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사다리이십니다. 신약교회에도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손자 야곱에게 보여진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사다리의 실상은 예수 그리스도이셨습니다. 그 약속이 성취된 말씀이 요한복음에 나타나는데요. 이러한 내용을 구분선 아래에서 밥 비슬리 목사님의 설명을 통해서 들으면 우리 믿음의 이해력이 더욱 증진될 것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사다리이신 예수님
창세기 28:10-12 야곱이 브엘세바에서 떠나 하란으로 향하여 가더니 한 곳에 이르러는 해가 진지라 거기서 유숙하려고 그 곳의 한 돌을 가져다가 베개로 삼고 거기 누워 자더니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서 있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 하고 |
아마도 당신은 야곱의 속임수에 대해 들어보았을 것이다. 그는 그의 형을 속여 장자권을 빼앗았을 뿐만 아니라 나중에는 아버지 이삭마저 속여 에서가 받을 축복을 앗아갔다. 그 후 야곱은 에서의 보복이 두려워 어머니 리브가의 제안을 따라 브엘세바로 도망하여 하란에 있는 친척 집으로 계속 향하여 나아갔다. 위의 구절에서 우리는 메소포타미아로 향하는 야곱을 본다. 그는 루스라고 불리는 장소에서(나중에 그 장소 이름은 벧엘로 바뀌었다) 하루 밤을 지내게 된다. 이때 그는 700 킬로미터의 여행 중에 단지 10% 정도 여행한 상태였다.
야곱은 바위를 하나 찾아서 베게로 삼고 자다가 너무나 이상한 꿈을 꾸게 된다. 그는 꿈에서 하늘까지 닿는 큰 사다리를 본다. 그 사다리가 뭔지 모르지만 어마어마하게 크고 높았다. 야곱은 그 사다리에서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하는 장면을 본다. 여기서 하나님의 사자들이란 하나님의 '천사들'이다. 창세기에서도 종종 천사들이 언급되지만 성경 전반에 걸쳐 천사가 언급된다. 히브리서 12장 22절은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 산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라고 말한다. 히브리서 기자는 "모든 천사들은 섬기는 영으로서 구원 받을 상속자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히 1:14)을 받았다고 설명한다.
이 어마어마한 사다리 위에 천사들이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첫째, 하늘, 즉 하늘의 예루살렘이 존재한다는 뜻이다. 둘째, 하늘은 참으로 이 땅에 관심이 많다는 사실이다. 사다리 꼭대기 중심에는 하나님이계시고 그 하나님은 피조물인 사람에게 관심이 많으셔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다.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창 22:17). 우리는 이 약속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졌음을 안다.
안타깝게도 야곱이 이 약속을 받았을 때 믿음으로 행하지 않았다. 사실 그는 그의 죄의 결과로부터 도망을 하고 있었는데 이는 믿음의 행위와 반대된 행동이다. 나아가 그의 불신앙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그의 반응에서 잘 나타난다. 창세기 28장 20절에서 22절을 보면 야곱의 서원이 나온다. "야곱이 서원하여 이르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셔서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떡과 입을 옷을 주시어 내가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이 내용을 보면 그의 서원이 조건적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그를 위하여 이러 저러한 모든 것을 해 주시면 그때 주께 순복하겠다고 한다. 지금 이러한 자세는 믿음이 아니라 흥정이다! 야곱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흥정하고 있다. 즉, 야곱의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이 실제로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있지 않았다. 이는 야곱의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완전한 은혜임을 알려주는 것이다.
하늘에서 말씀하셨던 하나님은 야곱의 불신앙에도 불구하고 결국 야곱에게 은혜를 베푸셨다. 그 은혜는 먼 훗날에 보내실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로 인함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야곱의 사다리가 의미하는 것처럼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시다. 나다나엘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을 때 주께서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또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요 1:50-51)
예수님은 새 언약의 중보자이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은혜에 의하여 하늘과 영생에 이른다. 따라서 하늘 아버지는 죽은 자의 아버지가 아니라 모든 산자의 아버지다. 오직 예수님만이 하늘과 땅의 그 무한한 간격을 이으시는 사다리다.
밥 비슬리, 『구약 성경에 나타난 101가지 예수님의 형상』, pp.70∼72.
첫댓글 밥 비슬리 목사님은 국내에 많이 알려진 편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분이 쓴 책 『구약 성경에 나타난 101가지 예수님의 형상』을 번역한 스데반 황 목사님은 건전한 설교와 안정적인 목회로 인해서 국내에 꽤 알려져 있습니다. 저는 스데반 황 목사님이 존 맥아더에 대해 객관적이고 냉정한 분별을 (용감하게?) 해주신 것을 보고서 호감을 가졌고 존중할 부분이 많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네, 공감힙니다.
<IVP 성경주석: 모세오경>, 창28:10-22 야곱이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나다
개인의 위기는 종종 영적 체험의 기회가 된다. 이것은 야곱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집을 떠나 외지로 가는 길에 그는 노천에서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여호와께서 맨 처음 아브라함에게 주셨고 이삭에게 반복되었던 땅과 자손 복의 약속들을 그에게 다시 말씀하셨다. 그런데 여기에 새 요소가 추가되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15절). 하나님이 동행하시겠다는 약속은 이스라엘의 많은 지도자에게 주어진 것이요(참고, 출 3:12; 수1:5: 삿 6:16), 실제로 그리스도가 자기를 따르는 모든 자에게 주신 약속이다(마28:20; 히 13:5-6). 그러나 다른 많은 약속과 달리야곱은 그의 수호 천사들을 보는 특권을 누렸다(참고, 마 18:10; 26:53).
다음 날 아침 일어나서 그는 하나님 임재의 상징으로서 돌로 신성한 기둥을 세웠고 그는 그것을 신성하게 하려고 그 위에 기름을 부었다. 그 다음에 그는 만약 하나님이 그를 무사히 돌아오게 하신다면 소득의 십일조를 바치겠다고 서원하며 맹세했다.
이같은 서원들은 그 때나 지금이나 절망 중에있는 사람들이 흔히 하는 것이다(참고 삼상1:11). 구약에서 서원자가 자기의 서약을 수행하는 한 그들의 소망은 좌절되지 않는다(참고 신 23:21-23; 전 5:4-6). 서원이 꼭 하나님과의 거래인 것은 아니고, 그것은 하나님께 우리가 의존한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다. 또한 여기에서 야곱의 서원은 지금 막 그에게 주어진 약속에 대한 불신의 표현이 아니다(15절). 왜냐하면 모든 탄원의 기도는 우리의 필요를 공급하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이다(참고, 마 6:11과 6:25-34의 비교).
주․ 19절. 벧엘(하나님의 집')은 예루살렘북쪽으로 약 19km 떨어진 곳이다.
@장코뱅 좋은 주석의 설명을 잘 참고하겠습니다.
<베이커 성경주석: 구약편>, 창28:10-22
브엘세바와 하란 사이의 어디쯤, “한 곳”(28:11)이라고 모호하게 나온 장소에서 야곱은 자려고 준비한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이 꿈을 통해 말씀하시는 세 번째 경우를 보게 된다(28:10~22; 창 15:22, 20:3). 아마도 이 세 번의 계시는 모두 밤에 이루어졌을 것이다.
야곱은 꿈에서 하늘로부터 땅으로 이어져 있는 계단 또는 경사로를 본다. 그 위에서는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하고 있다. KJV는 '계단’(stairway: NIV)이 아니라 '사닥다리'(ladder)라고 되어 있다. 두 가지 이유로 해서 '계단'이라는 번역이 널리 받아들여진다. 첫째, 그것은 바벨론의 지구라트, 또는 계단식 탑 및 그 계단과 비교가 된다. 둘째, 사닥다리에서 쌍방통행을 하는 것은 생각할 수가 없다. 하지만 이 둘째 사항은 논의의 여지가 있다. 그리고 그렇게 따지면 왜 천사들이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 할 뭔가가 필요하단 말인가? 전통적인 ‘사닥다리'라는 번역을 계속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이때 하나님은 야곱에게 처음으로 말씀하신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전에 야곱이 한 어떤 무분별한 짓에 대해서도 그를 꾸짖지 않으신다. 반대로 하나님은 야곱에게 자손, 땅, 영적 영향력, 그리고 하나님 자신의 임재를 포함하는 약속을 주신다(28:13~15). 그것은 에서를 속여 등쳐먹고, 이삭의 눈을 속였으며, 약속의 땅에 들어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땅에서 도망하고 있는, 발꿈치를 붙잡은 야곱에게 주신 약속들이다.
이에 대한 야곱의 반응은 좀 이상하다. 야곱은 두려워한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자신을 보여주셨을 때마다, 아브라함은 절대 떨지 않았다. 아마 이 점에서 야곱과 가장 유사한 사람은 아담이었을 것이다. 아담은 여호와의 임재가 분명해졌을 때, 동산에서 두려워했다. 야곱의 경우에, 이 두려움은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경외감에서 나온 것인가? 그 자신의 영적 무감각에서 나온 것인가 또는 죄의식에서 나온 것인가?
야곱은 이 장소를 “벧엘”이라고 부른다. 그것은 “하나님의 집/거주지"라는 의미다. 더 이상 그것은 단순히 하나의 장소, 하나의 위치가 아니다.
그것은 이제 엘의 거주지다. 이야기 후반에 가서야 우리는 전에 그 신전이 루스라고 불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28:19). 하나님과의 이런 만남을 기념하기 위해, 야곱은 자기가 베고 잤던 돌을 취해 그것을 기둥으로 세운다(그것은 후에 특정한 맥락에서는 부정한 것이 되지만, 족장 시대에는 허용될 수 있는 현상이다).
야곱의 서원은 15절의 약속은 취하지만 14절은 배제한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야곱이 관심을 가지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 및 자신이 도망쳤던 땅에 안전하게 돌아오는 것이다. 서원의 절정은 야곱이십일조를 하겠다고 말하는 것이다(28:22). 이것은 벧엘에서의 만남을 오로지 감정적인 영역에서 자기 부인 및 청지기직의 영역으로 옮겨 가게 한다.
“동방 사람”(29:1)은 가나안 동쪽에 사는 어떤 사람이든 지칭하는 일반적인 호칭으로 사용된다. 야곱은 우물 근처에서 떼를 지어 서성거리고 있는 많은 목자들을 만난다. 그 우물은 큰 돌로 덮여 있다. 다행히도 이 목자들은 라반이 누구인지 알고 그의 건강 상태가 어떤지 안다.
그리고 더 좋은 것은 야곱이 우물에 있는 동안 라반의 딸 라헬이 우물로 오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우연히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도를 나타낸다(29:1~14).
야곱은 목자들에게 그들의 양 떼를 먹이고 다시 가서 풀을 뜯게 하라고 재촉한다. 목자들이 그것은 절차를 어기는 것이라고 항변하자, 야곱 자신이 돌을 굴린다. 이 모든 것은 야곱이 라헬과만 어느 정도 시간을 보내기 위해 일부러 꾸며 낸 일일 것이다. 야곱이 라헬에게 입을 맞춘 것은 경솔한 행동이거나 구애가 시작되기도 전에 끝내 버리는 것이 아니라, 당시의 관습으로 봐야 한다.
@장코뱅 IVP 주석보다 더 복음적인 살명을 하는 것 같근요. 좋습니다.
@장코뱅 내용이 좋습니다.
@노베 공감합니다.
야곱이 본 하늘 사다리를 계단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낫겠어요. 오르락 내리락 하는 데 유용하려면 계단이 안정적이겠죠.
야곱의 이 꿈은 하나님과 인간의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성취되었네요.
야곱을 비롯한 이스라엘 족장들의 일생은 당연히 예수님과 깊은 연관이 있는데, 하나하나 들여다 보면 시사점들이 매우 많아서 연구할 것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좋은 책이네요. 감사합니다.
좋은 댓글과 풍성한 공감에 매우 감사합니다.
네, 계단이 더 좋은 것 같습니다.
비슬리 목사님의 은혜의 묵상을 보며 제 믿음이 풍상해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공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