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07. 05
신기술 시장 진입 확 넓히고 기득권 카르텔 깨야
1977년경, 김재익 경제기획원 기획국장이 중앙정보부에 불려가서 뇌물 수수 여부를 추궁받았다. 무슨 일이 있었던가. 전전자식교환기(TDX)로 기존의 기계식 전화교환기를 교체하려는 정책을 입안 추진하는 과정에서 생긴 해프닝이었다. 기존 교환기업계의 반발이 그 배경에 도사리고 있던 것으로 추정된다. 1970년대의 가정용 전화기는 백색(개인 소유)과 청색(이사하면 반납) 전화로 나뉘었다. 백색이든 청색이든 전화기 설치엔 오랜 시일이 소요됐다.
이런 전화기 설치의 적체는 반수동식 전화교환기 때문이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전화교환기를 전자식으로 교체해야 했다. 그 교체 작업을 김 국장이 입안해서 추진했다. 그런데 당시 전화 업무의 주무 부처였던 체신부가 전자교환기 시스템으로 교체하는 정책에 반대하는 입장을 표명했다.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겠지만, 결과적으로 기존 기계식 교환기 업계의 입장에 동조했던 셈이다.
1977년 전화교환기 교체 갈등
기존업계와 주무 부처의 반대가 거센 가운데 시중에 김 국장의 뇌물 수수설까지 나돌았다. 전혀 근거 없음이 밝혀졌지만, 전자식 교환기로의 교체 추진은 어려워졌다. 그러나 전두환 정권에 들어와 이 계획은 재탄생했다. 김 국장이 경제수석으로 발탁되자 전 대통령을 설득해 이 정책을 재추진한 것이다.
기술의 진보는 새로운 기술적 아이디어의 연구·개발, 상용화, 전파의 과정을 거쳐 이루어진다. 기술혁신이란 이 전 과정을 의미하기도 하고, 좁게는 새로운 아이디어의 상용화를 가리키기도 한다. 연구(Research)는 새로운 지식의 발견을 위한 노력이다. 이 새로운 지식의 기술적·상업적 완성도를 높여가는 과정이 개발(Development)이다. 개발단계를 거치면서 기업인들이 그 새로운 지식의 사업적 타당성을 검토해 상업적 생산 여부를 결정한다.
TDX 프로젝트는 연구단계에선 기득권(기계식 교환기 생산업계와 주무 행정부처인 체신부)에 의해 좌절됐다. 기술혁신의 전 과정에서 이런 발목잡기는 다양한 형태로 가능하다.
정부의 다양한 행정조직들이, 특히 특허청, 과거의 공업진흥청(현재 중소벤처기업부에 흡수), 식품의약품안전처, 질병관리청, 여러 종류의 시험연구원, 검역원 등이 기술혁신의 전 과정에 걸친 행정 절차를 관리한다. 이런 행정 관문의 통과 과정에서 기득권 질서(관료조직, 기존 법규, 기존업계)가 TDX와 유사한 사례를 재연시킬 수 있다.
혁신의 최대 걸림돌은 기득권
여러 행정 관문을 통과하더라도, 판매단계에 들어가면 기존 유통시장의 폐쇄성이나 기존 거래처들의 위험부담 기피 경향이 신기술 제품의 시장진입을 어렵게 한다. 그런데 이런 시장의 반응이 기존 기득권 업체의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한 뒷거래나 유관 행정기관의 암묵적 가이드라인에 의해서 형성된다면 어떻게 될까. 이것은 불공정거래이고 부패의 한 단면일 수도 있다.
1977년에 이어 1981년에도 국내의 기계식 교환기 업계와 체신부가 국산 TDX 연구·개발의 저지에 성공(?)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기계식 교환기 업체는 계속 생존했을까. 아니다. 관련 전자교환식 신기술 제품이 해외에서 수입돼 국내 기계식 교환업체들은 도태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해외 수입 제품으로 문제를 해결했다면, 국내 인터넷과 전자 기술 발전의 독자적 기반 구축은 어려웠을 것이다. 해외 제품에 의존했다면 오늘의 인터넷과 5세대(5G) 이동통신 강국, 모바일 폰과 반도체 세계 선도국으로서의 한국이 가능했을까. 불가능했다고 본다.
기술력은 경제·안보의 생명줄
삼성전자 평택 반도체 공장 방문으로부터 시작한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최근 방한에서 우리는 기술력이 한국경제와 국가안보의 생명줄임을 명확히 인식했다. 한 국가의 기술력은 내생적 기술혁신의 축적된 결과이다. 때문에 현시점에서 한국의 신기술 연구·개발·상용화에 관련된 기득권 질서(업계와 유관 행정조직, 관련 법규 등)의 상황을 재조명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현재의 우리 사회에는 1977년의 TDX 계획을 좌절시켰던 업계 풍토와 정부 조직의 무지, 무책임성이 사라졌다고 믿고 싶다. 그러나 업계와 관계에 아직 70년대식 사고가 일부 잔존하고 있다고 본다.
우선 업계의 문제를 시정할 수 있는 공정거래위원회를 보자. 안타깝게도 기술적 전문성과 연관되기 때문에 공정위원회가 이런 문제에 쉽게 접근하기는 어렵다. 첨단 신기술의 역할이 경제에서 차지하는 의미가 커진 상황에서 공정위는 이제 신기술 제품의 시장 진입장벽에 대해서 더 큰 관심을 가져야 한다. 역동적 혁신 생태계에서의 공정성은 시장진입 기회의 개방성과 균등성 보장에 있기 때문이다.
신기술 허가·승인·인증기관들은 어떤 상황일까. 기술혁신 과정에서 창출되는 새로운 아이디어나 신기술 제품을 관리하는 한국의 행정기관들엔 절대권력의 잠재성이 내재해 있다. 그 근거는 기술적 전문성이다. 이들이 기술적 전문성을 내세우면 그 누구도 대항하기 어렵다.
코로나 19 대응에서 질병관리청이 행사해 온 절대권력을 우리는 경험하고 있다. 신속 항원검사는 ‘대한 진단검사의학회’ ‘행동하는 여의사회’ 등 다수의 전문가 그룹이 과학적 데이터를 근거로 검사 정확도가 낮아 방역 수단으로서 위험한 선택이라고 우려했다. 그러나 질병청은 공개토론 과정도 없이 ‘확진 판정’용으로 활용하도록 했다. 질병청 자신도 신속 항원검사의 낮은 검사 정확도를 인정한 바 있다.(2020.11.17. 2021.4.30. 질병관리청 Q&A, 중앙방역대책본부)
대기업에 발목 잡힌 중소기업
다른 한편으론 높은 검사 정확도로 식약처로부터 일반사용 승인을 받은 진단키트(RT-QPCR)를 사용하는, 여주시의 현장 PCR 검사는 속도·비용·편의성 등에서 혁신적인데도 외면당했다. 여주시가 18만여 명의 검사·분석 데이터를 제시했지만 질병청은 사용 용도 제한을 해제하지 않았다.
주부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은 ‘모다모다 샴푸’는 미·일에선 사용 허가되고, 유럽에선 사용 금지된 성분(THB) 포함을 근거로 식약처가 사용금지를 예고했다. 그러나 규제개혁위원회가 ‘유해성 여부 재검증’을 권고해서 현재 1년이 걸리는 재검증이 진행 중이다. 그 사이 대기업들이 유사 상품을 출시했고, 최초로 제품혁신을 한 모다모다 샴푸 제조 중소기업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모다모다 샴푸의 경우는 적시성(適時性)의 중요성을 일깨워준다. 신기술 제품 관련 행정 절차에 소요되는 시간이 신기술 제품의 상업적 성공에 치명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신기술 제품 관련 행정조직들이 ‘민원 처리 법정 시한’ 지키지 않아도 업자들이 항의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고, 시간 지연으로 최초의 혁신 기업은 상업적으로 실패할 수도 있다.
김광두 / 국가미래연구원장, 남덕우 기념사업회장
중앙일보
역대 대통령의 규제 혁파, 왜 모두 실패했나
국가적 공익 차원에서는 절대권력이 필요할 수도 있다. 단 두 가지 전제조건이 충족돼야 한다.
첫째, 담당 관료들의 전문적 식견과 관련 법규가 꾸준히 새로워져야 한다. 기술이 급변하는 시대다. 행정 관료가 과거에 습득한 낡은 기술에 대한 식견을 기준으로 신기술을 판단하거나, 구기술을 기준으로 제정된 법규에 얽매여서는 안 된다. 디지털 시대에 아날로그 문법으로 디지털 기술을 읽으면 그 결과는 어떻게 되겠는가.
둘째, 신기술 유관 행정조직의 구성원들이 기존제품 생산업체들의 입김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과거 TDX 프로젝트에 반대하는 업계와 체신부가 동일한 입장이었던 결과, 한국의 TDX 개발은 4년이 지체되었다. 이들이 상호 독립적이었을까. 아이러니하게도 권력이 교체되면서 재추진이 가능해졌다.
지금 세계 경제 질서가 지각변동하고 있고, 국내 경제는 정부·가계·기업 모두 과다부채의 늪에 빠져 있는 상황에서 스태그플레이션이 진행 중이다. 사회는 자산 가격 급등과 좋은 일자리 감소로 계층 간 갈등으로 분열돼 있다.
돌파구를 찾아야 한다. 그 키워드는 성장동력의 회복·강화이다. 한국경제의 체질을 역동성이 넘치는 혁신 생태계로 바꾸어야 성장동력 회복이 가능하다. 혁신 생태계는 현상 유지형 기득권 중심의 경제 사회 질서와 행정 관행이 존속하는 한 조성되기 어렵다.
김영삼 대통령 이래 모든 대통령의 규제혁신 노력이 다 실패했다. 대부분의 경제활동 관련 규제는 기득권과 연결돼 있다. 기득권 카르텔에 내포된 암세포들을 정확히 진단하고 그 활동 기반을 파악하여 도려내지 못하면 규제 혁파는 성공하기 어렵다. 윤석열 대통령이 기득권으로 얽힌 신기술 제품 진입 저지망을 풀어헤쳐 역동성이 넘치는 혁신 생태계를 구축하는 첫 대통령이 되기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