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성 태안사
일주문:1981년 10월 20일 전라남도유형문화재 제83호로 지정되었다.
1683년(숙종 9)에 각현선사(覺玄禪師)가 중수하였고, 1917년
영월선사(暎月禪師)가 다시 중수한 것을 1980년에
보수하였다. 지름이 60㎝ 정도 되는 원목을 다듬지 않고 사용하였으며, 앞뒤로
팔각 기둥을 세웠고, 창방과 평방을 겹쳐서 일주문 전후에는 3구(具), 측면에는 1구의
공간포(空間包)가 받치고 있다. 앙서로 된
살미첨차들, 화려한 단청, 상부의 용머리 장식이 한층 풍취를 돋운다. 내3출목, 외4출목으로 겹처마 맞배지붕이다. 전면에는 ‘동리산 태안사(桐裏山 泰安寺)’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1950년 6·25 전쟁 때 이 일주문과 능파각(凌波閣:전남유형문화재 82)만이 소실되지
않고 남았다.
멀고도
깊은, 곡성 동리산 태안사로 가는 길
할!
태안사 일주문
주련이 활처럼 튕겨 내 마음 깊이 다가온다.
歷天劫而不古(역천겁이부고)
亘萬歲而長今(긍만세이장금)
천겁
세월이 지나도 옛 되지 않고
수
만년을 뻗쳐도 항상 지금이네
▲일주문 후면
▲태안사 옛길
대중교통을 이용한 길,
연천-서울-목포-순천-구례-태안사...
곡성 태안사로 가는 길은 멀고도
길었다.
4월
10일,
우리나라 최전방
연천에서 출발하여 서울에서 하루 밤을 자고 다음날 조카의 차를 타고 목포로 갔다.
목포로 가는 이유는
무안군 삼향면 오룡산 자락에 있는 조상의 산소에 시제를 모시기 위해서였다.
당초에는 기차를 타고
가려고 했는데,
조카가 차를 몰고
가니 함께 가자고 하기에 함께 동석을 했는데,
자동차가 어찌나
밀리던지 우리나라에 있는 자동차는 모두 나온 느낌이었다.
그런데다 조카의 차가
펑크가 나서 신간 인터체인지에서 나가 정비소에 들려 자동차 바퀴를 바꾸어야 했다.
목포까지 6시간이 걸렸다.
12시부터
2시까지 문중 식구들과 함께 조상님께
정성스럽게 시제를 모시고 나서,
오후
2시 35분 목포 터미널에서 순천행 버스를
탔다.
버스요금은
9,000원.
2012년도에 개통
된 목포 광양 간 10번 고속도로를 타보긴
처음이다.
남해바다가 숨바꼭질을
하듯 나타났다간 숨곤 했다.
아스라하게 펼쳐진
남해의 낮고 작은 섬들,
그리고 구릉처럼
다정하게 다가오는 산…
그런 풍경을 구경하며
가다보니 어느덧 순천에 도착했다.
오후
4시,
목포에서 순천까지는
1시간 반이 걸린 것이다.
순천에서는 아내의 초등학교 동창회가 열린다고
했다.
서울에서,
목포에서,
광주에서,
대전에서…
전국에 흩어진
일로초등학교 36회 동창들이 순천으로 다 모인다고
했다.
아내는 서울에서
전세버스를 타고 순천에 이미 와 있었다.
전화를 걸었더니
정원박람회장을 구경하고 있다고 했다.
아무튼 나는 아내
덕분에 순천에 거주하고 있는 아내의 동창생 집에서 하루 밤을 묵었다.
다음날은 아내의 동창생들과 함께 여수로
갔다.
마음 같아서는 혼자서
태안사로 먼저 가고 싶은데 아내가 함께 가자고 하니 어쩔 수 없었다.
덕분에
여수해상케이블카를 타기도 했다.
1ㅣ간도 넘게 기다려 탄 여수해상케이블카는
아시아에서 홍콩,
싱가포르,
베트남에 이어 네
번째로 바다 위를 통과하는 케이블카라고 했다.
육지와 돌섬을
연결하는 케이블카는 투명한 바다를 들여다보며 남해의 절경을 관망할 수 있지만,
타는
과정,
기다리는
시간,
운영시스템이 형편없어
느낌이 별로 좋지 않았다.
▲바다 위를 출렁거리며 가는 여수 해상케이블카
여수에서 다시 순천으로 돌아온
뒤,
본의 아니게 아내의
동창생들과 어울려 점심을 먹고,
순천버스터미널에서
태안사로 가기 위해 구례로 가는 버스를 탔다.
처음에는 곡성으로
가는 버스표를 끊었는데,
버스가 하루에 몇 번
밖에 없어 1시간 반을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스마트 폰으로 태안사
가는 길을 검색해 보니 웬걸,
구례에서 태안사로
가는 거리가 곡성에서 가는 것보다 배나 가까웠다.
순천에서 구레로 가는
버스는 자주 있었다.
곡성버스표를
물리고,
구례로 가는 버스표를
샀다.
버스를 타고 구례로 가는 길에 아내가
태안사에 미리 와 있는 월명수 보살에게 전화를 했다.
구례까지 마중을 좀
나와 달라고.
왜냐하면 구례에서
태안사로 가는 대중교통은 압록에서 내려 다시 버스를 갈아타야 하는데 하루에 몇 번 없어 타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순천에서 구례까지는
40분이 걸렸다.
▲옛스런
풍취를 느끼게 하는 구례버스터미널
구례!
3년 전에 내가
살았던 땅이 아닌가?
터미널의 예스런
풍경도 정겨웠다.
멀리 노고단이
할머니의 품처럼 아늑했다.
구례의 어머니의
자궁처럼 아늑한 땅이다.
그래서 구례는 내게
항상 그립고 가고 싶은 땅이다.
10여분을 터미널
대합실에 쪼그리고 앉아 기다리고 있으니 월명수 보살이 남편 대원거사와 함께 손을 흔들며 다가왔다.
“오메,
여그서 만나니 겁나게
반갑네 잉~”
서울에서 늘 만나는 사람이지만 구례에서
뜬금없이 만나게 되니 반가울 수밖에 없다.
우리는 산토리니 블루
색깔을 한 대원거사의 날렵한 아반테를 타고 태안사로 향했다.
굽이굽이 섬진강을 딸
가다가 압록에서 좌측으로 꺾어져 들어가니 보성강이 연방죽처럼 펼쳐졌다.
보성군 일림산에서
발원한 보성강은 120여km를 흘러 전라선 압록역 부근에서 섬진강으로
유입된다.
민족시인 조태일의 시심이 흐르는 곳
압록에서 18번 지방도로를 따라 가다가 죽곡면 유봉리
삼거리에서 좌측으로 난 보성강을 건너는 다리를
지나간다.
이
길은 복숭아 산지로 유명한 월등으로 넘어가는 길이다. 그 길 왼 편에 <조태일 시문학기념관>이란 이정표가 보인다. 조태일 시문학기념관은 민족시인 조태일의 유품과 작품 등 2000여점이
전시되어 있다. 최남선의 <백팔번뇌>와 <오뇌의 무도> 등 희귀본까지 전시되어 있다니 시간을 내어 꼭 들러볼 일이다.
태안사 대처승의 아들로 태어난 조태일은 <아침 선박>, <식칼론>이란 시집을 발간한
한국시의 기교주의를 비판하고, 민중적 감정과 민중적 언어를 시로 결합한 민중시인이다. 삼선개헌과 유신선포 암흑기에도 강직한 시정신으로
<국토>연작을 발표하기도 한 그는 일신의 영달에만 집착하는 높은 분들을 향해서 매서운 질타를
가하기도 했다.
야윈 팔다리일망정 한껏 휘저어
슬픔도 기쁨도 한껏 가슴으로 맞대며 우리는
우리의 가락 속을 거닐 수밖에 없는
일이다
버려진 땅에 돋아난 풀잎 하나에서부터
조용히 발버둥치는 돌멩이 하나에까지
이름도 없이 빈 벌판 빈 하늘에 뿌려진
저 혼에까지 저 숨결에까지 닿도록 -조태일의 '국토'
중에서-
농로처럼 생긴 좁은 길을 십 여리를 가다가
원달리에서 다시 좌회전을 한다.
여기서부터는
비포장도로다.
태안사는 깊고 먼
곳에 위치하고 있다.
▲태안사로 가는 비포장도로
드디어…
비포장도로 끝에
<동리산 태안사>(桐裏山
泰安寺)’라고 쓰인 일주문이
나온다.
지금은
봉두산(鳳頭山
753m)이라 부르는 데,
태안사를 둘러싸고
있는 산세가 봉황이 즐겨 앉는 오동나무 줄기 속처럼 아늑하다고 해서 동리산이라고도 불렀다고 한다.
이곳에 있는 동안 한
번 올라보아야지 다짐하며 일주문을 들어선다.
▲태안사
초입에 세로 세워진 일주문
절 초입에 세워진 일주문에 나중에 건립을 한
것이다.
그곳에서 능파각을
지나 태안사 옛길로 접어들면 진짜 태안사 일주문이 나타난다.
전남유형문화재
제83호.
1683년(숙종 9년)에 각현선사가 중수하였다는 태안사 일주문은
다듬어지지 않는 원목을 사용하여 팔각기둥을 세웠고,
일주문 전후에
3구,
측면에는
1구의 공간포가 받치고
있다.
화려한
단청,
상부의 용머리 장식이
한층 옛 풍취를 느끼게 한다.
1950년
6.25
전쟁 때 다른 전각은
불타 없어졌지만 이 일주문과 능파각은 소실되지 않고 그대로 남아있다.
할!
다시 일주문 주련이
활처럼 튕겨 내 마음 깊이 다가온다.
歷天劫而不古(역천겁이부고)
亘萬歲而長今(긍만세이장금)
천겁
세월이 지나도 옛 되지 않고
수
만년을 뻗쳐도 항상 지금이네
옛 도인들은 시공을 초월하여 살아왔기에 몇
천겁을 지나도 옛날이 아니고,
수 만년을 앞으로
가도 항상 지금에 살고 있으렷다!
그래 오늘처럼만 항상
살아간다면 내 인생의 무에 어려움이 있을꼬?
꼬박 2박 3일의 시간을 걸려 최전방 연천에서 이곳
동리산 태안사에 이르렀다.
대중교통을 타고 온
긴 시간이 옛 되지 않고,
오늘 지금 새롭게
보이는 태안사에 이르렀으니 이보다 더 좋을 수 있겠는가?
아아, 이제 승과 속을 가르는 일주문에 들어선다.
나는 왜 이 절문을 들어서는가?
이 절은 신라시대 혜철스님이 일으킨 구산선문의 동리선풍이 면면히
흐르고, 동리산파 3조인 국사 광자대사 윤다의 선풍이 이어져 내려오고 있으며, 근세 드물게 생불이라 일컫는 청화 큰스님께서 10년간 주석했던
곳이기도 하다. 또한 나와 인연이 깊은 각초스님(전 화엄사 선등선원장)이 최근 이 절에 주지로 취임을 하여 선풍을 일으키고 있다.
사람은 인연따라 산다고 했던가? 나는 청화 큰스님이 주석하고 있던
1985년 청화스님의 법문을 듣기위해 서울에서 이곳 태안사까지 주말이면 내려오기도 했다. 일주문을 들어서니 30년 전추억이 가슴 깊이 안겨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