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그래도 ‘최순실’ 터졌는데…朴, 왜 논란의 지소미아 집착했나 [박근혜 회고록 3]
박근혜 회고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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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대통령에 취임할 무렵 한국의 미래를 위해 임기 중에 반드시 실현하겠다고 작심한 사안이 몇 가지가 있었는데, 한·일 간의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General Security of Military Information Agreement, 지소미아)가 그중 하나였다.
2014년 3월 26일(한국시간) 핵안보정상회의 개최지인 네덜란드 헤이그 미국 대사관저에서 한·미·일 정상회담이 열렸다. 미국의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주최하는 형식으로 열리는 이 회담에서 박근혜 대통령과 아베 신조 일본 총리 등 3국 정상은 북핵 및 핵비확산 문제에 관해 의견을 교환했다. 중앙포토
2016년 3월 31일(현지시간) 워싱턴에서 열린 한·미·일 3국 정상회의는 북한의 4차 핵실험(2016년 1월 6일)이 얼마 지나지 않은 때여서 분위기가 무거웠다. 북핵을 억제하기 위해 세 나라가 어떻게 조율하고 공조할 것이냐에 초점이 모아질 수밖에 없었다.
“北 도발 억지에 필수” 지소미아 팔 걷어붙인 오바마
매일 달리는 차에서 김밥…식탁에 앉자 어지러웠다 [박근혜 회고록 4]
박근혜 회고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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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이후 18년간 세상과 거리를 두며 살고 있던 나를 정치의 무대로 이끈 결정적 계기는 1997년 연말 IMF 사태였다.
평소 같으면 크리스마스 시즌을 맞아 성탄 트리와 캐럴로 한창 들떠야할 서울 도심이 당시 국가 부도 때문에 무척 썰렁했다. 그 장면을 보고 “아버지와 국민들이 어떻게 일으켜 세운 나라인데 이 지경이 됐나” 하는 비감한 심정에 잠겨 눈시울을 붉혔던 기억이 난다.
그 무렵 대선을 목전에 두고 한나라당에서 영입 제안이 들어와 신중히 고민했는데, 국가 위기를 극복하고 나라를 다시 반석 위에 세우는 데 내가 기여하지 못한다면 나중에 굉장히 큰 후회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한나라당의 제안을 수락했다.
2004년 3월 24일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가 당 현판을 들고 천막당사로 이동하고 있다. 당시 한나라당은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탄핵 역풍으로 위기에 처해 있었다. 중앙포토
2004년에도 위기가 찾아왔다. 당시 탄핵 역풍을 맞고 한나라당이 수렁에 빠지자 그해 4월 총선을 한 달도 안 남겨 놓고 나에게 당을 맡아 달라는 요청이 여기저기서 들어왔다. 정치적으로 굉장히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당원들의 기대를 저버릴 수 없었다. 나는 몸을 사리지 않고 한나라당 대표를 맡아 천막당사에서 17대 총선을 치렀다. 시민들과 악수하느라 손이 퉁퉁 부었지만 이를 악물고 손에 붕대를 감고 선거 현장을 누볐다. 다행히 결과가 나쁘지 않아 한나라당은 몰락의 위기에서 벗어났고, 2007년 정권교체를 향한 교두보를 마련할 수 있었다.
무상급식 후폭풍에 ‘안철수 열풍’…“방관할 수 없었다”
그런데 2011년 말에 또다시 한나라당에 큰 위기가 발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