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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삶이 머무는 마음의 고향 원문보기 글쓴이: 月田(金直漢)
충절의 고장 '순흥' | ||||||||||
세종 임금의 여섯째 아들이자 단종 임금의 숙부인 금성대군은 그 형인 수양대군 (세조임금)의 속셈을 늘 경계했다. 마침내 수양이 조카 단종의 자리를 빼앗고 왕위에 오르자 금성은 모반의 누명을 쓰고 삭령 (지금의 경기도 연천)에 유배 되었다가 광주에 이배 되었고(1456년), 이듬해 성삼문, 박팽년 등 사육신의 단종 복위운동이 실패하자 그 연루로 순흥 땅에 다시 유배됐다.
1457년 여름 어느날, 수양을 몰아내고 단종을 복위시킬 결심을 다시 세운 금성은 순흥부사 이보흠(집현전 출신으로 단종의 아버지인 문종이 세자 때부터 총애한 인물), 순흥의 양반·백성들과 함께 단종을 복위키로 뜻을 모았다. 관련 야사 기록을 종합해 보면 금성은 순흥의 군사와 순흥 남쪽의 모의에 참여한 수령, 양반, 백성들을 동원해 당시 강원도 영월에 유배된 단종을 옮겨 모시기로 했다. 이어 조령(문경새재)과 소백산의 죽령 두 길을 막아 서울과의 교통을 끊은 뒤 영남의 민심을 얻어 독립정권을 세워 서울로 쳐들어갈 계획이었던 것으로 추론된다. 거사를 성공하기 위해선 무력이 필요하지만 당시 지방 고을에는 군액(병역 대상자의 정원과 명단)만 있었을 뿐 부사 이보흠이 동원할 대규모의 상비군은 없었다. 그리하여 금성은 대의와 명분을 표방한 격문을 앞세워 먼저 영주를 접수하고 안동에 진출해 2천~3천명의 군사를 동원하는 한편 죽령과 조령을 막고 영남 일대 고을에 격문을 돌리면 대사를 성공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하지만 어찌하랴.
막 출병을 서둘던 가을 어느날 밤, 비밀회의를 엿들은 한 관노(官奴)가 격문을 훔쳤고 관청에 고자질해 갑작스런 관군의 급습으로 금성의 단종 복위운동은 실패로 돌아갔다. 이로 인해 금성과 의거의 주역 (이보흠 등 21명)은 물론 순흥고을 백성(최소 400명)은 참혹한 죽음을 맞이했다. 순흥은 온통 피바다가 돼 30리 안에는 사람의 그림자가 끊겼고, 하루아침에 폐허가 되었다. 고려 말의 명문 집안인 순흥 안씨의 경우 피해가 가장 커 거의 멸문의 화를 당했고, 당시 피가 죽계계곡을 메워 20리 하류인 '피끈'에 이르렀다고 한다. '피끈'이라는 지명이 그 비극을 전하고 있는 셈이다 (안정면 동촌리).
이후 순흥은 도호부가 폐지돼 고을 이름조차 역사에서 사라져 버렸다. 왕권과 관련된 복위운동이어서 조정의 그 누구도 감히 순흥의 역사를 거론할 수 없었다. 후환이 두려워서다. 무려 200여년의 세월이 흘러 숙종이 즉위하면서 드디어 서민으로 격하됐던 단종이 대군으로 올려지고, 숙종 9년인 1683년 순흥부가 회복됐다. 또 단종 복위운동이 실패한지 260 년 만인 숙종 45년(1719년)에 금성과 이보흠 등을 기리는 금성단(소수서원 앞에 위치)이 설치됐다. 순흥 지방 기록에 의하면 당시 순흥 고을 사람들이 도호부사 행렬을 맞이하기 위해 죽령 고개까지 나갔다고 하니 순흥 사람들이 얼마나 옛 영광을 회복하고 싶어했는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금창헌 영주 소수박물관장은 "순흥의 아픔은 수백년간 묻혀 오다가 숙종 대 이후부터 단종 복위, 순흥부 복설, 금성대군과 이보흠 등에 대한 신원과 복권이 연이어 이뤄지면서 드디어 세상에 그 진실이 알려지게 됐다"고 밝혔다. 왜 순흥이 충절의 고장으로 거듭나게 됐는지 단종 복위운동에 그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만약 순흥도호부가 수백년간 사라지지 않고 역사의 주역으로 계속 명성을 이어갔다면 ? 박석홍 영주시 학예연구원은 "아마 지금보다 더 화려하고 찬란한 역사·문화를 꽃 피웠을 것이고, 수많은 학자와 관료를 배출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현재 단종 복위운동과 관련된 역사의 산물은 금성단이 유일하다시피하다. 금성단은 금성대군과 부사 이보흠, 당시 단종 복위운동에 가담한 의사들의 신위를 모신 곳이다. 지금 영주는 순흥의 옛 영광을 회복하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고 있다. 지난해 말 영주문화원 주최의 '순흥 단종 복위의거 학술포럼'을 시작으로 순흥 역사 바로세우기가 시작됐다. 비록 순흥에 단종 복위운동의 생생한 역사 유적은 적지만 순흥이 한 임금을 끝까지 섬긴 충절의 고장이고, 이후 선비의 표상으로 거듭난 고을임은 명백하다. 이제 순흥에서 영주 선비와 백성의 고귀한 충절을 한껏 느껴야 하지 않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