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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일성의 추구, 깨달음의 혜안
- 『문학도시』 1월호를 읽고 -
권대근
문학박사, 문학평론가
I. 로그인
문학은 모든 것이 충족된 만족 속에서 나오지 아니하고, 무언가를 상실하거나 무참하게 버려진 느낌 속에서 더욱 밝게 빛나는 법이다. 인간은 흔히 자신의 현재적 삶이 충족된 상태로 여기기보다는 무언가 결핍된 상태로 여기며 사는 수가 많다. 그것이 물질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자신에게는 무언가 결핍된 것들이 많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흔한 것이다. 또 이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고통과 불만족, 슬픔, 소외감, 허전함, 결핍감이나 욕망의 갈증 등을 느끼며 살아가는 것을 우리는 작품 속에서 많이 보게 된다. 결핍의 인식 상태에서 사물에 대한 감각은 예민해지기 마련이다. 가슴 속의 불평이나 울분이 날카로운 촉수가 되어 이전보다 더 좋은 작품을 쓰게 만들어준다. <문학도시> 1월호에 실린 작품은 이런 결핍된 상황으로부터 탈출하려는 노력으로 볼 수 있다.
현대의 문화인은 정치적으로는 부와 쾌락을 원하나 예술적 실존으로는 내핍과 괴로움을 원하는 모순적 상태에 있다고 한 트릴링의 말과 인간에게는 쾌락을 거부하고 반쾌락에서 만족을 찾는 본능적 충동이 있다고 한 프로이트의 지적을 토대로 살펴 볼 때, 정신적 신체적 고통이라는 '궁'의 상황은 신체적, 정신적 편안 상태보다 더 나은 예술 창작의 충분조건이 된다. 문학을 포함한 모든 예술 활동은 인간 내부의 두 개 자아를 일치시켜나가려는 몸짓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반성적 성찰도 마찬가지다. 정신적 '궁'의 상황이 가져다 준 실의나 좌절감은 작가 내부에 그렇지 않았던 상태와의 괴리감을 인식시키고, 이로 인해 동일성의 상태에 조금 더 접근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고 하겠다.
II. 클릭
드킨시의 말대로 훌륭한 문학 작품은 작가 자신을 감동시킬 힘을 가져야 하고, 작품을 대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마력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아래에서 다룰 세 분의 작품은 문학적 가치를 충분히 지닌다. 우선 이원우와 최홍석은 자신을 감동시킬 수 있는 힘을 가졌다. 솔직한 자기고백에서 시작하고 자기반성에서 끝을 맺는 이 수필의 구성 전략도 좋았다. 수필 쓰기에서 가장 중요한 자기 자신을 송두리 채 내보이고자 하는 마음 비우기에 성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삶을 성찰한다는 것은 한편으로 반성을 의미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음미, 천천히 맛을 본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황선유 작가를 인간답게 하는 가장 결정적인 요건이고, 수필가를 성찰의 존재라고 하여도 무리가 없게 만든다. 성찰은 독자에게 감동을 주는 요소로 작동한다. 작가는 그 모티브를 커피에서 끌어왔다. 경험을 성찰로 연결시켜낸 까닭으로 좋은 수필이 될 수밖에 없다
이원우의 수필 창작 과정 또한 로그인에서 제기한 이러한 내적 요구와 동떨어져 있지 않다. 사위와 딸에게 미리 써놓은 유서는 신선한 느낌을 주면서 무거운 죽음을 가볍게 여기게 만들어 놓는다는 점에서 수필의 치유적 효과를 배가시키며, 작가에게는 동일성의 추구로 나아가게 한다. 상실감이 강하면 강할수록 갈망도 커지는 것이니, 동일성의 추구란 현실과 자아, 혹은 이상적 자아와 현실적 자아 사이에 형성된 파국적 관계를 청산하려는 노력인 것이다. 작가는 딸과 사위에게 부고를 낼 때, 문명의 이기를 한껏 활용하라고 권한다. 작가는 살아 있는 사람에게 보낼 미리 쓴 부음을 입력시켜 놓는다. 부음은 간단하다. “안녕하십니까? 이 세상에 왔다가 이제 오늘 201*년 월 일 시 저세상으로 떠납니다. 그동안 힘들었지만 행복했습니다. 행여 틈나(시)면 제 영혼이 부르는 흑인 영가 ‘방황하는 나그네’를 들어 주실(줄) 수 있을는지요?”라는 네 문장의 짧은 마지막 인사다.
이처럼 수필 <내 죽거든>은 '삶'의 무상성을 ‘부음’이란 제재에 빗대어 풀어내고 있는 철학성이 짙은 수필이다. 웰다잉이란 주제에 대한 상상화가 발단부에 잘 서술되어 있어, 독자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목숨이 참 질기다. 나 자신 십 년도 훨씬 전 죽는다고 생야단이었는데 아직 살아 있으니까 하는 말이다. 아무튼 이승 떠나는 게 그리 두렵지 않다.”라고 하는 발단부 첫 세 문장은 우리에게 자연의 순리에 순응하라는 의미로 다가온다. 죽음을 맞이하는 바람직한 태도에 수긍이 가는 대목이다. 죽음을 순리로 승화시키는 과정에서 탄생한 것이 이원우 작가의 사생관이다. 주제와 제재와의 상관성에서 수필의 성공이 결정된다고 볼 때, 이 수필은 대상이 되는 삶의 의미를 상징할 수 있는 제재 ‘부음’이 적절한 유사성을 가짐으로써 문학적 성취를 이루었다고 하겠다.
그러다 보니 사위 보스코에게 이런 언질을 주게 되었다. 내 숨 멎는 즉시 사체를 절차에 따라 기증하라고. 내외가 직장에 나가는 터 그동안 이래저래 경조사에 참석한 곳이 적지 않을 테니 장례는 치르라고 덧붙였다. 워낙 내가 죽는다, 죽는다 했고 유서에까지 번거로운 장례를 치르지 말라고 당부해 왔던 터라 사위는 처음엔 어리둥절해 했다. 그러나 이윽고 동의했다. 이제 한시름 놓은 셈이다. 내가 이 세상에서 마지막 숨을 몰아쉬다가 멈췄다 치자. 사위는 곧 가톨릭대학교 시신 기증센터(02-2258- 713*)에 연락하고 본당 연령 회장(이병곤 베르나르도 010-5383-138*) 급하게 전화를 돌리리라. 이 죄인이 죽음의 옷을 갈아입는 데 요란스러울 건 없다. 학교 동기 동창 몇 명쯤이면 끝이다. 초등학교 친구들이 몇몇 서울에 사니 부음을 전했으면 한다. 그리고 사범학교 졸업 동기도 마찬가지다.
- 이원우의 <내 죽거든> 중에서 -
작가는 이렇게 장례식을 미리 그려 보며, 결말부에 가서 “얼마 전 이근양 예비역 소장을 만나 인터뷰하는 도중 벽에 붙여 놓았던 그의 ‘사후死後 연락처’가 이 졸고 위에 겹쳐져 보인다.”라고 적었다. 이 예화는 주제를 암시하는 주요한 포인트가 되어 글쓴이의 의도를 내재화하는 역할을 한다. 작가는 죽음에의 의미부여를 통해 삶의 진정성에 무게를 두고자 한다. 부음을 통해 과연 가치 있게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독자에게 메시지로 전해주는 것이다. 이원우 작가가 그리는 삶에서 힌트를 얻어 그 해답을 찾으면, 이 글의 감상은 마무리되는데, 작가는 종지부를 찍기 전에 다시 힌트 하나를 더 건넨다. “이 전문全文을 딸 내외에게 메일로 보내면 둘이서 허둥대지 않아도 되니 짐 하나 덜어 주었다고 여기자.”는 마지막 멘트가 그것이다. 수필을 소화하는 과정에서 느낄 수 있는 안도감을 충분히 만끽하도록 한 구성력에 박수를 보낸다. 무거운 주제를 가볍게 견인하는 작가의 노력에 흐뭇한 미소를 지어본다. 사후처리를 담담하게 미리 말함으로써 죽음 앞에서도 성찰을 통해 동일성에의 추구로 나아가는 전략이 공감을 갖게 한다.
황선유의 <커피방담>은 커피에 대한 단상을 적은 모던 스타일의 수필이다. 수필의 과거 회고적인 성격에서 빗겨나 현대적인 질료를 소재로 채택하고 있어, 이 수필 또한 눈길을 끈다. 이 작품의 출발점은 가벼운 방담에 있으나 실질적으로는 삶의 근원적인 사유가 펼쳐져 있어서 철학성이 짙은 지성수필이라고 할 수 있다. 제재에 대한 멋진 경구를 이용해 설득과 공감을 높이고, 문학의 맛을 주려는 시도가 좋았다. 커피에 사유를 풀어놓으며 삶을 새롭게 인식해 나가는 과정이 공감을 자아낸다. ‘커피를 빼놓고는 그 어떤 것도 좋을 수가 없다.’는 아메리카노에 대한 베토벤의 이야기, 탈레랑의 카페라떼, 카푸치노에 대한 ‘악마같이 검고 지옥처럼 뜨겁고 천사같이 순수하고 사탕처럼 달콤하다는 표현’, 알렉산더 대왕이 에스프레소에 대해 말한, ‘큰 위기가 올 때마다 우리 심장이 근본적으로 필요로 하는 것은 한 잔의 커피이다.’라는 세 개의 인용 예문은 싱싱한 수필의 손맛을 전해준다. 커피를 세 가지 층위로 나누어 그 특성을 명언으로 잘 구체화하는 능력도 놀랄만하다.
에스프레소, 큰 위기가 올 때마다 우리 심장이 근본적으로 필요로 하는 것은 한 잔의 커피이다. - 알렉산더 대왕 늦은 저녁임에도 그는 에스프레소를 마신다. 커피 잔은 너무 작아서 찻잔을 잡은 손가락이 불편해 보인다. 등 뒤에서 의자 커버가 붉게 타고 있다. 에스프레소는 맛으로 멋으로 마시는 커피가 아니다. 구도와도 같은 긴 여행에서 돌아와 마시는 것이다. 귀향의 안온함으로 그간의 깊고 그윽한 사유를 풀어 마시는 것이다. 미량이 서서히 입안을 적시는 동안 한 꺼풀씩 회한이 벗겨지고 슬픔이 녹아나고 용서가 번지는 것이다. 끈적한 농축액의 마지막 한 방울이 떨어질 때를 기다려 사유는 처연함에서 걸어 나와 단아한 자기 수용으로 돌아앉는 것이다. 살아온 날들이 그러했듯이 살아갈 날들도 진한 듯 부드러우며 쓴 듯 단 에스프레소의 맛과도 닮을 것이다. 이윽고는 소꿉처럼 작은 에스프레소 잔 안으로 커피를 싸안은 크레마의 포용과 통찰에 이입될 것이다.
- 황선유의 <커피방담> 중에서 -
이 작품은 커피의 다양한 측면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에 소재면에서 참신하다. 위 인용에서 보는 바와 같이 커피에 대한 방담이 단상의 차원을 뛰어넘어 철학으로 나아가고 있다. 안온과 용서를 거쳐, 사유와 수용에서 포용과 통찰에까지 이르는 커피에 대한 작가의 철학은 ‘에스프레소는 맛으로 멋으로 마시는 커피가 아니다.’라는 언명에도 잘 나타나 있다.‘살아온 날들이 그러했듯이 살아갈 날들도 진한 듯 부드러우며 쓴 듯 단 에스프레소의 맛과도 닮을 것이다.’라는겸허한 자기반성으로부터 독자는 훈훈한 작가의 인격미를 느낄 수가 있는 것이다. 성찰의 서정이 넘치는 글이다. 본격수필은 결말에서 제재가 주제를 의미화하고 있어야 한다. 작가는 지라르가 말했던 결말의 극치를 주제와 제재의 '상관화'를 통해 여실히 보여주어야 한다. 이 수필은 평범한 소재이지만 작가가 나름대로 자료를 많이 모으고 선택된 제재를 통해 주제의 내면화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고 있기 때문에 감동을 준다. 미적 구조로서 문학은 미적 감동의 창출이 필수적이다. 수필이 제재를 통해 주제를 겨냥하는 문학이라는 점을 잘 알고, ‘커피’라는 제재를 문학적으로 잘 형상화하고, 그것을 삶의 문제와 결부시켜 풀어낸 점, 그리고 자기 삶을 반성적으로 성찰해서 주제 의미화를 이룬 점에 대해 박수를 보낸다.
최홍석의 <희귀난치성 질환>은 접하기 어려운, 일종의 고백수필이다. 수필이 심적 나상의 보여주기로 인해서 피어나는 꽃이라고 한다면, 이 작품은 이런 성격에 잘 부합한다. 진실하면서도 소박한 자기 고백이 작은 감동을 주어 비평 대상작으로 선했다. 작가는 적어도 ‘궁’의 상황을 겪어본 사람이다. 이런 조건 자체만으로도 이미 이 수필은 절반의 성공인 것이다. 문학은 전체성의 범주에서 보면 현실을 일깨우는 작은 충격이어야 한다. 수필의 출발은 작지만 큰 발견이고 인식이어야 한다면, 최홍석 작가의 수필은 그런 측면에서 그림자의 인격화가 돋보인다고 하겠다. 작가는 전개부로 오면서 병마와 투쟁하는 모습을 담담히 적고 있다. ‘가을에 P대학병원 호흡기내과에서 다시 X레이 찍고 폐기능 검사하고 혈액검사한 후, 진단이 떨어졌다. 특발성 폐섬유화 증상이라고 하였다. 난치성 희귀 질환으로 간질성 폐질환이라고도 한다. 5년 생존율 40%에 불과한 무서운 병이다.’라는 진단 결과를 솔직하게 전하는 작가 앞에서 놀라움을 금하지 않을 수 없다. 자신의 질병과 관련한 수필쓰기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따라서 이 이야기는 감동의 가능성을 이미 열어 놓았다고 하겠다.
살아 있는 유기체는 이런저런 질병 속에 생존을 유지한다. 병에 걸렸다는 것은 생명체가 살아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사람은 크고 작은 병고 속에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다. 그래서 일찍이 성인께서는 몸에 병 없기를 바라지 말라고 하셨다. 질병과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우리 삶을 정확하게 보시고 그것을 벗어나려고 애쓰는 병자들의 고통을 걱정한 것이다. 의연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설사 그 병이 우리 생을 마지막으로 이끌지라도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최대한으로 진행을 늦추도록 노력해야 한다. 마지막에는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과의 이별을 차분히 준비해야 한다.
- 최홍석의 <희귀난치성 질환> 중에서 -
작가는 목숨을 가진 사람들은 언제가 자연으로 돌아갈 준비를 차분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삶과 죽음의 극단적인 틈바구니에 처해 본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이 수필의 가장 감동적인 요소는 처절한 자기반성에서 찾을 수 있다. 작가는 ‘의연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설사 그 병이 우리 생을 마지막으로 이끌지라도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최대한으로 진행을 늦추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말한다. 자신의 난치성 질환을 고백을 한다는 게 말처럼 쉬운 건 아니다. 질병과 싸우며 작가의 가슴에 진실의 강이 흐르고 있음을 느낄 수 있기에 평범하지만 작가의 이야기는 크나큰 감동을 준다. 다시 건강을 되찾아 삶을 진정으로 사랑하게 된 작가에게 더욱 건강하기를 빌어본다. 삶과 죽음의 틈바구니 속에서 경험했던 그 ‘궁’의 상황을 문학화하여 삶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해답을 주려하는 게 작가의 의도다. 문학적 안목이라는 것은 대상을 그 대상의 속성 자체로 재인식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되고, 연결고리를 만들어 가는 작업이다. 그 연결고리의 한켠에는 언제나 인간과 삶이 존재한다. 작가는 주제의식을 생활 속에 여과시켜 순리의 삶을 구축할 수 있었기 때문에 독자와의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었다.
III.
어느 시인은 "한 줄의 글을 쓰는 것은 뼈를 깎는 아픔이요, 한 줄의 글을 쓰지 못하는 것은 피를 말리는 아픔"이라고 말한 바 있다. 글다운 글을 쓰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글을 쓰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서도 너무 쉽게 글을 쓰는 경향이 있다. 다시 말해 한 줄의 좋은 글을 쓰기 위해 깊이 고뇌하고 혼신의 노력을 기울이기보다는 안이한 생각으로 쉽게 글을 쓰는 것이다. 좋은 글, 수필다운 수필이 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조건이 필요하겠지만, 우선 참된 고뇌가 필요하다. 특히 진정한 수필은 참된 고뇌로부터 탄생되어진다. 참된 고뇌란 자아에 대한 각성이요, 삶에 대한 명확한 인식이다. 또한 인생과 인간 존재에 대한 재발견이며, 새로운 의미의 추구이다. 그리고 우리 사회의 갖가지 부조리한 현실과 모순에 대한 의식 있는 자의 '보이지 않는다'의 눈이요, '말하지 않는다'의 입이다.
또 다른 수필의 조건은 소외된 이웃에 대한 아픔을 공유하는 것이다. 특히 작가로서의 고뇌는 그것이 단순한 고뇌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의식과의 끊임없는 싸움, 우리 사회 현실의 모순과 부조리에 대한 처절한 갈등과 아픔이어야 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인생과 진실을 깨닫고, 현실의 이면까지도 꿰뚫어 볼 수 있는 혜안을 지녀야 한다. 아울러 고뇌를 통한 정직한 자기 노출이 있어야 한다. 이런 차원에서 보면, 황선영의 <봉개와 카봇>, 정의륙의 <욕망의 늪>, 윤미화의 <경로당 할머니들이 몸으로 말하는 규칙> 등은 위의 조건을 충족시키는 수필이나 지면 관계상 다루지 못했다. 윤오영은 글을 읽고 나서 이 글이 나에게 어떤 감동을 주었나, 어떤 정서를 안겨 주었나, 어떤 새로운 문제를 안겨 주었나, 이 사람이 무엇 때문에 이 글을 쓰지 않고는 못 배겼나 생각해 봐서 하나도 뚜렷한 것이 없으면 그 글은 읽지 말라고 했다. "문학을 독자에게 주는 효과만으로 판단하려는 것은 '감정의 오류'에 빠진다"고 한 버즈레이나 윔세트의 말을 전하면서 글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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