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9월. 30년간 다닌 직장에서 퇴직을 하면서 그는 내게 자신있게 약속했다. 뒷바라지 하느라 그동안 당신도 고생했어. 서울 시내 샅샅이 구경시켜줄게. 덕수궁 창경궁 경복궁 남산 창덕궁 비원. 정말이지 약속. 손가락을 걸고 도장을 찍고 복사를 하고 어린 딸처럼 눈을 반짝이며 소리를 치며 야단법석을 떨었다. 소풍을 앞둔 열 살 아이처럼 꽤 여러 날 나는 들떠 있었다. 잠을 자다가 한두 번 깨어나는 일이 있는 나인데 그때마다 서울 구경에 대한 기대감으로 부풀어 다시 잠을 잘 이루기가 어려웠다.
서울에서 이십대부터 살아왔는데 사실 제대로 서울에 관심을 가진 적이 있었던가. 없다. 아이들의 학교 과제물 때문에 덕수궁과 경복궁을 동행한 적이 있었다. 사진작가인 친구 따라 창덕궁 겹매화꽃과 비원을 구경하기도 했다. 어쩌다 친구 모임이나 글 모임에서 남산이나 인왕산 둘레길이나 청계천을 걸어보았다. 그뿐. 거리에서 스쳐 지나가는 사람처럼, 보았으나 보지 못한 채 스쳐 지나왔을 뿐이다. 아는 것만 보인다 했으니 결국 아무것도 본 것이 없는 셈이다.
2023년. 그로부터 십 년이 흘러갔다. 그가 약속했던 서울 구경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가자 가자 말하면서도 그도 나도 적극적으로 나서지는 않았다. 사실 텃밭이 있는 양평 종자골에 다니느라 한눈을 팔 여유는 없었다. 꽃씨를 뿌리고 아욱과 고추와 토마토 모종이 자라나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 매 순간순간이 우리를 즐거움으로 이끌었다. 다만 가끔 심통이 날 때 나는 남편을 공격하는 무기로 서울 구경을 꺼내 들었다. 언제 서울 구경 가는데? 십 년 뒤?
딸아이가 결혼을 하고 웃을 일이 많아졌다. 그래서였을까. 좀처럼 좋아지지 않던 내 건강도 눈에 띄게 좋아졌다. 밥맛도 좋아지고 친구들을 만나러 나가는 일도 즐거워졌다. 어떤 의욕 내지는 열망 같은 것이 내게서 스멀스멀 기어 나왔다. 조선왕조실록을 읽으면서 조선 시대의 왕과 궁궐에 관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유튜브로 읽어주는 조선 역사를 틈틈이 들었다. 신경숙의 소설 리진을 읽으며 경복궁과 명성황후 시해 사건을 만났다. 경복궁 가장 뒤쪽 왕비의 처소 곤녕합 옥호루에서 일본인에 의해 벌어진 사건이었다. 칼에 베이고 불에 태워지는 왕비를 먼 발치서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궁녀 리진의 처절한 눈빛을 만나고도 싶었다.
경복궁 가요. 서울 여행 첫 번째로요. 그렇게 남편에게 말한 날부터 나는 숙제하듯 하루에 한 번씩 인터넷에 들어가 경복궁을 섭렵했다. 광화문 흥례문 인정문 인정전 강녕전 교태전 경회루 장안당. 읽고 나서 뒤돌아서면 잊어버렸지만 반복해서 읽으니 조금씩 친숙해졌다. 궁금해졌다. 십리길 수원장에서 사오시던 커다란 눈깔사탕뿐만 아니라 맛있는 것이면 무엇이든 안겨주시던 외할머니가 계시던 외갓집처럼, 경북궁으로 얼른 달려가고 싶어졌다.
서울. 그곳은 내게 가까운 듯 멀었다. 칠 형제 중 아버지를 제외한 나머지 형제들은 서울에 사셨다. 할머니가 둘째 아들이었던 내 아버지와 함께 사셨으므로 큰아버지를 비롯하여 작은 아버지와 어머니와 사촌들이 줄을 지어 드나들었다. 특히 방학이면 사촌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사촌오빠가 컴컴한 사랑방에서 들려주던 드라큐라 영화는 으스스했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들었다. 할머니를 위해 작은 아버지들이 사오던 케익과 사탕과 빵은 그러지 않아도 통통했던 나를 얼마나 유혹했는가. 사촌이 가져다 준 스케이트를 나는 혼자 앞 논배미에 가서 넘어지고 넘어지면서 극성스럽게 배웠다. 촌스러운 내가 서울내기 사촌들에게 기죽지 않을 기회였다. 정작 육학년 때 졸업여행으로 서울 구경 갈 사람 손들어보라는 선생님 말씀에 나는 손을 들지 못했다. 소극적이고 수줍음이 많고 엄마곁을 떠난본 적이 없는 나는 어머니나 언니들이 없는 곳에 가는 일이 죽을만큼 싫었다.
다음 주 수요일에 경복궁 가자. 내가 생각한 것보다 그의 대답은 빨랐다. 하필 그날 미세먼지와 초미세먼지 농도가 가장 나쁜 수치를 나타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다음으로 미루었다. 아쉬웠다. 그날 오후에 일원동에 살 때 가까이 지냈던 남편의 친구 아내인 재희씨와 오랜만에 통화를 하였다. 한번 만나자는 이야기에서 시작된 말이 다음날 경복궁에 가자는 약속으로 진전이 되었다. 세상일은 한 치 앞을 모른다고 했던가.
친구 부부는 둘 다 서울 토박이다. 우리 부부가 강남권을 벗어나지 않고 좁게 살아가는 반면에 그들은 하루가 멀다고 명동이며 종로며 을지로 일대를 다녀오고는 했다. 서울시에서 개최하는 행사에는 거의 다 참석해서 즐기는 것으로 알고 있다. 거기다가 지방 곳곳을 누볐다. 구경하고 경험하기를 즐기는 사람들이다. 당연히 경복궁에 가자는 말에는 두 말이 필요치 않았다. 지하철을 타도 불편하지 않은 장소인데 고맙게도 남편이 운전을 자처하였다.
태조가 조선을 건국하면서 지은 경복궁. 광화문을 지나 흥례문을 지나 근정문을 지나 근정전에 섰다. 북악산과 인왕산이 손에 잡힐 듯 우뚝 서서 궁궐을 감싸고 있다. 끊임없는 영화와 환란의 역사를 품고 있어서인가. 고풍스러우면서 쓸쓸한 듯 경건하다. 근정문을 들어서자마자 왕 앞에 절을 올리는 신하의 심정으로 서 보았다. 근정전에서 광화문 쪽을 바라보며 왕이 되어보았다. 임금이 신하들과 나랏일을 의논하는 사정전을 지나 왕과 왕비의 침전인 강녕전과 교태전을 둘러보았다. 드디어 건천궁에 이르렀다. 곤녕합 옥호루 앞에서 한참을 먹먹하게 서 있었다. 일제의 칼잡이 앞에서조차 꼿꼿함을 잃지 않았던 명성황후의 기개가 전해져오는 느낌이었다.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굴복의 그림자조차 허락하지 않았던 그녀가 그곳에 서 있었을 것이다. 수정궁은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하신 집현전이 있던 자리란다. 무지한 백성을 위한 세종의 백성에 대한 애민정신, 빛난다. 지금도 그쪽이 환하다.
경회루, 웅장하면서 견고하면서 운치가 있다. 일본의 한 대사가 극찬을 아끼지 않았단다. 각국의 대사들을 모신 연회 자리에서 한 마리 나비처럼 춘앵무를 추던 리진. 그 춤에 매료되어 눈길을 멈춘 임금과 그 임금의 표정을 읽고 있는 왕비가 보였다. 리진을 사랑했고 파리로 데려갔던 프랑스 대사 콜랭이 보였다. 물론 신경숙의 소설 리진의 한 장면이다.
경복궁. 1392년 태조에 의해서 중건되었고 1592년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 고종 2년 흥선대원군에 의해 1865년 재건되었고 다시 일제에 의해 파손되고 옮겨지고 사라진 전각들을 1990년대를 거쳐 2000년대까지 하나하나 재건해 지금의 모습이 된 경복궁이다. 과거였으나 과거는 사라지지 않고 역사학자들과 문화재청의 노력으로 현재에 이르렀다. 내 등뼈가 우뚝 서는 느낌이다. 경복궁 복원 사업은 2040년도에 완공이 될 것이란다.
경복궁 주변 북촌은 아기자기하다. 옛 건물들을 보존하여 보수한 작고 낮은 공간에 상가가 아기자기하게 들어찼다. 얼마나 유명한 수제비집이면 평일인데도 줄을 서서 기다린다. 재미있다. 기대감을 불러일으킨다. 항아리 안에 담겨진 수제비보다는 열무와 얼가리 배추 물김치가 일품이다.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외출한 김에 경복궁 뒤쪽 북악산 스카이웨이를 구불구불 올라갔다. 팔각정에서 달콤한 빵에 커피를 마셨다. 이 여유와 자유로움을 무엇과 바꾸랴. 멀리 북한산 자락이 보이고 평창동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야경이 볼만하단다. 꾸미지 않고 웃는 모습에서 따스함이 묻어나고, 툭툭 내뱉는 솔직한 말솜씨에 웃음을 터트리게 하는 부부와 함께하니 더없이 편안하다. 재미있다.
요즈음 웃을 일이 없어요 그렇게 많이 웃기는 오래간만인거 같아요. 덕분에 실컷 웃었어요
다음날 혜림 엄마 제희씨 전화가 왔다. 저두요 저두요 고마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