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정보
카페 프로필 이미지
가나안 신자와 초보 신학생
카페 가입하기
 
 
 
카페 게시글
성경묵상 나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사다리이신 예수님
장코뱅 추천 4 조회 242 23.11.08 08:18 댓글 17
게시글 본문내용
 
다음검색
댓글
  • 작성자 23.11.08 08:57

    첫댓글 밥 비슬리 목사님은 국내에 많이 알려진 편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분이 쓴 책 『구약 성경에 나타난 101가지 예수님의 형상』을 번역한 스데반 황 목사님은 건전한 설교와 안정적인 목회로 인해서 국내에 꽤 알려져 있습니다. 저는 스데반 황 목사님이 존 맥아더에 대해 객관적이고 냉정한 분별을 (용감하게?) 해주신 것을 보고서 호감을 가졌고 존중할 부분이 많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 23.11.08 14:24

    네, 공감힙니다.

  • 작성자 23.11.08 09:05

    <IVP 성경주석: 모세오경>, 창28:10-22 야곱이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나다

    개인의 위기는 종종 영적 체험의 기회가 된다. 이것은 야곱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집을 떠나 외지로 가는 길에 그는 노천에서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여호와께서 맨 처음 아브라함에게 주셨고 이삭에게 반복되었던 땅과 자손 복의 약속들을 그에게 다시 말씀하셨다. 그런데 여기에 새 요소가 추가되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15절). 하나님이 동행하시겠다는 약속은 이스라엘의 많은 지도자에게 주어진 것이요(참고, 출 3:12; 수1:5: 삿 6:16), 실제로 그리스도가 자기를 따르는 모든 자에게 주신 약속이다(마28:20; 히 13:5-6). 그러나 다른 많은 약속과 달리야곱은 그의 수호 천사들을 보는 특권을 누렸다(참고, 마 18:10; 26:53).

    다음 날 아침 일어나서 그는 하나님 임재의 상징으로서 돌로 신성한 기둥을 세웠고 그는 그것을 신성하게 하려고 그 위에 기름을 부었다. 그 다음에 그는 만약 하나님이 그를 무사히 돌아오게 하신다면 소득의 십일조를 바치겠다고 서원하며 맹세했다.

  • 작성자 23.11.08 09:05

    이같은 서원들은 그 때나 지금이나 절망 중에있는 사람들이 흔히 하는 것이다(참고 삼상1:11). 구약에서 서원자가 자기의 서약을 수행하는 한 그들의 소망은 좌절되지 않는다(참고 신 23:21-23; 전 5:4-6). 서원이 꼭 하나님과의 거래인 것은 아니고, 그것은 하나님께 우리가 의존한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다. 또한 여기에서 야곱의 서원은 지금 막 그에게 주어진 약속에 대한 불신의 표현이 아니다(15절). 왜냐하면 모든 탄원의 기도는 우리의 필요를 공급하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이다(참고, 마 6:11과 6:25-34의 비교).

    주․ 19절. 벧엘(하나님의 집')은 예루살렘북쪽으로 약 19km 떨어진 곳이다.

  • 23.11.08 14:25

    @장코뱅 좋은 주석의 설명을 잘 참고하겠습니다.

  • 작성자 23.11.08 09:18

    <베이커 성경주석: 구약편>, 창28:10-22

    브엘세바와 하란 사이의 어디쯤, “한 곳”(28:11)이라고 모호하게 나온 장소에서 야곱은 자려고 준비한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이 꿈을 통해 말씀하시는 세 번째 경우를 보게 된다(28:10~22; 창 15:22, 20:3). 아마도 이 세 번의 계시는 모두 밤에 이루어졌을 것이다.

    야곱은 꿈에서 하늘로부터 땅으로 이어져 있는 계단 또는 경사로를 본다. 그 위에서는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하고 있다. KJV는 '계단’(stairway: NIV)이 아니라 '사닥다리'(ladder)라고 되어 있다. 두 가지 이유로 해서 '계단'이라는 번역이 널리 받아들여진다. 첫째, 그것은 바벨론의 지구라트, 또는 계단식 탑 및 그 계단과 비교가 된다. 둘째, 사닥다리에서 쌍방통행을 하는 것은 생각할 수가 없다. 하지만 이 둘째 사항은 논의의 여지가 있다. 그리고 그렇게 따지면 왜 천사들이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 할 뭔가가 필요하단 말인가? 전통적인 ‘사닥다리'라는 번역을 계속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 작성자 23.11.08 09:18

    이때 하나님은 야곱에게 처음으로 말씀하신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전에 야곱이 한 어떤 무분별한 짓에 대해서도 그를 꾸짖지 않으신다. 반대로 하나님은 야곱에게 자손, 땅, 영적 영향력, 그리고 하나님 자신의 임재를 포함하는 약속을 주신다(28:13~15). 그것은 에서를 속여 등쳐먹고, 이삭의 눈을 속였으며, 약속의 땅에 들어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땅에서 도망하고 있는, 발꿈치를 붙잡은 야곱에게 주신 약속들이다.

    이에 대한 야곱의 반응은 좀 이상하다. 야곱은 두려워한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자신을 보여주셨을 때마다, 아브라함은 절대 떨지 않았다. 아마 이 점에서 야곱과 가장 유사한 사람은 아담이었을 것이다. 아담은 여호와의 임재가 분명해졌을 때, 동산에서 두려워했다. 야곱의 경우에, 이 두려움은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경외감에서 나온 것인가? 그 자신의 영적 무감각에서 나온 것인가 또는 죄의식에서 나온 것인가?

    야곱은 이 장소를 “벧엘”이라고 부른다. 그것은 “하나님의 집/거주지"라는 의미다. 더 이상 그것은 단순히 하나의 장소, 하나의 위치가 아니다.

  • 작성자 23.11.08 09:19

    그것은 이제 엘의 거주지다. 이야기 후반에 가서야 우리는 전에 그 신전이 루스라고 불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28:19). 하나님과의 이런 만남을 기념하기 위해, 야곱은 자기가 베고 잤던 돌을 취해 그것을 기둥으로 세운다(그것은 후에 특정한 맥락에서는 부정한 것이 되지만, 족장 시대에는 허용될 수 있는 현상이다).

    야곱의 서원은 15절의 약속은 취하지만 14절은 배제한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야곱이 관심을 가지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 및 자신이 도망쳤던 땅에 안전하게 돌아오는 것이다. 서원의 절정은 야곱이십일조를 하겠다고 말하는 것이다(28:22). 이것은 벧엘에서의 만남을 오로지 감정적인 영역에서 자기 부인 및 청지기직의 영역으로 옮겨 가게 한다.

    “동방 사람”(29:1)은 가나안 동쪽에 사는 어떤 사람이든 지칭하는 일반적인 호칭으로 사용된다. 야곱은 우물 근처에서 떼를 지어 서성거리고 있는 많은 목자들을 만난다. 그 우물은 큰 돌로 덮여 있다. 다행히도 이 목자들은 라반이 누구인지 알고 그의 건강 상태가 어떤지 안다.

  • 작성자 23.11.08 09:19

    그리고 더 좋은 것은 야곱이 우물에 있는 동안 라반의 딸 라헬이 우물로 오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우연히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도를 나타낸다(29:1~14).

    야곱은 목자들에게 그들의 양 떼를 먹이고 다시 가서 풀을 뜯게 하라고 재촉한다. 목자들이 그것은 절차를 어기는 것이라고 항변하자, 야곱 자신이 돌을 굴린다. 이 모든 것은 야곱이 라헬과만 어느 정도 시간을 보내기 위해 일부러 꾸며 낸 일일 것이다. 야곱이 라헬에게 입을 맞춘 것은 경솔한 행동이거나 구애가 시작되기도 전에 끝내 버리는 것이 아니라, 당시의 관습으로 봐야 한다.

  • 23.11.08 14:27

    @장코뱅 IVP 주석보다 더 복음적인 살명을 하는 것 같근요. 좋습니다.

  • 23.11.09 07:53

    @장코뱅 내용이 좋습니다.

  • 23.11.13 09:22

    @노베 공감합니다.

  • 23.11.08 11:43

    야곱이 본 하늘 사다리를 계단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낫겠어요. 오르락 내리락 하는 데 유용하려면 계단이 안정적이겠죠.
    야곱의 이 꿈은 하나님과 인간의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성취되었네요.
    야곱을 비롯한 이스라엘 족장들의 일생은 당연히 예수님과 깊은 연관이 있는데, 하나하나 들여다 보면 시사점들이 매우 많아서 연구할 것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좋은 책이네요. 감사합니다.

  • 작성자 23.11.08 11:46

    좋은 댓글과 풍성한 공감에 매우 감사합니다.

  • 23.11.08 14:30

    네, 계단이 더 좋은 것 같습니다.

  • 23.11.08 14:31

    비슬리 목사님의 은혜의 묵상을 보며 제 믿음이 풍상해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 23.11.09 07:54

    공감합니다.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