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列國誌]
2부 장강의 영웅들 (194)
제9권 장강은 흐른다
제 25장 경씨(慶氏)도 기울고 (8)
마침내 진무우(陳無宇)와 포국(鮑國)은 고강과 난시를 타도하는데 성공했다.
제경공(齊景公)은 그들이 공궁을 침범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병을 일으킨 것에 대해서 아무런 문책도 하지 않았다.
고강(高彊)과 난시(欒施)의 재산은 몽땅 진무우와 포국의 차지가 되었다.
난이 끝나고 안영과 진무우가 사적인 자리에서 만났을 때였다.
안영(晏嬰)이 진무우에게 조용히 충고했다.
"그대는 주공이 명을 내리지도 않았는데 고씨와 난씨를 쳐서 그들의 재산까지 나눠 가졌소.
이는 주공을 섬기는 사람으로서 그 직분을 잊은 것이라 할 수 있소.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이번에 몰수한 고씨, 난씨의 재산을 모두 공실에 바치시오.
그러면 세상 사람들도 그대를 칭송할 것이요. 그대 집안은 오히려 더 번창할 것입니다.“
"맞는 말씀입니다.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진무우(陳無宇)는 선선히 안영의 충고를 받아들여 고강, 난시에게서 빼앗은 자기 몫의 재산을 모두 제경공에게 바쳤다.
제경공(齊景公)은 진무우의 그러한 행동에 여간 기뻐하지 않았다.
백성들도 한결같이 진무우를 칭송했다.
반면, 포국(鮑國)은 자기 몫을 그대로 취했다.
이로 인해 포씨는 인심을 잃었다.
제경공의 생모는 노나라 숙손교여(叔孫僑如)의 딸이다.
제나라에서는 목맹희(穆孟姬)라고 불리었다.
목맹희는 사위인 진무우(陳無宇)가 이번에 빼앗은 고씨, 난씨 재산을 모두 공실에 바쳤다는 말을 듣고는 상당히 기특하게 여겼다.
아들인 제경공에게 부탁했다.
"이번에 진무우(陳無宇)가 방자하고 교만한 자들을 쫓아낸 공이 적지 않소.
그런데도 그는 자기 몫의 재산을 공실에 바쳤소.
그에 상응하는 다른 땅을 식읍으로 내려주는 것이 어떻소?“
"그렇군요."
제경공은 진무우에게 고당(高唐) 땅을 식읍으로 하사했다.
고당은 황하 동쪽 기슭에 위치한 땅이다.
제영공 시절에는 숙사위(夙沙衛)의 식읍이었던 곳이기도 하다.
이 땅을 얻은 뒤로 진씨 일족은 크게 번창했다.
그로부터 며칠 후, 진무우(陳無宇)는 제경공에게 청했다.
"지난날 많은 공족들이 고씨에게 쫓겨 다른 나라로 망명했습니다.
주공께선 이번 기회에 그들을 다시 국내로 소환하시고 벼슬을 내리십시오.“
제경공(齊景公)은 기뻐하며 승낙했다.
공족들이 앞다투어 귀국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대부분의 재산을 고씨에게 빼앗겼기 때문에 무일푼이나 다름없었다.
당장 생활할 능력이 없었다.
이것을 안 진무우(陳無宇)가 발벗고 나섰다.
그는 사재(私財)를 털어 폐허나 다름없이 된 그들의 집을 깨끗이 수리해주었고, 가구를 들여주었다.
공족들은 이러한 진무우의 호의에 대해 몹시 감격해했다.
진무우(陳無宇)는 또 재산을 풀어 자기 영지 내의 가난한 백성들에게 정기적으로 곡식을 보내주었다.
꿔주는 형식이었으나, 그것이 실로 교묘했다.
당시 제(齊)나라에는 곡물의 양을 세는 단위로 기본이 되는 승(升, 되)외에 네 가지가 더 있었다.
- 두(豆), 구(區), 부(釜), 종(鍾)
바로 그것이다. 이것들은 4진법으로 단위가 올라갔다.
좀더 자세히 설명하면, 4승(升)은 1두(豆)다.
그리고 4두가 1구(區)가 되며, 4구가 1부(釜)가 된다.
그러나 마지막 종(鍾)은 10진법으로 계산했다.
10부가 1종인 것이다. 그러므로 1종은 10부, 40구, 160두, 640승이 된다.
이 무렵의 1승(升, 되)은 약 0.2리터.
그런데 진무우(陳無宇)는 나름대로 이 단위에 변형을 가햇다.
4진법을 사용하지 않고 5진법을 적용시킨 것이다.
다시 말해서 5승(升)을 1두(豆), 5두를 1구(區), 5구를 1부(釜)로 기준을 삼았다.
따라서 640승(升)이 되어야 하는 1종이 진무우 계산대로 하면 1250승이 된다.
똑같은 1종(鍾)이라도 거의 두 배 가깝게 차이가 나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크게 문제될 것이 없다.
문제는 그가 곡식을 꿔주고 거두어들일 때 이것을 혼용해서 썼다는 점이었다.
곡식을 꿔줄 때는 5진법을 사용했고, 받을 때는 나라의 공식 단위인 4진법으로 계산하여 받은 것이었다.
이런 식으로 계산하면 진무우(陳無宇)에게서 1종(鍾)의 곡물을 빌린 사람은 1250승(升)의 곡물을 빌리고 갚을 때는 640승(升)만 갚으면 된다는 계산이다.
우리나라 말로 '말로 꿔주고 되로 받는다'였다.
백성들로서는 엄청난 이익이었다.
- 진씨(陳氏)에게 곡식을 빌리자.
뿐만 아니다.
워낙 가난하여 채무 상환 능력이 없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아예 문서를 찢어버렸다.
식료품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진무우(陳無宇)는 바다에서 생산되는 생선, 소금, 조개 등을 산지에서 구매한 가격 그대로 자신의 영주민들에게 보급했다.
아무리 흉년이 들고 재해가 일어나도 진씨 영지 안의 백성들은 물가 인상에 시달리는 일이 없었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이로 인해 진무우(陳無宇)의 인기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높아갔다.
그의 영지 사람으로서 진무우의 덕을 칭송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심지어는 진씨 일족을 위해 목숨을 버리겠다는 사람까지 생겨날 정도였다.
- 유수(流水)와 같다.
그를 따르는 사람이 흐르는 물과 같았다는 말이다.
물의 흐름은 아무도 막을 수 없다.
진씨(陳氏)의 인기는 이와 같았다.
후세 사관(史官)이 이때의 진무우의 행동을 평한 것이 있다.
진씨(陳氏)가 백성들에게 후하게 한 것은 마음속에 딴 뜻을 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군주로 하여금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풀지 않게 하고, 자신의 사재를 털어 백성들의 환심을 샀던 것이다.
재미난 평이다.
칭찬을 한 것이 아니라 비난을 하고 있다.
물론 이 사관이 진무우(陳無宇)를 이렇게 평한 데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진씨는 전국시대(戰國時代)에 이르러 성을 전(田)으로 바꾸게 되는데, 그 후손 중 하나가 제나라 군위를 빼앗았기 때문이다.
즉 진무우가 사재를 털어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푼 것은 순수한 마음에서가 아니라 군위(君位) 탈취의 사전 포석이라고 해석한 것이었다.
한편, '고강.난시의 난' 이후 진무우(陳無宇)는 조정에서의 위치가 한결 굳건해졌다.
그러나 정치에는 거의 관여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다른 사람을 경(卿)에 천거했다.
- 안영에게 나라 일을 맡기면 제(齊)나라는 크게 번성할 것입니다.
제경공은 진무우의 이 천거를 수락했다.
안영은 마침내 제나라 경(卿)의 지위에 올랐다.
관중(管仲)과 더불어 춘추시대 최고의 명재상으로 손꼽히는 안영의 시대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BC 532년(제경공 16년)의 일이었다.
🎓 다음에 계속..........
< 출처 - 평설열국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