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송 상징’ 450살 삼산리 소나무 ‘영면’ “사명대사 의병 때 태어나”…천도재 열기로 천연기념물 제350호…주민들 “관리 잘못 탓”
▲ 삼산리 소나무의 전경. 높이 22m이고 곧게 뻗은 줄기가 4m 높이에서 둘로 갈라진 독특한 모습을 하고 있다.삼산리 소나무의 전경. 높이 22m이고 곧게 뻗은 줄기가 4m 높이에서 둘로 갈라진 독특한 모습을 하고 있다.
★*…오대산 소금강 들머리를 450년 동안 지켜오던 기품 있고 아름다운 '삼산리 소나무'가 마침내 수명을 다했다. 금강송의 상징이던 이 소나무의 넋을 달래기 위한 천도재가 이달 말 열린다. 지난 4일 강릉시 연곡면 삼산리의 소나무를 찾았다. 오대산 국립공원의 소금강 들머리의 주차장 바로 옆에 자리 잡아 길에서도 한 눈에 들어온다. 잔 가지 없이 미끈한 줄기와 껑충한 키가 스리랑카의 거목 바오밥나무를 떠올리게 했다.
강원도 강릉시 연곡면 삼산리 주민 김근영(56)씨가 ”어릴 때부터 꼭 이만했는데”라며 죽은 소나무를 안타까워 하고 있다. ▶
★*…가까이 다가서자 거대한 몸피가 압도했다. 가슴높이 둘레가 3.6m에 이른다. 하지만 붉은 빛이 사라진 수피와 솔잎 하나 없이 앙상한 가지만 남아 생명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작년 봄까지만 해도 나무 꼭대기에 녹색 잎사귀가 조금 있었는데…."어릴 때부터 이만했던 나무를 보고 자랐다는 마을 주민 김근영(56)씨가 안타까워했다."참나무엔 그네를 매달아 놀고 여름엔 마을 사람들이 소나무 그늘로 모여 쉬었어요. 모내기가 끝나면 동네잔치가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소나무는 낮에는 동네 노인들의 모임터가 됐고 밤엔 처녀·총각들이 만나는 장소였죠."
박정희 대통령 때 미신을 타파한다며 없애기 전엔 이곳에 성황당도 있었다. 그래도 주민들은 해마다 두 번씩 당제를 지냈다. "엊그제도 조촐하게 당제를 지냈지요. 죽어버린 나무에 절을 하는데 마음이 아팠습니다." 문화재청은 1988년 삼산리 소나무를 천연기념물 제350호로 지정했다. 마을의 질병과 재난을 막아주는 나무로 주민의 보호를 받아온 서낭나무로서 민속학적, 생물학적 가치가 크다는 이유에서였다.그러나 2000년대부터 수세가 약화되면서 생육상태가 급격히 나빠져 올 8월 고사 상태로 판정했다. 현재 문화재 지정 해제 절차가 진행 중이다.하지만 소나무가 문화재로 지정된 뒤 시름시름 앓다가 죽은데 대해 주민들은 섭섭함과 원망을 토로한다.
김재복(48) 삼산리번영회장은 "가지를 너무 쳐내는 등 관리를 잘못해 수백년 멀쩡하던 소나무가 죽은 게 아니냐"고 말했다. 주민들과 상의도 없이 문화재로 지정해 약 치고 가치 치며 관리를 하더니 죽은 뒤에도 아무 해명도 없는 당국에 화가 나는 것이다. "소나무에 그늘이 진다며 옆에 있던 아름드리 참나무 세 그루를 베어냈어요. 그것들만 있어도 마을숲이 이렇게 황량하지는 않았을 텐데."
안타깝게도 소나무 주변은 그 동안 논이어서 후계목도 전혀 없다.관리자인 강릉시는 소나무의 자연수명이 다했다고 본다. 조승호 강릉시 문화재전문위원은 "소나무는 400~500년이 되면 급격히 쇠퇴 한다"며 "현재 삼산리의 다른 소나무를 문화재로 대체 지정하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고 밝혔다.
국립공원을 지키는 시민의 모임은 월정사와 함께 이달 말께 고사한 소나무 앞에서 죽은 소나무의 극락왕생을 비는 천도재를 지낼 예정이다. 이 자리에는 작은 문화공연도 함께 열어 마을 주민들의 허전한 마음도 달래기로 했다.고공 월정사 사회국장은 "450살 소나무라면 임진왜란 때 사명대사가 월정사에서 의병을 일으켰을 때부터 마을을 지켜온 나무"라며 "나무 밑에서 천도재를 열어 넋을 위로하겠다"고 말했다. 강릉/글·사진 조홍섭 환경전문기자 ecothink@hani.co.kr
[환경통신]
정부는 1966년, 5월 넷째 화요일인 권농일을 페지하고 11월 11일을 농어업인의 날로 정했다. 농민들이 흙에서 나서 흙에서 살다 흙으로 돌아간다는 의미를 살려 달과 날짜의 성질상 토(土) 자가 두 개 겹친 이 날을 정하게 되었다고.
1908 이인직의 <은세계>, 최초의 신극 원각사 공연
1946 국립박물관 개관
1972 남북조절위원회 합의에 따라 남북한 상호 비방방송 24년만에 전면중지 1976 왕인 박사 유허비 전남 영암에 건립
1977 전북 이리역구내서 화약열차 폭발 다이나마이트 24톤을 싣고 인천을 떠난 지 36시간만에 이리역에 도착한 화물열차 폭발로 반경 1km 지역이 초토화되고 10km 안의 모든 창문 깨짐 책임자의 사소한 실수로 일어난 이 사고로 모두 59명이 죽고 1,316명의 부상자, 이재민 1만 6000명, 가옥파괴 1만여동, 재산피해 62억원 다이나마이트 24톤의 위력은 B29폭격기 12대가 한꺼번에 폭탄을 떨어뜨린 위력에 해당하는 것, 폭발현장은 깊이 10m, 직경 30m의 웅덩이로 변했다.
1978 강원 장성 연화광업소서 승강기 추락. 12명 사망
1980 북한, '고려민주 연방공화국' 창립을 위한 준비위원회 결성 제의 제정당 사회단체연석회의 1987 섬유류 수출, 단일업종으로는 최초로 1백억 달러 돌파
1993 국무회의 병역법 개정안 의결 방위병제도 폐지, 상근예비역 및 공익 근무요원 소집제도 신설
1620 대륙 상륙에 즈음한 메이플라워 맹약
1821 러시아 문호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태어남 대표작: 카라마조프의 형제, 분신, 백야, 백치, 악령 "만일 악마가 존재하지 않고 사람이 악마를 창조하게 되었다면 사람은 자기 형상과 닮게 악마를 창조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1840 조각가 로댕 태어남
1855 덴마크 철학자 쇠렌 키에프케고르 세상 떠남 실존적 사유의 개념 확립 대표작: <이것이냐 저것이냐>, <사람은 어떻게 해서 기독교인이 될 수 있나>
1918 독일의 항복으로 제1차 세계대전 끝남
1937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금문교 완공 미국 샌프란시스코와 북쪽 마린 반도를 잇는 금문교의 길이는 2,825m 2만톤의 철강으로 된 2층의 케이블이 지탱하는 두 탑의 높이는 226m나 되는 이 다리는 밑으로 배나 경비행기가 지나가는 세계의 명물이다.
1953 막사이사이, 필리핀 대통령에 당선
1965 로디지아 독립선언
1987 뉴욕 소더비 경매장에서 고호의 <붓꽃> 고액에 경매됨 뉴욕 소더비 경매장에서는 1987년 11월 11일 전세계 2천2백여명의 미술 애호가들이 모인 가운데 빈센트 반 고호의 <붓꽃> 경매가 있었다. 3분 30초 동안 액수는 끝없이 올라가 마침내 5,390만 달러(3억 2천만 프랑)에 낙찰됨으로써 이보다 몇 달 전에 기록을 세우며 팔린 <해바라기>의 220만 프랑 기록을 경신했다.
1989 독일의 베를린 장벽 붕괴 서독으로의 대량탈출 사태를 막기 위해 여행자유화를 통해 베를린 장벽을 차차 개방하기로 작정한 것이 장벽붕괴로 이어진 것은 기자회견장에서 당 대변인의 실수 때문이었다. 그는 머뭇거리다가 국경 개방에 대해 문서와는 달리 얼떨결에 '즉시 발효'라고 했고, 이를 이상히 생각하면서도 동독 방송이 그대로 방송했던 것. 이어 군중들 사이에 "당장 담을 넘어갈 수 있다"는 소문이 퍼졌고, 벽 쪽으로 몰려가 극적인 상황이 벌어졌다. 실수와 의도적 오해로 이루어진 독일 통일의 한 장면이다.
|
이리역열차폭발사건 발생 1977. 11. 11
1977년 11월 11일 오후 9시 10분경 전라북도 이리역(지금의 익산역) 구내에서 화약수송열차가 폭발했다. 이 사건은 민수용 화약을 싣고 광주로 가기 위해 하행선에 대기 중이던 화물열차에 실린 다이너마이트 등 폭약 24.810t이 폭발하면서 발생한 것이었다. 이 사건으로 사망 49명, 실종 7명, 중상 293명, 경상 717명, 가옥 전파 675채, 반파 1,289채, 재산피해 80억 원, 이재민 9,000여 명이 발생했다. 사건의 직접적 원인은 화약수송원이 술에 취해 열차 내에 촛불을 켜놓은 채 잠이 들었다가 다이너마이트 상자에 불이 붙으면서 발생한 것으로 밝혀졌다. 또한 한국화약에서 총포화약류단속법과 이에 따른 시행령 등의 규정을 무시한 채 다이너마이트 등 폭약과 뇌관 36상자를 싣고 무자격자를 동승시킨 점이나, 철도청에서 철도운송규정 제46조 2항 "화약류는 되도록 도착정거장까지 직통하는 열차에 의하여 운송되어야 한다"는 규정을 무시한 채 화약열차를 역 구내에 22시간 이상이나 방치시키고 위험표지판의 부착이나 비상소화전 등의 방화시설을 제대로 갖추지 않은 점 등도 사고의 주요 원인으로 꼽힌다. |
제1차 세계대전 휴전협정 조인 1918. 11. 11
1918년 11월 11일 동맹국과 연합국으로 대립한 제1차 세계대전의 휴전협정이 조인됨으로써 4년간 계속되어온 전쟁이 막을 내렸다. 1914년 6월 28일 남부 슬라브족의 '해방'을 위해 사라예보를 순방 중이던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이 세르비아 청년에게 암살당함으로써 세르비아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간의 갈등이 폭발했다. 이 사건은 각국의 이해와 맞물려 제1차 세계대전으로 확대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동안 연합국은 500만 명의 전사자를 포함해 2,200만 명이 넘는 사상자를 냈으며, 동맹국은 330만 명의 전사자를 포함해 1,500만 명의 사상자를 냈다. 전쟁 중 굶주림이나 질병, 또는 대량 학살 등으로 많은 민간인이 목숨을 잃었는데 군인 전사자보다 많은 1,300만 명가량으로 추정된다. 이 전쟁에서 동맹국측인 터키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등이 차례로 몰락했고, 독일은 미국과의 협상을 통해 평화협정에 합의했다. 이로써 제1차 세계대전은 프랑스·영국·러시아·이탈리아·일본·미국이 주도한 연합국측의 승리로 끝났다. 그러나 무리한 참전은 러시아에서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나는 결과를 낳았고, 유럽의 불안정은 제2차 세계대전의 불씨가 되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