하늘을 날 수 있습니다. 국민의 선택을 받기 위해서는 국민을 위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포도나무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포도나무이고, 우리는 가지라고 하셨습니다. 가지에 포도가 열리려면 나무에 붙어 있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나무에 붙어있지 않은 가지는 곧 말라 땅에 떨어지고, 땅에 떨어진 나무는 버려지거나, 아궁이로 던져질 거라고 하셨습니다. 포도나무를 많이 보지 못한 저는 예수님의 말씀이 어린 시절 연 날리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늘 높이 나는 연은 마치 우리들의 삶과 같습니다. 우리는 각자 개성과 자유를 가지고 세상이라는 바람을 타고 살아갑니다. 연줄은 세례를 통해서 주어지는 신앙과 같습니다. 믿음, 희망, 사랑의 향주 삼덕을 간직하면, 청빈, 순명, 정결의 복음 삼덕을 실천하면 신앙의 줄은 어떤 바람에도 끊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자유롭게 살 수 있는 것은 자비로우신 하느님의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고가신 예수님의 희생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말씀을 따른다면 우리는 이미 이 세상에서 자유를 얻습니다. 언젠가 우리의 삶이 마쳐질지라도 우리는 부활하여 영원한 자유를 얻을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이고, 이것이 신앙의 신비입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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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3.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신부님
주님과 상호내주相互內住 일치의 삶
-참으로 살아 있는 사람들-
요즘 쓴 자작 애송시 두편을 나눔으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당신이 바로 그러하다’와 ‘당신은’입니다. 저는 물론 모두를 지칭하는 당신입니다.
-“산山의 깊이와 고요는 맡김에 있다
하느님께, 자연에, 순리에 맡긴다
맑든 흐리든 차든 덥든 비오든 눈오든
모든 것은 다 지나가는 것
일희일비一喜一悲하지 않는다 묵묵히 견뎌낸다
알고 보면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
날마다 좋은 날이 아니던가 무엇이 부러우리
오늘은 비안개 속에 묻혀
휴식을 취하는 산
하여 날로
깊어지는 산 고요해지는 산 새로워지는 산 좋아지는 산
당신이 바로 그러하다.”-
참으로 주님 안에 머물 때 위의 산처럼 날로 깊어지는 삶, 고요해지는 삶, 새로워지는 삶, 좋아지는 삶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당신이요 당신이 바로 그러합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신록의 계절 5월 성모성월입니다. 날로 새로워지고 푸르름 짙어져가는 산천의 초목들입니다. 바로 주님안에 머물 때 이런 신록처럼 날로 새로워지는, 충만한 생명임을 깨닫습니다. 또 하나 ‘당신은’ 이란 짧은 시입니다.
-“꽃이 꽃을 가져오다니요
그냥 오세요
당신은 꽃보다 더 예뻐요
산이 산에 가다니요
그냥 있으세요
당신은 산보다 더 좋은 산이예요”-
이 시를 지었을 때의 감동을 잊지 못합니다. 어버이날 참 마음이 예쁜 분이 꽃 한송이를 선물할 때, 사람꽃에 비해 얼마나 초라해 보이던 꽃송이던지요. 사람보다 더 예쁜 꽃은 없음을 참으로 깊이 깨달았고 즉시 쓰여진 시입니다. 사람은 꽃입니다. 잠시 폈다 지는 보통 꽃이 아니라 참 특별한 늘 피어 있는 하느님의 꽃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꽃처럼 아름답고 품위있고 향기롭게 살아야 합니다. 또 다른 시도 생각납니다.
-“마음이 예쁘니
말라도 뚱뚱해도 작아도 커도
젊어도 늙어도
예쁘다 다 예쁘다”-
참으로 주님 안에 머물 때, 꽃보다 더 예쁜, 산보다 더 좋고 깊은 산같은 존재인 사람들임을 깨닫습니다. 주님 안에 머물 때 참으로 살아있는 삶임을 깨닫습니다. 살아 있다고 다 살아있는 것이 아닙니다. 살아있다 하나 생화가 아닌 향기없는 조화같은 삶도 참 많습니다.
살아있을 때 향기지 죽으면 향기도 없습니다. 참으로 진짜 살아있음을 느낍니까? 참으로 주님 안에 머물러 살아 있을 때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 참으로 살아 있음을 깨달을 때 참 기쁨과 행복입니다. 어떻게 참으로 살아 있음을 깨달을 수 있겠습니까? 바로 오늘 복음의 예수님 말씀이 답을 줍니다.
“나는 참포도나무요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
하느님은 참포도나무인 예수님을 가꾸시는 농부이시고, 우리는 모두 참 포도나무 예수님께 붙어있는 가지라는 것입니다. 혼자라는 생각이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착각이요 환상인지 깨닫습니다. 참포도나무 예수님께 붙어있을 때, 예수님 안에 머물 때 참으로 살아있다 할 수 있습니다. 농부이신 하느님은 부단히 우리를 전지剪枝하시고 살펴 주시니 바로 이것이 은총입니다.
“너희는 내가 한 말로 이미 깨끗하게 되었다.”
부단히 영과 생명의 주님 말씀으로 살아나고 정화되고 성화되는 우리임을 깨닫습니다. 하여 끊임없이 바치는 말씀의 공동전례기도입니다. 이어지는 말씀은 군더더기 설명이 필요없을 정도로 자명합니다. 우리 모두를 향한 말씀입니다.
“내 안에 머물러라. 나도 너희 안에 머무르겠다.”
바로 주님과 상호내주相互內住의 일치입니다. 주님 안에 머무를 때 주님도 우리 안에 머무르겠다는 약속입니다. 참으로 주님과 상호내주의 일치일 때 정말 살아있다 할 수 있습니다. 이래야 비로소 영육의 건강입니다. 늘 새롭고 깊어지고 고요해지고 깨끗해지는 삶입니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있지 않으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처럼, 너희도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로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아. 바로 이 말씀이 만고불변의 진리입니다. 이를 깨달을 때 진정 겸손하고 지혜로운 삶입니다. 혼자라는 생각이 얼마나 큰 착각이요 환상인지 깨닫습니다. 주님 안에 머무를 때 풍성한 열매요 주님 없이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합니다. 열매 또한 없습니다. 참으로 주님 안에 머물지 않을 때, 주님을 떠날 때 무지와 허무의 심연深淵에 탐욕의 밥이 되니 바로 이게 지옥이요 스스로 자초한 화요 심판임을 깨닫습니다. 이어지는 말씀도 고무적입니다.
“너희가 내 안에 머무르고 내 말이 너희 안에 머무르면, 너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청하여라.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너희가 많은 열매를 맺고 내 제자가 되면, 그것으로 내 아버지께서 영광스럽게 되실 것이다.”
얼마나 은혜로운 말씀입니까? 주님 안에 머무르고 주님 말씀이 우리 안에 머물러 주님과 상호내주의 일치를 이룰 때 비로소 주님의 제자가 되고 주님의 뜻대로 정말 필요한 것을 청하게 되며 우리의 청은 다 이루어질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맺는 무수한 열매들이 아버지께는 영광이 되니 바로 이것이 영원한 생명의 구원이요 충만한 생명의 실현임을 깨닫습니다.
평생을 참 열심히 살았어도 주님 밖에서 헛된 노고의 열매 없는 삶이었다면 그 인생 얼마나 허망하겠는지요. 그러니 참으로 늘 깨어 주님 안에 머물러 살고 있음을 알게 하는 주님 현존 의식의 훈련이 필요함을 깨닫습니다. 이래서 끊임없는 기도의 강조입니다. 성구聖句를 끊임없이 반복하며 바치는 비움기도나 향심기도가 목표하는 바도 늘 깨어 주님 안에 머물러 살기 위함입니다. 그렇다면 사도행전의 답은 저절로 나옵니다.
“모세의 관습에 따라 할례를 받지 않으면 여러분은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모세의 관습에 눈먼 수구파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의 주장입니다. 할례를 받지 않은 비유다계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구원이 없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를 위해 안티오키아 교회에 속한 바오로와 바르나바가 예루살렘 회의에 참석합니다. 오늘 복음 말씀을 보면 답은 자명해집니다. 모세의 관습이나 할례를 지켜 구원이 아니라 주님 안에 머무를 때 구원이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우리를 참으로 자유롭게하는 통쾌하면서도 간명한 처방인지요.
주님 안에 머무를 때 주님 또한 우리 안에 머물게 되어 비로소 상호내주의 일치의 구원입니다. 바로 이런 구원을 새롭게 확인하는 미사은총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당신과 상호내주의 일치의 구원을 선사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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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3. 부활 제5주간 수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성덕(聖德)으로 나아가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성인전(聖人傳)을 많이 읽으십시오!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님의 말씀입니다. “성덕(聖德)으로 나아가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성인전(聖人傳)을 많이 읽으십시오. 성인전은 성인들이 자신들의 생애를 통해 기록한 제2의 복음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오늘 축일을 맞이하시는 마리아 도메니카 마자렐로 성녀(1837~1881)를 소개합니다. 돈보스코(1815~1888)와 함께 도움이신 마리아의 딸 수녀회(살레시오 수녀회)를 공동 창립하신 분입니다.
이탈리아 북부에 위치한 토리노에서 버스로 두 시간을 가야 나오는 모르네제의 산골 소녀 마리아는 뜨거운 열정을 지닌 사람이었습니다. 당시 마리아는 모르네제 본당사제였던 페스타리노 신부의 지도하에 또래 동정녀들과 의기투합해서 복음 선포에 열중하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모르네제 소녀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었고, 사람들은 그녀의 순수한 열정에 큰 박수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그녀는 미래에 대해 뚜렷한 확신을 가지고 있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마리아는 한 위대한 인물과의 운명적인 만남을 갖게 됩니다. 돈 보스코가 오라토리오 청소년들과 함께 모르네제로 소풍을 온 것입니다. 그때 마리아는 그와의 첫 대면을 통해 즉시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저분은 성인(聖人)이시다! 안심하고 우리의 미래를 맡겨도 될 분이다!”
내면 가득히 신뢰로 가득 차자 조금도 망설임 없이 그와 한배를 타게 됩니다. 그의 제안에 따라 즉시 갈 곳 없는 소녀들을 위한 집을 마련했습니다. 그들의 미래를 위해 학교를 짓습니다. 오라토리오를 열어 소녀들을 기쁨과 행복의 도가니로 빠져들게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살레시오 수녀회는 살레시오회와 더불어 신속하게 전 세계로 퍼져나가게 되었습니다. 1872년 살레시오 수녀회가 창설되고 마리아는 초대 총장에 임명됩니다.
하느님의 방식을 늘 이런 식인 것 같습니다. 나자렛 산골의 겸손한 처녀 마리아를 하늘의 모후요, 전 인류의 어머니로 들어 높이셨듯이, 모르네제 산골의 겸손한 처녀 마리아를 같은 방식으로 성덕의 정상에로 높이 들어 올리신 것입니다.
소녀시절 마리아의 강렬한 성체 신심은 정말이지 놀랄만한 것이었습니다. 자신이 머물고 있던 발포나스카 농장에서 마자렐로 본당까지는 지방도를 따라가면 한 시간 남짓, 우거진 잡풀 사이로 난 지름길을 이용하면 30분쯤 걸리는 거리에 있었습니다.
그녀는 성체를 모셔야겠다는 간절한 마음으로 매일 새벽, 별이 총총한 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그 길을 오갔습니다. 본당에 도착해보면 성당 문이 닫혀있을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럴 때 마다 그녀는 성당 문 앞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면서 문이 열리기를 기다렸습니다.
막중한 임무의 봉사직을 수행하던 마리아가 가장 듣기 싫어했던 말이 있었는데, 그것은 장상이라는 말이었습니다. 그만큼 그녀는 겸손했습니다. “원장 수녀님!” 하고 동료수녀들이 자신을 부를 때 마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원장 수녀가 아니라 부원장 수녀입니다. 우리의 원장은 성모님이십니다.”
이렇게 그녀는 언제나 성모님을 수녀회 장상으로 여겼습니다. 그 표시로 저녁마다 수녀원 대문 열쇠를 성모님의 발치 앞에 가져다놓았습니다.
마리아의 성모님을 향한 큰 사랑은 세 가지 신심 안에 요약됩니다. 원죄 없이 잉태되신 동정마리아를 향한 사랑, 신자들의 도움이신 마리아를 향한 신뢰, 고통의 성모 마리아를 향한 공경. 그러면서 마리아는 성모님을 자신이 살아가야할 롤모델로 삼았습니다.
따라서 돈 보스코와 함께 공동창립했던 수녀회의 이름도 ‘도움이신 마리아의 딸 수녀회’라고 명명했습니다. 그녀를 장상으로 모셨던 수많은 수녀들의 증언에 따르면 마리아에게서는 언제나 성모님의 진한 향기가 풍겼답니다.
그녀의 생애 전체는 성모님 생애의 판박이였답니다. 철저한 순명, 자발적 가난, 빛나는 순결, 한없는 겸손, 모성적 희생, 일상적 기도...그녀의 얼굴은 성모님 얼굴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었답니다.
극진히 사랑했던 소녀들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 마리아의 성모님을 향한 큰 사랑을 잘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극히 다정하신 우리 성모님을 굳게 믿으십시오. 그분의 덕행을 본받되 특히 겸손과 순결과 정숙함을 본받도록 하십시오. 그렇게 하면 이 세상에서나 저 세상에서나 만족하게 것입니다.”
소녀들이 공부에 열중하고 있을 때, 그녀는 그들 옆에서 바느질을 하면서 이렇게 화살기도를 바쳤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이신 동정 성모님, 저희 모두를 성인(聖人)이 되게 해주소서.”
커다란 벽시계가 매시 정각을 알리는 소리를 낼 때 마다 그녀는 소녀들과 함께 성모송을 한번 바쳤습니다. 그리고 이런 화살기도를 올렸습니다.
“동정 마리아님, 제 생명이 한 시간 줄었나이다. 저를 당신께 맡기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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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3. 전삼용 요셉 신부님. [부활 제5주간 수요일]
사도행전 15,1-6
요한 15,1-8
너희는 나 없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성경 해석의 울타리를 정하는 주체는 교회
제2차 세계대전 중 프랑스의 어느 시골 마을에서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그런데 그 와중에 미군 병사 한 사람이 목숨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의 동료들은 시체를 전쟁터에 그냥 방치해 두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교식 장례를 치러 주기로 했는데, 전투가 벌어지는 일선에서 몇 마일 떨어진 곳에 흰 울타리를 친 작은 공동묘지가 딸린 성당이 있던 것을 기억해 냈습니다.
친구의 시체를 공동묘지로 옮겨가기 위해 상사의 허락을 받은 병사들은 해가 지기 전 겨우 그곳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허리가 굽고 야윈 신부가 그들을 맞아 주었습니다.
깊은 주름이 팬 햇볕에 그을린 신부의 얼굴은
지혜와 열정으로 불타오르는 번쩍이는 두 눈이 자리 잡고 있는 집처럼 보였습니다.
한 병사가 정중하게 말을 꺼냈습니다.
“친구가 전쟁터에서 숨졌습니다. 우리는 그를 교회 묘지 에 묻어주고 싶습니다.”
신부는 병사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이해했지만 아주 서투른 영어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미안합니다. 우리와 같은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아니면 이곳에 묻어 줄 수가 없습니다.”
수개월에 걸친 전쟁에 지친 병사들은 서운한 기색조차 보이지 않은 채 말없이 그 자리를 떠나려고 했습니다.
그러자 노 신부가 그들을 불러 세웠습니다.
“그렇지만 울타리 밖에 묻는 것은 괜찮습니다.”
그 말에 화가 나긴 했지만 병사들은 하얀 울타리 밖에 땅을 파고 친구를 묻어 주었습니다.
그 일을 다 마쳤을 때는 이미 해가 떨어지고 난 다음이었습니다.
다음날 아침 전선을 옮기라는 명령을 받은 병사들은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친구에게
작별인사를 하기 위해 그 작은 성당을 다시 찾아갔습니다.
그러나 친구를 묻은 자리를 찾을 수 가 없었습니다.
지치고 어리둥절해진 병사들은 성당의 문을 두드렸습니다.
그리고 친구를 묻은 자리를 알고 있는지를 물었습니다.
“어젯밤 지치기도 했고 어두워서 그랬는지 제대로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
그 말에 노 신부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습니다.
“어젯밤 댁들이 떠난 후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아침 일찍 일어나 내가 울타리를 옮겨 놓았습니다.”
성체는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같은 그리스도의 몸으로 보일까요?
아닙니다.
오직 성변화가 일어남을 믿는 가톨릭 신자들만이 밀떡의 모습을 보면서 그리스도의 몸이라 말합니다.
이것이 성사의 특징입니다.
성사(聖事)는 거룩하게 된 것이지만 거룩하신 분은 보이지 않기 때문에 모든 성사도 거룩하지만 실제로는 각자의 믿음에 따라 다르게 보입니다.
성경도 성령으로 거룩하게 된 문자들로 된 책입니다.
그런데 개신교인들은 물론이요, 여호와의 증인, 신천지, 하나님의 교회 등의 특징은 성경을 먼저 들이밀고 그것이 진리인 양 설명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도 성사이기 때문에 각 종교의 믿음에 따라 다르게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각자가 다르게 보이는 기준 가지고 무슨 논쟁을 할 수 있겠습니까?
각자 자기 주장만 있을 뿐입니다.
예를 들어 성체를 가지고 논쟁을 해봐야 그 안의 본질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결론이 날 수 없고 각자의 주장만 남을 뿐입니다.
초대교회 신자들에게 처음 발생했던 논쟁은 바로 ‘할례’에 관한 규정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할례에 대해 논쟁하면서 그 해답을 찾기 위해 성경을 먼저 피고 연구했을까요?
아닙니다. 오늘 독서는 교회가 소집되었다고 나옵니다.
위의 예화에서 병사들이 동료의 시신을 교회 안에 묻기 위해 성경을 펴들고 자신들의 주장을 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당은 그들의 영역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영역을 내어줄 것인지 말 것인지는 각자가 다르게 해석하는 성경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종교의 주체의 재량에 맡겨진 것입니다.
따라서 모세의 율법인 할례에 대한 논쟁이 벌어졌을 때 성경을 펴 놓고 자신들끼리 논쟁하기보다는 교회에 건의를 하고 교회의 구성원들이 소집되어 그 결정을 내리게 된 것입니다.
교회는 가차 없이 울타리를 넓혀서 모세의 율법에 나오는 할례규정을 폐지해 버렸습니다.
이는 성경을 해석할 수 있는 유일한 권한도
성령을 충만히 받은 교회에 달려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성령강림을 통해 세워진 교회의 뿌리가 지금까지 이어지는 교회는 가톨릭교회 외에는 찾을 수 없습니다.
성령께서 쓰셨다면 성령께서 가장 완전한 해석을 해 주실 수 있는데, 그 성령께서 가톨릭교회 안에서 활동하게 계신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은 성체처럼 그 믿음에 따라 다르게 보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진리의 판단 규범이 될 수 없음을 깨닫고 성경을 펴 놓고 자신들의 교리에 끼워 맞추는 설명에 빠지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를 가져다놓고 코걸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직 그 용도를 알 수 있는 사람은 그것을 만든 사람뿐이고 그것을 만든 사람은 교회 안에 계십니다.
교회가 모여 정하면 그것이 곧 해석의 울타리가 되는 것입니다.
교회를 먼저 믿으면 밀떡 모양이지만 성체로 보이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성체성사가 이루어짐을 먼저 믿어야 성체를 통한 구원에 이릅니다.
물론 이것도 예수님은 당신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않으면 구원이 없다고 성경에 쓰여 있는 데도 다른 그리스도교에서는 믿지 않습니다.
각자의 해석의 울타리가 있는 것이지 성경 자체를 연구해서 진리에 도달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먼저 울타리를 칠 수 있는 교회를 믿으십시오.
그러면 그 울타리 안에서 성경이 오류 없이 완벽하게 이해될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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