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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살아가는 이야기ㅡ62
(휴가지에서 유배자 추사를 만나다)
유홍준교수의 나의문화유산답사기 시리즈가 공전의 히트를 치고 있다.어떨 땐 박학하고 어떨 땐 다식하다.미사려구로 글을 이어가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다.그래서 독자층도 다양하고 밀리언셀러가 된지 오래다 . 나도 이 양반이 남도일번지라 부제를 붙인 1권부터 일본편 북한편까지 14권을 모두 읽었다. 아는 것 만큼 보인다는 신조어가 유행하는데 일조하며 열혈펜이 되었었다. 그러다가 유교수가 노무현시절 문화재청장을 하면서 북한에 갔을 적에 평양 어디에서 인민군 군가를 불렀다 해서 정나미가 떨어져 결별해 버렸다.
그러고는 쳐다보지도 않으려고 애를 섰다. 세월이 한참 지나고 세상이 뒤죽박죽 되는 환란을 숱하게 당하고 나서 이념적 갈등은 점차 희석되어갔다. 대체로 예술이나 문학이나 학문을 하는 사람들은 진보적인 성향을 띤다는 것도 근래에 와서 인정하게 되었다. 그래서 다시 유교수를 새롭게 공감하게 되는데, 공산주의 사상을 주입하려는것도 아닌데 내가 너무 편협한 생각속에 갇혔었나 싶었다. 하여간 이 양반에 다시금 심취했다. 깊이 있는 식견도 식견이지만 감칠 맛 나는 글이 더 좋아서였다.이 분의 7편이 제주편인데 제주는 다른 지역에 비해서 문화유산이 별로 없어서인지 자연유산 분야의 소재가 대다수였는데 여름철이 아니고 휴가철이 아니면 이책에 소개된 동굴이나 오름 같은 곳도 가보고 싶었다. 하지만 타이밍이 맞지 않고 집사람과 동행해야 하니 쉽지 않았다.
그런데 제주도를 소개하는 관광안내서나 팜플렛 등에서는 이 양반이 그렇게 침튀겨 가며 열변을 토하는 장소는 아에 없거나 비중을 두지 않고 건성으로 취급하고 있었다.
그런 것 까지 내가 탓할 건 아니라서 언외로 하고 이번 휴가여행에서 꼭 가볼 곳으로
대정에 있는 추사유배지를 우선 순위로 꼽아 놓았었다.
나는 근대의 석학 중에 다산 정약용과 추사 김정희를 흠모하고 있었다. 그래서 4년전 첫 휴가여행을 남도일번지라는 강진으로 다산초당으로 갔다. 그러고 이번 제주휴가 중에 추사가 귀양와서 위리안치하며 9년을 살았던 대정을 찾아갔다. 유홍준교수는 추사평전도 쓴 게 있어 그책도 몇넌 전에 읽었다. 숨죽이며 감동깊게 읽어서 추사에 대해서는 알 만큼 알고 있지만 추사체를 완성했다는 9년간의 유배지의 분위기와 그 당시의 모습을 유추해 보면서 한시대의 천재를 만나보고 싶어서 였다.
추사는 여러방면에 걸출한 업적을 쌓았다. 함경도 황초령의 진흥왕순수비를 처음으로 고증했는가 하면 무학대사의 비석으로 알러졌던 북한산 비봉꼭대기에 있던 비문을 금석학적으로 감정하고 진흥왕의 순수비라는 것을 입증하고 7,000자에 달하는 논문을 발표하였다 하니 좀 일찍 태어나서 시대를 잘 못 만나 그렇지 노밸상 보다 더 큰상도 받을 업적을 남겼다. 그뿐만 아니라 사천왕시지에서 문무왕의 깨어진 비석을 발견하고 이를 발굴해서 세상에 알렸고,
경주 암곡 깊은 골짜기에 있는 무장사지의 비석도 찾아내어 세상에 공포하며 후세에 기록으로 남기는 등 자칫 살아질 뻔 한 우리 민족사의 역사를 바로 세워준 분이다.그래서 나는 이분을 존경한다.
(지금부터 30줄은 추사집안의 역사임. 지루하면 건너뛰어도 됨)
다른 글에서 보기 어려운 추사집안과 당쟁의 내력을 알아보면 신라왕족인 경주김씨 중에 더러 이름있는 가문이 있지만 조선중기 극렬한 당파싸움과 세도정치의 죽기 아니면 살기식의 이전투구에서 이름을 날린 가문 중에 하나다.
조부 형조판서 김이주와 8촌 사이인 정순왕후가 있고, 증조부 김한신은 영조의 둘째딸 화순옹주와 혼인한 부마인 월성위이다. 고조는 영의정을 지낸 김흥경이다. 정말 삐까번쩍한 가문인데 사극에도 자주 등장하는 정순왕후는 15세에 영조의 계비가 된다. 이 때 영조의 나이는 66세 였다.조선시대이니까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영조는 80넘게 살았지만 정순왕비는 자식을 낳지 못했다.그러나 사도세자의 죽음과 정조의 치세시절 숱한 곡절과 정치의 소용돌이에 정순왕비가 있다. 사도세자의 죽음을 두고 노론은 벽파와 시파로 갈라져 치열한 치킨게임을 한다.경주김씨 세력은 사도세자를 죽여야 한다는 당론이었다. 이런 당파속에 주도권을 쥐고 있는 과정에 불편한 정조가 세손이 되고 왕통을 이어 받았다. 정조와 이들은 늘 암투관계였다.정조가 급사하는 날 대비이던 정순왕비가 임종하여 독살설에 연루되기도 한다. 이런 가문의 원죄와 업보를 추사는 받고 살아야 했다.정적을 죽이지 않으면 내가 당하는 살벌한 정치싸움은 작금의 정치형태와 엇비슷 한 셈이다.
정조가 급사하자 순조가 즉위하는데 순조의 비가 더 유명한 안동김씨 김조순의 딸 순원왕비다. 안동김씨의 세도정치가 서막을 올리자 극렬한 권력싸음이 펼쳐졌다.생부 김노경을 탄핵하여 권좌에서 밀어내고 10년 후 윤상도의 상소문을 추사가 조언했다는 죄명을 덮어씌워 경주김씨의 싹수를 근본적으로 척결하는 과정에 제주도로 귀양보냈던 것이다. 요즘 유행어로 하면 적폐청산인 셈이다.
잘나가던 위세있던 가문에다 장래가 촉망되었던 추사가 죽여야 될 정적들을 뱃길에서 죽든지, 외부와 단절된 절해고도에서 극심한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여 죽든지 택일하라며 역모자에게나 하는 가시나무 탱자울타리 안에서 연명하게 했다.추사의 인품과 덕망을 알아본 강도순이라는 사람이 자기집을 내주며 함께 기거 한 모양인데 밭으로 변한 집터를 강씨의 증손자의 증언대로 복원한 모양이다. 옛날방식의 가옥 구조이지만 상상보다 번듯한 구조다. 당시는 이보다 휠씬 열악했으리라 본다.
유물로 남아있는 사료들을 보면 향토병과 맞지않은 음식으로 고생한 내용에 미루어 그때 생활이 짐작 된다
옆에 딸린 유물전시관은 유배지에 무슨 유물이 있을까만은 이곳에서 9년 동안 죽어 사는동안 오직 글씨에 심취하여 유명한 추사체의 완성으로 숱하게 많은 불후의 명필들을 남겼다는 것이다
그리고 전대후문의 명작 세한도를 그리고 금과옥조 같은 발문을 써 자고로 인간관계의 귀감으로 삼을 유명한 명문을 남겼다는 점이다.
갓끈 떨어지고 권력에서 추락한 별볼 일 없는 늙은 노인을 잊지않고 수차례에나 바닷길을 건너와 위문하고 때때로 청나라에서 각종 신물 서적을 보내주는 애제자 이상적에게 그려준 폭 23센치의 자그만한 그림에 불과한 것이 세한도다. 어설픈 구도의 가옥이 비스듬히 있고 소나무와 잣나무가 두거루 서 있다.
그림에 문외한인 나의 눈에도 그림은 잘 그린 것은 아니지만 세한도라는 의미와 발문의 설명이 기가 막히게 표현되었다는 점이다.
게다가 이 세한도를 받은 이상적이 그뒤 역관으로 다시 청나라에 갔을 때 그곳 석학 여려명에게 금쪽같은 발문을 연명으로 받았다는 점이다.
발문 내용 중에
"날이 차가워 다른나무들이 시든 뒤에야 비로서 소나무가 늘 푸르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는 구절이
핵심이다.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강조한 것이라 예단하면 나의 지나친 비약일까.옆지기가 빨리 나가자고 재촉만 하지 않았다면 비록 모사본이지만 막 튀어나올 듯한 반듯반듯한 추사체의 위엄 가득한 글씨와 세한도 그림에 매료되어 되돌아 돌아서기 아쉬운 발걸음을 옮겼다
위대한 천재여.걸출한 영웅이여,
가신지 160 성상이면 몇차례 환생했을 법도 한데
현세의 추사는 과연누구신져 !
첫댓글 선배님 반갑습니다. 이쁜 글 잘 읽겠습니다. 신라천년의 다양한 유산들을 볼 수 있어 더욱 좋습니다. 고맙습니다.
불초. 신세를 갚을 겸 1등 경품당첨기 올려볼 심산입니다.
@유승 예 자못 기대가 됩니다 선배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