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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무엇을 생각하십니까?
박조준 목사
오늘 저녁 봉독한 말씀의 첫 부분인 1-3절은 사치와 육욕에 대한 경고의 말씀입니다. 사람에게는 식욕이라는 본능이 있어서 먹는 일로 말미암아 죄를 범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 다. 또 마귀란 존재는 우리의 본능을 약점으로 잡아서 사람을 유혹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 마귀란 존재는 우리의 본능을 약점으로 잡아서 사람을 유혹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먹는 것은 즐거 운 일입니다. 그래서 모든 교제도 먹는 일로 합니다. 먹을 때는 대개 마음의 문이 열립니다. 그런데 이 열리는 틈을 타서 죄가 들어오기 쉽습니다.
여러분 기억하시는 대로 인류의 조상 아담 과 하와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범죄 하였는데 무엇을 통해서 죄를 지었지요? 먹는 것을 통해서 여자를 유혹하였습니다. 창세기 3장을 보세요!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가운데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 뱀이 여자에게 묻기를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여자가 뱀에게 말하기를 동산 나무의 실과를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그 때 뱀이 여자에게 말하기를 그게 무슨 말이냐 절대로 죽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알아서 그런 거야. 그 말을 들은 여자가 “그 나무를 보니 먹음직도 하고 보임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 었다” 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자기만 먹을 것이 아니라 자기 남편에게도 주어먹게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물론 성경 에는 한마디로 남편에게 주매 그는 먹은지라 하였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재미있는 장면이 연상됩니다.
여자가 하나님의 금하신 열매를 먹고나니 이상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자지 남편을 보니 너무 순진하단 말이요. 그 얼굴에는 아무런 불안도 없이 그저 평안하고 자기를 보는 눈이 그저 사랑스럽기만 하단 말이요.
그런데 여러분, 죄라는 것은 이상합니다.
자기 혼자 죄를 짓고 마는 것이 아니라 죄지은 후에는 다른 사람도 같이 죄짓기를 원하는 묘한 마음이 있습니다.
로마서 1장 32절에 “저희가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하느니라.”
여보! 왜요? 나 당신한테 꼭 하나 확인하고 싶은 게 있어요.
그건 뭔데요. 또 새삼스럽게. 말할테니 화내지 않을 꺼에요?
아니 화를 내다니 내가 언제 당신한테 화낸 적이 있소?
사실 아담과 하와는 이날까지 한 번 말다툼해 본 적이 없는 그저 다정하기만한 부부였습니다. 그러나 하와가 그 열매를 먹은 다음 순간부터는 벌써 마음이 병이 들어 남편이 나를 진정 사랑 하나? 하는 의심도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내는 남편에게 다짐합니다.
여보, 당신 나를 사랑하지? 아무렴, 내가 이 세상에 여자라고야 당신밖에 더 있소? 원 별걸 다 묻는구먼. 아니야, 나는 당신이 진정 나를 사랑하는지 확인하고 싶어서 그래요.
아 그러면 어떻게 하면 확인이 되겠소. 내가 당신 하라는 대로 다 할게. 아닌게 아니라 사랑하는 부부는 가만 보면 남편이 부인에게 꼼짝 못하고 졸졸 끌려갑니다.
사실 힘으로 말하면 여자보다 남자가 월등히 센데 여자한테 남자가 진단 말이요. 사랑 때문에 그래요. 남편의 사랑을 확인한 아내 하와는, 여보, 고마워요. 그럼 내가 하라는 것 다 할꺼에요? 아무렴. 그래요, 이 과실 말이요 하면서 아내가 내 놓은 것을 보니 하나님이 따먹지 말라고 엄히 명하신 과실이 아니겠어요?
눈이 둥그래진 남편은 거의 경련을 일으키다시피 몸이 굳어져, 아니, 그건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명하신 과실이 아니요? 그래요. 여보, 그것을 왜 땄어요? 그걸 먹으면 죽소하며 벌벌 떱니다.
이 때 하와는 토라져서 말합니다.
여보, 나는 이것을 먹었어요. 당신이 보시다시피 죽지 않았어요. 당신도 들어보세요. 참 맛이 있어요. 이제야 사람이 된 것 같아요. 그 전에는 너무 모르고 살았어요. 사람이 사는 것은 그게 아닌 것을 이제야 알았어요. 당신 나 사랑한다고 했지요? 무엇이나 다 하겠다고 했지요? 이 위선자! 만일 내가 죽으면 당신 혼자 살거예요?
나 죽으면 누구하고 결혼할 거예요! 따지고 보니 그렇단 말입니다.
그래서 그만 아담이, 어디 먹어 볼까? 하고 받아먹었답니다.
그런데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순간, 하나님의 말씀이 생각나 아이쿠 하는데 목이 걸려서 남자의 목에는 뼈가 솟아났다고 합니다. 먹는 것 조심해야 합니다.
많은 죄가 이 먹는 것을 통해서 들어옵니다.
그리고, 4-5절에는 재물에 대한 경고입니다.
물욕을 경계하였습니다.
이것 역시 식욕과 아울 러 인간의 본능 중에 하나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세요.
“부자 되기에 애쓰지 말라. 네가 어찌 허 무한 것에 주목하겠느냐? 정녕히 재물은 날개를 내어 하늘에 나는 독수리처럼 날아가리라.”
이 세상에 사는 사람이 돈 없이 살수 있다면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돈은 꼭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돈을 필요 없다 하지 않았습니다.
“돈을 사랑하지 말라”고 경고하였습니다.
디모데전 서 6장 7절에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 즉 족한 줄을 알 것이니라.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하였습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않다. 돈을 쓰는 것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맡아 가지고 사용하는 것 인데 엄격한 의미에서 보면 내 것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 밭에 새들이 많이 날아와서 다닌다고 그 새들이 자기 것으로 생각하면 큰 잘못입니다. 그 새들은 날개가 있어서 오늘은 여기에 내일은 다른 밭에 날아가는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뜻깊은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분명히 들으세요!
본능이 죄가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 생각할 때 죄가 됩니다. 먹는 것이 죄가 아닙니다. 그러나 지나치게 많이 먹을 때 죄가 됩니다. 물질 그 자체는 선한 것 도 악한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을 잘못 쓸 때, 그리고 지나치게 탐할 때 죄가 됩니다.
사람이 사람인 것은 본능대로만 살지 아니하고 이것을 제어할 줄 아는 것에 있습니다.
본능대로만 살면 짐승이지 그것은 사람이 아닙니다. 짐승은 본능대로만 살지 생각하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생각하는 존재입니다. 생각하기 때문에 사람입니다. 까치는 50년 전이나 100년 전이나 아니 그 전에나 똑같이 집은 짓습니다. 본능대로 짓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잘 지으려고 생각하고 연구하기 때문에 발전이 있습니다. 이것이 인간에게 부여 된 특권입니다.
사람은 생각하는데 따라서 그 사람이 달라집니다.
오늘 본문 7절에 “대저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하다” 고 하였습니다.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가는 더 말씀드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시편 39편 3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뜨거워서 묵상할 때에 화를 발하니.”
즉 깊이 생각할 때에 불이 붙었다는 말입니다. 무슨 생각이나 깊이 오래하면 우리의 마 음이 뜨거워지고 가슴에 불이 납니다. 그래서 그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게 됩니다. 이것은 좋은 생각도 그렇고 나쁜 생각도 그렇습니다.
옛날부터 오늘까지 인류를 위해서 봉사하고 공헌한 분들은 다 좋은 생각을 깊이 한 분들입니다. 위대한 종교가, 위대한 철학자, 위대한 과학자가 다 그렇습니다.
알키메데스 같은 분들은 같은 목욕탕에서 목욕을 하면서도 어떻게 사람이 물 속에 들어가면 가벼워질까 깊이 생각하는 가운데 저 유명한 알키메데스의 원리를 발견하고 자기가 목욕하고 있는 중인 것도 다 잊어버리고 내가 찾았다, 내가 발견했다 하면서 벗은 몸으로 기뻐하며 거리 에 뛰쳐나갔다고 합니다.
뉴톤(Newton)같은 분은 사과 알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깊이 생각하는 가운데 만유인력의 법칙 을 발견했다고 하지 않습니까?
반면에 악한 생각도 그렇습니다.
세상에서 큰 죄를 범하는 사람들이 일석이조에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나쁜 것을 오래 깊이 생각하는 가운데서 그런 흉악한 사람을 만들고 흉악한 일을 하도록 한 것입니다.
며칠 전에 신문을 통해 보셨겠지만 어떤 30대 여인이 생명보험 제도를 깊이 연구해서 (나쁜 방면으로) 결국 무서운 범죄를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므로 사람이 항상 자기의 생각을 살펴서 조심해야 합니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합니까?
사람은 흔히 생각하는대로 됩니다.
생각하는 일을 합니다.
생각은 알과 같습니다.
비둘기 알을 오래 품고 있으면 귀여운 비둘기를 깔 것입니다. 그러나 독사의 알을 오래 품고 있으면 마지막에 는 독사 새끼를 깝니다. 그러므로 생각을 조심해야 합니다. 그런데 생각은 성경에 보면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위엣 것을 생각하는 것,
다른 하나는 땅엣 것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위에 속하는 생각이 있고 땅에 속하는 생각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믿는 사람은 비록 땅에 거하지마는 결국 위에 속해 있으므로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하지 말라”고 권면하였습니다(골 3:2).
그러면 땅에 속한 생각이 무엇입니까?
가령 분한 생각, 남을 미워하는 생각, 이거 땅에 속한 생각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손해를 입을 때 분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 오래 품으면 결국 나 자신이 손해를 봅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분을 내어도 해가 지도록 품지 말라” 고 권면한 것입니다.
그리고 시기하는 생각, 이것도 땅에 속한 생각입니다.
남을 시기하는 사람은 남이 잘 되는 것을 싫어합니다. 이것은 옛날부터 승기자염이라고 나보다 나은 사람을 싫어하는 그런 감정인데 이것은 실상 나 자신의 교만, 이기주의, 열등감 같은데서 나오는 감정입니다.
그런데 이런 감정을 오래 품고 있으면 결국은 나 자신이 타락합니다(사울 왕의 경우).
또 한가지는 불결한 생각입니다. 정욕의 생각입니다. 인간에게는 역시 성적 본능이 있어서 누구나 일시적으로 성적 충동 또는 유혹을 받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불결한 생각을 계속해서 품는 것은 각자의 책임입니다. 품을 이유는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말한대로 내 머리 위를 새가 날아다니는 것은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 새가 내 머리가 앉아 둥지를 튼다면 그것은 내 책임입니다. 잠깐 동안 유혹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생각이 둥지를 틀어서 음란죄를 짓는 것은 내 책임입니다. 이런 요소를 다 제거해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결국 크게 타락하는데 이르게 됩니다.
우리 믿는 사람, 옛사람은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은 사람들은 위엣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땅엣 것을 생각지 않는 적극적인 길은 위엣 것을 생각하는 데 있습니다. 병 속에 들어있는 공 기를 내보내려면 맑은 물을 넣으면 됩니다. 그러면 자연히 공기는 밀려 나가게 됩니다. 이것이 소위 불가입성의 원리 입니다.
위엣 것을 생각하면 땅엣 것은 자연히 들어올래야 들어올 수가 없습니다.
위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계십니다. 즉 하나님을 항상 생각하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영광, 지혜, 사랑, 공의, 능력을 생각하라고, 산천초목을 볼 때, 오곡백과를 볼 때, 사람을 볼 때, 사귈 때, 사업을 할 때도, 공부를 할 때도 하나님을 생각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위에는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그리스도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의 겸손과 온유를, 진리 의 교훈과 깨끗한 생활을,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을, 승천과 하나님 우편의 빛나는 얼굴을, 그의 사랑과 인내와 자비와 긍휼, 능력과 성결을 생각하라고. 분한 생각이 들어올 때 주님이 십자가상에서 기도하신 말씀을 생각하라고.
오! 하나님! 이 사람들의 죄를 용서해 주소서. 이들이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스데반은 순교 당할 때 그리스도를 생각하였습니다. 그리스도 위에는 하나님의 나라 천국이 있습니다.
천국 생각을 늘 하면서 살라는 말씀입니다.
무엇을 보나 천국은 저보다 더 좋겠지! 생각하라고.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무엇을 생각합니까? 생각하는 것으로 스스로 거듭났나? 그렇지 못한 가? 판단할 수 있습니다. 내가 어떤 사람인가? 내가 무엇을 생각하나? 하는 데 달려 있습니다. 우리가 그 동안 무엇을 생각해 왔습니까?
(2) 조심해야 할 것들
박조준 목사
오늘 저녁 읽은 말씀에서는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조심해야 될 것 세 가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먹는 것을 조심하라," "재물을 조심하라," "생각하는 것을 조심하라"고 하면서 이 세 가지만 조심해도 인생을 성공적으로 살 수 있다고 지혜자는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사람에게는 식욕이라는 본능이 있기 때문에 먹는 일로 말미암아 죄를 범하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또 마귀가 우리의 본능을 약점으로 잡아 사람을 유혹하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먹는 것은 즐거운 일입니다. 사람에게 먹는 게 없다면 사는 맛이 없고 "사람은 먹기 위해 산다"고 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로 먹는 것은 중요합니다.
이 세상에서만 중요한 것이 아니고 하늘나라에서도 그렇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보십시오. 우리가 하늘나라에 들어가게 되면 하나님 앞에서 먹고 마시며 즐기리라고 했습니다. 하늘나라에도 먹고 마시는 즐거움이 있는 것입니다. 먹을 것이 눈앞에 있는데도 먹지 못하는 것처럼 불행한 일이 세상에 없습니다.
전에 제가 위가 좋지 않아서 어떤 때는 한 주일, 어떤 때는 한 달, 심지어 두 달 동안, 밥 한끼 먹지 못한 적이 있었습니다. 미음 같은 것을 먹으면서 앞이 아찔아찔한 가운데 심방도 하고, 교회 일도 하며 아주 고생을 했습니다. 음식을 보면 식욕이 당기지만, 먹어놓으면 속이 더 부담스럽고 고통스러웠습니다. 그러니 음식을 앞에 놓고도 마음놓고 먹지를 못했습니다.
이렇게 먹을 것을 먹지 못하는 것처럼 불행한 일이 없습니다.
우리가 교제할 때도 대개 먹을 것을 놓고 먹으면서 교제합니다. 먹으면 사람 마음이 확 열립니다. 그래서 웬만한 것은 배가 부르고 좋을 때 부탁하면 "그렇게 하자"고 해서 교섭이 잘 되잖아요. 그래서 먹는다는 것이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기억하시는 대로 인류의 조상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범죄하였는데, 무엇 때문에 범죄했습니까?
먹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하셨는데, 마귀는 "야, 그것 먹어도 괜찮다" 하면서 시험을 했습니다.
창세기 3장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가로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여자가 그 나무를 보니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라고 했습니다.
죄는 자기 혼자서 짓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가 죄를 지으면 다른 사람도 죄를 짓게 만들려고 합니다. 그것이 사람의 본성이요, 죄의 본성입니다. 그래서 이 여자는 자기만 먹은 것이 아니라 자기 남편 아담도 먹게 했습니다. 물론 성경에는 한 마디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재미있는 장면이 연상됩니다.
하나님의 금하신 열매를 먹은 여자는 이상한 것을 느꼈습니다. 마음의 평화와 기쁨이 다 사라지고, 불안과 공포가 몰려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런데 자기 남편을 보니 너무 순진했습니다. 그 얼굴에는 아무런 불안도 없고, 그저 평안하고 자기를 사랑스러운 눈으로 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죄는 자기 혼자 짓지 아니하고, 다른 사람도 죄를 짓게 하는 묘한 특성이 있습니다.
로마서 1장 32절에 "저희가 이 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하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이처럼 죄는 전염성이 있어서 쌓이고 번집니다.
어떤 분이 창세기 3장의 타락한 이야기를 이렇게 전개했습니다. 하와가 자기 혼자 선악과를 먹고 나니까 죽을 게 뻔하거든요. 죄를 범하기 전에는 '뭐 그렇게 될까' 그랬는데, 먹고 난 다음에는 마귀가 "너는 죄를 지었으니까 죽는다"라고 했습니다.
남편 가진 부인은 누구든지 '나 죽으면 우리 남편이 또 어떤 여자하고 결혼하나?'하는 생각을 하게 되면 죽었다가도 살아납니다. 죽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남편 아담이 어디 갔다가 순진하게 들어오자 여자가 물었대요. "여보! 당신, 나 사랑하지?" "사랑하지." "정말 사랑해?" "정말 사랑해. 세상에 여자라고 당신밖에 더 있나?" "그래. 그럼 당신 나 사랑하게 되면 뭐 부탁하든지 다 할 수 있지?" 남자들은 허풍이 좀 있잖아요. "아, 나 당신 사랑하기 때문에 당신이 죽으라면 죽을 수도 있지."
그러자 하와는 따 놓았던 선악과를 내놓았대요. "여보, 이것 드세요."
아담이 선악과 먹을 것을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면서 "이게 무슨 일인가? 이것을 먹는 날에는 정녕 죽는다고 하셨는데 이게 무슨 일인가?"라고 물었습니다.
그때 하와가 "여보, 당신 나 사랑한다는 말 거짓말이지? 나 이거 먹고 죽을 거예요. 나 죽은 다음에 어떤 여자하고 결혼하려고 그래?"하고 몰아붙였습니다.
장부일언이 중천금이라고, 남자가 한 번 말했으면, 그대로 행해야지 거짓말을 할 수가 있습니까? 그래서 아담이 선악과를 먹었습니다. 먹는 순간 "먹는 날에는 정녕 죽는다"는 하나님 음성이 쨍하게 귀에 울려 선악과가 목에 걸렸대요. 그래서 남자 목에 뼈가 있잖아요. 이것을 영어로 'Adams apple'이라고 하는데, 우리말로 직역하면 "아담의 사과"이에요.
남자는 먹다가 목에 걸렸어요. 여자는 몽땅 삼켰어요. 그래서 그 만큼이 남자하고 여자의 양심의 차이입니다.
그런데 선악과를 먹고 나니까 편안했습니까?
이상해요. 범죄하기 전에는 하나님이 그렇게 그립고, 하나님만 뵈면 궁금하고, 물어볼 말씀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죄를 짓고 나니까, 누가 뭐라고 하는 것도 아닌데, 하나님을 만날까봐 두려웠습니다. 죄는 쫓아오는 사람이 없어도 도망가게 합니다. 죄의 값은 사망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처럼 아담과 하와의 예에서 보듯이, 우리는 먹는 것을 조심해야 됩니다.
먹는 것은 사실 우리 한국 사람의 약점 가운데 하나입니다. 과거에 우리는 너무 가난했었습니다. 그래서 배불리 먹는 것이 제일 큰 소원이었습니다. 요새는 그런 인사들을 안하지만, 제가 어릴 때만 하더라도 사람들이 아침이나 점심, 혹은 저녁에 만나면 "진지 잡수셨습니까?"하는 것이 보통 인사였습니다. 그렇게 밥 먹는 일이 중요했습니다. 밥 못 먹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요새는 밥 굶는 사람이 많지 않으니까 그런 인사가 없어진 것 같습니다. 그때는 보통 밥을 먹을 때면 "허리띠를 풀어놓고 먹는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배가 이렇게 나왔습니다. 옛날에는 배가 나와야 사장이라고 그랬습니다. 그만큼 돈 많은 것과 배부른 것을 연결시켰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아무리 좋아도 많이 먹으면 안 된다고 말씀합니다.
많이 먹어서 생기는 병이 얼마나 많은지 아세요?
세상에서 위장병이 제일 많은 나라가 어딘지 아세요?
한국이에요.
물론 우리가 고추장이나 김치를 먹어서 위병이 많이 생긴다고 하지만, 실은 많이 먹어서 그런 겁니다. 한국 사람들은 포식을 합니다. 술을 마셔도 폭탄주를 마셔야 좋아합니다. 먹고 마시는 것이 지나치면 잘못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짐승은 보통 자기 위(胃)의 10분의 7을 채울 정도로 먹는다고 합니다. 10분의 3은 비운다는 얘깁니다. 그래서 동물들은 위병이 거의 생기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람은 얼마만큼 먹는지 아세요? 열이면 열둘을 먹습니다. 꽉 채워서 먹습니다. 그래서 병이 납니다.
짐승은 위장병 나는 경우가 별로 없습니다. 참 미안하고 죄송스러운 표현입니다만, 이런 것을 보면 어떤 의미로는 사람이 짐승보다 못하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포식하는 것을 삼가야 합니다.
꿀이 아무리 우리 몸에 좋다고 해도 너무 먹으면 토합니다. 먹는 것을 조심해야 됩니다.
다음으로, 본문 4∼5절은 물욕에 대한 경고입니다. 물욕은 역시 식욕과 아울러 인간의 본능 중의 하나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을 보세요. "부자 되기에 애쓰지 말고 네 사사로운 지혜를 버릴지어다 네가 어찌 허무한 것에 주목하겠느냐 정녕히 재물은 날개를 내어 하늘에 나는 독수리처럼 날아가리라" 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돈 없이 살 수 있다고 말한다면 거짓말입니다. 돈은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도 우리에게 돈이 필요없다고 말한 부분은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돈을 "사랑하지 말라"고 우리에게 경고합니다.
디모데전서 6장 7절 이하에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라고 했습니다.
돈은 세상에 사는 날 동안 필요합니다.
돈이 없으면 세상을 살아가는 데 불편합니다. 돈이 많으면 살아가는 데 편합니다. 그러나 그것뿐입니다. 이 말은 돈이 곧 행복을 준다는 말이 아닙니다.
돈으로 훌륭한 집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돈으로 행복한 가정을 살 수는 없습니다.
돈으로 맛있는 음식은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돈으로 식욕을 살 수는 없습니다.
돈으로 굉장한 침대를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돈으로 달콤한 잠을 살 수는 없습니다.
돈이 할 수 있는 것도 있지만, 할 수 없는 것도 역시 많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돈이 곧 행복의 척도입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여러분 요즘 신문 기사의 70%가 무엇에 대한 것인지 아세요? 다 돈과 관계된 것입니다. "정치하는 아무개가 돈을 받았다," "아무개가 뭐하면서 돈을 받았다," 등등 그저 돈에 관한 것입니다. 아마 이것이 없으면 뉴스거리가 없어질 거예요. 그런데 돈은 어떤 것입니까? "가지고 온 것이 없으니 갈 때도 가지고 가지 못한다"고 그랬어요.
옛 어른들이 한 말이 옳습니다.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입니다. 빈 손으로 왔다가 빈 손으로 갑니다. 이 세상에서 아무리 많이 가지고 있어도 갈 때는 다 빈 손으로 갑니다. 젓가락 하나 못 가지고 갑니다. "수의에는 주머니가 없다"는 아랍 속담이 있습니다. 옳은 말입니다. 주머니가 없기에 망정이지 주머니가 있으면 아마 다 집어넣어서 가려고 할 것입니다.
갈 때는 다 빈 손으로 갑니다.
이것을 아셔야 합니다.
또한 돈은 돌고 도는 겁니다.
여기에 보면 "날아가는 독수리 같다"고 그랬는데, 독수리가 한 곳에 앉아 있나요? 돈은 오늘은 김씨 댁, 내일은 이씨 댁, 모레는 박씨 댁으로 빙빙 돕니다. 이렇게 '돌고 돈다'고 돈이라고 했답니다. 돈은 돌아야 돼요. 만일 한 달이고, 두 달이고, 일년이고, 이년이고 돈이 한 곳에 가만히 있으면 경제가 순환이 안됩니다. 돈은 돌아야 돼요. 자꾸 돌아야 됩니다.
그래서 선진국을 보면 돈이 돌도록 제도적으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은행에도 많은 돈을 갖다 넣지 못하게 합니다. 만 불 이상 갖다 넣게 되면 왜 만 불 이상 갖고 있느냐고, 다른 대책을 세워서 투자를 하라고 하면서 돈을 갖고 있지 못하게 해요.
돈은 필요하지만 내가 영원히 가지고 있을 것이 아닙니다.
자기 밭에 새들이 많이 날아와서 다닌다고 그 새들을 자기 것으로 생각하면 큰 잘못입니다. 새들은 날개가 있어서 오늘은 여기에, 내일은 다른 밭에 날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본능 자체는 죄가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 사용하면 죄가 됩니다.
먹는 것이 절대로 죄가 아닙니다.
그러나 지나치게 먹고, 안 먹어야 할 것을 먹게 되면 죄가 됩니다.
물질 그 자체는 선한 것도 악한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을 잘못 사용하고, 지나치게 탐할 때 죄가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인 것은 본능대로만 살지 아니하고 본능을 제어할 줄 아는 데 있습니다.
짐승은 본능대로 살지 본능을 '제어'하거나 '조종'(control)하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본능대로 살면 짐승
이지 사람이 아닙니다. 짐승은 본능대로만 살지 생각하면서 살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본능을 갖고 있으면서도 생각하는 존재입니다. 생각하기 때문에 사람입니다. 까치는 50년 전이나 100년 전이나 똑같이 집을 짓습니다. 본능대로 짓는 것이지 생각하고 연구해서 짓는 집이 아니기 때문에 언제나 똑같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새롭게 지으려고 생각하고 연구하기 때문에 발전하고 성장합니다. 제가 20대에 목회를 시작하면서 영등포에 개척을 하고 예배당을 지었습니다. 그때 짓던 예배당과 지금 짓는 예배당을 비교해 보면 기술적인 면이나 모든 것에서 하늘과 땅같이 차이가 납니다. 비교가 안됩니다. 이만큼 발전합니다. 이것은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말로 하면, 사람은 자꾸 생각하고 연구해서 발전해야 합니다. 작년에 그렇게 살았으니까 금년에도 그렇게 살고, 금년에 그렇게 살았으니 내년도 그렇게 살겠다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도태되고 맙니다. 이제 다가오는 새로운 천년은 생각 없는 사람은 살아갈 수 없는 사회가 됩니다. 요샛말로 '아이디어'가 없는 사람은 살아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 주신 특권 중 하나가 생각하는 지성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생각할 수 있는 우리의 능력을 잘 활용해서 발전하고, 성장하고, 성숙한 자녀로 살아야 합니다. 이것은 인간에게 부여된 특권입니다. 사람은 생각하는 데 따라서 그 사람이 달라집니다.
그래서 오늘 주신 말씀 7절에 뭐랬어요? "대저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하다" 그랬습니다.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은 더 말씀드릴 필요가 없다고 봅니다.
시편 39편 3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뜨거워서 묵상할 때에 화가 발하니."
다시 말하면 깊이 생각할 때에 불이 붙었다는 말입니다. 무슨 생각을 오랫동안 깊이 하게 되면 우리의 마음이 뜨거워지고 가슴에 불이 붙습니다. 그래서 그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게 됩니다. 제가 설교 준비할 때도 하루에 다 준비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일설교를 하려면 벌써 오래 전부터 본문을 택해서 생각하고, 기도하고, 연구하는 가운데 제 마음이 뜨거워지고 '이것을 전하지 않고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생깁니다. 이렇게 해야 설교가 됩니다. 그저 생각난다고 깊이 생각 안하고 본문 하나 써 가지고 설교하면 은혜가 안 되고 전하는 저도 힘이 생기지를 않습니다. 뜨거움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깊이 생각하고, 기도하고, 연구하는 가운데 되어지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무슨 일이나 깊이 생각하고 오래 하면 이런 열이 생기고 이런 열에 의해서 행동이 나오게 됩니다. 좋은 생각도 그렇고 나쁜 생각도 그렇습니다.
옛날부터 오늘까지 인류를 위해서 봉사하고 공헌한 분들을 보세요. 다 좋은 생각을 깊이 한 분들입니다.
위대한 종교가들이 그렇습니다.
위대한 철학자가 그렇습니다.
위대한 과학자도 마찬가지입니다.
모세 같은 사람을 보세요.
그는 시내광야에서 깊이 생각하는 가운데 힘을 얻어서 자기 민족을 인도한 위대한 민족의 지도자가 되지 않았습니까?
옛날 엘리야 같은 사람을 보세요.
호렙산에서 깊이 생각하고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능력을 얻어서 민족의 장래를 바로 예언하고 지도한 지도자가 되지 않았습니까?
옛날 세례요한 같은 사람을 보세요.
광야에서 깊이 기도하고 연구하고 생각하는 가운데 힘을 얻어서 당시에 어려운 민족을 바로 지도한 사람이 되지 않았습니까?
바울 같은 사람을 보십시오.
아라비아에 가서 3년 동안이나 깊이 기도하고 생각하는 가운데 하나님께로부터 능력을 얻어서 기독교 역사상 위대한 사도가 되지 않았습니까?
정신적인 지도자뿐만 아니라 과학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전에 아르키메데스 같은 분은 물 속에 들어가면 사람이 좀 가벼워지는 것을 보고, '야 이거 이상하다. 왜 밖에 있을 때보다 물 속에 들어가면 가벼워지나?' 생각하고 연구를 했습니다. 이 분이 하루는 물이 찰랑찰랑 차 있는 목욕탕 안에 쑥 들어갔더니 이 목욕탕 물이 좌악 넘쳐요. '왜 넘나? 내가 들어갔으니까 넘지. 얼마만큼 넘나? 내 몸의 부피만큼 넘지. 그러니까 내가 가벼워지나? 그럼 왜 가벼워지나? 물이 넘는 만큼, 물의 무게만큼 내가 가벼워지나?' 생각하다가 원리를 깨달았어요. 얼마나 감격스럽던지, 얼마나 놀랍던지… 하여간 그 일화에 보면 아르키메데스가 목욕탕에서 벗고 목욕하다가 벗은 것조차도 잊어버리고 거리에 뛰쳐나와서 "내가 찾았다! 내가 발견했다!"하면서 외쳤다고 그래요. 이렇게 해서 '아르키메데스의 원리'를 발견한 것 아닙니까. 보통 사람은 그런 생각을 안합니다. 그러나 이 분은 깊이 생각하니까 결국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뉴톤(Newton)같은 분도 그렇잖아요.
거리에 가다보니까 사과가 떨어지더라고요. 그때 '왜 사과가 떨어지나?'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사실 다른 사람들은 사과가 떨어지는 것이 어제 오늘 일이 아니고, 조상적부터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거니까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뉴톤은 그냥 지나치지 않았어요. '사과가 왜 떨어지나? 이상하다.' 생각하고, 생각하고, 연구하고, 연구한 끝에 '아하 지구에는 잡아당기는 힘이 있기 때문에 사과가 올라가지 않고 떨어지는구나'라는 생각에 도달했고, "만유인력의 법칙"을 찾아낸 것이 아닙니까. 보통 사람은 생각이 없기 때문에 발견하지 못하는 거예요.
다른 것 없습니다.
진리는 먼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가까운 데 있습니다.
생각하는 사람에게 부여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좋은 생각을 하는 사람의 경우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나쁜 생각하는 사람 또한 그렇습니다. 세상의 큰 죄를 범하는 사람들이 일조일석에 그렇게 된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나쁜 것을 오래 깊이 생각하는 가운데 그런 흉악한 사람을 만들어지고 흉악한 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젠 다시 붙들려 갔습니다만, 한동안 사회를 불안케 했던 탈옥수 신창원 씨를 여러분 아시지요. 그 사람이 감옥 안에 있으면서 바른 사람 되려고 생각했나요? 아닙니다. '어떻게 하면 감옥을 탈옥하나? 나가서 어떻게 하면 남을 또 속이나? 어떻게 하면 또 훔치나? 어떻게 하면 부잣집에서 돈을 꺼내오나?' 이런 생각만 가지고 밤낮을 연구했습니다. 그래서 탈옥한 후에 얼마나 놀라운 일을 많이 했습니까? 악한 일도 깊이 생각하면 깜짝 놀랄 일들을 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항상 자기의 생각을 살펴서 조심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사람은 생각하는 대로 된다고 합니다.
생각은 알과 같습니다. 비둘기 알을 오래 품고 있으면 귀여운 비둘기가 나옵니다. 그러나 독사의 알을 오래 품고 있으면 마지막에는 독사 새끼가 나옵니다.
그러므로 생각을 조심해야 합니다.
그런데 생각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위엣 것을 생각하는 것,
다른 하나는 아래 것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위에 속한 생각이 있고 땅에 속한 생각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믿는 사람은 비록 땅에 거하지만 어디에 속해 있습니까?
하늘에 속해 있습니다.
그러므로 땅에 살지만 하늘에 있는 것을 생각하는 것이 우리 믿는 사람의 특성입니다.
물론 여기에 갈등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늘에 올라가 있다면 하늘 것밖에 모를 겁니다. 그러나 땅에 살기 때문에 땅엣 것을 내려다보기가 쉽습니다. 가깝고 눈에 보이니까 그렇습니다.
골로새서 3장 2절에 보면 "(네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지음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땅에 속한 생각이 무엇입니까?
분한 생각과 남을 미워하는 생각은 땅에 속한 생각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손해를 입을 때 분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을 오래 품고 있으면 결국 자신이 손해를 봅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분을 낼 수가 있지만 해가 지도록 품고 있지 말라"고 했습니다.
분을 품으면 어떻게 됩니까?
나쁜 일이 일어납니다.
동생에 대해 분을 품었던 가인은 동생을 죽이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은 "분을 품지 말라. 해가 지도록 품지 말라"고 하십니다. 잠시 분한 마음이 생기는 것은 어떻게 할 도리가 없습니다. 아무 감정도 안 생긴다면 사람이 아닙니다. 사람에게는 감정이 있기 때문에 분한 생각이 날 수는 있지만, 그 나쁜 생각을 품으면 안됩니다.
전에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성화를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과 열두 제자가 둘러앉아서 마지막 만찬을 하는 그림을 그려 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바로 옆에 앉아 있는 가룟 유다를 그리려고 하던 때에, 마침, 미술가들 모임에 나가서 회의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사람 하나가 자기가 말하는 것을 매우 반대하며 무시했습니다. 그래서 아주 화가 나서 참지 못하고 싸웠습니다. 그후 '세상에서 제일 밉고, 흉악하게 생긴 사람이 그 친구다. 옳거니, 그 얼굴을 가룟 유다의 얼굴로 그려야겠다'고 했습니다. 자기가 가장 미워하고, 싫어하는 그 사람을 모델로 해서 가룟 유다의 얼굴을 그렸습니다. 그 다음에 예수님의 모습을 그려야 되는데 아무리 그리려고 해도 그려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안타까워서 "이게 어떻게 된 것입니까?"라고 기도하는 중에 자기가 분한 마음을 품고 아주 미워하는 사람의 얼굴로 가룟 유다의 얼굴을 그린 것 때문에 예수님의 모습이 제대로 그려지지를 않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회개하고, 화실에 들어가서 가룟 유다의 얼굴을 지워버리고 다시 그린 다음에 그리니까 예수님의 얼굴이 나타납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에게 전해오는 이 그림은 그가 다 회개한 다음에, 분한 생각을 다 푼 다음에 그린 그림이기 때문에 세계 인류 역사의 세기를 두고 내려오는 명화가 된 것입니다.
그림을 하나 그려도 분한 마음을 가지고 그리면 그려지지를 않습니다.
요새 골프 치는 분이 많이 계십니다만, 골프 칠 때 어떤 분은 자기가 제일 미워하는 사람의 얼굴을 생각하고 친다고 합니다. 그런데 분한 마음 갖고 골프 치면 절대로 제대로 안된다고 합니다. 우리는 마음속에 있는 분한 생각을 버려야 됩니다. 그리고 시기하는 생각, 이것도 땅에 속한 생각입니다. 남을 시기하는 사람은 남이 잘 되는 것을 싫어합니다. 이것은 옛날부터 승기자염(勝己者厭)이라고 합니다. 나보다 나은 사람을 싫어하는 감정인데 이것은 실상 교만, 이기주의, 열등감 같은 데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감정도 오래 되면 결국 내가 타락해 버리고 맙니다.
우리말에도 먼 데 사람이 잘 되면 시기하는 생각이 없습니다. 그런데 가까운 사람이 잘 되면 배가 아픕니다. 십촌 이십촌이 밭을 사는 건 괜찮아요. 그런데 사촌이 잘되면 배가 아파요. 이것이 땅에 속한 나쁜 생각이에요.
전에 성경 역사를 보면 사울 왕이 초대 유대 나라의 왕이 되지 않았어요. 왕이 안 된다고 숨어 있는 것을 모셔서 왕을 삼았습니다. 참 키가 크고, 인물이 좋고, 나라를 잘 다스리지 않았어요. 그런데 블레셋에게 늘 괴로움을 당했습니다. 블레셋 장군 골리앗이 나와서 이스라엘을 대적하는데 이스라엘 중에는 상대할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너무 안타까워하면서 골리앗에게 이기면 딸을 주겠다고 약속까지 하였습니다. 마침 다윗이라는 소년이 나와서 블레셋 장군 골리앗을 쳐 물리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약속한 대로 딸을 주었습니다. 말하자면 다윗이 사울 왕의 사위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이렇게 승전하고 들어올 때,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많은 사람들이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라"고 외쳤습니다. 사울이 그 말을 들었을 때 '아니, 사울은 천천 다윗은 만만? 그러면 다윗이 나보다 낫단 말인가?'하는 분한 생각이 났습니다. 이렇게 시기하는 생각이 나서 다윗을 보게 되니 사울이 어떻게 되었어요? 결국은 악령이 들어가서 미쳐 버리고 말았어요. 그래서 사위를 좇아 다니면서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있을 수 있는 일이에요?
그런데 시기라는 마귀가 들어오면 이런 상상 밖의 일이 벌어져요. 그러므로 우리가 땅에 속한 생각을 하지 말아야 됩니다.
불결한 생각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에게는 성적 본능이 있어서 누구나 일시적으로 성적 충동이나 유혹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불결한 생각을 계속해서 품는 것은 각자의 책임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 다시 말해 옛사람은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은 사람들은 위엣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땅엣 것을 생각지 않는 적극적인 길은 위엣 것을 생각하는 데 있습니다.
병 속에 들어있는 공기를 내보내려면 맑은 물을 병 안에 넣으면 됩니다.
그러면 자연히 공기는 밀려나가게 됩니다.
이것이 소위 물리학에서는 "불가입성의 원리" 라고 말합니다.
위엣 것을 생각하게 되면 자연히 땅엣 것은 밀려나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위엣 것이 무엇입니까?
위에는 누가 계시는데요?
하나님이 계십니다. 하나님을 항상 생각하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영광, 지혜, 사랑, 공의, 능력을 생각하라는 말입니다.
산천초목을 볼 때, 바다를 볼 때, 오곡백과를 볼 때, 사람을 볼 때, 친구를 사귈 때, 사업을 할 때, 공부를 할 때 언제나 하나님을 생각하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위에는 누가 계세요?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그리스도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의 겸손을 생각하고, 그의 온유를 생각하고, 그의 진리의 교훈과 깨끗한 생활을 생각하고,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과 승천을 생각하고, 하나님 우리의 우편의 빛나는 그 얼굴을, 그의 사랑과 인내와 자비와 긍휼, 능력과 성결을 생각하라고 하십니다.
전에 성 프란시스 같은 사람은 예수님을 얼마나 생각했던지 그 손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힌 그 흔적이 나타났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분한 생각이 들어올 때 주님이 십자가에서 기도하신 말씀을 생각합시다.
"오! 하나님이시여! 이 사람들이 잘못을 알지 못합니다. 저들이 알지 못해서 그러니 저들의 죄를 용서해주소서." 예수님은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위에는 무엇이 있어요? 하나님의 나라가 있습니다.
천당을 생각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살다 보면 세상 것이 부러울 때가 있어요. 그러나 '천당은 더 좋을 텐데' 생각하면 세상 것에 대한 부러움이 사라지고 말 거예요. 스데반은 순교할 때 주님을 생각하였습니다. 위에는 하나님의 나라와 천당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천당 생각을 늘 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무엇을 보든지, 천당은 그보다 더 좋을 것이라고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무엇을 생각하십니까?
우리의 생각이 거듭났습니까?
우리가 그 동안 세상 것만 생각하지 않았습니까?
이 시간 세상 생각은 버리고 위엣 것을 생각하고 위엣 것을 바라보는 가운데 하나님의 자녀답게, 그리스도 제자답게 살아가는 축복이 함께 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