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나님의 뜻으로 사는 삶(살전5:16-18)
오늘 하나님의 뜻으로 사는 삶이라고 하는 제목으로 오늘 그 첫째 시간을, 내일 둘째 시간 그렇게 가져보려고 합니다. 미국에 가면 현재 지구촌에서 그야말로 대학들이 모여있는 그 리그라고 그러죠. 그 중에 명문대학들만 모여 이름하여 “아이비리그”라고 하는 게 있습니다.
우리가 잘 들었던 하버드니 예일이니 뭐 그런 대학들 몇몇 대학들이 함께 모여서 원래는 이 스포츠리그였습니다만 이제는 명문대학의 리그가 됐죠. 아이비리그에 지금 현재 20년째 3대 명강의가 있습니다. 여러분 지구촌의 IB 리그에 20년째 3대 명강의라면, 지금 지구촌에서 가장 유명한 강의입니다. 그 첫 번째가 하워드대학교 마이클 샌들 이라고 하는 교수가 진행하는 정의란 무엇인가 라는 강의고요. 두 번째가 예일대학교의 쉐어리 케이근이라고 하는 교수가 진행하는 죽음이란 무엇인가 라는 강의고 세 번째로, 같은 하버드 대학교에 타우벤 샤하르 이스라엘 계통입니다.
타우벤 샤하르 교수가 진행하는 행복이란 뭔가? 이 3강의가 학기가 시작하자마자 다른 학생들이 미처 등록할 여지없이 바로바로 그야말로 초인기 강좌입니다. 정의란 무엇인가? 모든 젊은이들의 가슴을 뛰게 하는 영원한 주제죠! 죽음이란 무엇인가? 예 쉐어링 케이건의 이 강의는 인생의 근본 의미를 깊이깊이 생각하게 만들어줍니다. 탈렌 샤르의 와레스 해피네스 행복이란 무엇인가? 라고 하는 이 강좌는 미래의 행복을 위해 지금 뭔가를 희생하지 말고 지금 계속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이 정말 삶을 행복하게 해 준다.
라고 하는 메시지로 젊은이들의 가슴을 사로잡죠. 내일을 위해 지금 고통을 참아야지라고 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의 삶을 뒤바꾸어 놓는 명강의 중에 명강의입니다.
여러분 그런데 이 3개의 명강의 중에 재미있게도요 첫 번째 강의와 두 번째 강의는 다른 사람이 흉내를 못 냅니다. 마이클 샌드르의 와레스 저스티스 아무도 대신 못합니다. 쉐일리 케이건의 무엇이 죽음인가 아무도 대신 못 합니다. 그런데 이 타우벤 샤르의 행복이란 무엇인가? 라고 하는 이 강좌는 지금 전 세계로 나뉘어지고 있구요. 한국에만도 서울대학교를 비롯해서 행복연구소가 있습니다.
서울대학교에도 여러분 유튜브에 행복연구소 뭐 이렇게 쳐보시면 수많은 강의가 거기 담당 교수가 최인철 교수라고 하는 분이 보급하는 내용들이 나와 있습니다. 왜 이 타우베 샤르의 행복이란 무엇인가라고 하는 주제가 다른 2개의 주제와는 달리 전 세계로 보급되고 있을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너 나 할 것 없이 숨 쉬며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추구하는 궁극적인 가치가 행복이기 때문에 그런 거죠. 그래서 타우벤 샤하르 교수가 몇 년 전 한국에 왔었습니다. 예 그때 왔을 때 기자가 이 타우벤 샤하르 교수와 인터뷰한 내용을 신문에 아주 압축해서 실었습니다.
예일대학교 쉐엘리 케군 교수의 죽음 하버드 대학교 마이클 샌들 교수의 정의 그리고 타우벤 샤오르 교수의 행복이 바로 그것인데요. 1등만을 추구해 온 하버드 학생들에게 내일의 성취를 위해 오늘의 행복을 포기하지 말라고 가르치고 있는 행복학의 타우벤 샤하르 교수를 기자단이 인터뷰 했습니다. 뭐 이런 쭉 내용 중에 기자가 이렇게 묻습니다. 교수님께 행복이란 뭔가요 학문적으로 그래서 요즘 이 학문을 뭐라고 부릅니까 사이언스 오브 해피니스 행복 과학 행복학 아니다. 사이언스를 붙여서 또 사이언스 오프 해피니스 강좌 책 제목이 그렇게 돼 있습니다. 교수님께 행복이란 뭔가요? 라고 묻죠 묻자 샤르 교수가 학문적으로 행복을 정의합니다. 그간 대답은 다음과 같습니다.
행복은 즐거움과 의미에 대한 전반적 경험으로 정의할 수 있습니다. 행복은 즐거움과 의미에 대한 전반적 경험! 요 2가지 단어 아주 짧은 표현이지만 말 속에 수많은 연구와 오랜 시간의 강의가 다 압축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이 개그나 코미디를 듣고 행복하세요.
왜 코미디를 보고 혹은 개그 프로그램을 보고 웃찾사 프로그램을 보고 웃으면서 행복하다라고 말 못 하는가요? 이유는 의미를 느낄 수 없기 때문이죠. 또 때때로 어떤 종교분들 보면 종교 생활을 너무 심각하게 합니다. 진지하게 하는 걸 너무 심각하대 하게 하다보니 뭐가 없어요. 즐거움이 없어요. 저는 그런 분들 많이 봅니다. 종교 가치를 추구하다가 진지한 걸 넘어 심각해집니다. 즐거움이 얼굴에 즐거움이 없습니다. 행복은 즐거움과 의미에 대한 전반적 경험 이게 무슨 말일까? 예 그러려면 생각을 바꾸어야 합니다.
관점을 바꿔야 하지요.
탈벤 샤르 교수의 이런 접근을 시작하기 위한 가장 첫 번째 스텝은 단계는 바꾸는 겁니다. 여러분 똑같은 현상이 발생되는데요. 그 똑같은 상황을 접하는 사람들이 절대로 그 현상을 다 똑같이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누군가는 이렇게 누군가는 이렇게 누군가는 이렇게 다 다르게 받아들이죠. 내가 지금 있고 겪고 있는 경험을 다른 사람들이 다 똑같이 나처럼 똑같이 받아들이고 기뻐하거나 아파하지 않습니다. 누군가는 또 다르게 받아들이고 있죠. 여러분 이게 뭐죠 2사람이 마주 보고 있나요? 아니면 하얀 나무 잔인가요?
여러분은 뭘 보시나요? 이게 쥐인가요? 고양이인가요? 고양이로 보이시나요? 쥐로 보이시나요? 하얀 걸 보시는 분은 고향이고요. 여러분 하얀 박쥐가 날고 있나요? 까만 박쥐가 날고 있나요? 아무리 싸워보셔도 내가 보는 대로 보입니다. 세상은요, 내가 있는 대로 본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상 보는 대로 있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많은 경우예요. 여러분 까만 새가 왼쪽으로 날고 있나요? 하얀 새가 오른쪽으로 날고 있나요? 다 자기 보는 대로 날고 있습니다.
나는 지금 무엇을 보고 있느냐 하는 거지요 예 어떤 여자분이 외투를 입고 걸어가고 있나요? 큰 얼굴이 보이시나요? 예 어떤 여자분 얼굴이 보이시나요? 꽃과 나비가 보이시나요? 꽃하고 나비인가요? 아니면 큰 어떤 여자분 얼굴인가요? 그쵸. 예 다 보는 대로 보여요. 여러분 어떤 분이 말 타고 걸어가는 게 보이시나요? 아니면 큰 할아버지 얼굴이 보이시나요? 다 보이시죠. 보이는 대로 보이시는 거예요. 마찬가지입니다. 말 2마리가 보이시나요? 아니면 어떤 여자분의 얼굴이 보이시나요? 보는대로 보이시는 거예요. 마찬가지입니다. 두 사람이 기타 치고 노래 부르는 게 보이나요? 할아버지 할머니가 마주 보고 있는 게 보이시나요?
여러분 이 글자는 뭐죠 예 어떤 분은 까만 걸 보는 분은 헤이트라고 하실 거구요. 하얀 걸 보시는 분은 러브라고 하실 겁니다. 뭘 보느냐 하는 게 결국은 내가 보는 대로 보고 있다는 거지요 똑같은 장면인데 누군가는 러브를 보고 있구요. 누군가는 헤이트를 보고 있는 거지요 절대로 내가 지금 보고 있는 현 내가 지금 겪고 있는 어떤 일들을 모두가 다 나처럼 보고 있지는 않습니다. 행복하게 보도록 선택할 수 있는 거죠.
헤이트로 안보고 러브를 보겠다고 선택할 수 있는 거지요 예 제 눈에 안경이란 말이 있습니다. 맞아요. 우리 모두는 제 눈에 안경입니다. 내가 보고있는 대로 보는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 모두는 절대로 모든 걸 다 볼 수 없습니다. 절대로 우리 모두는 주관적인 판단을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제 눈에 안경이에요. 문제는 무슨 안경을 쓰느냐 하는 거죠. 예 신앙도 안경쓰는 겁니다. 신앙이 뭔가요 세상과 인생을 바라보는 나의 프레임을 바꾸는 게 신앙입니다.
복음이라고 하는 안경으로 내 인생과 저 세상을 복음이라고 하는 안경을 거쳐서 보겠다고 하는 선택 그게 신앙이에요. 어 나는 끝까지 HAT로 보겠다. 나는 LOVE로 보겠다. 그게 내 선택인 거죠. 신앙이란 세상과 인생을 바라보는 프레임의 변화입니다. 그렇게 생각을 바꾸고 관점을 바꾸면 많은 것들이 부정이 긍정으로 바뀔 수 있다는 겁니다.
그렇게 보면 어느 날 문득 자살이 뒤집어서 보면 살자로 보이는 거지요 예 우리가 겪고 있는 수많은 어려움 역경을 어느 날 뒤집어서 보면 경력이 되는 거지요 예 내 힘들다 이걸 뒤집어서 읽으면 다들 힘내로 뒤집어 치는 거죠. 바꾸어 볼 수 있다는 겁니다. 네 어떻게 바꿀까요? 여러분 이게 무슨 글자죠 지금까지 드린 말씀대로 한번 요약해 가지고 어떻게 볼까를 한번 선택해 보세요. 이게 뭘로 보이시나요? 여러분 이거는 이 글자는 이대로만 보면 13도 되고 B도 될 수 있어요. 그쵸. 이걸 어떻게 보느냐 이렇게 못 보고 물으면 아무도 확실하게 대답을 못 하세요.
그런데 요렇게 써놓고 보면 이건 분명히 B입니다. ABC예요. 그런데 반대로 이렇게 써놓고 보면 분명히 12 13 14입니다. 어떤 프레임을 선택할 것이냐에 따라 똑같은 게 전혀 다르게 해석될 수 있는 것이죠. 같은 글자지만 어떤 프레임으로 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르게 인지되는 겁니다. 전혀 다르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거죠.
그렇다면 우리의 사고와 우리의 삶의 프레임을 어떻게 바꿀까 어떻게 바꿀 수 있을까? 예 성경에 보면 이런 표현이 있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다 아는 성경절이 뭘까? 하고 제가 조금 고민했습니다. 집회 부탁을 받고 대부분의 사람들 심지어 교회를 안 다니시는 분들일지라도 아니 심지어 다른 종교를 가진 분이라 할지라도 1번쯤은 들어봤을 성경절이 뭘까? 제가 생각하다가 이 성경절을 택했습니다. 더더군다나 하늘 마을에 계신 분들은 아마 1번쯤 들어보지 않으셨을까? 생각합니다.
항상 기뻐하라 그가 뭐죠 쉬지 말고 기도하라 그다음 뭐죠 범성에 감사하라 그런데요. 이렇게 3가지로 말한 다음에 이어지는 성경절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여러분 너희를 향하신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 이렇게 표현되니까. 항상 기뻐하라는 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니까. 우리가 기뻐해야 하는 부담이 생기나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혹은 쉬지 말고 기도하라 어떻게 쉬지 말고 기도할까 눈을 감으면 사고 나는데 어떻게 쉬지 말고 기도할 수 있죠.
이 하나님 뜻인데 모든 일에 감사라 이걸 어떻게 할 수 있죠. 여러분 하나님이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 우리를 향한 다시 말해 우리에게 기대하는 하나님의 뜻이라면 우리가 그렇게 해서 하나님께서 뭘 얻으실 수 있으세요. 참 그런데 여기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라는 표현을 쉬운 성경은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다른 성경입니다. 항상 기뻐하십시오. 쉬지 말고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항상 즐거워하십시오. 쉬지 말고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뜻입니다.”(살전 5:16-18, 쉬운)
그 다음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여러분을 아까는 여러분을 뭐한 이번엔 여러분을 위한 이게 무슨 뜻일까요? 여러분 우리가 기뻐하는 게 하나님께서 우리가 기뻐하는 걸 필요하셔서 우리보고 기뻐하라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우리가 기뻐하면 그 기뻐하는 것이 우리의 좋기 때문에 우리보고 기뻐하라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기뻐하는 것이 당신이 필요해서가 아니고 우리 주님이 우리가 기뻐하는 것을 본질적으로 필요해서가 아니고 기뻐하는 것이 우리에게 기 때문에 기뻐하는 것이 우리를 위한 것이기 때문에 주님이 우리보고 기뻐하라고 말씀하신다는 거죠. 질문을 하나 드리겠습니다. 행복하면 기뻐하나요? 기뻐하면 행복해지나요?
생각해 보십시오. 부담하지 마시구요. 예 왜 우리가 항상 기뻐하는 것이 그 3가지 중에 첫 번째 항상 기뻐하는 것이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뜻일까? 기뻐하는 것이 주님을 위한 것일까? 나를 위한 것일까? 그럼 질문을 가슴에 간직하시고요. 계속 말씀을 함께 나누겠습니다. 지금 보시는 사진은 2017년에 전 세계를 울린 사진입니다. 중국에 있었던 일인데요. 두찬성 레이장시에서 아기가 태어났는데 2살인데 시한부 생명을 살게 되었습니다.
아빠는 장 리옹이라고 하는 젊은 아빠였는데 이 아빠가 딸이 태어나자마자 이 취한부 삶을 살게 된 그 사실이 너무 안타까워서 이 철 모르는 딸이 마침내는 자기 곁을 떠날 것을 생각하면서 딸이 눕게 될 무덤에 젊은 아빠가 들어가서 딸이 혼자 거기 들어가지 않는다는 사실의 추억을 만들어주려고 딸을 보시는 것처럼 팔에 안고 하루 종일 아빠가 딸하고 같이 누워있는 거예요. 이 장면이 TV에 방송되고 언론으로 소개되면서 전 세계를 울렸습니다.
저는 언제부턴가 어느 곳에 이런저런 강연 부탁을 받아서 가게 되면 에 가까운 곳에 있는 우리 모두가 다 아는 분들의 무덤을 순례합니다. 정치적 입장과 아무 상관없이 2016년 저쪽 남해 쪽에 남쪽의 강연 부탁을 받아 가게 됐을 때 봉하마을에 들러서 우리 노무현 전 대통령의 무덤과 부엉이바위 앞에서 사진을 찍었습니다. 생각을 하는 거지요 제가 30년 세월을 보내고 있는 삼육대학교 가장 가까운 산흥에 보면 영락동산이 있습니다. 영락동산 제일 위에 올라가면 한경직 목사님 한국 모든 귀션들의 사표로서 저분처럼 살면 좋겠다.
라고 존경을 한몸에 받는 이 한경직 목사님과 사모님의 무덤이 있습니다. 목사님 어느 날 저녁 목사님의 묘소를 방문하고 정말 천빈하게 사표로 살아가신 목사님의 삶을 깊이 묵상하며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늘 강의를 위해 학교를 가다 보면 저는 고속도로를 타기보다는 양평 쪽 한강을 따라서 학교를 갑니다. 도로는 별로 싫어합니다. 늘 길을 좋아하지 도로는 IC에서부터 IC 나갈 때까지 나가야만 목적인데 길은 간 자체가 목적이잖아요. 예수께서 나는 도로요 하지 않고 나는 길이요. 하셨잖아요. 예 그래서 늘 한강을 따라 이렇게 가는데 양평을 지날 때 보면 저기 값싼 공원이 있습니다.
작년 재작년 우리 모두가 다 잘하는 최진실 최진용 남매 무덤이 있습니다. 가지고 생각을 하는 거죠. 제가 제가 이렇게 어떤 강연 부탁을 받았을 때 이런 곳을 방문하는 이유는 딱 하나뿐입니다. 내가 지금 살아있다는 그 삶의 의미가 얼마나 큰지를 몸으로 체험해 보는 것이죠. 얼마 전에는 구리에서 집회를 했습니다. 우리 모두가 다 아는 제가 대학생들에게 물어보면 아무도 몰라요. 어떻게 이분을 모를 수 있냐고 물어봐도 전혀 몰라요. 예 우리 이주일 선생님 코미디의 황제 참 안타깝게두요 이분의 묘가 없어졌습니다. 묘 자체가 지금 없어요. 어디 가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 내용이 2017년 9월 14일 에 신문 기사로 언론에 다 소개됐었죠. 무릇 산 자는 죽을 줄 알되 죽은 자는 아무것도 모르며 네가 어떤 일을 하든지 내 힘을 다해서 해라 네가 들어갈 무덤 속에는 일도 계획도 지식도 지혜도 없다. 나는 하나님 믿으니까 괜찮다구요. 아뇨 성경은 사람은 숨 한 번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니 그가 세운 모든 계획이 바로 그날로 다 사라지고 만다 영원히 살아서 찬양하고 감사하고 그런 말 성경은 안 합니다. 뭐라고 말하나요? 죽으면 아무도 주를 생각할 수 없습니다. 성경이 하는 말입니다. 무덤 속에서 누가 주를 찬양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여러분 이 모든 성경 말씀들은 무얼 말하기 위한 것인지 아세요. 찬양하고 싶어 지금 해 그 말입니다. 내일의 행복을 위해 지금의 행복을 포기하지 말라는 그 말을 하고 있는 거죠. 탈벤 샤르 교수가 말하고 있는 내용을 성경이 이미 다 말하고 있는 겁니다. 또 뭐라고 말하나요? 죽은 사람은 주님을 찬양하지 못한다. 침묵의 세계로 내려간 사람은 어느 누구도 주님을 찬양하지 못한다. 이걸 다 다른 말로 대입하면요 사랑하고 싶은 것 감사하고 싶은 것 기억하고 싶은 것 표현하고 싶은 것 미루지 말고 지금 해 그만입니다. 예 여기 사자가 있구 개가 있습니다. 그림 보시죠.
여러분 그런데 백수의 왕이라고 하는 사자가 있구요. 그야말로 개입니다. 개 한국사람들이 욕할 때 가장 많이 쓰는 단어잖아요. 갠데 개는 살아있습니다. 여러분 사자지만 죽었어요. 그런데 이 죽은 사자와 산 개를 딱 비교한 하나님 말씀이 있습니다. 성경 말씀이 있습니다. 성경이 뭐라고 말하는가? 하면 이렇게 말합니다. 산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나옵니다. 무슨 뜻입니까? 무슨 권력을 가졌든 무슨 부귀를 가졌던 지금 숨 쉬고 있는 나보다 내가 지금 단지 숨 쉬고 있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모든 사람보다 이미 떠난 사람보다 내가 지금 더 낫다는 말을 성경이 말해주고 있는 거지요 어떻게 항상 기뻐할 수 있나요?
삶은 고통도 있고 아픔도 있는데, 어떻게 항상 기뻐할 수 있나요? 항상 기뻐하라는 말은 도대체 무슨 이유로 그런 가르침을 그런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을까요? 여러분 전분세락이라는 한자 사자성어가 있습니다. 어렵죠 전전 굴러간다 분 똥이란 뜻입니다. 새 세상의 락 즐거움이다. 굴러가는 똥이 세상의 즐거움이다. 이 전분쇄락이라는 어려운 사자성어를 영어로 표현하면 뭔지 아세요. 요걸 아주 쉬운 순수한 우리 한국말로 표현하면 뭔지 아세요. 한번 상상해 보세요. 전분쇄라 이 말입니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 진짜 이거 제가 한 말이 아니고 진짜입니다. 이 말의 영어 표현이 좀 전에 보셨던 레빙 도 이스베르덴 데드라이언 요 말을 그대로 옮겨놓은 겁니다.
산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낫다 돌아가신 피천득 선생님 이 서울대학교 영문학자인 피천득 선생님이 쓰신 이 순간
이 순간
피천득
이 순간 내가
별들을 쳐다본다는 것은
그 얼마나 화려한 사실인가
오래지 않아
내 귀가 흙이 된다 하더라도
이 순간 내가
제9교향곡을 듣는다는 것은
그 얼마나 찬란한 사실인가
그들이 나를 잊고
내 기억 속에서 그들이 없어진다 하더라도
이 순간 내가
친구들과 웃고 이야기 한다는 것은
그 얼마나 즐거운 사실인가
두뇌가 기능을 멈추고
내 손이 썩어가는 때가 오더라도
이 순간 내가
마음 내키는 대로 글을 쓰고 있다는 것은
허무도 어찌하지 못할 사실이다
문학자가 쓴 이 순간 살아있는 삶의 환희 이 순간 이 순간 그렇습니다. 삶에 있어서 의미가 있는 것은 다 내려놓고 여하튼 이 순간 우리들이 살아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함께 시간과 공간을 공유하면서 만나고 인사하고 같이 나누는 것도 여하튼 이 순간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교육도 사랑도 성취도 행 모두 살아 있기 때문에 누릴 수 있는 특권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지금 이 순간 살아있다는 이 사실에서부터 하나님의 뜻을 찾아야 합니다.
항상 기뻐하라는 말은 조울증 조증 환자가 되라는 뜻이 아닙니다.
여러분 언제라도 계속 웃기만 하고 있는 사람 보면 좀 겁납니다. 무서워요 장례식에 갔는데 부모님 돌아가셨는데. 어떤 분이 웃고 있어요.
그래서 이상해가지고 어 이렇게 끝난 다음에 어떻게 괜찮으시냐고 그러니까 하 우리는 뭐 부활의 약속이 있는데, 왜 옵니까 저는 그런 분 만나면요 감동받는 게 아니라 무서워요 가서 산 사람도 만났다 헤어지면 눈물 나는 게 인지상정인데 어떻게 사람이 항상 기뻐합니까? 그 조증 환자지요 그런데 성경은 우리보고 항상 기뻐하라고 말하잖아요. 그게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하잖아요. 그게 우리를 위한 거라고 말하잖아요. 어떡해요. 무엇 때문에요.
단지 지금 내가 산 어떤 인생을 살고 있다 하더라도 죽은 사자보다 살아있다는 사실이 내가 내 인생의 개 같다 할지라도 죽은 사자보다 낫다는 사실에서부터 항상 기뻐할 수 있는 것이 출발되어야 한다는 거죠.
예 그것보다 더 중요한 건 없습니다. 지금 여러분 여기서 사진 보시고요. 저를 좀 찾아주시길 바랍니다. 50년 전 저의 모습입니다. 동그라미 쳐놨는데도 못찾으면 제가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예 제 고향에서 초등학교 6학년 때 소풍 가서 찍은 사진입니다. 뒤에 있는 분들이 제일 저쪽에 서있는 분이 저희 지금 같이 같이 둔네 사는 저희 누님이시고요. 그다음에 다 친척들입니다. 사촌동생들 뭐 고모 그다음에 동생들입니다.
지금 보면 이름들이 참 재미있어요. 뭐 다 자자자 이렇게 끝나는 이름들이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요렇게 초등학교 6학년이던 요때 꼭 요때 제가 이런 걸 하나 기울여서 주웠습니다. 여러분 그 시골 아이가 개울에 가가지고 반두라고 그러는데 우리 원장님 옛날 반도라는 거 써봤어요. 물고기 잡는 거 개울에서 그쵸. 족대라고 그러죠 그래 가지고 인제 물고기 이렇게 잡는데 개울에서 물고기를 이렇게 잡다가 보니까 이런 게 하나 나왔어요. 이게 그때 사진을 제가 찾다 찾다가 이거 찾았습니다. 이런 게 이렇게 나왔는데 제가 보니까 그때 에 이케 물고기 잡다가 이걸 주워 가지고 보니까 어 이게 너무 갖고 노는 게 좋은 거예요. 뭐하고 비슷한가 하면 그 당시 초등학생들은 운동회를 했는데 운동회면 늘 곤봉 돌리기를 했습니다. 다 이렇게 곤봉 돌리기를 하고 일종의 매스 게임을 했죠. 근데 보니까 이게 곤봉하고 너무 비슷한 거예요.
제가 이걸 안구요. 제가 이걸 안고 친구들이 한 10명이 저를 따라왔습니다. 강원도에서 장작 패는 곳을 모탁이라 그럽니다. 그래서 이걸 안고 와 가지고 장작패는 이런 데다 올려놓고 그 다음에 여기 꼬리를 이 꼬리를 잘라버리면 너무 갖고 놀기 좋게 했어요. 그래서 이걸 모탁 위에다 올려놓고 도끼를 들고 저 꼬리를 치기 위해 이렇게 들고 뒤에 친구들이 다 보고 있는데, 막 내려치기 직전이었습니다. 게 들고 딱 이렇게 칠려고 그러는데 저쪽 마당 건너 부엌에서 아버지가 나오시면서 뭐하냐? 그래요. 제가 아버지 여기 강원도 말로 무쇠를 쇠꼽이라고 그럽니다. 아버지 여기 쇠꼽곤봉 있어요.
이렇게 하니까 쇠꼽곤봉 이렇게 와 보시더니, 막 기겁을 하시면서 아버지 팔을 들어 제 뺨을 이렇게 치시면서 뭐라고 그러시는가 하면 이놈의 새끼가 죽으려고 여러분 그게 박교폭탄이었습니다. 만약 그때 한 2~3초나 됐는지 모르겠어요. 제가 도끼를 들고 이렇게 다치기 직전이었는데. 뭐하냐? 하는 고 순간이 없었더라면 저는 물론이고 제 주위에 있었던 제 친구들은 아마 다 크게 잘못됐겠죠. 50년 전 이야기입니다.
한 사람이 지금 이 순간 여기 이렇게 앉아서 같이 얼굴 보며 이야기하려면 여러분이 살아오신 50년 60년 70년 세월 동안 그런 순간들이 얼마나 많이 지나갔을까를 생각해보자는 거죠.
뭐가 기적인가요? 어 저는 아이들 둘이 있습니다. 지금은 다 인제 기 다 자기 가정들을 꾸려서 다 떠났고, 이제 한 놈은 미국에 살고, 한 놈은 영국에서 살고 이렇게 지금 코로나 시대 그야말로 국제 소식을 듣고 있습니다.
저와 제 아내가 여보 우리 애들이 우리 품을 떠나기 전에 대한민국이 이게 삼면이 바다라 반이 섬이라 한 반도인데 애들 우리 품 떠나기 전에 한번 이 바닷가로 쫙 한번 여행을 가족여행을 한번 가자. 그래서 아이들을 데리고 2009년에 열흘 가족여행을 계획했습니다. 이 사진은 첫날 해넘이 채화대 저 인제 서해안으로 가서 해 지는 거기서 찍은 사진입니다. 쪽 그 호남 쪽으로 끝에 땅끝 마을에서 다시 배 타고 만끝 마을로 가서 보기를 돌아가는 고산 윤선도의 어부사시사가 나오는 그 배경인 거기 가서 찍은 사진입니다. 호남 쪽 끝이죠. 다시 배 타고 나와가지고, 한산섬 영남 쪽 예 한산섬에 가서도 다 보고 그렇게 가족여행을 하고 이제 드디어 동해안으로 올라오는 길입니다.
이건 부산의 태종대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올라오면서 이제 울진 삼척 대개에서 사진을 찍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인제 강릉으로 와가지고 서울로 오면 됩니다. 그렇게 울진을 지나 삼척을 지나 네 강릉을 향해 막 오고 있는데, 해변가에 쉽지 않은 순간 지금은 길이 굉장히 넓어졌습니다만 얼핏 지나가는 순간에 딱 지붕 위에 보이는 그 지붕의 어떤 글씨가 탁 보이는데 무슨 무슨 교회라고 하는 글자가 스쳐 지나 가면서 보였습니다. 그래서 어 순간적으로 들렀다 갈까 이렇게 하고 제가 차를 후진하고 들어가서 이렇게 조그마한 해변가로 이렇게 들어가는데 내외분이 나와 가지고 마당에 서 있다가 아주 활짝 웃으면서 저희를 맞아요. 저를 아세요.
이렇게 아이 교수님 우리 학생 학부형이에요.
제가 지금 가르치는 학생 반갑다고 그러면서 뭐 하룻밤 자고 가라고 그러는데 보시는 대로 2 아이가 이때 다 대학생이기 때문에 어른들이 반가우면 애들은 지루하죠.
자고 갈까 얼른 자고 가자 그분이 아주 내일 아침 새벽에 바닷가 나가서 어망 끌어올리고 물고기 잡는 거 다 보여 주겠다. 그러면 너무너무 하고 싶은데 자고 갈까 가자 저도 좀 섭섭하지만 할 수 없이 밤 10시 반쯤 출발했습니다.
출발한 지 한 5분쯤 가는데 아무도 오지 않는 경사진 길입니다. 저는 시속 한 30키로 정도로 가고 있었죠. 맞은편에서 이렇게 차 한 대가 내려와요. 오른쪽은 낭떠러지였습니다.
해변가 낭떠러지 저는 천천히 가고 옆에서 아내가 잠들어 있었고, 뒤에서 딸아이가 그 집 그 아들 전화해 가지고 오빠 나 오빠네 집에 갔다 와요. 하고 전화하고 있었고, 아들은 졸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운전해 가고 있는데, 저는 다 봤습니다.
맞은편 차가 브레이크를 하나도 밟지 않은 채 그대로 제 차로 돌진했습니다. 그 순간 저는 봤습니다. 이게 사고 직후에 차가 낭떠러지 끝까지 밀려간 사진입니다. 뒷문이 떨어졌구요. 119 대원이 어떻게 왔는지 저는 지금도 기억 못 합니다. 앰블런스가 2대가 왔고 저와 딸이 같이 타고 아내와 아들이 같이 타고 삼척 의료원으로 옮겨졌습니다. 저는 멀쩡합니다.
근데 어떻게 누가 연락을 했는지 왔는지 저는 지금도 모릅니다. 근데 무슨 정신이 있었는지 제가 계속 뭐라고 이야기했는가 하면 저는 서울에 있는 삼육 병원을 가야 됩니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앰블런스를 타고 그 새벽에 다시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큰 사고였습니다. 사실 여기 차 문이 뒷문이 다 떨어져 있는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다행히 보신 대로 차가 그분이 졸음운전을 하셨습니다. 아우디 차를 몰면서 연세 드신 어른 두 분이셨는데 이 어디 갔다 오시다가 조셔 가지고 하나도 밟지 않은 채 그대로 제 차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우리 가족 여행은 이렇게 끝났습니다. 4가족이 다 병원에 입원해서 한 달 동안 입원해 있었죠. 이 사고로 우리가 어떻게 됐을까요?
여러분 제가 지금까지 어디 가서 이 이야기하면서 이 이야기 끝난 다음에 박수 안 친 데는 여기가 처음입니다. 내 가족이 교통사고를 이렇게 당했는데 저 양반이 별일이 없으니까 지금 와서 이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겠어요.
여러분 참 점잖으시네요. 정말 아내 제 내자는 1달 동안 가슴이 아파가지고요. 저희 내자가 이 안에 뭐 폐랑 젊어서부터 많이 앓았기 때문에 사실은 한쪽 폐가 거의 없 없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압착이 너무 심해 가지고 숨을 잘 쉬기 힘들어 했고 제가 뒷문을 열었을 때 아들이 피를 범벅을 하고 있었습니다.
지금 차 문을 차에 불나면 큰일이지 싶어 가지고 내려서 딱 뒤를 봤는데 아주 얼굴이 시뻘렇게 피가 있어서 지금 얼마나 놀랬는지 모르는데 나중에 들으니까 머리는 피가 나는 게 다행이라고 그러더라구요. 여기를 깨져 가지고
지금도 이렇게 딸은 이상합니다. 정면을 부딪쳐 가지고 치아가 살짝 변색됐는데 무슨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신경이 안 죽었는지 결국 바뀌지 않고 치아를 그대로 유지하게 돼서 참 다행이죠.
참 감사합니다. 여러분 그런데 저는 이 사건 이후에 제 나름대로 참 깊은 걸 경험한 게 하나 있습니다. 그게 뭔가 하면 내가 아무리 늦게 가고 아무리 방어 운전이 아니라 천천히 시속 30키로로 가고 있어도 맞은 편 차가 와서 받아버리니까 뭐 순간 어떻게 할 길이 없습니다.
여러분 그렇게 큰 사고가 났는데 우리 가족이 아무 일 없이 이렇게 돼 있는 것에 대해 감사하지요. 여러분 대관령 내려가다가 차가 굴렀어요. 굴렀는데 몇 바퀴를 구르더니, 차가 어쩌다가 나뭇가지에 탁 걸리더니, 그 밑에 바위가 있는 거예요.
그 바위의 나뭇가지에 탁 걸려 가지고 차가 그 바위에 털럭 주저앉더니, 낭떠러지 안 떨어지고 차가 걸렸어요. 그 사이에 차를 기어나와 가지고 절벽에 딱 붙었는데 차가 떨어지는 거예요. 그래 가지고 기어 올라와서 살았어요. 감사해요. 안 해요. 기적이 아니에요. 여러분 차가 떨어지다가 나무에 걸려 가지고 절벽에서 걸렸다가 고사이 빠져나와 살아가지고, 목숨 부치면 감사하다고 찬양하고 뭐 동네방네 다니면서 간증하고 난리가 날 텐데 굴러 떨어지다 차는 굴러떨어지고 나는 살고나면 차 하나도 안 아까워요. 그런데 그게 더 감사해요. 그냥 내려오는 게 더 감사해요.
여러분 근데 우리는 언제 감사를 느끼나요?
뭐가 기적인가요? 차가 굴러 떨어졌는데 내가 살아나는 게 감사해요. 그냥 그냥 무사히 대관령을 내려오는 게 감사해요. 무사히 내려오는 게 더 감사한 기적이지요. 저는 그날 이후 반대편 차가 지나가 주는 게 계속 저한테는 기적이에요. 지나가면서 기적! 기적! 기적! 기적... 부딪쳤다가 사고 안 나는 게 기적이 아니고 부딪쳤는데 살아나는 게 기적이 아니고 그냥 지나가 주는 게 기적이죠.
항상 기뻐하라 항상 기뻐라 항상 기뻐라 항상 기뻐하라 내가 지금 살아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여하튼 오늘 내가 숨 쉬고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이게 나한테 좋으니까 이게 나를 회복시키니까 나를 위해서가 아니고 너희를 위하여 너희를 위한 나의 뜻이니라.
부모가 자식 보고 얼굴 좀 펴라고 할 때 그게 그 아이에게 좋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거지요 자기가 그거 보고 기분 좋자고 하는 말이 아니고,
물론 부모는 웃는 아이 보면 부모 마음도 기뻐요 하나님께서 그걸 말씀 내 뜻이라고 말씀하실 때는 그게 우리에게 좋기 때문에 그러신 거지요. 예! 죽을 뻔 하다가 살아난 것보다 여하튼 지금 내가 살아있다는 사실 하나가 얼마든지 감사할 수 있는 이유라고 하는 차원으로 다시 삶과 세상을 보기 시작하는 것, 법륜 스님이 말했잖아요.
살아있는 행복
아침에 눈을 뜨면 '오늘도 살았네'
한 번씩만 외쳐 보세요.
살았다는 느낌보다
인간에게 더 좋은 에너지를 주는 것은
없습니다.
인생에 너무 많은 의미를 두지 마세요.
항상 현재에 살아야 합니다.
현재에 가장 중요한 것은
지금 살아있다는 것 입니다.
불행한 이유들을 만들어서
움켜쥐고 있지 말고, 놓아버리고
살아있는 행복을 누리시면 좋겠습니다.
- 법륜 스님
예 크리스찬들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지금 숨 쉬고 있다는 것, 그거 하나님 은혜야 나의 하나님이시여 나의 피할 바위이요 나의 방패시여 나의 구원에 뿌리시여 그래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내가 지금 크신 응해요.
그렇게 노래합니다. 내가 지금 사는 것 주의 크신 은혜요 하나님은 사랑하시기에 살게 해 주셨고 우리가 살아 있기에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십니다.
지금 감사하고 찬양해야 합니다. 그게 나를 회복시키기 때문이죠. 물론 삶은 힘든 여정입니다. 시지프스의 신화처럼 감당할 수 없는 부담을 끊임없이 밀어 올려야 하는 부담이 힘듭니다. 그러나 행복은 즐거움과 의미에 대한 전반적 경험이라면 여기서부터 우리는 우리의 프레임을 바꾸어야 하는 거죠.
생각을 바꾸고 관점을 바꿔 부정이 긍정으로, 자살이 살자로, 역경이 경력으로 내 힘들다가 다들 힘내로 많이 들어보셨죠.
세상과 인생을 바라보는 복음의 프레임으로 그렇게 다시 바라볼 때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 항상 기뻐하십시오. 쉬지 말고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여러분을 위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행복 하면 웃을 거야. 라고 생각하지 마시구요. 웃어서 행복해져야지! 그렇게 결심하시는 저녁 되기를 바라면서 말씀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