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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님의 슬픔
1972.08.06 (일), 한국 전본부교회
[기 도]
사랑하는 아버님, 오늘은 1972년 8월 6일, 이달을 맞이하여 첫번째 맞는 안식일 이 아침에 당신의 보호와 은사와 지도가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일에 부족한 것들을 이끄시고 수고의 노정을 참으시며 지금까지 저희들을 인도하여 주신 아버지 앞에 저희들은 진정 감사를 드려야 되겠습니다.
이제 이 한 달도 새로이 맞았사오니, 당신 앞에 진정으로 감사를 드리고 충성을 다하는 이달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저희들은 당신의 뜻을 따라가기를 원하오나, 언제나 아버지만을 위하지 못하고 자기를 위하는 때가 많았사오니, 용납하여 주시옵소서.
이 아침에 아버지 앞에 부복한 자녀들을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저희 자신이 어디에 처해 있느냐 하는 것을 깨닫고, 당신이 남기신 복귀의 한계선을 향하여 스스로 달려갈 길이 남아 있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 누구의 힘으로써 이 길을 갈 것이 아니라 각자가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최후의 싸움을 다 싸워 가지고 아버지 앞에 가지 않으면 안 될 저희 자신들인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길이길이 참으시고 수고하신 아버지, 저희 자신들도 불쌍한 것을 아시는 아버지, 저희들을 버릴 수 없는 자리에서 저희들을 위해 서 있는 아버지이신 것을 알게 될 때 늘쌍 불쌍한 아버지이심을 느끼게 되옵니다.
아버님, 이 아침에 전국에 널려 있는 자녀들이 이곳을 바라보고 정성 들이는 그 곳곳마다, 아버지,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특히 이번 기간은 저희들의 마음을 모아 나라와 민족을 중심삼고, 금후의 아시아의 문제를 중심삼고 하늘의 갈 길을 염려하면서 정성들이는 기간이오니, 아버지여, 각별히 이 기간에 당신의 보호하심으로 같이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여, 대내적인 모든 것이 당신의 뜻과 더불어 일체가 되게 하시옵고, 대외적인 모든 문제도 당신의 섭리의 뜻 앞에서 환영의 터전이 될 수 있게끔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늘쌍 저희들을 위해서 수고하신 아버님이신 것을 생각할 적마다, 저희들의 수고가 부족하고, 저희들의 정성이 부족한 것을 스스로 느끼면서, 내일의 개척자의 사명을 다짐하지 않으면 안 될 저희의 처지인 것도 잘 알고 있사오니, 아버지여, 이끌어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 아침에 당신의 이름을 갖고 모이는 곳곳마다, 더우기 한국뿐만이 아니라 전세계에 널려 있는 당신의 자녀들 위에 친히 같이하여 주시옵시고, 특별히 기동대를 아버지께서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역사 이래 처음 하늘을 위해 나선 무리이오니 그 움직임이 당신의 뜻을 증거하고, 당신의 생명의 인연을 나타내고, 아버님이 실존하신 것을 드러냄으로 말미암아 만방에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고, 아버지의 승리의 터전을 확대시키어 당신의 권위와 당신의 존엄성을 만민 앞에 드러내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그들을 보고 그들과 더불어 인연맺고 그들의 말씀을 듣는 곳곳마다 당신의 생명력이 같이하여 개개인의 심령 심령을 연결시키시옵소서. 그리하여 최고의 아버지의 터전을, 아버지의 승리의 나라와 승리의 세계를 넓히는 데 있어서, 절대 필요한 움직임이 됨과 동시에 그런 무리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 아침 저희 모두를 친히 굽어살피시옵소서. 저희가 원하는 모든 뜻은 당신이 남기신 뜻이옵니다. 또한 당신이 싸워 나가는 길이오니 저희들이 그 싸움을 상속받고 그 수난의 길을 극복하기 위한 하늘의 용사로서의 책임을 다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여, 하늘에서 바라시는 것과 같이 땅에서 저희들이 응하여 드리게 하여 주시옵고, 저희가 요구하는 것이 아버지의 뜻과 일치되기를 간절히 부탁하고 원하옵니다.
만만세의 영광, 당신의 승리의 그날을 저희들이 하나됨으로 말미암아 이루어 드리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하면서, 모든 말씀 참부모님의 이름으로써 아뢰었사옵니다. 아멘.
말 씀
이 땅 위에 살고 있는 인간은 누구나 소망을 갖지 않은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또, 그 소망을 대해서는 온갖 충성과 노력을 다하려고 하는 것이 우리 인간의 본성이요, 본능인 것입니다. 즉, 인간은 현재보다도 더 낫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현재의 입장을 넘어서서 발전하기를 바라는 것이 우리 인간들의 소원인 것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소망은 행복을 찾는 것
이렇게 볼 때, 우리 인간은 하나님을 닮아서 태어났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우리 인간을 지었다고 했기 때문에, 본체 되시는 하나님이 있다면 우리들도 그분을 따라서, 그분을 닮아서 지어진 것입니다.
우리가 그러한 소망을 지니기를 바라고 소망하는 곳에 가기를 바라는 마음을 갖게 된 것을 볼 때, 우리 인간은 어디까지나 주체적인 입장에 서는 것보다도, 혹은 어떠한 동기적인 입장에 서는 것보다도 결과적이요, 상대적인 자리에 서 있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것을 볼 때, 우리 자신들이 그러한 마음을 갖는 것은 그 어떠한 주체가 그러한 목적을 중심삼고 우리와 일치된 자리에서 공동적인 성사가 되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어떤 주체에게 그런 마음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상대 되는 우리 인간도 그러한 마음을 갖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관점에서 볼 때, 우리 인간을 넘어서 주체 되시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그 하나님도 보다 나을 수 있는 소원, 보다 나을 수 있는 이상이 없을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미루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은 이상(理想), 현재의 입장보다도 나을 수 있는 이상을 추구하시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우리 인간을 중심삼고 볼 때, 인간이 바라는 소망, 그 소망이 이루어진 곳은 불행한 곳이 아닌 것입니다. 그런 소망을 이룬 나라가 있으면 그 주권자는 모든 나라 앞에 자랑하고 싶을 것입니다. 혹은 자기가 처해 있는 환경의 대소를 막론하고, 작으면 작은 자리에 있어서 자기가 소원을 이루고 싶었던 그 소원을 중심삼고 나타내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그 나타내고 싶어하는 자체는 자기가 처해 있는 환경뿐만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 나라면 나라, 혹은 더 높은 곳이 있으면 그곳에까지 자랑하고 싶은 것이 인간의 마음인 것을 우리는 엿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이렇듯이, 하나님도 자기의 소원이 성취된 그러한 자리가 있으면 그것을 자랑하고 싶을 것은 틀림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이나 인간에게 있어서 자랑할 수 있는, 자랑하고 싶은 것이 무엇이겠느냐? 이런 문제를 두고 보면, 외적인 문제도 물론 자랑할 것이 있겠지만, 보다 자랑하고 싶은 중심적인 요인, 중심적인 그 내용이 무엇이 되겠느냐 할 때, 이것은 행복한 자리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행복하다는 자리는 어떠한 자리냐? 전체를 대해서 결핍을 느끼지 않는 자리입니다.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꽉찬 자리, 그 이상 더 바랄 것이 없는 자리가 행복한 자리가 아닐 것이냐? 이런 문제를 두고 볼 때, 모든 것이 완전히 채워진 자리가 행복한 자리입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받고 싶을 때 무한히 받을 수 있고, 주고 싶을 때 무한히 줄 수 있는 자리가 행복한 자리가 아니겠느냐?
행복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된 가정에서 비롯된다
사람이 불행하다는 것은 무엇을 두고 불행하다는 것이냐? 내가 받고 싶은 것이 있을 때 받지 못하는 것이 불행한 것이요, 또 진정한 의미에서 주고 싶은 것이 있을 때 줄 수 없는 입장에 서 있는 것이 불행한 것이 아니냐. 그러니 언제나 완전히 주고받을 수 있는 자리, 언제나 줄 수 있고 언제나 받을 수 있는 자리가 행복한 자리입니다. 그리고 자기의 마음이 원하는 대로 자기의 상대적인 환경이 응해 줄 수 있는 자리인 것입니다. 주고받을 뿐만 아니라. 모든 생활면에 있어서 어떠한 사물을 중심삼고 보더라도 그것은 언제나 자기가 움직이는 데 있어서 그 환경이 상치되지 않는 자리인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생각하게 될 때, 소원의 중심이 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이 문제를 두고 볼 때, 부모가 계시면 부모 앞에는 자녀가 없어 가지고는 안 될 것이다 하는 것을 우리는 생각하게 됩니다. 부모 앞에 자녀가 없게 될 때는 그 부모의 행복은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부모의 기쁨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또, 자녀 앞에 부모가 없어 가지고는 그 자녀의 기쁨은 결함 있는 기쁨이 아니겠느냐? 우리는 이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혹은 어떤 남성이 있으면 남성 앞에 그 상대가 없어서는 안될 것이 아니냐. 여성이면 여성 앞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어떠한 부부가 있으면 그 부부는 반드시 하나돼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되는 데는 무엇을 중심삼고 하나되어야 되느냐? 주체와 대상의 관계에 있어서 서로서로의 소원이 뭐냐 하면, 보다 높은 사랑을 중심삼은 것이 아니냐. 지금의 자리보다도 내일에 희망하는 보다 가치적인 내용, 보다 입체적인 사랑의 내용을 추구하는 데 있어서, 또 그것이 틀림없이 그러리라고 믿을 수 있는 생활적인 입장에서, 서로서로가 하나되는 그 자리에서만이 내일의 행복을 자극할 수 있으며 오늘의 행복을 감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냐.
그리고 부부가 있으면 부부 앞에는 반드시 자녀가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의 가정이 이루어지는 데 있어서 위로는 부모가 계시고, 아래로는 자녀가 있어야 하며, 또한 부부가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부모는 부모끼리 하나되어야 되고 자기들 부부는 부부끼리 하나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또, 부부를 중심삼고 자녀를 볼 때, 자녀는 자녀끼리 하나되어야 되는 것이 아니냐. 그것을 보면, 종적으로는 물론 3단계가 되어 있지만, 횡적으로 보면 이것이 둘 둘 둘이니까 6수가 하나되어야 될 것이 아니냐 하는 문제를 우리는 생각해야 될 것입니다.
그러면 그 누구를 중심삼고 하나될 것이냐 하는 문제를 두고 볼 때, 인간만 가지고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인간만 가지고는 최고의 이상, 보다 높은 가치를 추구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여섯 사람이 하나된 가운데 거기에 없어서는 안 될 것 하나가 무엇이냐? 우리 인간은 제한된 인간인 것입니다. 한계권내를 넘어갈 수 없는 인간임을 생각하게 될 때 절대관이 아니라 상대권에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에 절대적인 그 무엇이, 절대적인 사랑의 주체가 있다면, 그를 중심삼아 가지고 부모도 하나되기를 바랄 것이고, 혹은 부부도 하나되기를 바랄 것이고, 자녀도 하나되기를 바랄 것이 아니냐. 그렇게 횡적으로 부모와 자기들 부부와 그 부부를 중심삼고 태어난 새로운 자녀가 하나되어야 할 것이 아니냐는 문제를 두고 볼 때, 현재 자기들만의 행복 가지고는 횡적으로는 물론, 종적인 부모와 자기들 부부와 자녀의 입장을 연결시킬 수 있는 그 무엇이 없다고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쁨은 인간을 통해서
그러면, 모든 것을 하나로 규합시키고, 모든 것을 보다 가치 있는 입장으로 희망적이요 자극적인 면으로 통합시키고 하나로 통일시킬 수 있으려면 그 무엇이 있어야 되는데, 그것은 우리 인간의 사랑만이 아니라 절대적인 사랑일 것입니다. 그것을 중심삼아 가지고야만이 가능할 것이다 하는 것을 우리는 추측케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입장에서 보면, 하나님의 이상, 최고의 분으로서의 높은 이상이 있다면 그 이상은 어떤 이상일 것이냐? 그보다 더 높은 이상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최고의 자리에 올라갔으면 그것은 내려와야 되는 것입니다. 높아졌으면 낮아져야 되는 것입니다. 우주는 반드시 주고받는 이치로 되어 있습니다. 이와 같이 높아졌으면 낮아져야 되고 받았으면 줘야 되는 것이기 때문에, 최고의 사랑, 혹은 절대적인 주체되는 그분 앞에 보다 높을 수 있는 이상이 있다면 그 이상은 어디서 실현될 것이냐 하는 문제를 두고 볼 때, 보다 높을 수 있는 자리에서 실현될 것이냐 할 때 그럴 수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절대적인 입장이라 하더라도 그 절대적인 입장이 보다 높을 수 있는 자리에 서게 된다면 그 절대적인 자리는 상대적인 자리에 서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으면 주체가 못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체로서의 절대자는 반드시 상대를 위해서 이상을 추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세상에 아무리 훌륭한 사람, 무슨 세계적으로 권위 있는 학자라든가 예술가라든가 정치가라든가 혹은 아무리 높다 하는 성인이 있다 하더라도. 혼자서는 기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기쁨이라는 것은 혼자서는 느낄 수 없는 것입니다. 상대적인 여건을 갖춘 그곳에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높은 사람이라도 그가 기뻐할 수 있는 통일된 기준이라는 것은, 아무리 높은 인격자라도 그를 중심삼고 볼 때 그가 기뻐하는 것은 더 높을 수 있는 무엇도 있을 수 있지만, 그것이 최고의 자리라면 그 자체를 중심삼아 가지고는 기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최고의 자리가 있다면 그 자체도 반드시 상대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혼자 가지고는 기뻐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의 기쁨은 어디에 나타날 것이냐? 이런 문제를 두고 볼 때, 더 높을 수 있는 자리를 찾아 나가는 데서 기쁨이 나타나는 것보다도, 하나님은 절대자이기 때문에, 그분은 끝이라면 최고의 끝이요, 또한 한계선의 중심으로 서 있기 때문에, 그 상대적인 면을 추구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어떠한 물체를 중심삼고 볼 때, 햇빛이 비치면 거기에는 반드시 그림자가 생기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의 형태로 우리는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반드시 주체 되는 그분이 주는 데는 높은 것을 위해 주는 것보다도 상대적인 낮은 인간과 만물을 위해서 주고 싶을 것이 아니냐.
하나님이 천지만물을 왜 지었느냐? 하나님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 지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입장에서 이상실현의 대상을 보게 되면, 미물에서부터 큰 우리 인간까지 연결되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에는 자연계도 포함되지만 하나님은 작은 것에서부터 큰 것을 지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작은 것은 무엇이냐? 작은 것은 작은 것으로서 하나님의 모든 것의 일부분적인 상대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작은 것을 추구해 가지고 지었기 때문에, 절대적인 하나의 상대적 요건으로 지었기 때문에, 작은 것을 대해서 사랑할 수 있는 출발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그 작은 것보다 높아지는 자리를 바라게 될 때 상대적인 면의 자극을 느꼈을 것이 아니냐. 점점 차원 높은 의미의 자극을 느꼈을 것이 아니냐. 이것은 두말할 바 없는 것입니다. 작은 것으로부터 큰 것, 이렇게 해 가지고 인간을 창조했다는 것입니다.
구원의 길을 찾아가는 인간의 본심
그러면 인간은 어떠한 존재냐? 하나님의 아들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딸로 지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인간을 중심삼고 비로소 이상적인 사랑을 실현하려고 했을 것이 아니냐. 그러면 인간 외에 또 다른 무엇이 있겠느냐? 있을 수 없다 이겁니다. 상대 외에 또 다른 것이 있을 수 있겠느냐? 없다구요. 그러므로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고 싶었기 때문에, 그 이상도 사랑을 빼놓은 이상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이상은 인간에 대한 사랑을 중심삼고 실현될 것인데, 인간을 대하는 그 사랑은 어떠한 사랑이냐? 하나님을 중심삼고 볼 때 부모의 사랑입니다. 우리 인간을 중심삼고 볼 때, 절대적인 하나님이 인간을 대해 부모로서 사랑을 할 수 있는 것이요, 인간을 자녀로서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사랑할 수 있는 어떠한 일치점-그 일치점에 우리 인간이 미도달했지만-은 자라고 있는 인간에게 있어서 높은 자리에 있어야지, 낮은 자리에 있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 완성과 더불어 부모된 하나님 앞에 그 자녀로서 당당히 서 가지고 그 사랑을 받고, 사랑을 할 수 있는 일치점이 있어야 될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렇게 볼 때, 이상적인 사랑은 실현의 자리라는 것은 어떤 자리냐? 하나님이 인간을 지어 놓자마자 인간이 완성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완전히 받을 수 있는 아들딸이 되었다면 모르지만, 모든 창조원칙은 반드시 과정을 지남으로 말미암아 완성이 이루어지게끔 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 인간도 짓자마자 대번에 완전한 하나님의 사랑을 받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점진적인 발전을 하여 장성해 가지고 그 사랑의 자리에 도달하기 때문에, 우리 인간으로 볼 때 그 자리라는 것은 미래의 자리요, 소망의 자리가 아닐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소망의 자리, 다시 말하면 인간으로서 바라는 행복의 자리가 있을 것인데, 그 자리는 현재가 아니라 미래에 이어받을 수 있는 그런 자리라고 결론지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 인간이 그 자리에까지 도달했다면, 인간과 하나님이 행복할 수 있는 그 자리를 맞이했을 것이 아니냐. 또한 절대자가 느끼는 그 행복과 절대자가 느끼는 그 사랑은 영원할 것이 아니냐. 그 사랑의 출발을 보았으면 그것은 영원할 것이고, 그 사랑에 동거할 수 있는 권위를 가진 인간이 되었다면 그 인간의 권위와 그 동거하는 자리는 변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 무엇이 변하더라도 절대적인 하나님의 사랑과 일치된 그 자리는 변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느냐? 우리 인간을 두고 봐서 알 수 있습니다. 내가 진심으로 사랑했던 그 자리는 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무엇이 빼앗아 갈 수 없는 것이요, 그 무엇에 점령당하지 않는 것입니다. 점령당했댔자 그것은 스스로의 해방권으로서 자주성을 갖고 나타나는 것을 우리는 타락한 인간이지만 일상생활에서 체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 인간이 소망적이고, 이상적이고, 행복한 그 자리에 가지 못하고 미도달 단계에서 떨어진 것이, 혹은 그것을 잃어버린 것이 타락이 아니냐. 그렇기 때문에 소망적이고, 이상적이고, 행복한 그러한 터전은 남아 있는 것입니다.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남아 있는 것입니다.
우리 본성의 마음이 거기에 도달할 수 있는 바탕을 지녀야만 절대적인 하나님의 이상과 일치될 수 있는 자리에 연결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본성이 그곳을 지향하지 않으면 일치될 수 있는 때를 영영 맞출 수 없기 때문에, 절대적인 하나님이 계시는 한 반드시 우리의 본성의 마음이 거기에 일치될 수 있는 소망을 갖게끔 아니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비록 타락했을망정 그 자극적인 소망의 본심은 우리 인간에게 남아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 마음을 통해서 다시 한 번 우리 인간을 복귀할 수 있는, 구원할 수 있는 길이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타락으로 벌어진 하늘의 슬픔과 인간의 슬픔
이렇게 볼 때,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과 하나될 수 있는 사랑의 곳이 있다 하는 것을 아는 사람이 있겠느냐, 거기에 도달한 사람이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될 것입니다.
우리 선조들 가운데 그런 자리에 도달한 사람이 있었다면, 그것은 인류 앞에 행복의 기틀이 되고, 그 터전에서의 행복했던 그 느낌과 그 삶의 결과로 나타난 것은 인류역사의 전통적인 사실로 남아졌을 것인데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자리는 오늘날 우리 인간 앞에 미도달의 경지로, 우리가 추구하는 소망의 내용으로 남아진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절대자인 하나님은 인간과의 관계에 있어서 이상적인 곳, 행복한 곳, 우리의 소망이 일치될 수 있는 자리를 세우셨기 때문에 그 기준을 절대적으로 성사하지 않으면 절대자의 권위가 성립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타락한 인간이 되었더라도 이를 끌어 올려 가지고 다시 본연의 자리로 귀일된 자리를, 행복한 그 길을 추구하게 하지 않을 수 없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계시다면 그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구원섭리의 길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소망의 자리를 찾아 나가는 데 있어서 그것이 일시에 될 수 있느냐? 일시에 될 수 없기 때문에 이것을 복귀하는 데는 맹목적으로 복귀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떨어져 내려왔으면 떨어져 내려온 그 반대적인 과정을 거쳐서 올라가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두말할 나위 없는 사실입니다.
자, 그러면 본연의 우리 인간, 본래의 우리 인간이 처해야 할 자리는 어떠한 자리냐? 아까 말한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은 하나님의 직계의 자녀로 태어났어야 했을 것입니다. 만일 직계의 자녀로 태어났다면 하나님이 우리를 타락하지 않은 인류 본연의 그 부모, 그 조상을 중심삼고 사랑해 내려왔을 거라고 생각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소년시대로부터 장년시대, 혹은 노년시대, 즉 일생을 두고 볼 때, 하나님께 소년시대는 사랑을 받았을는지 모르고, 청년시대도 사랑을 받았을는지 모르겠지만 장년시대와 노년시대를 하나님의 사랑의 보호권 내에서 살아 본 인간이냐? 타락했다는 것을 우리가 긍정하고 들어가서 볼 때 타락한 그 연령 이후의 기간은 하나님의 보호권내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추방권내. 보호권외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상권 내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반대적인 입장에 있는 우리 인간을 바라보면 그 자리는 행복의 자리가 아니라 절망의 자리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행복의 자리가 못 되었기 때문에 위로 하나님에게도 슬픔이 벌어진 것이고, 아래로 인간도 슬픔을 느끼지 않을 수 없으니, 이것이 우리 인생이 아니냐. 이것은 두말할 바 없는 것입니다.
타락인간의 구원은 완전분해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러면 떨어진 사실을 두고 볼 때 얼마만큼 떨어졌느냐? 하나님의 아들의 자리에서 종의 자리만큼 떨어졌느냐? 그보다 더 떨어졌다는 거예요. 흙덩이와 마찬가지의 가치의 존재로 떨어져 버렸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떤 공장에서 만든 제품이 있다면, 그 제품이 제작자가 구상한 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도리어 불합격품으로 만들어졌을 때, 그것을 다시 만드는 것은 처음 만드는 것보다 더 힘들 것이 아니예요? 이것을 우리는 다 잘 알고 있습니다. 새로운 것으로 이것을 다시 회복시키기 위해서는 전부다 분해작업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큰 덩치나 작은 덩치나 전부 다 분해해서 다시 조립해야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이것을 다시 어떤 규격을 중심삼고, 부분품의 완전한 설계면 설계를 중심삼고 그와 일치된 실물을 재차 추구하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됩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 인간이 타락했다면 타락한 인간을 다시 복귀하기 위해서는 이것을 전부 다 분해작업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분해작업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부모가 있으면 부모를 그냥 붙들고 분해작업할 수 없는 것이요, 부부가 있으면 부부를 그냥 붙들고 분해작업할 수 없는 것이요, 자녀가 있으면 자녀를 그냥 붙들고 분해작업할 수 없는 것이 아니냐. 그렇기 때문에 복귀의 노정, 하나님의 구원섭리의 노정이라는 것은 완전 분해작업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각자가 다 온전해야 되는 것입니다.
완전한 물건이 하나의 목적을 위해서 결합되게 될 때, 완성된 물건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의 집이 완성되려면 문짝이라든가 거기에 소속되는 일체의 부속품이 완전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의 집이 완성되는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를 두고 볼 때 완전한 개체를 추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태복음 5장 48절에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들도 온전하라'고 했습니다. 표준이 뭐냐 하면, 하늘의 완전함과 같이 너희들도 완전하라는 것입니다. 절대에 가까울 수 있는 대상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것은 두말할 것 없는 것입니다. 주인의 어떠한 구상이 있으면 그 구상 앞에 절대적으로 하나될 수 있는, 추호도 어긋나지 않는, 완전히 일치된 완성품이라고 칭찬할 수 있는 그것을 표준으로 해서 물건을 만들 것이 아니냐. 마찬가지로 하나님도 그와 같은 입장에서 추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완전을 요구한다는 것입니다. 얼마만큼 완전한 것을 요구하느냐? 절대자 앞에 대상으로 서기에 부끄럽지 않는 완전품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생활에서부터 분석해야 되겠습니다. 생활을 전부 다 헤쳐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도 전부 다 헤쳐 버려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 몸뚱이까지 헤쳐 버린다면…. 물론 그래 가지고도 죽지 않고 목적을 이루기 위해 나갈 수 있는 존재라면…. 일체의 분해작업을 시작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사지백체, 우리의 감각기관까지도 분해 분석해야 됩니다. 내가 느끼는 것도 전부 다 옛날과 달라야 됩니다. 내가 보는 것도, 내가 듣는 것도, 내가 느끼는 촉감도, 내가 생각하는 구상도, 나의 심정 방향도 달라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는 안 됩니다.
완전부정에서 완전한 것이 출발한다
타락된 인간 앞에 긍정적인 요인이 남아 있을 때는 타락성을 지니고 있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완전 분해해야 합니다. 그 형태를 갖춘 그 요소를 그냥 연결시키는 자리에는 타락성 요인이 남아 있기 때문에, 그것은 완전분해가 아니지 않느냐. 완전부정이 아니지 않느냐? 완전분해라는 것은 완전부정이 아니냐는 겁니다. 그게 완전부정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참다운 인간 본연의 이상적인 소원성취의 길은 타락한 인간에게 있는 긍정적인 요인을 가지고는 있을 수 없다, 이렇게까지 결론을 짓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참된 신이 종교를 통해서 그의 섭리의 목적을 추구하고 계시다면, 그 신이 주장하는 행로, 그 노정이라는 것이 긍정이 아니라 절대 부정입니다. 절대 부정으로 출발한 기준이 나오지 않고는 타락한 인간 앞에 절대자의 상대이념을 성취시킬 수 있는 길은 있을 수 없다는 결론이 지어집니다. 그래서 '종교의 길은 반대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반대.
여러분이 지금까지 살아 나온 습관적인, 정서적인 문제를 중심삼아 가지고 내 어머니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이 통할 수 있느냐? 이게 문제라구요. 그게 통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아요. 그러나 통할 수 없다는 겁니다. 혹은 남녀끼리 서로 사랑하는 것이 통할 수 있느냐? '그거 그래야지' 하겠지만, 이상적인 관점에서 볼 때 그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형제끼리 서로 사랑하는 것이 그냥 통할 수 있느냐? 그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기서 모든 것이 상충이 벌어집니다. 상충되는 이 운동을 제지할 수 있는 놀음이 오늘날 인류역사 노정에 벌어져야 되는 것입니다. 누구를 중심삼고? 사람을 중심삼는 것이 아니라 신을 중심삼고…. 역사는 그렇게 나오는 것입니다.
역사시대에 많은 종교가 나왔는데, 지금의 결과적인 입장에 있어서는 공헌을 했지만, 그 당대에 있어서 공헌한 종교가 있느냐? 없습니다. 그 당대에 있어서는 상충입니다. 모두가 배치되었고, 모두가 부정적인 입장에서 출발했지만, 역사시대를 지나고 나서 그것이 어떻게 공헌의 결과를 가져왔느냐? 그것은 절대적인 주체자인 하나님의 섭리가 있기 때문에, 그 섭리의 지휘 밑에서 역사는 관련되어 나오기 때문에, 그 경륜권내의 결과를 가져오지 않을 수 없겠기 때문에 비로소 종교는 역사상에 공헌한다는 결론이 내려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이게 행복한 것이냐? 매우 비참한 것입니다. 그건 비참한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살림살이, 우리 인간이 살고 있는 인연적인 제반 여건, 혹은 관계적인 환경, 이것이 행복한 것이냐? 인간이 타락됐다는 것을 공인할 때, 그 환경과 그 인연과 그 관계는 비참한 것입니다. 왜 비참한 것이냐? 하나님 앞에 슬픔을 가해 줄 수 있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자식들이 말이예요. 뭐 애기들을 키워 본 사람들은 잘 알 거예요. 어린 애기들을 보면 물건을 갖고 놀기를 참 좋아합니다. 예를 들면 칼 같은 것을 가지고 놀 때, 이걸 놓으라고 하면 이걸 붙들고 안 놓으려고 야단한다는 거예요. 울고불고한다 이겁니다. 그러면 부모는 그걸 그냥놔 둘 수 있느냐? 울어도, 아무리 울어도, 그건 뭐 하루종일 울든지 뭐 며칠을 울더라도 자유를 허락할 수 없습니다. 그럴 때는 매정하게 빼앗아 버려야 된다구요. 눈물을 뭐 몇 대야 흘리고 야단법석이 벌어지더라도 도리어 채찍을 가해 가지고 빼앗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부모의 사랑입니다. 부모가 참다운 사람이라면, 그 어린 아이에게 칼을 줘서 '어서 놀아라' 그럴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러한 비참한 정상(情狀)에 처한 인간이 있다면, 그 자체를 공인해 주고 협조해 주는 것보다도 그것이 죽음의 길이요, 사망의 길이라 할 때는, 그 반대의 길로 때려 몰 것입니다. 그런 일이 벌어질 것입니다. 역사는 그러한 과정을 거쳐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시대에 있어서 그러한 사명을 짊어진 것이, 우리가 부정할 수 없는 역사적인 사실로 등장한 것이 종교가 아니냐. 종교의 길은 비참한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비참한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긍정적인 요인을 중심삼아 가지고는 타락한 인간이 절대 완전한 것을 추구할 수 없기 때문에, 완전 부정에서부터 완전한 것이 출발할 수 있는 가망성이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죄가 있는 곳에 은혜가 많다
그러면 절대적인 하나님이 우리 인간 세상을 보고 기뻐할 수 있겠느냐? 기쁘다고 봐요? 아무리 좋은 옷을 입고 춤을 추지만 그 춤추고 난 끝에는 함정에 다시 떨어지는 것입니다. 아무리 뭐 자기를 자랑하고 뭐 어떻다고 큰소리치더라도 그것은 최후의 암흑과 더불어 파탄되고 말 것입니다. 그 과정은 호화찬란한 것 같지만 그 문화의 종말은 비참이요, 파멸이요, 모든 부정적인 요인을 결론지어 주고 마는 것입니다. 문화가 발전함에 따라 사회의 공인과 인정을 못 받고 발전하면 발전할수록, 부정적인 요인이 내포되는 것은,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그렇다고 보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걸 알아야 됩니다.
역사시대의 수많은 문명권이 발전했다가 왜 망하게 되었느냐? 발전하면 발전할수록 보다 더 큰 세계를 향해서, 만민을 위하고 만국을 위할 수 있는 문화의 행로를 거쳐 나가지 못하고, 그 발전함에 비해서 그 반대적으로 그 발전한 사회는 망할 수 있는 요인이 더 커 간 것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이 현대문명도 마찬가지입니다. 미국 같은 예를 두고 봐도 그들에게는 외적인 물질적 세계에 있어서는 무슨 불평이 필요 없는 것입니다. 제반 여건이 갖추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행복한 자리에서 살고 있으면서도 행복한지 모르고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 사회에 그들 앞에 더 높은 고차적인 희망을 촉구시킬 수 있는 내용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파탄적인 내용-암적존재-이 보다 크게 내포되어 있어서 그 역사의 발전과 더불어 그 최후를 향해 점점 접근해 가는 것을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왜 그러냐? 역사는 반드시 부정당해야 되며, 문명도 부정당해야 되기 때문입니다. 부정당할 수 있는 역사적인 운명을 타락한 인간이 이루어 나왔기 때문에, 이것을 초월할 수 없고 넘어설 수 없는 것은, 그런 결과에 부딪치는 것은 하나님이 있다면 당연한 이치인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부정하려면 아예 문명이고 뭣이고 출발도 못 하게 부정해 버리면 될 것이 아니냐? 그게 아닙니다. 인간은 경험을 다 해봐야 되는 것입니다. 칼을 가지고 노는 아이를 만일에 부모가 말리게 될 때는, 그 내용을 모르는 아이는 떼를 쓰고 야단하며 나 하고 싶은 대로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가지고 놀다가 팔을 베어 보고 상처를 입어 보면 '아이쿠…' 하고 깨닫는 것입니다. 다 해봐야 압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하고 싶은 대로 다 해봐라 이겁니다. '너희들이 이 세상에 다른 하나의 세계를 만들고 싶으면 해봐라' 이겁니다. 해보지만 그것이 인간들 뜻대로 안 되게 될 땐 하나님이 그 자리에서 무엇을 추구하느냐? '너희들의 힘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라….' 하고 하나님이 소원의 일면을 그것으로 말미암아 다짐지을 수 있는 하나의 조건을 추구해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타락했던 사람이 돌아서게 된다면 다시는 타락의 길을 안 갈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악이 있는 곳에, 죄가 있는 곳에 은혜가 많다는 말도 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세계가 갈 수 있는 새로운 방안은 메시아를 찾는 것
그러면 오늘날 이 세계를 두고 보면, 이 세계는 어디로 갈 것이냐? 하나님이 바라시는 이상, 그걸 중심삼고 볼 때 그 이상은 어디서 실현될 것이냐? 오늘날 여러분이 살고 있는 가정이냐? 아닙니다. 여러분이 바라보고 있는 대한민국이냐? 아닙니다. 혹은 선진국이냐? 그거 아니라구요. 이걸 크게 부정해서 초월할 수 있는 운동이 어디서 나오겠느냐 하는 문제가…. 이것을 완전히 부정해 놓고도 거기에 행복한 것을 밀고 나와 가지고 '너의 행복이 무엇이냐? 너의 힘이 무엇이냐?' 하는 이상의, 완전부정권내에 서 가지고도 그 이상의 것을 능가할 수 있는 내용을 들고 나오는, 신을 위주한 새로운 운동에서만 그것을 바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결론지을 수 있습니다.
타락의 역사의 종말이라는 것을 우리가 생각하게 된다면 여기에서는 바랄 것이 없습니다. 이것을 완전히 부정해야 돼요. 개인 부정, 가정 부정, 종족 부정, 민족 부정, 국가 부정, 세계 부정을 해 놓고도 그 이상의 것을 사랑할 수 있는, 신으로 말미암은 새로운 소원과 새로운 소망과, 새로운 이상과, 새로운 사랑을 주장할 수 있는 길이 있다면 여기서 비로소 이 세계가 갈 수 있는 새로운 방안을 바랄 수 있지, 그냥 이대로는 안되는 것입니다. 안 된다는 결론을 지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만큼 끌고 나온 하나님을 볼 때, 여기에 이러한 숨막히는 장면, 즉 그야말로 망하느냐 흥하느냐 하는 흥망성쇠가 한 행동에 좌우될 수 있는 경각에 임하면 임할수록 하나님이 계시는 한 여기에 대안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안 그래요? 예를 들면, 사랑하는 자식이 지금 물에 빠져 떠내려간다고 하면 그 부모는 무슨 힘이 없어서 그렇지, 힘이 있다면 비상수단으로 그물을 치든가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구하려 할 것입니다. 그것을 빠진 그 사람은 모를 겁니다. 물에 빠진 사람이 '여보시오, 나를 위해서 이렇게 해 가지고 그물을 쳐 주소!' 하고 지시해 가지고 그럴 수 있어요? 그 자체에 급급한 것입니다. 옆을 못 보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럴 수 있는 어떠한 절대자가 있다면 그물을 치는 놀음을 할 것이 아니냐. 역사의 종말의 비참함이 탄식과 절망으로 귀결되어 인류 앞에 찾아오면 그 절망과 비참의 자리에 서 있는 인간들은 모르지만 이것을 방비할 수 있는 표어와 혹은 준비와 예고를, 인간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길이 있다면, 해왔을 것이 아니냐? 그것이 예언자들을 통한 예언임을 우리는 여기서 들고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끝날에는 메시아가 와야 됩니다. 메시아 사상은 지극히 고마운 사상입니다.
그러면 우리 인류도 비참하지만 그 정경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은 어떨 것이냐? 숨막히는 시간이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것을 구할 것이냐? 한꺼번에 세계를 몽땅 구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 사람으로부터, 한 사람으로부터 구원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한 사람이 하나님을 대표할 수 있는 사람으로 이 땅 위에 와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자신은 보이지 않는 분이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그분과 그분을 볼 수 없는 인간과는 관계를 맺을 수 없기 때문에, 보이는 인연을 갖고 오시는 분이 메시아요, 그 사상이 메시아 사상입니다. 종교를 보면 고차적인 종교일수록 메시아 사상이 없는 종교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걸 볼 때, 종교는 한 목적을 지향한다는 부정할 수 없는 결론을 우리는 내릴 수 있습니다.
인간회복은 부모가 있어서 행복하다는 자각에서부터
이렇게 볼 때 우리 인간만 비참한 것이 아닙니다. 어찌하여 결과가 이렇게 되었느냐 하는 것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은 더욱 비참한 것이 아니냐. 타락하지 않았더라면 본래의 인간은 행복할 것인데, 그 행복의 모든 요인을 전부 다 포기해 버리고 절망과 비운의 자리, 생사의 기로에 서서 자신의 운명을 알지 못하고 허덕이고 있는 그들을 바라보게 될 때, 하나님은 보다 비참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을 대해 나오시는 하나님은 이상적인 분이요, 절대자이기 때문에 그 절대자가 느낀 슬픔은 절대적으로 남아지는 것입니다. 안 그렇겠어요? 절대자가 아픔을 느꼈던 것은 절대적으로 남아지는 것이 아니냐. 그렇지 않아요? 진정한 효자의 한마디 불효한 말은 불효자의 백 마디 불효의 말보다 더 아픈 것입니다. 그것은 일생 동안 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안 되겠어요?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절대자가 슬픔을 느꼈으면 그 슬픔이라는 것은 언제나 절대자의 마음에 뽑아지지 않는 슬픔으로 남아질 것이 아니냐. 인간이 타락했다면 타락한 그 순간의 아픔은 영원히 계속되는 것입니다. 타락으로 인한 슬픔과 그 아픔이라는 것은 그의 가슴속에서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히 사랑하기 때문에….
여러분 그래요. 사랑하는 자식을 잃게 되면 말이예요.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그 기간이 오래 가는 거예요. 우리에게는 상대적인 관념이 있기 때문에 그것이 사라져 버리지, 절대적인 관념은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슬픔이 되살아 나오는 것입니다. 아들 또래들이 크면 클수록, 아들의 친구를 바라보면 바라볼수록, 친구를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그들이 잘살면 잘살수록, 훌륭해지면 훌륭해질수록 거기에 비해서 그것이 되살아 나오는 것이 아니냐.
이렇게 볼 때 사랑의 주체 되는 분은 비참하다, 비참하지 않느냐고 여러분이 결론을 지어도 무방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인간의 내정을 미루어 볼 때도, 그것이 긍정될 수 있는 사실이라면 주체 되는 하나님은 얼마나 슬펐을 것이냐? 그 슬픔의 시간이라는 것은 일시적으로 흘러갔는지 모르겠지만, 그 시간이라는 것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담 해와가 타락한 그 순간에 '아담아! 해와야!' 하고 부르던 그 애달픈 마음은 역사시대를 넘어 가지고…. 지금도 애절한 마음으로 부를 것이 아니냐? 그러한 주체되시는 사랑의 하나님이기 때문에 그 하나님이 불쌍하다면 불쌍한 반면 우리 인간 앞에는 가장 귀하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그러한 부모가 있다는 것은 지극히 비참한 것이지만, 그런 자리에 선 부모 앞에 면목이 없는 것이지만, 내 앞에 그러한 부모가 있다는 사실은 행복한 것이 아니냐. 사랑의 아픈 그 마음을 가지고 천년 만년의 세월을 하루같이 나를 잃어버린 슬픔을 품고 나오는 부모가 있다는 사실은…. 그 자리에 도달할 수 있는 안위의 자리를 못 가진 것이 한이지 내일에 대해서 가졌던 소망이 얼마나 크다는 것, 그 내연적인 사실은 사실이 아니냐.
그런 사실을 두고 볼 때, '불쌍한 나였지만 그런 부모가 있어서 그분이 나를 생각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나는 행복하다' 하는 일념을 자각해 가지고 여기서 다시 돌아서는 데에 있어서 인간 회복운동이 제기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걸 알아야 돼요. 그렇기 때문에 부모가 너무나 슬퍼했다는 것을 느끼게 될 때는, 나는 불효했다는 것을 뼛골에, 세포에 사무치도록 절절히 느끼게 될 때는, 불효의 길을 갈 수 없는 것입니다. 거기서 비로소 부모를 다시 찾게 되는 것이요, 그 부모 앞에 비로소 하나될 수 있는 위로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느끼지 않고는 될 수 없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됩니다.
불효로 인한 아버지의 슬픔을 해소시킬 수 있는 길을 모색하라
그러면 종교는 무엇이냐? 그러한 하나님, 심정의 주체 되시는 하나님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그분이 지금까지 수천년 수만년의 역사를 거쳐 나오면서 우리 인간 자체를 구하기 위해서 그 아픔을 억제해 나오신 비참한 과거를 연상하면 연상할수록, 과거에 지내 나오던 수난길이 멀면 멀수록, 복잡하면 복잡할수록, 그 내정에는 자식을 그리워하는 그 마음이 되살아났을 것이 아니냐. 자식을 위하는 그 마음이 되살아 났을 것이 아니냐. 자식을 그리워하는 그 마음이 되살아났을 것이 아니냐.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이 타락한 역사 종말시대에 메시아를 이 땅을 회복할 수 있는 하나의 중심적 존재로 세워 가지고, 그것이 가능하다고 하면 그 기쁨은 어떻겠느냐? 그 기쁨이라는 것이 옛날 아담 해와가 타락할 때의 슬픔을 능가하지 못한다면, 하나님은 행복하지 못한 것입니다. 이게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타락했을 때 이상 자극적인 기쁨을 통쾌하게 느낄 수 있는 자리, 그러한 자리에 나가지 못한다면 하나님은 불쌍한 하나님입니다. 불쌍한 하나님으로 끝날 것이 아니냐. 그가 자랑할 수 있는 심정적인 내연이 있을 수 없습니다.
역사시대를 거쳐오는 과정에서 당한 수난은, 잃어버린 자녀를 찾기 위해서 수난길을 극복해 나오는 데 있어서의 그 모든 슬픔과 역경의 갈림길이라는 것은 심정에 상처를 가해 준 것은 물론이고, 가해진 상처가 말할 수 없이 컸다는 것입니다. 이 상처를 품고 찾으시는 것이 뭐냐? 잃어버린 자녀를 찾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은 수난길의 고통에 비례되는, 찾아지는 때의 기쁨의 자극을 배가할 수 있는 내용이 되는 것입니다. 안 그래요? 성경에도 주인이 백 마리 양 중에서 한 마리의 양을 잃어버렸을 때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을 남겨 두고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아 나서는데 찾아 다닐 때는 고통이 심했지만 그 한 마리 양을 찾았을 때는 놔 둔 아흔 아홉 마리를 보는 것보다 더 기뻐한다는 말이 있지 않느냐 이겁니다.
심정세계에 있어서는 가중된 역사시대의 수난길이라는 것이 물론 비통하고 비참한 것이지만, 그것이 우리 인간이 찾아질 수 있는 때에 있어서는 도리어 아담 해와가 타락할 때 이상의 슬픈 심정을 넘어설 수 있는 자극적인 요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대해 가지고 사랑의 마음으로 지금까지 참고 극복해 나오는 또 다른 일면이 아니겠느냐 하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의 길은 뭐냐? 그러한 심정적인 내연을 어떻게 내가 상기시키느냐 하는 데에서부터 본질적인 신앙이 출발하는 것입니다. 인간 회복운동 혹은 구원운동, 복귀운동에 있어서 어디서부터 사람이 돌아설 수 있느냐? 외적인 문제가 아니라구요. 슬픈 하나님의 심정 앞에 있어서 그것을 동정하고 내가 거기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부모가 가는 길에 자식이 같이 가면 그는 효자인 것입니다. 군왕이 가는 데 같이 끝까지 생사지경을 넘어서 가려고 하는 사람은 충신인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임을 알아 가지고, '부모가 고생하는 자리에 있기 때문에 나도 고생하는 자리에 간다. 그분이 나로 말미암아 슬픔을 당했기 때문에 내가 더 슬픔을 당하는 것이 응당한 것이다' 하며 그것을 감수할 수 있는 입장에 설 때 그는 효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신앙자는 세상의 고통과 마주쳐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갈 수 있는 십자가의 길을 책임져야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너희 중에 너희 부모나 처자나 그 누구보다도 나를 더 사랑하지 못하면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한다'고 했고, 그 다음엔 '자기를 이기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나에게 합당하지 못하다'고 하신 것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져야 된다구요.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여러분이 심정의 빛을 짊어지고 있으니 이것을 갚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불효한 자는 불효로 인한 그 심정의 요인을 해소시킬 수 있는 길을 모색하기 전에는 돌아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라구요. 여러분, 예수님의 십자가가 극도로 고통스러웠던 것은 세계적인 십자가를 대신한 심정의 중심으로 세우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심정의 가지와 같은 여러분들에게도 거기에 접붙이기 위한 또 하나의 십자가의 길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불효했던 것을 회개하라
그러면 이제 우리는 무엇을 구원시킬 것이냐? 몸뚱이의 구원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아요? 하나님이 몸뚱이를 구하려고? 밥을 먹고 하는 이 몸뚱이는 언제나 있는 거예요, 이게. 이 타락한 인간이 갖고 있는 오관을 가지고 느끼는 감정은 언제나 있는 겁니다. 그것을 필요로 하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타락권내에 있는 인간의 정서적인 일면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요, 타락권내에 있는 인간의 어떠한 일체의 내용을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부정하고 더 차원 높은, 또 다른 면에 있어서 하나님의 심정과 하나님의 마음을 중심삼은 그 세계의 그 무엇을 동경하고 바랄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이 무엇이냐? 불효했던 그 사실을 다시 느껴 가지고 그 반대의 자리에서 부모를 위해…. 부모가 울었으면 나는 2배 이상 부모 앞에 울 수 있는 모습을 갖추고 나와야 될 것이고, 부모가 아팠으면 그 이상의 아픔을 내가 느껴야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부터 회개가 있는 것입니다, 회개.
그래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야, 너희들 노력해서 천국가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다'라고 하셨습니다. 무엇을 회개하느냐? 불효했던 심정의 빛을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그 회개된 위에서 이루어지는 가정이라야 회개된 가정으로 받아들이는 것이요, 그 가정 위에 선 종족이어야 회개된 종족으로, 그 종족 위에 선 민족이라야 회개된 민족으로, 그 민족 위에 선 국가라야 회개된 국가로, 그 국가 위에 선 세계라야 회개된 세계로 하나님이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땅을 통일의 세계가 되게 하려면 어떻게 되어야 되느냐? 통곡할 수 있는 인류가 되어야 됩니다. 결론이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통곡할 수 있는 인류가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공산당이면 공산당 자체가 통곡할 수 있는 날이 와야 되는 것입니다. 민주세계를 중심삼고 세계를 하나로 못 만들었으면 '이 민주세계를 가지고는 안 된다' 하며, 이걸 붙들고 통곡해야 됩니다. 이것을 저버리고, 이것을 부정하고 새로운 무엇을 추구하는 데 있어서, 통곡하는 운동이 역사 종말시대에 나타나지 않고는 돌아갈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미국 같은 나라는 이제 통곡할 단계에 들어왔습니다. 민주주의가 좋다고 하지만 끝까지 가다 보니 전부가 개인주의화 되었습니다. 개인을 절대시하는 자리에는 나라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 뭐 세계가 어디 있어? 세계가 나하고 무슨 관계가 있어? 나라가 무슨 관계가 있어? 친척이나 종족이 무슨 관계가 있어? 가정이 무슨 관계가 있어? 어미 아비가 무슨 관계가 있어? 형제가 무슨 관계가 있어? 하고 있으니 동물과 마찬 가지입니다. 그야말로 비통의…. 밤이나 낮이나 진실한 의미에서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통탄할 일일 것입니다. 여기서 도약할 수 있는 길이 있다면 하고 싶을 것입니다. 이것을 일시에 뭉그러뜨리고 부정해 가지고 새로이 날아가고 싶은, 미련 없이 날아가고 싶을 단계에까지 들어왔습니다. 그러면서 붙들고 통곡할 때가 왔습니다. 그런 거예요. 뭐 죽자니 청춘이요, 살자니 고생이라는 말과 같이…. 그런 역사시대로 하나님이 계시다면 몰아낼 것입니다.
그러한 여건을 일시에 부정하고, 부정된 것을 또다시 부정한 입장에 서 가지고 되돌아설 수 있는 데서만이 새로운 인류의 소망이 열릴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였던 종교인들이 문제가 됩니다.
보라구요. 여러분들이 그렇잖아요. 물질을 가지고 세계를 움직여 봤습니다. 물질의 힘 가지고 세계를 쥐고 땅의 힘을 가지고 권세를 쥐고 뒤흔들어 봤습니다. 나라도 그렇잖아요? 큰 나라가 작은 나라를 마음대로 억제하고 자기 주도권을 확대시킬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세계를 뒤흔들어 봤다는 것입니다. 물질 가지고 뒤흔들어 봤다 이겁니다.
선과 악
타락을 보게 되면 말이예요. 삼단계 타락입니다. 심정 타락, 마음 타락, 몸 타락입니다. 그러면 타락은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느냐 하면 마음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몸에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라구요. 결과로 보면 첫째는 심정 타락…. 마음이 문제입니다. 즉, 마음을 중심삼고 몸뚱이가 타락했고, 마음을 중심삼고 심정이 타락했습니다. 이것이 타락의 경로라구요.
천사장을 두고 보더라도, 사탄을 두고 보더라도 자기 마음에서부터 동요가 벌어졌다구요. 몸뚱이에서부터가 아니라구요. 사람이 실패하는 것도 어디서부터 시작하느냐? 몸뚱이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예요. 흥망성쇠를 결정하는 것은 몸뚱이가 아니라 마음에서부터…. 그렇지요? 한 가지 잘못 결정함으로 말미암아 전부 다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 역사를 거쳐가는 거예요. 그 마음에서부터…. 그래서 하나님을 되돌아 찾아 나가려니 복귀역사는 몸뚱이가 문제되는 거예요. 인간의 몸뚱이를 중심삼아 가지고 이 인간의 몸뚱이가 사탄의 몸뚱이가 되었고, 인간의 마음이 사탄의 마음이 되어 버렸으며, 인간의 사랑이 사탄의 사랑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니 인간 몸뚱이를 중심삼고 세계를 흔들려니 악이 득세하는 때가 올 것입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즉, 악이 물질을 중심삼고 득세할 때, 악이 마음을 중심삼고 득세할 때, 악이 사랑을 중심삼고 득세할 때가 오는 것입니다. 그것이 끝까지 팽창해 가지고 그 몸뚱이도 부정받고, 마음도 부정받고, 사랑도 부정받거들랑 끝날이 된 것입니다. 지금 때가 바로 그런 때입니다.
지금 포인터, 사냥개 한 마리 사려면 몇십만원 줘야 됩니다. 그런데 사람을 3만 원만 주고 사 가라고 해도 살 사람 있어요. 거 개 새끼만도 못한 사람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더우기나 나이 많은 사람 같으면 그냥 줘도 데려가겠다는 사람이 있어요? 야, 이놈의 고기덩이가 짐승고기 값만큼도 안 나가는…. 이렇게 떨어졌다구요. 이 인간아, 잘됐다. 이놈의 인간들아, 그건 그래야 되는 거라구요. 불효한 녀석은 지나가던 미친 개가 물더라도 그건 잘했다 하지 안됐다고 해요? 세상에 알려진 불효 자식이 도망가고 있는데 미친개가 쫓아가서 뒷다리를 물고 늘어지고, 피를 철철 흘리게 되면 그것 못했다고 하겠어요, 잘했다고 하겠어요? 잘했다고 하는 거라구요. 도망가는 역적의 다리를 미친개가 물고 늘어지게 되면 그거 잘했다고 하겠나요, 못했다고 하겠나요? 잘했다고 한다구요.
그 다음엔 뭐냐? 몸뚱이시대가 지나게 되면, 그것이 끝날 때가 되면 마음시대가 옵니다. 이것이 사상시대라구요. 그래서 이 세계역사는 몸뚱이적인 땅이 세계를 지배하는 때가 오고, 물질이 세계를 지배하는 때가 오고, 그 다음엔 사상이 세계를 지배하는 때가 옵니다. 요때가 왔다는 거예요. 사상이 세계를 지배하는 거예요. 갈라진 마음을 가지고, 사상을 가지고 세계를 지배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악이라는 것은 본래 어떻게 되어 있느냐? 주인을 부정해 버리고 또 다른 주인의 입장에 선 것이 악입니다. 이렇게 돼요. 역적이 뭐냐? 역적과 충신이 다른 것이 뭐냐? 다 같다구요. 그렇다고 군왕을 반대하는 역적은 없습니다. 수단 방법은 조금 다르지만, '오, 충신보다도 내가 당신을 더 위했소' 이런다구요. 더 위한다고 하는 거라구요. 그것은 계통을 통하지 않은 것입니다. 중심의 역사라는 것은 전통을 통해 나오는 것입니다. 과거가 뚜렷하고, 현재가 뚜렷하고, 미래가 뚜렷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악은 그렇지가 못해요, 악이란 것은.
선은 무엇이냐? 역사를 위하는 자리에 서는 것이 선(善)입니다. 역사를 위하기 때문에 자기의 현재를 부정하는 거예요. 또, 선은 무엇이냐? 전체를 공인하고 현재의 자기를 부정하는 데서만 선이 되는 것인데, 그게 공적입니다. 미래를 긍정하고 미래의 가치를 추구하기 위해서는, 현재의 자기의 가치를 부정하는 데서만이 새로운 전통, 선의 전통이 이어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악은 무엇이냐? 미래가 없는 것입니다. '과거가 뭐야? 미래가 뭐야 나면 돼, 나, 나' 이렇게 '나'만 제일이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중심삼은 천하가 되기를 꿈꾸는 거예요. 이게 악입니다. '모든 것이 나로 말미암아 있어라? 이러는 게 악이라구요. 모든 것은 절대적인 창조주로 말미암아 있어야 할 터인데, 그것을 부정하고 '나로 말미암아 있어라' 이러는 게 악입니다. 모든 것은 내적인 가운데, 중심에 서 있는데 '내적이 뭐야' 하며 부정해 가지고 '외적인 것이다!'라고 합니다. 이것은 오늘날 철학사조로 볼 때, 유심사관과 유물사관입니다. 반대라구요, 반대. 마음이 있는데 마음이 없다고 해 가지고 몸뚱이가 중심이라고…. 그러면서 이 몸뚱이를 강제로 치는 것입니다. 악은 강제로 하는 것입니다. 순리가 아니라 역리적인 행동을 해 나가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탄압이요, 공포요, 공갈이요, 협박이요, 생명을 위협하면서 나오는 것입니다. 이런 식이 공산당식입니다.
벽에 부딪힌 공산주의와 민주주의
현재의 이 세상을 바라볼 때, 우리가 진정한 의미에서 어디로 갈 것이냐? 공산당도 믿을 수 없고 민주세계도 믿을 수 없습니다. 어디로 갈 것이냐? 몸뚱이 세상을 부정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물질문명의 권위 혹은 지금까지 땅의 기반을 중심삼고 권위를 자랑하던 그런 주의를 우리는 숭상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자기의 야욕과 욕망, 일방적인 자기의 욕망을, 내적인 것을 부정하고 외적인 입장을 절대시하는 그런 사상은 사탄의 사상이라구요. 오늘날 유물사관을 중심삼은 세계 제패의 사상, 그것이 온 세계를 한 번 뒤흔들 것입니다. 그래, 하나님은 사탄으로 하여금 다 해보게 하는 것입니다. 사탄의 소원을 다 이루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절대자라는 거라구요. 악한 사람의 소원까지도 '너 다 해봐라' 이러시는 하나님이라구요. 그게 하나님의 절대자로서의 아량이요 권위라는 겁니다. 악한 네 힘대로 한번 해보라는 것입니다. (잠시 녹음이 되어 있지 않음)
이놈의 나라가 죄다 망했습니다. 그러나, 나라는 언제나 망했지만, 그 나라의 사람은 안 망했다구요. 그렇지요? 문화와 문명은 망해 나왔지만 사람은 망하지 않았어요. 그렇잖아요? 그 누가 그것을 점령했다고 해서 그 사람들의 모가지를 다 잘라 버려요? 나라는 언제나 망하는 거라구요.
그렇기 때문에 오랜 역사시대에 독재자들이 이루어 놓은, 자기 야욕으로 이루어 놓은 문명도 그 독재자의 이름과 더불어 사라져 갔지만 그 백성은 남아 나온다는 거예요. 그저 그 백성은 왔다갔다하면서 남아 나온 것입니다. 그래야 된다구요. 꾸불꾸불하면서 틀어지니까 이리 가고 저리 가고…. 이래 가지고 끌고 나오는 거라구요. 정치 야욕을 가진 독재자의 그 사상을 중심삼은 수많은 국가 주권은 변천해 나왔지만 종교는 변천 안 해 나온 겁니다. 종교는 변치 않는다, 이것이 특징입니다.
현재 기독교가 염려해서 외치는 것이 뭐냐 하면, '자, 초대교회로 돌아 가야 되겠다' 하는 것입니다. 이제 진짜 초대교회로 돌아가는 운동을 해야 된다구요. 변해서는 안 된다 이겁니다. 변질해서는 안 된다, 본질로 돌아가야 된다 이겁니다. 출발과 끝, 시종(始終)이 일치되는 것이 참인 것입니다. 첫 출발이 그랬으면 끝에 가서는 횡적인 면에 보다 배가된 그런 현상이 벌어져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끝날에는 '밀실에 들어가 기도하라. 더 많이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시게 되었을 때, 겟세마네 동산에서 밤을 새워 가면서 홀로…. 밀실에 들어가서 기도한 것과 마찬가지로 그와 같은 현상이 끝날에 벌어져야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통일교회는 그 놀음하자는 거라구요. 뭐 기성교회가 통일교회에 대해서 반대하겠으면 하고, 우리는 갈 길이 바쁘지…. 귀한 손님이 동네에 나타나면 개는 짖는 거예요. 그렇지요? 거지가 나타나도 짖지만, 그걸 듣는 데 있어서는 그 내용이 다르다 이겁니다.
이런 입장에서 보게 된다면, 오늘날에 있어서는 사상전입니다. 하나님을 빼놓은, 그래도 양심을 중심삼은 사상과 악을 중심삼은 사상이 싸우는 사상전입니다. 그거 재미있지요? 공산당은 전체주의입니다. 그런데 민주세계는 왜 개인주의 세계냐? 그것은 악이 주권을 잡고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래 선은 개인주의로 끝나는 겁니다. 그리 된다구요. 이게 악주권 앞에 설 수 없다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개인주의 세계의 종말이 딱 벌어집니다.
물론 민주주의 세계가 하나의 형태, 하나의 모습을 갖춘다고 했지만 우리 인간으로서 양심적인 사람은…. 여러분들 이것을 기억하라구요. '내가 양심의 가책 안 받으면 다 되지' 하지요? 천만에요. 다 될 것 같아요? 양심적인 사람들이 모여 가지고 이루어 놓은 세상이 개인주의 세상이 돼 버렸다구요. 이렇게 돼 버렸다구요. 사람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이제는 사람만 가지고는 안 된다는 결론이 났어요. 공산주의 가지고도 안 되고, 민주주의 가지고도 안 된다 이겁니다. 그건 이제 다 알게 되었다구요.
자, 돌아갈 수 있는 사람, 새로운 것을 찾을 수 있는 사람이 되려고 한다면 자기가 현재 어떠한 입장에 있다는 것, 방향이 동쪽에 있는지 서쪽에 있는지 그것을 알게 될 때는 그 사람은 가만히 안 있습니다. 그 자리에 암만 떡을 갖다 놓고, 밥을 갖다 놓고, 혹은 뭐 세상에 부러울 것 없는 것 갖다 놓고 거기 있어라 해도 안 있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다 알았다 이겁니다. 민주세계는 어떻고 공산세계는 어떻다는 걸 다 알았다 이겁니다. 무슨 내용을 가지고 아무리 공산당이 선전하더라도 세계는 공산당을 다 알았고, 민주세계가 아무리 선전하더라도 다 알았다 이겁니다.
색다른 세계 운동-하나님주의
그러면 이제부터 모르는 세계운동이 시작될 것입니다. 알겠어요? 색다른 세계운동이 시작될 것입니다. 그것이 공산주의도 아니요 민주주의도 아니면 무엇이냐? 이것들은 보다 악한 사람, 보다 덜 악한 사람을 중심 삼은 주의(主義)였습니다. 여기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의가 개재되는 날에는 인간들은 모를 주의가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보통사람은 모를 주의가 종교라구요.
'그 예수 믿고, 뭐 종교 믿는 녀석들은 다 어리석은 녀석들이야'라고 하지만, 여기 통일교회 문선생은 어리석은 사람이 아닙니다. 그건 망발이예요. 그러는 녀석들은 내가 멱살을 잡고 다그칠 거라구요. 내가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예요. 종교인들이 어리숙해 보이지만 어리석은 사람들이 아니라구요. 보라구요, 문선생이 그렇게 어리숙하게 생겼나, 눈을 보라구요. 내가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예요. 지독한 사람입니다. 적당히 통하는 사람이 아니예요.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니고 둘 중의 하나지, 어영부영해 가지고 적당히 꽁무니빼는 그런 사람이 아니예요. '세상이 반대하겠으면 반대하고, 나라가 반대하겠으면 반대해라' 하고 당당히 선포해 놓고 가는 거라구요. 교계가 반대하겠으면 반대해라! 실력 대결이다! 최후에 가서 누가…. 그렇잖아요? 세계적인 책임자가 되려면 1차전, 2차전, 3차전뿐만 아니라 10차전, 20차전, 100차전까지 해야 됩니다. 그렇잖아요? '세계적'이 되려면. 나라가 많은 데서 그 나라의 대표가 되려면, 백 개 나라면 백 번 싸워서 이겨야 되는 거라구요.
그래서 백 번 싸워 이겨 가지고 최후에 남더라도 출발하던 때 이상의 당당한 패가 되자 하는 것이 통일교회 패라구요. 임자네들은 그런가요? 그래요, 안 그래요? 「……」그래요. 안 그래요?「그렇습니다」 안 그렇거든 다 보따리 싸라구요. 돌아가라는 거라구요. 시시하게 뭐 통일교회 나쁘다고 뭐…. 그런 껄렁패가 아니라구요. 오겠으면 오고 말겠으면 말라구요. 서울대학 들어가는 데도 돈 주고, 그저 머리 싸매 가지고 그러는데, 통일교회 들어오기가 그렇게 간단하지 않아요. 내가 이런 이야기 하면 '뭐 종교인이 그런 고자세로…'그런다구요. 이제는 고자세로 하지 않고는 일이 처리 안 될 때가 왔다구요. 판사는 최후 판결의 전까지는 저자세입니다. 그렇지만 최후에 가서는 고자세로, 최고의 고자세가 아니고는 판결을 내릴 수가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고자세를 취할 때가 돼야 할 텐데, 고자세가 되려면 두 세계를 전부 다 요리하고 남을 수 있어야 됩니다. 그런데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면 암만 고자세로 했댔자, 그건 밤에 와도 집어치울 수 있고 낮에 와도 집어치울 수 있다구요. '뭐 종교인들은 약자들이나 귀의해 가지고 뭐 어떻고, 일하기 싫어하는 꿍꿍이 패들이 아니냐? 하겠지만 그런 시시한 패들은 종교인이 아닙니다. 세계는 종교가 지배하는 거라구요.
우리 대한민국이 지금까지 무엇을 갖고 있어요? 무엇 갖고 대한민국을 구할 거예요? 기성교회 갖고도 안 된다구요. 공산당을 가지고 안 된다구요. 민주세계 가지고도…. 자기들이 불리할 때는 언제나 포기해 버리고 의리를 배반하는 민주세계는 이거 발길로…. 내가 지금까지 대한민국을 중심삼고 싸웠지만 앞으로 미국을 중심삼고 싸울 거라구요. 여러분이 그걸 알아야 돼요.
그렇기 때문에 인간들로서 할 놀음 다 해봤다 이겁니다. 그렇잖아요? 인간들로서 할 놀음 다 해봤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기 때문에 '야 야. 너 하고 싶은 대로 해봐라…' 이것이 민주세계이고, '가인아, 너 하고 싶은 대로 해봐라…' 이것이 공산당이라구요. 공산주의는 유물주의예요. 이것을 누가 먼저 세웠느냐? 가인입니다. 복귀라는 것은 병난 그 근원을 파헤쳐 가지고 청산짓지 않으면 안 되는데, 이 역사적인 종말시대에 있어서 가인주의가 무엇이냐? 공산주의라구요. 그것은 하나님을 부정하고, 부모를 부정하는 거라구요. 아벨은 뭐냐? 하나님을 위하고, 부모를 위하는 것이라구요.
하나님의 사랑을 빼앗기 위한 싸움이 벌어져야 한다
지금은 어떻게 돼 있느냐 하면, 타락한 인간 세계에 있어서의 민주세계도 이제는 하나님을 위주하고 출발했으면서도, 하나님은 잃어버렸다구요. 하나님은 죽었다고 하는 때가 왔다구요. '중심이니 뭐니, 국가라든가 민족이라든가 가정 같은 것은 꿈도 안 꾼다구요. 다 집어 던졌다구요. 결국 인간으로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진정한 의미에 있어서 사랑을 지닐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 이상을 지닐 수 있는 사람이 아니예요. 이상을 지닐 수 없다는 거예요. 사랑만이 최고일 것입니다. 이렇게 보는 거예요. 그러면 여러 분들이 현재 시점에서 보라구요. 우리 사람을 두고 보면, 역사는 사람 하나를 완성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악한 사람들이 선한 사람을 완전히 때려서 죽이든가, 쓰러질 때…. 이것이 최후를 결정하는 순간이라는 거예요. 그렇게 되는 날에는, 생명이 극할 수 있는 때가 되게 되면 하나님이 발동하신다는 겁니다.
예를 들면 춘향이에게 이 도령이 암행어사로 출동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최후의 경각에 가 가지고 모든 것이 뒤집어질 수 있는 때가 되어 옵니다. 최후다 이겁니다. 죽느냐 사느냐 하는 판국에 어사 출동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좋겠어요?
지금 보라구요. 금번에, 내가 3차 세계순회노정에 올라 전세계를 돌아 보면서 느낀 것이 무엇이냐 하면, '야! 공산당이 빨리도 발전해 가는구나! 빨리도 세계를 쑤셔대고 있구나?´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여실히 느꼈어요. '이놈의 자식들, 나에게 이제 얼마만의 기간을 다오. 너희들과 정면 충돌할 때가 올 것이다' 그러고 돌아왔어요. 그래서 세계적으로 통일 십자군이란 것을 편성해 가지고 돌아왔으니, 이제부터 싸움이 치열하게 벌어질 것입니다. 그러고 있다구요.
여러분은 대한민국에만 속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말라구요. 이제 여러분도 한국 문제만 논의할 때가 지나갑니다. 미국이면 미국이 미국 자체의 이익만을 취하는 정치노선 가지고는 갈 수 없습니다. 세계 이익을 위한 정치노선을 하나님이 허락한 것인데, 돌아서는 날에는 들이 맞는 것입니다. 미국이 이제 망한다구요. 내가 미국의 전역을 돌아다니면서 호통을 쳤어요. 이 시퍼런 눈에 키다리 말 같은 녀석들한테 '미국은 몇 해 지나가게 되면 망한다. 이놈의 자식들 두고 봐라' 하고 공공연히 들이 조져도 눈만 껌벅껌벅하고 뭐…. 우리는 그런 교육을 해야 되겠다구요. 회개하지 않으면 망한다고….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다' 이렇게 교육하는 거예요. 알겠어요? 앞으로 대한민국도 회개하지 않으면 망하는 거라구요. 여러분이 이걸 생각해야 돼요.
그렇기 때문에 역사를 두고 보면, 물질을 중심삼은 땅 빼앗기 위한 싸움, 그 다음엔 사람 빼앗기 위한 싸움이 있었는데, 그 다음엔 뭐냐? 사랑 빼앗기 위한 싸움을 했는데, 그 사랑은 인간의 사랑이 아니예요. 하나님의 사랑 빼앗기 싸움입니다. 그러기에 나중에는 종교전쟁이 남아 있어요, 종교전쟁.
지금 세계 36억 인류 가운데 20억 가까운 수가 종교인이 아니냐. 이들이 어떠한 정치적 영역까지도 소화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요? 지금 한국만 하더라도 뭐 기독교와 불교의 싸움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앞으로는 세계적인 기독교당이 나올 것입니다. 그거 안 나올 수 없다는 것입니다. 또, 세계적인 불교당이 나올 거라구요.
미국 같은 나라가 책임 못 했다는 거라구요. 내가 아이젠하워 대통령을 1965년에 만나 가지고 한 말이 그거라구요. '당신이 재임시에 한 것이 뭐냐? 한국동란 때에…' 이런 거예요. 아이젠하워라는 말은 '아! 이젠 하지 않느냐' 하는 것이 아이젠하워라구요. 거 이름도 비슷하다구요. 그때 저 히말라야의 뭐 달라이 라마(Dalai Lama)사건이 있었다구요. 그게 세계적인 사건이었는데…. 공산당은 종교의 원수라고 해 가지고 그런 찬스를 포착해서 세계적으로 매스컴을 동원하고 미국에 있는 종교인들을 규합하여 세계 복지화 운동을 제창해 가지고…. 뭐 30억 달러 정도의 자금만 만들었으면 세계의 4대 종교를 완전히 한 손아귀에 규합했을 것이 아니냐 그겁니다. 이래 가지고 복지화 운동을 하면서 '공산당은 하나님이 없다고 하니 그 이상 원수가 어디 있느냐' 하며 이런 놀음을 했더라면, 세계 종교는 제2의 전략을 위한 완전한 터전을 만들었을 것인데, 미국이 그렇게 손댔어요?
내가 지금까지는 공산당은 틀림없이 아랍권을 중심삼고 재출발할 것이다 한 것입니다. 그래 지금까지 왔다가 지금 이집트가 몰락하는 때에 있기 때문에 공산당도 휘딱 지나가는 것입니다. 미국도 민주세계에서 몰려서 후퇴하는 것입니다. 다 마찬가지예요. 아랍권에 진출했던 소련이 후퇴 함과 동시에 세계무대에 진출했던 민주주의 대표인 미국도 후퇴하니 누가 언도할 것이냐? 지금 이렇게 돼 들어오는 겁니다.
신본주의 사상으로 기독교를 통일하자
그런 의미에서 우리 통일교회는 기독교를 통일하자는 것입니다. 원래 선각적인 싸움으로 출발한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돼요. 통일하는 데는 무엇을 가지고? 주먹 가지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눈물 가지고 하는 것입니다. 누가 너를 더 사랑했느냐, 누가 너를 덜 사랑했느냐 하는….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 앞에 끌려가는 것입니다. 우리 대한민국에서도 지금가지 그런 놀음하고 있다는 겁니다. 대한민국 이 민족을 누가 더 사랑했느냐? 속여 가지고 뜯어먹는 패들이 아니라 자기가 죽어 가면서 피를 흘리고 눈물을 흘린 사람들이 대한민국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오히려 사랑하는 부모는 자기 자식을 사랑했다고 광고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통일교회는 그 놀음하자는 거라구요. 어떤 기관에서는 통일교회는 왜 선전할 줄 모르냐고…. 우리는 선전해서 팔아먹고 발전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자기들의 수법일는지 모르지만, 통일교회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어떤 실적을 가지고도 실적의 3분의 2이상은 생각하지 말라는 주의라는 거예요. 부모가 자기 자식을 사랑했다고 선전하게 된다면 그것은 불효자를 길러 놓는 자원이 되는 것이 아니냐. 그렇지요? '야야! 내가 너를 위해서 눈물을 이렇게 흘리고 피땀을 흘렸는데, 요놈의 자식아 그걸 몰라줘, 요것아, 요것아' 이러는 것은 불효를 낳는 기원이 돼요. 한 면으로 수고는 했지만 불효자를 양성하는 기원이 되는 것이 아니냐.
대한민국에 있어서 뭐 통일교회가 나라를 위해서 뭐 어떻게 어떻게 했다고 해서 뭐 어떻고 어떻고 그러는데…. 지금까지 나라가 못 하는 일을 내가 많이 했다구요. 빚을 지면서…. 요즈음 뭐 통일교회가 돈 많다고? 돈이 뭐야? 피를 팔아 가지고 이 놀음하고, 굶으면서 이 놀음하고 있다는 거라구요. 그런데 뭐 어떻고 어떻고, 그 조총련의 돈을 들여와? 이놈의 자식들, 조총련을 때려 잡기 위해서 선두에 서서 싸우고 있는데, 지금까지 기성교회에서는 그렇게 모략하고 있다구요. 뭐 통일교회가 이렇게 강력한 단체이기 때문에, 문선생은 이렇게 해 가지고 수가 많아지면 정당을 만들어 가지고 대통령 해먹으려고 한다고 하는데, 대한민국 대통령? 대한민국이 뭐가 크다고. 내 이 손톱만큼도 생각하지 않는다구요. 미국을 주더라도 내가 콧방귀를 뀐다구요. 그래서 내가 요번에 미국의 상원의원 유명한 녀석들을 만나 가지고 다 말한 거라구요. 이놈의 자식들, 배통에는 썩은 호박통밖에 없다 이겁니다. 이놈의 자식들, 불쌍하게 돼 있지.
여러분은 이제 정신을 차려야 되겠다구요. 이제 누구를 믿을 것이냐? 마음을 중심삼고 외적으로 출발한 그 문화의 발전의 터전이 내적으로 귀결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당연합니다. 신본주의 사상은 인본주의 사상의 종결을 보는 것입니다. 인본주의 사상은 종말점에 가서 행복이 아니라 파탄입니다. 갈 곳이 없다 이거예요. 인간의 본질을 보라구요. 전부 다 자기 중심삼은 인간들 아니예요? 큰 사람 작은 사람 높은 사람 낮은 사람을 막론하고, 자기 위주한 인간주의 휴머니즘에서 세계 통일할 방안이 나온다는 것은 꿈도 꾸지 말라는 거예요. 따라서 그것은 인간애가 아니예요. 자기 위주한 인간이 아니예요. 자기를 희생시키고 전체를 위주할 수 있는 사랑을 중심삼고 제창하는 운동이 벌어지면 이것이 신본 주의 사상입니다. 박애주의 사상입니다. 나를 희생시키는 것입니다.
어떤 집안에 열 사람의 식구 가운데 주인이 될 수 있는 사람이 누구냐? 열 사람을 고생시켜 자기 야욕을 충당하려는 사람이 중심이 되는 것이 아니라구요. 열 식구를 위해서 말없이 희생하는 사람을 열 사람이 추대해 가지고 중심으로 세우는 것입니다. 그게 원칙이 아니냐. 부모까지도 그 앞에는 무릎을 꿇고 천년 만년 축복을 해주는 것이 아니냐. 그게 원칙이라구요.
타락은 인간의 마음으로부터 출발하여 거기서부터 파탄이 벌어졌기 때문에, 개인주의 사상과 물질주의 사상으로 갈래갈래 갈라져 서로 헐뜯고 있습니다. 민주주의도 그렇고 공산주의도 그렇지 않아요? 보라구요. 소련에 있어서 흐루시초프는 스탈린이 자기가 집권하기 이전의 주권자지만, 그를 격하시키기 위해서 온갖 심혈을 기울여 투쟁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기막힌 싸움이었습니다. 그러니 이 세상에는 평화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 통일교회는 타락으로 출발했던 것, 타락 후에 그 문명의 목적을 바라고 나오던 것을 부정하고 타락 이전의 것을 찾아 가자는 것입니다. 이것이 통일교회 사상이라구요.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타락 이전의 것을….
새로운 주의와 사상을 주장하고 나가야 할 우리
그러면 아담과 해와가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 앞에 효자효녀가 되었느냐? 되었다고 생각해요? 못 되었다구요. 아담과 해와가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 앞에 충신이 되어 봤느냐? 못 되어 봤다구요. 하나님 앞에 선한 사람이 돼 봤느냐? 못 되어 봤다구요. 하나님의 신망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되었느냐? 못 되었다구요. 쫓겨났다구요. 전부 다 빼앗겼다구요. 참된 효자는 하나님 앞에 보관되어 있고, 참된 충신은 하나님 앞에 보관 되어 있고, 참된 사람은 하나님 앞에 보관되어 있다구요.
그래 그 쫓겨난 사람들 마음대로 해봐라! 나중엔 돌아올 길밖에 없을 것이다! 그 놀음이라구요. 그리하여 역사를 요만큼 끌고 왔다구요. 하나님이 놀라우신 분이니 그렇게 참고 나온 것이며, 거기에 있어서 메시아 사상이 있었다는 것은 우리 인류역사에 있어서 하나의 희망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색다른 종교를 추구해서 색다른 문화와 문명을 창건해야 할 시대가 현재 20세기 후반기입니다. 이 후반기에 있어서 인류에게 절박하고도 긴장된 시점이 지금이라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자, 그러면 여러분이 부모나 형제를 두고 보라고요. 세상에도 보게 된다면 형제끼리도 지금 뭐 돈 만원 가지고도 칼 가지고 싸우는 일이 납니다. 부자지간에도 돈 만 원 가지고 싸우는 때가 됐다구요. 부부끼리도 '아 당신이 몇천 원 썼으니까 요걸 줘야 된다. 안 주면 당신도 손해고, 나와 인연이 없다'라고…. 물질로 좌우되는 인간의 무가치한 인연, 이것은 파탄되어 버려야 된다구요.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새로운 사상, 새로운 면의 주의를 주장하고 나가는 것임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이와 같은 시점에 왔으니 우리가 어떻게 돌아가느냐? 애당초 출발하지 않았으면 좋았을 거예요. 알겠어요? 아담과 해와가 타락한 그 자리에서 그저 더벅머리 총각 모양으로 그저 멍텅구리가 되어서 문화도 뭐도 없이 그냥 가만히 있었으면 외려 낫다는 거라구요. 차라리 오지 않았으면 좋을 뻔했는데…. 여기까지 멀리 왔으니 돌아가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돌아가려니 세계를 부정해야 되고, 나라를 부정해야 되는 것입니다, 세계적인 판국을 가지고 자기의 야욕을 충당하던 그런 것을 다 버려야 된다구요.
그러면 어떻게 되어야 되느냐? 타락한 아담과 해와는 타락한 가정을 이루었기 때문에, 타락한 역사의 혈통을 받고 태어난 사람은 타락한 가정을 그냥 그대로 갖고 있으면 타락권내를 벗어날 수 없으니 이것까지 부정해야 됩니다. 종교는 그걸 부정하고 나오기 때문에 독신생활을 강조 하는 거예요. 사도 바울 같은 양반은 스스로 된 고자(鼓子)를 찬양했다구요. 이게 뭐 전부 다 하나님이나 종교를 두고 보면 이게 알 수 없는 것이라구요. 그렇지만 알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내용이 있다구요. 그렇기 때문에 종교는 반드시 현실과 상반된 길을 간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자기가 땀을 흘리는데 있어서는…. 종교가 가는 길은 하나님을 따라가는 길인데, 하나님이 지금까지 오는 길은 어떠한 길이냐? 보라구요. 전부 다 젊은 녀석들이 앞서 타락했기 때문에…. 타락은 어느 때 했느냐? 소년시대였다구요. 그래서 타락은 소년시대로부터 청년시대, 장년시대, 노년시대로 되어져 갔다구요. 역사시대에 있어서 사탄은 소년시대, 청년시대, 장년시대, 노년시대로 끌고 나온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잘난 놈, 젊은 놈이 선두에 서고, 늙은이들이 전부 다 나중에 서게 되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고대 종교는 나이 많은 사람들이 믿는 것입니다. 그렇게 돼 있어요. 연구들 해보라구요.
인중지말…. 이걸 악이 끌고 가니 선한 하나님은 여기에 따라가면서 뒤에서 낙오자들을 수습하시는 겁니다. 낙오자들을…. 그렇기 때문에 보라구요. 성경상에 나타난 것을 보면 노아 아저씨예요, 노아 청년이예요? '노아' 하면?「할아버지」 할아버지. 아브라함은 아저씨예요, 할아버지예요? '아브라함 할아버지'입니다. 모세가 할아버지예요, 젊은이예요? 80세 나서부터 출발했으니 모세 할아버지…. 그러면 예수시대 와서는? 세례 요한 시대에 와서는? 이것이 비로소 세례 요한시대에 와서는 청년시대에 가서 아저씨시대로 들어가는 거예요. 알겠어요? 보라구요. 낙오된 많은 늙은이들, 뭐 5만 원 주고 사 가라고 해도 싫다고 할 수 있는 이 인간 쓰레기들, 이 인간 쓰레기들을 뒤적뒤적해 나오는 일이 하나님의 일이라구요. 자, 이 땅 위의 사탄 패들이 그거 좋아하겠어요? 인간 쓰레기를 빼오니, 뭐라고 할까? 고물상 주인이 됐다구요. 그래도 그걸 중심삼아 가지고 뜯어 가지고 녹여 가지고 다시 뭘 하나 만들어 보자고…. 이렇게 하여 장년시대를 향해서 출발한다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탄세계에서 빼앗아 나오는 겁니다. 그 다음엔 청년시대…. 이것이 기독교시대라구요. 기독교시대.
그러면 지금 시대는 어떤 시대냐 하면, 지금 통일교회시대는 어떤 시대냐 하면 청소년시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이 많은 사람, 저기 김 장로 같은 사람은 70이 넘었지만…. 좀 섭섭하겠지만 통일교회에 들어온 사람은 젊은 사람 아니고는 못 끌려 다닙니다. 가기 힘들다구요. 밥 먹고 뛰려니…. 일선에 서야 되겠다구요. 그렇기 때문에 통일교회는 청소년, 고등학교 학생을 위주해 가지고 전도해라 하고 지금 지시하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대학생도 벌써 물들었다구요. 문제는 중학교 3학년에서부터 이들을 4년 동안에 우리는 전도를…. 그렇기 때문에 전국에서, 어느 지방에서나 고등학생 중에서 똑똑하고 우수한 패는 모두 통일교회 패라구요. 그렇게 돼 있다구요. 그러면 통일교회가 희망이 있느냐 없느냐 할 때, 나는 희망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지만,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통일교회는 희망이 있다구요.
청소년 때의 이상적인 신앙과 새로운 희망의 세계 전개
이번에 우리가 일본 교수들 한 40명을 10일 동안 초청했는데, 거기에 우리 협회장이 가 가지고 파티를 했어요. 협회장이 척 나서니까, 그들은 그 사람이 협회장인 줄 모르지 뭐예요. 저 사람이 통일교회 책임자라니까 '저 사람이 뭐…' 그래요. 누구나 일본에서는 뭐 나를 모르는 사람이 없다구요. '문선명' 하게 되면 유명하다구요. 유치원 애들까지 전부 다 소문을 들어서 알고 있다구요. 저 사람이 문선명이라는 사람이 아닌데 누구냐고 하더래요. 그래서 협회장이라고 하니까 몇 살 되었느냐고 물어서 40대라고…. 그래 보니까 간부들이 전부 다 피도 안 마른 새파란 젊은이들만 있다 이겁니다. 그 사람들이 한국에 와서 통일교회 하게 되면 늙은이들만 북적북적하는 줄 알았는데, 전부 다 새파란 젊은이들이…. 거기에 놀랐다는 거라구요. 그 사람들의 말이 크게 놀랐다는 거예요. 또 일본도 비슷하지. 일본만 그런 줄 알았는데, 한국도 그러니까, 이런 젊은 사람들이 구성요원이 되어 있으니까 세계에 널려 있는 통일교회 패들은 씩씩하고 현실적인 투사들이라고…. 내가 그런 말을 듣게 될 때, 기분 나쁘지 않았어요. (웃음)
우리 통일교회는 청소년시대라는 것입니다. 인류가 하나님 앞에 언제 청소년시대를 중심삼아 가지고 대한 때가 있었느냐? 아담 해와가 청소년 시대에 타락하지 않았느냐? 타락한 아담과 해와를 끌고 나오는 데 있어서, 사탄이 자랑할 수 있는 청년시대로서, 사탄이 자랑할 수 있는 장년시대로서, 사탄이 자랑할 수 있는 노년시대로서는 거쳐왔지만, 하나님을 중심삼아 가지고 청년시대, 장년시대, 노년시대가 있었느냐? 하나님편에 서서 사랑받을 수 있는 청년시대, 사랑받을 수 있는 장년시대, 사랑받을 수 있는 노년시대를 거쳐 가지고 천국가는 것이 본래 이상적인, 타락하지 않은 인간의 갈 길인데도 불구하고 오늘날 이 땅 위에 그런 길을 간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길이라는 것은 늘그데기들이 가는 것이 아니라고요. 알겠어요? 이상적인 신앙이라는 것은 지극히 팔팔한 청소년서부터 시작하는 것을 말합니다. 인간의 제일 고귀한 시대는 사춘기시대입니다. 꽃필 때고 향기 풍길 수 있는 그때인데, 그런 고귀한 청소년들이 하늘의 사랑과 정열에 불타 가지고 하늘나라의 이념을 중심삼고 건국의 용사로서 등장하는 무리가 나올 때, 거기서는 새로운 희망의 세계가 전개될 수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러한 청소년들이 진정한 사랑을 받아 가지고 청년이 되고, 사랑을 받던 그 청년들이 커 가지고 장년이 되고, 사랑을 받던 그 장년들이 나이 많아 가지고 늙은이가 되어 갑니다. 따라서 그 늙은이들이 품고 사랑할 수 있는 아들딸들은 장년이요, 그 다음에 품을 수 있는 손자들은 청소년들이다 할 때, 한 가정을 중심삼고 3대를 통해서 역사적인 3시대의 한을 풀 수 있는 행복된 터전을 오늘날 통일교회 이념을 중심삼은 가정을 중심삼아 가지고 성취해 보자는 것입니다. 이것이 통일교회가 주력하는 축복가정인 것입니다. 3대의 한을 풀어야 된다는 거예요. 그렇지 않아요? 청년시대, 장년시대, 노년시대, 3대의 한을 풀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자, 이러면서 이 청년들은 어떻게 돼야 되느냐 하면, 자기가 이익 되기 위해서 세계를 희생시키는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하고, 자기가 잘살기 위해서 나라를 희생시키는 사람이 되지 말라는 겁니다. 절대로…. 미국이 잘살기 위해서, 미국 자체가 망할까봐 세계를 버리는 시시한 미국이 되지 말라 이겁니다. 이 껄렁껄렁한 미국…. 나라의 주권자 자기 일당의 야욕을 위해서, 자기 당이 잘살기 위해서 나라를 망각하는 무리가 되지 말라 이겁니다. 그러면 망하는 겁니다. 역사시대에 지나가는 주권자는 주인이 못 되는 것입니다. 주인은 오늘 것을 내일 자랑받고 싶고, 내일 것을 모레에 자랑받고 싶은 것이 아니냐.
국보라는 물건 중에 당시에 몇천만 원짜리 있는 줄 알아요? 쓰레기통에 들어갈 것밖에 안 된다는 겁니다. 그건 뭐냐? 어젯날의 것이 오늘에 자랑하고 싶어하는 그 전통으로 남았다는 거예요. 그걸 말한다구요. 그것은 무엇을 말하느냐? 민족이면 민족, 자기 민족을 지도하던 사람의 일생을 남기는 것보다도 앞으로 빛나는 역사를 남기는 사람이 돼야 되고, 대한민국의 역사를 남길 수 있는 사람이 돼야 된다는 것입니다.
보다 사랑하는 사람이 이 세상의 주인이다
오늘날 우리 통일교회 사상을 중심삼고 본다면 통일교회, 이 통일교회 간판 어서 떼면 좋겠어요, 뗐으면…. 간판이 문제가 아니라구요. 그런 시시한 문선생이 아니라구요. 나라를 살릴 수 있는 길이 있거들랑 간판을 떼라 이겁니다. 세계를 살릴 수 있는 대한민국이 되었다면 대한민국 민족이라는 것을 망각해 버려라 이겁니다. 민족을 망각해야만 세계를 구할 수 있지 대한민국을 위주한 헤게모니를 취해 가지고 민족을 지도하겠다는 무리는 물러가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소련이 슬라브 민족을 중심삼고 세계 제패를 위한 공산권 이념을 들고 나왔는데, 거기에는 중공이라는 또 다른 원수가 생겨나지 않았느냐? 공산권을 위해서 세계적인 공로가 있을 때 거기에는 세계적인 지도자로 추대할 수 있는 터전이 있을 것인데, 그렇게 못 되고 슬라브 민족을 중심삼고 소련 공산당이 헤게모니를 쥐려는 내분이 숨어 있다면 그것은 반드시 분열되기 마련입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우리 통일교회 청년들, '내가 대학을 졸업해 가지고 보다 충성하겠다' 하는 그런 패들에게는 내가 신세 안 지겠다 이겁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그런 손길을 거쳐서 실적을 갖춘 사내나 아낙네는 내가 쓰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누구를 중심삼겠다는 거예요? 민족이 망해 들어가는데, 학교가 뭐예요? 다 집어치우라는 거라구요. 교회가 뭐예요? 교회도 참된 나라를 세우기 위해서 있는 거예요. 그렇다구요. 불교가 어디 있고, 기독교가 어디 있어요? 참된 이상의 나라를 이루기 위해서는 그 불교, 그 기독교의 간판을 떼야 되는 것입니다. 아직까지 참된 나라가 안 나왔기 때문에 그렇지…. 우리 통일교회는 참된 나라를 못 세웠다 이겁니다.
지금은 어떤 때냐 하면 몸과 마음이 싸우는 사상전시대입니다. 마음을 봐라 이겁니다. 누구의 생각이 좋으냐 그거 아니예요? 마음 싸움인 것입니다. 역사는 뭘해 나왔느냐? 하나의 사람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사람을 재창조, 다시 복귀해 나오는 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몸뚱이적인 세계의 제패를 꿈꾸고 나오는 왕자들이여, 혹은 영웅들이여 나와서 해봐라! 망하게 된다면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교육자료로 삼을 것이다', 하나님은 그렇게 하는 거예요. 그걸 알아야지요. 이게 하나님이라구요. 그 누가 자기 마음을 중심삼고 자랑할 수 있는 무엇이나 체제가 있으면 나와서 해봐라 이겁니다. 그래 가지고 망하게 되면 그 전통적 자료를 수집할 겁니다. 그래서 참다운 아들딸로 교육할 수 있는 교본을 만들어야 되겠습니다. 알겠어요?
그러면 사상전쟁에서, 사상주의를 중심삼고 싸우는 민주세계는 어디에 가서 닻을 내릴 것이며, 공산주의는 어디에 가서 닻을 내릴 것이냐? 세계 어디에도 발붙일 곳이 없다 이겁니다. 미국에 발붙일 곳이 있어요? 소련에 발붙일 곳이 있어요? 발붙일 곳이 있는 것 같지만 없다구요. 발붙일 곳이 하나도 없으니, 그러면 무엇에만 발붙일 것이냐? 최후에 남은 것은 사람의 몸뚱이와 마음입니다. 이상은 정(情)이 있어야 됩니다. 사랑이 없으면 이상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행복도 정서적인 관계에서…. 통일교회 문선생이 혼자 있고 아무도 없다면, 정서적인 면에 있어서 아무 상대도 없다면 그건 불행하다구요. 세계적인 대통령이 된 어떤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그가 독신이 되어 아들딸이 없으면 '아, 그 사람 불쌍하다' 그러지요? 대번에 그런 레테르가 붙는 거라구요. 인간의 최고의 행복의 기준은 뭐냐? 사랑이라구요, 사랑.
임자네들 다 사랑 원하지요? 사랑 다 좋아하지요? 똥개들도 주인이 더 사랑해 주면 꼬리를 치고 따라 다닌다구요. 그렇게 영민스러운 고양이 새끼도 사랑하는 주인의 품에서 '야옹' 하는 거라구요. 그거 기분이 좋지 않지만 말이예요. 자기를 사랑하면 좋아서 따라가는 거예요. 그렇지요?
이 세상의 주인은 누구냐? 보다 사랑하는 사람이라구요. 보다 사랑하는 사람이 세계의 주인이 되는 거라구요. 나라의 주인은 누구냐? 나라를 보다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사랑의 본질이 그거라구요. 이것은 예외가 없어요. 왜 도의 길에서는 희생해야 되느냐 이겁니다. 이게 문제라구요. '적선은 무슨 적선이야. 이게? 바쁜 세상에 적선이니 뭐 그럴 수 없다. 날치기해 가지고, 슬쩍해 가지고 내 배때기 채우면 그게 행복이지' 그렇게 장담하는 사람들이 있다구요. 여러분 그걸 알아야 돼요.
천치창조는 기쁨을 느끼기 위해서 한 것
사랑이 무엇이냐 하는 문제를 두고 볼 때, 거기에 대답할 수 있어요? 사랑은 어디서부터 시작하느냐 하는 문제를 두고 볼 때, 어디서 시작해요? 혼자 시작해요? 혼자 시작할 수 있어요? 사랑이라는 말은 대상관계에서부터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자기 혼자 앉아 가지고 '아이구 좋아, 아이구 좋아, 아이구 좋아' 하면 그거 미쳤다고 하지요? 배우들이 연습하면서 춤을 추고 웃고 할 때에도 거울을 보고 그럽니다. 그림자 같은 상대라도 있어야 신이 나지, 그것도 없이는 몇 번도 못한다구요. 그런 기준을 중심삼고 얼굴을 보고 '요 표정이 딱 됐다' 하는 무엇이 있기 때문에, 감독이 잔소리하고 핏대를 올려도, '그까짓 연기도 내가 다 하는 거지, 뭐 어때서' 하며 그것을 표준해 움직인다구요. 그렇지 않아요? 연습한 기준이 있기 때문에…. 연습도 안 해 가지고 하다가는 '저거 왜 저리 하노?' 하면 꽁무니빼고 도망해 버릴 수도 있는 거라구요. 그렇지만 연습한 기준이 있으면 누가 불평을 안 하게끔 내가 볼 때에도 더 잘됐다, 누구든지 잘됐다고 할 수 있게끔 할 수 있다구요. 그러니 상대자가 이렇게 필요해요.
그러면 하나님은 왜 천지를 창조했느냐? 그 절대자가, 전지전능하신 분이 무엇이 없어서 사람을 창조했겠어요? 무엇이 없었겠어요? 하나님의 사랑이 있어요, 없어요? 사랑이 있어요, 없어요?「있습니다」 있다구요. 여러분에게도 사랑이 있어요, 없어요?「있습니다」 있지마는 상대가 없이는 나타나지 않는다고요. 상대가 없는데 작용하게 되면 손해가 난다구요. 이거 보면 전부 다 자기를 보호하게 되어 있다구요. 절대 손해나는 곳에는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상대가 나타나면 사랑이 없는 것 같은 데도 뛰어 나온다구요. 그렇지요? 그 하나님도 사랑이 있기는 있는데, 남성적인 하나님이 가만히 혼자 있을 때는 그 사랑이 있긴 있는데 그것이 나타나요, 안 나타나요? 요건 나타내 보이지 않는 거라구요. 이것을 나타내 보이려는 상대가 사람이라는 거예요. 그 뭐 세밀한 얘기 할 시간이 없기 때문에….
그러면 본래 창조는 왜 했느냐? 창조하게 된 것은 무엇 때문이냐? 요즘에 뭐 윤리학에서 가치관에 있어서 선에 대한 가치관이라든가, 지정의 (知情意)라는 말을 하고 있지만, 지(知)가 출발이 아니예요, 지가. 하나님이 모르면서 천지를 지었겠어요? 하나님이 목적 없이 천지를 지었겠나요? 목적이고 뭣이고 다 필요 없다는 거라구요. 거기엔 더 필요치 않아요. 이건 다 부차적인 거라구요. 무엇 때문에 천지만물을 지었느냐? 알기 위해서 지었어요? 아는 게 좋아요, 기쁜 게 좋아요?「기쁜 게 좋아요」 기쁜 게 좋지요. '내가 학박사가 되어서 아, 책을 바라보니 좋다? 그렇게 돼 있지 않다구요. 그 책을 바라보고 좋은 것은 왜 좋으냐? 상대권이 넓어지기 때문입니다. 알겠어요? 자기가 아는 범위가 넓어지기 때문에, 알게 되는 그 판도가 세계적으로 되니까 그게 좋다는 것이지, 책을 보고 좋아하는 거예요? 그것은 책벌레지. 전부 다 그렇게 돼 있는 거예요. 상대적 권을 추구하는 데 있어서, 보다 가치를 느끼는 데 있어서 기쁨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천지만물을 왜 지었겠느냐? 기쁘기 위해서 지었습니다. 기뻐하는 데는 무엇을 갖고 기뻐할 것이냐? '야, 이 녀석아 너 하늘 천(天) 따 지(地) 해봐라' 해서 하늘 천(天) 따 지(地)를 알았다 할 때 그것 보고 기뻐하겠어요? 자, 지식을 가질 거예요, 사랑을 가질 거예요?「사랑요」그러면 뭐 지금까지 그저 세상을 살 것같이 노동해 가지고 일생 동안 그저 고생을 하면서라도 돈, 돈, 돈, 돈을…. 돈이라면 눈이 히뜩 뒤집어지는 사람들도 '너, 돈이 필요해, 사랑이 필요해?' 하면, 눈꺼벅꺼벅하지 않고, 눈 깜짝하지 않고 대답하는 말이 '사랑이지' 할 것입니다. 그렇게 돼 있다구요. 그래요, 안 그래요? 그렇지 않다면 손들어 보라구요. 그는 가짜라구요. 가짜. 개, 돼지와 마찬가지예요.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도 무엇에서부터 천지창조를 했느냐? 기쁨입니다. 정서적인 세계를 이루기 위해…. 거기에서 출발이라구요, 정서적인 세계 보다 간절히 자극을 추구하려니 설명이 필요하다구요. 목적이 필요한 거예요. 결국은 이렇게 됐다 하는 과정을 설명하려니 그런 이치가 필요하다구요. '이것이 이렇게 돼야만 진짜가 된다' 하는…. 그렇기 때문에 목적관이 필요합니다. 완전한 것은, 완성이라는 것은 과정이 필요하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거라구요. 전부 다 정서적인 면을 중심삼고 출발하는 거예요. 지(知)가 먼저 아닙니다.
천국은 사랑을 통해 이루어진다
타락한 인간이 모르는 세상에서 찾아 나가려니 그게 필요한 것이지만 하나님도? 여러분. 부모의 사랑을 받아 본 아들딸이 있다면, 그들이 사랑을 받지 못한 아들딸한테 백날 설명했댔자 그거 알 수 있어요? 천년을 설명해도…. '부모의 사랑은 이렇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그 사랑은 이렇다, 부부가 사랑하는 그 사랑은 이렇다' 하는 설명 가지고 통해요? 몇억만 년 설명했댔자 그거 알 수 있어요? 알 길이 있을 것 같애요? 없다구요. 그건 체험을 해야 알 수 있지. 자식을 가져 봐야 '아이구, 자식 사랑은 이렇구나' 하며 알지, 그걸 자식 안 가진 사람에겐 암만 설명해 줘도 몰라요. 몰라. 모르는 거라구요. 그런 경험을 통하지 않으면 모르게 돼 있다구요. 배워 가지고 아는 도리가 아니예요, 배워 가지고. 알겠어요? 지식으로나 무엇으로나 배워 가지고 아는 것이 사랑이냐? 아니예요. 그거 그래요, 안 그래요? 이것은 배우는 것, 교육을 초월해 있어요. 이렇게 되는 거예요. 미미한 동물도 새끼를 사랑하는 것은 다 알지요? 그 무슨 백과사전을 통해 가지고, 자기 조상에게 배워 가지고 나왔어요? 아무리 무식해도 자기 아들딸은 사랑할 줄 안다구요. 그렇지요? 그것은 교육을 초월해 있다구요. 또 그 자리는 말이예요. 체면이고 위신이고 있어요, 없어요?
이 나라 대통령이 자기 아들딸이 시궁창에 까꾸로 꽂혀 죽게 되었다할 때는 '아이구. 내가 국민이 지금 바라보는 대행사를 주도하는 주인공 인데…. 아들이 죽어도 괜찮아' 그래요? 체면이 있겠어요. 없겠어요? 그 자동차를 차 버리고 까꾸로 들어가 가지고, 그거 뭐 시궁창에 까꾸로 들어가더라도 자식을 들고 나오게 될 거라구요. 그렇게 하면 그 대통령을 나쁘다고 하겠어요, 좋다고 하겠어요? 만약 대통령의 아들딸이 죽게 되었는데 행사 때문에 죽었다면 그것을 잘했다고 하겠어요? 차고 무엇이고, 그 나라의 주인 되는 한 사람이 타고 다니는 차를 발길로 차 버리고, 또 그게 옥살박살 되더라도 아들딸을 살리기 위해 뛰어 들어가 가지고…. 그것이 뭐 형편없이 되고, 그날 대회가 그 다음으로 연장되더라도 그랬으면 그 대통령은 아비로서의 자격이 있다구요. 국가 국민들의 대통령으로서의 자격은 잃어버렸지만, 아비로서의 자격은 됐다는 겁니다. 그러면 국가에 대해서는 실례 중의 실례이고 자식에 대해서는? 실례 반대가 뭔가요? 예도를 갖췄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이걸 놓고 국민들이 그렇게 했다고 참소할 수 없는 겁니다. 사랑, 이것은 국가, 국민도 넘어선다는 거라구요. 알겠어요? 누구나 이렇다는 거예요. 이렇게 볼 때, 야, 사랑에는 절대적인 무엇이 있다, 사랑은 절대적이다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무엇을 연구하는 분이냐 하면, 하나님은 사랑을 연구하는 분이지, 지식을 연구하는 분이 아닙니다. 그것을 알아야 돼요. 하나님이 권력을 연구하는 분이 아니예요. 하나님이 전지전능하신데 무슨 권력이 필요해요? 무슨 권력이 필요하냐 이겁니다. 그것보다 더 높은데…. 그러면 무엇을 숭상하고, 무엇을 연구하고, 무엇을 행사하려고 하느냐 하면 사랑을 중심삼아 가지고 행사하려고 하고, 사랑을 중심삼고 가르치려고 하는 거예요. 사랑을 중심삼고 가르치게 될 때는 그 가르침은 천년 만년 가는 거예요. 사랑의 맛을 알고 가르침받게 되면 영원히 잊어버리지 않아요.
여러분, 사랑하는 사람끼리, 두 청춘남녀가 동산에서 사랑을 속삭이면서 찔레꽃 잎사귀 다 시들은 것이라도 하나 준 것, 그것이 영원히 잊어져요? 안 잊어진다구요. 사랑을 통한 교육, 사랑을 통한 신앙생활, 그것이 천국이라는 거예요. 여러분이 그걸 알아야 돼요. 지식을 통한 국가, 권한을 통한 국가, 이것은 망국판이라는 거예요. 사랑을 통한 지식, 사랑을 통한 경제, 사랑을 통한…. 그것 싫소, 좋소? 천국이 이렇게 된 곳이예요. 이렇게 볼 때, 사랑이 이런 줄 몰랐지요? 알겠어요?
사랑이란 설명해 줄 수 없는 것
통일교회 문선생이 지금까지 뭐 욕먹어 왔지만, 원수진 것 하나도 없다구요. 진짜 사람이냐, 가짜 사람이냐 하는 데는 욕먹는 놀음이 벌어진다는 거예요. 마사를 피우는 겁니다. '저것이 어떻게 되나 보자' 하는 주목거리가 다 되어 있는데, 이제 앞으로 관심거리 될 때가 올 것입니다. 안오면 안 될 단계입니다. 그렇게 될 때 통일교회가 나쁘지 않을 거라구요.
사랑을 중심삼고 어머니가 '야, 이놈의 자식아' 그랬더라도 자식이 그 사연을 알게 될 때 불평해요? 도리어 어머니 손을 붙들고…. 자기를 진정으로 알아주면 고마와한다는 거예요. 자식을 낳아 본 부모가 돼야 아이고, 어머니가 자꾸 나를 때리더니…. 옛날에 때려 놓고는 붙들고 울고 그랬거든요. 그걸 그땐 알 수 없었다구요. 그렇다는 거예요. 어미도 자식을 때려 놓고는 운다구요. 때릴 때는 언제고, 그 다음에는 붙들고 하염없이 운다는 거예요. 세상으로 보면 아주 뭐 변덕도 그런 변덕이 없을 거라구요. 그렇기 때문에 자기가 아들딸을 낳아서 길러 봐야 '우리를 사랑했구나' 하고 알고 그때에야 어머니를 그리고 봉양하지…. 그렇다는 거예요. 그거 아는 거예요. 그렇지요? 그때에 자기를 때려 준…. 부모의 그 뼛골에 잊을 수 없는 사랑이 거기서…. 그래 가지고 그 자식이 부모한테 순응하게 될 때는 눈물이 나올 것이고, 수백 배로 위해 주고 싶은 마음이 그때에야 나오는 거예요. 여러분은 모른다구요. 장가 안 간 녀석들은 모른다구요. 아들딸 낳아 본 사람 외에는 모른다구요. 암만 설명해도 모른다구요, 낳아 봐야 알지. 그래 그것을 보면 사랑의 교육이 필요해요?
여러분, 장가가는 아들에게 '너 장가가기 위해서 20년 동안 교육받았느냐?' 그래요? 나면서부터 '야, 네가 색시를 얻으려면 이렇게 돼야 되는 거야'라고 교육받았어요? 여기 아저씨들! 교육받고 갔어요? 사랑의 길은 모든 것을 초월해 있다는 것입니다. 남편이 어떻다는 교육이 필요 없다구요. 사랑만 알게 된다면 남편이 어떻다는 교육이 필요 없다구요. 아내가 어떻다는 것도 사랑만 알게 된다면 교육이 필요없다구요. 자식이 어떻다는 것도 사랑만 알게 되면 교육이 필요없다구요. 필요해요? 교육이 있으면 도리어 방해된다구요. 부처끼리 재미있게 사는데 그의 어머니 아버지가 문 열고 들어가 가지고 '야! 너희들 사랑하니? 그런다면 그거 기분 좋겠어요?(웃음) 그 자리는 평등권이요, 동등권이요, 또한 해방권이예요. 그 누가 간섭하지 못한다구요. 그래서 사랑이 좋다는 겁니다.
자, 그러면 우리 인간의 사랑을 보면, 우리 인간은 타락했기 때문에 천사장급 사랑에서 출발한 거라구요. 알겠어요? 천사장급 사랑보다 위의 사랑이 아들급 사랑이요, 아들급 위가 아버지급 사랑입니다. 그런데 천사 장급 사랑, 종급 사랑에서도 죽자 사자 하며 생명을 바치고 나가는데, 아들급 사랑과 아버지급 사랑이 한꺼번에, 꿀단지 꺼꾸로 부은 것과 같이 꼭대기에서 퍼붓게 될 때는 사지백체가 어떻게 되겠는가를 생각해 보라구요. 곤약은 아직 멀었다는 거라구요. 물이 되든 뭐가 되든, 살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게 된다는 거예요. 사실 그렇다는 거예요.
여러분, 영계에 대한 체험 없지요? 영계에 대해 모를 겁니다. 내가 이번에 비행기를 많이 타고 다니면서 보았는데 말이예요. 공중에 3천 미터 이상 높이 날을 때 상공에서 아래를 보면 뭉게 구름이 있는 거예요. 여기서는 보게 되면 기분 나쁜 검은 구름이 많지요? 그렇지요? 그렇지만 비행기를 타고 올라가 보면 검은 구름은 없다구요. 전부 다 뭉게구름이예요. 아주 뭐 솜털 같은, 아주 뭐 그 솜도…. 표현을 어떻게 하지 못한 다는 거예요. 그거 보게 되면 말이예요. 햇빛이 내리 쬐는데 거기에 반사 되는 구름 빛은 반할 정도라구요. 비행기를 타고 가다가 내려서 한번 휘익할 때, 그것이 솜과 같이 돼 가지고 한번 척 품으면 떨어지지 않는다면 한번 해보고 싶은 마음이 있다구요. 그런 무엇이 있다구요.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꿈꾸는 맛이 정말 재미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영계의 작용이 그렇습니다. 영계가 그렇습니다.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더 멋지고,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점점 넓어지고,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더 빨려 들어갑니다.
그래서 세상에도 사랑하는 사람들끼리 몇 해만에 만났다면, 남편과 떨어져 있다가, 아내가 남편이 오기를 바라다가, 서로 부두에서 만나게 된다면, 거기서 나타나는 것을 봤단다면 말하기 전에 손을 들고 뛰어가는 거라구요. 그래 가지고 만나게 되면 삥삥 돌지 않아요? 여기선 네 자리나 내 자리나 같으니, 통일되는 거라구요. 여기서 같이 나가게 되면, 도는 가운데 남아질 수 있는 중심이 무엇이냐? 중심은 사랑밖에 없다는 거라구요. 빙빙 도는데 무얼 중심삼고 도느냐? 남자를 중심삼고 도는 거예요, 여자를 중심삼고 도는 거예요?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니고 뭐예요? 사랑이지요. 사랑을 중심삼고 도는 거예요. 부부면 부부는 사랑을 중심삼고 도는 거예요. 거기에 이상(理想)이 있다구요. 그렇기 때문에 가정의 이상이라는 것은 아버지만 중심이 아니고, 어머니만 중심이 아니라구요. 그 두 사람을 합한 사랑을 중심삼은 가정이 돼야 되는 거예요. 가족도 마찬가지라구요. 그래야 될 것 아니예요? 이렇게 볼 때, 사랑이란 결국 좋아지는 겁니다.
사랑의 본질은 절대적이고 영원한 것
그러면 그 사랑의 본질이 어떠냐 할 때…. 사랑의 본질에 대해서 얘기하자구요. 우리 저 아내된 사람들, 이 아주머니들 말이예요. 시집가서 살면서, '남편이 진짜 나를 사랑하나? 하며, 물어 보기 좋아하는 것이 여자들입니다. 대부분이 그렇다고 그래요. 다 그렇지는 않겠지만…. 아내가 남편한테 떡 물어 보는 거예요. '아, 나는 정성껏 당신을 사랑하는데…' 하면서 '당신 날 진짜 사랑하오? 하는 물음에 '아! 사랑하고말고' 했다 합시다. 그러면, '얼마만큼 사랑하오? 했을 때 '요만큼 사랑한다' 하면 (웃음) 싫어한다구요. 몇천 년이라 하는 것보다 말이 안 나와서 '칵' 이렇게 되면, 말을 안 들어도 시늉이라도 하며 이렇게 사랑한다 하면 좋아 한다는 거예요. 그것 그런다는 거예요. 그게 뭐냐? 품고 품고 품고 품고, 끝없이 끝없이 끝없이 끝없이 사랑한다는 말입니다. 그게 뭐예요?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까지, 절대권에 연결될 때까지 사랑해 달라는 말이예요.
그렇기 때문에 세상에서 제일 좋은 형용사를 무엇이 갖고 있느냐 하면 사랑이라는 거예요. 사랑만 갖고 있다구요. 절대적이라는 말이 사랑에만 맞지, 절대적인 생명이라고 해도 그거 실감이 안 납니다. '절대적인 사랑'할 때 실감이 난다구요. 그렇지요? '영원한 사랑' 실감나지요? '무한한 사랑' 실감난다구요. 이것은 우리 인간에게 본질적으로 최고의 이념, 으뜸되는 이념이기 때문입니다. 그것 전부 다 갖다 붙여도 조금도 모순 상충이 없습니다. '절-대' 이러지 '무-한' 이러지, '무한, 절대' (짧게 말씀하심) 이렇게는 말 안 해요. 안 그래요?
그렇게 볼 때, 사랑만이 멋지다구요. 그것이 무슨 사랑이냐 할 때 이것이 영원한 사랑이예요? 인간에게 영원한 사랑이 있어요? 백년도 못 사는데…. 영원한 사랑 있어요? 남자가 아무리 잘났더라도 백년도 못 산다고요. 여자, 암만 잘났다고 해도 백년도 못 산다구요. 그러면 그 무슨 뭐 영원한 사랑 봤어요? 그게 무한이예요, 유한이예요? 일세기 이내인데, 유한인데 무슨 무한이예요? 뭐 자기들 중심삼고 영원한 사랑 멋대로 죽도록 찾아다녀 보지…. 이 사기꾼 같은 사람들이 영원이 무엇이 영원이예요? 무한이 무슨 무한이예요? 무엇이 절대적인 거예요? 여기에 무얼 갖다 놓아야 되느냐? 하나님이라는 그분이 있다는 말을 갖다 놓고야…. 그분을 통해서는 이루어질 수 있다구요.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사랑한다고 해도…. 보라구요. 부인이 남편한테 떡 묻는데 대답하기를, 자기가 이만큼 절대적인 사랑을 하지만…. '하지만' 한다구요. '하지만 내 머리끝만큼 아직까지 미달이야' 할 때 기분 좋아요, 나빠요? 머리끝만큼은 아직까지 사랑 못 한다 할 때 기분 좋아요, 나빠요? 대답해 봐라 이 녀석들아! 사람을 사랑하는데, '요거만큼, 조금만큼, 머리끝만큼은 아직까지 사랑 못 해' 할 때는 좋아요, 나빠요?「나쁩니다」 고거예요, 고거. 그것도 원칙이예요. 그렇기 때문에 사랑의 본질은 절대적이라는 거예요.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요 머리끝 하나만이라도 몽땅 내 사랑 되라고 하지, 그것도 안 놓치려고 한다는 거예요. 사랑권내는 몽땅 좋아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의 손수건도 자기 생명과 바꾼다는 거예요. 그것을 몽땅 사랑할 수 있다구요. 그러니 그런 논리가 성립된다구요.
자, '그렇지만' 할 때는 안 되는 거라고 했는데, 그것이 무슨 말이냐? 나는 나를 위해 있다 하는 주장이 남아 있는 데는 완전한 사랑이 성립 안 된다는 말이라구요. 그렇지 않아요? '나'라는 관념이 있어 가지고, 나를 나로서 생각하는 무엇이 있다 하게 될 때는 아직까지 미급하다 그말이예요.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그게 그말이라구요. 나는 너만을 위해서 있다, 언제나 너를 위해서 존재하고 있다 할 때는 완전한 사랑을 할 수 있는 자리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돼 있어요. 알겠어요?
그렇기 때문에 진정한 사랑은 주고 기억하는 것이 아니예요. 그렇게 되는 거예요. 자기를 위하는 게 아니예요. 내가 저 쪽, 그를 위해 있어야지 자기를 좋아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알겠어요, 무슨 말인지? 진정한 사랑은 그를 위해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을 하고 나서 나를 생각해 가지고, 내가 너를 사랑했다 하는 그 자리로 가 가지고도 안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고 나서 부끄러움을 느끼는 사람, 그 이상 많은 것을 느끼는 사람은 사랑의 원칙에 합격자가 될 수 있지만, '내가 너에게 주었으니까, 사랑했으니까 너도 나를 사랑해야 된다' 하는 것은 이상적인 사랑의 원칙에 부합되지 않는 것입니다.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는 자식을 사랑해 주게 될 때 '내가 너에게 며카날 고무신 사 주고 옷 사 주고 너를 위해서 피땀을 흘렸는데. 그 가치는 몇천 몇백 몇십 전이다' 하며 치부(置簿)해요?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데는, 세상의 왕궁의 왕자 왕녀 이상 해주고 싶지만, 그 이상 해주고 싶은 마음을 느끼는 자리에서, '내가 정성 다해도 이것밖에 없으니 미안하다' 한다는 것입니다. 그 이상 더 좋은 것 해줄께 하는 마음을 부모는 갖고 있다는 거예요. 알겠어요? 그래서 부모의 사랑을 좋아하는 거예요. 여러분 그걸 알아야 돼요. 주고도 부족함을 느끼고, 사랑하고도 덜 사랑한 것이 있지 않겠나 하며 더 사랑하고 싶은 마음, 주고 나서 섭섭하고 안된 마음. 이러한 것이 있기 때문에 이것은 영원한 사랑과 통하는 본질에 속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그것이 사랑의 출발의 전통적 동기입니다.
창조는 손해보고 투입하는 놀음이다
왜 그러냐? 사랑은 어디서 나오느냐? 창조의 과정을 통해서 나옵니다. 하나님이 천지창조를 할 때 어떻게 창조했느냐? 창조한 것이 뭐냐 하면 대상을 창조한 것입니다. 대상을 창조하는 데는 대상이 자기보다도 더 좋기를 바라는 것이 창조자의 심정입니다. 다시 말하면 작자가 자기 구상보다도, 지어진 그것이 자기 생각하는 것보다 나았으면 하는 것이 창작자의 소원이 아니냐. 그것이 본성이요, 그것이 원리 원칙이예요. 그런데 그것이 마음대로 되느냐?
그러면 창조주도 자기 대신의 상대자를 만드는 데 있어서 자기가 구상하는 것보다 좋은 녀석이 나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겠어요, 안 했겠어요? 작가의 마음의 본질은 그래야 된다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사람을 지어 놓고 얼마나 하나님이 좋아했겠나 생각해 보라구요. 그 눈을 볼 때, 요게 까박까박하고 말이예요. 여기에는 천지의 박물적인 지식이 다 갖추어져 있습니다. 별이 있고, 해가 있고, 땅이 있고, 공기가 있고, 먼지가 나고, 이런 것 다 알았거든요. 전부 다 들어 있다는 겁니다. 그 하나를 만들더라도 그것 하나만 보지 않았다구요. 세계의 우주를 보았다는 것입니다. 손도 보라고요. 열 손가락으로 되어 있다구요. 여러분, 통일교회를 우습게 여길 것이 아니예요. 천지의 이치를 말하고 있는 거예요. 애기들이 자라날 때는 요렇게 되면…. (녹음이 잠시 중단되었음)
그걸 말한다구요. 천지의 운행 법도권내의 중심인 하나님이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원리를 따라 나오면 그 다음엔 주관하는 것입니다. 행사할 때는 이를 주관해야 되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안 된다구요. 눈도 먼저 초점이 맞아야만 보는 것입니다. 이성성상의 하나의 초점이 맞아야만 행복의 길, 모든 창조적 상봉의 요건이 벌어지는 겁니다. 이것 코가 여기가 막히면 안 된다구요. 터져 가지고 둘이 만나야만 좋은 것입니다. 귀도 하나뿐이라면 안 들린다구요. '윙-' 해 버린다구요. 이것이 삼반규관(三半規管)을 통해서 딱 들이 맞아야 되는 것입니다. 전부다 그렇게 돼 있다구요. 그것들이 전부 다 천지의 이치로….
자, 그러면 하나님이 제2대상을 정성껏 만드시는 데 있어 그 대상은 뭐냐 하면, 자기의 사랑, 내밀적 내성적인 본성의 사랑을 표현할 수 있는 최대의 직행코스입니다. 알겠어요? 여기에서 모든 것이 직선이 돼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인간과의 사이에 그을 수 있는 제일 똑바른 길이 뭐냐 하면 이 길이라구요. 사랑의 길은 돌아가지 않는다구요. 거기에 반대가 있으면 다 죽여 버리고, 전부 다 치워 버리고 가고 싶다구요. 제일 빨리 가고 싶다구요. 또 그게 빠르다구요. 내가 지금 미국 갔다 왔다 하면 생각은 미국 갔다 오는 거라구요. 또 영국도 갔다 왔다구요. 그런 생각보다 더 빠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면 가 가지고 돌아오려고 하지 않는다구요. 가 가지고는 살려고 하는 거예요. 끌려가는 거라구요. 나를 부정하고 가는 길이 사랑의 길이라구요. 그렇기 때문에 자기 시인의 자리가 아니예요. 사랑의 자리라는 것은 자기를 공인하고, 자기의 가치를 타진하는 자리가 아니라, 상대의 가치를 타진하는 자리입니다. 이렇게 된거예요. 알겠어요?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할 때 어떻게 했느냐? 만물을 짓는다는 것은 자기의 본질을 빼 내는 것입니다. 결국은 에너지를 투입했다는 것이고, 에너지를 투입했다는 것은 자기 본질의 삭감을 말하는 거예요. 알겠어요, 무슨 말인지? 손해보는 거라구요. 손해보는 자리라구요. 대상 창조의 이념의 세계는 사랑으로 말미암아 되었기 때문에 그 뜻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은 어떻게 하셨느냐? 투입하는 놀음을 하신 것입니다. 알겠어요? 투입하는 데는 그것이 자기에게 열매 맺히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상대에게 열매가 맺히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 무엇으로 지었느냐? 사랑으로 지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투입해 가지고 하나님이 소원(疎遠)함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만족을 느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이 원칙이 됨으로 말미암아 오늘날 사랑의 전통에 있어서는 부모의 사랑의 본질이 남아졌다 이겁니다. 알겠어요? 그렇기 때문에 자기를 투입해 가지고 자기 의식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자기 의식을 망각해서 보다 상대적인 목적이 이루어질 수 있는 가치 추구에 자기 전체가 흡수돼 들어가는 것입니다. 결국은 하나님도 창조한 사람을 위해 있는 자리에 서겠다는 말이라구요. 그것이 창조원칙이다 이겁니다. 창조원칙이라구요.
종교의 본질적인 노정은 자기몰각의 노정
그렇기 때문에 사랑의 길은 나 자신을 희생해서…. 사랑은 희생해야 되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왜 사랑은 희생하지 않고는 안 되느냐? 그것은 사랑의 본질이 남을 위하는 것이기 때문에…. 자기를 주장하는 데는 창조가 없다는 거라구요. 그렇지요? 출발의 상대권이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자기만 남아지는 거라구요. 자기만 남아져 가지고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 있는 거예요. 알겠어요, 무슨 말인지? 그것이 창조의 원칙이기 때문에 잃어버린 인간을 찾는 데는 하나님은 원리의 하나님이기 때문에, 원칙을 따라서 찾으려니, 인간 세상에 있어서 이 원칙을 적용하려니 악한 인간 세상이지만 희생하라고 해 가지고 지금까지 자기를 재차 투입한 것입니다. 얼마만큼 투입하느냐? 개인적으로 투입하고, 가정적으로 투입하고, 종족적으로 투입하고, 민족적으로 투입하고, 국가적으로 투입하고, 세계적으로 투입해 나오는 것입니다. 종교는 개인이 희생하고, 가정이 희생하고, 종족이 희생하고, 나라까지도 희생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나라도 종족권을 희생해 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세계의 국가 중에서도 종교를 믿는 국가는 지금까지 희생의 역사를 걸어오는 것입니다. 알겠어요?「예」 그것은 왜? 창조적 사랑의 대상이념을 이루기 위해서는 그것이 사랑의 본질적인 원칙이기 때문에 그 원칙을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과 일치될 수 있는 자리를 가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사랑의 이상세계와는 관계를 맺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의 이상세계와 관계를 맺으려면 그 원칙의 전통을 이어받지 않고는 안 되겠기 때문에 종교가 가는 길은 사랑이나 박애주의를 내세워 희생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알겠어요?「예」 천국과 지옥, 선과 악은 여기에서 갈라지는 것입니다.
타락이 뭐냐? 자기 자각으로부터 타락이 시작되었습니다. 천사장의 자기 자각으로부터 타락이 시작됐고, 해와도 자기가 눈이 밝아져 가지고 하나님과 같이 높아지겠다고 하는 '자기' 생각에서부터 타락이 시작됐고, 자기 자각에서부터 타락이 시작됐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 자각을 한인간은 그것을 포기하고 부정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천사장도 그랬고, 해와도 그랬고, 아담도 그랬고, 오늘날 그 후손 전부는 자기 자각을 중심삼은 악한 주권세계의 전통적 열매입니다. 알겠어요? 「예」 그것은 사탄이 되는 것입니다. 지옥에 가는 것입니다.
이 본질적인 내용이 달라져야 됩니다. 어떻게 해야 되느냐? 자기 자각이 아니라 자기 몰각(沒却)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상대 자각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 상대 자각이라고 하는 것은 무슨 자각이냐? 하나님, 주체 앞에 설 수 있는 사랑의 대상을 위한 자각입니다. 그렇게 하는 데 있어서 종교의 본질적인 노정이 형성되는 것입니다. 알겠지요?
싸우지 않고 정복하는 심정의 세계관
우리 인간은 대상이예요. 하나님이 사랑할 수 있는 대상이 되는 거예요. 하나님이 사랑할 수 있는 대상을 추구하여 자기 본질의 변경을 요구하게 될 때 거기에 자기가 주체가 못 되니 사랑할 수 있는 대상 앞에 상대적인 인간으로밖에 설 수 없습니다. 왜 그러냐? 그것은 아담 앞에 천사장이 인류의 조상이 되어 있지만 천사장은 종이기에 아들 앞에는 상대가 되어야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종교인이 가야 할 길입니다.
그래서 앞으로 오시는 메시아는 무엇이냐? 우리 종된 세계 앞에 있어서 주체적인 주인으로 오시는 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주체 앞에 절대 귀일되는 내가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나를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그를 위해서 있다, 이것이 창조원칙이라구요. 알겠어요? 사랑의 길은 그거라구요. 나를 위해서 있다는 것은 사랑의 길이 아니예요. 그렇기 때문에 남자는 여자를 위해 태어난 거라구요. 그래 남자가 이 세상에 남자를 위해서 태어났어요, 자기를 위해서 태어났어요? 잘났다는 남자야말로 자기를 위해서 태어났어요, 이렇게? 남자가 아무리 덩치가 크다 하더라도 말이예요. 그가 무엇 때문에 그렇게 태어났어요? 여자 때문에 태어난 거라구요. 남을 위해서 태어났다구요. 부모는 무엇 때문에? 자식을 위해서 태어났다구요. 살기도 남을 위해서 살아야 되는…. 자식은 무엇 때문에? 형제를 위해서, 부모를 위해서, 가정을 위해서 태어난 것입니다.
위하여 사는 세계가 이상세계입니다. (판서하시면서) 위하여 사는 세계, 알겠어요, 이상세계? 이상세계의 본질을 여러분이 알아야 돼요. 이상세계는 천륜의 원칙을 중심삼고, 천지창조의 제 1조 헌법에 의해 가지고 실현되기 마련입니다. 그것이 뭐냐? 사랑에 대한 규약이 천지창조의 제1조가 되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제1조라구요. 하나님이 세웠던 헌법을 실행하려니 그 제 1조를 먼저 이루어야 제2조가 이루어지고 다 이루어지는 거라구요.
하나님이 지금까지 뭘했느냐? 악한 세상 앞에 맞고 빼앗아 나온 것입니다. 맞고 나온 것입니다. 불효자 때문에 부모가 맞고, 지내고 난 후에 자식 때문에 그렇게 희생한 것을 그 자식이 깨닫게 되어서 그것을 갚고 가야 된다며 눈물을 흘리고 돌아서게 될 때 소망의 천국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요것이 종교가 본질로 추구하는 회개의 도리라구요. 그러니까,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다'고 한 거예요. 회개하지 않으면 천국에 못 간다구요. 알겠어요? 그렇기 때문에 맞고 빼앗아 나오는 것입니다. 맞고 지배해 나오는 것입니다. 사랑의 능력으로 다…. 그래서 예수님도 맞고 우리 세계를 구해 나온 것입니다.
통일교회도 맞고 빼앗아 나오는…. 통일교회는 맞았지만 발전해 나왔어요. 그렇지요? 여러분, 그걸 알아야 돼요. 대한민국이 앞으로 세계를 위해서 맞지만 세계를 보다 사랑하게 될 때는 싸우지 않고 정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심정의 세계관이라구요, 심정의 세계관. 알겠어요? 통일교회에서 '심정, 심정' 하는데 그 역사는 여기서부터 출발했다구요. 알겠어요, 모르겠어요?「알겠습니다」 알겠어, 모르겠어?「알겠습니다」
하늘의 슬픔을 위로해 드리는 아들딸이 돼야 한다
결론을 짓자구요. '아버님의 슬픔'이란 말…. 아버님의 슬픔이 뭐냐? 진짜 하나님이 6천년간 슬퍼한 것을 알았느냐? 진짜 알았느냐? 아까 말한 것과 같이, 얼마나 하나님이 아픔을 느끼고 오셨느냐? 사랑의 세계가 한번 틀려 버리면 천년 만년 잊을 수 없는 것이 아니겠느냐. 시일이 가면 갈수록, 반대의 세력이 커지면 커질수록 그 충격적인 자극이 있지 않느냐. 원수가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딸을 일시에 자기의 족속으로 만들어 가지고 하나님을 참소하고, 하나님을 몰라보고 하나님은 희생시키는 자리에 있을 때 하나님을 얼마나 상처가 심했겠느냐? 그 슬픔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찾아 나온 것은 오늘날 나 하나를 위해서, 나 하나의 해방을 위해서 역사적인 수난길, 시대적인 수난길을 거치며 미래적인 소원, 단 하나 일편단심의 마음을 품고 나오는 하나님이 아니냐? 그 슬픔을 알아 드릴 수 있어야 된다구요. 알았어요? 「예」 얼마나? 눈이 뽑혀져 나오도록 그려 봤어요? 여러분, 한 번 죄를 회개하고 울어 봤어요? 밸이 꼬이도록, 눈물 콧물 입물 할것없이 진구렁이 돼 가지고 뭐 대학교수고 대통령이고 나 모르겠다, 뭐 체면이고 위신이고 나 모르겠다, 그래 봤어요?
이제 소원성취의 그날, 잃어버렸던 부모를 찾는 그 이상과 희망이 어디 있겠느냐 이겁니다. 그래 봤어요? 자, 하나님을 사랑 한번 해봤어요? 여러분이 사랑하겠다는 말이, 그저 이거 권위와 그 위치를 생각할 때 가증스럽다는 겁니다. 자, 저기 노동자의 여편네가 돼 가지고 말이예요. 대통령을 대해서 '저 대통령을 내가 남편같이 사랑한다'고 그럴 때 그 대통령이 된 사람 같으면 일방적이라 기분 나쁠 거라구요. 한 나라도 그렇거든 오늘날 하나님도 그럴 거예요. 우리 타락한 인간은 역적의 피를 받은 인간이라구요. 역적이라구요. 역적의 피를 받은 이것을 극복하는 데 있어서 여러분들이 '아버지' 할 때 아버지의 내용을 가졌어요? 가졌어요, 못가졌어요? 여러분 이거 심각한 문제라구요.
자, 이러한 전반적인 문제를 두고 볼 때, 하나님이 나를 위해서 눈물을 얼마나 흘렸을 것이냐 이겁니다. 개인 위해서 흘렸고, 가정 위해서 흘렸고, 종족, 민족, 국가, 세계로 발전시킬 때까지, 기반을 닦아 나오면서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 눈물 가운데 소원하였던 모든 것의 대표자는 하나의 완전한 남자요, 완전한 여자입니다. 예수는 고맙게도 신랑 신부라는 말을 여기에 귀결시켰기 때문에, 기독교 문화는 세계를 대표할 수 있는 하나의 승리적인 터를 마련한 것이 아니냐. 하나님은 눈물 가운데, '내 사랑하는 아들딸, 아담 이상 되는 아들아, 해와 이상 되는 딸아'할 수 있는 아들딸을 찾기 위해서 눈물지은 것이 아니더냐.
그러한 아들딸을 찾기 위하여 수난길을 걸어 나온 하나님 앞에, 내가 망하더라도 그러한 아들이 되고 딸이 되겠다고 몸부림치면서, '당신이 소원하던 아들이 이렇고, 딸이 이렇지 않습니까? 세상은 모르더라도 나는 이러한 자리에 서겠습니다'하면서, '불쌍한 아버지!' 하며, 자신을 망각한 자리에서 옷깃을 붙들고 목을 끌어안고 통곡하는 날에는, 하나님도 진짜 그를 붙안고 운다구요.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여러분, 그건 진짜 이 땅 위에 나라를 가졌던 주권자가 나라가 망하는 슬픔을 느끼는 그 이상의 슬픔이라구요. 알겠어요?
참된 아들딸이라면 하나님을 위해 수난길을 가야 된다
아담과 해와를 잃어버리는 것은 나라뿐만 아니라 천주가 망해 나가는 자리입니다. 개인 아들딸이 망하고, 자기 가정이 망하고, 자기 국가가 망하고, 세계가 망하고, 천지가 망해 자빠져 나가는 자리입니다. 이래 가지고 망명객의 신세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 하나님 아버지 아니냐. 알겠어요, 무슨 말인지? 망명자라구요. 알겠어요?
그러면 그 나라에 있어서 망명객의 입장에서 볼 때, 쫓겨난 군왕의 입장에서 볼 때, 자기를 제패하고 자기를 치고 백성을 지도하는 거기에 하나되기를 원할 것이냐, 데모하는 걸 원할 것이냐? 모가지가 잘려 나가더라도 하나되지 말라고 주장하는 거라구요.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는 순교의 피를 흘려 나왔다구요. 아무리 피를 흘리더라도 한탄하지 말고, 피를 흘리더라도 선전하라. 그런 사상이라구요. 그렇기 때문에 로마제국의 4백년 압박시대에도 망명객의 입장에 있는 하나님이 악한 세계의 주권에 대항하는 그날들은 하나님의 소망, 하나님의 소원성취의 자극의 시간이었더라 이겁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반대하고 나서면 나설수록, 투쟁하면 투쟁할수록 내일의 소망을 촉구시켜 주는 자극적인 터전이 그 순교의 자리더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런 하나님을 위로하면서, '당신이 있기 때문에 나는 응당히 가야 될 길로 갑니다' 이렇게 죽어 가는 사람이 얼마나 많았느냐 이겁니다. 욕심을 품고, '하나님이여, 나는 요렇게 죽기 때문에, 나는 요렇게 하나님을 위해 죽었기 때문에, 그 대가로 나를 천국 보내 주소?' 하고 죽었지, '당신의 나라를 이루고 당신의 아들딸을 해방시키기 위해서 나는 죽습니다' 하는 사람은…. 알겠어요, 무슨 말인지? 그 역사 앞에 반대되는 기독교는 하나님 앞에 배척받는 겁니다. 복귀시대에 있어서는 하나님이 피땀을 흘리며 수고할 때가 있지만, 언제나 수고와 희생으로 남아지는 하나님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죄를 책임지고 그 소원을 들어줄 수 있는 자리에 있어서는 내쫓기고, 죽을 자리에 들어가서도 인간을 구해 주었지만, 그 후에는 하나님을 위한 수난길을 내가 가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효자는 세계를 위하여 가는 아버지의 짐을 대신 져야 됩니다. 그래야 효자라구요. 군왕이 가고 있는 수난길을 책임져야 충신이 됩니다.
여러분 그래요. 오늘날 기독교에서 '하나님이여, 우리 아들딸 복 주소? 이런 기도하는 데는 가지 말라 이겁니다. 그렇게 목사가 기도하면 뒤로 돌아서 가라는 겁니다. 그것은 무슨 말이냐? 언제나 하나님을 종으로 만들자는 거라구요. '하나님이여, 우리 앞에는 복이 필요 없습니다. 복은 세계 사람에게 주시고, 내 앞에는 사망을 주시옵소서. 죽을 자리를 주시옵소서' 이게 참된 아들딸이 갈 길이라구요. 알겠어요? 우리 통일교회 젊은 놈들, 알겠어?「예」 나라를 위해서 희생하려고 하고, 세계를 위해서 희생하려고 해야 된다구요. 내 아들딸 잘살게 해 달라고 하고, 내 아들딸 사랑해 달라고…. 우리 통일교회는 그러지 말자는 거라구요.
선생님은 지금까지 그런 기도 안 해요, 지금까지. 어머니, 아버지가 뭐 이북에서 공산당들한테 피살당한 줄로 짐작하지만 언제 하나님 앞에 영계를 통해 물어 본 적이 없다구요. 나라를 위해서 바쳐야 돼요. 충신이 되기 위해서는 자기 어머니 아버지를 잡아서, 하늘 나라를 위해서 제사 드려야 된다는 겁니다. 그거 이해가 돼요? 자기 아들딸이 아니라구요. 어머니 아버지까지도 잡아 제사드릴 수 있겠느냐? 나라를 위해서는…. 만약에 그가 그 나라의 주권자가 되었으면, 어머니 아버지를 죽여서라도 나라를 살릴 수 있다면, 어머니 아버지를 죽을 자리에 내세워야 되는 것입니다. 그 나라를 위한 주권자, 책임자의 자리에 있으면…. 그래요, 안 그래요? 「……」이렇게 심각한 길이라구요. 자기 아들딸 그건 아무것도 아니예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인류를 사랑하고 부모님을 사랑하라
통일교회는 그런 전통적인 역사를 따라 나오기 위해서 출발한 거라구요. 여러분이 그걸 알아야 돼요. 얼마나 나라를 생각하고, 얼마나 백성을 사랑하고,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해 봤느냐? 슬프신 하나님을 얼마나 위로해 봤느냐? 꼬리를 저으며 대가리를 들고 다니면서 자기 이익을 위해 눈을 깜박깜박하며 옆으로 빠지고 뒤로 후퇴하는 사람은 많지만, 하나님의 슬픔을 붙안기 위해서 민족의 한을 책임지고, 이 나라에 하나님이 찾아오실 수 있는 길이 있다면 그 길을 위해서 내가 선발대로서 죽음을 당하고 상처를 입을 수 있다는 응당한 각오가 돼 있느냐? 그게 의문입니다.
오늘은 8월 첫주일이예요. 8월은 재출발의 달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우리 통일교회 교인들, 이러한 문제에 있어서, 다시금 반성하고…. 하나님을 사랑해 봤어요? 진짜 우리 식구를 사랑해 봤어요? 사랑해 봤어요? 「……」응? 선생님을 사랑해 봤어요? 뭐 선생님을 사랑하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이 고깃덩이 사랑하라는 사람이 아니라구요. 선생님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인류를 사랑하고 나서 통일교회 문선생님을 사랑하라고 가르쳐 주고 있다구요. 가정에 대한 교육도 그거라구요. 여편네에 대한 교육도 그거라구요. 자식에 대한 교육도 그거라구요. 아버지가 자기를 위해 살다가 죽는 아비가 되거들랑 아예 울지도 말고, 장사도 지내 주지 말고, 냅다 차 버리라는 거라구요. 남편이 그런 남편이면 남편으로 생각하지 말라는 거라구요. 그게 가훈이 돼 있다구요.
우리 아버지가 하나님을 누구보다도 사랑하려고 했는데, 우리 아버지 이상 그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할 사람이 아직까지 없기 때문에 운다고 해야 됩니다. 세계 인류를 누구보다 사랑하려고 하다가 죽었을 때 그 이상 사랑할 수 있는 주인이 없어졌기 때문에 죽은 아버지를 붙들고 울 수 있다면, 그런 아버지를 가진 아들딸은 망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이게 통일교회의 본질적인 전통의 역사로 알고 있는 거라구요.
그러면 여러분들이 나라를 위하여 눈물을 흘려 봤느냐? 형제를 위해서 얼마나 눈물을 흘려 봤느냐? 그 눈물 흘리는 것이 효의 길이요, 충의 길입니다. 아버지가 눈물을 흘리고 오는 길이기 때문에 수난을 당하고 오는 길이기 때문에 그 입장을 바꿔 가지고 내가 거기에서 하나될 수 있게끔 하는 것이 아버지를 위한 효의 길이 아니냐. 그렇기 때문에, 화목케 하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는다고 했지요? 화목케 하는 사람이 되라는 거예요. 그래야 하나님이 오실 수 있다구요. 오늘날같이 싸우는 거기에는 하나님이 올 수 없다구요. 그래서 통일교회는 맞고, 맞으면서도 하나되자는 것입니다. '형님, 형님, 때리는 것은 좋소. 그렇지만 우리 가정과 나라를 생각해야 될 것이 아니요?' 하면서…. 원한이 있다면 그것은 일대일의 원한이 아니라 역사적인 인연으로 남아지기 때물에, 한 번 잘못하면 후대 후손 신앙자들의 역사가 무너지기 때문에, 맞는 채찍을 붙들고 그러지 말라고 눈물로 호소하자 하는 것이 통일의 길이라구요. 통일방안은 그것밖에 없다구요.
진정한 사랑은 위하고 용서하는 것
통일교회 문선생의 입장에서 보면 기성교회 목사, 장로들은 내 원수라구요. 내 본래 성격 같으면 용서 안하는 거라구요. 어렸을 때 한 번 매 맞고는 그 집을 40일 동안 쫓아다녀 그 어머니 아버지까지 전부 다 항복 하는 걸 보고야 물러난 사람이라구요. 내가 불을 놓든가 전부 다 무슨 놀음이 벌어지는 거예요. '한다' 하면 세상에 누가 오더라도 말리지 못한 사람이라구요. 지독한 사람이라구요. 그런데 왜 그러한 사람이 이처럼 묵사발이 돼 가지고 못난 놀음을 하느냐? 못난 사람이 아니예요. 그거 다 알기 때문에…. 선생님이 이 목사들을 전부 다 수택리까지 데려다가 고기 반찬에다 잘 먹여 주고 그랬는데 이게 목사들이 닭다리를 가지고 싸움하고, 닭을 갖다 훔쳐 가지고 다니더라구. 그런 사람들을 내가 데려다가…. 나는 우리 통일교회의 피와 살을 에어서 하는 건데. 기가 막힌 거라구요. 선생님이 말한 대로 딱 됐다구요. 악이 선을 쳐서 남아지는 법이 없고, 선이 악을 쳐 가지고 악이 망하지 않는 법이 없지 않느냐. 통일교회를 반대하던 목사들이 우리가 고생하던 그 길을 딱 가는 것입니다. 딱 그렇게 됐다고요.
이제 그걸 알았으니…. 그렇게 되었더라도 여러분이 문제라구요. 여러분 그걸 알아야 돼요. 그러면 여러분, 오늘날 통일교회는 요셉과 같은 마음을 가져야 돼요. 요셉이 애급에 가 가지고 총리대신 될 때 전부 다 흉년이 들어 형제들이 쌀을 구하러 두 번씩이나 왔다 갔으나 형제들을 대해, 저들은 나를 팔아먹은 자들이라고 하지 않았어요. 요셉은 죽으라고 물 없는 웅덩이에다 갖다 넣었어도 형님이 권고해 줘 가지고 살았고, 나중에는 보디발의 집에 들어가서 몰려 가지고, 간교에 꾀여 가지고 감옥에 가는데, 죽을 자리인 그 감옥에서부터 길을 닦아 출세해 나옵니다. 그렇지요? 감옥에서부터 출세했다구요. 생각하면 뼈가 갈리고 이가 갈리는 사건이다 이겁니다. 그렇지만 요셉은 분을 안 품었다구요. 형님들 대해 분풀이한 것이 아니라구요. 내가 고향에 없어서 부모 앞에 효도 못할 때, 그래도 저 형님들이 내가 사랑해야 할 어머니 아버지를 사랑하지 않았느냐, 어머니 아버지 앞에 효도한 역사적인 전통을 갖고 있으니 나보다 낫지 않느냐 하는 심정적인 효의 마음을 갖고 형제들을 용서했다는 거예요.
나도 마찬가지라구요. 통일교회 문선생이 나오기 전에 기독교가 하나님 앞에 효도한 것이 있지 않느냐? 하나님의 사랑의 심정을 보게 될 때 그들이 종과 같은 입장에 있기 때문에 그들에게 분풀이 안 한다구요. 그 반대한 것, 지금까지 단에 서서 그런 것…. 이제 우리 통일교회도 마음만 먹으면 무슨 짓도 다 할 수 있다구요.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천대를 받으면서도 문전에 가서 쫓겨나면 또 가고 또 가고 또 가고…. 이러면서 지금까지…. 그래도 이제는 어디를 가든지 우리 통일교회를 반대해도…. 그렇잖아요? 자기네들이 아무리 욕하고 뭐 다 그래도, 종교인들이 하는 것 보나 너무 했거든요. 지나치게 했으니까 자기를 반성할 수 있는 입장이 됐기 때문에, 이제는 점차로 통일교인들을 박대 안 하고 환영하는 무리들이 많아져 간다구요. 이제 우리는 교육해야 된다는 겁니다.
또, 국가 국민도 우리에 대해서 그러는 거라구요. 뭐 별의별 뭐…. 지금도 그저 조총련의 돈을 갖다 쓴다고 악선전하고 있다구요. 통일교회가 조총련이예요? 지금 조총련 때려잡기 위해서 선두에 서서 일본 천지가 지금…. 대사관이 업혀 가지고 전부 다 이 놀음하고 있는데…. 그놈들 아가리 찢고, 쓰레기통에 전부 다 쓸어 넣어 버리고 싶지만. 이 종교의 입장이 그렇게 안 돼 있습니다. 못 들은 척, 모르는 척하고 있는 거예요.
그건 왜냐?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얼마나 비참하냐 이겁니다. 형제끼리 싸우는 데에는 하나님이 오시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 길을 거쳐 나가야만 되는 거예요. 그런 의미에서 형제를 사랑해 봤어요? '내가 조금 더…. 누가 다섯 시간 잤으면 나는 다섯 시간 십분, 좀 더 자야지. 누구보다 난 조금 덜 수고해야지' 요러는 것들은 전부 다 지옥 쓰레기감들이라구요. 천국은 여기서 나오지 않는다구요. 남을 위해서 내가 십분이라도, 일분이라도 더 하겠다고, 일분이라도 더 하겠다고…. 공부를 해도 그렇게 해야 된다구요. 공부를 해도…. 뜻을 알고 있는 여러분들이 만약에 학교를 다니며 공부를 하더라도, 대학교 가 가지고라도 자기가 지방에 나간 전도사 이상의 시간을 내서 전도하는 입장에 서 가지고 실적을 나타내어 양심적으로 가책받지 않겠다는 자리에 서야 그것이 정당한 입장이라구요. 조건이 되는 거라구요. 이게 원칙이예요.
조건을 남겨 주기 위한 것이 하나님의 가는 길이요 부모님의 길
자, 이런 가운데서 하나님의 슬픔을 알았을진대는, 그 슬픔의 길을 걸어 밤이나 낮이나 세계로 갈 것인데, 이것을 누가 막을 것이냐 하는 문제를 여러분과 우리 통일교회가 책임져야 되겠다구요. 알겠어요, 무슨 말인지?
남북한에 지금 이런 문제가 벌어지면 국가를 놓고 우리는 기도해야 된다구요. 세계를 붙들고 기도해야 된다구요. 그야말로 이제부터 어떡하든지 사생결단을 해야 할 최후의 전선을 앞에 놓고 총궐기하지 않으면 안 될 때가 된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다구요.
그것을 넘어갈 수 있는 단 하나의 비법이 무엇이냐? 하나님의 슬픔을 알고 나서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쓰러지더라도 그 전선이 약화되는 것이 아니라 강화되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무슨 말인지? 전선은 강화된다 이겁니다, 하나님이 살아 있기 때문에. 오늘날, 이 끝날 세상에서 우리가 소망을 가질 곳이 없지 않으냐? 그래도 세계가 모르는 하나의 움직임이…. 이것은 인본주의 사상이 아니라구요. 하나님을 중심삼은 심정주의 사상을 가지고 나온 것은 역사시대에 처음이 아니냐. 그렇기 때문에 이 주의는, 이 사상은, 이 움직임은 세계를 제패하고도 남을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여러분이 어머니 아버지를 진짜 사랑했어요? 부모를 사랑하지 말라는게 아니라구요. 사랑해야 된다는 거예요. 선생님은 원리 말씀을 중심삼아 가지고 부모한테 얘기 못 했어요. 우리 형님은 영계를 통해 가지고, 자기의 동생인 나에 대해서, 자기 동생이 세계 제일이라는 것을 알았다구요. 다 통하는 거예요. 해방될 것 다 알고, 자기가 병난것도 약 안 쓰고 하늘의 은사로 고친 사람이라구요. 그렇기 때문에 자기 동생이 무슨 말을 하더라도 동생의 말에는 절대 순종했다 이겁니다. 내가 필요해서 집을 다 팔라고 하더라도 이의가 없었다구요. 피난 보따리를 싸 가지고 떠나 자고 해도 이의가 없었다구요. 그런 의미에서는 가인을 복귀했다는 겁니다. 훌륭하신 형님이었다구요. 그렇지만 동생에 대해 그러한 무엇을 영계의 가르침을 받아 가지고 알았지만, 나한테 대해서 묻지 않으면 내가 얘기 안 했어요. 원리말씀 한마디 안 해줬다구요. 기가 막힌 놀음이라구요, 그게. 자기의 가치가 얼마나 크다는 것을 자기의 사랑하는 부모 형제 앞에 자랑하여야 할 텐테, 부모 형제 앞에 자랑할 처지가 못 되었다 이겁니다.
예수님이 자기 형제들을 사랑했어요? 어머니 아버지한테 사랑받았어요? 모든 내정적인 사연을 이스라엘 민족에게도 얘기하지 못했다 이겁니다. 하나님이 지금까지 아벨을 통해서 자기의 사연을 통했어요? 못 했다구요. 예언자를 내세워 가지고는 가인을 통해 가지고…. 가인에게 가르쳐 준 후에야 아벨을 통해서….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사랑이라구요. 자기 아들딸을 죽여 가지고 원수의 자식을 구해 주겠다니 사랑이라는 겁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6천년 복귀역사가 아니냐. 이런 문제를 두고 볼 때, 여러분에게 있어 지금은 어떤 때냐? 그런 때가 아니예요. 여러분이 어머니 아버지를 위해서 사랑할 수 있다구요.
선생님이 효하지 못한 그 효를 대신 해 달라는 거라구요. 여러분이 형제를 대해서, 선생님에게 그런 형제가 있지만 선생님이 형제를 사랑 못한 것을 탕감복귀하라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수고한 것을 전체가 넘어갈 수 있는 하나의 조건으로 남겨 주기 위해서 길을 닦아 나왔으니 여러분 시대는 탕감시대가 아닙니다. 이 조건을 남겨 주기 위한 것, 이것이 하나님이 가는 길이 아니냐 이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민족에 대해서 그런 입장의 해방권을 만들어 주자는 겁니다. '좋은 것 있으면 내 것? 그것은 빼앗긴다구요. 주는 데는 망하는 법이 없다구요. 내가 전부 다 주려고 하는 이것을 하나님은 '지극히 작은 소자에게 행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다'라고 하시는 거예요. 그렇게 행하게 되면 그것은 전부 다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때문에 하나님은 내 뒤에서 내가 걸어가면 나를 밀어 준다 이거예요. 알겠어요? 원수는 뒤로 오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앞으로 오지 않고 뒤로 오는 것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은…. 방향을 찾는 과정에서 전진할 수 있는…. 내가 죽게 되었더라도, 죽을 자리에 있는 나를 구해 주더라 이겁니다. 이런 길이 틀림없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통일교회 문선생은 지금까지 죽지 않고 살아 남은 거라구요. 또 아무리 핍박이 있더라도 망하지 않고, 또 내가 낙망하지 않고 나오는 것은, 이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 모를 거라구요.
하늘의 슬픔을 탕감해 드리자
이제 몇 년 안 가면 내가 외국에 나가 있으면 대한민국이 섭섭해 할 거예요. 반대하다가는…. 내가 광고를 내고…. 조금만 더 가면 그럴 날이 올 것입니다. 한국에 대한 책임을 다했어요. 다했다구요. 이젠 다, 어느 애국자에게 지지 않을 놀음을 다했다구요. 그것은 하늘이 공인하고 있는 거라구요. 이제 통고밖에 남지 않았다구요, 통고. 통고밖에 남지 않았다구요. 통고하는 날에는 그 나라에 소망이 깃들 것이요, 우리 대한민국도 환영할 것입니다. 그때가 되거들랑 통일교회 문선생이라는 사람의 가치가 올라갈는지 모른다구요.
여러분, 우리는 이 대한민국만을 위해서 싸울 때가 아니예요. 이제는 미국을 요리해야 된다구요. 미국은 200년 동안의 역사를 통해서 하늘이 축복한 나라입니다. 야곱의 20년 시대와 맞먹는 200년 역사예요. 요 1976 년까지가 건국 후 200년 역사와 마찬가지라구요. 200년 동안 하늘이 고이 길러 줬다구요. 200년이 넘어서는 그때에 가 가지고는 미국이 책임을 못 하게 되면 들이맞는다 이겁니다. 그것은 원리적으로 그렇게 돼 있다구요. 그것을 알기 때문에 미국을 수습해야 되겠다 이겁니다. 지금 그것을 느끼고 있다구요. 그래서 이 미국의 뉴욕 본부를 사는 데도, 백만 달러 가까운 돈을 들여서 사는 데도 내가 배후에서 세계를 움직여 가지고 사 놨다구요. 교육을 해야 되겠다구요. 앞으로 통일교회 책임자들은 여기서 싸우는 것보다 이제는 국제 무대에서 싸워야 되겠다 이겁니다.
자 그러려고 하는데 그 나라에 가서 신세지려 하면 여러분을 절대 안 데려갑니다. 신세지는 여러분은 절대 안 데려간다 이겁니다. 그 나라에 가서 신세를 지워야지요. 자기 집을 팔아 바치고, 자기 나라를 하늘 앞에 바치더라도…. 그대들의 은덕을 못 잊겠다고 할 수 있는 사랑의 심정을 가진, 메시아적 사명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고는 못 간다 이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사람은 나라를 사랑해야 되는데, 그러려면 거기에서 증거가 될 재료가 무엇이냐? 대한민국에서 그렇게 살아라 이겁니다. 앞으로 공산당한테 우리는 선전해야 되겠다구요. 저 공산당 이상 사랑했다는 재료를 가져야 되겠다구요. 이런 등등의 문제를 가지고 여러분이 다년간, 오랜 역사적인 과정을 통해서 미래를 향해 나왔기 때문에, 그 과정에서 실적이 나타나지 않았을는지 모르지만, 이제 목전에 결과가 나타날 수 있는 때가 왔으니 여러분이야말로 이제 다시 한 번 빛나는 싸움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어요.
문제는 하나님의 슬픔을 탕감해 드리자는 겁니다. 하나님의 슬픔을 탕감해 드리자.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를 위해서 눈물을 흘린 대신 우리는 형제를 위해서, 국가를 위해서 눈물을 흘리고 세계를 위해서…. 이런 책임을 수행할 수 있는 무리가 세상에 나오게 되면 그 무리는 망하지 않는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어요. 그 후손은 틀림없이 발전할 것입니다. 여러분 당대에는 물론 비참한 역사적인 무엇이 있을는지 모르지만, 지금 끝날이 왔기 때문에 당대에 두 세계를 심판하고 한 세계를 건국할 수 있는 시대가 온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고, 이때야말로 역사적인 시점인 것을 알고, 하나님 앞에 효자가 될 수 있고, 충신이 될 수 있는 이때인 것을 알고 하나님을 위로하는 여러분이 되어 주기를 바라서 말씀했어요.
기 도
아버님, 삼팔선을 넘어오면서 그 가운데 서서 아버지 앞에 기도하던 날이, 그 시간이 엊그제 같지만 수십 년 역사가 지난 이때에, 아버지, 당신의 뜻을 대하여 나선 저희의 무리가 이렇게 초라하고, 이렇게 미흡한 것을 생각할 때, 당신이 바라는 소원이 크면 클수록 통일교회를 바라고 오신 아버지의 마음이 낙망이요, 슬픔이요, 고통이요, 몸부림밖에 없을 것을 생각하게 되옵니다. 제가 통일교회를 만들어 이끌어 나오는 이 기반이 아버님에게 위로가 못 된 것을 더더욱 느끼게 되옵니다. 더더욱 아버지의 마음을 상하게 할 수 있는 자극적인 것이 되었고, 더더욱 아버지의 염려를 넓힐 수 있는 내용이 되었던 것을 생각하게 될때…. 그러나 당신에게는 우리밖에, 이 땅 위에 그 누구도 없기 때문에 우리만을 붙들지 않을 수 없는 아버지의 입장이 지극히 지극히 불쌍하다는 것을 저희들은 알고 있습니다.
아버님, 오늘 8월 첫 안식일을 맞이했사옵니다. 이달이 아버지 앞에 복되게 허락하여 주옵소서. 불쌍한 것들이 안간힘을 다해 나라와 세계를 위해서 하나님의 심정을 붙들고 싸워 나온다고 했지만, 그 모습이 처량하고, 그 모습이 추하여 당신 앞에 어떻게 이것을 가릴 것이냐 하는 부끄러움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그렇지만 아버님을 위하는 마음을 가진, 전통을 아는 통일의 몇몇 무리가 있기 때문에 그들을 통하여 잊고자 하는 아버지의 마음을 알면 알수록 당신은 불쌍하신 분이시고, 비참하신 분이심을 느끼옵니다. 오늘날 세계에 우리만큼 잘난 사람이 없어서, 저희들을 상대하고, 저희들과 더불어 세계적인 모든 계획을 하고 천주사의 한을 논의하지 않으면 안 될 아버지는 지극히 불쌍한 아버지이심을 알았습니다.
여기에 그 어떤 잘났던 역사적인 지배자라도 당신 앞에 부족함을 깨달아야 할 것인데도 불구하고, 우리같이 아무것도 아닌 것들을 이끌고 지금까지 버리지 못하시는 아버지의 딱한 사정을 생각하게 될 때에, 우리는 아버지 앞에 선포해야 되겠습니다. 통일교인을 보내 가지고 통일교회 이상의 당신의 뜻을 이를 수 있는 곳이 있거들랑 어서 옮겨 가시라고 저희는 기도해야 되겠습니다. 나는 망하더라도 당신의 뜻과 당신의 심정은 안위의 자리를 빨리 가져야 할 것임을 알았기 때문에 그럴 수 있는 자리를 저희들은 바라야 되겠습니다.
세상이 어떻든 우리만이 출세하고 우리만이 성공을 바라는 그런 무리들이 되어서는 안 되겠사옵니다. 그런 무리의 욕망을 이루어 주는 아버지가 아닌 것을 알았기 때문에, 이제 저희는 더 희생해야 된다는 신념이 강해지는 통일교인이 되어야만 되겠습니다. 그래야만 금후에 통일교회의 미래는 남아지는 것이요, 통일교회는 아버지의 뜻과 더불어 남아진 전통의 역사를 기릴 것을 생각하게 되옵니다. 지금까지 지켜 나온 아버지의 은사를 고맙게 생각합니다.
이제 이 세계적 무대를 아버지께서 지켜 주셔야 되겠습니다. 아버지, 3차 순회노정 위에서 편성해 놓은 세계적 기동대를 아버지께서 지켜 주셔야 되겠습니다. 이 이름이 상실되고, 이 이름이 수치를 당한다면, 그때는 이 땅 위에 당신의 절망이 얼마나 클 것인가를 생각하게 될 때, 아버지여, 아버지의 마음이 상심받지 않기를 바라는 저희 심정을 보시사 여기에 아버님이 직접 같이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가는 길 앞에 당신이 현현하시옵고 당신의 뜻을 이루시옵소서. 만민 앞에 그 가슴 가슴에 새로운 생명의 인연을 심고 남을 수 있는, 아버지의 인연과 아버지의 관계가 맺어지게 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 저희들은 이 시간 겸손히 아버지 앞에 엎드려서 스스로 반문하게 허락하여 주옵소서. 아버지를 내가 사랑했느냐 하는 데 대한 증거를 받아야 되겠습니다. 나라를 사랑했느냐? 증거를 받아야 되겠습니다. 형제를 사랑했느냐? 증거를 받아야 되겠습니다. 아버지의 공의의 심판정 앞에 나타나기 위해서는 증거될 재료가 필요하지 않습니까? 악을 대한 것보다도 선을 대했던 실증적인 증거가 있어야만 아버지의 보호권 내에 설 수 있는 것이 천리 원칙인 것을 알았기 때문에, 스스로를 망각하고 아버지가 남길 수 있는 사랑의 길을 더듬으면서 봉사를 해야 되겠사오니, 일편단심으로 부모를 위하는 효의 마음, 나라를 위하는 충의 마음만 갖고 나가는 당신의 아들딸이 되게 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남북이 엇갈린 입장에서 통일을 논할 수 있는 자리는 지극히 비통한 자리인 것을 알았습니다. 당신이 주인이 되시옵소서. 당신이 이끄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금후에 통일교회가 갈 길을 아버지께서 맡아 주시옵소서. 수난길을 마다하는 것이 아니요, 승리할 수 있는 아버지의 안식의 심정의 터전을 넓히고자 하는 것이 이들이 원하는 것이요, 이들을 지도하고 있는 이 자식의 원(願)이오니, 부디 그럴 수 있는 자리에서 모든 싸움과 모든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무리가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오늘 당신의 이름과 더불어 모이는 곳곳마다 축복하여 주시옵고, 세계에 널려 있는 당신의 불쌍한 자녀들이 이곳을 흠모하는 그 마음에 천만 배의 은사를 가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달과, 이해와, 이 세대가 복될 수 있게끔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말씀 참부모님의 이름으로써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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