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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면서
한국교회가 샤머니즘적인 기복주의로 흐르고 있다는 우려와 지적은 오래전부터 있어왔다. 그러나 이 현상은 개선되기보다는 더 악화되고 있는 것 같다. 한국교회의 복 개념과 불신자의 그것은 많은 면에서 구별되지 않고 대동소이하다. 이런 차제에 다시 한 번 한국교회의 복 개념을 신약 성경의 복 개념에 비추어 진단해 보면서, 오류를 개선할 필요가 있다. 이 글에서 한국교회의 복 개념을 살펴본 후, 신약의 복 개념을 복음서, 서신서, 그리고 계시록에서 살펴본 후, 한국교회에 필요한 현실적인 대책을 찾아보고자 한다.
1. 한국교회의 복 개념 진단
한국교회의 기복주의적 요소는 무엇인가? 예를 들어, 신년이면 ‘축복대성회’가 열린다. 여기서 ‘축복’ (祝福)은 ‘복을 빈다’는 뜻이기에 부절절하다. 복을 받을 목적으로 집회에 참석하는 것이 아니라, 성도는 이미 복된 존재가 되었기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참석하는 것이 옳다. 송구영신예배 시, 담임 목사가 미리 적어둔 성경 구절들 중에서 하나를 제비뽑듯이 뽑아 그 말씀대로 1년을 살겠다고 결심하는 것은 넌센스다. 그런 구절은 주님을 위해서 고난을 받고 희생하겠다는 내용을 거의 포함하고 있지 않다. 예배 중 헌금 기도는 “성도가 십일조와 같은 헌금을 바쳤으니, 더 많은 돈을 주시옵소서”라는 내용으로 점철되어 있다면 틀린 지적일까? 봉사와 헌금을 은혜에 대한 감사의 발로가 아니라, 보상심리로 하는 경향이 많다. 한국교회의 이런 관례는 현세적이며 물질적인 복 개념을 더욱 고착화 시킨다. 요즘도 종종 열리는 신유집회는 주로 육체의 질병치유에 초점이 있지만,예수님은 육신의 치유를 통해서 죄 사함의 중요성을 가르치셨다 (마 9:6; 눅 18:42). 신유집회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통전적 구원을 추구해야 한다.
출 20:5, 민 14:18, 렘 31:29, 32:18, 겔 18:1-32절 등에 기초한 가계에 흐르는 저주 (generation curse) 이론은 비평적인 고찰을 요한다. 이윤호 (2001)에 의하면, 가계에 흐르는 죄와 하나님의 저주는 후손에게 유전되는데, 이런 것들을 없애려면 유전적인 죄의 뿌리를 제거해야 한다. 가계 저주론자들은 심지어 예수님을 믿어 구원을 받아도 저주 아래 살 수 있고 자유를 얻지 못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후손이 저주에서 해방되려면 조상이 지은 죄를 알고 적절히 대처해야 하는가? 가계 저주론은 저주를 풀고 복을 받으라고 가르치는 샤머니즘과 다를 바 없다.그렇다면 예수님이 율법과 죄와 사망과 죄의 몸에서 자기 백성을 해방하신 사역은 무엇인가? (참고. 롬 8:38-39). 그리고 이윤호가 인용한 구약 구절들이 문맥 안에서 정당하게 주석된다면, 가계저주론과 무관함을 알 수 있다. 예레미야와 에스겔은 조상의 죄 때문에 후손이 벌을 받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리고 모세는 공동연대와 책임을 져야했던 독자들에게 출 20:5절의 ‘삼사 대까지 벌하고’와 6절의 “수천 대까지 은혜를 베풀 것이다”를 대조하도록 한다 (참고. 존 월튼, 2010:135).
지금은 많이 교정되었지만 한국교회의 천국 개념은 여전히 미래 지향적이다.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있으므로, 죽으면 천국 간다는 수준에서 머물고 있지 않는가?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천국 백성답게 천국 확장을 위해서 전투적으로 살아가는 성도는 얼마나 되는가?
2. 신약의 복 개념
신약에서 복은 주로 명사형euvlogi,a와maka,rioj로 표현된다.hk'r"b..의 헬라어 번역인euvlogi,a는 주로 누가복음과 바울의 주요 서신들과 히브리서에 등장하지만, 바울의 짧은 서신들, 일반서신, 요한서신, 베드로후서와 유다서에 나타나지 않는다 (참고. Becker, 1986:212-217).euvlogi,a는 세속 헬라어가 아니라 구약의 해당 단어로부터 종교적 의의를 전수받았다.%rB의 헬라어 번역인 동사euvloge,w는 LXX에 400회 이상이나 등장한다.
신약에서euvlogi,a와euvloge,w의 뜻은 다양하다: 높은 자가 낮은 자를 ‘축복’할 수 있고 (히 7:1), 사람은 마땅히 하나님을 ‘찬양’해야 하고 (눅 1:64; 2:28, 34), 메시아를 잉태한 마리아는 ‘복되며’ (눅 1:42), 메시아는 ‘복 되시다’라는 칭송을 받을 만하며 (마 21:9), 예수님은 오병이어의 표적 전에 ‘축사’하셨고 (막 6:41), 예수님은 어린 아이와 제자들을 ‘축복’하셨고 (막 10:16; 눅 24:50), 성도는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축복’해야 하며 (눅 6:28; 벧전 3:9), 무조건적 사랑에서 우러나오는 ‘선물’을 하며 (고전 14:16), 거짓 선생들은 이익을 얻으려고 ‘아첨하는 말’을 하며 (롬 16:18), 보좌 위의 하나님과 어린 양은 ‘찬송’을 받으시기 합당하시다 (계 5:12, 13; 7:12; 참고. Beyer, 1974:754-763).
아래에서 명사 ‘복’ 혹은 형용사 ‘복되다’ 혹은 동사 ‘축복하다’ 혹은 ‘복을 주다’라는 표현이 등장하는 신약 성경의 구절은 물론, 이런 단어가 등장하지 않지만 복과 관련된 사상이 나타나는 중요 구절들을 복음서, 서신서 그리고 계시록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2.1. 복음서의 복 개념: 산상설교의 8복을 중심으로
산상설교의 서론격인 8복은 마 23:13-30절의 8화와 대조 된다. 각 사항마다 정확하게 대조되지 않으나, 전체적으로는 그러하다. 줄 친 단어에 주목해 보라:
| 8복 | 8화 |
| Maka,rioi oi` ptwcoi. tw/| pneu,mati( o[ti auvtw/n evstin h` basilei,a tw/n ouvranw/nÅ 복 되도다. 심령이 가난한 자들아! 왜냐하면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기 때문이다 (마 5:3) | Ouvai. de. u`mi/n( grammatei/j kai. Farisai/oi u`pokritai,( o[ti klei,ete th.n basilei,an tw/n ouvranw/n e;mprosqen tw/n avnqrw,pwn\ u`mei/j ga.r ouvk eivse,rcesqe ouvde. tou.j eivsercome,nouj avfi,ete eivselqei/nÅ 너희에게 화있도다. 위선자들인 서기관들아 바리새인들아! 왜냐하면 너희가 사람들 앞에서 하늘나라를 닫아 놓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는 자들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마 23:13). |
| maka,rioi oi` penqou/ntej( o[ti auvtoi. paraklhqh,sontaiÅ 복 되도다. 슬퍼하는 자들아! 왜냐하면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마 5:4). | Ouvai. de. u`mi/n( grammatei/j kai. Farisai/oi u`pokritai,( o[ti katesqi,ete ta.j oivki,aj tw/n chrw/n kai. profa,sei makra. proseu,contai\ dia. tou/to lh,mywsqe perisso,teron kri,maÅ 너희에게 화있도다. 위선자들인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아! 왜냐하면 너희가 과부들의 집들을 삼키고, 남에게 보이려고 길게 기도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너희가 더 엄중한 심판을 받을 것이다 (마 23:14). |
| maka,rioi oi` praei/j( o[ti auvtoi. klhronomh,sousin th.n gh/nÅ 복 되도다. 온유한 자들아! 왜냐하면 그들이 그 땅을 상속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마 5:5). | Ouvai. u`mi/n( grammatei/j kai. Farisai/oi u`pokritai,( o[ti peria,gete th.n qa,lassan kai. th.n xhra.n poih/sai e[na prosh,luton( kai. o[tan ge,nhtai poiei/te auvto.n ui`o.n gee,nnhj diplo,teron u`mw/nÅ 너희에게 화있도다. 위선자들인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아! 왜냐하면 너희가 개종자 하나를 얻으려고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하나가 생기면 그를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의 아들로 만들기 때문이다 (마 23:15). |
| maka,rioi oi` peinw/ntej kai. diyw/ntej th.n dikaiosu,nhn( o[ti auvtoi. cortasqh,sontaiÅ 복 되도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아! 왜냐하면 그들이 배부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마 5:6). | Ouvai. u`mi/n( o`dhgoi. tufloi. oi` le,gontej( }Oj a'n ovmo,sh| evn tw/| naw/|( ouvde,n evstin\ o]j dV a'n ovmo,sh| evn tw/| crusw/| tou/ naou/( ovfei,leiÅ 너희에게 화있도다. 맹인 된 인도자들아! 너희는 “누구든지 성전을 두고 맹세하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누구든지 성전의 금을 두고 맹세하면 지켜야 한다”라고 말한다 (마 23:16). |
| maka,rioi oi` evleh,monej( o[ti auvtoi. evlehqh,sontaiÅ 복 되도다. 긍휼히 여기는 자들아! 왜냐하면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마 5:7). | Ouvai. u`mi/n( grammatei/j kai. Farisai/oi u`pokritai,( o[ti avpodekatou/te to. h`du,osmon kai. to. a;nhqon kai. to. ku,minon kai. avfh,kate ta. baru,tera tou/ no,mou( th.n kri,sin kai. to. e;leoj kai. th.n pi,stin\ tau/ta Îde.Ð e;dei poih/sai kavkei/na mh. avfie,naiÅ 너희에게 화있도다. 위선자들인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아! 왜냐하면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면서, 율법의 더 중요한 것들인 의와 긍휼과 신뢰는 버렸기 때문이다. 너희가 이것들도 행해야 했으며 저것들도 버리지 말아야 했다 (마 23:23). |
| maka,rioi oi` kaqaroi. th/| kardi,a|( o[ti auvtoi. to.n qeo.n o;yontaiÅ 복 되도다. 마음이 청결한자들아! 왜냐하면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이기 때문이다 (마 5:8). | Ouvai. u`mi/n( grammatei/j kai. Farisai/oi u`pokritai,( o[ti kaqari,zete to. e;xwqen tou/ pothri,ou kai. th/j paroyi,doj( e;swqen de. ge,mousin evx a`rpagh/j kai. avkrasi,ajÅ 화있도다. 위선자들인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아! 왜냐하면 너희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하게 하지만, 속은 착취와 방종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마 23:25). |
| maka,rioi oi` eivrhnopoioi,( o[ti auvtoi. ui`oi. qeou/ klhqh,sontaiÅ 복 되도다. 화평케 하는 자들아! 왜냐하면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불릴 것이기 때문이다 (마 5:9). | Ouvai. u`mi/n( grammatei/j kai. Farisai/oi u`pokritai,( o[ti paromoia,zete ta,foij kekoniame,noij( oi[tinej e;xwqen me.n fai,nontai w`rai/oi( e;swqen de. ge,mousin ovste,wn nekrw/n kai. pa,shj avkaqarsi,ajÅ 너희에게 화있도다. 위선자들인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아! 왜냐하면 너희가 회칠한 무덤들과 같기 때문이다. 그것들이 겉은 아름답게 보이지만, 안에는 죽은 자들의 뼈와 온갖 더러운 것들로 가득 차 있다 (마 23:27). |
| maka,rioi oi` dediwgme,noi e[neken dikaiosu,nhj( o[ti auvtw/n evstin h` basilei,a tw/n ouvranw/nÅ 복 되도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들아! 왜냐하면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기 때문이다 (마 5:10). | Ouvai. u`mi/n( grammatei/j kai. Farisai/oi u`pokritai,( o[ti oivkodomei/te tou.j ta,fouj tw/n profhtw/n kai. kosmei/te ta. mnhmei/a tw/n dikai,wn( kai. le,gete( Eiv h;meqa evn tai/j h`me,raij tw/n pate,rwn h`mw/n( ouvk a'n h;meqa auvtw/n koinwnoi. evn tw/| ai[mati tw/n profhtw/nÅ 너희에게 화있도다. 위선자들인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아! 왜냐하면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들을 세우고, 의인들의 기념비들을 장식하며, “우리가 우리 조상들의 날들에 있었다면, 선지자들의 피를 흘리는 일에 그들과 함께 가담하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마 23:29-30). |
8복 (마 5:3-10)은 하늘나라의 속성을 드러내는 자들에게 약속된 복이다. 이 복을 받는 것은 도달하기 불가능한 이상향이 아니라, 성령님으로 행할 때에 가능하다. 성도가 성령으로 행할 때 이 복을 받지만, 동시에 천국 백성이라면 누구나 누려야 할 복이기에, 존재론적인 복이기도 하다. 팔복은 일시적이고 세상적인 관점과는 반대되는 특별하고도 영원한 천국의 규칙이다. 8복을 하나씩 살펴보자:
(1) ‘심령이 가난한 자’는 오직 은혜로만 살 수 있음을 전인으로 고백하는 자이다 (3절; 참고. 시 12:5; 35:10). 칼빈 (1993:247)은 이들을 역경으로 고통을 받아 겸손하게 “하나님의 보호를 받겠습니다”라고 고백하는 자들로 본다. 8복에 자주 등장하는 미래 동사와 달리 3절과 10절에서는 현재 동사 (evstin)가 사용된다. 나머지 미래 시제 동사들도 현재적 함의를 가진다.
(2) ‘심령이 가난한 자들’과 무관하지 않는 ‘애통하는 자들’은 구체적으로는 개인의 죄와 고통에 대해 애통하는 자 (참고. 칼빈, 1993:248; Van Bruggen, 1998:20)와 넓게는 하늘나라가 세상의 불의로 인해 자신의 삶 속에 온전히 이루어지지 못함에 대해 애통하는 자로 볼 수 있다 (4절; 참고. 사 66:2; 롬 5:3).
(3) 새 하늘과 새 땅 즉 천국을 소유할 ‘온유한 자들’은 죄를 멀리하고 하나님만 바라보는 강한 자이다 (5절; 참고. 시 37:11; 마 19:29; 시 37:9-11). 성경 전체는 ‘땅’ (주권과 통치의 영역)을 두고 하나님과 사단이 싸우는 전투로 볼 수 있다. 구약에서 땅의 주인은 하나님이라고 안식년과 희년법에서 분명히 말씀하듯이 (참고. 레 25:23), 신약에서는 땅의 상속 (즉 천국과 영생의 상속)은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소관임을 밝힌다. 온유한 자처럼 하나님의 남은 자가 그 땅을 소유 한다 (참고. 사 1:19; 4:2-6; 11:11-16; 43:1-7; 51:11; 56:8).
(4)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 (6절)은 의로우신 하나님을 사모하여 영적인 굶주림과 갈증이 없다 (참고. 사 44:3; 55:1-5). 천국은 의로우신 하나님이 다스리는 영역이다. 그 통치는 갈망하는 자에게 해갈로 주어질 것이다.
(5) ‘긍휼히 여기는 자들’ (7절)은 하나님의 긍휼을 먼저 깨달아 남을 관대하게 용서하고 동정하는 이들이다 (참고. 롬 11:30-12:1).
(6) ‘마음이 청결한 자들’ (8절)은 죄가 없는 자가 아니라, 진실 됨, 동기의 순수함, 내적체험과 외적 행위의 일치를 추구하는 자들인데, 하나님과 가장 긴밀한 교제를 누릴 수 있다 (참고. 시 24:3-6; 요일 3:2; 계 21:23).
(7) ‘화평케 하는 자들’ (9절)은 평강의 왕이신 예수님 (참고. 사 9:6-7)의 수직적인 화평을 경험한 자인데, 하나님 (예수님)의 성품을 닮아 분쟁을 종식시키기에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린다.
(8) ‘의를 위하여 핍박을 당하는 자들’ (10절)은 의로우신 하나님이 주시는 나라 (통치)를 받을 것이다 (참고. 벧전 4:12-19). 이런 사람은 ‘정의와 평등’에 대한 관심으로 최선을 다해서 악한 일을 거부하며, 선을 지키기 때문에 악인들의 원한과 분노를 사는 자이다 (참고. 칼빈, 1993:251).
3절과 10절을 보면, 8복은 “왜냐하면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기 때문이다” (o[ti auvtw/n evstin h` basilei,a tw/n ouvranw/n)로 시작하여 ‘하늘나라’로 마침을 알 수 있다. 그리고 8복 중에 갈 5:22-23절의 성령님의 9가지 열매와 중복되는 것이 있다. 예수님의 성품과 삶의 방식이요, 하늘나라의 백성인 성도가 이루어 가야할 성품과 삶의 모습이 8복과 성령님의 열매에 나타나 있다.
위선적인 바리새인들의 삶은 천국 백성과 대조된다. 심령이 가난한 자들이 상속할 하늘나라의 복과 무관했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하늘나라의 문을 막고, 긍휼 없이 불의한 방법으로 약자의 재산을 탈취함으로써 화평을 제거하고, 위선적 삶과 잘못된 지식으로 지옥 자식으로 만들고, 헛된 맹세를 일삼고, 내면의 동기와 행실이 청결한 자와 달리 율법의 정신을 무시한 채 껍데기만 준수하고, 경건의 능력은 간과하고 외양에 집착하며, 의롭게 사는 성도를 박해하면서도 오히려 자기 합리화에 바쁜 이들이다. 그들에게는 심판만 기다릴 뿐이다.
2.2. 신약 서신의 복 개념
2.2.1. 바울이 이해한 복
2.2.1.1. 롬 15:29
바울은 로마교회에게 갈 때 ‘그리스도의 충만한 복’ (plhrw,mati euvlogi,aj Cristou/)을 가지고 가려고 한다.바울이 전달하고자 하는 그리스도의 충만한 복은 무엇인가? 로마 교회에 이미 임한 하나님의 영적인 복을 상기시키는 것인가? 아니면 바울이 로마 교회와 누리는 교제의 유익함을 가리키는가? 이것은 롬 1:11절의 신령한 은사들과 유사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스도께서 바울의 사역에 은혜와 권능으로 역사하심으로써 동반된 복들을 로마교회에게도 충만히 부어 주실 것이다 (참고. Murray, 1984:220).
2.2.1.2. 고후 9:5
바울은 마게도니아 성도에게 고린도교회가 속한 아가야 성도들이 예루살렘 교회를 도울 준비를 이전부터 하고 있다고 자랑했다 (고후 9:2; 참고. 고후 8:6). 고린도교회가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서 ‘전에 약속한 헌금’ (th.n proephggelme,nhn euvlogi,an u`mw/n, your gift of blessing previously promised)은 관대한 선물이란 뜻이다. 여기서 ‘헌금’을 직역하면 ‘복’인데, 관대함과 열정을 가진 심정으로 시행되는 구제는 그 대상자에게 복이다. 고린도교회가 바울에게 이전에 구두로 한 약속이 현재 완료 분사로 포현되어 여전히 유효함을 강조 한다 (참고. Harris, 2005:628).
2.2.1.3. 갈 3:8-9
바울은 갈 3:8절에서 구약의 한 구절 (단수형h` grafh.) 즉 창 12:3절을 인용하는데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것이다;VEneuloghqh,sontai evn soi. pa,nta ta. e;qnh),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는다 (갈 3:9). 여기서 바울은 갈라디아교회의 대적인 유대주의자들의 다음의 주장에 답하고 있다: 만약 모든 나라가 아브라함 안에서 복을 받게 된다면, 갈라디아 교회도 할례를 통하여 아브라함과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 ‘미리 복음을 전하다’ (proeuaggeli,zomai)는 신약에서 8절에만 등장하고 LXX와 유대묵시문헌에도 나타나지 않는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율법이 아니라 복음을 미리 전하셨다는 사실로써 바울은 할례를 행함으로 아브라함과 연합된다고 주장했던 유대주의자를 논박 한다 (참고. Longenecker, 1990:115). 아브라함은 믿음이 있는 할례자와 무 할례자의 조상이다 (참고. 롬 4:11-12).
2.2.1.4. 엡 1:17-19
엡 1:17-19절에 ‘복’이라는 단어가 등장하지 않지만 복 개념으로 충만하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를 위해서 기도 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곧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 (pneu/ma sofi,aj kai. avpokalu,yewj)을 너희에게 주시어 하나님을 알게 하시옵소서” (17절). ‘영광의 아버지’ (o` path.r th/j do,xhj)라는 말에서 ‘영광’은 임재의 광채와 거룩 (참고. 딤전 6:16) 그리고 능력 (참고. 롬 6:4)의 성부 하나님과 관련 있다. 더 나아가 성부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이 행하신 일 (즉 자신의 영광)을 계시 하신다 (참고. Snodgrass, 1996:72). 지혜와 계시의 영은 사람의 영인가? 아니면 성령님인가? (참고. NIV: the Spirit of wisdom and revelation).
엡 1:8절과 3:16절을 참고해 볼 때, 성령님이 에베소 교회에게 지혜를 주시고 계시 하신다 (참고. Snodgrass, 1996:73). 바울의 기도는 계속 된다. 지혜와 계시의 성령님께서 “너희의 마음의 눈들을 밝히셔서 그분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 있는 그분의 유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인지” 알게 해 달라고 기도 한다 (18절). ‘그분의 부르심의 소망’ (h` evlpi.j th/j klh,sewj auvtou/)이란 성도가 하나님의 기업을 이을 자녀 (참고. 엡 1:14; 5:5)와 영광스런 신부 (참고. 엡 5:26-27)로 부름을 받은 소망이다. 그리고 ‘그분의 유업’ (th/j klhronomi,aj auvtou/)은 다름 아니라 성도 자신인데, 하나님의 유업은 성도로 구성되어 있고 성도 안에서 발견되어 진다 (참고. 신 4:20; 9:26; 시 33:12; 보라. Snodgrass, 1996:74).
성도는 천국의 복과 은혜 그리고 성령님을 기업으로 삼고, 하나님은 성도를 기업으로 삼고 계신다. 마지막으로 바울은 “그분의 강력한 능력의 활동하심 (evne,rgeia)을 따라 믿는 우리를 위해 베푸신 그분의 능력 (du,namij)의 지극히 크심 (to. u`perba,llon me,geqoj)이 무엇인지 알게” 하시도록 기도 한다 (19절). 에베소교회가 성령님의 조명으로 알아야 할 ‘하나님의 지극히 크신 능력’은 무엇인가? 19절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능력이 무한함을 ‘힘’, ‘능력’, ‘활동’이라는 비슷한 말을 반복함으로써 강조한다. 하나님의 능력의 분명한 모습은 20절 이하에 등장하는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볼 수 있다. 따라서 여기서 하나님의 능력은 구체적으로 ‘생명을 주시는 힘’이다 (참고. Snodgrass, 1996:75).
2.2.2. 베드로가 이해한 복
2.2.2.1. 벧전 1:4
벧전 1:4절에 ‘복’이라는 단어는 없지만 복 개념으로 충만하다. 베드로와 달리 유대인들은 4절에 언급된 복들을 미래 종말적으로 이해했다. 신약 성도가 받은 이 기업은 구약 이스라엘 백성이 아브라함의 언약의 성취로 받았던 ‘가나안 땅’과 비교하면서 설명할 수 있다. 이 기업은 ‘썩지 않는다’ (a;fqarton). 가나안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때때로 침략을 받아서 약탈당하고 황폐되었다 (참고. 사 24:3-4). 그리고 이 기업은 ‘더럽혀지지 않는다’ (avmi,anton).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지 않아서 그 땅을 더럽히고 그 기업을 가증하게 여겼다 (참고. 렘 2:7; 3:2). 하지만 신약 교회가 받은 산 소망과 구원 그리고 신령한 은사와 복은 절대로 더럽히지 않는다고 한다. 성도가 받은 기업은 ‘쇠하지 않는다’ (avma,ranton). 이것은 마르거나 시들지 않는 기업을 말한다. 가나안 땅은 이방인에 의해 침략을 당하고 파괴당하고 더럽혀졌을 뿐만 아니라, 행음으로 인한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을 받아 가뭄으로 쇠하기도 했다 (참고. 렘 23:10). 구약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기업인 약속의 땅 가나안은 마치 그림자처럼 불완전한 복이요 기업이었다. 하지만 예수님의 부활로 신약 성도가 누리게 된 기업과 복은 산 소망 그 자체요 확실한 실재이다. 이런 확실한 소망과 복된 기업을 바라보고 믿으면서 베드로전서의 나그네 된 독자들은 소망과 위로를 받았다.
2.2.2.2. 벧전 4:14
성령님은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고난당하는 성도와 함께 한다. 성령님은 복음 때문에 고난당하는 복된 자들에게 (maka,rioi) 할 말과 지혜를 주신다 (참고. 마 10:9절 이하).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성령님 (to. th/j do,xhj kai. to. tou/ qeou/ pneu/ma)이 그들과 함께 하시고,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신다.
2.2.2.3. 벧후 1:3
벧후 1:3절에 ‘복’이라는 단어는 없지만 복 개념으로 가득하다. ‘그분의 신성의 능력’ (th/j qei,aj duna,mewj auvtou/)에서 ‘그분의’는 성부와 성자 모두에게 적용될 수 있지만,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도에게 전달된 은혜는 곧 성자의 신성을 입증 하는 증거라고 볼 수 있다 (참고. 칼빈, 1993:478). ‘경건’ (euvse,beia)은 하나님께서 특별히 자기 백성에게 베푸신 영적 생활의 특수한 은사로서의 도덕적 고결성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다 (참고. 칼빈, 1993:479). 하나님을 알아야 생명 (zwh., 참고. 요 6:68)과 경건이 우리에게 와 있음도 알게 된다. 헬라와 로마제국에서 ‘경건’이란 마땅히 받을 만한 사람 (예. 신, 부모, 조상, 친척, 사회 기구, 동료 시민)에게 충성하고 존경하는 것을 의미했다. 베드로가 이 개념을 염두에 두었다면, 기독교의 경건은 성도가 하나님에게 충성하고 존경을 표하는 ‘의무’이다 (contra 벧후 2:5-7절의 경건치 않은 자들). 그 의무를 수행하는 것은 천국 시민의 명예이다. 성도는 하나님에게서 받은 생명과 경건을 위해서 필요한 모든 것들로 성장해 가야 한다. 그 누구도 예수님을 닮지 못한 것에 대해 변명할 수 없다. 3절의 하나님은 'Divine Benefactor'이시다. 3절의 ‘영광’ (do,xa)과 ‘덕’ (avreth,)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영광’ (혹은 명성)은 하나님의 장엄한 현존을 가리킨다. 그리스도의 영광은 종종 주님의 부활과 연결 된다 (참고. 벧전 1:21).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부르신 것은 ‘신적 능력’으로만은 아니다. 죄인이 거룩하신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기 위해서는 ‘도덕적으로 완전하신 분’에 의해서 성취된 구원의 사역을 필요로 한다. ‘덕’은 성품의 탁월함을 뜻하는데, 예수님은 죄 없는 삶을 사셨다 (참고. Moo, 1996:42-43).
2.2.3. 요한이 이해한 복
요삼 2절에 ‘복’이라는 단어는 없지만 복 개념으로 가득하다. 요한삼서 2절 (VAgaphte,( peri. pa,ntwn eu;comai, se euvodou/sqai kai. u`giai,nein( kaqw.j euvodou/tai, sou h` yuch,)을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사랑하는 자여, 나는 너의 영혼이 잘 되어지는 것처럼 네가 잘되어지고 건강하도록 모든 것들을 위해서 기도한다.” 요한은 요함삼서의 수신자인 가이오에게 건강과 범사에 형통함을 약속하지 않는다. 반대로 요한은 건강과 범사의 형통함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 요한은 ‘너의 영혼’뿐 아니라 “네가 (se) 잘되어지기를 기도 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잘되어지기를’ (euvodou/sqai)은 신적수동태이다. 성도의 ‘존재’는 하나님의 은혜로만 잘되어 진다. 존재론적으로 성도는 죄악의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복된 존재이다. 이런 존재론적인 복과 더불어서, 요한은 가이오의 모든 것들 (peri. pa,ntwn) 즉 범사를 위해서 기도 한다 (참고. Zerwick, 1993:736).
2.3. 요한계시록의 복 개념: 7복을 중심으로
계시록에는 7개의 복이 등장한다. 사도 요한은 음녀 바벨론 성의 파멸과 대조시키려고 대부분 복을 계 14장 이후에 배치한다.
| 첫째 복 | maka,rioj o` avnaginw,skwn kai. oi` avkou,ontej tou.j lo,gouj th/j profhtei,aj kai. throu/ntej ta. evn auvth/| gegramme,na( o` ga.r kairo.j evggu,j. 복 되도다 (단수형). 그 예언의 말씀들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안에 기록된 것들을 지키는 자들이여! 왜냐하면 그 때가 가깝기 때문이다 (계 1:3). |
| 둘째 복 | Kai. h;kousa fwnh/j evk tou/ ouvranou/ legou,shj( Gra,yon\ Maka,rioi oi` nekroi. oi` evn kuri,w| avpoqnh,|skontej avpV a;rtiÅ nai,( le,gei to. pneu/ma( i[na avnapah,sontai evk tw/n ko,pwn auvtw/n( ta. ga.r e;rga auvtw/n avkolouqei/ metV auvtw/n. 그리고 나는 하늘에서 나는 음성을 들었는데, 말하기를 “너는 쓰라. 복 되도다 (복수형). 지금부터 주님 안에서 죽는 자들이여!” 하니, 성령님께서 “그렇다. 그들은 수고를 끝내고 안식할 것이니 그들의 행위가 그들을 따를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하셨다 (계 14:13). |
| 셋째 복 | VIdou. e;rcomai w`j kle,pthjÅ maka,rioj o` grhgorw/n kai. thrw/n ta. i`ma,tia auvtou/( i[na mh. gumno.j peripath/| kai. ble,pwsin th.n avschmosu,nhn auvtou/. 보아라. 내가 도둑같이 온다. 복 되도다 (단수형). 누구든지 깨어서 자기의 옷을 지켜 벌거벗은 채 다니지 않고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않는 자여! (계 16:15). |
| 넷째 복 | Kai. le,gei moi( Gra,yon\ Maka,rioi oi` eivj to. dei/pnon tou/ ga,mou tou/ avrni,ou keklhme,noiÅ kai. le,gei moi( Ou-toi oi` lo,goi avlhqinoi. tou/ qeou/ eivsinÅ 그 천사가 내게 “너는 쓰라. 복 되도다 (복수형). 어린 양의 혼인잔치에 초대 받은 자들이여!”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가 내게 “이것들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다”라고 말한다 (계 19:9). |
| 다섯 째 복 | maka,rioj kai. a[gioj o` e;cwn me,roj evn th/| avnasta,sei th/| prw,th|\ evpi. tou,twn o` deu,teroj qa,natoj ouvk e;cei evxousi,an( avllV e;sontai i`erei/j tou/ qeou/ kai. tou/ Cristou/ kai. basileu,sousin metV auvtou/ Îta.Ð ci,lia e;thÅ 복되고 (단수형) 거룩하도다.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여! 둘째 사망이 이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들이 되어 천년 동안 그분과 함께 다스릴 것이다 (계 20:6). |
| 여섯 째 복 | kai. ivdou. e;rcomai tacu,Å maka,rioj o` thrw/n tou.j lo,gouj th/j profhtei,aj tou/ bibli,ou tou,touÅ 보아라, 내가 속히 온다. 복 되도다 (단수형). 이 책의 예언의 말씀들을 지키는 자여! (계 22:7). |
| 일곱 째 복 | Maka,rioi oi` plu,nontej ta.j stola.j auvtw/n( i[na e;stai h` evxousi,a auvtw/n evpi. to. xu,lon th/j zwh/j kai. toi/j pulw/sin eivse,lqwsin eivj th.n po,linÅ 복 되도다 (복수형). 생명나무를 차지할 권세를 가지 위해 그 문들을 통해 그 성안으로 들어가려고 자기의 옷들을 빠는 자들이여! (계 22:14). |
계시록의 7복은 완전을 상징하는 숫자 7과 연관 지을 때 ‘완전한 복’을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첫째 복과 여섯 째 복은 내용상 일치한다. 따라서 계시록 전체는 ‘복 되도다’라는 표현으로 인클루시오 구조를 가진다. 말씀에 순종하고, 죽을 때까지 주님을 믿으며 살고, 깨어 근신하며, 어린 양이요 신부이신 예수님과 더불어 살고, 거듭난 후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왕 노릇하며 살며, 회개하며 사는 자가 복되다. ‘복 되도다’라는 말씀은 디아스포라의 불신 유대인들과 로마제국으로부터 박해를 받던 계시록의 수신자들에게 위로를 주기 위해서 이다.
2.4. 요약
신약의 복은 ‘존재론적인 복’을 중요하게 여긴다. 8복을 서론으로 둔 산상설교는 하늘나라 백성의 윤리라고 할 수 있는데, 성도는 이미 복된 자가 되었기에 신분에 걸맞게 살아야 함을 가르친다. 천국 백성은 예수님으로부터 책망을 받은 위선적인 바리새인들과는 달라야 했다.
바울은 에베소 성도가 이미 받은 영광스러운 신분과 기업을 깨닫도록 기도했다. 바울처럼 베드로도 구약과 비교되지 않는 온전한 기업 그리고 생명과 경건을 이미 받은 성도가 그것을 깨닫도록 기도했다.
그리고 베드로는 주님의 이름 때문에 고난 받는 자를 영광의 성령이 임하시는 복된 자로 본다. 요한은 가이오의 영혼이 잘된 것처럼 그의 존재가 잘되고 건강하도록 범사를 위해서 통전적으로 기도했다.
계시록은 7복을 통해서 박해 받던 수신자들이 박해를 견디도록 주로 영적인 복을 약속했다. 신약 성경은 대부분 AD 60년 전후로 하여 기록되었는데, 박해 상황을 배경으로 한다.
신약 기자는 주로 물질적인 번성이라는 복 대신에, 하나님 나라와 예수님을 중심으로 하여 영적이고 존재론적인 복을 강조한다. 물론 천국 백성으로 신실하게 살 때 하나님은 물질적인 복을 주시기도 한다. 신약 성경은 잘 먹고 잘 사는 것, 일등하고 출세하는 것, 어려움 없이 무병장수하는 것을 복이라고 소개하지 않는다.
나오면서
약간의 예외를 제외한다면, 한국교회는 특목고나 명문대에 진학하는 것, 대기업에 입사하는 것, 승진하고, 건강한 것을 복이라고 믿는다. 이것은 불신자와 구분되지 않는 지극히 출세지향적인 복 개념이며 거짓 실용주의적 발상이다. ‘이미와 아직 아니’에 근거하여 천국에 대한 균형 잡힌 시각이 많이 교육되어 왔음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의 천국 개념은 여전히 미래 중심적이다. 그러나 복 개념은 현세 중심적이다.
왜 이런 모순된 현상이 일어날까?
다수의 한국 성도는 구원의 확신을 가진 채 미래적 천국과 영생 그리고 구원을 기대하며 산다. 따라서 여기 이미 임한 천국과 영생을 누림이라는 역동적인 생활이 약하다. 그러므로 미래적 천국 개념과 현세적 복 개념은 모순이 아니라 자연스런 연결이다. 언약 신앙이 약하므로, 하나님 자신이 성도에게 최고의 복임을 놓치는 경향이 많다. 그리고 많은 경우에 성도가 이미 존재론적으로 복된 사람임을 간과한다.
무엇보다 벧전 4:14절이 교훈하듯이, 한국교회는 그리스도의 이름과 복음을 위해서 고난을 받는 것이 복임을 애써 무시하지 않는가? 주님의 이름 때문에 고난당하는 자 위에 영광스런 성령님이 함께 계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현존 (presence)이 우리에게 최고의 선물 (present)임을 기억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 무엇보다 한국교회에 언약 신앙이 확립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물질적이며 현세적이고 기복적인 복을 주로 추구하는 한국교회를 교정할 현실적인 대책은 무엇인가? 무엇보다 설교에서 “여러분이 복 받기를 축원합니다”에서 “여러분은 이미 하나님의 복을 받은 존재이며, 받은 복을 깨닫고 감사하며 살기 바랍니다”로 바꿀 필요가 있다. 구체적인 대책은 종말론적인 하나님 나라와 언약 그리고 예수님을 중심으로 하여 존재론적이며 영적인 복을 먼저 가르치는 복 개념을 숙고하는 사람에게 숙제로 남겨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