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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시리즈] 시적 구원: 윤동주 탄생 100주년에 부쳐 - 박명림, 연세대학교 교수 윤동주 100주년 두 세계 이념의 대결로 인한 세계적 대전쟁의 참혹한 파국을 체험하였을 뿐만 아니라 아직도 그 이념 대결의 산물인 분단의 질곡과 세계 전쟁의 위협에서 조금도 벗어나질 못하고 있는 불행한 이 나라의 현실을 보고도, 단일한 세계 이념을 온 인류사에 들씌우려 했던 첫 출발인 볼셰비키 혁명 100년의 의미조차도 정리하지 못하고 있다. 올해 우리 사회의 격동이 얼마나 격심했는가, 지성적 대응이 얼마나 단견적이었는가를 상념하게 하여 착잡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다. 인물들 역시 마찬가지다. 100주년을 맞은 사람들만도 한 사람 한 사람 거명키 벅찰 정도다. 뇌리와 골수를 가르는 굵은 섬광으로 살다 간 시대의 양심 윤동주(尹東柱)와 송몽규(宋夢奎), 군사 쿠데타와 산업화 · 근대화 혁명의 선도자 박정희(朴正熙), 비극적인 선구적 통일운동가이자 세계적 음악가 윤이상(尹伊桑), 한국전쟁의 지휘관이자 박정희 정권의 국무총리였던 정일권(丁一權), 좌우 대립과 보혁 대결을 넘어 대화를 통한 사이 너머의 제3의 길을 주창한 강원용(姜元龍), 이들 모두 100주년을 맞는다. 한 사람 한 사람 모두가 다 깊이 들여다봐야 할 족적이 한두 가지가 아닌 사람들이다. 세계로 눈을 돌려도 같다. 미국 진보와 자유주의의 상징 존 F. 케네디(John F. Kennedy), 20세기의 10대 순교자로까지 선정된 라틴 아메리카 해방신학자 로메로 대주교(Óscar A. Romero y Galdámez), 언어의 마술사로 불렸던 미국 현대 작가인 시드니 셀던(Sidney Sheldon)도 모두 100주년을 맞는다. 명동촌과 용정: 다시 윤동주를 찾아 한 편 한 편이 ‘주옥같은’이라는 말이 그대로 들어맞는 윤동주의 시는 누구에게나 사랑을 받는다. 청년의 시기에 그를 통해 내 마음의 별을 꿈꾸고, 살포시 시심(詩心)을 키우며, 고단한 삶의 위로를 받지 않았던 보통의 젊은 가슴들은 거의 없을 것이다. 100주년을 맞아, 이전에도 몇 차례 들렀던 용정과 명동촌의 그의 삶의 여러 궤적들을 다시 밟아봤다. 지난해 본 영화 「동주」에 대한 감상도 추가되어, 여기 용정에 와서야 가까스로 시간을 내어 그에 대한 오랜 사랑의 한 켠을 어설프게나마 갈무리해본다. 그가 다니던 학교의 윤동주 교실도 막 답사한 직후다. 그러나 이 글은 한 문외한의 아마추어적인 시 감상에 불과할 뿐, 전혀 전문적인 평론이 아니라는 점을 매우 강조하여 말씀드린다. 하여 오독과 오류도 적지 않을 것이다. 늘 그러하였듯 이번에도 안중근의 숨 막히는 최후 궤적들과 함께 하였으나, 안중근의 삶과 사상은 머지않아 전작으로 본격 분석할 것이기에 또 미루어둔다. 폭염의 만주 여정은 곳곳이 서울처럼 크게 더웠지만, 젊은 날의 한 표적(標的) 윤동주와 함께였기에 마음만은 맑고 가볍기가 이를 데 없었다. 육신의 무더운 땀과 마음의 포만한 청량감이 공존하는 시원함은 무엇과도 비길 데 없는 모순적 일치의 체험이리라. 그가 다녔던 일본의 대학까지 강연차 두어 차례 다녀오고 그때마다 그곳의 그의 시비(詩碑)도 느껴보았으니 동주의 겉 삶은 얼추 답사한 셈이다. 평소에도 강의 후나 늦은 오후에 가끔 연세 교정의 윤동주 시비를 둘러보고, 동주길을 따라 윤동주 기념관에도 들러 체취를 맡으며, 특히 올해는 윤동주 100주년의 교내 문학 행사에도 가끔 들러보곤 하였다. 청년 시절 빠져들었던 윤동주에 대한 오늘의 이 모든 값진 혜택들은 윤동주가 다녔던 학교에서 가르칠 수 있는 과분한 행운 때문일 것이다. 민족 시인과 항일 시인을 넘어: 윤동주의 본질을 찾아 맞는지는 모르지만 문자 그대로 시(詩)를 파자(破字)하면 아마 ‘사원의 언어’[言+寺] 가 될 것이다. 즉 시란 마치 사원에서 홀로 드리는 기도처럼 고독한 자기만의 언어요 내면 마음의 말일 게다. 절대 언어이자 내면 언어인 것이다. 그 점에서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말이자, 또 자연스럽기 때문에 꾸밈이 없는 말, 즉 신에 의해 창조된 원형에 가장 가까운 인간들의 말이 시일는지도 모른다. 우리 세대 누구나가 그러하듯 학창 시절부터 제법 오래도록 윤동주를 읽어왔지만, 불행하게도 나는 그의 시가 우리의 학교 교육과 나라가 늘 강조해오던 민족 시(인), 저항 시(인), 애국 시(인), 순국 시(인), 항일 시(인)가 주조는 아니라고 생각해왔다. 그러한 점이 분명 존재하나 그게 전부나 중심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시를 전혀 모르며, 시를 쓴 시인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나의 근본적인 한계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학교에서 윤동주를 배우던 시절에 그를 몇 대(大) 몇 대 저항 시인으로 자리매김하는 것을 아직도 기억하나, 훗날 다시 읽으니 동의하기 어려운 분류였다. 그를 민족주의에서 보편의 바다로 풀어놔줄수록, 좁은 항일 시인의 범주에 가둬놓지 않고 세계로 벗어나게 할수록 그는 한 명의 뛰어난 세계 시인이 되고, 그의 시는 인간의 내면과 실존, 세계의 당대 시대 상황을 가장 잘 표현한 20세기의 대표 시이자 보편 언어가 되지 않을까 상념해본다. 시인은 언어로 말한다는 점에서 그의 시를 반복하여 읽어보아도 국가, 민족, 독립, 해방, 광복, 항일, 저항, 애국이라는 어휘나 그에 근접한 것들은 많지 않다. 대신 그의 시어들은 이미 잘 알듯이 ‘자연’, ‘자아’, ‘구원’의 부류에 거의 집중되어 있다. 다른 하나를 추가하자면 그를 둘러싼 실존적 현실과의 시적 대면일 것이다. 김우창이 말하듯 “‘새벽’, ‘아침’, ‘시대’, ‘역사’, ‘진실한 세기의 계절’, ‘빛’, ‘어둠’ 등의 어휘는 그의 행동도 이러한 어휘가 가리키는 사회적 정치적 테두리 속에서 취해져야 할 것임을 이야기해준다.” 끝으로 하나의 시어 군(群)이 굳이 추가될 수 있다면 ‘고향’이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를 쉬이 민족 시인으로 분류한다. 그의 몇몇 시심이나 창작의 의도를 반일 저항으로 해석할 수는 있겠으나, 또 그가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비극적인 옥사를 당한 것은 명백한 사실이지만 그로 인해 그의 창작 행위가 곧바로 항일이 되고, 그의 주요 시들이 반일 민족 시가 되어야 하는 것인지는 쉽게 동의하기가 어렵다. 그의 생가(生家) 입구에 있는 ‘중국 조선족 애국 시인’이라는 소개로 인한 민족과 국적 문제가 눈에 거슬린다는 여러 지적들이 떠오른다. 이때 ‘애국 시인’은 물론 ‘중국’의 애국 시인을 말할 것이다. 그가 중국을 자기 조국으로서 사랑했는가? 아닐 것이다. 또 당시 항일은 곧 중국에 대한 애국이었는가? 역시 아닐 것이다. 중국의 협량이 그대로 읽힌다. 그는 한국 이민 가족의 후손으로서 중국에서 나아서 중국, 한국(일제 식민 시기), 일본에서 학교를 다녔고, 한국어로 시를 썼다. 물론 식민 시대에 출생하여 식민 시대에 사망하였기에 해방된 대한민국(남한)이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의 국적을 가졌던 적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시가 한국어로 쓰인 한국 시임을 부정할 수는 결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 윤동주의 시는 그런 민족과 국적 문제조차도 안고 넘어 시대의 혹독한 인간 억압과 인간성에 말살에 대한 가장 보편적인 정신적 영적 저항—희생을 통한 자기와 민족과 인간 구원—의 경지에 다다르지 않았나 생각해보게 된다. 그것은 아일랜드를 방문하여 우리가 익히 잘 아는 시인과 소설가, 극작가들의 행로를 여행할 때, 토착어가 아닌 영어로 시를 쓴 우리와 세계에 저명한 아일랜드 출신의 아일랜드/영국 시인과 소설가들을 이해하려 할 때 가졌던 독법과 유사하면서도 다른 어떤 것이었다. 우리는 우리 시인들을 민족(주의)의 범주 안에 가두지 않을 이별 훈련을 해야 할 것 같다. 그에게서 민족 시인과 항일 시인의 좁은 굴레를 벗겨줄 수 있다면 우리는 그를 시적 구원, 나아가 인간적 구원을 향한 하나의 더 높은 보편 정신, 대표적인 세계시민이요 대시인 그 자체로 기억할 수 있을는지 모른다. 아래에서 살펴보듯 그의 시 읽기에는 구원의 지평이 추가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즉 시적 구원을 말한다. 이 말은 누스바움(Martha C. Nussabaum)이 사용한 ‘시적 정의’라는 표현을 염두에 두고, 윤동주의 시와 삶에 맞게 수정한 표현이다. 내면 성찰과 구원은 —전자는 이미 김우창이 말한 바 있다— 윤동주가 시를 쓰는 궁극적 이유였지 않을까 싶다. 평범한 독자인 내가 그의 시를 읽는 나름의 독법이다. 그리하여 문학에 문외한인 한 독자로서 그의 시를 읽을 때 —과장이나 오독이 아니길 빈다— 종종 괴테나 릴케, 헤세를 연상하는 연유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러한 기억 방법이 민족적 기억의 테두리보다는 좀 더 바른 것이 아닌가 싶다. 그에 대한 판결문과 전기와 영화를 볼 때 그의 곡진하고 치열하며, 순수하고 진실했던 삶이 주는 감동의 또 다른 한편에서는, 그의 시가 갖는 어떤 종교적인 절대적 경지에 대한 외경심이다. 기독교와 시적 구원: 윤동주의 본질 윤동주에 대한 가장 탁월한 전기를 쓴 송우혜는 “윤동주의 본질은 기독교인”이라고 간단명료하게 압축한다. 그의 부모는 모두 기독교인이었고, 그 역시 당연히 기독교도로 태어났고 유아 세례를 받았다. 그러나 성인이 되어서는, 송우혜가 다시 말하듯, 그는 “단연코 자신의 선택에 의해서 기독교도로 살아갔다.” 그는 친가와 외가가 모두 기독교 집안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당시 ‘간도의 대통령’으로 불린 유명한 그의 외삼촌 김약연(金躍淵)은 목사였다. 김약연이 남긴 “나의 행동이 나의 유언이다.”라는 자못 감동적인 말은 매우 종교적인 구도자적 언어로 이해된다. 다른 글에서 언젠가 소개한 적이 있는 간디의 거의 같은 말, 즉 “나의 삶이 나의 메시지다.”도 역시 그러하지 않나 싶다. 윤동주는 교회의 주일학교 및 성경학교 교사로 섬겼으며, 주요 교육을 기독교 학교에서 받았다. 그가 차례대로 배운 명동소학교, 은진중학교, 평양 숭실중학교, 광명중학교, 연희전문학교, 릿쿄대학, 도시샤대학 중 여러 곳이 기독교 계통이었다. 연희전문 시절 그는 목사 부인이 지도하던 영어 성서반에도 참석하였다. 삶의 마지막 순간인 옥중에서도 그는 영일대조(英日對照) 신약성서를 차입해서 읽었다. 나아서 죽을 때까지 그의 삶은 평생 종교, 즉 기독교와 떼려야 뗄 수가 없었다. 그의 시가 후반부로 가면 갈수록 기독교적인 색채가 더욱 농후해져 점점 더 절대 내면과 절대 구원을 노래한 까닭이었다. 다시 강조하건대 구원을 희구한 윤동주에 대한 민족 시인, 항일 시인, 독립운동(가) 시인 규정은 어딘가 협소하고 왜소해 보인다. 그리고 그것들은 그의 시의 전체 본령, 그의 삶의 본질도 아니지 않았나 싶다. 그는 부조리한 시대가 엄습한 최악의 인간 조건에서 인간으로서, 시인으로서 (거의 예수나 사제들처럼) 저항한 것이지 한국 민족으로서 저항한 것은 아닌 것처럼 보인다. 이 말이 그가 한국인이었기 때문에 죽임을 당하였다는 말을 부정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다시 김우창을 빌리면, “그가 원했던 것은 주로 자아의 미적 실존적 윤리적 완성이었다.” 전적으로 동의한다. 여기에 더해 기독교적 구원의 문제가 추가되어야 한다고 본다. 그러나 문제는 자아의 윤리적 완성조차 허용하지 않는 시대였다. 즉 “시대는 너무나 가혹했다.” 그리고 “가혹한 시대는 자아의 탐구자에게 비장한 수난자의 지위밖에 허용하지 않았다.” “윤동주에게 괴로웠던 것은 당대의 사회가 넓은 의미에서 자기완성의 추구를 허용하지 아니한다는 점이었고, 그 결과 그는 현상 타파를 요구하게 된 것이다.” 이제 김우창이 말하는 “비장한 수난자로서의 현상 타파”에는, 또는 그것을 넘어, 윤동주의 자기 희생적인 시적 구원이 포함 또는 추가되어야 할 것 같다. 공교롭게도 시인의 아래의 글들은 거의 전부 1941년 한 해에 씌어졌다. 사유종시 구원을 희구한 윤동주에게 처음과 끝은 같은 것이었다. 우리가 잘 아는 「서시」에서 ‘죽는 날까지’를 말한 시인은 「종시」(終始)에서는 ‘시점’을 말한다. 즉 “종점이 시점이 된다. 다시 시점이 종점이 된다.”라고. 덧붙여 시인은 말한다.
그리하여 시인은 끝내 시종(始終)이 아닌 ‘종시’(終始)를 말하고 만다. 이것은 단순한 거꾸로가 아니다. 그에게 종점과 시점은 같은 것이다. 시인이 말하듯 누구에게나 내린 곳이 곧 타는 곳이 아니던가. 그가 믿은 종교가, 그리고 동양의 정신과 교육 세계를 지배한 한 고전이 말하는 바와 같이 사유종시(事有終始), 종시일관(終始一貫)일지 모른다. (시작이 있기에 끝이 있지만, 동시에) 끝이 있기에 시작이 있어 시인은 끝을 먼저 분명히 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즉 끝이 시작이다. 이는 우리 시대 최고의 철학자의 한 명인 함석헌의 역사철학이기도 하다. 시인에게 끝[終]은 종말과 심판을 말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꿈과 소망이요 목적일 수도 있고, 부활과 영생일 수도 있을 것이다. 목적이 있기에 출발이 있다. 끝이 있기에 처음이 있다. 종말이 있기에 탄생이 있다. 그러나 시인은 끝끝내 종에서 시(始)로의 여행, 즉 ‘진정한 고향’행을 말함으로써 탄생과 출발의 근원으로의 재귀와 회귀를 희원한다. 궁극적인 구원을 희구한 시인 동주에게는 어쩌면 사는 날과 죽는 날, 삶과 죽음, 처음과 끝, 종점과 시점은 같은 것인지 모른다. 뒤에서 보듯 삶과 죽음이 같다는 깨달음 역시 그가 생명의 부활을 믿었기 때문인지 모른다. 읽으면 읽을수록 그가 도달한 경지가 그렇지 않았을까, 그는 대저 거기까지 나아가지 않았을까 하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세계일주행보다는 고향행을 더 사랑하는 시인은, 그러나 불행하게도, “진정한 내 고향이 있다면” 하고 물으며 고향 상실의 현실을 안타까워한다. 그 상실은 마음(에서)일 수도 있고, 현실(에서)일 수도 있다. 근본적으로 인간은 “고향에서 낳아서 (세상을 거쳐 다시) 본향(本鄕)을 찾아가는 존재”다. “고향에서 본향으로”, 이 말은 언젠가 철학적으로 상론(詳論)하려 한다. 모든 삶이 오디세이, 즉 인간오디세이인 까닭이다. 그것은 세상에 온 누구의 여정이나 같다. 나 역시 —윤동주와 특수 관계였던— 정지용의 「향수」를 가장 좋아하는 애창곡으로 삼아 시도 때도 없이 깊은 향수에 젖어 부르곤 한다. 그런데 알게 모르게 마음 한 켠에는 그와 윤동주의 특별한 관계가 자리 잡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래서 그런지 시골 고향 길의 모퉁이를 돌아가며, 또 학창 시절 가까운 친구들과 학교 앞 대폿집에서, 또는 이번을 포함해 몇 번 들렀던 명동촌과 용정의 마을 한 어귀에서 지척의 해란강과 일송정을 떠올리며, 언젠가는 멀리 벤조 소리 들리는 미국 어느 중서부 마을의 붉은 노을 지는 저녁을 서성이며, 「향수」를 소리 내어 부를 때면 이상하게도 노래가 다 끝나기도 전에 늘 마음 한쪽에서는 윤동주가 함께 떠올랐다. 이상했다. 내 의식과 기억 속의 불가피한 사랑이요 자동 연상 작용인지도 모른다. 본향, 또는 「또 다른 고향」 시인은 끝내 자신이 말한 ‘진정한 고향’을 찾았는가? 「또 다른 고향」을 보면 백골과 함께 고향에 돌아온 뒤 우는 나를 백골[현실 · 육신]과 혼[영혼 · 초월]으로 나눈 뒤, “백골 몰래 아름다운 또 다른 고향으로 가자”고 외친다. 이미 고향이 있는 시인이 또 다른 고향을 말한다. 그곳은 아름다운 곳이다. 아! 시인은 ‘진정한 내 고향’을 마침내 ‘아름다운 또 다른 고향’에서 찾은 것이다. 성서에서 선명하게 대비하여 말하는, “저희가 나온 본향”(고향)이 아닌 “더 나은 본향”(천국)을 말하며, 이는 하나님이 “본향을 찾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해 놓은 성”이다.[히브리서. 11장 13절-16절] 시인은 마치 성서의 이 구절을 시적으로 능숙하게 옮겨 놓은 듯하다. 질곡의 현실에서 육신마저 분리해놓고 자유로워지고 싶은 이 절규가 내겐, 고단한 현실에 묶인 육신을 떼어놓고 영혼만 따로 ‘아름다운 또 다른 고향’, 즉 자유와 생명의 ‘본향’인 ‘천국’으로 가자고 나지막이 외치는 기도 소리로 들려온다. 초월이요 절대다. 어쩌면 이때 ‘또 다른 고향’은 가장 역설적인 현실 세계일 수도 있다. 즉 자유의 고향 용정이 아닌 부자유한, 자신이 고향을 떠나 당시에 공부하던 식민지 조국의 수도 서울일지도 모른다. 거기에도 고향처럼 자유의 바람을 불어넣고 싶었던 소망의 표출인지도 모른다. 둘 중 무엇이었든지 간에 —또는 이 두 해석이 다 틀렸을 수도 있다— 그가 현실과 하늘, ‘썩어가는 백골’[육신]과 ‘아름다운 혼’[영혼]을 분리하려는 간구만은 분명했다. 구원의 나팔 소리: 「새벽이 올 때까지」 이제 시인은 거의 법칙 같은 편재와 합일과 일치를 말한다. 「새벽이 올 때까지」에서 시인은 ‘검은 옷’을 입힐 ‘죽어가는 사람들’과 ‘흰옷’을 입힐 ‘살아가는 사람들’을 모두 한 침실에서 잠을 재우자/재우라고 말한다. 생사와 흑백의 구별과 초월을 동시에 말하고 있다. 그리하여 시인이 분명히 같은 뜻으로 썼을, 그리고 실제 삶에서는 완전히 같은 현상이요 실존인 ‘죽어감’과 ‘살아감’, ‘죽어가는 사람들’과 ‘살아가는 사람들’ 모두는 다들 울 것이며, 즉 다들 울 정도로 고통스러울 것이며, 그러면 젓을 먹이라고 한다. 여기에서 시인은 울음을 말하나 기실 그는 슬픔을 훨씬 더 자주 사용한다. 시인의 시 쓰기를 ‘슬픈 천명’(「쉽게 씌어진 시」)이라고 보는 그는 성서가 말하는 팔복[마태복음 5장 3절-12절]을 말하며, 시 「팔복」에서 단지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한 가지만을 무려 여덟 번 반복하여 말한다. 놀랍다. 그는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요”라고 말한다. 시인에게는 슬픔이 곧 복이며, 다른 모든 복을 대신한다. 팔복을 슬픔 단 하나로 모두 삼켜버리는 시인, 우리는 그가 자신의 슬픔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또 복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죽어가는 자들에게나 살아가는 자들에게나 울거들랑 다 똑같이 먹이와 양식을 주기를 포기하지 말라는 시인은, 그러면 “이제 새벽이 오면 나팔소리 들려올 거외다.”라고 말한다. 언젠가 모두에게 차별 없이 새벽이 올 것인바, 이때 울릴 나팔 소리는 일상의 깨우는 소리, 기상의 소리인 동시에, 기독교도인 시인에게는 무엇보다도 신의 음성, 하늘의 음성을 말한다. 시인에게 그것은 하나님의 나팔 소리다. 즉 예수의 재림과 통치의 음성을 말한다. 부활의 새벽에는 산 자와 죽은 자 모두 최후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 시인은 거듭 나팔 소리를 듣는 영원한 생명과 부활과 구원을 노래하고 있다. 성서는 〈출애굽기〉, 〈시편〉, 〈마태복음〉, 〈고린도전서〉, 〈데살로니가전서〉, 〈요한계시록〉 등에서 반복하여 —서로 약간 다른 뜻으로 이지만— ‘나팔소리’에 대해 말하고 있다. 시인은 이것을 말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내가 이제 한 가지 비밀을 말하겠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죽지 않고 모두 변화된다는 점입니다. 마지막 나팔소리가 울릴 때 눈 깜짝할 사이에 죽은 사람들이 썩지 않을 사람으로 다시 살아날 것이며, 우리는 모두 변화될 것입니다. 이 썩을 것이 썩지 않을 몸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않을 몸을 입을 수밖에 없습니다.”(고린도전서 15장 51-53절). 「태초의 아침」
「태초의 아침」은 더 성서적이며 더 인간적이다. 성서적인 동시에 인간적이라는 이 말은 맞는 것일까? 어쩌면 가장 성서적이며 가장 인간적인지 모른다. 시인에 따르면 봄 여름 가을 겨울 자연의 아침이 아닌 날 아침에 꽃이 피어났다. 모든 것은 그 전날 밤에 마련되었다. 하나의 꽃이 피는 것조차 인간이 알 수 없는 신의 계획이다. 전날 밤에 마련되어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는, 오래전에 예비된 자연의 신비이다. 모든 것이 신의 계획 속에 마련되었음을 말한다. 그리고는 끝내 시인은 “사랑은 뱀과 함께, 독은 어린 꽃과 함께”라고 외쳐 창세 이후 인간과 종교의 가장 모순적인 본질에 육박한다.[창세기] 뱀이 없었다면 사랑은 올 수 없었다. 사랑과 뱀, 악과 꽃은 함께 왔을 뿐만 아니라 공존한다. 섭리와 자유, 계율과 자유행위도 함께 왔을 뿐만 아니라 공존한다. 선과 악을 아는 지식나무를 먹지 말라는 신의 ‘섭리 · 계율’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따먹는 인간의 ‘자유 · 자유의지’를 허락하는 모순적 본질을 전율할 정도로 이보다 더 잘 노래한 시와 시인을 발견하기는 쉽지 않다. 적어도 나의 경우는 그러하다. 그것은 곧 신의 섭리의 절대적 옳음과 인간의 자유(와 타락)의 영역을 동시에 증명하려 해온 인류 철학의 한 중심 명제가 아니었던가? 자신의 자녀 이브에게 준 신의 계명과 인간 이브의 자유를 모두 말함으로써 여기에 이르러 비로소 시인은 성선(설)도 성악(설)도 도저하고도 선명한 대비를 통해 철저하게 융합하고 철저하게 극복한다. 소름이 돋는 하나의 완벽한 구극의 경지처럼 보인다. 「또 태초의 아침」 구원을 향한 시인의 기도는 한 걸음 더 나아간다. ‘하나님 말씀이 들려온다’고 직접 언명하는 「또 태초의 아침」에서는 죄지음과 눈밝음을 자신에 대한 계시로 통합하여 읽어낸다. 즉 죄지음과 눈밝음은 불가분의 관계다.[창세기] 이게 가능할까? 아니 시인은 이미 죄지음이 없이는 눈밝음이 없다는 모순적 진리를 깨달았음에 틀림없다. 무슨 계시일까. 눈이 밝아진 시인은 마침내 땀 흘려 일하려 한다. 선악과를 따먹은 이브가 잉태하는 고통을 받아 무화과 잎으로 부끄러운 곳을 가린 채 인간으로서 열심히 생산하고 노력했듯이, 시인의 다짐은 이브의 후예로서 당연하다. 이 부분에 대한 김우창의 해석처럼 인간은 악까지도 포함하는 삶을 살 결심을 하여야 한다. 눈밝음의 산물은 곧 부끄러움, 죄, 악에 대한 깨달음이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땀은 영원히 부끄러움, 죄와 함께할 것이었다. 시인은 그것을 말하고 있다. 이브가 해산하는 수고를 다하면 아직 알 수는 없지만, 가만히 읽으면 이때 말하는 ‘태초의 아침’과 그때의 ‘해산의 수고’는 조국의 새벽과 광복의 도래를 말하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부끄런데’는 창씨개명한 자신을 말할 수도, 강탈당했던 식민지 조국을 말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리하여 이브의 후예들처럼 자유의 상황에서 죄를 씻기 위해 더 열심히 생산하고 창조하고 노력해야겠다는 다짐일는지도 모른다. 머지않아 윤동주 전문가들에게 여쭤봐야겠다. 「십자가」 「눈 감고 간다」에서 성서의 ‘씨 뿌리는 자의 비유’[마태복음 13장 10절-33절. 마가복음 4장 10절-20절. 누가복음 8장 9절-15절]를 따라, 예언자와 선지자처럼, 어두운 밤에 눈을 감고 가진 씨앗을 뿌리면서 가거라 외치는 시인은 마침내 「십자가」에서 아예 예수처럼 자기 자신이 십자가를 지고 싶어 한다. 여기에서 ‘괴로웠던 사나이’는 자신일 수도 있고 예수일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전자일 경우 괴로운 윤동주가 십자가를 짐으로써 행복한 예수를 꿈꾸는 것이 되며, 후자일 경우 예수는 괴로웠으나 행복한 존재로 같이 그려진다. 전자일 확률이 크지만, 둘 모두 윤동주의 소망일 것이었다. 그리고는 높은 첨탑 위의 십자가이지만 올라갈 수만 있다면, 자신에게도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예수의 길을 가겠노라고 조용히 다짐한다.
이 시는 목숨을 드리워 피=생명을 바쳐 희생하고 헌신하여, 다시 꽃처럼 피어나=부활하여 세상 어둠을 밝히기 위해, 십자가에서 조용히 피 흘리며 죽어가겠다는 간절한 기도로 들린다. ‘꽃처럼 피어나는 피’와 ‘어두어가는 하늘 밑’의 대조는 섬뜩하기까지 하다. 대체 죽을 때 몸에서 쏟아져 나올 피가 어찌 꽃처럼 아름답게 피어날 수 있는가? 게다가 십자가의 예수 죽음은, 전지전능한 창조주가 그의 독생자의 죽음을 무력하게 바라보기만 하는, 기독교 최대의 역설적인 절대 사랑의 표현이 아니던가? [마태복음 27장] 불의한 죽음에 예수조차 일체의 저항이 없었다. 독생자의 생명을 죽게 (하고 부활하게) 함으로써 자녀들에 대한 사랑을 증명해내는, 자신이 창조한 자녀들에 대한 절대 사랑이 없다면 결코 설명할 수 없는 무한 사랑으로서의 신의 무력함이다. 그게 우리가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시인 동주의 사랑과 희생의 경지였나 보다. 여기에서 그의 시와 기도, 시어와 기도 언어는 완전한 일치를 이룬다. 그에게는 이제 시가 기도요 기도가 시인 것이다. 지금은 정녕 너무도 괴롭지만 피 흘리며 죽어가 다시 부활한 행복한 예수를 따르겠다, 예수의 길을 가겠다는 구원의 절대 기도요 절대 다짐이다. 시인은 마치 작은 예수가 된 것 같다. 자유와 구원에의 우리들의 절대 희구는? 역사학자 E. H. 카는 자신의 저명한 도스토옙스키 평전에서 “대립하는 것이 융합하고 상반하는 인간의 마음의 깊은 곳을 탐색한 사람은 도스토옙스키 이외에도 존재한다. 그러나 그만큼 깊이 있게 증명한 사람은 없다.”라고 말한 바 있다. 아마도 도스토옙스키의 저 극적인 인물들을 만나본 사람들은 이 말을 인정할 수밖에 없으리라. 나는 이 말을 이렇게 변용하여 윤동주에게 적용하고 싶다. “대립하는 것이 융합하고 상반하는 인간의 본질을 탐색한 사람은 윤동주 이외에도 존재한다. 그러나 그만큼 선명한 시어(詩語)로 보여준 사람은 많지 않다.” 시인의 삶과 시에 대한 나름의 범용한 중간 여정을 마치며, E. H. 카가 전기의 끝부분에서 도스토예프스키에게 헌사한, “그처럼 타락하지 않고 끝까지 완벽하게 자연스러웠던 위대한 사람도 드물 것”이라는 말을 이 빛나는 용정의 아침을 맞아 나는 윤동주에게 바치고 싶다. 100주년을 맞아 그를 전체주의 시대의 인간성 파괴에 저항한 한 구원의 시인으로 기억하는 추가가 일어나길 기대해본다. 그리하여 그를 20세기 폭력과 야만과 전체주의로 인한 인간성 파괴에 맞서 구원의 시어를 통해 인간의 고결성과 존엄성을 지키려 한 차원 높은 정신의 소유자요 구원의 승리자로 상승시킬 수 있기를 소망한다. 그의 바람대로 자신의 육신은 죽었으되 영혼은 다시 살아나는 것이다. 소생이자 부활이다. 그게 윤동주이건 아니건 어떤 시[言+寺]를 통과한 뒤의 문제는 다시 우리요 나다. 지금의 우리가 우리 시대의 척박한 현실과 삶의 여러 고난 속에서도 과연 윤동주와 같은 최순수(最純粹)에의 열정과 절대 구원을 향한 내면 마음을 갖고 있느냐의 문제일 것이다. 그게 문제다. 우리는 그보다 훨씬 덜 척박한 시대에 살고 있고, 그처럼 외국 전체주의 세력에게 정신이 억압당하지도 육신이 결박되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보다 훨씬 덜 순수하고 훨씬 덜 자유 추구적이며 훨씬 덜 구원 희구적이다. 나를 포함해 우리가 깨달음이 적고 영혼이 신산하고 부자유한 이유다. 두렵고 부끄러운 나 자신들이다. 윤동주가 걷고 뛰놀던 그의 고향 어귀에서 다시 돌아보건대 100주년을 맞는 윤동주가 우리에게 주는 시(詩), 즉 기도의 언어[言+寺], 절대 언어는 결국 이것이 아닐까 묵상해본다. 갑자기 동네 입구의 윤동주 고가에서 마당과 옥수수 밭을 타고 내가 서 있는 이쪽 길모퉁이로 바람이 불어온다. 동주가 자주 맞았을 그 바람인가 보다. 폭염 속에 이마가 한껏 차가워진다. (윤동주의 고향 명동촌과 용정에서) 필자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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