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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치 못할 그림자(7)
16
민준은 가끔 안부 전화만 드렸던 가평 처가댁을 찾았다. 아직도 아내의 흔적이 여기저기 남아 있는 그곳은 아린 추억을 늘 품고 있는 곳이다. 지금은 저버린 정원 장미꽃 단지 안에 있는 흙으로 조형한 조소, 나부(裸婦)의 여인상은 아내가 졸업 작품으로 제작한 것이다. 그것은 마치 쇼윈도의 마네킹처럼 두 손은 허리에 뒷짐을 지고 가슴과 얼굴은 앞으로 내밀어 키스하는 모습으로 보였다. 아주 순수한 아마추어 티를 벗어나지 않은, 조금은 어색하지만 에로틱한 모습이다. 민준은 그 작품을 볼 때마다 놀려대곤 했었다.
"이서방, 어서 와요."
짧게 그를 보듬는 장모님은 더 수척해 보이고 왠지 쓸쓸해 보인다
"…… 건강은 어떠세요? 자주 찾아뵙지 못해 죄송합니다."
엉겁결에 외동딸을 잃어버리고 쓸쓸하고 까칠해 보이는 두 분의 얼굴빛이 안타깝다. 거의 두 달 만에 뵌 장인의 얼굴은 눈이 더 패인 듯 눈썹이 하얗게 보인다. 항상 단정하게 롱 스커트와 옅은 하늘색 셔츠에 카디건을 즐겨 입는 장모의 모습은 오랫동안 고등학교 교장을 지낸 고고함을 풍기는 듯 우아(優雅)였는데 색이 바랜 고동색 면바지에 후줄근 한 티에 카디건만은 여전하시다. 어딘가 허전해 보이지 만 집 안 분위기는 예전과 다름없이 차분하고 정갈하다. 오직 사랑하는 외동딸에게만 의지하던 두 분은 허전한 두려움도, 안타까운 미련도 세월에 많이 단련이 된 듯 평온한 얼굴이다.
민준은 변함없는 사랑으로 두 분을 안심시키고 믿음을 주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오래도록 가까이에서 지켜주는 신뢰를 그분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그런데 어쩌면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하는 시점에 두 분의 허락이 맨 먼저 필요했다. 재작년 초 봄부터인가 오히려 민준이 처가를 들를 때마다 그만 잊고 결혼하라는 재촉이 있었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었다.
"자네도 이젠 그 애를 그만 잊고 새 출발해야 하지 않나?"
"…… 네…… 저…"
"자네 이 원칙은 알아야 하네. 인간의 삶은 돌고 도는 순환이라는 원칙을 알아야 한단 말이네. 원인은 원인에 이끌려 가듯 만남의 인연은 끝이 없어. 시냇물이 바다로 나가 증발해 비를 내리듯 원인은 끝이 없네. 내가 내 부모에게 낳아졌듯이 우리 또한 지민이를 낳았네…… 그 사고가 없었다면 그 아이는… 자네 둘은 분명 내 손자를 낳아을 것 아닌가? 지금 사정이 이렇게 됐다고 해서 자네가 독신을 주장하는 것은 궁극적인 삶이 아닌 건 분명하다는 것이네. 이군, 자네 생각대로라면 남아나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걸 알아야 하네. 자연의 순환을, 나아가서 하느님의 뜻을 거부하는 것은 죄악이라는 걸 알아야 한단 말이네."
그동안 흐트러짐이 없이 그와 죽은 지민이 이어갈 수 있었고 그의 정신이 지탱될 수 있도록 계기가 되신 두 분이다. 쉽게 방문의 이유를 이끌어내지 못했던 그에게 오히려 모든 걸 알고 있다는 듯 그의 처지를 이해하고 먼저 다가와 주는 따뜻한 배려 같은 것이다. 민준은 두 분과 때려야 땔 수 없는 한오라기 실로 이어온 인연은, 어쩌면 바짝 마른 바위에 이끼가 끈질기게 붙어 있는 처신 같은, 운명을 서로 부여잡고 싶은 몸부림 같은 것이었다. 사랑하는 경희에게 선뜻 자기의 처지를 쉽게 이야기하지 못한 것은 지민 부모님이신 두 분에게 소심을 더한 어려움이었다. 민준은 더 이상 자기감정을 속일 수는 없었다. 어떤 사람을 만나고 있고 그녀를 좋아하고 결혼하고 싶다는 그의 생각을 솔직히 얘기했다. 경희를 우연히 다시 만나고 그녀에게서 사랑을 느끼고 있다고 되도록 소상히 얘기했다. 민준이 얘기하는 내내 조용히 듣고 있던 두 분의 얼굴에 뭔가 모를 아쉬움과 한 편 절망 같은 어두움이 그려지는 걸 민준은 놓치지 않았다. 죄스럽고 몸 둘 바 몰랐지만 홀로 애타하며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다.
"듣던 중 반가운 얘기네, 자네 집안이나 우리 모두에게 기쁜 소식이구먼 잘했네… 잘했어."
"죄송합니다. 지민에게 미안하고…… "
"솔직히 많이 아쉬워요. 하지만 이서방을 생각하면 더 미룰 수 없는 아주 좋은 소식이야, 우리 지민이도 그걸 바랬을 거예요."
조금은 충격인 듯 민준의 말을 잘라버리고 오히려 그에게 위안을 주지만 장모님의 얼굴엔 쓸쓸함이 가득했다.
허전함과 안타까운 현실에 얽매인 한 힘없는 이가 실오라기라도 잡고 싶은 나약함 같은 것이다. 흔히 있을 수 있고 극히 인간적인 속내다. 속된 삶에서 자신에게 조금이나마 반항하고 싶은 그런 모습이었다. 그는 너무나 미안해했고 두 분에게 마땅한 표현이나 말이 떠오르지 않아 차라리 침묵을 지키는 게 옳다고 생각했다.
17
경희는 사랑하는 사람과 여행은 처음이다. 새해 1 월 말 설날 즈음 j 시 민준 고향 집 인사차 간 것 외에는 본격적 둘만의 호젓한 여행은 처음이다. 그것도 부모형제도 아닌 민준과 강원도 사흘 여정의 여행은 작년 초까지 꿈도 꿔보지 못한 나들이다. 예전에 가족들과 여행은 해봤지만 사랑하는 그와 단둘의 여행은 두 사람의 존재 의미를 찾는다는 것에서 행복을 느끼며 서로 마음에 깊게 새겨 저 깃들 것이라 생각했다. 경희는 그의 마음속까지의 따뜻한 체온을 느끼기 위해 운전대를 잡고 있는 그의 손에 자기 손을 포개어 애무하듯 만지작거리며 점심은 어디서 먹을 거냐 묻는다.
"평창 소고기를 간만에 먹고 싶은데 자긴 괜찮아?"
"거기라면 나두 잘 알고 있는데 용평 한우 마을 가요. 우리, 작년 여름에 가족이랑 갔었는데 아주 맛있었어요. 트리뿔 등심인데 정말 좋아요."
"그래요. 맛있었나 본데, 윤 교수 화장실 이용은 편해?"
경희는 그와 함께할 때 순간순간 놀라는 일이 많았지만 그의 배려는 그의 본연 무의식 속에 있는 이타적 행동이라 생각했다. 저 밑 어디엔가 있는 그녀를 존중하는 선함은, 세심한 배려는 항상 따뜻했다 그러면서 그의 소소한 매력에 빠져 그 속에 용해되는 자기를 발견하곤 한다. 경희는 이렇게 사랑하는 사람과 이런 아름다운 세상에 마냥 행복한 너그러움에 빠져도 되나 생각한다. 그녀는 사는 기쁨은 누군가와 더불어 아무 조건 없이 걸어가는 것이라 결론지으며 같이하는 가치가 자양분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네, 괜찮아요. 잘 되어 있어요."
두 사람은 식사를 끝내고 식당을 나와 커피를 들고 야외 6인 나무 탁자가 있는 쪽으로 가 민준은 탁자에 앉았다. 햇살이 나뭇가지 틈 사이로 밝게 빛나 맑고 시원한(?) 경치가 멀리 산으로부터 죽 펼쳐진다. 북 쪽으론 아직도 녹지 않은 희끗한 눈이 보이고 산비탈 능선 바닥이 나뭇가지 사이로 고독스럽게 감춰진 이곳의 오래된 역사를 아는 듯 을씨년스럽다. 주 초라 관광객이 띄엄띄엄하고 식당 길 주변에 나뭇잎이 다 떨어져 앙상하고 빛바랜 몇 잎만 달려 산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좁은 계곡 사이 실 개천 물 길에 졸졸거리는 소리와 매혹적인 고요가 주변을 깨워 경희에게 편안한 감상을 준다. 경희는 휠체어 주머니 속에서 볼 펜과 메모지를 꺼내 열심히 뭔가를 적고 있다. 한참을 써 내려간 뒤 다시 휠체어 주머니에 넣고 또 뭔가를 꺼낸다. 살며시 웃음 지으며 민준을 올려다본다.
"여기 계곡은 참 좋은 곳 같아요. 때론 오래 있으면 고독도 느낄 수 있지만 그걸 이겨 낼 수 있는 유유자적이 있지 않아요?"
"하하, 윤 교수. 여기 이 고즈넉함을 느끼는 감성은 아직 젊다는 것 아냐? 그건 행복인데! 그러니 항상 누군가에게 감사를 느끼며 살아요. 알간."
농으로 하는 말이 경희의 뭔가 부족을 느끼게 하는 말일 수 있다. 자기도 모르게 한 말이지만 주체가 확실한 의지의 독립군인 그녀에게 혹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았나 하는 우려에 경희가 대꾸하기 전에 말한다.
"미안해요. 말이……"
"차암, 선생님두…… 참! 이것."
하며 적당히 두꺼운 책자를 그에게 내민다. 아침에 나올 때부터 휠체어 뒷주머니에 가지고 다니던 것을 민준에게 건넨다.
"이게 뭔데?"
"으응 다음 주 금요일부터 계획된 그룹전 프로필이에요. 프로필이 엊그제 나와 많이 늦었어요. 축하해 주실 거죠."
"대단해, 난 아무것도 하는 게 없는데……"
"아니에요. 선생님의 진면목은 고통 속에서 잉태되기 때문에 아마 많은 소재들을 맘속에 저축해 놨을 거예요. 그게 빨리 세상에 나왔으면 좋겠어요. 되도록 빨리!"
"……"
'그래, 나도 빨리 다시 시작하려고 하는데…… 되도록 빨리 다시 시작할 거야.'
민준은 하고 싶은 말을 입 밖에 내놓지 못하고 속으로 스스로에게 다짐한다.
그들은 숙소인 정동진 S 호텔에 도착해 일출 오션 뷰가 좋다는 신관 14 층 룸을 확인 후 옆 건물 전망대로 올라갔다. 스카이라운지 유리 창이 미래를 열어가는 희망의 여명(黎明)인 양 오후 한낮 사방 밝은 빛이 가득하다. 360도 회전 카페인 라운지는 커피의 진한 스모키 한 향 내음이 가득했다. 창 너머로 멀리 오션 뷰가 하늘과 맞닿아 죽 나열되고 까만 점인 배들이 드문드문 떠 있다. 겨울인데도 조용한 바다 잔물결이 훈훈한 그리움으로 다가오듯 사랑하는 둘을 위해 친절하게 너울댄다. 일정한 파도의 횡적 움직임이 그들 행복을 노래하듯 어떤 가치를 느끼게 한다. 어정쩡한 시간대라 카페 손님은 별로 없고 어느 때나 수동적인 움직임만 보였던 카페 직원들도 한가하게 앉아 있거나 잡담을 하는 듯했다.
"선생님 우리 저기 앉아요."
경희는 창가 쪽을 가리키며 카페 직원이 오는 쪽을 바라본다. 민준은 휠체어를 가볍게 밀어 경희가 원하는 곳에 갔을 때 직원도 도착해 의자 하나를 다른 테이블 옮겨 공간을 만들어 준다.
"두 분 무얼로 드릴까요?"
조금은 무념하듯 짧고 소원하게 느껴지는 질문이다.
"어… 난 라테, 선생님은 아메리카노?"
민준의 얼굴을 바라보며 동의를 구한다. 민준이 끄덕이자 다시 고개를 돌려 이번엔 직원을 쳐다보며 끄덕이며 말한다.
"아메리카노는 조금 연하게 타주시고 크루아상 두 개만 주실래요."
순간 민준은 경희가 눈치채지 않을 만큼 놀랐다. 아침에 서울에서 출발할 때 경희가 준비한 커피는 진한 맛이었는데 지금 연하게 주문하는 것은 예전에 민준이 꾸준히 지키던 커피 음용 버릇을, 그러니까 두 잔 째부터는 엷게 마시는 것을 기억하며 말한 것이다. 그로서는 잔잔하게 스며오는 감동이었다. 민준은 경희를 지긋이 바라본다. 이젠 무슨 일이 든 서로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어 창밖의 맑은 햇살을 보는 것 같았다.
"근데, 왜 뚫어지게 보세요. 제 얼굴에 뭐라도?"
지금 약간 계면 쩍 듯한 경희의 마음과 조금 전 커피 주문할 때를 생각을 한 민준은 그녀의 마음을 조금은 헤아려 주고 싶었다. 그저 듣기 좋은 소리가 아닌 솔직한 지금의 심정이고 마음이었다.
"윤 교수, 당신이 아주 많이 많이 예쁘고, 귀엽고, 착하고, 등등……"
사랑하는 사람이 그런 칭찬을 하니 괴란쩍게 수줍어 어쩔 줄 모른다. 이어 깔깔대며 순간을 모면하며 어떤 암울에서 벗어난 듯 탄성을 예쁘게 외친다.
"와~우"
그때 그걸 본 직원이 빵과 커피를 가지고 와 각자의 앞에 놓고 의미심장한 듯 엷게 웃는다.
'혹시 뜨거울 수 있으니 조심하세요.' 하며 돌아간다.
"전 지금 너무 행복해요 선생님."
"환한 웃음이 참 예쁘네, 그래, 계속 행복하세요. 나두 행복합니다."
민준은 경희와 새롭게 시작하는 그들의 미래에 대해 존중과 성의를 다 하려고 다짐했다. 누군가에게 한 번 더 생각하는 것은 오래전 그의 잘 나가던 삶에 주체할 수 없는 어둡고 그늘진 절망의 그림자가 덮친 후부터였다. 그가 새롭게 가진 버릇은 사뭇 그의 의무인 듯 확실했다. 이제는 더 이상의 자기 무성의로 인한 고통을 타인은 물론 자신에게도 주거나 가져서는 안 된다는 것 때문이다. 자신보다 상대를 먼저 생각해 편하게 해주는 마음도 있었고 '이게 잘못이구나' 느꼈을 땐 그걸 솔직히 인정하는 있는 그대로의 솔직함도 있었다. 모든 이와 특히, 경희와의 일상에서 어울림은 그가 감당할 수만 있으면 가벼운 실랑이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그때그때의 환경에 편하게 맞추려 했다. 어떤 어려움이 있을 때나 얽힌 여러 문제에 그는 그걸 감내하며 이겨낼 수 있도록 평범한 생활인이 되려 노력했다.
18
어느덧 해가 바다 반대편에 있는 듯 늦은 오후의 정경은 바다의 수평선에서 희덕이는 물결이 수채화 톤의 맑은 감성보다는 온통 파스텔화 같은 연 파랑의 바다 색조가 쉼 없이 일렁인다. 멀리 옅은 해무가 낀 겨울 바다 날씨는 차분하다. 어렴풋이 멀리 눈에 잘 보이지 않는 수평선을 안개가 감싼 것은 그 안에 있는 신비를 아직 드러내 보이고 싶지 않은 순수 같다. 가까이 순한 물결이 오늘의 마지막 반짝임을 연출한다. 그들 마음의 평화가 이루 말할 수 없는 고요로 한밤 어둠에 달빛이 비치 듯 두 사람 사랑을 구김 없이 빛낸다. 민준은 의자를 옮겨 나란히 앉아 경희의 어깨를 감싸 회전목마를 탄 듯 유리창이 아주 느리게 하나하나 밖의 풍경을 지나는 걸 보고 있다. 민준은 정동진역이 바다와 맞닿아 이어질 때 두 개의 상관적 개념이 부담이 되는 걸 느꼈다. 그리고 어떤 공허와 함께 불현듯 아내 지민을 생각했다. 경희 어깨에 얹었던 손을 풀고 자신에게 반항이라도 해야 할 듯 사뭇 진지한 모습이다. 갑자기 느껴지는 그의 또 다른 얼굴에 경희도 뭔지 모를 예감에 풀었던 민준 손을 다시 잡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제 예감이 틀리지 않았다면 돌아가신 그분이 생각…… "
"……… "
"선생님…. 그분을 그리워하고 눈물을 흘리는 건 당연한 것 아니에요? 그런 선생님을 다시 만나고 사랑하는 건 그분이 축복을 제게 주었기 때문이라 전 생각해요. "
그녀 말은 상황과 자연스러운 어울림이었다. 참 자아를 알게 하는 저 밑 어디엔가 있었던 인간 본연의 기독교적 선함이다. 착한 사람들 의식 속에 있는 자기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는 이타적 말이다. 민준은 아무 말없이 그녀를 꼭 안았다. 그는 오래전 옛날이 불행일지라도 그때 그 사고가 슬플지라도 어느 순간에는 멈춰야 하는지를 알고 있다. 그녀 꿈을 망가트리고 싶지 않았다.
"미안해요. 당신과 나 이젠 어떤 어려움이 오든 언제나 함께할 겁니다. 사랑합니다."
"지금 전 꿈속에 있는 것 같아요. 5 월 우리의 결혼을 앞둔 게 아직 실감이 안 나요."
그들은 호텔 방으로 돌아와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뒤 이제 막 가시는 바다가 보이는 창가에 민준은 경희를 안아 무릎 위에 앉히고 두 팔로 감싸 목소리를 톤을 정중하게 넣어 장난스레 조금은 진지하다.
"사람은 사랑을 위해 태어났다 볼 수 있고 사랑을 위해 살다가 사랑을 안고 죽어간다는 말이 있는데 지금 그댈 안은 난 지금 죽는다 해도 아무 후회도 미련도 없습니다. 핫 하하하… "
"선생님! 죽는다는 건 사랑의 완성이 절대 아닙니다. 전 18 세기 적 허무한 사랑은 하기 싫습니다. 그댈 영원히 제 곁에 있게 하고 싶으니까요. 호호"
두 사람의 대화는 농담 같기도 또 진지하기도 했다. 강냉이를 불 판에 넣고 튀기 듯 조금 과장됐지만 당당한 말이다. 말속에 그들만 아는 상상의 뜻이 숨어 있다. 이렇듯 그들은 서로 사랑하는 방법을 알아내고 익혀 간다. 다시 만난 지 얼마 안 됐지만 어떤 어려움이 까다롭게 굴거나 어렵게 한들 서로의 익숙함으로 그걸 이겨내고 있다.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당신의 깊은 배려, 당신과 그런 사랑을 하는 난 정말 행복한 사람입니다."
민준은 경희를 자기 쪽으로 돌려 긴 키스를 했다. 경희는 행복한 짜릿함을 주체 못 하고 그의 가슴에 손바닥을 대 좀 더 교감하고 싶어 쓸어 담 듯 애무한다. 민준은 뭔가 생각난 듯 그의 품에 안긴 경희 얼굴을 바라보며 부드럽지만 일부러 퉁명스럽다.
"난 당신에게 투정도 부리고 싶고 불평도 막 말하고 때론 당신과 싸우고도 싶을 땐 난 큰 소리도 막 낼 거야 알간."
그의 생각은 어떤 편견에서 벗어나 장애를 가지지 않은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불편하지만 아무렇지 않은 평범한 일상을 갖자 하는 의돈데 경희가 자기 마음을 알아줄지는 그녀의 마음에 달려 있다 생각했다. 똑똑한 경희는 그의 의도를 그의 표정에서 읽었다. 주저 없이 말하는 그녀 역시 부드러운 단호가 섞인 말을 조용하게 농을 섞어 말한다.
"전 장황하고 지루한 잔소리꾼인데 제 잔소리를 강 건너 불구경하듯 하면 정말 안됩니다. 알간. 호호호"
둘은 때론 소리 내어 웃기도 하고 사랑에 빠져 서로에게 충실했다. 호텔 방에 호젓하게 둘만이 있는 공간이 어색한 경희는 저녁 식사는 언제 할 거냐 묻는다. 그러나 민준은 우발적이라 보이기엔 좀 그런, 묘한 뉘앙스를 풍긴다.
"점심 잘 먹어서 난 저녁 생각 없는데 그냥 눕고 싶은데, 배고파요?"
"아니요. 저도 괜찮지만, 선생님이… "
"탁자에 바나나와 냉장고에 과일, 음료가 있던데 그걸로 때우면 안 될까?"
그리고 그는 아무 일도 아닌 듯 그녀에게 다가가 번쩍 안아 침대에 조심스럽게 누인다. 경희는 부끄러운 듯 옆으로 돌아누어 말이 없다. 그도 경희 옆에 누어 한동안 아무 의미 없이 벽 쪽 모조 그림 모네의 '해돋이'를 생각 없이 바라보다 경희 쪽으로 돌아누어 그녀의 어깨를 돌려 한쪽 팔로 어깨를 부드럽게 껴안아 꼼짝 못 하게 한다. 순간 경희는 그의 품에 안겨 자신의 팔로 그의 허리를 감싸 민준 얼굴을 올려다보며 수줍게 웃는다. 경희는 그의 행동이 얼핏 어떤 정해진 모습이라 생각했다.
그들의 첫 동침은 1 월 j 시 민준 본가에 인사차 갔을 때였지만 그때는 민준 집 안채와 가깝게 떨어진 화단 건너 독립 채인 사랑채였기 때문에 모든 게 조심스러웠다. 그러나 지금은 호젓하고 가슴 뭉클한 분위기에 그 둘은 사랑을 확신했고 서로 원하고 있다. 민준은 그녀를 조심스레 안았다. 예전에 운동을 해서 그런지 가냘프게 감춰진 산뜻한 허리 곡선과 그리 풍만하지 않은 가슴, 어딘가 애수에 차 있는 듯 사랑스러운 모습이다. 그들 사랑은 지금 그들이 원하는 곳인 꿈속의 낙원에 있다. 허울의 과정을 물 말아 버리고 허상(虛想)을 잠재우는 단 하나의 사랑으로 그들 행위는 지금 행복에 서려 훈훈하다. 신기루의 마법에 취한 듯 서로에게 열중했다. 휘황찬란한 붉은 노을에 갈무리의 낙원을 보듯 확실한 사랑에 젖어 그 순간 만은 극히 인간적인, 열정적 행위에 충실했다.