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사 명장면] 26. 승록사와 승관제 도입
明 홍무제, 유.불.도 三敎合一로 백성 교화
불교-도교는 유교를 보충하는 것으로 인식
포의의 신분으로 명조를 세운 주원장 즉, 태조 홍무제는 이 세상의 어리석은 백성들에게 있어 유교.불교.도교는 불가결한 것이라고 인식하였다. 홍무제는 유교를 양(陽), 불교와 도교를 음(陰)으로 간주하고 음은 양을 보충하는 것으로 인식한 삼교합일(三敎合一)을 설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대 불교는 교리면에서 만족할 만한 발전이 없었다. 그렇다보니 중국 불교사를 연구하는데 있어서 가장 뒤떨어진 시대가 명.청시대가 아닌가 싶다.
본 지면에서는 명대(1368~1644) 불교제도사의 한 부분을 밝힐 수 있는 승록사(僧錄司)의 설치와 승관(僧官)의 임명, 도첩제의 실시와 명 중기 이후 기근구제나 군비조달 목적으로 도첩을 매매하는 매첩제가 시행되는 과정을 간략히 서술하기로 한다. 단, 명대의 사찰조영 금지 정책에서 조영으로 변질되어 가는 과정과 황제를 위시해 고위 관료로부터 일반 서민에게까지 불교가 널리 성행하였던 모습에 대해서는 지면 관계상 생략하기로 한다.
<사진설명>중국 산서성 태원시 숭선사 대비전은 명대 초기 사찰건축의 전형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사진은 대비전과 종루의 모습.
중앙에 승록사, 지방엔 승강 등 설치해 사찰관리
# 승록사의 조직
홍무제는 홍무 원년(1368)에 선세원(善世院)을 열었다. 질(秩)은 종2품으로 특별히 사(師)를 연범선세이국숭교대선사(演梵善世利國崇敎大禪師)에 제수하여 대천계사(大天界寺)의 주지로 삼아 불교의 여러 일을 담당케 하였다.
홍무 14년 6월에는 남경에 새로이 선세원의 기능을 대신할 승록사를, 부.주.현에는 승강(僧綱).승정(僧正).승회사(僧會司)를 설치하여 천하의 사찰과 스님을 관할케 하였다. 그 조직은 아래 표와 같다.
예부의 관할 하에 있던 승록사는 남경에 천계사(天界寺)에 설치하였다. 홍무 21년에는 승록사를 천희사(天禧寺)로 옮겨 도첩 발급 등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후에 영락제가 북경천도를 단행함에 따라 북경에 대흥륭사(大興隆寺, 후에는 대륭선사)를 건립하여 승록사를 설치하였다. 영락연간(1403~1424)에는 변경의 주.현과 군대를 통할하는 위소(衛所)에도 승강사와 승회사가 설치되어 지방의 인심 수습에도 커다란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발급횟수-자격 등 엄격히 제한해 스님 증가 억제
‘토목의 변’때 도첩매매 군비조달…이후 비리횡행
# 도첩제의 시행과 변질
도첩발급은 홍무연간(1368~1398) 예부상서 조모(趙瑁)의 상주에 의해 ‘삼년일도(三年一度)’ 즉 3년에 1회로 규정하였다.
민(民)으로 20세 이상인 자는 스님이 되는 것을 불허하는 대신, 20세 이하의 자로 남경의 사찰에서 3년 간 불사에 종사하여 염결(廉潔)하고 과오가 없는 자는 스님이 되는 것을 허락하였다.
<사진설명>대비전의 동서쪽 방에는 원판(元版) 및 명판(明版)대장경이 보존돼 있다. 사진제공=도서출판 민족문화
단 20세 이상이라도 부모가 유사(有司)에 고하면, 유사가 상주하여 3년 후에 남경에서 경전에 통달하였는가를 시험하여 도첩을 발급하였다.
이러한 홍무제의 조법(祖法)을 이어받은 영락제도 불교를 통제하는 과정 속에서 도첩 발급을 엄격하게 제한하는 정책을 펼쳤다.
영락제는 스님들이 식량을 허비하여 국가에 도움이 되지 않는 존재로 인식하고 홍무제 때의 금령을 준수토록 하였다.
또한 스님 수가 많아지자 ‘삼년일도’의 규정을 5년에 1회 도첩을 발급하는 ‘오년일도’로 개정하였다. 도첩 발급을 3년에서 5년으로 연장한 것은 스님의 증가를 억제하려는 정책에서 기인한 것이다.
영락 16년(1418)에는 스님의 대다수가 경전에 정통하지 않고 멋대로 머리를 깎는 폐해가 발생하자 스님에게 도첩을 발급하는 규정을 새로이 정하였다. 이 조치로 10년에 1회 도첩을 발급하게 되었고 그것도 부는 40인, 주는 30인, 현은 20인을 초과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더욱이 스님이 되는 연령을 이전의 20세에서 40세 이상으로 높였다. 다만 20세 이하인 경우에는 유사에 고하고, 이웃 사람들의 보증을 거쳐 틀림없는 인물인 경우에 한하여 사찰로 보냈다. 이 경우에도 경전을 익히는 기간을 5년으로 정하였고, 승록사가 시험한 후 처음으로 법명을 주고 도첩을 지급하였다.
그런데 명 중기 이후 구황 정책과 몽골의 한 부족인 오이라트 에센이 명조를 침입하여 정통제를 포로로 삼은 소위 토목(土木)의 변이 발생한 이후 군비조달책이 문제로 대두되자 도첩을 매매하는 정책이 시행되었다. 처음에는 쌀 5석을 납부하면 도첩을 발급받았으나, 점차적으로 그 액수가 쌀 5~20석, 혹은 은 5~12량으로 증가하였다.
그 결과 명 초에는 도첩을 청하는 승도(僧道, 스님과 도사)의 수는 3만6000여 명에 지나지 않았으나, 성화 2년(1466)이 되면 그 4배에 달하는 13만2200여 명이 된다. 더욱이 환관이나 유력자가 개입하여 이름을 기재하지 않은 공명도첩(空名度牒)을 남발하게 되면서 승도 수는 50만에 달하게 되었다.
일반 스님만이 아니라 승관들도 연납에 응하였는데 승관에 결원이 생긴 경우에는 본처 사찰의 스님 중에서 학술과 기예에 정통한 자를 심사하여 쌀 100석을 납부하면 즉시 이부(吏部)에 보내 선발케 하고, 동시에 예부(禮部)에서 실시하는 고시(考試)도 면제토록 하였다.
성화연간에는 노약한 승관을 강제적으로 물러나게 하고 대신 연납에 의해 임명하라는 제안을 성화제가 허락하여 명 초의 8명이었던 승관이 4배로 증가하게 된다.
‘경전정통 계행단아’ 기준…봉록은 지급 안해
임무는 스님단속…지방선 ‘백성순화’역할도
# 승관의 임명
승록사에 속한 승관의 자격은 정덕 〈대명회전〉권178, ‘승록사’를 보면 “무릇 본사(승록사)의 관(官)은 모두 경전에 정통한 자를 선발하며 계행이 단아하고 청렴한 자로 삼는다. 봉록은 지급하지 않는다”고 기록돼 있다. 즉 승관에 임명되는 기준을 경전에 정통하며 계율을 지키고 불도를 수행하는 자 중에서 단아하고 청렴하거나 명성과 덕망에 둔 것이다. 이들 승관의 임무의 하나는 천하 스님들의 계율과 청규(淸規)를 지키도록 단속하는 일이었다.
승관에 임명된 한 가지 사례를 들어보자. 명 초의 혜진(慧進)스님은 홍무제의 은혜를 입어 도첩을 획득하였다. 그는 화엄종지(華嚴宗旨)에 정통하였고 유식론 등 여러 법에 통달하여 법주(法主)라고 불리게 되었다. 후에 영락제가 이를 알고 환관을 파견하여 불러들였다.
황제가 〈능엄경〉의 대의를 묻자 잘 대답하여 자의(紫衣)를 하사받고 승록사를 관장하는 천계사에 주석토록 하였다. 후에 영락제가 북경으로 천도하자 해인사에 주석하였고, 천하 스님의 영수가 되어 대재(大齋)를 열어 중생을 구제하여 좌각의에 승진하였다. 그는 또 황제에게 대장경을 간행할 것을 상주하자 영락제가 친히 경의 서문을 작성하였다.
이러한 공적으로 좌천교에 승진하였다. 후에 홍희제가 승록사의 승관을 선별할 때도 혜진만은 불교의 뜻을 잘 살피고 계행을 바르게 한다고 하여 표장하였고, 선덕제는 그를 국로(國老)로서 대우하였다.
한편 각 부(府)의 도강이나 주(州)의 승강은 불도에 박학하고 수행에 정진하는 스님을 임명하여 지방의 백성들을 잘 순화시키도록 하였다.
서 인 범/ 동국대 사학과 교수
[출처 : 불교신문]
☞'불교사 명장면' 목차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